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군의 신화와 진실』 게하르트 그로스 저, 진중근 역(길찾기 2016)
독일 장교단과 그들의 군사사상은 수많은 군사사 연구자들을 사로잡는 주제입니다. 2차대전 이래로 수많은 연구자들이 전쟁 초기 독일이 승승장구한 원인은 무엇이며, 독일이 우수한 군대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철저하게 패배한 원인은 무엇인가를 탐구해 왔습니다. 냉전시기에는 전쟁 초기의 승리에 초점을 맞추고 독일군의 장점에 주목하는 연구가 많았다면 1990년대 이후로는 독일군과 그 군사사상의 한계에 대한 비판적 연구가 점차 늘어나는 추세라고 보여집니다. 특히 이런 경향은 미군의 주도하에 작전사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된 미국 학계에서 두드러졌습니다. 그러나 언어적 장벽 때문에 독일어권의 연구는 활발하게 소개되지 못했습니다. 독일인들은 자신들의 역사적 실패에 대해 어떤 시각을 가지고 있었을까요? 최근 길찾기 출판사에 발행한 『독일군의 신화와 진실- 총참모부 작전적 사고의 역사』는 이러한 90년대 이후의 경향을 반영한 독일 학계의 최신 연구성과입니다. 저자인 게하르트 그로스는 2000년대 초중반 국제 군사사학계의 주목을 끌었던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에 참여해 이름을 알린 연구자로 독일의 전통 군사사상에 대한 독일 학계의 권위자라 할 수 있습니다.
먼저 이 책의 눈에 띄는 장점을 이야기 하는게 좋겠습니다. 영어권의 독일 작전사 연구는 대개 군사적인 측면에 집중하는 경향을 보여왔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독일군사상의 기원과 한계에 천착한 미국의 로버트 시티노(Robert Citino), 전간기 독일군 교리의 발전을 연구한 제임스 코럼(James Corum) 등이 당장 떠오르는 군요. 그런데 그로스는 군사적 측면에 더해 사회적, 정치적 측면도 중요하게 고려합니다. 군사사상의 형성을 군사적 측면 뿐만 아니라 사회적 집단인 독일 장교단의 세계관, 정치적 이해관계라는 측면에서도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은 독일이 두 차례의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중요한 원인인 장교단의 전략적 식견 부족을 설명하는데 유용합니다. 1차 대전에서는 실패할 경우 마땅한 대안이 없는 양면전쟁을 단지 작전적인 차원에서 실행하고, 2차 대전에서도 작전적 수준의 우위만을 믿고 소련과의 전쟁에 돌입한 것 등을 예로 들 수 있겠군요. 이 점은 저자가 독일인이라는 데서 기인하는게 아닐까 싶습니다. 국제 정치에서 독일이 우위에 서야 한다는 민족주의적 열망, 러시아와 동유럽에 대한 인종적 멸시 등이 전쟁계획에 영향을 끼치고 결국 독일 민족국가의 파멸로 치닫게 했다는 설명은 여러 모로 설득력이 높고 교훈적입니다.
군사적인 측면에서는 독일의 지정학적인 위치가 군사사상의 형성이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논의는 미국의 시티노도 한 바 있는데, 시티노가 그 시기를 17세기 프로이센의 형성과정으로 까지 올려잡는데 비해 그로스는 독일 제국의 형성과 19세기 산업혁명으로 인한 군사기술의 발전에서 기원을 찾는 점이 차이점 입니다. 저자는 독일 제2제국이 유럽의 정 중앙에 위치해 전략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있고 국가가 형성될 무렵에는 잇따른 군사적 혁신으로 군대의 규모가 증가했기 때문에 독일 군사사상가들은 독일의 지리적 위치를 활용한 공세 중심의 군사사상을 가지게 됐다고 설명합니다. 이러한 설명은 위에서 언급한 정치적인 비판과 밀접하게 연결됩니다. 근본적으로 독일 군부가 독일을 중심으로 하는 국제질서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전쟁을 피할 수 없었고 그 결과는 1차대전으로 귀결되는 양면전쟁이었다는 겁니다.
