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월 30일 일요일

의욕상실

무장친위대 출신의 군사 저술가인 빌헬름 티케(Wilhelm Tieke)는 2차대전에 관한 출중한 저작들을 많이 남겼습니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많은 분들이 잘 아시는 SS 2기갑군단사가 있지요. 티케는 자신이 실제 참전자이다 보니 전쟁의 다양한 측면을 잘 이해하고 있고 그래서 더 훌륭한 저술가가 아닐까 생각이 됩니다. 티케는 베를린 전투를 다룬 저작, Das Ende zwischen Oder und Elbe : Der Kampf um Berlin 1945에서 전쟁중에 생산된 문서자료에 대해 날카로운 지적을 하나 하고 있습니다.

베를린을 둘러싼 최후의 전투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책이 나와 있지만 그 대부분은 아돌프 히틀러와 수상관저를 둘러싼 사건들을 다루었을 뿐이다. 전선에서 벌어진 혼란스러운 전투를 시간의 경과에 따라 치밀하게 다룬 책은 단 한 권도 없었는데 이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나는 이것을 해 보기로 했다.

얼마전 미국에서 프라이부르크(Freiburg)에 있는 연방문서보관소-군사분과(Bundesarchiv-Militärarchiv)에 반환한 바익셀 집단군(Heeresgruppe Weichsel)과 그 집단군에 배속된 야전군의 자료들은 큰 도움이 되었으며 이 책에 광범위하게 인용되었다. 이렇게 해서 전투의 경과를 하루 단위로 서술할 수 있었으며 여기에 참전 군인들의 구술자료가 추가되었다. (독일과 소련) 양측의 지휘관들과 병사들이 공식적으로 또는 비공식적으로 남긴 회고록과 기록들도 도움이 되었다.

그렇지만 기록들이 항상 정확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이 저작도  완벽하게 정확하다고 주장할 수 없을 것이다. 내 개인적인 경험을 보면, 특히 전쟁 말기의 군부대 일지들(Kriegstagebücher)의 경우 허위로 기록되는 경우가 간혹 있다 보니 “적의 완강한 저항에도 역습에 성공했다”고 되어 있지만 실제로 역습 같은 것은 시작도 하지 않은 일도 있었다.

Wilhelm Tieke, Das Ende zwischen Oder und Elbe : Der Kampf um Berlin 1945(Motorbuch Verlag, 2.auflage, 1992), s.9

무장친위대 조차도 전쟁 말기에는 죽기가 싫어서 하지도 않은 공격을 했다는 허위보고를 하는 경우가 꽤 있다는 이야기죠. 사실 이런 종류의 군대 비화는 어느 나라나 다 있습니다만. 하여튼 티케는 역사서술에 있어 아주 중요한 문제 한가지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자료에 대한 충실한 검토와 비판입니다.

재활용

얼마전에 읽은 스페인 내전에 대한 논문에 아주 흥미로운 내용이 있었습니다. ‘비교적’ 유사한 구성원들로 이루어진 사회에서 내전이 일어날 경우 일어나는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가장 재미있는 부분을 직접 인용해 보겠습니다.

내전에서 어느 한 쪽이 인력자원을 상실하는 것은 다른 쪽이 인력자원을 얻을 가능성을 뜻했다. 국민파는 공화파의 포로나 투항자 중 절반 정도가 국민군에 복무해도 될 정도로 믿을 만 하다고 여기고 있었다. ‘재활용’은 국민군이 새로운 병력을 얻는데 매우 효과적인 방법으로 드러났다. 이렇게 ‘재활용한’ 병력은 독일과 이탈리아, 그리고 모로코 용병들과 함께 국민군이 징병해야 할 인력을 줄일 수 있도록 했다. 국민군은 진격할 때 마다 편을 바꿀 가능성이  있는 공화군 포로를 잡아들여 여분의 인력자원을 꾸준하게 확보할 수 있었다.

1937년 9월, 국민군 총참모부는 병력과 저렴한 노동력을 더 확보하기 위해서 포로수용소장 마르틴 피닐로스(Martin Pinillos) 대령에게 “신규 노동대대의 편성을 시작하기 위해 포로의 신속한 등급분류를 실시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분류는 다음과 같이 문자를 붙이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국민파의 대의에 충성’하는 것으로 간주되면 A, ‘(국민파의 대의에) 적대적이고 반대하는 것이 분명한’ 것으로 간주되면 B, ‘유죄’이며 법적 처리를 받아야 하는 포로들의 경우 범죄가 ‘경미할’ 경우에는 C, ‘심각할’ 경우에는 D로 분류되었다. 마지막으로 위에서 언급한 네 가지 분류에 해당되지 않으면서 그 충성심도 의심스러운 경우에는 ‘의심스러운 A’로 분류되었다. 이렇게 분류한 결과는 놀라운 것이었는데 공화파 포로 중 무려 50퍼센트가 A, 20퍼센트가 ‘의심스러운 A’, 20퍼센트가 B에 해당됐다. C와 D는 합쳐서 전체 포로의 10퍼센트에 불과했다. 이것은 국민군이 거의 절반에 달하는 공화군의 포로를 자기 편으로 ‘재활용’ 할 수 있었다는 것을 뜻하며 의심스러운 A와 B로 분류된 포로는 노동대대에 배치되었다.

또한 이 통계는 공화군 병사의 상당수가 자신의 안위가 위협을 받을 때는 편을 바꿀 수 있을 만큼 충성심이 약했다는 가설을 뒷받침 한다. 스페인 내전 전시기의 통계 자료는 없지만 국민군은 1937년 말 까지 107,000명의 공화군 포로를 잡았다. (이 중에서) 거의 59,000명이 곧바로 국민군에 입대했으며 약 30,000명은 노동대대에, 거의 12,000명 정도가 재판에 회부되었다. 나머지 6,000명은 이 보고서가 작성될 때 까지 아직 분류가 되지 않은 상태였다. 1937년 가을, 아스투리아스(Asturias) 전역이 끝나갈 무렵 국민파는 다음과 같은 선전을 했는데 사실 이것은 많은 공화군 포로들의 현실을 정확히 설명했다고 할 수 있었다.

“우리는 거의 10만명의 포로를 잡았다. 아스투리아스 점령이 끝나갈 무렵 우리는 거의 7만명의 포로를 잡았는데 이들 중 대부분은 수일 내로 우리의 군인이 될 것이다.”

