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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2월 14일 수요일

주취폭력-2



주취폭력


 우리 제3사단 제23연대는 포항을 지나 동해안을 따라 계속 북진하기 시작하여 영덕시를 점령하였다. 당시에는 확실히 몰랐는데 아마도 그때가 UN군에 의한 인천 상륙작전이 성공한 그 무렵이 아니었나 짐작된다. 아무튼 인민군은 패주하기 시작하였고 그를 추격하는 최전방의 아군부대는 중대 대대 등 전투병력과 연대본부가 거의 동시에 움직였으므로 연대장과 미고문관 Morris 대위와 함께 영덕시에 들어갔을 때에는 바로 몇 백 m 전방에서 교전하는 총소리가 들렸다. 영덕시 중심가에는 "인민공화국 만세!"라고 쓴 플래카드가 걸린 높은 탑이 그냥 서 있었으며 그 꼭대기에는 인민공화국의 국기가 걸려 있었다. 연대장은 도끼를 가져오게 하여 그 탑을 직접 찍어 넘어뜨렸다.
 그때, 도시 뒷산으로 개미떼처럼 도망쳐 올라가는 인민군들을 육안으로 볼 수 있었으며 우리 연대 장병들은 도망가는 인민군을 향하여 총을 쏘아 댔다. 미처 도망가지 못한 인민군들은 줄줄이 붙잡혀 와서 양손을 박박 깎은 머리 위에 얹고 길가에 꿇어앉아 있었는데, 대부분이 16세에서 20세까지의 어린 나이로 보였다.
 그때 미고문관은 나를 통하여 연대장에게 "장교는 장교임과 동시에 신사여야 한다"고 하면서 잡힌 포로들에 대한 신사적인 대우를 강조하였다. 뒤에 그 말이 "전시 포로에 대한 대우에 관한 제네바 협약"을 준수하여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하였지만 당시 내 마음에는 죽고 죽이는 살벌한 전쟁터에서 신사가 되라는 미고문관의 비현실성을 이해할 수가 없었으며 어딘지 위선적인 면이 있는 것 처럼 느꼈다.

 그로부터 약 4개월 후 중공군의 개입으로 우리 제3사단이 후퇴하여 중동부 전선에 배치되었을 때의 일이 생삭난다. 연대장이 한 미고문관에게 술 한잔 하자고 권하여 일선 산속에서 간단한 술상을 차려놓고 잔을 주고받는 자리에 통역으로 동석하였다.
 술이 거나하게 취하여 연대장이 미고문관에게 "아주 질이 나쁜 적의 첩자를 두 놈 잡았는데 그놈 중 한명은 내가 직접 쏴 죽이겠다"고 하자 같이 얼큰하게 취한 미고문관이 "나도 한 놈을 쏴 죽이겠다"고 하지 않는가. 연대장과 고문관을 따라 계곡에 가 보니 거지같이 너덜너덜한 평복을 입은 두 명이 묶인 채 악을 쓰고 있었다. 연대장이 M1 소총으로 그 중 한 명을 쏘아 죽이자 잇따라 미고문관이 45구경 권총으로 다른 한 명을 쏴 죽였다.
 그중 한 명은 끝내 "인민공화국 만세!"를 울부짖으며 쓰러졌다. 평복을 입었으나 인민군이 틀림없었고 아마도 첩보수집을 하는 정보대 요원이었던 것 같았다.


조광제, 『한 직업외교관의 회상록: 나라를 생각하고 나를 돌아보다』 (나남, 2016) 50~51쪽

2016년 9월 29일 목요일

한국전쟁 시기 공산군의 F-86 운용?


정보문서들을 읽다 보면 호기심을 자극하는 내용이 많습니다. 이런 이야기 중에는 나중에 사실로 드러난 것도 많고, 단순한 착오나 역정보로 드러나는 경우도 많지요. 아래에서 인용하는 미공군 정보보고의 진위는 제가 아직 확인하지 못했는데, 그래도 꽤 흥미로운 이야기라고 생각되어 소개를 해 봅니다.


