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8월 30일 목요일

이탈리아 공군의 지브롤터 폭격

2차대전 당시 이탈리아군의 주 전장은 “당연히” 지중해 지역이었습니다. 지중해 전역에서 치열한 공중전이 펼쳐진 곳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지역은 “몰타” 입니다. 몰타는 1943년까지 지중해 지역에서 이탈리아와 독일공군의 주요 공격 목표였지요. 그런데 몰타의 유명세에 가려 잘 알려지지 않은 이탈리아 공군의 공격 목표가 하나 있었으니 바로 지중해의 영국해군 거점 중 하나인 “지브롤터”였습니다.

이탈리아 공군은 1940년부터 1943년까지 지브롤터에 대해 15회의 폭격을 실시했습니다. 그런데 한 두 차례도 아니고 무려 15회에 걸쳐 꾸준한 공격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지브롤터 같은 중요한 전략 목표에 대한 공격이 잘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래의 내용을 보시죠.

지브롤터에 대한 이탈리아 공군의 공격(1940~1943년)

1940년 7월 17/18일 : SM.82 3대 출격 : 민간인 3명 포함 4명 사망
1940년 7월 25/26일 : SM.82 3대 출격 : SM.82 1대 파손(대공포)
1940년 8월 20/21일 : SM.82 2대 출격 : SM.82 1대 격추(대공포)
1941년 6월 6일 : SM.82 2대 출격 : 1대는 이륙 후 다시 귀환, 1대는 지브롤터를 찾지 못하고 돌아옴
1941년 6월 13일 : SM.82 1대 출격 : 스페인의 La Linea 폭격, 스페인 민간인 4명 사망
1941년 7월 11일 : SM.82 1대 출격
1941년 7월 13일 : SM.82 1대 출격
1941년 7월 14일 : SM.82 1대 출격
1942년 4월 1일 : SM.82 3대 출격
1942년 6월 28/29일 : P.108B 5대 출격 : 4대가 지브롤터 도착, 3대는 연료 부족으로 스페인에 불시착
1942년 7월 3일 : P.108B 1대 출격 : 중간에 추락
1942년 9월 24일 : P.108B 2대 출격 : 아무 전과 없음
1942년 10월 20일 : P.108B 4대 출격 : P.108B 1대 비상착륙 중 대파
1942년 10월 21일 : P.108B 3대 출격 : P.108B 1대 비상착륙 중 대파
1943년 6월 19일 : SM.79 9대 출격 : SM.79 5대 엔진고장으로 귀환

Hans Werner Neulen, Am Himmel Europas : Luftstreitkräfte an deutscher Seiter 1939~1945, Universitas Verlag, 1998, s.31

최대 출격 기수는 9대이고 전과는 민간인 7명(이 중 4명은 중립국 민간인)을 포함해 8명 사망에 불과합니다. 손실은 완전손실 2기, 대파 3기로 전과에 비해 큰 손실을 입었습니다. 이탈리아인들에겐 미안하지만 관심을 가져달라 하기가 난감한 수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즉 후대에 알려지는 것 자체가 민망한 일이었습니다.

2007년 8월 29일 수요일

나는 통일 정치쇼의 들러리였다 - 권오홍

가끔가다가 한심한 제목을 달았지만 내용은 상당히 재미있는 책이 있습니다. 「나는 통일정치쇼의 들러리였다」역시 제목은 매우 한심하지만 내용은 정반대인 책입니다. 출판사도 동아일보사이기 때문에 보수 언론을 혐오하시는 분들은 편견을 가지실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만. 제목과 출판사만 보고 읽지 않기에는 아까운 책 입니다.

(약력만 가지고 판단하면) 책의 저자인 권오홍씨는 대북사업에 초창기부터 관여한 이 분야의 전문가입니다. 현장 전문가의 눈으로 현 정부의 대북정책을 비판한 것이기 때문에 이 책은 상당한 가치가 있습니다. 저자는 참여정부의 대북정책, 특히 지난 2006년의 핵위기부터 이해찬 총리의 방북에 이르기까지 막후에서 있었던 북한과의 협상과정을 회고하면서 그 과정에서 있었던 양측(주로 한국정부)의 과오에 대해 지적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책 초반에 나오는 이종석 통일부장관이 물러난 사정에 대한 설명입니다. 저자는 북한측의 평가를 빌어 이종석 장관을 이렇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평양에서 이종석이란 한 인물을 두고 나온 평가는 여러 갈래다. 결론은 “그는 학자(아마추어)다”라는 말이다. 그쪽 식으로 볼 때는 “꾼”이 아닌 사람이 처리하기에는 남북한 양자의 관계가 그리 가볍지 않다는 인식이 있다. 그는 서울에서 노 대통령의 신임을 바탕으로 이 분야에서 거의 무소불위의 권능을 보였다. 그러나 고장난명(孤掌難鳴)이었다.(39쪽)

이종석 전통일부장관이 현실감각이 다소 부족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은 그 동안 간간히 나오던 이야기들을 접하면서 품고 있었는데 이렇게 직설적으로 지적하는 사람도 있는 것을 보니 내부적으로는 상당히 심각한 문제였던 모양입니다.

이 밖에도 저자는 안희정으로 대표되는 대통령 심복들의 능력 부족과 무지함에 대해서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현 정부의 실세들이 자신의 능력 부족을 깨닫지도 못하면서 의욕 과잉으로 일만 벌이는 통에 대북정책이 엉망으로 표류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특히 이화영의원(현 민주신당)에 대한 비난은 굉장히 신랄합니다.

결국 안희정이나 이화영, 이호철을 통해서 본 그들의 세계관, 시대관, 한반도관, 나아가 처세하는 방식은 과거의 정치인보다 더 몹쓸 여지가 많다는 게 개인적 결론이다. 그들의 아마추어리즘이 지난 몇 년 동안 국가 정책의 저변에 흐른 게 아니었나 싶어 마음 한 편이 씁슬하다.(279쪽)

이 책에서는 정치 흥행을 목표로 한 기존의 대북정책은 남북관계 개선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며 냉철하게 계산된 경제중심의 협력만이 남북관계를 개선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개인의 회고록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주관적인 면이 강하긴 하지만 흥미로운 내용이 매우 많아 충분히 읽을 만 한 책 입니다. 물론 노빠 같은 부류들은 동아일보사에서 나왔다는 사실 하나 만으로도 이 책을 불신할게 뻔하긴 합니다만.

저자는 앞으로 김대중 정부 시기의 대북정책을 비판하는 책을 낼 계획이라고 하는데 이것 또한 상당히 기대가 되는 책 입니다.

2007년 8월 28일 화요일

최지룡 만화 실사 버전 주인공

오마이뉴스에 들어가니 아주 재미있는 기사와 사진이 있었습니다.

이순신을 놀라게 한 '주한미군 철수' 기습시위


이 친구를 보니 최지룡 만화에 자주 등장하는 친구가 생각납니다.

바로 이 친구...


비슷하다는 느낌이 드는건 이 어린양 혼자만이었을까요?

오마이뉴스 기사에 달린 동영상을 보니 참 쌀이 아까운 찌질이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런 정박아들이야 말로 명랑사회의 적입니다.

2007년 8월 26일 일요일

부하린이 감옥에서 스탈린에게 보낸 편지

부하린이 스탈린에게 마지막으로 보낸 편지는 여러모로 흥미로운 글입니다.

