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익순 대령(1917~1997)은 한국전쟁 당시 제9사단 30연대장으로 백마고지 전투에서 맹활약 했고 전쟁 말기에는 수도사단 부사단장으로 금성전투에 참가했다가 포로가 된 경험을 가진 인물입니다. 육사2기로 군 경력도 훌륭했지만 전후 진급운이 없어서 대령으로 한직을 전전하다가 예편했습니다. 그는 만주국군 소속으로 노몬한 전투에 참전한 특이한 경험이 있는 인물입니다. 게다가 장갑차병으로 소련 기갑부대와 기갑전투까지 경험했으니 특기할 만 합니다. 임익순 대령 회고록의 노몬한 전투 부분을 발췌해 봅니다. 개인의 회고담인 만큼 약간 과장되었거나 부정확한 이야기가 있지만 그대로 인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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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같은 일과로 나날을 보낸 지 3개월이 지난 때였다. 만주 서북부 만소 국경에 노로 고지라는 지역이 있었다. 이 지역의 국경선인 강을 소련군이 점령한 사건이 발발했다. 이름하여 ‘노몬한 사건’이다.내가 속해 있던 야나세 부대도 그 전투에 출동하게 되었다. 나는 장갑차 분대장으로 참전하려고 출동했다.
10월 초였지만 벌써 초겨울 날씨였다. 사람의 키보다 높은 이름 모를 풀들이 그 넓은 평야를 온통 뒤덮고 있었다. 높은 고지가 없어 전체적으로 나지막한 구릉으로 구성된 습지대였다. 땅은 거무스름한 모래로 되어 있어 비가 오면 그위를 걸어가거나 자동차로 지나가는 일이 불가능할 정도다. 구릉과 구릉 사이의 습지대에는 약 1미터 간격으로 물웅덩이가 있었고 그 웅덩이에는 크기가 30센티에서 1미터까지 달하는 물고기들이 살고 있었다. 그 잉어처럼 생긴 물고기를 잡는 데 그물이나 낚시는 필요하지 않았고 곡괭이나 삽자루만 있어도 몇 마라 잡는 것은 식은 죽 먹기처럼 쉬웠다. 물고기의 맛이 훌륭한 편은 아니었지만 아쉬운 대로 먹을 만했다. 양념이라도 해서 요리를 했다면 더 먹음직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물고기들은 잉어와 생김새가 비슷했지만 수염이 달려있지 않아서 우리는 ‘바보잉어’라고 이름을 지어주었다.넓고 넓은 초원에 백양나무가 군데군대 서 있었고 푸른 하늘에는 뭉게구름이 둥실둥실 떠다니는 풍경이 마치 그림 같았다. 대포소리만 들리지 않는다면 인간이 사는 땅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였다.
우리는 기차를 타고 만소 국경에 있는 만추리라는 국경 역을 향해 1주일 밤낮을 달리다가 중간에 가설 역에서 하차했다. 길도 없는 곳이었다. 밤이 새도록 자동차 전조등도 키지 못한 채 먼저 간 부대의 발자취를 더듬거리며 따라갔다. 날이 샐 무렵 어느 진지 같은 곳에 도착했다. 선발대가 본부를 설치해 놓았으나 전선은 아직 멀리 있다고 했다. 우리는 조금 더 앞으로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소련군은 모두가 경기갑으로 무장되어 있으며 그 유명한 ‘코사크 기병’이 주력이라고 했다. 기동력이 뛰어나고 화력도 막강하며 일명 ‘하바리(종달새)’라고 불리는 소형 전투기도 보유하고 있다고 했다. 그들은 노로 고지 앞에 있는 하루하 강의 수면에 30센티 정도 두께의 철판으로 다리를 놓고 밤을 틈타 공격하곤 했다. 공중에서는 전투기로 아군 후방 깊숙한 곳까지 폭격을 가하고 기총소사도 했다. 적의 기갑군도 그 위력이 대단했지만 코사크 기병도 무시무시한 공격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이 타고 다니는 말은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아라비아종 보다 두 배가 큰 종이었다. 그 거대한 말을 타는 병사 역시 몸집이 2미터는 족히 넘는 거구였다. 그들이 1미터가 넘는 장검을 휘두르며 돌격해오는 모습을 상상만 해도 소름이 끼칠 것이다.여기에 대항하는 아군은 어떠했을까? 만주 서북부에 위치한 흥안남 북성의 몽고족 기병대가 합류해 결성된 2개 사단과 철도 경비를 맡고 있는 독립 수비대 1개 사단으로 적을 막아내 국경선 밖으로 몰아냈다. 이것이 1차 노몬한 사건이다.
