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4월 30일 토요일

인도군단에 대한 총통각하의 단평

예전에 자유인도군단에 대한 글을 짤막하게 쓴 적이 있습니다. 독일군에 소속된 외국인 부대 중에서도 아주 재미있는 부대라서 조금 관심이 있던 차에 오늘 책을 읽다 보니 전쟁 말기에 히틀러가 자유인도군단에 대해 평을 한 대목을 발견했습니다. 아주 재미있는 평이라 한번 올려봅니다.

인도군단은 웃음거리야! 인도인들은 이 한마리도 죽이지 못해서 그냥 물어뜯기고 있지 않나. 인도인들은 영국놈도 죽이질 못해. 그놈들에게 영국놈들을 상대하라는건 내 생각에 정말 바보같은 짓이야. 우리 편에 있는 인도인들이 보스의 지휘를 받는 인도인들 보다 용감하게 싸울 수 있겠나? 일본은 영국놈들로 부터 인도를 해방시키기 위해서 보스의 지휘 하에 있는 인도인 부대를 버마에 투입했지. 그런데 정말 빨리 도망을 쳤잖아. 인도인 병사들이 독일군에 있다고 더 용감해 지겠나? 내 생각에 인도인들에게 염주나 쥐어주던가 그 비슷한걸 시킨다면 세상에서 가장 끈기있는 군인이 될거야. 하지만 그들을 실전에 투입하는건 정말 웃기는 일이지. 인도인들이 얼마나 강한가? 게다가 이건 바보같은 짓이야. 만약 무기가 남아돈다면 선전 목적에서 이런 장난질을 할 수 있겠지. 하지만 무기가 남아도는 것도 아닌데 선전 목적으로 이런 장난질을 하는 건 정당화할 수 없어.”

Walter Warlimont, Im Hauptquartier der deutschen Wehrmacht 1939 bis 1945 : Band II, (Weltbild Verlag, 1990), s.542

총통각하의 독설은 수준급입니다;;;;

이 발언을 보면 인도인에 대해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인종적 편견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지요. 하지만 히틀러의 발언에 있는 내용들을 상상해 보면 정말 웃깁니다.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2-3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연재에 앞서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0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0-1

1. 테렌스 주버vs테렌스 홈즈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1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2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3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4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5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6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7

2. 테렌스 주버VS로버트 폴리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2-1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2-2

S. 번외편 및 기타 사항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S-1


지난번 글에 서는 로버트 폴리의 주장에 대한 테렌스 주버의 반론을 다루었습니다. 로버트 폴리의 첫 번째 글과 여기에 대한 테렌스 주버의 반론은 전초전적인 성격으로 분량도 매우 소략했습니다. 하지만 로버트 폴리는 테렌스 주버의 반론을 접한 뒤 본격적인 반박에 들어갑니다. 이번에 다룰 글은 로버트 폴리가 2006년 War in History 13권 1호에 기고한 “The Real Schlieffen Plan”이라는 제목의 반박문으로 상당히 재미있는 글입니다. 로버트 폴리는 테렌스 주버의 사료 이용 등 근본적인 부분에서 의문을 제기하며 전통적인 학설을 옹호하고 있습니다. 제 개인적으로 로버트 폴리의 이 글은 슐리펜 계획을 둘러싼 논쟁에서 가장 재미있는 글이고 1차대전 직전 독일육군 총참모부를 이해하는데도 많은 도움이 되는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2-3
로버트 폴리의 재반론


1. 테렌스 주버의 사료 해석에 대한 비판

로버트 폴리는 이 글에서 가장 먼저 테렌스 주버의 사료 이용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로, 테렌스 주버가 사용한 주사료였던 빌헬름 디크만(Wilhelm Dieckmann)의 연구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폴리가 보기에 디크만의 연구는 매우 귀중한 자료이지만 치명적인 결함을 하나 가지고 있습니다. 슐리펜 계획에 있어 가장 중요한 시기인 1904~1905년에 대한 내용이 누락되어 있다는 점 입니다. 이것이 완성되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이 문서가 1945년 소련군에 노획된 이후 1989년 독일에 반환될 때 까지의 시기에 사라진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가장 중요한 시기가 누락되어 있는 것은 치명적인 문제입니다.
두 번째는 빌헬름 디크만이 연구를 하던 무렵 가용 가능했던 사료가 제한적이었다는 점 입니다. 테렌스 주버는 지난번 글에서 슐리펜계획이 실제 전쟁계획이었다는 역사왜곡을 한 독일군 참모부출신들이 빌헬름 디크만의 일급기밀자료 접근을 의도적으로 방해했을 것이라는 가설을 제기한 바 있습니다. 하지만 로버트 폴리는 1918~1945년 사이 독일육군의 문서고가 1차대전 시기 독일군의 모든 문서를 갖추지 못했다고 지적합니다. 우선 1918~1919년의 혼란기에 많은 사료가 파기된 것이 첫번째 이유이고, 두 번째로는 1914년 이전의 문서들 중 상당수가 정보 누출을 우려해 독일군 스스로의 손에 의해 파기되었기 때문이라는 것 입니다. 폴리는 이어서 가용한 사료가 부족했기 대문에 독일육군은 전간기 사이에 사료 수집에 심혈을 기울였으며 이 과정에서 슐리펜 집안이 소장하고 있던 비망록이 입수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이러한 설명은 매우 중요합니다. 테렌스 주버는 슐리펜계획이 실제 작전계획이 아니라는 증거로 슐리펜의 1905년 비망록이 슐리펜 가문이 개별적으로 소장하고 있던 문서라는 점을 지적했는데 폴리의 설명을 따르게 되면 이 점이야 말로 전통적인 학설을 뒷받침 하는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로는 주버가 디크만의 연구를 해석하는 방식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디크만의 연구는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첫 번째가 1890년대 중반까지의 계획, 그리고 두 번째가 1890년대 중반에서 1903년 까지의 계획,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가 1904년에서 1905년까지의 계획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것 처럼 마지막 세 번째 부분은 누락되어 있지만 목차에는 제목이 남아있다고 합니다. 로버트 폴리에 따르면 세 번째 부분의 제목은 바로 “포위 계획(Der Umfassungsplan)”이었습니다. 본문은 누락되어 있지만 제목만 보더라도 빌헬름 디크만은 슐리펜이 1904년 이후 대규모 우회 포위기동을 구상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 입니다. 목차의 구성이야 말로 디크만의 연구는 슐리펜이 수많은 계획 변경을 통해 궁극적으로 프랑스군 좌익을 돌파하는 대규모 포위기동을 구상하는 방향으로 나갔음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증거라는 것이지요. 주버는 디크만이 전통적인 학설을 따른 이유가 모든 음모를 꾸민 참모부 출신들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난 결과라는 해석을 하고 있지만 폴리는 이런 결론을 내리는 것은 지나친 억측이라고 비판합니다.

