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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0월 25일 일요일

미 24보병사단이 실시한 T-34에 대한 2.36인치 바주카포 관통실험

잡담 하나.

T-34 쇼크는 한국전쟁 초기의 지상전 전개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입니다. 그 중에서 특히 유명한 이야기는 보병의 주력 대전차화기였던 2.36인치 바주카포가 T-34를 상대로 무력함을 드러냈다는 것 입니다. 잘 아시다 시피 전쟁 초기에 투입된 미군 보병도 2.36인치 바주카포를 주력 대전차 화기로 운용했고 미군 역시 한국군과 마찬가지로 2.36인치 바주카포가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는 것에 충격을 받게 되지요. 그래서 미군은 2.36인치 바주카포의 T-34에 대한 관통력을 구체적으로 평가하기 위해 실험을 실시하게 됩니다. 그 중에서 잘 알려진 것이 1950년 8월 제24보병사단에서 실시한 관통 실험입니다. 보고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950년 8월 25일

주제: 소련제 T-34 전차에 대한 2.36인치 바주카포의 효과 
수신: 제24보병사단장

1. 사단장의 구두 명령에 따라 1950년 8월 24일 두대의 소련제 T-34전차에 2.36인치 바주카포의 성형작약탄(HEAT)으로 사격한 효과를 정리한 도표를 첨부하였다. 

2. 통계자료를 평가할 때 다음과 같은 요인을 고려해야 한다.
a.실험에 사용한 전차들은 화재로 인한 고열에 영향을 받은 상태였다. 
b.후방에서 사격한 경우를 제외한 모든 사격은 최대한 90도에 가까운 입사각을 얻기위해 전차 보다 15피트 높은 위치에서 행해졌다. 

3. 전차의 조립 상태는 다음과 같다.
a. 포탑: 주조 공법으로 일체형으로 만들어 졌으며 장갑의 두께는 부위에 따라 2¼에서 2 ¾인치 사이이다. 
b. 차체: 적층 강판으로 조립되어 있다. 
(1)차체 전면을 포함한 차체 상부의 장갑 두께는 1¾인치이다. 차체 측면의 경사각은 약 60도이고 차체 정면의 경사각은 약 45도이다. 
(2)차체 후부의 장갑 두께는 1½인치이며 마찬가지로 적층 강판으로 조립되어 있다.
(3)차체 하부의 장갑 두께는 ⅞인치이며 연철로 만들어졌으며  6인치 정도의 가용접으로 차체와 결합되어 있다. 
(4)궤도의 재질은 다량의 구리를 함유한 질 낮은 철로 판단된다. 

4. 사격 실험을 통해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었다.
a. 2.36인치 바주카포는 
(1) 입사각이 90도일 경우 2½인치 두께의 용접 포탑을 관통할 수 있을 것이다. 대부분의 명중탄은 입사각이 90도가 아니어서 튕겨나갔다. 
(2) 전면 장갑의 경사각 때문에 차체 정면에서는 관통을 할 수 없을 것이다. 
(3) 차체 하부의 1¾인치 두께의 장갑은 관통할 수 있을 것이며 관통 효과도 좋을 것이다. 궤도와 차체 상부의 틈을 명중시킬 수 있다면 전차 승무원을 살상하거나 그 부분에 적재된 포탄을 유폭시켜 전차를 전투불능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틈새의 폭은 3인치에서 4인치 사이에 불과하다. 
(4) 차체 후부의 1½인치 장갑을 쉽게 관통하고 변속기를 파괴할 수 있을 것이다. 
(5) 전차의 현가장치에 대해서는 무력할 것이다. 
b. 차체 하부는 매우 부실하게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중(重)대전차지뢰에 극도로 취약하다. 

5. 3.5인치 바주카포는 T-34를 모든 방향에서 완벽하게 관통할 수 있었다. 포탑에 명중한 3.5인치 포탄은 관통하는데 그치지 않고 관통한 반대쪽 장갑의 내측에 직경 6인치, 깊이 3/8인치의 피해를 입혔다. 