데 라 시에르바(De la Cierva)는 이중에서 대략 2/3이 1938년에 국민군으로 싸웠다고 추정했으며 인민군에 있었을 때와 ‘비슷한 정도의’ 전투력을 발휘했다고 보았다.

개별 모병소(Cajas de Recluta)의 보고서도 (위에서 언급한 것과) 비슷한 수준으로 전향이 이루어 졌음을 보여준다. 1937년 10월에서야 북쪽에 있던 공화파의 마지막 거점이 국민군에게 함락되었다. 그러나 북부전역이 진행되는 동안 함락된 산탄데르(Santander)의 모병소는 이미 9월 10일 부터 업무를 시작해 얼마전 까지 공화군에 있던 병사들을 국민군 일선 부대로 보내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1938년 5월의 보고서를 보면 부르고스(Burgos) 한 곳 에서만 15,000명을 ‘재활용’ 했다고 한다. 1938년 7월 14일 부터 20일 까지 단 일 주일간 사라고사 한 곳에서만 ‘적군 소속이었던’ 345명을 국민군에 입대시켰다. 마찬가지로, 바야돌리드(Valladolid) 에서는 같은해 7월, 단 10일 동안 246명을 모집했다.

공화군 병사로서 국민군에 사로잡힌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그들이 어떤 정파에도 속해 있지 않고 A로 분류될 경우 아주 빠르게 편을 바꿀 수 있었다고 회고한다. 예를 들어 루이스 바스티다(Luis Bastida)는 공화파 북부군에 복무하다가 1937년 말 국민군의 포로가 되었다. 바스티다는 두 달도 채 되지 않아 국민군 제35 ‘메리다’ 연대에 입대해 갈리시아(Galicia)의 비고(Vigo)에서 복무하게 되었다.

“우리는 사상을 바꾸지 않고도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진영, 군대, 군복, 군가, 그리고 깃발을 바꾸었다. 대단한 기록이었다.”

놀랍게도 바스티다는 국민군 소속으로 공화군 포로들을 감시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는 아이러니하다는 듯이 기록했다.

“나는 회색 상의와 카키색 바지의 국민군 군복이 우리의 모든 과거를 덮어 버리는 것을 목격했다.”

일부 병사들은 너무 빨리 편을 바꾸는 통에 황색과 적색의 왕당파 깃발에 충성을 서약할 시간도 없었다.

James Matthews, “'Our Red Soldiers': The Nationalist Army's Management of its Left-Wing Conscripts in the Spanish Civil War 1936-9”, Journal of Contemporary History Vol 45 No 2(2010), pp.354~356

이미 국민국가를 형성한 단계에서 내전이 일어나면 적과 아군을 구분하는 것이 매우 골치 아파집니다. 약간의 예외를 제외한다면 어차피 전쟁이 끝나면 다시 하나의 국민으로 편입될 존재들이기 때문에 적이라는 기준을 적용하는 것이 아주 애매해 지지요. 물론 독소전쟁의 경우 처럼 다른 국가와의 전쟁에서도 ‘재활용’이 이루어 지는 경우 많긴 합니다만 내전 처럼 간단하고 신속하게 이루어지지는 못하지요. 어찌 보면 사상적 균열이 꽤 심각한 문제이긴 합니다만 같은 사회구성원간의 내전에서는 의외로 쉽게 덮어버릴 수 있는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언어와 문화가 유사한 집단에서 특별한 표시가 없다면 그 사람이 빨갱이인지 파시스트인지 구분하기란 꽤 어렵지 않겠습니까?(반대로 독일과 소련이라면 그 문제는 훨씬 쉽겠지요)  

많은 분들이 아시겠지만 한국전쟁 당시 남한과 북한도 비슷한 일을 했습니다. 특히 인력이 부족하던 북한은 한국군 포로를 대규모로 인민군에 편입시켰지요. 한 기록에 따르면 북한은 휴전 직전 13,094명의 한국군 포로를 억류하고 이중 6,430명을 인민군에 편입시켰다고 합니다.1) 한국전쟁 당시 중국군의 포로가 되었던 박진홍 교수의 회고록을 보면 포로 송환 당시 한국군에서 인민군에 편입된 포로가 침통한 표정으로 가족에게 안부를 전하는 이야기가 있기도 합니다.2)

어쨌든 동일한 사회적 집단, 특히 민족이라는 집단의 테두리 내에서는 균열을 완전히 봉합하지는 못하더라도 적당히 은폐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우리 주변에서도 친인척이 과거 ‘빨갱이’나 ‘친일파’ 였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서 충격을 받는 경우가 종종 있지요. 스페인 내전 당시 상대방의 포로를 전향시키는 과정을 보고 우리의 과거가 겹쳐지는 것 같아 아주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1) 션즈화/최만원 역, 『마오쩌뚱, 스탈린과 조선전쟁』(선인, 2010), 413~414쪽
2) 박진홍, 『돌아온 패자 : 북한 포로수용소, 그 긴 전장을 가로지른 33개월의 증언』(역사비평사, 2001), 177~178쪽

2011년 1월 24일 월요일

어떤 정치인의 기록정신


언제나 그렇듯 밀린 RSS피드를 확인하다 보면 며칠 지난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접하게 됩니다. 뉴욕타임즈 1월 19일자에서는 2003년 이라크에서 노획한 이라크 정부 자료 몇 건을 공개했는데 이게 꽤 재미있습니다.

관련기사 : Hussein Wanted Soviets to Head Off U.S. in 1991

이 기사와 함께 영어로 번역된 노획자료도 함께 실렸습니다.  위기 상황에서 고르바초프에게 중재를 요청했다가 강대국 정치의 쓴맛을 제대로 맛보는 후세인의 모습을 보니 안구에 습기가 차는 동시에 만약 우리가 저 꼴이 나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등골이 서늘해 집니다;;;;

뉴욕타임즈가 공개한 번역문을 읽다 보니 재미있는 구절도 눈에 띄는데 특히 사담 후세인의 투철한 기록 정신이 재미있군요. 걸프전쟁 당시 후세인과 이라크 공보장관 하마디(Hamid Yusuf Hammadi) 간에 이런 대화가 오고 갔다고 합니다.(이 문서의 10쪽을 보십시오)

후세인 : 전쟁 중인 만큼, 중요한 문서들은 두 개의 사본을 만들어서 각기 다른 두 군데의 장소에 보관해야 하네. 만약 여기가 폭격을 받거나 불에 타버리면 어쩌겠는가.