두 번째로는 테렌스 주버가 디크만의 연구에서 누락된 부분을 보완하기 위해 사용한 사료인 참모부연습 문서들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주버의 기본적인 주장은 슐리펜이 1904년에 실시한 참모부연습과 1905년에 실시한 마지막 워게임(Kriegsspiel), 그리고 소(小)몰트케가 1906년과 1908년에 실시한 참모부연습에서 슐리펜계획과 유사한 요소가 나타나지 않으므로 슐리펜의 1905년 비망록은 실제 전쟁계획이 아니며 슐리펜계획은 허구라는 것 입니다. 폴리는 이 주장이 일부 타당하다는 점은 인정하고 있습니다. 폴리는 먼저 논쟁을 시작한 테렌스 홈즈의 주장을 옹호하면서 슐리펜의 1905년 비망록은 매우 융통성이 강하기 때문에 다양한 상황에 대응할 수 있어서 주버와 같은 방식으로 독해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지적합니다.
그리고 폴리는 주버가 독일군의 참모부연습의 성격을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오류를 범했다고 비판합니다. 주버는 참모부연습이 실제 전쟁계획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폴리는 참모부연습의 주목적은 전쟁계획을 시험하는 것 보다는 참모부 장교들의 교육훈련에 있다고 주장합니다. 폴리는 슐리펜계획에 대한 초기 연구중 하나인 헤르만 폰 쿨(Hermann von Kuhl)의 “1차대전기 독일 총참모부의 전쟁준비와 전쟁수행(Der deutsche Generalstab in Vorbereitung und Durchführung des Weltkrieges)”을 인용하여 슐리펜이 참모부연습을 특정한 작전의 연습이 아니라 다양한 환경에서 작전을 어떻게 수행할 것인지 자유롭게 시험하려 했음을 강조합니다. 또한 참모부연습이 실제 전쟁계획을 시험하는 것 이었다면 기밀등급이 최고등급인 절대기밀(Streng Geheim)로 분류되어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일반 기밀(Geheim)으로 분류되어 있다는 점도 지적합니다. 게다가 기밀등급이 낮을 뿐 아니라 참모부연습 결과를 25개 군단사령부 및 각급 기관에 배포한 점도 지적합니다. 실제 전쟁계획이라면 적국에 유출될 위험을 무릅쓰면서 평시에 잔뜩 뿌려댈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독일 육군은 기밀누출을 우려해 유효기간이 지난 기밀문서의 파기에 주의를 기울였는데 참모부연습은 파기 대상에도 속하지 않는 문서였다고 합니다.

세 번째로는 부대전개계획(Aufmarschpläne)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폴리는 슐리펜이 1905년 비망록을 작성하기 이전에 수립한 1905/06년도 부대전개계획만 살펴보더라도 슐리펜계획의 기본적인 요소가 나타난다고 강조합니다. 1905/06년 부대전개계획 I에서는 26개 군단과 20개 예비사단을 총 8개의 야전군으로 편성하고 주력을 메츠 북쪽에 집결시켜 저지대국가들을 통해 진격시키도록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부대전개계획 II는 동부전선에 병력을 일부 보강하고 있지만 여전히 서부전선에 주력을 집중하고 있습니다. 이 계획에서는 23개 군단과 16개 예비사단을 7개 야전군으로 편성해 부대전개계획 I과 마찬가지로 벨기에와 네덜란드를 침공하여 프랑스 북부로 진입하도록 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슐리펜은 1905/06년 부대전개계획에서 벨기에의 철도망을 장악하는것을 중요시해 5개의 기병사단이 신속히 마스강의 철교를 점령하도록 하였습니다.

폴리는 주버의 가장 큰 문제가 주사료인 디크만의 연구를 잘못 해석한데 있다고 봅니다. 이 때문에 참모부연습과 부대전개계획 같은 다른 사료들도 오독하는 연쇄작용이 일어났다는 것 입니다.


2. 당시 상황에 대한 이해 문제

폴리는 사료해석의 문제 다음으로 주버의 당시 상황에 대한 해석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합니다. 전쟁 계획은 국제정세와 군사적 상황을 반영하기 때문에 이에 대한 이해 없이는 독일의 전쟁 계획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 입니다.