적군이 F-86 기종을 운용할 가능성

(1952년) 9월 26일 15시 30분경 정주(定州) 남서쪽 5마일 지점 상공 22,000피트에서 두 대의 F-86이 적대적인 F-86 한대로 부터 사격을 받았다. 피해는 없었다. 
이 두대의 F-86은 같은 날 15시 35분경 순천(順川) 서쪽 5마일 지점 상공 28,000피트에서 다시 적대적인 F-86 한대로 부터 공격을 받았다. 아군을 공격한 항공기에는 뚜렷한 표식이 없었기 때문에 어떤 조직에 속한 것인지 확인할 수 없었다. 아군의 F-86한대가 오른쪽 주익에 경미한 손상을 입었다. 두 차례의 공격 모두 같은 F-86이 한 것으로 추정된다. 

9월 29일 13시 45분경 신의주 동쪽 30마일 지점에서 본대와 떨어져 비행 중이던 한 대의 F-86은 후방에서 접근 중이던 두 대의 F-86과 합류하려다가 선두에 있던 F-86이 기종을 알 수 없는 항공기에 사격을 가하는 것을 목격했다. 같은 시각 아군의 F-86한대는 두 대의 F-86으로 부터 공격받고 있다는 보고를 했다. 아군의 손실은 없었다. 

극동공군사령부 정보참모부는 과거에도 적대적인 F-86으로 부터 공격받았다는 보고가 있었다고 지적했다. 최초의 보고는 1952년 2월 3일에 있었다. 

공군본부 정보참모부의 평가: 9월 18일에 전투 지역에 있던 한대의 T-6과, 같은 지역에 있던 네 대의 F-80은 공격을 가하지 않는 한 대의 F-84와 조우했다. 직후 검증을 거친 결과 그 시각 해당 장소에는 아군의 F-84가 없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같은날 아군의 F-86 한대가 구성(龜城) 상공에서 두 대의 F-80을 목격했다. 직후 제5공군이 보고한 바에 따르면 그 시각 해당 장소에는 아군의 F-80이 없었다. 그러므로 확실한 증거를 확보해 입증하거나 이 정보가 잘못됐다는 점을 밝힐 수 없는 이상, 공산군 측이 소수의 F-80, F-84, F-86을 재생했다고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지난 2년간의 전쟁으로 적군의 점령지역에 많은 수의 해당 기종이 추락했기 때문에, 아군의 기종을 재생하는데 충분한 부품을 확보할 수 있었을 것이다. 

“Directorate of Intelligence USAF, Daily Korean Resume”(1952. 10. 1), Record Group 341: Records of Headquarters U.S. Air Force (Air Staff), 1934 - 2004, Records of the Office of the Director of Intelligence, Office of the Deputy Chief of Staff, Operations 1942~56. p.2,


2016년 6월 6일 월요일

한국전쟁기 미육군 전차대대의 전차포탄 보유 비율에 관한 잡담


한국전쟁 당시 전차전은 주로 1950년 7~10월 사이에 일어났고, 전차는 대부분의 기간에 보병 지원 임무에 투입되었습니다. 그리고 7~10월 사이의 전차전도 대부분 소대 이하의 규모로 전개됐습니다. 그래서 당시 미군 전차들은 화력지원을 위해 고폭탄 중심으로 탄을 탑재하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낙동강 전선에서 격전이 벌어지던 8월 말, 미 8군 소속 전차대대들의 전차 포탄 보유 현황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표. 1950년 8월 31일 미 8군 소속 전차대대의 전차포탄 보유현황

73대대
70대대
6대대
89대대
72대대
76mm
76mm HE
-
4,753
-
5,618
4,033
76mm APCT
-
-
-
933
671
76mm HVAP
-
790
-
136
98
76mm 백린연막탄
-
667
-
786
566
90mm
90mm HE/ MT신관
1,372
386
1,286
353
600
90mm HE/ PD신관
3,070
863
1,075
767
1,343
90mm HE
1,960
563
1,875
500
875
90mm APCT
946
266
887
236
444
90mm HVAP
99
28
93
22
43
90mm 백린연막탄
209
59
196
45
91
“Ordnance Daily Activity Report”(1950. 8. 31), War Diary: Headquarters Eighth United States Army Korea(1950. 8. 31), RG407 Records of the Adjutant General's Office U.S. Army: Command Reports, 1949 - 1954(Entry NM3 429), Eighth Army(EUSAK).

철갑탄 대비 고폭탄의 비중이 매우 높은 것이 명확히 드러납니다. 실제 포탄 소모량에 대한 기록이 있으면 더 명확한 그림을 그릴 수 있겠지만, 보유량만 가지고도 당시 미군 전차 부대의 운용 양상을 짐작할 수 있겠습니다.