하마디 : 각하. 저는 서류보관함과 금고를 하나씩 가지고 있습니다.

후세인 : 하지만 아직 한 군데에 있지 않은가. 두 개의 사본을 각기 다른 두 군데의 장소에 보관하도록 하게.

하마디 : 알겠습니다. 각하.

후세인 : 이런 자료들은 반드시 최소 두 개의 사본이 있어야 하네. 하나는 대통령궁으로 보내고 다른 하나는 자네가 보관하도록 하게.

하마디 : 알겠습니다. 각하.

히틀러도 그랬지만 이런 자료들을 남겨주는 독재자들은 호사가들에게 고마운 존재입니다. 만약 후세인이 스탈린 처럼 기록을 남기는 걸 싫어하는 인간이었다면;;;;

『갈등하는 동맹』의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기에 대한 서술

2010년 봄에 역사비평사에서 낸 『갈등하는 동맹 - 한미관계 60년』을 읽는 중 입니다. 책이 나왔을 때 한번 읽어보라는 이야길 듣고 사놓긴 했는데 달력이 완전히 넘어가고 나서야 읽게 되었습니다;;;; 이 책은 원래 『역사비평』에 연재된 글들을 정리해서 단행본으로 엮은 것인데 이승만 정부에서 노무현 정부까지의 한미관계를 간략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진보적인 학계가 한미관계에 대해 가진 시각을 살펴보는데 도움이 되는 저작입니다.

이 책의 가장 큰 문제는 가까운 현재를 보는 시각인 것 같습니다. 김대중 정부 시기를 맡은 필자는 박건영과 정욱식이고 노무현 정부 시기를 맡은 필자는 박선원인데 특히 박선원은 노무현 정부에서 통일안보전략비서관이었습니다. 애시당초 객관적인 평가가 불가능한 인물들을 필자로 선정한 셈이지요. 이들은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기 한미관계의 갈등은 물론 북핵위기의 원인을 모두 부시 행정부와 네오콘 집단에 돌리고 있습니다. 부시 행정부의 대북정책이 경직성과 전략적 오판이라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겠습니다만 작년 말 북한의 우라늄 농축시설 공개에서 드러난 것 처럼 모든 책임을 부시행정부와 네오콘에게 전가하는 것은 공정하지 못한 태도 같습니다.

특히 이런 점은 제2차 북핵위기에 대한 정욱식과 박선원의 서술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정욱식과 박선원은 부시 행정부와 네오콘이 북한의 우라늄 계획에 대한 정보가 불완전한 상태에서 무리하게 압박을 가해 북핵위기를 고조시켰다고 비판합니다. 하지만 2010년 말 북한의 우라늄 농축시설 공개에서 드러난 것 처럼 북한의 우라늄 계획은 장기간에 걸쳐 치밀하게 진행된 것 입니다. 특히 박선원의 글은 노무현 정부의 외교안보 정책을 변호하기 위해 쓰여졌기 때문에 더 불편합니다. 실패한 정책에 대한 변명과 책임전가처럼 불편한 것은 없지요.

하지만 김대중-노무현 정부에 대한 서술을 제외하면 개설서로 무난하다고 생각됩니다.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분들에게는 불편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2011년 1월 11일 화요일

抗日奇侠

중일전쟁에 대해 검색하던 중 왠지 재미있어 보이는 동영상이 하나 걸렸습니다;;;;;

대충 보아하니 무공으로 일본군을 파리잡듯 때려잡는 이야기인데 깔깔대며 보기에 좋을 듯 싶습니다.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6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연재에 앞서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0

1. 테렌스 주버vs테렌스 홈즈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1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2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3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4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5


다시 한번 훑어보니 2010년 10월에 1-5를 쓰고 두달이 훨씬 넘게 지났군요;;; 어쨌든 테렌스 주버와 테렌스 홈즈의 대결은 계속됩니다.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6


지난번 글에서 다룬 것 처럼 테렌스 홈즈는 2002년 War In History 9-1호에 발표한 “The Real Thing: A Reply to Terence Zuber’s ‘Terence Holmes Reinvents the Schlieffen Plan’”을 통해 주버의 반론을 다시 한번 비판합니다. 이에 대해 주버도 다시 재반론을 준비하고 이것을 2003년 War In History 10-1호에 Terence Holmes Reinvents the Schlieffen Plan – Again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했습니다.

