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8월 31일 수요일

고지전 단평

얼마전에 nishi님이 영화 고지전에 대한 제 감상을 물어보셨는데 한마디로 별로였습니다.

한국일보 라제기 기자는 영화에 나타나는 남북한 군인들의 교류가 퇴행적인 욕망을 보여준다고 평하기도 했는데 이 부분에 대해 매우 공감하고 있습니다. 한국영화 사상 최고의 전쟁영화라는 평도 있다는데 그게 사실이라면 한국 영화계가 얼마나 전쟁영화를 못 만드는지 보여주는 사례가 되겠지요. 예. 솔직히 이 영화의 반전메시지가 지겹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하는 영화가 한두편도 아니고. 솔직히 저는 반전영화는 1930년에 나온 서부전선 이상없다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주인공들은 제법 진지한 척 폼을 잡으며 전쟁의 허무함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하는데 제 눈엔 조성모가 베트남 전쟁을 배경으로 한 뮤직비디오에서 절규하는 것과 비슷한 수준으로 보입니다. 전쟁이 나쁘다는거 모르는 사람이 어디있습니까. 수없이 계속해온 뻔한 이야기를 반복하기 위해서 영화를 한 편 더 만들 필요는 없지요.

고지전의 감독과 시나리오 작가가 생각하는 전쟁이 뭔진 모르겠는데 전쟁에 대한 깊은 성찰이 있는 것 같지도 않습니다. 본인들의 생각은 다를 수도 있겠지만. 진지한 반전영화라기 보다는 반전영화 처럼 보이려고 노력하는 그저 그런 영화입니다. 걸작이라고 추켜세우는 사람들이 있긴 하지만 제가 보기엔 10년도 가지 않아 잊혀질 그저그런 영화입니다. 한국영화계는 남북문제를 다룰때 수십년간 작용한 반공이데올로기에 대한 반작용인지 지나치게 무리해서 그 반대로 나가려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전쟁을 다루는 영화 중에서 가장 짜증나는건 웰컴 투 동막골과 같은 겉멋만 잔뜩 든 골빈 영화인데 고지전은 그보다는 수준이 조금 낫지만 비슷한 영화로 보입니다. 솔직히 고지전을 걸작이라고 추켜세우는 영화 평론가 중에서 전쟁영화가 아닌 전쟁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요?

한국전쟁에 대한 진정한 걸작이 나오려면 일단 한국전쟁의 유산이 완전히 과거의 역사로 사라져야 할 것 입니다. 한국전쟁이 현실 정치에 영향을 끼치는 한 걸작 보다는 진지한 척 하고 싶어하는 겉멋만 잔뜩 든 영화만 나올 가능이 훨씬 높습니다.

2011년 8월 30일 화요일

러시아식 무상의료

러시아는 헌법에 무상의료를 명시하고 있는 국가입니다. 러시아 헌법의 근본 취지는 고상하다 하겠으나 돈이 없으면 그냥 구호에 그칠 뿐이지요. Foreign Policy 인터넷 사이트에 러시아 의료체계의 현실을 보여주는 화보가 실렸는데 많이 암담해 보입니다.




음. 그런데 이 화보에는 재미있는 사진이 몇 장 있습니다.


환자와 질병이 동시에 쓰러질 듯
그리고 역시 Foreign Policy에 실린 한 여성이 러시아 병원에서 출산한 경험도 읽어 볼 만 합니다. 이런 놀라운 시스템(?!)으로 산모 사망률을 꾸준히 낮춰왔다니 러시아인들은 여러 모로 사람을 놀라게 하는군요.


이 기사에 실린 사진은 더 무섭습니다.

애 잡을 기세

전쟁 말기 일본육군의 차량 부족에 대한 잡담

아래의 글에서 일본군의 궁색한 대전차 전투 사례를 하나 다루긴 했습니다만 2차대전기 일본 육군의 장비상태를 보면 이게 미국과 전쟁을 벌이는 열강이 맞나 싶을 정도입니다. 물론 태평양 전쟁이 해전 위주였고 일본해군이라면 세계 일류급 해군이긴 합니다만 육군과 육해군 항공대의 질적 수준은 삼류라 해도 과언이 아닌 수준이니 말입니다. 게다가 질적수준은 물론이고 양적 수준도 형편없지요.