자신의 최후가 다가오기 때문인지 편지의 곳곳에서 불안한 심리가 표출되고 있으며 또 성경의 일화를 언급하는 등 공산주의자 답지 않은 모습도 조금씩 보입니다. 특히 감옥에서 환각을 본다는 내용을 읽을 때는 한때 최고의 이론가이던 사람의 몰락에 비참함 마저 느껴집니다. 편지에는 삶을 체념했다고 적고 있는데 읽는 사람에 따라서는 스탈린에게 살려달라고 간청하는 내용으로 보입니다.(제가 보기에도 목숨을 체념했다기 보다는 어떻게든 살아 보려고 애쓰는 것 같아 안스럽습니다.)

스탈린 동지의 허가 없이는 아무도 이 편지를 읽지 못하도록 하시오.

스탈린 동지께

요시프 비사리오노비치(Иосиф Виссарионович),

아마도 이것은 내가 죽기 전에 당신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가 될 것 같습니다. 지금 나는 죄수의 신분이기 때문에 이 편지를 공문서 형식으로 쓰지 않았습니다. 이 편지는 오로지 당신만을 위한 것 입니다. 이 편지의 존재 여부는 오로지 당신의 선택에 달려있습니다.
나는 내 인생의 마지막 단계, 아마도 내 삶의 최종 단계에 도달했을지 모릅니다. 나는 이 편지를 쓰면서, 내가 과연 이것을 써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감옥의) 정적은 나를 오싹하게 만들며 많은 생각들이 스쳐 지나갑니다. 그리고 나 자신의 감정을 도저히 통제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제 내게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너무 늦기 전에, 그리고 내가 아직 글을 쓸 수 있을 때, 내가 눈을 감기 전에, 그리고 아직 나의 두뇌가 기능을 하고 있는 지금 제 죽음을 동지께 미리 알려 드리고자 합니다.
어떠한 오해도 피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이 점들을 밝히고 싶습니다.; a) 나는 내가 고백한 혐의를 부인하지 않을 것 입니다 b) 이와 마찬가지로, 나는 이 편지를 가지고 동지가 내 문제를 어떻게 처리 하실지에 대해 영향을 미치려 하는 것도 아닙니다. 내가 이 편지를 쓰는 것은 순전히 동지와의 개인적인 문제에 대한 것 입니다. 지금 나는 동지께 이 문제를 반드시 알려드려야 한다는 정신적 압박 때문에 이 편지를 쓰기 전에는 죽을 수가 없습니다.

1) 나는 지금 벗어날 수 없는 벼랑의 끝에 몰려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처지이므로 솔직히 이야기 하겠습니다. 나는 수사과정에서 밝혔듯 어떠한 범죄와도 관련이 없는 무죄입니다.

2)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사실을 생각해 보더라도 회의에서 이미 밝혔듯 다음과 같은 사실 외에는 더 말씀 드릴 것은 없습니다.

a) 나는 예전에 어떤 사람이 누군가 무슨 소리를 질렀다고 말한 것을 들었습니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아마 쿠즈민(Кузьмин)이었을 겁니다. 그렇지만 나는 쿠즈민이 한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기 때문에 그때 들은 이야기를 정확히 기억하지 못 합니다.

b) 아이헨발드(Айхенвальд)는 예전에 나와 함께 시내를 걸으면서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회의, 또는 회의 비슷한 것에 대해서 이야기 한 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에 대해 안스럽게 생각해서 아이헨발드와 이야기 한 사실에 대해 숨겼습니다.

c) 나는 1932년도에 내가 당에서 다시 실권을 잡을 것이라고 믿고 나를 따르던 나의 추종자들과의 “표리부동한” 태도에 대해서 유죄를 시인합니다. 그렇지만 나는 나의 추종자들을 당에서 유리시켰습니다. 이 점은 내가 말한 그대로 입니다. 나는 이 점에 대해서는 양심에 거리낄 것이 없습니다. 다른 혐의들은 모두 허구이거나 설사 그와 유사한 일이 있었다 하더라도 나 자신은 전혀 알지 못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전체회의에서 이야기 한 것은 모두 진실이며 거짓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지난 수년간 나는 당의 노선을 진심으로, 그리고 충실히 따랐으며 동지를 따르고 존경했습니다.

3) 나는 제게 씌여진 혐의나 “다른 이들의” 자백을 시인하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러지 않았다면 내가 “무장해제 당했다”는 허위 사실을 밝힐 수 없었을 것 입니다.

4) 이와 관계없는 것과 3번과는 별도로, 나는 우리의 조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 이번 숙청에는 거대하고 엄청난 정치적 바탕이 깔려 있습니다. 이것은 a) 전쟁 이전의 정치적 상황과 관련되어 있으며, b) 민주화로의 이행 과정과도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 숙청에는 1) 범죄혐의자 2) 범죄혐의를 받고 있는 사람 3) 잠재적으로 범죄혐의를 받고 있는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 또한 이 세 가지의 범주 중 하나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일부는 중립적인 입장을 지키고 있으며 일부는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고 마지막으로 두 번째 집단과도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는 일부가 있습니다.
어찌됐던 이제 인민들은 어쩔 수 없이 다른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하고 상호간의 불신은 지속적으로 높아만 가고 있습니다.(이것은 나의 경험을 통해 판단한 것입니다. 나는 내 명예를 훼손한 라덱()에 대해 분노를 터뜨렸으며 결국 그의 뒤를 따르게 됐습니다…) 이 방식을 통해 지도부는 자체에 대한 권위를 확립했습니다.

아무쪼록 내가 하는 말이 동지를 비난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나는 바보가 아닙니다. 나는 이번 숙청에 어떤 계획, 어떤 의도, 그리고 어떤 이해관계가 걸려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 자신과 나와 가깝던 사람들의 역사에서 차지하는 역할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스탈린 동지에게 달려있다는 점을 슬프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나는 극심한 고뇌에 시달리고 있으며 심각한 역설적 상황에 처해있습니다.

5) 만약 내가 동지의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면 마음의 안정을 찾는데 훨씬 도움이 될 것 입니다. 하긴, 그게 어쨌든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만약 동지의 의도가 그런 것이라면 그렇게 되겠지요. 그렇지만 나의 마음은 동지께서 내가 유죄라는 점을 믿고, 또 동지가 진심으로 내가 이런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려 했다고 믿고 있을 것 같아 답답합니다.
만약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 일까요? 나 자신이 나를 포함해서 많은 사람들을 당으로부터 축출당하게 만들었다, 즉 나 자신이 이런 행동이 범죄라는 것을 알고도 그대로 했다는 것 입니까? 만약 그것이 모두 사실이라면 어떤 식으로든 정당화 될 수 없을 것 입니다. 지금 나의 머리는 이런 혼란으로 어지럽습니다. 그리고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어떤 외침이 들리는 것 같습니다. 그냥 내 머리를 벽에 들이받아 죽어버리고 싶습니다. 하지만 만약 그렇게 한다면 이 때문에 또 다시 다른 사람들에게 죽음의 빌미를 만들겠지요.

도데체 나는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도데체 내가 뭘 하면 좋겠습니까?