주버는 먼저 “슐리펜 계획에서 파리 서쪽으로 대규모 우회 기동을 실시하는 것은 고정적인 요소가 아니라 프랑스군 주력이 서쪽으로 성공적으로 철수할 경우 어쩔 수 없이 취해야 하는 것” 이었다는 홈즈의 주장을 비판합니다. ‘슐리펜 계획’이 실재했던 작전계획이라는 전통적인 학설들은 모두 퇴각하는 프랑스군을 추격해 파리 서쪽으로 우회기동 할 것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글에서 주버가 가장 공들여서 비판하고 있는 부분은 이른바 “실재하지 않는 부대”들의 존재입니다. 홈즈는 “The Real Thing: A Reply to Terence Zuber’s ‘Terence Holmes Reinvents the Schlieffen Plan’”에서 슐리펜의 1905년 비망록에 나타나는 편성되지 않은 부대들은 전시에 편성될 부대였기 때문에 큰 문제는 없다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하지만 주버는 이 점이야 말로 “슐리펜 계획이 실제 작전 계획인 것 처럼 조작하려 한 쿨, 그뢰너, 푀르스터 등의 논리에 홈즈가 말려든 것”이라고 비판합니다. 주버는 전시에 동원되는 군단들, 이른바 “Kriegskorps”는 편성할 당시 부터 문제가 많았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Kriegskorps”가 처음 편성된 것은 1902년이라고 합니다. 1902년에 독일 육군을 증강해야 한다는 슐리펜의 주장에 따라 1902년에 21, 22, 23, 24, 그리고 근위예비군단 등 5개의가 편성된 것 입니다. 하지만 새로 전쟁상으로 취임한 아이넴(Karl Wilhelm Georg August Gottfried von Einem)은 Kriegskorps에 대한 평가를 지시했고 그 결과 전시동원에 필요한 장비가 부족하다는 점 때문에 Kriegskorps를 해체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게 됩니다. 하지만 슐리펜이 모든 Kriegskorps를 해체하는데 반대했기 때문에 23, 24군단만 해체되었습니다. 주버는 3개의 Kriegskorps가 이미 1902년 부터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1906/07년 전개계획에서 이 3개 군단이 포함되었다는 푀르스터의 주장을 그대로 반복한 홈즈는 설득력이 없다고 강조합니다.
한편, 지난번 글에서 살펴본 것 처럼 홈즈는  “The Real Thing: A Reply to Terence Zuber’s ‘Terence Holmes Reinvents the Schlieffen Plan’”에서 슐리펜이 서부전선에 대한 1904년의 첫번째 참모부연습에서 아직 편성되지 않은 가상의 13개 사단을 동원한 점을 지적하면서 (전시 동원을 고려했을 경우) 실제 전쟁계획에서도 아직 편성되지 않은 사단을 포함시키는 것이 이상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하지만 주버는 슐리펜이 실제 워게임에서 아직 편성되지 않은 부대를 포함시킨 것은 극히 예외적인 경우라고 강조합니다. 그리고 전시에 편성되는 부대들은 즉시 동원 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점도 함께지적하고 있습니다.
다음으로는 슐리펜이 1905년 비망록에서 당시 독일군의 병력이 부족하다고 지적한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홈즈는 “The Real Thing: A Reply to Terence Zuber’s ‘Terence Holmes Reinvents the Schlieffen Plan’”에서 슐리펜은 독일군의 병력이 부족하지만 8개의 보충군단이 편성되면 작전이 실행 가능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주버는 이에 대해 슐리펜이 실제로 이런 생각을 했다는 근거는 희박하다고 비판합니다. 주버는 홈즈가 단지 게르하르트 리터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여 8개 보충군단 문제를 제기했을 뿐이며 리터의 주장도 잘못된 것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주버는 양면전쟁과 러시아군의 전력 문제를 다시 언급합니다. 홈즈는 “The Real Thing: A Reply to Terence Zuber’s ‘Terence Holmes Reinvents the Schlieffen Plan’”에서 슐리펜은 러시아군이 동원가능한 병력의 규모보다는 러시아군의 질에 관심을 기울였기 때문에 러일전쟁으로 러시아군이 약체화된 상황에서 러시아의 공세능력을 과소평가한 것은 당연하다고 강조했습니다. 하지만 주버는 러일전쟁에도 불구하고 1905-1906년 시점에서 러시아군의 주력은 유럽지역에 동원 가능한 상태였다고 지적합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서부전선에 주력을 돌리게 된다면 러시아군의 질적 수준이 아무리 형편없더라도 텅 빈 동프로이센을 점령하는 것은 문제도 아니었을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한편, 홈즈는 모로코 위기 당시 수상이었던 뷜로(Bernhard Fürst von Bülow)가 슐리펜의 평가를 받아들여 러시아의 강경 대응 가능성을 낮게 평가했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주버는 이에 대해 모로코 위기를 초래한 뷜로가 러시아의 강경 대응 가능성을 낮게 평가하면서도 한발 물러선 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 묻고 있습니다.

다음으로는 홈즈의 1904년과 1905년의 서부전선에 대한 참모부연습에 대한 해석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주버는 홈즈가 ‘1905년 비망록’이 실제 전쟁계획이라는 가정을 하고 참모부연습을 해석하는 귀납적 오류를 저질렀다고 비판합니다. 주버는 먼저 1904년의 첫번째와 두번째 참모부연습과 1905년의 참모부연습에서 결전이 벌어지는 지역은 아르덴느와 로렌이었다는 점을 재차 강조합니다. 그리고 독일군의 우익으로 공세에 나서는 것은 1904~1905년에 이르러 형성된 개념이 아니라 그 이전 부터 검토되던 방안이었다고 지적합니다. 그리고 1910년 경에 이르면 프랑스의 대중 매체들 조차 독일군이 유사시 벨기에를 통해 공격해 올 것이라는 점을 인지하고 있었다는 점도 덧붙이고 있습니다. 주버는 만약 슐리펜이 이무렵 ‘슐리펜 계획’의 기본개념을 정립했다면 1904년과 1905년의 참모부연습에서 대규모 우회기동을 시험했어야 하는데 실제로는 그런 흔적이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고 봅니다. 주버는 오히려 슐리펜이 양면전쟁을 치르기 위해서 최대한 짧은 거리에서 결전을 벌인뒤 내선의 이점을 활용해 동부전선으로 병력을 돌린다는 생각만을 했다고 주장합니다. 주버는 그 무렵 슐리펜이 서부전선에서 신속한 승리를 거둔 뒤 동부전선으로 병력을 이동시키는 연습을 집중적으로 했다고 강조합니다.(이 문제는 주버의 단행본, Inventing the Schlieffen Plan에 더 자세히 언급되어 있으니 연재물에서는 이 단행본을 다룰 때 설명하겠습니다.)
그리고 주버는 1905년의 워게임에 대한 슐리펜의 논평 중 “Wir wurden demnach zu bekampfen haben…”이라는 구절의 해석 문제에 대해서는 자신의 해석이 옳다고 주장합니다. 슐리펜은 양면전쟁을 피할 수 없는 것으로 보았으며 홈즈는 단지 문법문제로 말꼬리 잡기를 하는 수준에 불과하다는 것 입니다.