첫 번째로는 러일전쟁의 결과와 이것이 끼친 영향입니다. 테렌스 주버는 러시아가 러일전쟁의 피해로 부터 재빠르게 회복되었기 때문에 슐리펜은 결국 양면전쟁의 위협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고 주장했습니다. 폴리는 이에 대해 앞선 논쟁에서 테렌스 홈즈가 인용한 바 있는 1905년 6월 10일에 슐리펜이 독일 수상 베른하르트 폰 뷜로우(Bernhard von Bülow)에게 보낸 편지를 인용하여 비판하고 있습니다. 슐리펜은 뷜로우에게 보낸 편지에서 러시아군이 예상 이상으로 약하며 전쟁 결과 더 약해졌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또한 러시아의 군개혁이 성과를 거둘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의구심을 표했습니다. 슐리펜은 러시아군이 너무 취약해서 오스트리아-헝가리군도 러시아군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슐리펜의 생각에 큰 영향을 끼친것은 러시아군에 파견된 관전무관들의 보고서였습니다. 폴리는 오토 폰 라우엔슈타인(Otto von Lauenstein)이 1905년 12월에 작성한 마지막 보고서를 인용했는데 이 보고서에서 러시아인들이 나태하고 어렵고 힘든 것을 회피하려는 경향이 강하다는 인종적 편견에 가득찬 결론을 내렸습니다. 또한 러시아 장교단은 위아래를 막론하고 형편없는 지휘능력을 가졌다고 혹평했습니다. 라우엔슈타인은 러시아군이 이런 문제들을 단기간에 해결하기가 어려울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폴리는 다음으로 외교적 상황의 변화를 강조합니다. 1905년의 독일은 러시아를 다시 독일의 편으로 끌어들이려는 외교적 노력을 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슐리펜이 프랑스에 전력을 집중하는 전쟁 계획을 수립한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폴리는 1906년 모로코 위기 당시 독일 정부내에서 외교적으로 고립된 프랑스를 상대로 예방전쟁을 시작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고 슐리펜도 예방전쟁을 강력히 지지했다고 지적합니다. 프랑스에 대한 예방전쟁이 실행되지 못한 것은 프랑스와의 포병전력 격차를 우려한 전쟁부 장관 아이넴(Karl von Einem)이 황제와 수상을 설득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다음으로는 슐리펜이 프랑스군을 어떻게 평가했는지를 다루고 있습니다. 폴리에 따르면 슐리펜은 러일전쟁의 결과 프랑스가 러시아군을 신뢰할 수 없게 되었고 독일과 단독으로 승부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수세를 취할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프랑스 정부는 러일전쟁이 끝난 뒤 요새 강화에 막대한 예산을 배정했는데 이것은 프랑스가 수세를 취할 것이라는 확신을 주었다는 것 입니다. 프랑스가 요새를 강화하는데 맞춰 독일군도 대구경 야포의 개발에 심혈을 기울였지만 1905년 시점에서는 아직 만족할 만한 결과물이 없었습니다. 결국 독일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은 상대적으로 취약한 프랑스군의 좌익을 노리는 것이었고 이를 위해서는 벨기에를 침공하는 것이 최선의 대안이었습니다.

이렇게 러일전쟁 이후의 정세를 고려한다면 슐리펜 계획이 작성된 맥락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 폴리의 주장입니다. 제 개인적으로도 타당한 설명이라고 생각합니다.


3. 소(小) 몰트케의 전쟁 계획

세번째로는 소 몰트케가 총참모장에 취임한 이후의 계획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다시 한번 강조되는 것이 1905년 이후의 정세 변동입니다.

소 몰트케 취임 초기 독일군의 정보당국은 러시아가 러일전쟁과 혁명의 혼란을 수습하는데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소몰트케 초기의 부대전개계획은 슐리펜 말기의 계획을 그대로 이어받았다고 합니다. 폴리의 설명에 따르면 1906/07년 부대전개계획은 주력을 서부전선에 집결하여 벨기에와 네덜란드를 침공한 뒤 프랑스군의 좌익으로 돌파하도록 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소몰트케는 1906/07년 계획에서 우익의 주력에 23개 현역군단과 11½개 예비군단을 배정하고 이를 7개 야전군으로 편성했습니다. 이 계획에서 각 야전군의 임무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제1군(5개  예비군단)은 안트베르펜으로 진격하여 우익을 엄호, 제2군(4개 군단)은 브뤼셀 방향으로 진격, 제3군(4개 군단+1개 예비군단)은 제4군(4개 군단+3개 예비사단)과 함께 리에쥬와 나무르의 벨기에군 요새를 공격, 제5군은 지베(Givet)-스당을 잇는 선으로 진격하여 우익의 주력과 제6군과 접촉을 유지, 제6군(5개 군단)은 이 대규모 우회기동의 중심축으로 카리냥(Carignan)-롱귀용(Longuyon)을 잇는 선으로 진격, 제8군(1개 군단+4개 예비군단)은 6군을 후속하여 진격하면서 베르덩 방면에서 예상되는 프랑스군의 역습을 견제, 좌익의 제7군(3개 군단+2개 예비군단)은 프랑스군을 정면에서 견제.