6)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적개심을 고취하지 않았고 나 또한 누구에게 원망을 품지 않았습니다. 나는 기독교인은 아니지만 내 나름대로의 신념이 있습니다. 나는 (당의 노선과 다른?) 길을 걷기 시작하면서 보복에 시달려 왔습니다. 그리고 아마도 동지께서 진심으로 알고 싶을 것 같아 이야기 하는데, 내가 답답한 이유 중 하나는 당신이 과거에 있었던 일 중 하나를 까맣게 잊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1928년 여름으로 기억하는데, 그때 내가 동지의 옆에 앉아 있을 때 동지는 내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동지는 내가 왜 동지를 나의 친구로 생각하는지 아시오? 그건 동지는 음모 같은 것을 꾸미지 않을 사람이기 때문이오. 그렇지 않소?” 그래서 나는 “그렇지요. 나는 음모 따위는 관심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때 나는 카메네프와 친하게 지내고 있었습니다. 동지께서 믿든 믿지 않든 상관없지만 카메네프와의 관계는 나에게 있어서 마치 유대인들의 원죄의식과도 같았습니다. 아. 이런. 이게 무슨 유치한 생각이란 말입니까! 이게 무슨 바보짓이란 말인지! 결국 카메네프와의 친분 때문에 지금 나의 명예와 목숨을 잃게 되었습니다.
이점에 대해서는 나를 용서해 주십시오. 코바. 나는 이 편지를 쓰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동지께서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는데 지금 나는 이 편지를 쓰면서 나의 처지를 더욱 더 곤란하게 만들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나는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습니다.
당신에게 마지막 작별인사를 해야겠습니다. 내가 당 지도부나 나를 수사한 수사관이건 간에 어느 누구도 원망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비록 나는 나의 주변이 모두 암흑천지 같이 보이고 어둠이 감싼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심한 처벌을 받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지의 용서를 구하는 바입니다.

7) 내가 환상에 시달리고 있을 때, 동지를 여러 차례 보았고 한번은 나데즈다 세르게예브나(Надежда Сергеевна Аллилуева, 스탈린의 두 번째 아내)를 보기도 했습니다. 그 환상 속에서 나데즈다 세르게예브나는 나에게 이렇게 말을 하더군요. “도데체 당신들이 당신에게 무슨 짓을 한 건가요, 니콜라이 이바노비치? 이오시프에게 말해서 당신을 빼내겠어요.” 이 환상이 너무나 사실 같아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동지께 제발 저를 풀어달라고 간청하는 편지를 썼습니다! 지금 저의 정신은 현실과 망상이 뒤섞여 있습니다. 나데즈다 세르게예브나는 제가 동지에게 어떤 악독한 음모도 꾸미지 않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것 입니다. 결국 나의 피폐한 정신이 이런 환상을 만들어 냈겠지요. 나는 동지와 수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아. 이런. 만약 나의 마음을 보여주는 기계가 있다면 동지에게 나의 영혼을 모두 보여 드리고 싶습니다. 만약 동지께서 내가 스테츠키(Стецки)나 탈(Тал) 같은 사람과 달리 나의 정신과 육체를 모두 동지께 바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동지께서는 나를 용서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게는 아브라함이 (이삭에게서) 칼을 거두도록 했던 것 같은 천사가 없을 것 같습니다. 나의 끔찍한 운명은 이제 결정되었습니다.

8) 마지막으로, 나의 마지막 부탁을 드리고자 합니다.

a)사실 나는 재판을 받지 않고 그냥 목숨을 끊어버릴 기회가 수도 없이 많았습니다. 나는 그저 내가 얼마나 나 자신을 통제할 수 있는지 알 수 없었을 뿐입니다. 동지께서도 나의 성품을 잘 알 것입니다. 나는 당이나 소연방의 적이 아니며 나의 힘이 닫는 한도 내에서 당의 의도에 충실히 따랐습니다. 그러나 이런 환경에서 나의 힘은 제한적일 수 밖에 없었으며 이로 인해 나는 많은 고뇌를 했습니다. 나는 부끄러움이나 자존심을 모두 버리고 당신 앞에 무릎 꿇고 간청합니다. 제발 나를 재판에 회부하지 마십시오. 하지만 이건 불가능하겠지요. 만약 가능하다면 내가 재판 이전에 죽을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b) 만약 내가 사형선고를 받게 된다면, 동지께서 먼저 이 사실을 알려주셨으면 하고 또 진심으로 총살은 피하도록 부탁 드립니다. 나는 총살 대신 독약으로 목숨을 끊고 싶습니다. (모르핀을 맞고 영원히 잠들고 싶습니다.) 특히 이점은 내게 중요합니다. 동지께서 내게 자비로운 행위를 베풀도록 부탁 드리려면 어떤 표현을 사용해야 할 지 도무지 머리에 떠오르지 않습니다. 어쨌거나, 정치적으로 어떤 표현을 사용할지는 중요한 일이 아닐 것 이고 또 어느 누구도 이 일에 대해 알지 못 할 것 입니다.
하지만 나의 마지막 시간들은 내가 원하는 대로 보낼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나에게 동정을 베풀어 주십시오. 동지께서도 나를 이해하시리라 믿습니다. 나와 같은 상황이라면 동지께서도 나와 같이 하시겠지요. 결정을 내리시면 알려주십시오. 나는 충분히 현실을 견딜 수 있는 용기가 있지만 한편으로는 가끔씩 죽음의 공포를 떨쳐버릴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런 혼란을 느낄 때 마다 내가 정신적으로 고갈된 상태라는 것을 알겠습니다. 그러니 만약 사형이 선고된다면 내게 치사량 만큼의 모르핀을 주십시오. 진심으로 간청합니다.

c) 그리고 나의 아내(Анюта, 부하린의 두 번째 아내)와 아들에게 작별인사를 할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단, 내 딸은 만나고 싶지 안습니다. 그 아이에게 너무나 미안함을 느낍니다. 나의 죽음은 내 딸아이가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고통스러울 것 입니다. 그리고 나디아(부하린의 첫 번째 아내)와 제 아버지 역시 고통스러워 할 것입니다. 하지만 아뉴타는 아직 젊으니 충분히 충격을 이겨낼 수 있을 것 입니다.
그러니 마지막으로 그녀와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될 수 있으면) 재판 이전에 아뉴타를 만났으면 합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만약 나의 가족들이 재판에서 나의 (조작된) 진술을 듣는다면 충격을 받아 자살할 지도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전에 몇 마디 이야기를 해서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도록 해 주려 합니다.

d) 만약 나의 예상과 반대로 내가 석방된다면 (나의 아내와 먼저 상의하는 것이 순리이겠지만) 다음과 같은 사안을 부탁 드리고자 합니다.
- 미국에 몇 년 정도 망명을 하고 싶습니다. 나의 의도는 이렇습니다. 재판을 받는 대신 정치 활동을 하겠습니다. 즉 트로츠키에 대한 투쟁을 전개하고 혼란에 빠진 지식계층들의 마음을 사로 잡겠습니다. 또 나는 반 트로츠키 주의자가 되어 트로츠키를 타도하는데 진심으로 전력을 다 하겠습니다. 동지께서는 나에게 비밀경찰 한 명을 감시 목적으로 붙이고 그래도 미덥지 않으시다면 나의 아내를 내가 트로츠키와 그 일당에게 큰 타격을 입힐 때 까지, 즉 여섯달 정도 본국에 두고 감시하도록 하십시오.
-만약 그래도 나에 대한 의심을 떨쳐버릴 수 없으시면 뻬초라(Печора)나 콜릐마(Колыма)의 수용소에 25년 정도 유배를 보내십시오. 나는 유배지에서 대학과 지역 문화 박물관, 연구소, 그리고 미술관, 민속박물관, 자연사 박물관, 언론사를 세우겠습니다. 즉 나와 나의 가족은 내가 죽을 때 까지 그곳에서 문화 사업을 전개할 것 입니다. 어떤 경우에든 나는 온 힘을 다하여 일을 할 것 입니다. 그러나 사실 나는 2월 전체회의에서 있었던 사안을 고려하면 내가 석방될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나에 대한 재판이 언제라도 열릴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게 나의 마지막 부탁입니다.(하나 더 덧붙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나의 철학 원고들은 내가 죽더라도 없애지 말아 주십시오. 매우 가치있는 저작들이 있습니다.)
이오시프 비사리오노비치! 당신은 당신에게 충실했던 가장 유능한 측근을 하나 잃게 되었습니다. 나는 마르크스가 알렉산드르 1세는 바클레이 드 톨리(Михаи́л Богда́нович Баркла́й-де-То́лли)를 반역 혐의로 의심해서 결국 가장 유능한 조력자를 잃었다고 평했던 글을 읽었었는데 지금 나의 상황이 마치 바클레이 드 톨리와 같아 가슴이 아픕니다.