그리고 주버는 홈즈가 첫 번째 반론이었던 “The Reluctant March on Paris: A Reply to Terence Zuber’s ‘The Schlieffen Plan Reconsidered’”에서 슐리펜의 후임이었던 소 몰트케가 1911년 슐리펜의 계획과 비슷한(akin) 계획을 채택했다고 지적한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합니다. 주버는 먼저 ‘슐리펜 계획’이 실재로 존재한 전쟁 계획이었다고 주장하는 전통적인 학설에서는 소 몰트케가 슐리펜 계획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고 설명하고 있음을 지적합니다. 즉 홈즈가 주장하는 것 처럼 소 몰트케가 1911년에 슐리펜 계획과 유사한 계획을 채택했다면 전통적인 학설과 충돌하게 되는데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하고 묻는 것 입니다. 다음으로는 홈즈가 두 번째 반론인 “The Real Thing: A Reply to Terence Zuber’s ‘Terence Holmes Reinvents the Schlieffen Plan’”에서 이 문제를 더 언급하지 않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akin’이라는 개념을 명확하게 설명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홈즈는 다음과 같은 예를 들고 있습니다. 1.슐리펜 계획에서는 우익과 좌익의 병력비율이 7:1인데 몰트케의 계획에서는 3:1이다. 2.슐리펜 계획에서는 우익에 82개 사단이 배치되는데 몰트케의 계획에서는 54개 사단만이 배치되어 있다. 3.슐리펜 계획은 서부전선에 병력을 집중하고 있는데 몰트케의 계획은 양면전쟁을 고려해 병력을 배치하고 있다.

주버는 마지막으로 슐리펜 계획은 프랑스군의 주력을 가능한한 파리-베르덩 사이에서 격멸할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고 파리 서쪽으로 대규모 우회기동을 실시하는 것은 프랑스군 주력이 성공적으로 퇴각할 경우 어쩔 수 없이 취해야 하는 방안이었다는 홈즈의 주장을 비판합니다. 하지만 주버는 전통적인 학설에서 슐리펜의 의도가 프랑스군 주력을 우회 기동으로 포위하기 위해서 파리 서쪽으로 대규모 우회기동을 취하는 것 이었다고 강조했음을 지적합니다. 주버는 홈즈가 슐리펜 계획이 실제 전쟁 계획이라는 자신의 주장을 강조하기 위해서 전통적인 학설에서 조차 일탈하는 오류를 저질렀다고 비판합니다.

2011년 1월 10일 월요일

국개론;;;;

60년대 잡지를 읽다가 재미있는 구절이 있어서 발췌해 봅니다.

무엇보다 가장 논난될 수 있는 일은 1948년의 한국 선거가 너무 ‘진보적’이었다는 것이다. 즉 투표에 있어 판단능력이 없는 사람들에게 선거권을 주었다는 사실이다. 즉 문맹도의 기준을 문자해독에 두는 것은 국어교육에서 할 일이고 정치에서는 사리판단이 문맹도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 더욱이 정치적 사리판단이란 사람을 죽였는데 그것이 옳은가, 나쁜가의 판단과 같이 간단히 되는 것이 아니다. 일반적인 지식 뿐만 아니라 정치적 교육이 필요한 것이다. 일제의 제한된 식민지 교육에서 그러한 정치적 판단능력이 기루어 질 수 없었음은 물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한번에 바로 보통선거제를 채택하였다. 한걸음 더 나아가 남녀평등이라고 하여 여성에게도 무제한 선거권을 주었으나 당시 정치가나 입법자의 이상적 기질은 대단하였던 모양이다. 아니면 여성 득표공작의 안이성을 고려한 manipulation이었던가. 프랑스에서 보통선거제가 안정된 것은 대혁명을 거친 훨씬 뒤였으며 영국에서는 1832년, 1847년의 선거법개정 이후에야 되었으며 여성참정은 모두 20세기에 들어와서 실현되었고 瑞西(스위스)의 일부에서는 아직 여성참정권이 거부되고 있다. 그 중요한 이유의 하나가 여성은 자기의지가 박약하여 남의 의사에 따른다는 것이다. 구주에서는 성직자의 영향을 배제해야 한다는 이유를 공언하고 있다. 이러한 선거민이 있는 곳에 비합리적인 통치자가 등장하기 쉬운 것이다. 자유당이 붕괴하고 이승만씨의 단점이 내외에서 폭로되기까지 사실상 그의 mana를 많은 국민이 믿고 있지 않았던가.

한국에서의 투표율이 대체로 80%~98%에 이르렀다고 해서 국민의 정치적 수준이 높다고 평가하는 것은 아전인수격이다. 이것은 민주주의를 반드시 계수로 표시해야만 만족하는 부류의 순진성일 따름이다. 투표율이 높은 것을 탓하는 것이 아니며 선진국에서 투표율이 약 60~70%된다고 해서 그 정도가 이상적이라는 말도 아니다. 99.9%의 투표율과 98%의 지지율을 공표해야 자기의 통치가 체면이 서는 것으로 생각하는 전체주의적 민주주의 사고방식에 빠져서는 안된다는 것을 다만 말하고 싶을 따름이다. 물론 투표율이 줄어서 50% 이하로 내려가는 것은 우려할 사태이다. 이것은 분명히 민주주의적 기반을 위태롭게 한다. 그런데 한국에서 보통 90% 정도의 투표율을 보이다가도 가끔 50% 미만의 사례도 나오니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 국민이 갑자기 무관심의 경향을 나타내었던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지만 달리 생각하면 높은 투표율 가운데 이미 무관심의 투표가 항상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이 무관심은 단순히 붓대를 눌러 동그라미를 치고서는 어디다 눌렀는지 기억조차 못하는 그런 것도 있고 또 정치적인 관심은 없으나 받은 것이 있으므로 일종의 계약 이행으로서 투표하는 그런 것도 포함해야 할 것이다. 혹은 이른바 준봉(遵奉)투표라는 것도 있었다. 관권에 스스로 압복(壓伏)되거나 혹은 관의 투표에 대한 지시에 순종하는 것이다. 여기에다가 선거시의 테로 행위는 살상가상격이었다. 이러한 현성이 선거를 통한 정권교체를 가능하게 하지 않았다. 도시의 중산층이나 지식층이 아무리 정부와 여당의 횡포에 대해서 투표로서 항의하고 투표함을 사수하고 해도 그외의 다수인구가 횡포한 권력의 지지세력(?) -엄밀히 말하면 투표수-으로 남아 있는 한 정권교체는 될 수 없었던 것이다. 선거가 정권교체만을 위하여 있는 것은 아니나 교체가 있어야 마땅한 지경에서 선거가 아무런 역활을 할 수 없다면 그러한 선거는 ‘하나 마나’인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에서 처음부터 5대원칙에 입각한 선거제도를 채택했던 것은 잘못이었다고 밖에 할 수 없다. 정부 수립이래 여러번 치루었던 선거가 한결같이 기존 집권자의 승리로 끝났는데 앞으로도 얼마간이나 이러한 현상이 되풀이 될지 알지 못한다.

