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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2월 14일 수요일

주취폭력-2



주취폭력


 우리 제3사단 제23연대는 포항을 지나 동해안을 따라 계속 북진하기 시작하여 영덕시를 점령하였다. 당시에는 확실히 몰랐는데 아마도 그때가 UN군에 의한 인천 상륙작전이 성공한 그 무렵이 아니었나 짐작된다. 아무튼 인민군은 패주하기 시작하였고 그를 추격하는 최전방의 아군부대는 중대 대대 등 전투병력과 연대본부가 거의 동시에 움직였으므로 연대장과 미고문관 Morris 대위와 함께 영덕시에 들어갔을 때에는 바로 몇 백 m 전방에서 교전하는 총소리가 들렸다. 영덕시 중심가에는 "인민공화국 만세!"라고 쓴 플래카드가 걸린 높은 탑이 그냥 서 있었으며 그 꼭대기에는 인민공화국의 국기가 걸려 있었다. 연대장은 도끼를 가져오게 하여 그 탑을 직접 찍어 넘어뜨렸다.
 그때, 도시 뒷산으로 개미떼처럼 도망쳐 올라가는 인민군들을 육안으로 볼 수 있었으며 우리 연대 장병들은 도망가는 인민군을 향하여 총을 쏘아 댔다. 미처 도망가지 못한 인민군들은 줄줄이 붙잡혀 와서 양손을 박박 깎은 머리 위에 얹고 길가에 꿇어앉아 있었는데, 대부분이 16세에서 20세까지의 어린 나이로 보였다.
 그때 미고문관은 나를 통하여 연대장에게 "장교는 장교임과 동시에 신사여야 한다"고 하면서 잡힌 포로들에 대한 신사적인 대우를 강조하였다. 뒤에 그 말이 "전시 포로에 대한 대우에 관한 제네바 협약"을 준수하여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하였지만 당시 내 마음에는 죽고 죽이는 살벌한 전쟁터에서 신사가 되라는 미고문관의 비현실성을 이해할 수가 없었으며 어딘지 위선적인 면이 있는 것 처럼 느꼈다.

 그로부터 약 4개월 후 중공군의 개입으로 우리 제3사단이 후퇴하여 중동부 전선에 배치되었을 때의 일이 생삭난다. 연대장이 한 미고문관에게 술 한잔 하자고 권하여 일선 산속에서 간단한 술상을 차려놓고 잔을 주고받는 자리에 통역으로 동석하였다.
 술이 거나하게 취하여 연대장이 미고문관에게 "아주 질이 나쁜 적의 첩자를 두 놈 잡았는데 그놈 중 한명은 내가 직접 쏴 죽이겠다"고 하자 같이 얼큰하게 취한 미고문관이 "나도 한 놈을 쏴 죽이겠다"고 하지 않는가. 연대장과 고문관을 따라 계곡에 가 보니 거지같이 너덜너덜한 평복을 입은 두 명이 묶인 채 악을 쓰고 있었다. 연대장이 M1 소총으로 그 중 한 명을 쏘아 죽이자 잇따라 미고문관이 45구경 권총으로 다른 한 명을 쏴 죽였다.
 그중 한 명은 끝내 "인민공화국 만세!"를 울부짖으며 쓰러졌다. 평복을 입었으나 인민군이 틀림없었고 아마도 첩보수집을 하는 정보대 요원이었던 것 같았다.


조광제, 『한 직업외교관의 회상록: 나라를 생각하고 나를 돌아보다』 (나남, 2016) 50~51쪽

2014년 8월 6일 수요일

브레스트 요새 전투에 대한 흥미로운 연구

최근에 나온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27권 3호를 훑어보니 제2차세계대전에 대한 글이 많이 실려있어서 즐거웠습니다. 흥미를 끄는 글 이 많은데 그 중에서도 라이프치히 대학의 크리스티안 간처Christian Ganzer가 쓴 “German and Soviet Losses as an Indicator of the Length and Intensity of the Battle for the Brest Fortress (1941)”라는 글이 돋보입니다. 이 글은 간처가 2010년 Osteuropa라는 매체에 기고했던 연구를 보완한 것 인데, 독소전쟁 초기의 유명한 전투인 브레스트 전투의 양상이 어떻게 전개되었는가를 양군의 인명피해 통계를 가지고 분석하는 흥미로운 방법을 택하고 있습니다.


필자인 간처는 브레스트 요새의 영웅적인 항전을 부각하는 소련의 역사서술에 의문을 표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그랬을까? 소련의 역사서술에 따르면 브레스트 요새에 포위된 붉은군대 장병들은 한달이 넘도록 독일군의 포위 공격에 맞서 결사적인 항전을 펼쳤고 독일군에게 막대한 손실을 입혔다고 합니다. 브레스트 요새 공격을 담당한 독일 제45보병사단의 보고서에 따르면 이 전투에서 전사한 독일군은 453명, 부상자는 668명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소련 역사가들은 이것이 조작된 것이며 독일군의 전사자는 보고서에 기록된 것의 2~3배에 달했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또한 독일군의 보고서에는 7,223명의 포로가 잡힌 것으로 되어 있는데 소련 역사가들은 이것 또한 조작이며 숫자를 과장하거나 브레스트 근처에 거주하던 민간인들을 체포한 것 까지 포함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필자는 이러한 소련측의 서술에 회의적인 시각을 보이고 있습니다. 위에서 이야기 한 것과 같이 필자는 전투의 양상을 재구성하기 위해서 독일군의 인명피해와 소련군의 피해 양상을 분석하는 방법을 취하고 있습니다.