하지만 이러한 계획은 정세변동과 함께 수정할 필요가 생겼습니다.
먼저 러시아가 러일전쟁의 영향에서 빨리 회복된 것이 가장 큰 문제였습니다. 1910년 경에는 독일군 정보당국도 러시아군의 회복을 확실하게 인식하였고 몰트케는 같은해 8월 수상이었던 베트만 홀벡(Theobald von Bethmann Hollweg)에게 쓴 편지에서 러시아군이 빠르게 회복되고 있음을 지적했습니다. 독일 정보당국은 러시아군이 신형 야포의 도입을 서두르면서 장교단을 교체하고 훈련을 강화하고 있는 점을 포착했습니다. 또한 러시아군은 동원체제를 개편하여 부대동원을 보다 신속히 할 수 있도록 하고 있었습니다. 소 몰트케는 러시아가 추진하고 있는 철도계획이 완성된다면 동원개시 13일차에 유럽전선에 투입할 병력의 2/3을, 18일차에 전 병력을 전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우려했습니다.

폴리는 이러한 상황이 소 몰트케의 전쟁계획에서 서부전선의 중요성을 더욱 더 높아지게 했다고 설명합니다. 러시아군은 단기간에 격파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지만 독일은 양면전쟁을 치루기 어렵기에 프랑스와의 승부를 더 빨리 내야 했다는 것 입니다. 소 몰트케는 프랑스는 가용한 인적자원이 제한적이었기 때문에 한차례의 결전으로 치명적인 피해를 입힌다면 서부전선을 정리할 수 있을 것이며 그렇게 한다면 동부전선으로 병력을 다시 돌리는 것이 가능해 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프랑스는 계속해서 국경지대의 요새를 강화하고 있었고 독일군의 야포 개발과 배치는 이것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의 취약점은 여전히 좌익에 있었고 프랑스와 벨기에 국경지대의 요새들은 1912년이 되어서야 겨우 제한적인 보강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소 몰트케가 이 지역에 더욱 더 관심을 기울 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반면 프랑스군은 보다 강화되었고 러시아가 다시 공격 능력을 갖추게 됨으로써 독일측은 프랑스가 수세만 취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남부 독일을 방어하기 위해서 좌익을 보강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탈리아는 동맹국이었으나 점차 외교적인 태도가 변화하고 있었고 소 몰트케는 이탈리아군으로 프랑스군 일부를 견제하는 것이 어렵다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폴리는 결국 이러한 변화가 소 몰트케의 계획을 더욱 더 신속한 공격에 집중하도록 만들었다고 지적합니다.  소 몰트케의 1908년 계획에서 좌익의 병력은 8개 군단으로 증강되는 한편 우익의 약화와 함께 장기전에 대비해 네덜란드를 독일의 대외 창구로 삼기 위해서 네덜란드 침공은 계획에서 누락되었습니다. 네덜란드의 철로를 이용할 수 없게 된 만큼 벨기에의 철로, 특히 철교들을 안전하게 탈취하는 것은 더욱 중요해 졌습니다. 주력인 제1군과 제2군을 합친 60만의 대군이 불과 12마일에 불과한 정면으로 진격해야 했으니 이 제한된 정면에 있는 철도망이 파괴된다면 그 뒷감당은 꽤 골치아픈 일이었을 것 입니다. 벨기에의 철도망을 신속하게 탈취하기 위해서 1908년 계획에서는 동원 11일차에 공격을 개시하도록 명시했는데 1913년 벨기에가 새 육군법을 제정해 육군 규모를 크게 늘리자 동원 5일차에 공격을 시작하는 것으로 변경되었습니다.

소 몰트케 시기의 전쟁 계획에 대한 폴리의 결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소 몰트케는 취임 초기만 하더라도 러시아군을 낮게 평가해 서부전선, 특히 우익에 주력을 집중하는 슐리펜의 계획을 그대로 계승했습니다. 하지만 러시아가 점차 러일전쟁의 충격에서 회복되면서 계획을 변경해야만 하는 압박을 받게 되었습니다. 양면전쟁의 가능성이 높아진 가운데 소 몰트케는 독일이 장기전을 수행할 능력이 부족하다는 우려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느 한 전장을 신속히 정리해야 할 필요를 느꼈습니다. 그 결과 프랑스를 더 신속히 무너뜨려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고 이것은 병력동원과 공격일정을 더 앞당기는 것으로 반영되었습니다.

폴리는 주버가 지나치게 작전 단위의 분석에만 집중하고 있기 때문에 슐리펜 계획이라는 대전략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 글에서 집중적으로 비판하고 있는 주버의 사료 인용은 주목할 만한 부분입니다.

2011년 4월 25일 월요일

Geoffrey Parker의 The Military Revolution이 번역될 듯 합니다

오늘 오전에 최근 추진중인 일 문제로 한국연구재단 홈페이지에 들어가 번역지원사업 내역을 확인해 봤는데 목록에 재미있는 책이 몇 권 눈에 들어왔습니다. 특히 군사사에 관심을 가진 분들이라면 매우 좋아하실 만한 책이 한 권 있었는데 바로 조프리 파커(Geoffrey Parker)의 The Military Revolution : Military innovation and the rise of the West, 1500-1800이었습니다.

군사사에 관심을 가진 분들이라면 이른바 "군사혁명"이라는 용어가 낯설지 않으실 텐데 이 개념을 발전시킨 대표적인 연구자의 저서가 국내에 소개된다는 것이 매우 즐겁습니다. 번역판이 출간될 때 여유가 있으면 영어판과 비교해 볼 수 있게 번역판도 한 권 마련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비고란에 "계약가능"으로 표시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큰 문제가 없는 한 번역되어 많은 분들이 접하실 수 있게 되리라 생각됩니다. 훌륭한 군사사 서적이 꾸준히 번역·소개되고 있어 이 분야에 관심을 가진 한 사람으로 매우 즐거운데 훌륭한 저작 한권이 또 번역된다니 반갑기 그지 없습니다. 훌륭한 번역본이 나올 수 있기를 빕니다.