裵成東, 「제도와 상황의 거리 : 한국의 두 정치제도에 대한 역사적 비판」『靑脈』11호(1965. 8), 110~111쪽

*필자인 배성동은 서울대 교수, 11,12대 국회의원(민정당), 명지대 북한학과 교수를 거쳐 현재는 한국학중앙연구원 이사장으로 재직중입니다.

이 글에 대한 제 개인적은 감상을 이야기 하라면 ‘투표란건 원래 그런게 아닐까’ 입니다. 

50~60년대의 지식인들이 자유당이나 공화당이 계속 집권하는 꼴을 보면서 울화통이 터지는 것을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닌데 어쨌든 간에 결정적인 순간에는 그놈의 보통선거가 이승만이나 박정희에게 타격을 주었으니 말입니다.

2011년 1월 8일 토요일

기병에 관한 한국 전통군사사 논문 한 편

한국 전통군사사에 대한 논문을 한 편 읽었습니다. 저자는 여기 들러주시는 분들이라면 다들 아실만한 바로 ‘그 분’입니다. 사실 19세기 이전 군사사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거의 없지만 매우 흥미롭게 읽은 논문이기에 짧은 평을 하고 싶습니다. 이 논문을 읽을 기회를 주신 필자께는 죄송하게도 도움이 될 만한 평이 못 되는게 아쉽습니다.

이 논문의 제목은 「한국사에 있어서의 기병 병종」으로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 한국의 기병 병종에 대해 통사적인 접근을 하고 있습니다. 필자께서 처음 논문을 보내주셨을 때 이 글에서 다루고 있는 범위가 매우 방대해서 놀랐습니다만 내용을 철저하게 기병 병종의 분류에 맞췄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밀도가 있다는 느낌이 들었고 글도 상당히 재미있었습니다.
논문은 부록을 포함해 90쪽이고 짧은 단행본 한 권으로 만들어도 될 정도입니다. 아마 필자께서도 글을 쓰시는 동안 글의 분량에 상당한 신경을 쓰셨을 것 같은데 독자의 입장에서는 적당했다고 생각이 됩니다.

이 글의 구성은 머릿말과 맺음말을 제외하고 크게 여섯 부분으로 나뉩니다. 먼저 2장에서는 이 논문의 근간을 이루는 기병 병종의 기본 개념을 다루고 있습니다. 필자는 여기서 서구의 중기병과 경기병이라는 구분을 한국사에 적용하기가 어렵다고 지적하고 그 대신 사용하는 장비와 전술의 성격에 따라 창기병과 궁기병이라는 분류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물론 말에도 갑옷을 입히는 중장기병은 다른 병종과 확실히 구분할 수 있는 기준이 있으므로 중장기병이라는 개념은 그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외국에서 사용하는 개념을 빌려오지 않고 한국의 역사적 상황에 맞는 개념을 고민했다는 점에서 높게 평가합니다.

다음의 3장에서는 한반도와 만주지역에 기승문화가 도입된 시점부터 삼국시대 까지의 기병 병종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고대의 문헌사료가 부족한 만큼 고고학의 연구성과를 풍부하게 반영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자료의 공백이 많은 시기인 만큼 논리를 전개하는데 어려움이 많을 수 밖에 없는데 필자는 중국 등 동시기 다른 지역과의 비교 분석을 통해 접근하고 있습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필자가 기승문화의 확산 시점을 추정하면서 마구의 기술적인 수준 보다는 말을 대량으로 사육할 수 있는 사회경제적 기반에 주목하고 있다는 점 입니다. 이 주장은 주로 문헌자료에 바탕을 하고 있는데 상당히 재미있는 가설이라고 생각됩니다.
그 다음으로는 삼국시대 기병 병종의 분화를 분석하기 위해 이 글에서 사용하는 구분의 기준이 되는 전투용 활과 기병창, 그리고 말의 품종과 마구의 발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특히 마구의 발전에 대한 부분에서 중국은 물론 같은 시기 유럽(로마)과의 비교 분석이 돋보입니다. 필자는 이러한 분석을 통해 삼국시대의 기병 병종을 중장기병, 창기병, 궁기병이라는 세 종류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4장에서는 삼국시대의 중장기병에 대해 분석하고 있습니다. 논문이 전체적으로 시기적 구분을 채택하고 있는데 비해 4장에서만 특별하게 삼국시대의 중장기병이라는 하나의 병종에 대해 상당한 분량을 할애해 분석하고 있는 것은 다소 의외입니다. 이 부분에서 주목할 만한 부분은 한반도 내에서의 중장기병 운용 방식에 대한 추정입니다. 필자는 한반도의 산악지형과 열악한 도로 환경 때문에 중장기병이 소규모로 성곽을 거점으로 한 제한적인 범위 내에서 운용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5장은 고려시대의 기병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헌사료의 부족과 고고학적인 자료의 부족 때문인지 그 분량은 고대나 조선시대에 비해 적습니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원간섭기 이후 몽골의 영향으로 궁기병의 비중이 늘어났을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 입니다. 이것은 조선 초기의 기병운용과 내용적으로 연결이 되는데 뒷받침 할 수 있는 자료가 더 풍부하다면 상당히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6장은 조선초기의 기병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6장 부터는 풍부한 문헌사료를 바탕으로 보다 밀도있는 서술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고대에서 고려시대 까지는 문헌사료의 부족으로 많은 부분을 고고학적인 자료나 다른 지역과의 비교를 통해 논리적인 추론을 해야 하는데 조선시대는 상대적으로 문헌자료가 풍부하다는 점 때문에 이런 제약에서 자유로운 것 같습니다.
6장에서 흥미로운 것은 조선초기에는 궁기병과 창기병이라는 2원적 체제에서 16세기에 이르면 사실상 궁기병 중심의 체제가 완성되었다는 지적입니다. 필자는 이미 5장에서 원간섭기 이후로 궁기병의 비중이 늘어났을 가능성을 제시했으며 조선초기도 문헌사료를 통한 분석으로 궁기병이 다소 많은 비중을 차지했다는 점을 밝히고 있습니다. 여기에 더해 16세기까지 창기병이 꾸준히 쇠퇴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었다는 주장은 상당히 흥미롭습니다. 필자는 15세기를 거치면서 기병의 훈련 체계와 선발체계에서 기병창 보다 활을 중요시 하는 경향이 강해졌다는 점을 밝혀내 궁기병 중심으로의 전환을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약간 아쉬운 점 이라면 왜 궁기병을 선호하는 경향이 강해졌는지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다는 것 정도입니다. 또한 안정적인 말 공급기반의 쇠퇴가 기병의 점진적인 쇠퇴를 가져왔다는 주장도 매우 흥미롭습니다. 이것은 7장에서 다루고 있는 조선 기병의 쇠퇴와 내용적으로 연결이 된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7장은 임진왜란 이후 조선 기병의 쇠퇴를 다루고 있습니다. 필자는 임진왜란 이후 전술이 보병 중심으로 전환하면서 군사력을 재건하는 과정에서 기병의 우선순위가 밀리게 되었다고 주장합니다. 조선후기 기병의 변화에서 제 개인적으로 재미있었던 내용은 근접전 능력 향상을 위해 편곤 사용이 확대되었고 18세기 초에 창설된 평안도의 별무사의 경우 하마전투를 고려해 조총도 사용하게 되었다는 부분입니다.
7장에서는 상당한 분량을 할애해 조선 기병의 질적ㆍ양적 쇠락을 중요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여기서 아쉬운 점은 조선 후기에 기병이 쇠퇴하게 되었다는 설명은 있으나 구체적인 원인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설명이 부족하지 않은가 하는 점 입니다.

