그러나 이 작전의 성공은 얼마 가지 못했고 스바이 리엥(Svay Rieng) 전역은 남베트남 군의 마지막 대규모 공세가 됐다. 1974년은 남베트남 정부에 있어 치명적인 해가 되고 말았다. 티우의 “전 지역 절대 사수” 전략은 다른 두개의 요인과 결합해 남베트남의 운명을 결정짓고 만 것이다. 두 개의 요인은 미국의 원조 감소와 이에 따른 남베트남군의 사기 저하였다. 이 두개 요소는 결국 사이공 함락을 가져오고 주권국가로서의 남베트남을 붕괴시키고 말았다. 남베트남은 1975년에 붕괴했지만 사실 운명의 주사위는 이때 던져졌고 붕괴는 이미 시작된 것이었다.
미군의 철수는 남베트남군의 증강에도 불구하고 베트남 인들으로서는 결코 채울 수 없는 공백을 만들었다. 1969년 베트남에는 미군과 남베트남군을 합쳐 22개 사단이 있었지만 1974년에는 남베트남군 13개 사단 뿐이었다. 반면 남베트남에 침투한 북베트남군은 1969년 352개 대대였으나 1974년 초에는 646개 대대로 증강됐다. 즉 양군의 전력 비율은 북쪽에 유리하게 기울었으며 그것도 계속해서 격차가 벌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미군의 철수로 항공지원이 격감한 것이었는데 남베트남으로서는 이것을 어찌 할 도리가 없었다. 항상 미국의 공군력에 의존해 왔기 때문에 이것이 없어지자 그 결과는 치명적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닉슨의 베트남화 정책은 남베트남군에게 미국식으로, 즉 공중기동, 강력한 항공화력지원, 막대한 보급지원하에서 싸우는데 익숙하게 만들어 버렸다. 이제 남베트남군은 항공지원, 탄약, 장비, 보급품 부족에 시달리면서 과거에 배운 방식대로 싸워야 했다. 이미 북베트남과의 전쟁은 결정적인 단계에 접어들었기 때문에 남베트남군대는 미국의 원조가 격감한 상황에 맞춰 전력 구조와 작전 개념을 개편할 여유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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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이 되자 우물도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미국의 군사원조는 1972-73년 회계연도에 22억 달러였으나 1973-74년 회계연도에는 그 절반도 안되는 9억6400만 달러로 격감했다. 1974년 초 사이공 DAO(Defense Attache Office)의 머레이 소장은 마틴 주월대사에게 장차 닥칠 붕괴를 모면하기 위해서 티우와 남베트남군 장군들에게 제한된 원조에 맞춰 전쟁을 수행하는 것을 권고하도록 말했다. 마틴 대사는 머레이 소장에게 이것이 정치적으로 너무 민감한 사안이기 때문에 절대로 이 문제가 밖으로 새 나가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언뜻 보기에는 남베트남 정부는 전쟁을 수행하기에 충분한 원조를 받은 것 처럼 보였다. 남베트남 정부는 ENHANCE와 ENHANCE PLUS 계획에 따라 7억5300만 달러에 상당하는 항공기, 헬리콥터, 전차, 야포, 그리고 기타 장비를 원조 받았다. 그러나 많은 장비들은 남베트남군의 요구에 미달하거나 또는 남베트남측이 유지할 능력이 없었다. 결과적으로 미국측도 인정했듯 많은 장비가 “방치된 채로 고철이 되어가고” 있었다. 더욱 불행하게도 남베트남 측은 미국이 막대한 장비를 원조해 줬기 때문에 여기 필요한 예비부품과 연료, 탄약을 계속해서 원조해 줄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비록 군 수뇌부는 원조 감소 때문에 물자 절약을 시도했지만 일선 지휘관들은 계속해서 미국으로부터 배운 방식대로 싸우고 있었다. 남베트남군 지휘관들은 화력 및 항공지원으로 대표되는 기존의 기본 전술과 작전 개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지침이 전혀 먹히지 않았다. 남베트남군 지휘관들은 탄약과 연료가 확보대는 대로 모조리 소모해 버렸다. 1974년 초가 되자 물자는 고갈되고 보급 체계는 회복 불능으로 붕괴됐다. 남베트남은 기존에 미국의 우산 밑에서 누리던 모든 것이 부족했다. 그 결과 베트남군의 전투력은 급감했고 사기도 함께 저하됐다. 1974년 중순, 포병 탄약이 크게 부족해 지자 주요 작전이 장애에 부딛히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중부 고원지대의 포병 포대들은 미군이 주둔할 때는 하루 평균 100발의 탄약을 소모했으나 1974년에는 하루 평균 4발로 줄어들었다. 1974년 여름이 되자 남베트남군 보병은 한달에 불과 85발의 소총탄을 지급받는 실정이 됐다. 수류탄과 기타 공용화기 탄약의 지급도 줄어들었다. 무전기의 배터리도 부족했기 때문에 통신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연료의 부족은 전투력과 기동력을 저하시켰다. 연료의 부족으로 남베트남군은 보유한 차량과 장비의 55%만 운용할 수 있었고 또 운용하는 것 자체도 작전단위에서 제한 되었다. 남베트남군의 트럭 중 50%가 연료 및 부품 부족으로 보관상태에 있었다. 당시 남베트남 제 1군단의 한 장군은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연료가 부족해 구급차의 운용도 지장을 받고 있다. 부상병을 수송하기 위해서 2½톤 트럭 한대로 구급차 네 대를 견인해야 했다.”