2011년 4월 23일 토요일

모형을 몇 개 샀습니다

기분전환을 할 겸 네이버하비에 가서 모형을 몇 개 샀습니다.


하비보스의 M4A3E8이 들어와 있길래 꽤 반가웠습니다. 하비보스에서 내놓은 셔먼 시리즈는 궤도만 빼면 마음에 드는 물건들이라 즐겨만드는 편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다른 셔먼들은 두대 정도 만들어봤는데 이지에잇은 만들어 본 일이 없더군요. 개인적으로는 하비보스의 셔먼에 맞춰 별매궤도가 나와줬으면 싶지만 현실적으로는 많이 어려울 것 같습니다. 1/48스케일을 좋아하는 입장이라 그점이 아쉽네요.



 타미야의 1/48스케일 2호전차를 뜯어보니 차체 하부가 플라스틱으로 되어 있습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다이캐스트로 만든 차체하부가 묵직해서 좋았는데 좀 실망이군요. 부품 구성은 아주 단촐해서 즐겁게 만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 처럼 손재주 없는 사람들에게 타미야는 정말 멋진 회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내용물을 더 살펴보니 다이캐스트로 된 차체 하부가 없는 대신 이게 들어있었습니다. 뭐, 이것도 나쁘지는 않아 보입니다만. 그리고 설명서가 조립설명서 하나와 실제차량에 대한 소개 및 도색가이드 두 개로 나뉘어 있는게 눈에 띄었습니다.

일단은 오늘 사온 왕호랑이를 약간 조립해 봤는데 정말 즐겁습니다.  

2011년 4월 17일 일요일

이승만 국부론에 대한 잡상

Big Train님의 이글루에 들렀더니 이승만 국부론에 대한 이야기가 하나 올라와 있어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Big Train님의 글에 달린 댓글과 트랙백으로 엮인 글들도 흥미롭더군요.

저는 개인적으로 이승만을 매우 싫어합니다. 이승만을 비판할 이유야 넘쳐나지만 가장 큰 이유는 한국전쟁 초기 무책임하게 서울을 버리고 피신했다는 점 입니다. 물론 전황이 불리했기 때문에 서울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승만의 피난은 체계적으로 이루어진 것도 아니었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국회는 사전 통보조차 받지 못해 많은 국회의원들이 북한군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김규식과 같은 재야의 거물들은 또 어떻습니까? 이승만이 피난하면서 버려둔 수많은 문서들은 북한에 노획되어 북한의 선전도구가 되었지요. 이승만의 피난은 체계적으로 조직된 것이 아닌 공황상태에서의 도주에 불과했습니다. 긴급시에 국가의 구심점이 되어야 할 대통령이 공황상태에 빠져 도망쳤다는 것 하나 만으로도 이승만은 대통령의 자격이 없습니다.

더더욱 우울한 것은 이승만이 25일 오후 부터 도망칠 궁리나 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1970년대 후반에 공개된 미국 대사관의 전문은 이승만이 25일 밤에 미국 대사를 불러 피난할 생각을 털어놓았다는 것을 밝혀냈지요. 그런데 이 자료가 공개되어 널리 알려진지 30년이 지난 지금도 일부 우익은 내용의 신뢰성이 의심스러운 프란체스카 비망록을 들먹이며 이승만이 27일까지도 서울을 사수하려 했다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지난 글, “1950년 6월 27일 이승만의 서울탈출” 에 서도 언급했지만 프란체스카 비망록의 6월 25일~28일 기록은 작성된 시기조차 확실하지 않고 이승만에 대한 비난을 막고하자 하는 정치적 의도가 강한 글 입니다. 결정적으로 주한 미국대사 무초가 25일 밤~26일 새벽에 이승만을 면담하고 국무부에 보낸 전문이 남아있기 때문에 프란체스카 비망록에서 주장하고 있는 내용은 신뢰하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요즘도 프란체스카 비망록의 내용을 따르는 글들이 ctrl+c+v되어 인터넷 곳곳에 퍼지고 있는 실정입니다.

제 개인적으로 6월 25일~27일 경무대에서 일어난 일들은 대한민국 역사에 있어 가장 치욕스러운 사건입니다. 전선에서 수많은 군인들이 최선을 다하고 있을 때 대통령이 먼저 도망칠 생각을 하고 있었고 정말로 가장 먼저 도망쳤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승만이 정부기관과 국회의 피난을 책임졌다면 그가 서울을 버리고 피난한 것을 비난하지 못할 것 입니다. 하지만 이승만은 전쟁 당일 부터 도망칠 생각을 하고 있었고 정말로 가장 먼저 도망쳤습니다. 더욱 더 비참한 것은 정작 외국인인 주한미국대사 무초가 최후까지 남아 대통령이 도망치고 나서 공황상태가 된 한국군 수뇌부를 도우려 했다는 것 입니다.

무초 대사는 1950년 6월 27일 오전 6시에 다음과 같은 짤막한 전문을 보냈습니다.