그렇지만 나는 눈물을 거두고 이 세상과 이별할 준비를 하겠습니다. 그리고 동지와 당, 그리고 당의 뜻에 대해서는 무한한 사랑 말고는 아무런 감정도 없습니다. 나는 동지에게 모든 것을 다 적었습니다. 내 편지를 꼼꼼하게 읽어 주십시오. 지금 나의 상황이 당장 내일이라고 어떻게 될 지 모르는 상황이기 때문에 편지는 미리 적었습니다. 신경이 쇠약해 졌기 때문에 지금은 손가락을 움직이기도 어려울 정도로 무감각 합니다.

그렇지만 지금 나는 두통과 눈물에도 불구하고 편지를 씁니다. 코바, 나의 양심은 당신 앞에 떳떳합니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당신에게 용서를 구합니다.(오직 마음속으로만 표현해 주십시오) 이런 이유로 나는 나의 마음속에 당신을 품고자 합니다. 영원한 이별이로군요. 이 불쌍한 사람을 좋게 기억해 주기 바랍니다.

부하린 1937년 12월 10일

J.Arch Getty and Oleg v. Naumov(ed), The Road to Terror : Stalin and the Self-Destruction of the Bolsheviks, 1932~1939, (Yale University Press, 1999), pp.556~560

추가 1. 이 편지의 러시아어판은 이 사이트에 있습니다.

추가 2. 이 편지 말고도 한국에 번역된 부하란 : 인간, 학자 그리고 혁명가라는 책에는 부하린이 자신의 두 번째 아내에게 쓴 편지가 부록으로 실려 있습니다. 이 두 번째 편지는 스탈린에게 쓴 편지에 비해 조금 더 차분한 마음에서 쓴 것 같아 보이며 또 상당히 슬픕니다.

2007년 8월 25일 토요일

드라마 한편이 여러 사람 바보 만드는군요


다물군이랍니다... 이 양반 MBC 주몽을 너무 많이 보신 모양이네요. 뭐, 정치하는 분들이 종종 드라마와 역사를 구분 못하신다는 것은 용의 눈물 시절 부터 알고 있었지만 판타지 아동극 주몽까지 튀어나올 줄이야.

2007년 8월 19일 일요일

중국 항공박물관

중국 항공박물관은 꽤 전시물이 많은 편이지만 교통이 불편했습니다. 먼저 버스로 베이징 외곽의 샤허까지 나간 뒤에 샤허에서 버스를 갈아타야 하는데 샤허까지 나가려면 보통 버스를 두 번 갈아타거나 택시를 잡아타야 했습니다.

그리고 버스에서 내린 뒤 수백미터를 더 걸어들어가야 합니다.

이 썰렁한 건물이 매표소입니다. 원래 입장료는 50원인데 해방군 창군 80주년이라고 2원에 들여보내주더군요.

야외 전시물의 상당수가 중국제 Mig-19였습니다. 다양한 파생형이 전시되어 있더군요. Mig-19가 너무 많아 박물관이 아니라 퇴역장비 폐기장인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Mig-19 떼샷!



실내 전시관은 과거에 격납고(?)로 쓰이던 곳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좋은 전시물이 많았는데 이상하게 사진이 제대로 안 찍혀서 쓸만한 사진을 별로 못 건졌습니다.


역시 박물관에는 모형이 있어야 합니다. 왜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Bf-109와 P-38 같은 2차대전 항공기 모형이 있더군요.


그리고 라이벌인 F-86과 Mig-15입니다. F-86은 당연히 노획한 것일리는 없고 파키스탄 공군이 기증한 기체입니다.




국민당 공군이 사용한 I-16과 플라잉 타이거즈의 P-40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P-40은 실물크기 목업이더군요.




격추당한 대만공군 U-2의 잔해입니다.



다시 야외 전시장으로 나갔습니다.

여기서 마오 주석과 저우언라이 동지의 전용기를 구경하는 광영(???)을 누렸습니다.

마오주석 전용기입니다. 마오주석 전용기는 한 대가 더 있더군요.

주은래 동지 전용기입니다.

야외 전시실의 전시물 상당수는 보존 상태가 엉망이었습니다. 대부분 이 85mm 대공포와 비슷하게 녹이 잔뜩 슬어 있더군요.


레이더 같은 대형 장비도 있었습니다.



야외 전시실의 전시물도 굉장히 방대했습니다. 너무 많아 제대로 구경도 못하고 사진도 조금 밖에 찍지 못 했습니다. 나중에 다시 가면 그때는 사진을 많이 찍을 생각입니다.

2007년 8월 16일 목요일

황빠들의 반응이 궁금하군요.

황우석 배아줄기세포 논문특허 사실상 포기

황우석 '특허 포기'는 논문조작 자인한 셈

황빠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군요.

이건 숫제 베드로도 아니고 예수가 스스로를 부인한 셈이니.

줄기교의 앞날이 걱정(?) 됩니다.

2007년 8월 15일 수요일

위대한 USA! 400대의 트럭으로 모스크바를 구하다!

3일전에 렌드-리스(Lend-Lease)가 소련의 교통-운수 체계에서 차지하는 역할이라는 글을 썼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아주 어이없는 댓글이 하나 달렸습니다.


물론 미국이 1941년에 소련으로 보낸 원조 물자 중에는 트럭이 있는게 맞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달랑 400대라는 점이지요. 고작 400대의 트럭으로 서부전선군 예하 사단들의 기동력을 높일 수 있다니 미국 자동차들은 무안단물이라도 발랐나 봅니다. 게다가 이것들은 부품상태로 도착해서 소련에서 조립을 했기 때문에 부대에 지급된 것은 1942년 1월이 넘어서 였습니다.

어이가 없어서 다음과 같은 댓글을 달았습니다.


그랬더니 다음과 같은 댓글이 달리는군요.


거참. 남의 블로그에 맞춤법도 틀린 헛소리나 늘어놓는 주제에 예의를 찾다니 어이가 화성탐사 나갈 지경입니다.

게다가 논리도 엉망이지요. 결국 증원군을 극동에서 러시아 서부까지 이동시킨게 철도라고 시인을 했는데 그렇다면 자동차는 별 도움이 안됐다는 결론아닙니까.

기초적인 역사적 사실에도 무지한 주제에 맞춤법도 틀리고 논리도 맞지 않는 헛소리를 지껄이면서 남의 블로그에다 예의를 논하니 뭐하는 인간인지는 몰라도 낮짝도 두껍습니다.

2007년 8월 14일 화요일

NATO의 군사력에 대한 소련의 추정

아래의 글은 소련이 분석한 NATO 회원국의 군사력 현황 중 일부로 1984년 12월 3일에서 4일에 걸쳐 모스크바에서 있었던 바르샤바 조약기구 국방장관 회의에서 발표되었습니다.