남베트남 해군은 연료가 부족해 메콩강 삼각주에서 작전하는 부대의 절반을 해체해야 했다. 남베트남 공군은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 연료와 예비부품 부족으로 헬리콥터 및 수송기의 가동률은 50~70%까지 줄어들었다.
1974년 중순, 남베트남군 제 3군단장 팜 꾸옥 투안(Pham Quoc Thuan) 장군은 물자 부족이 미친 영향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1973년 4/4분기에… 연료 및 탄약 보급은 3/4 분기의 30% 수준, 1972년 4/4분기의 60% 수준에 불과했다. 1974년 1/4분기가 되자 보급은 30% 더 줄어들었고 2/4분기에는 20%가 더 줄어들었다… 1973년 초 3군단은 하루 평균 전술항공지원에 200소티를 할당받았으나 1973년 말이 되자 80소티로 줄어들었고 1974년 전반기에는 30소티에서 최대 60소티 정도가 됐다. 항공지원의 감소는 항공기가 부족해서 그랬던 것이 아니라 연료, 폭탄, 탄약이 줄어들었기 때문이었다.”
남베트남군은 확보하고 있는 전 지역을 사수하기 위해 최대의 화력을 사용했기 때문에 사태는 더욱 더 악화일로를 걸었다.
James H. Willbanks, abandoning Vietnam : How America left and South Vietnam Lost its War, p.201-203
한국의 사정은 남베트남 보다는 많이 나아 보이지만 이번 전작권 환수 문제에서 드러났듯 꽃신이 없으면 못할 일이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전시작전권을 서둘러 돌려 받아야 할 타당한 이유가 무었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물론 전시작전권은 우리의 권리이니 돌려받는 것이 원칙적으로는 옳다는데는 이견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게 지금 당장 시급한 사안인지는 의문이군요.
제가 읽었던 약간 이상한-무단복제의 의심이 가는- 책에서는 100발을 쏘던 포대가 3발 밖에 운운... 하던게 저 이야기 였군요.
답글삭제잘 읽었습니다.
답글삭제지금 신 이라크군도 병참 및 화력지원은 거의 전적으로 미군에게 의존하고 있는데 이쪽은 100% 이패턴으로 가버릴 것 같습니다.
에디오피아 공군은 러시아출신 교관에게 2~3년 정도 훈련받고 SU-27을 그럭저럭 잘 굴리게 되었고 이번엔 해외침공에도 나섰습니다만[..] 한국군은 어떨까요? -_-
답글삭제(물론 전력상으로야 앞서겠지만, 50년이 넘게 기존구조에서 이탈할 시도조차 해보지 않은 쪽이 훨씬 더 불안해 보입니다.)
... 제가 전작권 환수에 찬성하는 게 사실 저 문제 때문이라면 이해하기 어려우실지도 모르겠습니다. -_-;;;
답글삭제행인님 // 아마 비슷한 이야기가 꽤 많을 것 같습니다. 남 베트남이 망한 다음에 국내에서도 연구를 많이 했으니까요.
답글삭제sonnet님 // 이라크야 최고의 대량살상 병기인 AK와 RPG가 있지 않습니까!
라피에사쥬님 // 네. 확실히 연합사 체제가 장기적으로 지속되다 보니 이게 마치 하나의 시스템 처럼 돼서 정착된 것 같습니다. 주객 전도라고 해도 되지 않을 까 싶습니다.
윤민혁님 // 혹시 연합사 체제가 지속되는한 한국측이 먼저 대미 의존 구조를 탈피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을 것으로 보시는 것이 아니신가요?
잘 모르겠지만 이런 문제점도 있지 않을까 짐작을 해 봅니다.
... 정답은 아닙니다만, 과정의 일부는 말씀하신 대롭니다. 어린양님이 제시하신 답은 이미 라피에사쥬님 말씀에 있기도 하군요.
답글삭제굳이 얘기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저 자신한테 짜증나서요. 이런 생각 할 동안에 그 상상력으로 소설이나 써서 팔아먹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orz