먼저 독일군의 인명손실을 파악하기 위해서 독일군의 공식 기록 외에 린츠에 있는 상(上)오스트리아 민속박물관Oberösterreichisches Landesmuseum에서 소장하고 있는 전후에 작성된 제45보병사단 전사자 명부를 활용하고 있습니다. 이 전사자 명부는 사단 소속 장병들의 개별 전사통지서를 정리하여 작성한 것으로 사망자의 출생일, 성명, 소속부대, 사망한 날자와 전사한 장소, 매장지, 사망원인, 인식표의 군번과 가까운 친인척의 소재지 등이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필자는 제45보병사단의 기록과 당시 지역신문의 사망자 관련 정보를 교차검증하여 이 명부가 신뢰할 만 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다음으로는 사망자의 숫자입니다. 이 명부에는 브레스트 전투에서 475명이 전사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실제로 8명은 전투 이전에 사망했거나 다른 지역에서 사망한 경우라고 합니다. 그리고 전투 첫날인 6월 22일에는 314명이 사망했는데 이중에서 제130보병연대의 사망자 30명은 브레스트 요새가 아닌 브레스트 시가지의 전투에서 사망했으며, 10명 정도는 독일군의 포격에 휘말려 사망했다고 합니다. 즉 브레스트 요새 전투의 첫날에 사망한 독일군은 280명 가량이라고 보는 것 입니다. 전투 이틀차 부터는 사망자 숫자가 격감합니다. 23일에는 35명이 사망했으며 이중 14명은 후송된 야전병원에서 사망했다고 합니다. 24일에는 전투가 격렬하게 전개되어 56명이 사망했습니다. 25일에는 21명이 사망했고, 요새내의 거점 대부분이 제압당한 26일에는 13명이 사망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6월 27일에는 브레스트 요새 전투에서 마지막 사망자가 발생합니다. 필자는 사망 일자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는 사망자 1명을 포함해 총 사망자는 428명이고 이중 86.5%에 해당하는 370명이 전투 초기의 3일간에 사망했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부상자 통계를 내는 것은 전사자 통계 보다 어렵지만 전사자와 비슷한 양상을 보인 것으로 파악합니다. 제45보병사단 의무대장의 보고에 따르면 6월 22일 저녁 기준으로 야전병원에 수용된 부상자가 총 312명, 25일에는 총  610명, 28일에는 714명이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사단장의 보고서와는 차이가 있는 수치인데 필자는 의무대장이 병원에서 사망한 장병의 숫자를 빼지 않은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필자는 사단장의 전투보고서에 기록된 부상자 숫자를 기준으로 전체 부상자의 86.2%가 전투 초기 4일동안 발생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한편 소련군의 피해를 정확히 집계하는 것은 어렵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독일측 기록에 따르면 1941년 6월 28일까지 약 2천구 가량의 시신을 브레스트 요새에서 확인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필자는 정확한 전사자 집계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소련군 포로 통계만을 활용하기로 합니다. 포로 통계는 제45보병사단이 상급부대에 보고한 내용을 기준으로 하고 있는데 제45보병사단은 브레스트 요새 공격당시 상급부대가 몇차례 바뀌었습니다. 필자의 조사에 따르면 6월 24일 부터 27일, 그리고 다시 6월 30일부터 7월 2일까지 제45사단을 지휘한 제53군단의 기록에서 포로 통계를 찾아볼 수 있다고 합니다. 이 기록에 따르면 6월 24일 부터 27일까지는 3,062명이 포로로 잡혔고 6월 30일부터 7월 2일까지는 940명이 포로로 잡혔다고 합니다. 필자는 다른 기록들을 활용하여 일자별 포로 통계를 산출했는데 여기에 따르면 6월 22일 부터 7월 1일까지 최소 6,713명, 최대 7,779명의 소련군이 포로로 잡혔을 것이라고 추산합니다. 최저치와 최대치 통계가 큰 차이를 보이는 시기는 6월 22일과 23일인데 전투 초기의 혼란 때문에 정확한 집계가 어렵다고 지적합니다. 그러나 브레스트 요새와 브레스트 시가지에서 잡힌 포로를 명확하게 구분하는 것은 어렵긴 해도 브레스트 요새가 단기간내에 고립됐고 브레스트 시가지에서 전투를 벌인 제130보병연대의 경우 22일 이후로는 이렇다 할 전투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6월 22일 브레스트 시가지에서 잡힌 400여명의 포로를 제외한 포로는 브레스트 요새 내에서 잡힌 것으로 보는게 타당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최대한 보수적으로 계산한다 해도 브레스트 요새의 병력 9,000여명 중 대부분은 항복했고 포로의 55.90%는 6월 22일 부터 6월 24일 사이에 투항했다고 봐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필자는 이와같은 결과를 토대로 브레스트 요새 전투를 1개월간에 걸친 처절한 항전으로 설명하는 것이 문제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대부분의 전투는 6월 24일까지 마무리 되었으며 29일에는 사실상 전투가 종결되었다는 것 입니다. 실제로 제45보병사단은 7월 2일에 제130보병연대 2대대와 제45야전보충대대만 브레스트에 남겨두고 동진했으며 남은 2개대대도 3일 뒤인 7월 5일에는 1개 중대 규모 남짓한 다른 후방 부대에 브레스트 요새를 인계하고 떠났다는 점을 볼때 6월 29일에 전투가 종결됐다는 독일측의 주장은 타당한 것 같습니다. 소련측의 주장대로 한달 동안 격렬하게 저항했다면 제45보병사단의 주력이 그렇게 일찍 브레스트를 떠났을 리는 없을 것입니다. 독일측의 기록에 따르면 6월 29일 이후 이렇다 할 교전은 없었고 다만 7월 23일에 한명의 소련군 중위가 독일병사 다섯명에게 부상을 입히고 생포된 것이 유일한 저항이었다고 합니다.
필자는 소련측 생존자들의 회고에서 최후까지 결사적으로 저항하다가 ‘가까이서 터진 포탄의 충격에 의식을 잃고’ 포로가 되었다는 설명이 많은 이유는 독일군에 생포되었다는 점 때문에 배신자로 몰릴 것을 우려해 자기 변명을 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소련측의 서술을 받아들인다면 요새 수비병력의 3분의 2 이상이 포로가 됐고 그중 상당수가 전투 초기의 3일동안 항복한 것을 설명하기가 힘들긴 합니다.