966. 서울 북쪽의 북한군은 지난 밤 사이 조금 더 진격해왔습니다. 가장 신뢰할 만한 상황 평가에 따르면 서울 근방의 적군 병력과 전차 숫자가 과대평가되긴 했어도 숫적인 우위를 보이고 있습니다. 대사관은 현재 고립될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대통령과 대부분의 각료들은 서울을 떠나 남쪽으로 피신했습니다. 국무총리서리 겸 국방부장관 신성모와 한국군 참모부는 아직 서울을 사수할 것을 고집하고 있습니다. 저는 소수의 지원자와 함께 최후의 순간까지(until bitter end) 서울에 남을 것이며 드럼라이트 참사관 및 소수의 대사관 직원을  자동차 편으로 대통령을 따르게 하겠다고 제안했습니다. (한국을) 포기했다는 비난을 막기 위해서 주한미군사고문단의 핵심 요원은 사태의 추이에 따라 차량을 이용해 남쪽으로 보내고 그밖의 군사고문단 요원들은 항공기편으로 피신시켜야 합니다.

The Ambassador in Korea(Muccio) to the Secretary of State(1950. 6. 27),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 1950 Vol.VII Korea(U.S.GPO, 1976), p.173

이승만을 옹호하는 측에서는 정부의 수뇌인 이승만이 생포되면 대한민국이 붕괴될 수 있으므로 이승만의 피난을 비난해서는 안된다고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옹호는 이승만이 정부와 의회, 그 밖의 국가 기관들을 체계적으로 피난시키려고 노력했을 때에나 가능할 것 입니다. 결정적으로, 주한미국대사인 무초는 한국군 수뇌부와 함께 글자그대로 서울이 함락되기 직전까지 서울에 남았습니다. 한국에 대한 무초의 책임은 이승만과는 비교할 수 없이 가벼웠지만 무초는 위험을 무릅쓰고 외교관으로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외국인보다도 대한민국에 대한 책임감이 없던 자를 국부로 추앙하려는 정신나간 움직임은 저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대한민국의 정통성은 국민이 주권을 가진데서 오는 것이지 억지로 만든 국부 따위를 받들어 모신다고 생기는게 아닙니다.

2011년 4월 16일 토요일

난징의 클레릭

아무래도 중일전쟁은 1937년에 끝났던 모양입니다.


클레릭의 쌍권총이 일본군을 상대로 불을 뿜겠군요.

제3세계에 대한 어떤 관점

“리비아/예멘 지도자 인물평”을 읽고나니 생각이 하나 떠올라서...

최근 수개월간 중동에서 일어난 사건들은 엄청난 국제적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비교적 국제문제에 무관심한 한국에서도 최근의 중동은 큰 관심을 끌었지요. 정치와는 관계가 없을 것 같은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도 중동 문제가 다뤄진 것을 보면 그 영향력을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일본의 대지진 등 굵직한 사건이 연달아 터지면서 지금은 중동에 대한 관심이 다소 줄어들길 했습니다만.

하지만 좀 아쉬운 점이라면 한국 내에서는 갑작스럽게 관심이 끓어오른 것에 비해서 흥미로운 글이 부족했다는 것 입니다. 주류언론의 기사들은 정보 전달이 중심이었지만 한국의 언론들이 일반적으로 국제문제, 특히 한반도 주변국을 벗어난 문제에 대해서는 다소 취약한 편이었으니 그다지 비판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꽤 흥미로웠던 것은 여러 인터넷 커뮤니티들에 올라온 일반인들의 글이었습니다. 상당히 많은 수의 글이 중동 사태를 단순한 독재세력vs민주화세력의 대결로 보고 있었고 특히 한국의 경험을 단순하게 대입시켜 보고 있었던 것 입니다.

해당 국가의 정치·사회적 배경에 대한 고찰없이 단순한 선악의 문제로 바라본다는 것이 좀 답답했는데 진보를 자처하는 몇몇 언론들도 유사한 시각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 꽤 흥미로웠습니다. 이런 재미있는 관점은 리비아 사태와 뒤이은 서구의 군사개입에도 반영되고 있습니다. 진보를 자처하는 한 인터넷 언론의 다음 기사가 이런 관점을 잘 보여주는 것 같군요.


사실 한국의 진보 지식인들이 제3세계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이런 구제불능의 발상은 하루이틀 된 것이 아니라서 더 재미있습니다. 1965년에 씌여진 다음 글을 보시지요.

1965년 4월 반둥 회의의 기조연설을 통해 인도네시아 수카르노 대통령은 “우리 인도네시아인이나 그 밖의 아시아·아프리카 제국(諸國)의 형제국들이 겪어온 고전적 형태의 것으로만 식민주의를 생말자. 식민주의는 이 밖에도 일국내의 소수의 외래적 집단에 의한 경제적 지적 물질적 지배라는 형태로 나타나는 현대적 의상을 쓰고 있는 것이다. 식민주의는 능숙한 솜씨로 과감히 행동을 하는 적이며 여러가지 가장을 하고 나타난다. 식민주의는 어디서 어떻게 나타나던간에 이 지구상에서 뿌리를 뽑아야 할 악이다.” 이와 같은 수카르노의 기조연설 내용은 전후 후진국 개발원조라는 휴머니즘 탈을 쓰고 지배복종의 관계를 수립한 신식 제패형태, 즉 유선형의 제국주의적 신식민주의의 출현을 단적으로 말하여 주는 것이다.