[전략]

최근 수년간 NATO 회원국들은 이미 자국을 방어하기에 충분한 군사력을 갖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더욱 위협적인 수준으로 군사력을 강화하고 있다. 미국은 계속해서 서유럽에 중거리 탄도미사일을 증강하고 있으며 이것은 바르샤바 조약국들에 대한 전략 핵공격 위협을 높이고 있다. NATO 회원국들은 (바르샤바 조약기구에 대한) 군사력 우위를 확보하기 위해서 1993년을 목표로 한 장기 군사력 강화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NATO의 군사비 지출은 1978년에서 1984년 사이에 17억달러에 달했다. NATO 조약국들의 군사비 지출은 크게 증가했으며 미국 국방비의 50% 수준이다. 영국과 프랑스의 지출은 80% 증가했으며 서독은 40%, 이탈리아와 그리스는 2.5배 증가했고 터키는 9배나 늘어났다.
이 기간 동안 NATO의 유럽지역 핵전력은 더욱 발전했다. 유럽전역의 병력도 크게 증강됐다. NATO군은 새롭고 현대화된 무기체계로 개편 중이며 새로운 전술을 도입하고 있다. 조직구조와 지휘통제 체계, 그리고 군사기술 지원체계도 개선되고 있다. 동원 기반도 확충되고 있으며 참모조직과 군부대의 작전 훈련은 횟수도 늘어나고 더욱 심화되었다.

[중략]

1. (서부전역)의 NATO측 핵전력을 살펴보면 핵미사일 운용가능 한 차량이 25% 이상 증가했으며 약 3,600대에 달한다. 이것으로 총 4,200발의 핵탄두를 운용할 수 있다.
2. 새로 증강된 병력은 6개 사단(프랑스 3개 사단, 영국, 네덜란드, 덴마크 각 1개 사단)이며 여기에 따로 에스파냐군도 5개 사단이 증강됐다. 이들 국가의 사단별 전투력은 거의 1.5배 늘어났으며 신형 전차와 야포, 미사일, 대전차화기, 신형 지휘통제 체계의 도입으로 질, 양적으로 확충됐다.
[중략]
3. 전투기의 숫자는 1.8배 증가했으며 이중 거의 25%가 신형 전투기이다. 전투기 중 2/3 이상이 다목적 전투기이며 이중 절반은 핵병기 운용이 가능하다. 공군의 전투력은 60% 이상 증가했다.
4. 대서양 동부와 지중해 지역을 관할하는 미 해군의 전력은 신형 수상전투함과 잠수함, 현대화 개장을 받은 전함의 배치, 그리고 핵 및 재래식 대함미사일의 배치로 강화되었다. NATO 가맹국의 해군 중에서는 영국과 프랑스가 신형 함대공 미사일과 항공모함의 개발을 계속하고 있다.
5. 유럽 전역의 전자전 부문, 특히 공군과 지상군은 신호 및 무선 정보 능력을 확충함과 동시에 바르샤바 조약군의 무전망을 모든 주파수에 걸쳐 교란할 수 있는 능력을 확보하고 있다.
6. 유럽 전역의 방공 체계 중 호크(Hawk) 방공시스템은 개량에 들어갔다. 요격기 중 1/3이 신형으로 교체되었다. 방공 능력은 2~2.5배 이상 강화되었으며 동시에 1,000대의 항공기를 상대할 수 있는 능력을 확보하고 있다.
7. 앞에서 살펴본 내용을 기초로 할 때 서부 전역의 NATO군은 총 46개 사단, 51개 독립 부대, 핵탄두 3,600발, 전차 11,000대, 야포 및 박격포, 방사포 9,800문, 대전차 무기 11,500개, 공군의 고정익항공기 2,870대, 육군항공대의 헬리콥터 및 고정익항공기 3,000대, 일선 전투함 480척으로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이중 대략 60%의 전력이 서유럽 전역에 집중되어 있다.
동원에 들어갈 경우 지상군의 전투력은 보병 사단들의 증강에 의해 두 배 이상 강화될 것으로 예상되며 특히 서독, 영국, 프랑스 지상군의 전력은 30% 이상 증강될 것이다. 서유럽 전역의 NATO군은 높은 수준의 전투 태세를 갖추고 있다. 사실상 거의 모든 상비 사단이 전투 준비를 마치고 있으며 최대 48시간 이내에 전투 태세를 완비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해군 또한 지상군과 비슷한 시간을 필요로 하고 있다. 공군은 12시간 이내에 완벽히 전투 태세를 갖출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또한 “Simple Alert”에서 “Reinforced Alert”단계로 전환되는데 필요한 시간은 6일에서 4일로 단축되었다.
서유럽 전역에는 30일분의 물자가 비축되어 있으며 미군의 경우 60일분의 물자를 비축하고 있다. 그러나 NATO 공군은 탄약의 경우 90일치를 확보하고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8. 서부 전역의 NATO 군은 작전 및 전술 훈련을 강화, 심화 함으로서 매우 높은 수준의 대비 태세를 확보했다.

[중략]

서부 전역 NATO군의 전투력

서부 전역의 NATO군은 1990년까지 전투 대비 태세를 손상시키지 않으면서 질적인 향상을 이룩하려 하고 있다.
1990년까지 서부 전역에서 선제 핵 공격을 감행할 수 있는 NATO의 전체적인 핵 전력은 40%(6,000발의 핵탄두) 이상 증가할 것으로 보이며 핵미사일 발사 차량을 14%(3,660대에서 4,150대) 이상 증강할 계획이 세워져 있다.
서부 전역의 전략적 상황은 매우 극적으로 변화할 것이다. NATO의 핵 전력은 서부 전역은 물론 소련의 상당 지역에 걸쳐서 강력히 방어되는 지역을 타격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출 것으로 예상된다.
서부 전역의 NATO 지상군의 전투력은 새롭고 고성능인 장비를 받아 증가하고 있다.
기갑 장비의 45%가 M 1 및 레오파르트 2, 챌린저, AMX 30B로 구성될 것이며 신형 보병 수송장갑차와 정찰용 항공기가 배치될 계획이다.
포병의 사거리는 30km에서 40km 대로 늘어날 것이며 사거리 연장탄과 유도 포탄, 다탄두식 포탄과 신형 미사일의 도입에 의해 발사 속도는 1.5~2배, 화력의 효율성은 3~5배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 지상군 군단은 1980년대 말에 이르면 “Assault Breaker” 정찰-통제 체계를 도입해 최대 200km 거리에서 기갑 장비를 식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출 수 있을 것이다.
미육군의 제 5군단과 제 7군단의 예하 사단들은 1986년형 사단으로 편제개편을 마쳤으며 우리측의 추정에 따르면 기계화보병사단의 전투력은 70%, 기갑사단의 전투력은 40% 이상 증강되었다.
1990년에 이르면 서부전역의 NATO 지상군 전투력은 1984년과 비교해 50% 이상 증강될 것이다.
1990년까지 서부전역의 NATO 공군의 45%가 F-16, F-15, A-10, 토네이도, 미라지 2000및 기타 신형 항공기로 구성될 것이며 이들 신형 항공기는 그 이전 세대의 항공기에 비해 전투력, 특히 무장 탑재 능력이 2~3배 이상 늘어났다. 공군의 전투력은 거의 두 배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다.

[후략]

Vojtech Mastny and Malcolm Byrne(ed), A Cardboard Castle? : an inside history of the Warsaw pact 1955~1991, CEU Press, 2005, pp.500~502

러시아어로 된 문서를 영어로 번역한 것을 중역했는지라 문장이 좀 기묘합니다만 전체적인 논조는 NATO의 군사력 증강이 매우 위협적이라는 것 입니다. 특히 신형장비의 도입에 따른 기술력 격차를 우려하는 점이 주목할 만 합니다.