2013년 4월 14일 일요일

연방의 신형전차

독일군은 1943년 말 부터 소련이 개발하고 있는 신형 중전차 ‘스탈린’에 관한 정보를 조금씩 포착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모든 정보업무가 다 그렇듯 ‘스탈린’ 전차에 대한 정보는 꽤 다양해서 독일군은 1944년 봄에 처음으로 이 전차를 상대하기 전 까지는 제대로 된 정보를 얻을 수 없었습니다. 1943년 말에 수집된 정보들은 대개 이 신형전차를 목격했다는 소련 포로들의 목격담을 취합한 수준이었습니다.


1943년 10월 16일 육군본부 동부정보과Abteilung Fremde Heere Ost에서 육군 병기국과 기갑총감부에 보낸 정보문서에 따르면 소련 제124소총병사단에서 탈주한 소위가 ‘스탈린’ 전차를 목격하고 증언한 내용이 있습니다.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출처 : RG242 T78 R619
[제124소총병사단 622소총병연대에서 탈주한 소위(의 증언) : 레닌그라드 근교에서 있었던 훈련에 ‘스탈린’이라는 명칭을 가진 100톤급 신형 전차 6대가 참가했다. 이 전차들은 레닌그라드에서 생산되었다. 궤도의 폭은 1.50m, 전면장갑은 25cm이며 속력은 시속 40~50km이다. 무장은 10cm포 1문과 기관총 3정이다. 승무원은 12명이다. 궤도 양쪽에는 위쪽으로 접을 수 있는 장갑판이 설치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보병 30~50명 정도를 태울 수 있다고 한다. 방수설계가 되어 있어 수심 4m까지 도하가 가능하다. 신형 전차는 KV-1 보다 길이가 3m 더 길어서 기존의 대전차호는 쉽게 극복할 수 있다고 한다. 연료 소비량은 KV-1 보다 조금 더 많은 수준이라고 한다.]


그렇습니다. 2차대전의 승패는 여기서 갈린 것 입니다. 파시스트 다 죽었습니다...


이 증언에 따르면 ‘스탈린’ 전차는 이렇게 생겼다고 합니다.

출처 : RG242 T78 R619

2012년 2월 8일 수요일

회색지대?

잘 아시다 시피 독소전쟁 초기 소련은 막대한 인명손실을 입었습니다. 수많은 전사자와 부상자 외에도 수백만명이 독일군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독일측의 주장에 따르면 1941년 전역에서 생포된 포로는 다음과 같습니다.