이러한 신형태의 제국주의와 대항하여 투쟁을 아끼지 않고 있는 신생 민족국가의 움직임은 아시아·아프리카를 비롯한 전세계의 후진지역 전반에 긍(亘)하여 확대되고 있으며 이 들의 횡적인 연대와 단결의 힘은 금일 세계사 상황의 주요한 새로운 원동력으로  등장함으로써 안으로는 진정한 민주주의적 사회정의의 실현과 완전한 정치적 경제적 자주독립을 쟁취하고 밖으로는 전쟁을 반대하기 위한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 신생제국이 달성한 독립의 과정과 형태는 일정하지 않고 각양각색의 특성을 가지고 있음은 주의깊게 관찰해야 할 점이다.

朴哲漢,「新生民族國家의 基本動向」,『靑脈』8호(1965. 5), 130-131쪽

저 글은 기본적으로 서구는 제국주의적인 惡이고 제3세계는 평화를 애호하는 善이라는 관점을 보이고 있습니다. 물론 1965년은 한국이 식민지에서 해방된 지 불과 20년 밖에 되지 않은 시점이었고 한국은 여전히 빈곤한 후진국이었던 때 입니다. 한일국교정상화가 가시화 되어 일본의 새로운 침략을 우려하던 때였으니 진보적 지식인들이 제3세계에 기대를 걸었던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것 입니다.

그런데 이른바 진보적 지식인들이 21세기에도 저것과 다름없는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은 정말 우울한 일이지요. 인용문에서 제국주의 반대를 소리높여 외친 인도네시아만 하더라도 동티모르에서 똑같이 ‘제국주의적인’ 행태를 보였던 것을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서방세계의 선진국들이 현실정치적인 바탕에서 움직이듯 제3세계의 모든 나라들도 마찬가지로 움직이고 있는 것 이죠. 뭐, 제가 굳이 이런 말을 할 필요도 없이, 이곳을 들러주시는 분들이라면 아주 잘 알고 계실 것 입니다. 하지만 인용문이 씌여진 지 40년이 훨씬 넘었건만 한국의 진보적 지식인들은 별로 발전한게 없어 보입니다. 정말 우울한 일이죠.

진보적 지식인들의 서구와 제3세계에 대한 이분법적인 인식은 앞으로도 당분간 사라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이것은 한국의 식민지 경험과 강력한 민족주의가 가장 큰 원인일 것 입니다. 한국의 역사적인 경험은 마찬가지로 식민지 경험을 가진 제3세계에 대한 객관화를 어렵게 하는 요인입니다. 1960년대의 지식인들이 그러했던 것 처럼 식민지 경험이라는 공통요소는 제3세계에 대한 우호적인 시각을 가지게 만듭니다. 21세기의 한국은 더 이상 제3세계의 범주에 넣을 수 없는 국가가 되었지만 과거의 경험은 너무나 깊게 각인되어 있습니다.

2011년 4월 15일 금요일

늙은 사자의 몸부림

2차대전 직후 영국의 안보정책은 매우 재미있는 주제입니다. 1차대전 이후 영국의 안보정책이 몰락해가는 강대국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한 고심의 흔적이라면 2차대전 이후 영국의 안보정책은 영국의 몰락을 인정하고 그 바탕위에서 B급 강대국의 지위를 고수하려는 처절한 몸부림으로 볼 수 있을 것 입니다.

특히 핵무기의 등장은 다른 강대국들과 마찬가지로 영국에게 있어서도 꽤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요즘 읽은 논문중에서 처칠이 재집권에 성공한 뒤 총참모부가 작성한 1952년 Global Strategy Paper를 다루고 있는 것이 있는데 여기서 핵무기에 대해 언급하는 부분이 흥미롭습니다.


냉전에 있어 주된 억제력(main deterrent)이며 전쟁 발발시 연합국의 유일한 공세 수단으로 간주되는 것(즉, 핵무기)을 가지지 못한다면 영국이 미국의 정책과 냉전 계획, 그리고 전시에 끼칠 수 있는 영향력은 심각하게 약화될 것이며 이것은 영국이 정책 수립이나 공세 계획에 참여할 수 없게 되는 것을 뜻한다.

(중략)

핵무기를 완전히 미국에 의존하고 (영국이) 자체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원자폭탄을 보유하지 않는 심각한 정치적 불이익을 받아들이는 것은 영국에게 가장 현명하지 못한 일로 보아야 한다.

John Baylis·Alan Macmillan, “The British global strategy paper of 1952”, Journal of Strategic Studies, 16: 2, pp.209~210

강대국으로 명함을 내밀기 위해서는 실력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하고 핵무기는 그럴수 있는 상징이라는 이야기죠. 2차대전 이전의 전함처럼. 하지만 이후 영국의 핵정책을 보면 안습입니다. 본격적인 핵경쟁에 나서기에는 국력이 모자라고 결국 상징적인 수준의 핵전력을 보유하는 데 그치게 되니 말입니다.(물론 유사시 물귀신작전을 펼 정도는 되겠습니다만)

물론 이때 영국이 확보한 국제적인 지위가 아직까지 유지되고 있다는 점에서 완전히 안습이라고 할 수는 없겠습니다만. 역사를 보면 강대국 경쟁에서 탈락한 비참한 패배자들이 산적해 있으니 말입니다. 영국의 몰락정도는 양호한 편이죠.