태평양 전쟁 종전 직후 미군이 일본군을 무장 해제한 기록을 보면 본토결전을 위해 일본 육군이 준비한 전력을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장기간의 소모전을 겪은 이후라 하더라도 1944년 말 부터 본토결전 준비를 한 것 치고는 준비가 영 부실한게 눈에 띄입니다. 조금 극단적인 사례일 수 있는데 규슈에 배치된 제16방면군 예하 40군의 경우 군 전체에 트럭 186대, 기타 차량 64대, 장갑차 46대 등 총 296대의 차량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장갑차를 제외한다면 250대의 차량이 있는 셈이지요.1) 일본 제40군은 1945년 1월 8일 편성에 들어갔고 여기에 총 4개 사단과 1개 혼성여단이 배속되어 있었습니다. 제303, 206, 146, 77사단과 독립혼성 125여단이지요. 그냥 단순하게 계산해서 제40군에 배속된 각종 지원부대를 제외하면 총 15연대(303사단 3개연대, 206사단 3개연대, 146사단 4개연대, 77사단 3개연대, 제125여단은 5개대대 편성이니 대략 2개연대로 계산)에 차량 250대, 1개 연대에 차량 16~17대 정도가 돌아가는 셈입니다;;;; 여기에 군 직할대를 포함시켜서 나눈다면 그 숫자가 더 줄어들겠지요. 사실상 미군이 직접 공격해 왔다면 신속한 기동은 포기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제40군은 303, 206, 146사단과 독립혼성125여단 등 총 3개사단과 1개 여단을 해안 방어에 투입하고 있었습니다.2) 제40군의 유일한 예비대로는 77사단만이 남는 셈인데 뭐 신속한 기동이 어려우니 미군이 상륙해 왔을 경우 어떻게 되었을지는 상상만으로 충분할 것 같습니다.

다른 곳과 비교해 본다면 어떨까요? 제 개인적으로 일본군의 본토 결전준비와 비교할 만한 대상으로는 독일군의 북부 프랑스 방어준비가 적합할 듯 싶습니다. 동부전선에서 장기간의 소모전을 거친 뒤 방어를 위해 수개월간 전력을 급히 축적한 사례이니 비교대상으로 적절하지 않을까 싶군요. 먼저, 위에서 언급한 일본군 보병사단들과 비슷하게 차량화 우선순위에서 뒤떨어지는 제6강하엽병연대의 경우 연합군의 상륙 직전 70대의 트럭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3) 장비 상태가 나쁜 축에 속했던 272보병사단의 경우는 오토바이를 제외하고 105대의 자동차, 136대의 트럭, 71대의 견인용 트랙터를 보유하고 있었고 비교적 양호한 수준으로 볼 수 있는 353보병사단은 오토바이를 제외하고 573대의 차량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4) 매우 거친 비교이긴 합니다만 일본군에 비교하면 차량화 수준이 상당히 양호한 편입니다.

물론 1945년 봄 본토방어를 위해 준비한 독일군과 비교하는게 타당하다고 보시는 분들도 계실 것 입니다. 1945년 봄을 기준으로 할 경우에는 독일군 보병사단도 상당히 엉망입니다. 약간의 예를들면 제167국민척탄병 사단은 1945년 3월 중순 편제의 13%의 차량만 갖추고 있었고 제326국민척탄병 사단의 경우는 아예 말과 마차만 갖추고 있었습니다.5) 하지만 그 당시의 독일군은 껍데기만 남긴 했어도 어느 정도의 기동부대들을 유지하고는 있었지요. 그 점에서 1945년 봄의 독일육군 조차도 일본 육군 보다는 조금 나은 수준이라고 볼 수 있을 것 입니다. 사실 국민돌격대에 판쩌파우스트라도 쥐어준 것을 보면 아무래도 독일이 일본 보다는 좀 낫지 않습니까.




1) John Ray Skates, The Invasion of Japan : Alternative to the Bomb, (University of South Carolina Press), p.190
2) John Ray Skates, ibid., p.120
3) Hans-Martin Stimpel, Die deutsche Fallschirmtruppe 1942~1945 : Einsätze auf Kriegsschauplätzen im Osten und Westen, (Mittler&Sohn, 2001), p.156
4) Niklas Zetterling, Normandy 1944 : German Military Organization, Combat Power and Organizational Effectiveness, (J.J.Fedorowicz, 2000) p.252, 282
5) John Zimmermann, Pflicht zum Untergang :  Die deutsche Kriegführung im Westen des Reiches 1944/45, (Schöningh, 2009), p.229

2011년 8월 27일 토요일

읽는이를 답답하게 하는 일본 육군의 대전차전 사례 하나

2차대전 당시 일본군 보병의 빈약한 대전차전 능력은 아주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래서 유럽전선이었다면 전차들이 보병의 손쉬운 사냥감이 되었을 상황이라도 일본군은 별 볼일 없는 성과만 거뒀던 것 같습니다. 아래의 사례는 레이터 전투 당시의 일화입니다. 보시면 아시기겠지만 보병이 제대로 된 대전차 화기를 갖췄다면 그야말로 전차가 큰 피해를 봤을 상황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전차를 공격한 쪽이 일본군이었다는 것이죠;;;;

제763전차대대는 96보병사단에 배속되었다. 이 대대는 상륙 당일 산 호세San Jose인근에 상륙했다. 763전차대대는 보병을 지원하면서 내륙으로 수천 야드를 진격했지만 해안가 뒤로 펼쳐진 습지대에 가로 막혀 옴싹달싹 못하게 되었다. 보병들만 계속해서 전진했다.