표1. 1941년 전역에서 생포된 소련군 포로
기간
사병
장교
사병(누계)
장교(누계)
6.22-6.30
112,784
645
112,784
645
7.1-7.10
253,588
1,324
366,372
1,969
7.11-7.20
234,566
405
600,738
2,374
7.21-7.31
213,092
648
813,830
3,022
8.1-8.10
271,714
1,625
1,085,544
4,647
8.11-8.20
211,225
647
1,296,769
5,294
8.21-8.31
215,641
522
1,512,410
5,846
9.1-9.10
203,668
749
1,716,078
6,595
9.11-9.20
234,574
605
1,950,652
7,200
9.21-9.30
550,961
1,553
2,501,613
8,753
10.1-10.10
288,485
861
2,790,098
9,614
10.11-10.20
499,476
3,392
3,289,574
13,006
10.21-10.31
249,817
931
3,539,391
13,937
11.1-11.10
152,296
742
3,691,687
14,679
11.11-11.20
85,786
312
3,777,473
14,991
11.21-11.30
53,852
64
3,831,325
15,055
12.1-12.10
39,596
74
3,870,921
15,129
12.11-12.20
19,277
3,890,198
15,129
12.21-12.31
16,567
67
3,906,765
15,196
[표출처 : Hartmut Schustereit, Vabanque : Hitlers Angriff auf die Sowjetunion 1941 als Versuch, durch den Sieg im Osten den Westen zu bezwingen, (Mittler&Sohn, 1988), p.73]

러시아에서는 독일측 주장이 과장되었다고 보고 있으며 1941년의 인명손실 중 포로 및 행방불명을 합치면 2,335,482명 이라고 주장합니다.1) 독일과 러시아의 통계간에 편차가 매우 커서 150만명이 넘을 정도입니다. 어쨌든 1941년 전역에서는 민스크, 스몰렌스크, 우마니, 키예프 전투와 같은 대규모 포위 섬멸전이 이어졌고 전투마다 수십만명의 포로가 발생했습니다. 민스크 포위망에서 30만명, 우마니에서10만3천명, 비텝스크에서 45만명, 스몰렌스크에서 18만명, 키예프에서 66만5천명, 체르니고프에서 10만명, 마리우폴에서 10만명, 브야즈마에서 66만3천명의 포로가 발생했다고 하지요.2)

그러나 1941년의 대규모 포위전은 큰 성과를 거두기는 했지만 완벽하게 수행되지는 않았습니다. 수십만명이 포위망을 빠져나갈 수 있었고 그중 일부는 소련군 전선으로 돌아가 다시 한번 싸울 기회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물론 그러지 못하고 후방에 남게된 인원들은 나름대로 빨치산을 조직하여 독일군을 후방에서 괴롭히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여기까지는 꽤 잘 알려진 ‘미담’이지요.

소련이 붕괴된 이후의 연구들은 이러한 한계를 벗어나서 다양한 분야로 관심을 돌리고 있습니다. 냉전기 소련에서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있었던 존재들이 위에서 언급한 포위망을 벗어나 전열에 합류한 용사나 빨치산들이었다면 냉전 이후에는 이전까지 관심을 두지 않았던 회색분자들에게도 연구자들의 관심이 주어진 것 입니다.
얼마 전 읽은 한 연구에서는 전쟁 초기 독일군의 포위망을 벗어났지만 다시 전열에 복귀하거나 빨치산에 합류하지 않은 군인들에 대한 언급이 있었습니다. 적극적으로 싸운 것은 아니지만 독일의 부역자가 된 것도 아닌 일종의 회색지대 같은 존재들인 것 입니다. 이런 존재들이 얼마나 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1943년에 NKVD가 해방된 지역에서 582,515명에 달하는 전직 군인들을 적발한 것을 보면 그 규모가 엄청났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 1944년 1월 1일에서 10월 1일까지 해방된 지역에서 354,592명(이중 장교는 50,441명)의 전직 군인들을 적발해 냈다고 합니다. 대략 전쟁 기간 중 이런 식으로 적발해서 다시 군대에 편입시킨 인원이 939,700명에 달한다는 기록이 있다고 하지요.3) 이들은 독일군의 포위망을 벗어난 뒤 그냥 민간인으로서 후방에 숨어서 전쟁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고 합니다. 1941년에서 1942년 사이에 이렇게 숨어든 사람들은 전세가 역전되어 NKVD와 SMERSh가 자신들을 잡으러 올 것이라는 사실은 결코 생각하지 못했겠지요. 이런 식으로 다시 징집된 이들은 당연하게도 매우 사기가 낮아서 전투가 치열해 지면 뒤로 돌격하는 경우가 꽤 있었던 모양입니다.
이렇게 해방된 지역에서 탈영병으로 의심받아 체포된 이들은 더 심한 처벌을 피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후방에 남게 되었음을 증명할 필요가 있었다고 합니다. 보통 군인 출신으로 드러난 경우 의도적으로 탈영했거나 독일군에게 협력하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 세명의 증인을 출두시켜야 했다고 합니다. 물론 결백함을 입증해봐야 다시 군대에 징집되는 것 이었지만 그러지 못한다면 죄수부대나 정치범수용소 특급을 탔다고 하지요.4)