이 저작은 군사학계의 최신 연구성과를 집약한 서적입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것 처럼 게하르트 그로스는 ‘슐리펜 계획 논쟁’에 참여하면서 국제적으로 이름을 알렸습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19세기 후반~1차대전 시기를 논한 5장과 6장이 가장 훌륭했다고 생각됩니다. 이 책에서는 10여년에 걸친 슐리펜 계획 논쟁의 결과를 반영하여 슐리펜 계획과 소(小)몰트케의 전쟁계획을 구분하는 새로운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이 점은 군사사에 관심을 가진 분들이라면 반드시 알고 넘어가야 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영어권을 중심으로 한 외국학계에서 진행된 논쟁이 국내에 지속적으로 소개되지 않았기 때문에 기존의 학설에 익숙한 분들이시라면 조금 어색함을 느끼실 것 같기도 합니다. 물론 이 책에서도 ‘슐리펜 계획 논쟁’에 대해 어느정도 설명하고 있긴 합니다만 조금 아쉽습니다.
1차대전과 2차대전 사이의 전간기 바이마르 공화국의 독일군과 2차대전 시기 독일 국방군에 대해서는 매우 비판적인 관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영미권과 이스라엘 학계에서 독일 국방군의 전쟁 수행을 높이 평가하는 연구자가 많았다는 점을 생각하면 꽤 흥미롭습니다. 이 시기의 독일군에 대한 비판은 사실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닙니다. 독일 군부의 전략적 식견 부족, 오직 작전이라는 군사적 수준으로 전쟁을 수행해 나간 점은 영미권 군사학계에서도 지속적으로 비판해 온 바 있습니다. 또한 히틀러와 독일 군부의 관계에 대한 평가도 완전히 새로운 것이라고 할 수 는 없을 것 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3제국 시기 민군관계에 대한 서술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저자는 독일 군부가 히틀러에 대해 맹목적으로 충성을 하다가 전황의 악화에 따라 장교단의 충성에 균열이 가는 모습을 매우 잘 서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전쟁 직후 패전의 책임에서 벗어나기 위해 전쟁 지도의 실패를 히틀러 한 사람의 책임으로 돌렸던 독일 군부를 날카롭게 비판합니다. 히틀러가 군사적인 측면에서, 특히 전략적으로 일정한 통찰력을 보유했지만 본질적으로 아마추어적인 전략가에 불과했다는 저자의 결론은 공정한 평가라고 생각이 듭니다. 독일 군부에 대해서는 매우 비판적인데, 최소한 1차대전 말기의 독일 군부는 새로운 작전-전술 단위의 해결책을 마련하는 등 제한적 혁신이 있었지만 2차대전 말기에는 군사적 해결책 보다는 국가사회주의에 기반한 사상 무장에 의존하는 등 퇴행적인 면을 보였다는 것 입니다. 저자는 이점이 고질적인 전략적 시야의 부족과 결합해 독일의 철저한 패배로 이어졌다고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이 책의 마지막 장에서는 냉전 시기 독일군부의 작전적 사상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한국에서는 상대적으로 생소한 분야라고 생각되며 그 때문에 이 책의 가치를 더욱 높여준다 봅니다. 독일이 패권을 다투는 강대국으로서 국가전략을 수행하던 시기에 형성된 군사사상이 독일의 몰락 이후에는 냉전이라는 새로운 환경에서 생명력을 유지하는 과정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다만 냉전 시기를 다룬 부분은 상대적으로 내용이 소략해 에필로그 같은 느낌을 주는게 아쉽습니다.
전체적으로 평을 하자면, 국제정치와 군사문제에 관심을 가지신 분들에게는 필독서라고 생각됩니다. 특히 국내에 드물게 소개된, 독일인의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바라본 독일 군사사라는 점에서 더욱 더 가치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최근 군사서적을 활발히 간행하고 있는 길찾기 출판사가 처음으로 발행한 학술서적인 만큼 큰 호응을 얻었으면 하는 기대가 있습니다.
E북으로 좀 내줬으면 하네요. 집에 공간이 없다보니 책사기가 겁나요...
답글삭제해외 출판사들이 불법복제 문제 때문에 한국에는 전자책 판권을 잘 안줍니다.
삭제혹 하고 사버렷습니다. 서문 읽다가 약간 고개를 가웃거린게.. 영문판보다 먼저 번역출간되었다는 점이죠. 뭐 서문 마지막에 나를 알아보다니 훌륭한 친구일세 번역한 친구!! 라고 해석할만한 문장이 있더군요. 살짝 사람은 다 똑같다는 생각이 들게 하더군요.
답글삭제의외로 영어권 시장에서는 독일의 군사사 연구를 많이 번역하지 않습니다. 독일어권 연구는 대개 전공자들 사이에 읽히는 수준으로 끝나는 듯 합니다.
삭제주문할수밖에 없는 서평이었습니다..
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