2007년 8월 13일 월요일

중국에서 지른 물건 중...

이번에 중국에서 지른 물건 중에는 이런 것도 있었습니다.


왜 질렀느냐면 가격이 한국과 비교해 너무나 싸더군요. 처음에는 가격이 한국보다 훨씬 싸서 제 눈을 의심했습니다.


타미야의 3호전차 75mm 탑재형은 대충 14,000원 정도입니다. 국내에서는 20,000원이 넘지요.


KV중전차는 대충 13,500원 정도입니다. 이것도 국내에서는 19,000원을 넘습니다.

중국의 모형점을 처음 갔을 때는 수입 모형 가격이 한국 보다도 훨씬 싸다는 점에 놀랐습니다. 그리고 순간 지름 충동이 일었더군요. 하지만 한국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는 물건을 중국에서 사가지고 들어갈 필요가 있을까 고민하다가 마지막날 남은 돈으로 질렀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제가 좋아하는 하비보스의 물건들은 제가 가본 베이징의 모형점들에서는 취급하지 않더군요.

중국이 한국보다 일제 모형이 싼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환율문제인지 아니면 한국이 쓸데없이 바가지가 심한건지...

2007년 8월 12일 일요일

렌드-리스(Lend-Lease)가 소련의 교통-운수 체계에서 차지하는 역할

참으로 오래된 퀴퀴하고 눅눅하고 식상하기 짝이 없는 낡은 떡밥입니다. 읽으시는 분들의 양해를 구하는 바 입니다.

독소전쟁에서 소련의 역할이 어느정도 였는가 하는 해묵은 떡밥은 여전히 인터넷에서 인기있는 주제 중 하나입니다. 이 이야기가 나오면 대개 소빠(?)와 소까(?)가 대립하는 양상으로 전개되는데 소까(?)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렌드-리스(Lend-Lease)의 역할이 과소 평가된다고 이야기 하지요. 그렇다면 렌드-리스는 실제로 어느 정도의 역할을 했을까요?

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에는 소련 체제를 혐오하고 친서방적인 경향을 보이는 연구자들이 등장했습니다. 제가 자주 인용하는 보리스 소콜로프(Борис Соколов)도 그런 경향의 사람인데 이 양반이 썼던 렌드-리스에 대한 글 중 하나가 1994년에 Lend-Lease in Soviet Military Effort, 1941~1945 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에 실렸습니다. 여기에는 렌드-리스로 받은 품목에 대한 통계가 잘 정리되어 있어서 매우 활용하기가 편리합니다. 저자가 소련 혐오자이기는 하지만 통계 자체는 충분히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군요. 여기에 차량 지원에 초점을 맞춘 그리바노프(Станислав Грибанов)와 던(Walter S. Dunn)의 글도 약간 덧붙이려고 합니다.

렌드-리스 품목은 매우 종류가 방대하니 여기서는 간단히 교통-수송과 관련된 부분만 짤막하게 이야기 하겠습니다.

1. 연료

1-1. 항공연료

소련은 1941년 전쟁 발발 당시까지 Б-78 항공유 소요량의 4%만 재고로 확보하고 있었습니다. 소련의 정유산업이 매우 수준이 뒤떨어져 있어서 항공유 생산이 적었기 때문입니다. 독일 공군이 노획한 소련군의 항공유가 너무 저질이어서 난방용 기름으로나 써야 한다고 평가했다는 일화가 있는데 어느 정도 사실에 부합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1940년부터 1941년까지 소련이 생산한 항공유의 양은 다음과 같습니다.(단위 미터톤)

1940년 : 889,000톤
1941년 : 1,269,000톤
1942년 : 912,000톤
1943년 : 1,007,000톤
1944년 : 1,334,000톤
1945년 : 1,017,000톤

렌드-리스로 지원된 항공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미국 : 628,000톤
영국 : 14,700톤
캐나다 : 573,000톤

여기에 렌드-리스로 light fraction gasoline(이 용어를 어떻게 번역해야 하나요?)도 지원됐습니다. light fraction gasoline은 거의 대부분 소련이 항공유를 제조하는데 사용되었습니다.

미국 : 732,300톤
영국 : 902,100톤

소콜로프는 항공유 제조에 사용된 light fraction gasoline을 포함하면 렌드-리스로 원조된 항공유는 1941~1945년 기간 동안 소련이 사용한 항공유의 51.5%에 상당하는 양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1-2. 차량용 연료

소련이 1941년부터 1945년까지 생산한 차량용 연료는 10,923,000톤이고 렌드-리스로 원조된 차량용 연료는 242,300톤입니다.

2. 운송수단

2-1. 차량

제 개인적으로 생각했을 때 렌드-리스에서 가장 결정적이었던 것은 미국제 트럭이 아닐까 합니다. 미국의 차량 지원이 없었다면 소련이 1944~45년 전역에서 독일군을 결코 기동력으로 압도할 수 없었을 것 입니다.

소련의 차량 생산량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1940년 : 145,390대
1941년 : 124,176대(이 중 1941년 7~12월의 생산량은 46,100대)
1942년 : 34,976대
1943년 : 49,266대
1944년 : 60,549대
1945년 : 74,657대

즉 전쟁 기간 중에 소련이 생산한 차량은 265,548대입니다. 그리고 미국이 렌드-리스로 지원한 차량은 409,500대로 압도적입니다. 특히 이 중 상당수가 1943~44년의 결정적인 시기에 지원되었다는 점은 미국의 차량 지원이 없었을 경우 소련 육군이 1944년의 대규모 기동전을 펼치기 어려웠다는 것을 잘 보여줍니다. 던은 미국의 차량 원조로 인해 소련군이 대규모 기동전에서 보급 지원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일반적인 마차 수송의 경우 하루 최대 30km가 한계고 운송량도 제한적이지만 트럭의 경우 일반적으로 하루 100km 정도의 거리를 충분히 담당할 수 있다는 점 입니다. 특히 포장도로가 극히 드물었기 때문에 미제 트럭이 부여한 기동력은 엄청난 것 이었습니다.


1942~1943년 소련의 차량 생산량이 격감한 것에서 볼 수 있듯 소련은 막대한 전차의 소모를 보충하기 위해서 차량 생산을 희생하면서 까지 전차 생산에 역량을 집중시켰습니다. 미국의 차량 지원이 없었다면 소련의 전차 생산은 격감했을 것 입니다.

여기에 미국이 원조한 견인용 트랙터 8,701대와 오토바이 35,170대도 기동수단으로 포함되어야 할 것 입니다.

또한 미국은 소련 원조를 위해서 이란에 세 곳의 차량 조립공장을 세웠는데 이것도 꽤 대단한 투자라고 할 수 있을 것 입니다. 그리바노프에 따르면 이 세 곳의 조립공장에서 생산되어 소련에 원조된 차량은 184,112대에 달합니다.

렌드-리스 중 자동차에 대한 부분은 그리바노프의 글이 꽤 자세하고 통계가 잘 정리되어 있는데 이것은 기회가 되면 따로 소개를 할까 합니다.

2-2. 철도

철도 부문에 있어서도 렌드-리스는 결정적 입니다.