‘애국자’ 들이나 블라소프와 같은 ‘반역자’들의 이야기는 오래전 부터 잘 알려져 있었지만 이렇게 어중한 위치에 있었던 사람들의 이야기는 냉전이 종결되고 나서야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뭐랄까요. 정치적 환경의 변화로 기존에는 조명을 받지 못했던 이야기들에 관심이 주어졌다고 해야 할까요. 냉전이 종식된 뒤 러시아와 서방 모두 소련 시기의 역사에 대해 이전 보다는 조금 더 냉철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이렇게 회색지대라 할 수 있는 부분에도 주목하게 된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1) G. F. Krivosheev, Soviet Casualties and Combat Losses in the Twentieth Century, (Greenhill Books, 1997), p.96
2) G. F. Krivosheev, ibid., p.235
3) Roger R. Reese, Why Stalin’s Soldiers Fought : The Red Army’s Military Effectiveness in World War II,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11), p.235
4) Catherine Merridale, Ivan’s War : Life and Death in the Red Army, 1939~1945, (Metropolitan Books, 2006), pp.251~252


잡담하나. 왠지 도표를 넣으면 알맹이 없는 글에 뭔가가 생긴다는 착각을 하게 됩니다. 요즘 들어 쓸데없이 도표를 집어넣는 원인이 된 듯 하군요;;;;;

2011년 12월 25일 일요일

마이웨이를 봤습니다

마이웨이를  봤습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꽤 볼만했습니다. 많은 분들이 지적하시는 것 처럼 연출상의 문제가 심각하고 사소한 고증 문제가 있기는 한데 참으면서 볼 정도는 됐습니다. 7광구 같은 졸작을 이미 경험했다 치더라도 예상외로 나쁘지 않은 영화였습니다. 좋은 영화라고 할 수 는 없겠지만 괜찮은 영화라고는 할 수 있겠습니다.

일단은 마음에 들지 않았던 요소부터 이야기 하겠습니다.

1. 주인공 김준식이 너무 평면적이고 매력이 없습니다. 그렇게 심한 고생을 하고 학대를 당한것 치고는 감정의 기복이 없어 보입니다. 캐릭터 자체는 나쁘지 않았던 것 같지만 묘사하는 방식이 영 마음에 들지 않더군요. 사실 일본군 병영이건 소련 포로수용소건 노르망디 해안이건 어디서나 줄구장창 마라톤 연습을 하는게 어색할 정도로 작위적이어서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다른 곳은 몰라도 소련 수용소라면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중노동에 시달렸을 텐데 달리기 할 기운이 남아있다니 너무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미 처음부터 완성되어 있던 인물이라는 점에서 연출이 아쉬웠습니다.

2. 판빙빙이 연기한 쉬라이라는 캐릭터는 너무 엉뚱해서 짜증이 났습니다. 쉬라이라는 인물을 삭제하고 대신 독일군 포로수용소나 이야기의 개연성을 강화시켜 줄 다른 부분을 넣는 것이 훨씬 나았을 것 같습니다. 중국 시장을 염두에 둔 것인지 억지로 ‘항일애국지사’를 집어 넣은게 굉장히 불편했습니다. 주인공을 두 사람으로 만든 지점에서 이미 해야 할 이야기가 산더미 같은데 뜬금없는 등장인물이 하나 더 튀어나오니 이야기의 흐름을 끊는 것 같아 불편했습니다.

3. 이야기의 진행이 매끄럽지 못합니다. 해야 할 이야기에 비해 시간이 부족하니 어쩔 수 없습니다. 16부작 정도 되는 TV용 드라마로 만들었다면 훨씬 괜찮은 이야기가 되었을 텐데 아쉽습니다. Das Boot처럼 TV용으로 따로 편집을 한다면 훨씬 좋을 것 같은데 그럴 가능성이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일단 노몬한에서 독소전쟁 까지는 어쨌거나 이야기가 그런대로 이어지는데 주인공 두 사람이 헤어진 뒤 갑자기 화면이 전환되면서 1944년의 프랑스로 이동하는게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4. 전투 장면의 연출이 매우 아쉽습니다. 처음의 1차 노몬한 전투는 상당히 스펙터클한 느낌도 들었고 매우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런데 다음의 2차 전투가 영 아쉽더군요. 압도적인 소련군의 전력과 일본군의 비인간적이고 무모한 전술을 비교하려는 시도는 나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지나치게 전차와 인간의 대결에 집중한 것 같습니다. 컴퓨터 그래픽으로 합성한 전차들만 스크린을 가득 덮고 있으니 뭔가 비현실적인 느낌이 들었습니다. 중간 중간 소련 보병이라도 튀어나와 주었으면 덜 밋밋했을 것 같아서 아쉽습니다. 독소전쟁은 너무 애너미 앳 더 게이트의 느낌이 나는게 문제였던 것 같습니다. 노르망디는 극적인 흐름을 위해서 다소 무리한 연출을 한 느낌이 듭니다. 상륙부대가 해안을 휩쓴 뒤 공수부대가 낙하하는 건 극적인 연출을 위해서 무리하게 집어넣은 장면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듭니다. 이 외에도 황당한 요소가 많은데 영화이니 그냥 넘어가지요;;;;

5. 마라톤이라는 요소가 사건의 발단 외에는 큰 역할을 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영화 도입부의 마라톤 장면도 일본의 폭압적인 성격을 보여주기 위해서 단순하게 묘사되어서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김준식이 계속해서 달리기 연습을 하는 것 말고는 마라톤이 이 영화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 요소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마찬가지로 육상선수 출신의 주인공을 다룬 영화 ‘갈리폴리’에서는 달리기라는 요소가 영화의 막바지에 비극을 강조하는 요소로 잘 녹아들었는데 마이웨이에서는 그 점이 참 아쉽군요.