10월 22일, C중대와 D중대의 3소대는 무르고 질척거리는 지형에 가로막혀 다시 해안으로 되돌아가 가야 했다. 이들은 해안에 도착하자 (북서쪽으로 4마일 떨어진) 피카스Pikas로 가는 길을 찾은 뒤 그곳에서 어려움에 처해 있는 383보병연대를 지원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찰스 파이페Charles G. Fyfe중위가 지휘하는 C중대의 1개 소대에 래퍼티David M. Rafferty가 지휘하는 D중대의 경전차 소대가 배속되어 이 임무를 맡게 됐다. 보병들은 이 전차 부대들이 지나가야 할 지역을 거쳐서 진격했지만 일본군을 정글에서 완전히 소탕하지는 못한 상태였다. 전차들이 지나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의 오른쪽 측면의 카트몬Catmon산에는 우회하고 넘어간 일본군의 대규모 거점이 아직 남아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차를 보호할 보병이 전혀 배속되지 않았다.

피카스로 가는 길은 상태가 나쁜데다 구불구불했고 교량은 통과 가능한 하중이 낮았다. 대열을 선도하는 중형전차가 교량을 망가트렸기 때문에 후속하던 경전차들은 전차가 건널 수 있는 얕은 여울목을 찾아야 했다. 이 때문에 경전차 소대는 다소 뒤쳐지게 되었다.

보병이 배속되지 않았기 때문에 경전차와 중형전차 모두 지나가는 길에 있는 여울, 커브길, 오르막길 마다 주의를 하며 지나갈 필요가 있었다. 경전차들이 막 한 고비를 넘기려 했을 때 도로 왼편의 덤불 속에서 바스락 거리는 소리가 들렸으며 갑자기 막대기에 달린 폭약을 가진 일본군 한명이 덤불속에서 튀어 나와 선두 전차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 일본군 병사는 후속하던 전차의 사격에 의해 중간에 쓰러졌다. 길을 따라 수백 야드 더 전진하자 도로의 오른편에 있는 무성한 덩쿨속에서 또 다른 일본 병사가 튀어나왔다. 이번에는 선두 전차가 당해서 오른쪽 궤도가 파괴되었다. 전차장 래퍼티 중위는 자신의 전차를 수리하는 동안 소대의 다른 전차들에게 자신의 전차를 둘러싸고 경계를 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전차들이 경계 대형을 취한지 얼마 되지 않아 적군이 공격해 왔다. 군도를 휘두르는 장교가 이끄는 약 30명의 일본군이 덤불 속에서 튀어나왔다. 일본군들은 고함을 지르고 사격을 퍼부으면서 전차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일본군 장교는 뭔가를 잘못 알고 있었는지 자신만만하여 마지막 전차로 달려들었고 차체의 기관총을 군도로 힘껏 내리쳐 반쪽을 내려고 했다. 그 장교는 곧바로 다른 전차의 기관총에 벌집이 되었다. 짧지만 요란한 교전이 끝나자 일본군은 후퇴했지만 계속해서 가까운 거리에서 경전차 소대를 소화기로 공격했다.

그때 중형전차 소대는 상당히 앞서가고 있었다. 래퍼티 중위는 파이페 중위에게 무전을 날려 그의 소대가 어려움에 처했다고 알렸다. 일본군의 사격 때문에 노출된 상태에서 이동하는 것이 어려웠고 경전차는 공간이 좁아서 기동불능이 된 전차의 승무원들 까지 태울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전차를 포기할 수가 없었다. 파이페 중위는 경전차 소대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으나 전차 한대 만을 좁은 길을 따라 돌려보낼 수 있었다. 이 전차는 불운에 처한 경전차 소대가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래퍼티 중위와 그의 부하들은 자신들의 전차의 탈출용 해치로 빠져나와 도랑을 따라 기어서 구출하러 온 중형 전차의 탈출용 해치로 들어갔다. 그리고 경전차 소대는 후퇴를 하려 했다.