그러나 소련군이 재침공을 할 기미가 보이자 이쪽에서도 정규군과 공군을 동원하기 시작했다. 그 무렵에 우리 부대도 출동명령을 받은 것이다. 우리의 임무는 보급품과 탄약을 일선으로 수송하는 군용트럭수송대를 엄호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적들과 정면충돌한 것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 우리 장갑차부대는 2개 중대로 편성되어 1개 중대가 3개 소대, 1개 소대가 3개 혹은 4개 분대로 편성되었다. 1분대라고는 해도 장갑차 1대에 분대장이 차장이었다. 장갑차 한 대 즉, 1개 분대(1대)에는 분대장 이하 포수와 사수, 운전수 등 8명에서 9명이 타고 있었다. 그러나 나의 분대에는 소대장과 연락병이 함께 타 소대본부를 구성했으므로 총 인원이 10명이 되어 공간이 비좁기도 했고 분대장의 정위치인 포탑에 소대장이 있어서 나는 포수자리에 앉게 되었다.
한번은 수송대 엄호임무를 띠고 전선으로 가는 중이었는데 구릉을 몇 개 넘어 앞에 있는 골짜기에 코사크 기병대 1백여명이 모여있는 것이 보였다. 코사크 기병대는 우리 장갑부대를 제일 무서워한다는 정보가 입수되어 있었다. 그래서인지 소대장은 간발의 차이를 두지 않고 중기와 경기 등 화력을 총동원하여 공격을 가했다. 허를 찔린 코사크는 민첩한 행동으로 도망했으나 말보다는 자동차가 속도가 빠른 것은 그들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코사크는 약간의 응전도 했으나 수많은 시체와 부상자를 남겨두고 초원을 지나 사라졌다.의외의 전과를 거둔 우리 소대는 전리품을 챙기고 있는데 어느 틈에 다가왔는지 적의 기갑부대 십여 대가 사격을 하며 다가왔다. 우리는 중과부적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했지만 그대로 후퇴를 할 수는 없었다. 우리는 전리품을 버려둔 채 전원이 승차해 대전차포로 응사했다. 50밀리 밖에 안되는 작은 포였으나 위력도 좋았고 명중률도 높은 편이어서 사격만 제대로 하면 효과를 올릴 수 있었다.적의 기갑 두어 대를 격파하고 나니 뒤에서 엄호사격이 시작되었다. 이틈에 나도 차를 돌려서 후퇴했다. 아군진지로 돌아와서 보니 소대장이 중상을 입었다. 그가 즉시 후송되고 내가 소대장 대리를 명 받았다. 그 다음날 나에게 하사 진급명령이 내려졌다. 원래 전투임무를 수행하는 부대가 아니기 때문에 어려운 임무는 소대장이 이끄는 소대가 나가고 나는 비교적 쉬운 임무를 담당했다.
아무 것도 없는 광활하기만 한 지역을 무슨 이유에서 피를 흘리며 뺏고 빼앗기는가에 대한 의문을 일개 사병 신분인 나로서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말로만 듣던 반공사상교육을 그곳에서 철저하게 배웠고 더불어 반공사상이 날로 투철해졌다.
길고 긴 만소 국경선에서 양측 수비대들이 간혹 충돌을 하고 있었지만 그처럼 대대적인 전투는 동만주 국경에서 한 번 있었고 노몬한 전투가 그 두 번째였다. 며칠 지나 일본군 몇 개 사단과 중포부대가 도착해 전투에 임했으나 일본군 사단이 9명의 생존자만 남기고 전멸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후 또다시 강력한 중장비로 무장한 사단 등의 증원군이 도착해 사기충천하여 총공격 준비를 완료한 상태였다. 그러나 총공격 전날 극적으로 휴전이 성립되었다. 그때 소장파 장교와 사병들의 반란이 일어나 고급장교와 장성이 다수 죽었다고 들었다. 소장파들은 억울하게 죽은 전우들의 원수를 언제 누가 갚을 것이냐고 휴전결정에 항의 했다고 한다.
포성도 멈추고 비행기 소리도 들리지 않게 되면서 전선이 불안할 정도로 고요했다. 멀리 보이는 초원에는 적색과 백색의 깃발이 줄지어 세워져 있고 그 너머 지평선에는 뭉게구름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어제까지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였다고 할 수 없을 정도로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우리 부대는 12월 초에 원대로 돌아왔다.
임익순, 『내 심장의 파편』 (시월, 2013) 61~65쪽.
노몬한 전투가 남의 나라일이 아니었군요. 잘봤습니다. 그건 그렇고 그 장갑차기 어떤거였는지 궁금하군요
답글삭제저자의 회고와 정확히 일치하는 장비가 뭔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일본제 기갑차량 중 저자의 회고에 딱 들어맞는게 없죠.
삭제노몬한 전투를 한국사람 시점에서 보니 신선하네요. 근데 다른데서 보기에는 일본군의 대전차 대응이 편제나 장비 양쪽 면에서 허술했기 때문에 팡참 비참하게
답글삭제싸웠다는 식의 서술을 몇번인가 봤는데 이쪽이 특수케이스로 봐야 할까요.
잘 아시겠지만 노몬한에서 소련-몽골 연합군이 상실한 기갑차량(전차+장갑차)이 거의 400대 가까이 됩니다. 여기에 여단장 1명에 여단 참모장 1명을 포함한 전차부대 장교급 130명이 전사할 정도로 소련 기갑부대가 졸전을 했습니다. 특이한 케이스는 아닌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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