이런 부분들이 개선되었다면 더 볼만한 영화가 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래도 대작 답게 볼만한 부분도 많았습니다. 나름 돈 값은 했다는 생각도 드는군요. 이 영화에서 마음에 들었던 부분을 조금 이야기 해 보겠습니다.

1. 공동주연 중 한명인 오다기리 조가 연기한 하세가와 타츠오는 영화를 통해 큰 변화를 겪는 인물이어서 ‘마라토너 김준식’에 비해 훨씬 좋은 캐릭터였습니다. 지나치게 과장된 면이 있기는 하지만 군인인 할아버지에 대한 동경과 조선인에 대한 증오로 뭉쳐 전쟁을 열망하게 된 청년이 고통스러운 현실에 직면해 내면의 변화를 일으키면서 인간적으로 성장해 가는 설정은 뻔하지만 나름대로 좋았습니다. 특히 소련 포로수용소가 묘사된 부분은 이 배우의 매력을 잘 살려준 것 같습니다. 주인공 다운 인물이었습니다.

2. 조연으로 나온 배우들이 괜찮습니다. 김인권이 연기한 안똔은 이 영화에서 가장 현실적으로 보이는 인물입니다. 김준식과 이 인물을 합쳤다면 영화가 훨씬 좋지 않았을까 싶네요. 영화에서 가장 극단적으로 무너진 인물인데 이 인물 덕분에 소련 포로수용소 장면이 이 영화를 통틀어 가장 볼만한 부분이 되었습니다. 김인권이 조연으로 나온 영화를 보면서 그다지 주목한 일이 없었는데 이 영화에서는 상당히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타츠오의 부관으로 나온 소좌도 분량은 짧지만 인상 깊은 인물입니다. 가족을 그리워 하며 나무인형을 다듬는 소박한 모습이나 비극적으로 사망하는 장면은 지나치게 작위적이고 영화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인간성’ 때문에 집어넣은 것 같지만 충실히 제 역할을 해 준 것 같습니다. 타츠오를 인간적으로 성장하게 하는 인물 중 한 명이었다는 점에서 후하게 평가하고 싶습니다. 어떤 배우인지 궁금해서 네이버나 다음의 영화 정보를 뒤져봤는데 정보가 없더군요.
그리고 천호진은 짧게 등장했지만 정말 좋습니다. 짧게나마 이 배우를 보여준 감독께 감사. 이 배우는 무슨 역을 해도 잘 어울리는것 같습니다. 별로 중요한 역할은 아니지만 천호진의 연기를 본 것 만으로도 9천원 중 천원 이상의 가치는 되었습니다.

3. 자잘한 디테일이 마음에 듭니다. 저는 홍보에서 강조한 노몬한이나 노르망디 전투 보다는 영화 초반에 묘사한 1930년대 경성이 꽤 마음에 들었습니다. 강제규 감독은 태극기 휘날리며에서 1950년대의 서울을 묘사한 바 있는데 그 당시 보다 이 도시를 훨씬 더 잘 다룬 것 같습니다. 중간 중간 스쳐지나가는 사소한 배경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습니다.  
삭제된 장면 중에는 베를린을 다룬 부분도 있는 듯 한데 그것도 아쉽군요. 공간적으로 풍부한 느낌이 들어 좋았습니다. 주인공 중 한 명인 오다기리 죠는 끝내 런던까지 가는군요.

4. 영화에서 이야기 하고자 하는 인간성의 회복 문제는 지겹도록 반복되지만 그럼에도 전쟁영화에 가장 잘 맞는 주제 같습니다. 엉성하게 민족의 비극 타령이나 하는 영화들에 비하면 훨씬 낫지요. 연출이 부실해서 안타깝지만 영화에서 이야기 하고자 하는 주제는 나쁘지 않았습니다. 다 알지만 속아주고 싶은 그런 느낌입니다.


이 영화는 현재 기대에 못 미치는 흥행성적을 거두고 있습니다. 사실 저도 다른 분들에게 적극적으로 권하지는 못하겠습니다. 어딘가 엉성한 부분도 있고 영화적인 완성도가 썩 높다고 할 수도 없지요. 하지만 지나치게 저평가되는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최소한 별 한개짜리 영화는 아닙니다) 저는 영화를 볼 때 열심히 만들었다는 느낌이 들면 좀 더 후하게 평가하는 경향이 있는데 마이웨이도 그런 영화입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시간이 허락한다면 한 번 더 극장에서 볼 생각이 있습니다. 감독판으로 재개봉 할 수 있다면 좋겠군요.