일본군의 강력한 사격 때문에 이 기동은 매우 어려웠다. 다른 전차 한대가 막대기 폭약에 맞았다. 이동하는 것 보다는 정지해 있는 것이 덜 위험한 것으로 보였다. 파이페 중위에게 교신이 취해졌고 파이페 중위는 다시 중대장에게 알렸다. 그리고 경전차 소대는 그 위치에 남아 일본군이 모습을 드러내면 사격을 산발적으로 가했다.

마침내 C중대에서 다른 중형전차 소대가 도착했다. 일본군은 격퇴되었고 부대 전체가 중대 지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하루가 꼬박 지나갔다. 조금도 진격을 할 수 없었다. 전차 한대를 상실했다. 전차들은 383보병연대에 도착하지 못했다.

Committee 16, Officers Advanced Course  The Armored School, Armor in Leyte : Sixth Army Operations, 17 Oct-26 Dec 44, (1949). pp.94~97

전차에게 불리한 정글에서, 게다가 좁은 도로를 중심으로 지원하는 보병조차 없이 고립된 경전차 1개 소대를 격파하지 못한 것 입니다. 일본군의 대전차 전력이 얼마나 빈약했는지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같은 시기의 독일군 이었다면 763전차대대 D중대의 경전차 소대는 물론이고 구원하러 달려온 C중대의 중형전차 소대도 상당한 손실을 각오해야 했을 것 입니다. 실제로 독소전 초기 다소 빈약한 대전차 화력을 갖췄던 독일 보병들이 위에서 제시한 사례와 같은 지형에서 T-34나 KV 등의 강력한 전차를 상대로 보여준 실력을 보면 일본군은 장비만이 문제였던 것은 아닌 것 같기도 합니다.

전차의 성능이 보잘것 없었던 1935년의 이탈리아-이디오피아 전쟁만 하더라도 보병들이 변변한 대전차 화기 없이 경전차를 때려잡을 수 있었습니다만 불과 10년도 되지 않아 전차는 기술적으로 무서운 발전을 이뤘지요. 사실 셔먼은 그렇다 하더라도 1944년 기준으로 별볼일 없는 성능이었던 스튜어트 경전차들 조차 격파하기 어려운 상대였다니 일본 육군은 장비면에서 정말 답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2011년 8월 20일 토요일

징병제에 대한 잡상 하나

근대적인 대규모 국민동원을 처음으로 시도한 것은 혁명기의 프랑스 였지만 이것을 더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은 프로이센이었습니다. Albrecht von Roon의 군제개혁은 프로이센식의 동원체제를 확립했고 보불전쟁 이후로는 세계 각국의 모델이 되기도 했지요. 그런데 론의 군제개혁은 병력동원의 효율성에 초점을 맞춘 것 이었습니다. 징병제를 옹호하는 측에서 지지하는 "무장한 시민"의 개념과는 동떨어진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론의 군제개혁은 독일 자유주의자들이 1813년 독일 민족 정신의 발현으로, 그리고 "무장한 시민"의 상징으로 생각한 향토방위군Landwehr를 축소하고 그 대신 국가가 "통제"하는 현역 자원을 늘리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징병제를 옹호해야 하는 입장에서 이런 사실들은 골치아픈 진실입니다. "무장한 시민"으로서의 징병제를 옹호하지만 실제로 우리가 채택한 징병제는 "무장한 시민"에는 별 관심이 없었고 단지 병력자원 확보에 초점을 맞춘 프로이센 방식에 가까우니 말입니다. 그리고 사실 한국의 징병제는 프로이센 지배층의 구상과 비슷한 바탕에서 움직이고 있지요;;;; 생각하면 할수록 답답한 문제인데 좀 더 정리된 글을 하나 쓰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2011년 8월 14일 일요일

더글라스 내쉬의 「잊혀진 병사」에 대한 글 중에서

지난번에 쓴 「조선족들의 한국전쟁 회고담」에서 잠깐 기 사예르의 『잊혀진 병사』에 대한 논쟁과 이 논쟁에서 기 사예르를 옹호한 더글라스 내쉬의 글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여기서 이야기한 글은 내쉬가 Army History 1997년 여름호에 기고한 “The Forgotten Soldier : Unmasked”라는 글인데 상당히 흥미롭게 읽은 바 있습니다.
2차대전사에 대해 관심을 가지신 분들은 잘 아시겠지만 기 사예르의 회고록은 많은 오류 때문에 1990년대에 들어와 진위여부에 대한 논쟁이 한차례 진행된 바 있습니다. 내쉬는 구술작업도 상당한 수준으로 진행했기 때문에 인간의 기억이 가지는 문제점, 구술자료의 장단점을 잘 파악하고 있는데 이 글에서 그 점을 잘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 중 흥미로운 부분을 조금 인용해 보지요.