John Wetherholt 중령, 사단 병기장교1)


이 보고서에 첨부된 도표는 다음과 같습니다.


표1. T-34/85에 대한 2.36인치 바주카포 HEAT탄 사격 결과(1950. 8. 24)
거리
(야드)
입사각
번호
장갑두께
(인치)
명중 부위
효과
100
90
1
포탑 중앙
관통 실패, 1⅜인치를 뚫음
100
90
2
포탑 중앙
포탑 상단 내부까지 완벽히 관통. 관통흔의 크기는 내측 ⅞인치, 외측 1과 1/16인치.
100
85
3
포탑 중앙
내부까지 완벽히 관통. 관통흔의 크기는 내측 ⅜인치, 외측 1과 1/16인치.
50
35
4
포탑 좌측
약간의 손상을 입히고 튕겨나감.
50
45
5
포탑 하부
내부까지 완벽히 관통. 관통흔의 크기는 내측 1인치, 외측 ½인치.
40
65
6
포탑 하부 모서리
내부까지 완벽히 관통. 관통흔의 크기는 내측 1인치, 외측 ½인치.
50
45
7
4
포탑(터렛링 부위의 1½되는 부분)
2인치 정도를 뚫은 흔적. 크기는 1½×1¼인치.
50
85
8
차체상부 중앙
내부까지 관통하는데 실패. 피격된 흔적의 크기는 직경 1¾인치, 깊이 1½인치.
50
85
9
차체상부
내부까지 관통하는데 실패. 피격된 흔적은 길이 2¾인치, 폭 1인치, 깊이 1과 9/16인치.
50
85
10
차체상부 모서리
관통하지 못하고 튕겨나감.
40
85
11
차체상부
내부까지 완벽히 관통. 관통부위의 크기는   ½인치.
60
45
12
차체하부 중앙, 궤도와 차체상부 사이의 틈
내부까지 관통하는데 실패. 1⅜인치 정도를 뚫음.
50
90
13
차체하부
완전 관통. 관통흔 직경 ⅞인치
50
90
14
차체하부
완전 관통. 관통흔 직경 ⅞인치
50
85
15
엔진 배기구 커버
내부까지 관통하여 브레이크 드럼에 경미한 손상을 입힘.
50
65
16
후부 점검창 경첩
½크기의 경첩 볼트에 명중하여 장갑을 ¾인치 가량 뚫음. 관통 실패.
50
45
17
차체 후부 좌중앙 좌측 귀퉁이
내부까지 완전히 관통하여 트랜스미션 하우징까지 피해를 입힘. 관통흔의 직경은 ⅞인치
50
45
18
차체 후부 하단 중앙
내부까지 완전히 관통하여 트랜스미션 하우징까지 피해를 입힘. 관통흔의 크기는 직경 1¼×⅞인치.
50
45
19
차체 후부 하단 중앙
상동
50
45
20
차체 후부 해치
완전 관통. 시동 모터를 파괴하고 팬에 경미한 손상을 입힘. 관통흔의 바깥쪽 직경은 1⅜인치, 안쪽 직경은 ⅞인치.
50
90
21
?
차체 후부 좌측 최동 구동축 커버
3¼인치를 뚫음. 관통흔의 바깥쪽 직경은 1¼인치이며 안쪽으로 갈수록 좁아짐.
50
30
22~25
차체 정면 상하단 결합부
결합부에 다섯발이 명중했으나 한발도 관통하지 못함. 피격 흔적의 크기는 깊이 5/16인치, 길이 1¾인치, 폭 1/4인치.
50
90
26~27
주행륜
주행륜
2발 명중. 효과 없음.
50
90
28~32
궤도
궤도 모서리
5발 명중. 효과 없음.
[표 출처. “Effect of 2.36 inch Rockets on T-34 Tank(Russian)”(1950.8.25), RG330 Entry18 Box69 Korea 400-56]

보고서의 도판을 첨부합니다. 시험 사격시의 명중 부위가 번호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클릭하시면 원본 크기로 커집니다.