2011년 12월 16일 금요일

영화 "마이웨이"에 관한 잡담 하나

강제규 감독의 신작 “마이웨이”는 제작을 시작한다는 보도가 나올 때 부터 꽤 관심을 가졌던 영화입니다. “태극기 휘날리며”도 그럭 저럭 나쁘지 않게 본 기억이 있어서인지 관련된 내용이 조금씩 공개될 때 마다 재미있겠다는 기대를 하고 있었는데 시사회가 끝나고 난 뒤 나오는 평들이 우호적이지가 않군요.

그런데 영화평들을 찾아 보던 중 영화 평론가 듀나가 쓴 평을 읽게 되었습니다. 아직 영화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이 평에 대해 뭐라 이야기할 단계는 아닙니다만 재미있는 구절이 하나 눈에 들어오더군요. 일부를 인용해 보겠습니다.

강제규의 [마이웨이]는 노르망디 상륙작전 직후 미군의 심문을 받는 동양인 사진 한 장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스티븐 앰브로스의 책 [디-데이]에 실린 이 사진의 설명에 따르면 독일 군복을 입은 이 동양인 포로는 자신이 '코리언'이라고 밝혔다죠.

듀나의 영화 낙서판 - 마이웨이

여기서 말하는 사진은 바로 유명한 아래의 사진입니다.



그런데 제가 가지고 있는 스티븐 앰브로즈의 D-Day(1994년에 출간된 페이퍼백판)에는 동양인 포로의 사진이나 이에 대한 설명이 실려있지 않습니다. 이 책에는 브루어 중위가 독일 군복을 입은 동양인 포로들을 생포했고 이들을 심문한 결과 ‘코리안’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는 내용이 짤막하게 나올 뿐이지요.(D-Day의 다른 판본은 어떤지 모르겠군요. 혹시라도 다른 판본에 그 동양인의 사진과 조선인이라는 설명이 있다면 알려주십시오.)

이미 많은 분들이 읽어보셨겠지만 해당 내용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독일이 1943년 쿠르스크에서 패배한 이후 이른바 동방대대는 갈수록 신뢰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그때문에 이 부대들은 독일인으로 이루어진 부대를 대신해 프랑스로 보내졌다. 제101공수사단 506강하연대의 로버트 브루어Robert Brewer중 위는 침공 당일 유타라고 명명된 해변에서 독일군복을 입은 네 명의 동양인을 생포했다. 이들과 의사소통이 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결국 이들은 조선인으로 드러났다. 어떻게 해서 조선인들이 히틀러를 위하여 미군에 맞서 프랑스를 방어하는 싸움에 참여하게 된 것인가? 이들은 1938년 당시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였던 때 일본군에 징집되었다가 1939년 국경지대의 전투에서 붉은군대에 생포되었고, 붉은군대에 강제로 편입된 뒤에는 1941년 12월 모스크바 근교에서 독일 국방군에 포로가 된 뒤 독일군에 강제로 편입되어 프랑스로 보내진 것으로 생각되었다.(브루어 중위는 이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떠올리지 못 했으나 아마 조선으로 되돌아간 듯 싶다고 했다. 만약 그렇게 되었다믄 이들은 다시 한번 남한이나 북한중 어느 한쪽에 징집되었을 것이 확실하다. 이들이 한반도의 어느쪽에 속했느냐에 따라 1950년에 미국에 대항해서 건 혹은 미군과 함께 건 다시 한번 싸움을 하게 되었을 가능이 있다. 이것은 20세기 정치의 예측 불가능한 측면이 아닐 수 없다.) 1944년 6월 경에는 서부전선의 독일군 소총병 여섯 명 중 한 명이 동방대대 소속이었다.

Stephen E. Ambrose, D-Day June 6, 1944 : The Climactic Battle of World War II, (Touchstone Book, 1994), p.34

인터넷 상에 노르망디의 조선인이라고 해서 널리 퍼진 이 사진에 언제부터 ‘조선인’이라는 설명이 붙게 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앰브로즈의 책에서 나온 설명은 아니라고 봐야 합니다. 앰브로즈의 책에 나온 서술을 이 사진에 달아놓은 것을 보긴 했는데 어쩌면 이것이 발단인지도 모르겠군요.

 

“마이웨이”의 영화 홍보도 정체가 불분명한 동양인의 사진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경향이 보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군요. 홍보하는 것을 보면 제작진도 상당한 자료를 준비했을 것이고 D-Day는 당연히 읽었을텐데 왜 그런 방향으로 홍보를 하는 것인지 의문입니다. 물론 영화 홍보에서 “스티븐 앰브로즈의 책에서 어쩌구” 하는 것 보다는 한 장의 사진을 제시하는게 시각적으로 더 효과가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긴 합니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그 사진에 실린 인물이 어느 민족에 속하는지 확실히 알 방법이 없습니다. 실체가 불확실한 사진을 중심으로 한 홍보가 정확하지 않은 정보를 계속 재생산 하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듭니다.