케네디Edwin L. Kennedy. Jr가 지적한 것 처럼 사예르의 회고록에는 많은 자잘한 오류들이 있다. 즉 화기의 구경, 차량의 명칭, 부대 그리고 용어 같은 것이다. 이런 오류 중 많은 것들은 영문판의 군사용어 번역이 부실하기 때문이다. 또한 애당초 사예르는 프랑스와 벨기에의 독자들을 대상으로 이 책을 썼으며 번역을 하면서 독일 군사용어에 대응되는 프랑스어 어휘를 무리해서 끼워맞춘 것이 원인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프랑스어로 번역된 용어들을 영어로 옮기는 과정에서 사소한 오류들을 더욱 심화시켰을 수도 있을 것이다. 사예르는 초고를 연필로 썼는데 알아보기 힘든 부분 때문에 처음 출판하는 과정에서 오류가 생겼을 수도 있다. 게다가 사예르는 전쟁이 끝난 뒤 잠시 프랑스군에 복무하기도 했는데 이 과정에서 그가 사용하는 어휘에 프랑스 군사용어가 들어가기도 했을 것이다.

한가지 더 명심해야 할 것은 사예르는 열 여섯살에 입대했다는 점이다. 사예르는 3년 뒤 전쟁 포로가 되어 독일군에서 제대했는데 이 때는 열 아홉살의 청년이었다. 사예르는 겨우 어린애를 벗어났을 뿐 아니라 독일어를 제대로 말할 줄도 몰랐으며 세부적인 군사지식에 대한 안목도 없었다. 전혀 다른 문화를 갑자기 접하게 된데다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보내졌는데 사예르가 자신이 경험한 것 들을 뚜렷하게 기억해 낼 수 있다면 그거야 말로 더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확실한 사실은 사예르가 사소한 사실들을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많긴 해도 전체적인 틀에서는 정확하다는 것이고 이점은 저자의 신뢰성을 충분히 뒷받침 해주고 있다. 전쟁이 끝나고 22년이 지난 뒤에 이런 사소한 사실들을 제대로 기억하고 있지 못하거나 잘못 기억하고 있다는 점이야 말로 인간답고 훨씬 믿을만 하지 않은가.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미국인 중 수개월의 전투를 경험한 뒤 대략 25년쯤 흐른 뒤에 모든 자잘한 사실들을 기억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내가 생각하기에 그런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할 것이다. 그리고 심지어 군사적인 지식을 갖춘 사람이라 할 지라도 그러지는 못 할 것이다. 대학교육을 받은 군사사 전공자나 직업군인, 혹은 취미로 2차대전을 연구하는 사람이나 군복, 무기, 군장, 그리고 차량 등을 수집하는 애호가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세부적인 사실들은 사예르에게 있어서는 사소한 것 들이었으며 이 때문에 군사적인 세부사항에 대해서는 아무렇게나, 심지어 대충 서술한 것이다.

케네디가 가장 강하게 확신하고 있는 부분은 사예르가 군복에 부착하는 표식의 위치를 잘못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 사예르는 부대의 소매띠 위치를 잘못 서술하고 있다. 이 점 때문에 필자는 현재 그로스 도이칠란트 사단 전우회장을 맡고 있는 퇴역 소령, 헬무트 슈페터씨와 서신을 교환하기도 했다. 케네디가 생각하기에는 이 점을 비난하는 것 만으로도 사예르의 회고록 전체가 조작이라는 딱지를 붙이기에 충분할 것이다.(케네디의 글을 인용하자면 “[소매띠의]  위치를 잘못 기억한다는 것은 납득할 수 가 없다”) 그로스 도이칠란트 사단이 독일육군의 정예 부대로서 부대원들의 오른쪽 소매에 소매띠를 달도록 허가받았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로스 도이칠란트 사단의 소매띠는 쥐텔린Süttelin 서체로 Großdeutschland라는 글자를 수놓은 것으로 당시에는 오늘날의 레인저 부대 마크나 다른 특수부대의 상징만큼 명예로운 상징이었다. 무장친위대 사단들 또한 소매띠를 달도록 허가받았는데 이들은 왼팔에 달았다. 사예르는 그의 회고록에서 자신과 전우들이 소매띠를 받았을 때 왼팔에 달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썼는데 이것은 명백한 오류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오른팔에 달라고 명령을 받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예르는 소매띠에 대해서 틀린 것이 맞다. 하지만 이 점이 뭘 입증해 준다는 것인가? 사예르의 회고록이 가지고 있는 장점은 세부적인 군사지식이 아니라 느낌과 분위기, 그리고 경험이다. 소매띠의 위치 같은 내용은 사예르가 너무나 뚜렷히 기억하고 있는 공포나 무용담과 비교하면 하잘데 없는 것에 불과하다. 사예르는 그저 소매띠를 어디에다 달았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일 수 있다. 2차대전 시기 독일군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지만 이런 오류가 그렇게 까지 터무니 없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우리가 앞서 살펴본 것과 같이 사예르는 이런 세부적인 사실에 대해 부주의한 면을 자주 보였다. 그리고 실제로 이런 세부적인 사실들을 잊어버리는 것은 참전용사들에겐 흔한 일이다. 나는 해외근무기장Overseas service stripes을 어느 쪽에 다는지 모르는 2차대전 참전용사와 이야기를 나눈 기억이 있다. 필자의 조부는 1944년 6월 6일 82공수사단 소속으로 생-메르-에글리제Sainte-Mère-Église에 강하한 분인데 자신이 82공수사단 마크를 달았는지 비공인 508강하연대 마크를 달았는지 기억하지 못하셨다. 그가 노인이어서가 아니다. 단지 많은 사람들이 세부적인 지식들을 별것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부대 휘장과 같은 것들을 잘못 기억하고 있다고 해서 사예르의 이야기가 진실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은 사소한 것에 얽매여 큰 것을 바로 보지 못하는 짓이다.