소련의 철도용 레일 생산은 다음과 같았습니다.(단위 미터톤)

1940년 : 1,360,000톤
1941년 : 874,000톤
1942년 : 112,000톤
1943년 : 115,000톤
1944년 : 129,000톤
1945년 : 308,000톤

미국과 영국이 렌드-리스로 원조한 철도용 레일은 총 685,700 미국톤(short ton)으로 미터톤으로 환산하면 622,100톤이 됩니다. 이것은 소련이 전쟁 기간 중 생산한 철도용 레일의 거의 60%에 육박하는 막대한 양 입니다. 게다가 소련이 생산한 철도 레일의 많은 수는 협궤용 레일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미국이 원조한 양은 소련의 생산량의 80%를 가뿐히 능가합니다.

기관차에 있어서는 더욱 더 압도적입니다.

소련의 기관차 생산량은 다음과 같았습니다.(소형 기관차 제외)

1940년 : 914대 + 디젤 5대
1941년 : 706대 + 디젤 1대
1942년 : 9대
1943년 : 43대
1944년 : 32대
1945년 : 8대

전쟁 기간 중 렌드-리스로 원조된 기관차는 증기 기관차 1,900대, 디젤 기관차 66대로 소련이 1941~1945년 기간에 생산한 기관차의 2.5배를 넘으며 특히 전쟁이 벌어진 이후 소련이 생산한 양과 비교하면 압도적 입니다.
철도 화차와 비교하면 더욱 더 결정적입니다. 소련이 1942년부터 1945년까지 생산한 철도 화차는 총 1,087대인데 같은 기간 렌드-리스로 원조된 화차는 무려 11,075대에 달하고 있습니다.

즉 미국의 원조가 없었다면 소련의 철도 교통은 전쟁 기간 중 파탄이 났을 것이며 후방 지원은 거의 불가능 했을 것 입니다.

교통수단과 관련해서 결론을 내리자면 렌드-리스의 역할은 너무나 결정적이었으며 렌드-리스가 없었다면 소련의 교통-운수 체계가 조기에 파탄나거나(1916~17년의 러시아처럼) 또 전차와 야포 같은 전투용 장비의 생산을 크게 감소시켰을 것 입니다.

2007년 8월 8일 수요일

국공내전 기간 중 양군의 인명피해

이번 중국행에서 사온 책 중에는 중국 국방대학교가 출간한 중국인민해방군전사간편(中国人民解放军战史简编)이 있습니다. 중국인민해방군의 창군부터 국공내전 종결 까지 인민해방군의 주요 작전을 간략하게 정리한 책인데 1983년에 제 1판이 나왔기 때문에 많은 분들이 이 책에 대해 잘 아실 것 같습니다. 제가 이번에 산 것은 2003년에 출간된 제4판입니다. 지도와 통계가 잘 정리되어 있어 마음에 들기는 하는데 종이가 너무 얇아 신경이 쓰이는군요.

이 책의 마지막 장은 인민해방전쟁, 즉 우리가 말하는 국공내전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마지막 부분에는 지도와 함께 인민해방전쟁시기 양군의 인명손실에 대해서 정리해 놓고 있는데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구 분
1946.7 ~ 1947.6
1947.7 ~ 1948. 6
1948. 7 ~ 1949. 6
1949. 7 ~ 1950. 6
합 계
인민해방군 사상자
336,000
407,600
490,000
79,100
1,312,700
국민당군 사상자
426,000
540,200
571,610
173,300
1,711,110
인민해방군 포로
2,500
5,300
2,600
3,300
13,700
국민당군 포로
677,000
953,000
1,834,010
1,122,740
4,586,750
국민당군 귀순
?
?
242,780
390,730
633,510
국민당군 집단전향
17,000
28,200
130,600
671,150
846,950
국민당군 재개편
?
?
271,000
22,030
293,030
인민해방군 실종
19,500
40,000
129,400
7,200
196,100
(표 출처 : 国防大学<战史简编>编写组, 『中国人民解放军战史简编』, (解放军出版社, 2003), p.641)

가장 흥미로운 점은 사상자 자체는 양군이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점 입니다. 물론 양군의 전력차를 감안해 보면 인민해방군이 상당히 선전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만. 비록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국민당군의 손실 대부분이 포로, 또는 귀순에 의한 것이라는 점은 꽤 재미있는 점입니다. 이것을 직접 통계로 보니 느낌이 색다르군요. 내전 초기 단계부터 60만이 넘는 포로가 발생했다는 점도 특기할 만 합니다. 1946년 7월부터 1947년 6월까지는 국민당군이 공산군을 압박하면서 전략적으로 유리한 상황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포로만 60만이 넘었다는 점은 굉장히 의외였습니다. 포로의 숫자는 전쟁 후기로 갈수록 급증하며 여기에 더해 자발적인 투항, 즉 귀순하는 비율도 월등히 높아지고 있습니다. 특히 개인 귀순이나 집단 귀순만 150만 가까이 된다는 점은 국민당군이 내부적으로 결속력이 떨어지는 집단이었다는 점을 잘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잘 정리된 통계를 보는 것은 또 색다른 느낌입니다. 통계 작성과정의 신뢰성은 둘째 치고라도 상당히 재미있는 자료입니다.

아뉘(Hannut) 전투에서 독일군이 입은 손실

제가 중국에 있는 동안 페리스코프 포럼에 deSaxe란 분이 질문 하나를 하셨습니다. 당연히 이분이 질문하신 페리스코프 포럼에 답글을 다는게 예의 인데 이상하게도 로그인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분에게는 로그인이 되는 대로 답변을 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분이 소개해 주신 위키피디아의 글이 상당히 흥미롭기 때문에 따로 여기에 글을 조금 적어둘까 합니다.

deSaxe란 분은 제가 예전에 썼던 아뉘 전투에 대한 글, "독일과 프랑스의 군단급 기갑전투 : 독일 16차량화군단과 프랑스 기병군단의 교전사례"가 위키의 내용과는 다르다고 질문을 하셨습니다. 이분이 인용한 위키피디아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When Erich Hoepner's XVI Panzer Corps, consisting of 3rd and 4th Panzer Divisions was over the bridges launched in the direction of the Gembloux Gap, this seemed to confirm the expectations of the French Supreme Command that here would be the German Schwerpunkt. The two French Cavalry armoured divisions, the 2nd DLM and 3rd DLMs (Division Légère Mécanique, "Mechanised Light Division") were ordered forward to meet the German armour and cover the entrenchment of 1st Army. The resulting Battle of Hannut on 12 May-13 May was, with about 1,500 AFVs participating, the largest tank battle until that date. The French lost about a hundred tanks, the Germans lost over 160 but managed on the second day to breach the screen of French tanks, which on 14 May were successfully withdrawn after having gained enough time for the 1st Army to dig in.

이 글에서는 독일군이 160대의 전차를 잃었다(lost)고 적고 있습니다. lost란 단어는 풍기는 뉘앙스가 "완전손실"에 가깝지요.

그런데 독일군의 "손실"이 160대 라는 것은 제가 썼던 글에도 있습니다.

프랑스측은 독일군의 손실이 더 크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실제 독일군의 전차 손실 중 완전 손실은 20대 가량에 불과했고 전체 피해는 5월 14일 기준으로 수리가능 한 피해와 고장을 합쳐 160대 정도였습니다.

즉 독일군의 손실이 160대 라는 것은 수리가능한 피해까지 합산한 것 입니다.