한편으로는 텍스트가 지나치게 홀대 받는다는 느낌이 들어 섭섭하군요.

2011년 3월 24일 목요일

2차대전 당시 소련에 수용된 전쟁포로의 사망률

소련의 수용소라면 당장 떠오르는 것은 열악한 생활환경과 가혹한 중노동입니다. 소련의 강제수용소를 다룬 이야기 중 가장 잘 알려진 솔제니친의 수용소군도의 내용만 보더라도 아름다운 모습이라곤 전혀 떠오르지 않지요.

2차대전 당시 소련은 총 3,777,290명의 포로를 잡았다고 합니다.1) 국적별로 세분화 하면 대략 다음과 같았다는군요.



국적
숫자
독일
2,389,560
오스트리아
156,682
헝가리
513,767
루마니아
201,800
이탈리아
48,957
핀란드
2,377
기타
464,147
G. F. Krivosheev, Soviet Casualties and Combat Losses in the Twentieth Century(Greenhill Books, 1997), p.277


그리고 이 중에서 꽤 많은 수의 포로가 고향땅을 밟지 못하고 사망했습니다. 소련 정부가 모든 포로를 송환한 뒤 1956년에 정리한 기록에 따르면 송환된 포로와 사망한 포로의 숫자는 다음과 같았다고 합니다.(집계 방식의 문제인지 위에서 인용한 자료와는 포로 숫자에서 조금 차이가 납니다.)



국적
포로 총계
송환된 포로
사망한 포로
독일
2,388,443
2,031,743
356,687
헝가리
513,766
497,748
54,753
루마니아
187,367
132,755
54,602
오스트리아
156,681
145,790
10,891
이탈리아
48,957
21,274
27,683
폴란드
60,277
57,149
3,127
체코슬로바키아
69,977
65,954
4,023
프랑스
23,136
21,811
1,325
유고슬라비아
21,830
20,354
1,468
네덜란드
4,730
4,530
199
핀란드
2,377
1,974
403
벨기에
2,014
1,833
177
룩셈부르크
1,653
1,560
92
스페인
452
382
70
덴마크
456
421
35
노르웨이
101
83
18
기타
3,989
1,062
2,927
포로 총계
3,486,206
3,006,423
518,480
Stefan Karner, “Die sowjetische Hauptverwaltung für Kriegsgefangene und Internierte. Ein Zwischenbericht” , Vierteljahrshefte für Zeitgeschichte 42-3(1994), s.470.

2차대전이 끝난 직후 소련의 사회경제적 상황은 말 그대로 최악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얼마전 까지 총부리를 들이댔던 나라의 포로들에게 좋은 대접을 해줄 여유가 있을리 없었습니다. 2008년에 썼던 “독일장교 비더만의 소련 포로수용소 생활”이라는 글에서 간단히 다뤘지만 특히 1945~46년 겨울에는 엄청난 숫자의 포로가 사망했습니다. 사정이 조금 나아지는건 1946년 하반기 이후였다고 하지요.

어쨌든 위에서 인용한 통계에 따르면 포로 생활 중 사망한 포로의 비율은 14.9%입니다. 좀 놀라운 것은 유독 이탈리아인 포로만 엄청나게 사망했다는 것 입니다. 생환된 숫자가 사망자 보다 더 적다는게 충격적이지요. 이탈리아 포로의 사망률은 56.5%로 다른 나라를 뛰어넘는 엄청난 규모입니다.2) 아마도 이탈리아군 포로의 대부분이 1942~43년 겨울 전역에서 생포되었기 때문에 그렇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비슷한 시기 스탈린그라드에서 생포된 포로 9만여명 중 겨우 6천여명 만이 살아돌아온 것과 비교할 수 있겠군요.3) 이탈리아가 1943년 항복한 뒤에는 포로의 대우가 개선되었다는 이야기도 있긴 합니다만 일단 사망률 자체가 덜덜덜한 수준이니별로 와닫지는 않는군요.
정작 가장 고생을 많이 했을 것 같은 독일군 포로의 사망률은 평균적인 수준입니다. 물론 최악이라고 할 수 있는 스탈린그라드의 포로들을 제외한다면 말입니다. 여기에 소련이 1945년에 본국으로 끌고 가지 않고 독일 내에서 석방한 포로들을 더한다면 사망률은 조금 더 내려가지 않을 까 생각됩니다.



1)  G. F. Krivosheev, Soviet Casualties and Combat Losses in the Twentieth Century(Greenhill Books, 1997), p.277
2) Stefan Karner, “Die sowjetische Hauptverwaltung für Kriegsgefangene und Internierte. Ein Zwischenbericht” , Vierteljahrshefte für Zeitgeschichte 42-3(1994), s.470.
3) Guido Knopp, Die Gefangenen,(Wilhelm Goldmann Verlag, 2005), s.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