“The Forgotten Soldier : Unmasked”, Army History No.42(Summer, 1997), pp.15~16

더글라스 내쉬는 그의 대표작 Hell's Gate: The Battle of the Cherkassy Pocket January - February 1944에서 잘 보여주었듯 전쟁을 이야기 하면서 그 속에 있는 사람의 이야기를 소홀히 하지 않습니다. 이 점은 제가 내쉬의 책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위에서 인용한 것 처럼 내쉬는 사예르의 회고록을 둘러싼 논쟁에서 군사적인 지식들의 오류를 근거로 비판하는 측에 대해 비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내쉬가 구술 경험이 풍부하기에 가능한 것이기도 한데 그는 인간의 경험과 기억이 전쟁을 어떻게 재구성하는지 잘 파악하고 있습니다. 아래에 인용한 조선족들의 경험담에서도 잘 나타나지만 군사사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과 전쟁을 경험한 사람들은 관심사가 같을 수가 없고 전쟁을 대하는 태도도 근본적으로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전쟁은 근본적으로 인간의 행위이지만 전쟁사를 공부하다 보면 그 속의 인간이 보이지 않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쉬와 같은 관점을 가진 역사가들은 반가운 존재입니다.

2011년 8월 7일 일요일

조선족들의 한국전쟁 회고담

한국전쟁에 참전한 조선족들의 회고담 모음집을 읽는 중인데 꽤 재미있습니다. 한국전쟁시기 중국군 수뇌부가 미군의 제공권 장악과 높은 기계화를 두려워 했다는 점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일선 병사들의 기억 속에는 그런 공포가 한층 더 강하게 자리잡았던 것 같습니다. 이 책에서 흥미롭게 읽은 대목을 조금 인용해 보지요.

적기의 폭격은 영화에서 보는 것 보다 훨씬 더 가렬하였다. 하늘은 타래치는 검은 연기와 뽀얀 먼지로 뒤덮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고막이 터질듯한 련속적인 폭발소리에 땅이 뒤집어지는 것 같았고 생사를 가늠할 수 없었다. 아군부대가 마을에 들었다는 소문이 나면 폭격이 사정없이 들이닥쳤다. 폭격이 즘즉해지면 서로 부르는 소리, 우는 소리…… 동네는 처참한 정경으로 수라장을 이루었다. 폭격당할 때에는 살아남을 사람이 있을 것 같지 않았으나 폭격이 끝나고 보면 그래도 살아남은 사람이 많았다.

(중략)

적기의 공습은 수시로 되였다. 우리는 보총, 기관총으로 낮게 뜨는 적기를 쏘아 떨구겠다고 무등 애를 써보았으나 맞을리가 없었고 정작 공습이 시작되면 폭탄을 피하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적들의 공중우세로 하여 우리는 얼마나 많은 희생을 냈는지 몰랐다.

한번은 아군의 야전병원에 적의 전투기 네대가 날아와 기관포사격을 하고 뒤이어 폭격기가 날아와서 폭격하여 우리는 희생자 5명을 내였다. 1차 전역때 남조선에서 참군한 한 전사는 폭격에 목이 거의다 떨어졌다. 그리고 조선 평안남도에서 참군한 리무석이라는 전사는 두 다리에 관통상을 입었는데 처음에는 정신이 말똥말똥하였다. 담가에 눕혀가지고 얼마 안가니 두 다리가 고무풍선처럼 부어나더니 조금 지나더니 눈을 감고 말았다. 조선전쟁은 전후방이 없었고 죽는데에도 군대와 백성의 구별이 없었다.