2016년 5월 28일 토요일

어떤 기록


전쟁 시기 군부대의 기록들을 보면 산더미 같은 정보의 양에 압도되곤 합니다.(특히 정보참모처의 기록들이 단연 압권이라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런 정보의 홍수 속에서도 단촐한 기록만 생산하는 부서가 간혹 있는데, 그 중 하나가 군종참모입니다. 예를들어 한국전쟁 당시 미육군 제8군 군종참모처에서 남긴 8월 10일자 일지를 보면 다음과 같이 달랑 한 줄로 보고를 마치고 있습니다.



뭐랄까, 아비규환의 전쟁에서도 평온한 일상 같은 모습을 보여주는게 괴이한 느낌을 주는군요.

2015년 12월 22일 화요일

미국의 군사원조에 관련된 단편적인 이야기 하나

뜬금없는 잡생각이 들어서 써 봅니다.

백마고지 전투에 투입된 한국군의 4개 야전포병대대(제30, 50, 51, 52야전포병대대)는 1952년 10월 6일 부터 10월 15일까지 총 9일간 143,749발의 105mm 곡사포탄을 발사했습니다.  가장 많은 포탄을 발사한 제52야전포병대대는 9일간 56,056발을, 가장 적은 포탄을 쓴 제 50야전포병대대는 같은 기간 동안 17,343발을 소모했습니다.1)  1개 대대가 9일 동안 대략 35,900발 정도를 사용한 셈입니다. 거칠게 계산하면 하루 평균 대대 3,990발, 포대당 1,330발 이군요.

그런데 제2차세계대전 당시 독일군 제4기갑사단 예하 제103기갑포병연대 소속의 105mm 5개 포대는 1943년 7월 5일 부터 9월 2일까지 대략 두달 정도 되는 기간 동안 105mm 곡사포탄 69,242발을 소모했습니다. 실제 전투기간은 46일이었는데2) 이걸 반영하면 하루에 5개 포대가 1,505발, 포대당 301발 정도를 쓴 셈입니다.

전투 상황의 차이가 있으니 양자의 단순 비교는 무리라 하더라도 재미있지 않습니까. 포탄 한발 만들지 못하는 제3세계의 군대가 미국의 원조만으로 손꼽히는 산업국의 군대 보다 더 많은 포탄을 쏠 수 있게 된 셈입니다. 미국의 바짓가랑이만 붙드는건 절대 안될 일이지만 미국이 있으면 편해지는게 사실은 사실입니다.^^




1) Bryan R. Gibby, “The Battle for White Horse Mountain: September-October 1952”, Army History(2013, Fall), p.42.
2) ”Stellungnahme zu dem Bericht der II./(Sf.) Pz.Art.Rgt 103 vom 20.8.43”(1943. 9. 7), H16/186, RG242 T78 R619,  p.3.

2015년 11월 8일 일요일

진천 전투 당시 김석원 사단장의 지휘(?) 방식


예전에 김석원 장군에 비판적인 미국 문서를 조금 포스팅한 일이 있는데 지나치게 미국 주장에 경도된게 아니냐는 말을 들었습니다.

김석원 준장 재임용 소문에 대한 미국 군사고문단의 반응


한국군 참전자들의 증언을 보면 김석원의 지휘능력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김석원에 비판적이고 미군사고문단의 문서를 뒷받침 할 만한 증언도 존재합니다. 한국전쟁 초반 포병단 부단장이었던 김계원의 증언을 보면 김석원이 군사적 지식이 부족해 사단을 운용하는데 문제가 있었다는 미군사고문단의 평가가 아주 허무맹랑한 중상모략은 아니었다고 볼 수 있을듯 합니다.

처음 곡사포를 수령한 김성 대대장은 충분한 운용의 실습도 없이 곧바로 진천지구 전투에 투입이 된 것인데 긍지를 가지고 분투하였다. 소속의 대전차포 중대장 허현(許玄) 중위는 이 전투에서 장렬하게 목숨을 잃었다. 이곳에 확인차 진천지구 OP관측소에서 오르니 사단장 김석원 대령*은 일본도를 옆에 들고 카이젤 팔자수염을 연신 만지며 참모장 최경록 중령*에게 계속해서 돌격 앞으로만 외쳤다. OP가 무엇을 하달하는 곳인 줄 모르는 것인가. 옆에서 고래고래 소리만 지르니 측지관측이 제대로 될 수 있겠는가 가관이었다. 직전 적의 이동경로에 정확히 아군의 포탄이 떨어져야 함에도 죄 없는 동네 민가에 떨어져 화염에 싸인 집에서 놀라 황급히 밖으로 뛰쳐나오는 불쌍한 주민들의 모습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즉시 화력지원 통제소에 뛰어가 오차의 원인을 분석하고 미군 고문관에게는 포의 운용을 점검케하여 시정하였다. 
김계원, 『The Father: 하나님의 은혜』, (SNS미디어, 2012), 300쪽