아뉘전투와 장블뢰전투가 사실상 끝난 5월 16일까지 독일군의 두 기갑사단의 전차 완전손실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제 3기갑사단 : 1호전차 10대, 2호전차 6대, 3호전차 2대, 4호전차 1대, 지휘전차 1대
제 4기갑사단 : 1호전차 15대, 2호전차 5대, 3호전차 4대, 4호전차 5대

두개의 전투를 치르고 난 뒤인 16일 까지 두 기갑사단을 합쳐서 49대의 전차를 잃은 것 입니다. 게다가 피해의 상당수가 5월 15일의 전투에서 발생한 것 이기때문에 12~13일의 아뉘전투에서 입은 피해는 당연히 더 적을 수 밖에 없습니다.

전투 피해를 집계할 때 언제나 혼동되는 것 이지만 완전손실과 수리가능한 손실을 혼동할 경우에는 뭔가 이상한 결론이 도출 될 수가 있습니다. 이점에서 위키에서 사용한 "lost over 160"은 약간 무리가 있는 표현이 아닐까 생각이 드는군요.

2007년 8월 7일 화요일

탈레반의 센스도 제법이군요

이번 아프가니스탄의 인질 사태가 장기간 지속되면서 언론과 이 문제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을 제외하면 대부분 신경을 쓰지 않는 것 처럼 보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어쩌다가 이 문제가 TV에 나오면 인질들을 비웃는 정도로 그치는군요.

그런데 오늘은 연합뉴스에 아주 흥미로운 기사가 하나 실렸습니다.

"탈레반, 인질처리 고심..이슬람 개종 권고"<외신>

기독교 선교를 하러 간 사람들에게 이슬람 개종을 권고하다니 이건 정말 대단한 센스가 아닐 수 없습니다. 폭력을 쓰지 않고도 이렇게 골탕먹이는 것이 가능하군요.

전도하러 간 자매님들이 여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궁금합니다.

베이징 군사박물관

저는 관심사가 관심사이다 보니 어디를 여행하건 전쟁과 관련된 박물관, 기념관이 있으면 최대한 관람을 하는 편 입니다. 게다가 올해는 인민해방군 창군 80주년이니 군사박물관에 뭔가 더 재미있는게 있지 않을까 싶더군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 보다 사람이 많아 돌아버리는 줄 알았습니다.



해방군 창군 80주년이라고 무료관람 행사를 하는 통에 가뜩이나 사람 많은 중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공짜 박물관에 몰려든 것이었습니다. 돈을 내지 않는 것은 멋진 일 이었지만 박물관 입구에서부터 사람들에게 떠밀려 들어가는 것은 아주 고역이었습니다. 그 와중에도 금속탐지기로 소지품 검사 같은 것은 일일이 다 하더군요. 그 덕분에 사람도 많은데 대기하는 줄은 더욱 길었습니다.


들어서니 위대하신 마오 주석께서 맞이하시는 군요.


사람이 매우 많아서 제대로 구경은 못 했지만 마음에 드는 전시물이 매우 많았습니다.


일본의 97식 전차도 이렇게 보니 그럭 저럭 봐 줄만 하더군요. 역시 배경화면의 힘이 큰 것 같습니다.


고대 중국의 전차는 아무리 봐도 뭔가 모자란 느낌입니다. 도데체 뭘까요?


이건 당나라 기병이랍니다.


중국군함 중에서는 가장 유명할 듯한 정원(定遠)의 모형입니다. 사진이 잘 안 나왔지만 모형은 꽤 괜찮게 만들었더군요.


신해혁명때 봉기군이 사용한 대포와 같은 모델이랍니다. 관람객들이 열심히 만지고 가동되는 부분은 움직여 대서 불쌍하더군요.


항일전쟁 전시관의 이 조형물은 꽤 흥미로웠습니다. 중국 드라마에 나오는 망나니칼(???) 휘두르는 홍군이 전혀 뻥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하긴 1차대전 때는 철퇴도 만들어 썼으니 현대전에서 망나니칼(???) 휘두르지 말라는 법은 없겠네요.


이건 그 북새통에도 사람이 거의 없어 한가했던 해방군 장군 서화전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별로 볼만하지는 않더군요. 여기서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한동안 쉬었습니다. 사람이 득시글 대는 건물은 정말 고역이더군요.


야외에는 80주년 특별 전시인지 99식 전차 같은 현용 장비들이 대거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99식을 실제로 보니 사진 보다는 포탑이 조금 더 길어 보이더군요. 물론 그래도 포탑이 너무 작다는 인상은 지울 수 없었습니다. 그래도 사진으로만 보다가 실물을 처음 보니 뭔가 느낌(?)이 오는 것 같더군요. 참고로 같이 전시된 장비중에서 99식이 가장 인기가 있었습니다. 의외로 전차팬이 많은가 봅니다.


이건 해방군 창군 80주년 특별 전시실에 있던 물건인데 미육군 31보병연대의 연대기라고 합니다.

사람이 지독하게 많아서 구경을 제대로 할 수 없었던 점을 제외하면 만족스러웠습니다. 한가할 때 천천히 관람해 보면 좋겠더군요.

2007년 8월 5일 일요일

중국군사서점과 일반 서점의 군사관련 코너

중국에 도착한 뒤 가장 먼저 한 일은 베이징에 있다는 인민해방군 직영서점을 찾는 일이었습니다. 말은 안 통하고 중국어를 할 줄 아는 한국인들은 이게 어디에 있는지 모르니 무작정 찾아보기로 하고 길을 나섰습니다. 그런데 이게 무슨 횡재인지 나가서 베이징 시내를 세시간 정도 걸어 다니다가 해방군 직영서점을 발견했습니다!


서점은 핑안리(平安里)라는 곳에 있는데 인민해방군 문예출판사와 같은 건물에 있었습니다.


서점의 첫 인상은 조금 별로였습니다. 일단 짧은 중국어로 훑어보니 군사 이론과 관련된 서적과 외국 저작의 번역물이 많이 보이더군요. 제법 유명한 저작들은 번역되어 있는 것 처럼 보였습니다.


어디선가 많이 보신 것들이지요?

1층은 군사서적을 전문적으로 취급하고 2층에는 좀 요상한(?) 책들이 같이 섞여 있었습니다.


이건 1층입니다.


조금 썰렁한 여기가 2층입니다.

하지만 그 후로 세 번 더 가 보니 상당히 흥미로운 책들이 많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중국어 학습에 대한 의욕을 불태우게 하더군요.

해방군 직영서점이 좋은 점은 모든 서적을 10% 할인해 준다는 점 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더해서 영수증을 출력해주는 도트 프린터의 출력음도 정겹더군요.

그 외에 베이징 시내의 대형 서점들은 모두 규모가 제법 있는 군사서적 코너를 갖추고 있어서 군사관련 서적을 구하기는 매우 쉽습니다. 몇몇 서점은 회원카드가 있으면 책에 따라 20% 까지 할인을 해 주더군요.


그리고 중국은 일반 대학에서도 군사사 연구가 활발하기 때문에 해방군 서점에서는 못 구하고 일반 서점에서만 구할 수 있는 군사서적도 제법 있었습니다.

일반 대학 출판부에서도 군사사 서적을 많이 출간할 정도로 연구가 활발하다는 점은 굉장히 부러웠습니다. 중국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점이 아닐까 싶군요. 앞으로는 중국어를 더 공부해서 기회가 되는 대로 책을 사러 중국에 갈 계획입니다.

다녀왔습니다.

토요일 오후에 귀국했습니다.

중국은 처음에는 큰 기대를 하지 않고 갔지만 시간이 지날 수록 멋진 점이 많은 곳이었습니다. 역시 편견은 좋지 않은 것이더군요.

중국에 있는 동안 Blogspot이 전혀 접속이 되지 않아 뭔가 쓰려고 해도 쓸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 귀국을 했으니 썰렁한 글로 도배질을 재개할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