적기의 폭격은 전방과 후방을 가리지 않았고 후방에 있는 백성들도 많이 죽었다. 그때 한 전사는 된감기에 걸려 양지쪽 산비탈에 누워서 햇뱇쪼임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200메터밖에서 터진 포탄파편이 그 전사의 머리를 명중하여 당장에서 즉사하였다. 한 녀성은 아이를 업고 있다가 적기의 공습을 받았는데 적기의 기관포탄알이 그녀의 뒤흉추상부로부터 복부로 관통하여 그 자리에서 죽었으나 업혀있던 아이는 아무 일도 없었다.

적의 폭격기편대가 앞에 한대, 뒤에 두대 이렇게 사람인자를 이룬 편대로 되여 날아가면 온 하늘이 떨리였다.

배태환 구술, 「정전전후」,  정협 연변조선족자치주 문사자료위원회 편, 『돌아보는 력사』(료녕민족출판사, 2002), 262~265쪽
‘비행기 사냥군조’가 미제의 공중비적을 파리 잡듯 때려잡는 북한 쪽 선전보다는 훨씬 솔직한 이야기 같습니다. 물론 조선족들의 회고담도 선전목적이 있기 때문에 무용담이 차지하는 비중이 많지만 북한쪽의 기록에 비하면 훨씬 솔직하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인민군 5사단 소속으로 참전한 다른 조선족의 증언도 비슷합니다.

며칠후 상급에서는 우리 부대에 남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우리는 밤낮 걸어서 락동강반에 이르렀다. 락동강반에 이르니 우리더러 나가보라는 것 이였다. 우리 진지의 포 42문이 한방도 쏘아보지 못하고 적기의 공습에 몽땅 녹아났다. 망원경으로 내려다보니 강변에 시체가 한벌 깔려있었고 땅우에는 피가 질벅하였다. 도하하던 사람들이 실패한 것이였다. 그때에야 우리는 무엇이 전쟁이란 것을 알게 되였다. 우리는 누구나 말 없이 머리를 떨구고 돌아왔다.

김리정 구술, 「청춘도 사랑도 다 바쳐」, 위의 책 184쪽
몇몇 구술은 미군의 현대화된 무기에 대한 공포가 잘못된 지식과 결합해서 군대괴담 수준이긴 한데 그것도 나름대로 재미있습니다. 인민군 4사단 소속으로 참전한 다른 조선족은 미군의 화력과 장비에 대해 이렇게 회고하고 있습니다.

남북전쟁이 일어나 수원전투까지는 인민군과 국방군과의 싸움이였다. 그러나 평택전투부터는 전쟁의 성격이 변하였다. 유엔군이 참전하여 전쟁은 국제전쟁으로 승격하였다. 미국 태평양전선사령부는 팬프리트의 륙전대를 부산에 등륙시켰다. 평택까지 다가든 적들은 땅크와 122미리 대포로 우리와 맞섰다. 그들은 매 한메터에 포탄 하나씩 떨구었다. 미 공군도 B-29폭격기로 무차별 폭격을 가하였고 F-48(F-84의 오기인 듯) 전투기는 지면을 누비면서 소사하였다. F-48전투기가 지면을 소사할 때면 매 한메터 사이에 기관포알 하나씩 떨구었다. 적들의 화력 앞에서 우리는 머리를 쳐들 수 없었다.

(중략)

1950년 8월, 우리는 락동강반의 신반리(경상남도 의령군)까지 쳐들어갔다. 락동강전투는 가렬처절하였다. 적들은 원자무기를 제외한 모든 현대화무기를 썼다. 그들은 비행기 폭격을 한 다음 뒤이어 연막탄을 쉬임없이 던졌다. 그러면 옆의 사람마저 보이지 않아 전투를 할 수 없었다. 그들은 또 세균무기를 썼다. 그러면 전사들은 세균에 감염되어 설사를 하고 토하면서 전투력을 상실하였다. 또 독가스탄을 썼는데 가스탄이 터진후 반시간 동안은 호흡을 할 수 없었다. 병력이 집중되여 있을만한 곳에는 비행기로 류산탄을 투하했다. 류산탄은 공중에서 폭발했기에 파편 쪼각들이 비오듯 쏟아졌고 그 살상력은 다단하였다. 지금도 나의 머리엔 류산탄 파편 두개가 박혀있다.