주석.
  1. “Effect of 2.36 inch Rockets on T-34 Tank(Russian)” (1950. 8. 25), RG330 Entry18 Box69 Korea 400-56

2012년 9월 17일 월요일

북한 주재 소련대사 슈티코프의 1950년 6월 26일 전문

출국준비로 어수선해서 블로그질이 좀 뜸하군요;;;; 가끔씩 들러주시는 분들께 민망하니 한국전쟁과 관련된 날림번역글 하나 올려 봅니다.

이 전문은 1950년 6월 26일 평양주재 소련대사 슈티코프가 소련군 총참모부 정보부국장 자하로프Матве́й Васи́льевич Заха́ров에게 보낸 것으로 1994년 BBC가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입수한 문서입니다. 한국에서 번역출간된 라주바예프 보고서와 중복되는 내용이 많긴하지만 개전 초기 북한군의 문제를 잘 요약해서 보여주는 글 같습니다. 라주바예프 보고서는 한참 뒤에 작성되어 정리가 잘 되어있긴 합니다만 슈티코프가 작성한 이 문서는 개전 직후에 작성되어 당시의 분위기를 좀 더 잘 반영하는 것 같습니다. 특히 개전 초반의 유리한 상황에서도 북한군 수뇌부의 지휘능력 부족을 질타하는 부분이 주목할 만 합니다.





1급기밀 
자하로프 동지 앞. 
직접 전달할 것.