유감스럽게도 제가 전통 군사사에 대한 지식과 이해가 부족해 논문에 대한 대략적인 평 밖에 할 수 없었지만 상당히 인상깊은 논문이었습니다. 무엇보다 기병 병종에 대한 통사적인 접근을 시도하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다른 연구자들의 연구에도 많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특히 이 글에서 필자가 제시한 몇몇 독특한 논점들은 후속 연구에 영향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The American Way of War!?

알맹이 없는 잡담 하나 더.

바로 앞의 ‘창군초기 한국군의 사격군기 문제’라는 글에서는 한국군의 사격 군기 결에 대한 미국 군사고문단의 비판을 다뤘습니다. 뭐, 사격군기 결여는 사실 지휘관들도 경험이 부족하고 사병들도 훈련이 부족한 군대라면 어쩔 수 없는 현상이긴 합니다만 외국인들의 신랄한 비난은 약간 씁슬하긴 하지요.

한편, 20세기 중반에 한국인이 사격군기가 결여되어 있다고 까대던 미국인들도 100년 전에는 유럽 사람들에게서 마찬가지로 까이고 있었습니다. 남북전쟁이 벌이지자 영국, 프랑스, 프로이센 등 유럽의 열강들은 연방과 남부연합 양측에 관전무관들을 파견해 전술과 군사기술을 관찰했습니다. 뭐, 많은 분들이 잘 알고 계시겠지만 이 시기 유럽인들은 미국의 아마추어들이 벌이는 전쟁을 다소 낮춰보고 있었다지요.

영국 육군의 플레처(Henry Charles Fletcher) 중령은 연방군의 전투 방식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고 합니다.

“경험이 부족하고 훈련이 덜 된 부대가 그렇듯이 병사들은 총을 많이 쏘지만 몸을 일으켜 세우려 하지 않으며...  이 때문에 먼 거리에서 너무나 많은 화약을 낭비하고 있고... (적에게) 별다른 피해를 입히지 못하고 있다.”1)

이런 견해는 다른 나라의 관전 장교들에게서도 나타납니다. 프로이센 육군의 샤이베르트(Justus Scheibert) 대위도 플레처 중령과 마찬가지로 연방군이 전투시 원거리에서 부터 총을 쏴대며 화약을 낭비하는 경향이 강했다고 비판했습니다.2) 19세기 영국의 유명한 군사이론가였던 헨더슨(G. F. R. Henderson)은 아예 연방군과 남부연합군 양쪽 모두 탄약을 막대하게 낭비했다고 노골적으로 비판하기도 했다지요.3)

물론 탄약을 낭비하는 것은 별로 좋지 않은 일이겠습니다만 남북전쟁 당시의 미군, 즉 연방군은 한 가지 점에서는 100년 뒤의 한국군이나 남베트남군 보다 나았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바로 1860년대의 미국도 막대한 공업력을 가진 공업국가였다는 점 입니다.



1) Jay Luvaas, The Military Legacy of the Civil War : The European Inheritance(University Press of Kansas, 1988), p.16
2) Jay Luvaas, ibid., p.63
3) Robert H. Scales Jr, Firepower in Limited War(Presidio, 1995), p.3

2011년 1월 5일 수요일

창군초기 한국군의 사격군기 문제

번동아제님의 쌍령전투에 대한 글을 읽어보니 당시 조선군의 사격군기 문제가 언급되어 있어 꽤 흥미로웠습니다. 화약무기가 도입된 이후 사격군기는 한 군대의 훈련수준을 평가하는데 있어 중요한 요소가 되었습니다. 잘 훈련된 군대일수록 사격군기가 훌륭해서 함부로 탄약을 낭비하지 않지요. 아무래도 저는 근현대 군사문제에 관심이 많다 보니 창군초기 한국군의 사격군기와 관련된 이야기가 생각나더군요.

창군초기 한국군도 사격군기 문제가 심각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여순반란진압, 빨치산토벌, 38선 충돌 등 심각한 상황이 잇달아 발생했으니 탄약 소모가 심할 수 밖에 없었는데 여기에 사격훈련도 부족하니 불에 기름을 들이 붓는 격이었던 모양입니다.

1949년 여름 옹진반도에서는 연대급 부대가 동원된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고 탄약 소모는 심각한 수준이었습니다. 당시 미국군사고문단이 신성모 국방부장관에게 보낸 비망록을 보면 8월의 2차 옹진 반도 전투당시 한국군은 총1,022.276발의 각종 탄약을 사용해서 북한군 69명을 사살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북한군 한 명을 사살하는데 14,604발의 탄약을 소비했다는 이야기 입니다.1)

군사고문단장 로버츠 준장은 육군부 기획작전국장 볼테(Charles Bolte) 소장에게 보낸 보고서에서 이 문제를 다음과 같이 비판했습니다.