(중략)

1951년 3, 4월에 서울을 해방하고 부산까지 쳐들어갈 계획이였으나 적군의 강력한 저항을 받았다. 특히는 적들의 공중우세로 하여 아군은 어쩔수 없었다. 우리 부대가 순천에 있을 때 적들은 운수기로 땅크를 투하하였다. 땅크는 공중에서 발동을 걸고 있었는데 땅에 떨어지자마자 앞으로 달리면서 싸울 수 있었다.

류호정 구술, 「피로 바꾸어온 평화」, 앞의 책 232~236쪽

류호정의 구술은 군사문제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이라면 잘못된 점을 쉽게 찾아낼 수 있을 정도로 세부적인 사실에서는 틀린 것이 많지만 나름대로 재미있는 부분이 많습니다. 일단 낙동강 전투에 대한 회고 담에서 세균무기와 독가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 재미있습니다. 이 부분은 중국이나 북한측 참전자들이 미국의 세균무기 사용을 어떻게 사실로 받아들이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갑작스러운 질병의 창궐은 전쟁터에서 쉽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지만 주입된 여러가지 지식이 결합되면 훗날의 기억에서는 다른 방식으로 나타나기도 하는 것 입니다.

“낙동강 전투 때 설사병이 돌았었지” → “미군이 항미원조전쟁에서 세균전을 했다는군” → “아하. 미군이 낙동강 전투에서 세균무기를 썼구나”

실제로 구술을 받다 보면 당시의 소문에 불과했던 것들이 개인적인 경험과 결합되어 사실로 받아들여지는 경우를 볼 수 있는데 이점을 고려하면 류호정의 이상한 회고담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공중에서 투하되는 전차와 같은 미국의 첨단기술에 대한 이야기는 1990년대에 운동권에서 많이 읽힌 김진계의 회고록인 『조국』에도 비슷한 내용이 있을 정도로 당시 공산군이 미국의 군사기술을 어떻게 보았는지 잘 보여주는 내용입니다.(김진계의 회고록에서는 헬리콥터가 고지 정상으로 탱크를 실어 나르죠;;;;;)

체르카시 전투에 대한 걸출한 저작을 낸 군사사가 내쉬(Douglas E. Nash)는 기 사예르의 회록에 대한 논쟁에서 참전자들의 기억에 나타나는 군사지식의 오류문제에 대해 아주 재미있는 지적을 한 바 있습니다. 참전자들의 전쟁 기억은 세부적인, 혹은 전문적인 부분에서 종종 부정확하고 엉터리로 보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그들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 입니다. 조선족들의 회고담도 많은 부분에서 오류가 보이고 종종 과장된 내용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무시할 필요는 없을 것 입니다.

2011년 8월 4일 목요일

민폐

유별나게 군대와 인연(?)이 많으셨던 시인 모윤숙 여사가 5ㆍ16직후 쿠데타를 지지하는 군부대 순회강연을 다닐때의 일화랍니다.

어느 연대 마당에 이르렀을 때에는 벌써 오후가 되어 싸늘한 산바람이 일고 있을 때였다. 2~3,000명으로 헤아일 수 있는 사병이 모두 땅바닥에 앉아 있었다. 나는 준비된 사회자의 소개에 의해 연단에 올라섰으나, 도무지 마음이 편안치가 안았던 것은 내 말이 무슨 말이던 땅바닥에 앉아 듣는 사병에게는 너무 지나치는 푸대접이 아닐가 생각되어서 무엇보다 한 연대에 하나씩 속히 대강당을 지어서 그들로 하여금 안정된 자리를 마련해 줌이 옳겠다고 생각되었다.

毛允淑,「一線에 다녀와서 : 巡回講演 感想記」, 『國防』117호(1962. 1), 114쪽

군대를 다녀오신 분들이라면 이 글을 읽고 살짝 짜증이 나실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때의 군대는 극도로 열악한 복무환경을 자랑하고 있었으니 요즘 군생활과는 비교할 것도 아니겠습니다만.

쿠데타 직후 ‘군사혁명’을 지지하는 지식인들의 목소리가 여기 저기서 터져 나왔고 우리의 모윤숙 여사도 그 중 한 분 이셨다지요. 당시 군부에서는 쿠데타의 정당성을 알리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실제로 상당한 효과를 거두기도 했습니다. 당연히 군대 내에서도 정훈교육을 통해 관련 교육이 이루어졌고 모윤숙과 같은 지식인들의 강연은 그 중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맨 땅바닥에 앉아서 지루한 강연을 들어야 했던 병사들은 어떤 생각이었을지 궁금하군요. 모윤숙이 불편함을 느낄 정도였으니 당사자들은 어떤 심정이었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