조선인민군의 군사작전 준비와 실행 과정에 대해 보고합니다. 
조선인민군은 총참모부의 계획에 따라 6월 12일 부터 38도 접경지대에 병력집결을 시작해 6월 23일에 집결을 완료했습니다. 부대 재배치는 질서정연하게 이루어졌으며 사고는 없었습니다. 
적의 정보부서가 군부대의 재배치를 감지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계획을 그대로 실행했으며 작전 실행 시기는 비밀로 했습니다. 
사단급 작전계획과 지형정찰은 소련 고문관의 참여하에 이루어졌습니다. 
작전에 필요한 모든 준비과정은 6월 24일까지 완료되었습니다. 6월 24일 각 사단장은 작전 일시와 시간에 대한 명령을 받았습니다. 
각 부대에서는 남조선 군대가 38선을 침공하여 군사적 공격을 도발하였으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가 조선인민군에 반격을 명령했다는 민족보위성의 명령서가 낭독되었습니다. 
조선인민군의 장교와 사병들은 반격명령을 열렬히 환영했습니다. 
각 부대는 6월 24일 24시 공격개시선으로 이동했습니다. 군사작전은 조선 시간으로 오전 4시 40분 개시되었습니다. 포병의 공격 준비사격은 20~40분의 직접 포격과 10분간의 탄막포격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보병은 왕성한 사기를 가지고 공격에 나섰습니다. 공격 시작 후 첫 세시간 동안 공격부대는 3~5km를 진격했습니다. 
조선인민군의 공격은 적에게 완전한 기습이었습니다. 
적은 옹진, 개성과 서울 축선에서만 강력한 저항을 했습니다. 적은 공격 첫날 12시가 지나서야 보다 조직적인 저항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첫날 전투에서 점령한 도시는 다음과 같습니다. 옹진, 개성, 신읍리(新邑里, Sinyuri, しん ゆうり) .(1943년 총참모부가 간행한 1:1,000,000 지도) 
인민군은 춘천방면에서 12km를 진격했습니다. 
동해안에서는 8km를 진격했습니다. 
공격 첫날 조선인민군 해군은 동해안에서 두 개의 상륙작전을 실시했습니다. 첫번째 상륙집단은 강릉(Korio, こうりょう) 지구에 상륙했으며 해군육전대 2개대대와 1천여명의 빨치산으로 편성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상륙집단은 울진에 상륙했으며 600여명의 빨치산으로 편성되어 있습니다. 
상륙작전은 5시 25분에 시작되었으며 성공적으로 수행되었습니다. 
빨치산 부대가 울진과 그 주변 지역을 점령했습니다. 
상륙과정에서 인민군의 함선과 남조선군의 함선 간에 교전이 있었습니다. 교전 결과 남조선군의 트롤함 한척이 격침되었고 다른 한척이 파손되었습니다. 북조선 함대는 피해가 없었습니다. 
6월 26일 인민군은 공격을 계속하여 전투를 치르면서 남조선 영내 깊숙히 전진해 들어갔습니다. 
6월 26일에는 옹진반도와 개성반도가 완전히 소탕되었으며 (인민군) 6사단은 (강화)만을 강행 도하하여 김포 비행장 방면의 인구밀집지대를 점령했습니다.  
서울 방면에서는 (인민군) 제1사단과 제4사단이 문산과 동두천을 점령했으며 제2사단은 (강원도의) 중심인 춘천(Siunsen, しゅんせん)을 점령했습니다. 
동해안에서도 진격이 계속됐습니다. 주문리(注文里, Tubuiri, ちゅうぶんり, 주문진)를 점령했습니다. 
6월 26일에는 고성 방면으로 진격하는 제12사단, 신읍리를 지나 의정부(Geisif, ぎせいふ) 방면으로 진격하는 제3사단 및 기계화여단과 하루종일 연락이 두절되었읍니다. 
북(조선군)에 대한 결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인민군의 작전 수행에 있어 다음과 같은 기본적인 문제를 지적할 필요가 있습니다. 
1. 군사작전이 시작되면서 각 부대가 전방으로 진격하는 동시에 상급부대에서 하급부대에 이르기까지 지휘부 간의 교신이 두절됐습니다. 인민군 총참모부는 개전 첫날 부터 전투를 지휘하지 못 했으며 단 하나의 사단과도 제대로 된 통신을 유지하지 못 했습니다.
각 부대의 지휘관들은 상급 제대의 참모부와 교신을 하려 하지 않았으며, 야전 부대와 그 상급 부대의 지휘에서는 참모진을 허가를 받지도 않고 교체했으며, 총참모부는 동해안에서 작전하고 있는 여단 및 제12사단과 교신을 하지 못했습니다. 
2. 조선인민군의 참모진은 전투 경험이 없었습니다. 소련 군사고문단이 동반하지 않은 경우에는 전투 지휘가 졸렬했으며 포병 및 전차의 운용도 형편없었고 통신도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3. 그러나 우리의 군사고문관들은 조선인민군 부대 내에서 매우 헌신적으로 활동했으며 이들이 부여받은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북돋아 주었습니다. 
4. 군사작전이 개시될 무렵 북조선 인민들의 정치적인 분위기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에 대한 신뢰와 조선인민군이 승리할 것이라는 믿음 때문에 전반적으로 열성적이었습니다. 
6월 26일 김일성은 조선민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의 이름으로 조선 인민들에게 연설을 했으며 이 연설에서 조국의 정세에 대하여 설명했으며, 적을 섬멸하고 조선을 통일하는 과업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5. 조선인민군 지휘부는 부대간의 통신을 정상화하고 전투 지휘를 체계적으로 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고 있습니다. 이 조치가 마무리되고 인민군 사령부는 철원(Tepuges, てつげん) 지구로 이동했습니다. 민족보위상(최용건), 인민군 총참모장(강건), 그리고 군사고문단장과 여러명의 장교들이 사령부로 갈 것 입니다. 
남(조선군)에 대한 결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 이틀간의 군사작전으로 다음과 같은 점이 드러났습니다. 
1. 적군은 저항 의지를 보여주었으며 싸우면서 남조선 내륙 깊숙히 퇴각하고 있습니다. 아직까지 남조선군의 포로를 많이 잡지 못했습니다. 
2. 남조선 괴뢰정부는 후방에 있던 부대를 투입하고 있으며 인민군의 진격을 저지하려고 시도하고 있습니다. 
3. 첫날 조선인민군의 공세로 남조선은 혼란에 빠졌습니다. 남조선 당국과 주한미국대사는 라디오 방송에서 담화를 발표하여 남조선 인민들이 침착하게 있을 것을 당부했습니다. 남조선군의 사령부는 남조선 군대가 승리하고 있다는 거짓 방송을 하고 있습니다.

슈티코프 
No. 358/sh 
1950년 6월 2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