2011년 4월 13일 수요일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2-2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연재에 앞서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0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0-1

1. 테렌스 주버vs테렌스 홈즈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1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2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3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4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5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6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7


2. 테렌스 주버VS로버트 폴리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2-1

S. 번외편 및 기타 사항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S-1

지난번 글에서는 테렌스 주버와 테렌스 홈즈의 논쟁 중 이 논쟁에 새롭게 참여한 로버트 폴리의 논문을 소개했습니다. 로버트 폴리는 “The Origins of the Schlieffen Plan” 이라는 논문에서 슐리펜 계획에 대한 전통적인 학설을 지지하면서 슐리펜 계획의 수립 시기를 1899-1900년으로 높여 잡았습니다. 테렌스 주버는 새롭게 논쟁에 개입한 폴리에 대해 War in History 2004년 2호에 “The Schlieffen Plan was an Orphan”이라는 제목의 반박논문을 기고합니다.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2-2
테렌스 주버vs로버트 폴리(2)
주버의 반론

이 논문은 총 6쪽으로 매우 소략합니다. 주버의 반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폴리가 슐리펜 계획의 원형이라고 주장한 1899/1900년도 부대전개계획 I(Aufmarschplan I)은 68개 사단을 서부전선에 집중하는 계획안입니다. 하지만 주버는 1899년 4월 1일부로 효력을 발휘한 부대전계계획 I은   불과 6개월도 못되어 수정안이 등장했기 때문에 효력이 없어졌다고 주장합니다. 또한 폴리의 주장과는 달리 1899/1900년도 부대전개계획 I에는 서부전선에서 승리를 거둔 뒤 동부전선으로 부대를 재배치하는 내용이 없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주버는 폴리의 주장과 달리 슐리펜은 1898년도에 작성한 비망록에서 전쟁 초기 부터 서부전선과 동부전선 양쪽에서 싸움을 치러야 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폴리는 테렌스 주버가 주사료로 활용한 빌헬름 디크만의 연구에서 슐리펜 계획의 존재를 명기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는데 주버는 여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빌헬름 디크만이 연구를 하고 있던 1930년대에는 슐리펜 계획이 실재했다는것을 의심하는 사람이 전혀 없었으며 결정적으로 디크만의 연구는 1904년까지 작성하다가 중단되었기 때문에 빌헬름 디크만이 실제로 1905년 이후의 전쟁계획에 대한 ‘1차사료’를 확인했는지는 불확실 하다는 것 입니다. 테렌스 주버의 기본적인 주장은 독일 군부가  1920년대에 ‘슐리펜 계획’이라는 신화를 만들어냈기 때문에 기밀자료였던 전쟁계획을 볼 수 없었던 당대의 사람들은 여기에 대해 의심을 하지 않았거나 하지 못했다는 것 입니다. 주버는 ‘슐리펜 계획’이라는 신화를 유지하려는 군 고위층에 의해 원사료에 대한 접근이 철저히 제한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다음으로는 폴리가 제기한 병력 규모의 문제를 비판합니다. 폴리는 1899/1900년 부대전개계획 I에서 23개 군단(46개 현역사단)과 19개 예비사단을 서부전선에 집중하도록 명시하고 있었다고 설명했습니다. 하지만 주버는 슐리펜의 1905년 비망록은 96개 사단을 명시하고 있는데 1899/1900년 부대전개계획은 물론 실제 독일군의 병력은 여기에 한참 미치지 못했다고 지적합니다. 1899년 4월 1일의 부대전개계획 I은 65개 사단, 그리고 1914년에 실제로 동원 가능했던 것이 72개 사단이니 슐리펜 계획이 실재했다치더라도 독일군의 병력은 24개 사단이나 부족하다는 것 입니다. 주버는 폴리가 슐리펜 계획의 실재여부를 주장하면서 구체적인 전투서열 조차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합니다.
가장 중요한 독일군 우익의 움직임도 중요한 비판의 대상입니다. 주버는 1899/1900년 부대전개계획 I은 우익과 중앙의 병력 비율이 거의 1:1 수준인데 슐리펜 계획은 그렇지 않다는 점도 함께 지적합니다. 그리고 1899/1900년 부대전개계획 I은 프랑스군이 아르덴느로  선제공격해 올 경우 역습에 나서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기 때문에 슐리펜 계획과 유사하다고 볼 수 없음을 지적합니다.

주버는 폴리의 주장을 이렇게 조롱하고 있습니다.

“1898년 비망록과 슐리펜 계획 비망록의 유사성은 돼지와 말의 유사성 정도이다. 1898년 비망록과 슐리펜 계획이 우익에 대해 신경쓰고 있는 정도는 돼지와 말의 유사성이 다리 네 개를 가진 정도인 것과 같다.”

다음으로는 독일의 국경지대 요새 문제를 비판하고 있습니다. 폴리는 독일이 서부전선 국경지대의 요새를 강화함으로써 우익으로 병력을 더 집중할 수 있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주버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합니다. 요새가 건설중이라는 것은 당시의 슐리펜도 알고 있었을 텐데 요새가 완성된 이후에야 슐리펜 계획에 반영되었다는 주장은 납득하기 어렵다. 그리고 실제 독일의 국경지대 요새들은 1905년 비망록을 작성할 당시 완성되었다고 할 수준도 아니었다. 그러므로 국경지대 요새들이 1905년 비망록, 즉 슐리펜 계획에 영향을 주었다고 보는 것은 어렵다는 것 입니다.

2011년 4월 1일 금요일

[妄想大百科事典] 국익(國益)

[妄想大百科事典] 국익(國益)

특정 집단이 자신들의 이익이 되는 것을 높여 부르는 말.

무언가를 날로 먹고 싶은데 그냥 먹기는 민망할 때 주로 사용한다.

특정 집단이 국익을 지나치게 강조할 경우 그 사회에 해악을 끼칠 가능성이 높으므로 주의할 필요가 있다.


유의어 : 민족의 이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