한국군은 작전 수행중에 탄약을 황당할 정도로 소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한국측의 요구대로 보급을 해 준다면 문제만 복잡해 질 뿐입니다. 저는 기본적인 문제, 바로 사격훈련과 사격군기의 결여에 봉착해 있습니다. 이 문제들을 해결하려면 헤프게 물자를 소비하는 한국측에게 탄약을 공급하는 것을 그만 둬야 합니다. 또한, 최근 옹진반도 전투에서 적이 입은 인명피해와 우리측이 소비한 탄약에 대한 조사를 보면 적 한명을 사살하는데 14,604발의 탄약을 소비했다는 점도 지적하고자 합니다.

(They burn up ammunition at a fantastic rate in operations, and to supply all their requirements only compounds the problem. I have hit at the basic difficulty - lack of marksmanship training and fire discipline - and if we are to get those problems licked, we must stop giving them ammunition with such a lavish hand. In passing, I should like to point out that in a recent battle on the Ongjin peninsula, a study of enemy casualties and our own ammunition expenditure showed that it took 14,604 rounds of ammunition to produce one casualty.)2)
이런 문제는 미국쪽만 지적한 것이 아닌것 같습니다. 한국군 참전자들의 증언에 크게 의존한 사사끼 하루다카(左左木春隆)의 저작에도 당시 옹진반도에 투입된 2연대의 전투시 탄약 낭비가 극심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3)

이 당시 한국군의 사격군기 문제의 중요성은 전술적인 수준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미국의 군사 원조가 제한적인 상태에서 보급문제를 더 악화시켰기 때문입니다.


1) Memorandum to Minister of National Defense(1949. 8. 17), RG 338, KMAG Box8 : Brig. General W.L.Roberts(Personal Correspondence), 1949; Birg. General W.L.Roberts(Meomorandum), 1949
6일 동안의 전투에서 2연대가 소비한 탄약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30구경 소총탄 288,071발
30구경 카빈탄 242,989발
30구경 자동소총탄 158,897발
30구경 기관총탄 223,502발
50구경 기관총탄 51,506발
45구경 권총탄 32,140발
2.36인치 로켓탄 634발
60mm 박격포탄 10,269발
81mm 박격포탄 8,696발
105mm 포탄 5,572발
2) 로버츠가 볼테에게(1949. 8. 19), RG 338, KMAG Box8 : Brig. General W.L.Roberts(Personal Correspondence), 1949; Birg. General W.L.Roberts(Meomorandum), 1949
3) 左左木春隆/姜昶求 編譯, 『韓國戰秘史(上) 建軍과 試鍊』(병학사, 1977), 456~457쪽

2011년 1월 4일 화요일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12월 마지막 주 부터 이번주 초 까지 기분전환을 할 생각으로 강원도를 다녀왔습니다. 정말 즐거운 여행이었습니다.

1. 이것저것

1-1. 고어텍스
고어텍스는 정말 좋습니다. 고어텍스를 개발한 사람들에게 무한한 축복이 있기를!

1-2. MRE
여행을 떠나기 전 동대문에 들렀다가 MRE를 떨이로 잔뜩 구매했습니다.



이걸 짊어지고 다니면 식비를 아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대량으로 구매했는데 원래의 목적은 달성했습니다만 짐이 많아졌습니다. 이걸 짊어지고 다니는 동안 군량을 짊어지고 행군했다는 우중문, 우문술의 수나라 별동대가 된 느낌이었습니다. 특히 진부령을 넘어갈 때는 꽤 힘들더군요.

1-3. 메모리카드
여행을 다니면서 처음으로 디카의 메모리가 부족하지 않았습니다. 역시 메모리카드의 용량은 넉넉하면 넉넉할 수록 좋은 것 같습니다.


2. 구제역

원래는 강원도에서 경상북도 산간지역까지 들어갈 생각이었지만 구제역이 창궐해서 여행범위를 강원도 만으로 좁혔습니다. 그런데도 제가 강원도를 돌아다는 동안 강원도 곳곳이 구제역에 뚫려 버렸지요. 정말 우울한 일입니다.



3. 전적비

한국전쟁은 한반도에 본격적인 근대국가 들어서는 계기를 마련했고 그 이후 수십년간 전개된 북한과의 대결은 그 근대국가의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중요한 사건인 만큼 이 사건의 흔적들은 곳곳에 남아있습니다. 각종 전적비와 기념비도 그것들 중 하나지요.

인제군 백골병단 전적비
고성군 향로봉지구전투전적비
고성군 당포함전몰장병충혼탑
속초시 수복탑
속초시 해양경찰충혼탑
속초시 제1군단전적비
속초시 통천군순국동지충혼비

북한과의 충돌은 현재 진행형이니 앞으로도 유사한 조형물이 계속 들어서겠지요.




4. 겨울바다

파도와 바람이 몰아치는 겨울바다는 정말 근사합니다. 겨울바다를 한참 바라보고 있으면 식욕도 솟아나지요.

고성군 거진항
속초시 동명항
양양군 하조대 해수욕장
양양군 기사문리항


5. 개

양양군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아주 귀여운 강아지들을 키우더군요. (개라는 짐승이 그렇다지만) 나름 붙임성도 있고. 올 여름에도 이 친구들이 무사한지 한번 확인하러 가 봐야 겠습니다.



6. 기차

여행을 다니는 동안 가끔 기차를 이용했습니다. 사실 여행할때 기차처럼 즐거운 교통수단도 없는 것 같습니다. 강원도에 철도가 좀 더 늘어나면 좋을 텐데...



7. 눈

이번 여행에서 걱정 했던게 폭설이 오면 어떻게 하나 하는 것 이었는데 삼척을 제외하고는 날씨가 대체로 맑아서 별 탈 없었습니다.

삼척시 공양왕릉을 지나 황영조 기념공원으로 가는 길

8. 책

여행을 다닐때 책 한권 정도는 들고 갈 필요가 있지만 두꺼운 책은 필요가 없더군요. 하루 종일 걸어다니다 보면 피곤해서 몇장 넘기다 꿈나라 익스프레스를 타는게 다반사이니 말입니다. 무겁고 배낭 무게만 늘리는 두꺼운 책은 앞으로 들고 다니지 말아야 겠습니다.


별로 긴 여행은 아니었지만 꽤 즐거웠습니다. 2011년의 시작을 상쾌하게 했으니 남은 한해도 즐겁게 보낼 수 있도록 노력해 봐야 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