*두 사람의 실제 계급은 각각 준장, 대령입니다. 저자가 말년에 회고를 하다 보니 기억에 오류가 있었던 듯 합니다.

한국전쟁 기간 중 김석원이 유능한 지휘능력을 보여줬다는 평가가 있는데 미국쪽 자료들과 일부 한국측 증언을 보면 그에 반대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김석원의 지휘능력에 대한 비난은 그가 지휘한 사단에 배속됐거나 거쳐간 고문관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데 제3사단 선임고문관 에머리치(Rollins S. Emmerich) 중령은 김석원의 지휘능력이 형편없고 공격성이 결여된데다 고문단이 사단을 지휘하는 동안 잠이나 자고 있었다고 맹렬히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이 에머리치 문서는 나중에 한번 번역해 보겠습니다.

김석원이라는 군인의 군사적 능력에 대한 자료들은 평가가 극과 극을 오가는지라 상당히 호기심을 자극합니다. 

2015년 11월 6일 금요일

한국전쟁 초기 미군의 대전차전 준비에 관한 잡담


사실 지금 할 이야기는 다들 잘 아시는 이야기라서 진부한 감이 없진 않습니다. 그래도 생각난 김에 적어 봅니다. 진부하더라도 참아 주시길.

1950년 7월 5일 스미스 특임대가 패배하자 미육군본부에서는 부랴부랴 대응책 마련에 나섭니다. 그 중 하나가 3.5인치 바주카포를 생산해 보급하는 것 이었는데 7월 7일에 미합동참모본부의 카이저(C. A. Kaiser) 대령이 합참 전술지원위원회(Tactical Support Board)의 피어슨(Albert Pierson) 준장에게 보낸 보고서를 보면 트루먼 행정부 초기의 군축으로 육군이 상당히 곤궁한 상황에 처해 있었음이 드러납니다.

육군본부 군수참모부의 허친슨(Hutchenson) 대령은 일본 및 한국의 보급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알려주었습니다. 
   a. 전쟁이 시작됐을 당시 육군은 일본에 60일치에 해당하는 모든 종류의 보급품을 확보하고 있었으며 이 60일치의 보급품을 소모하기 전 까지는 일선 부대에 재보급을 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다만 여기에 3.5인치 바주카포와 무반동포는 해당되지 않는다.
   b. 3.5인치 바주카포 20문과 탄약 1,000발, 바주카포 운용 교육을 담당할 장교 1명과 사병 2명이 비행기 편으로 출발했으며 월요일인 7월 10일에 일본에 도착할 예정이다.
   c. 추가로 3.5인치 바주카포 100문과 탄약 4,000발을 곧 비행기 편으로 보급할 예정이다.
   d. 이에 더해 매 3일마다 3.5인치 바주카포 포탄 600발을 보급할 예정이다.
   e. 육군본부 작전참모부가 유럽 방면에 보내기 위해 비축하도록 한 분량을 제외하고, 최대 900문의 3.5인치 바주카포와 여분의 바주카포 포탄은 공장에서 생산되는 즉시 선박편으로 보급할 것이다.
"Memorandum for Brigadier General Albert Pierson"(1950. 7. 7), RG218 Records of U.S. Joint Chiefs of Staff, Chairman's File: General Bradley, 1949-53, Box1

e. 항을 보면 미국의 안보정책에서 제1순위에 있던 유럽 방면 마저 3.5인치 바주카포의 보급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전쟁이 터지고 소련제 전차에 일격을 당하고 나서야 황급히 3.5인치 바주카포 생산라인이 돌아가기 시작했음을 보여주죠.

그리고 '전차의 적'인 전차 이야기를 하자면 이쪽도 그리 상황이 좋지 않았습니다. 예전에 "한국전쟁 이전 미육군의 기갑전력 증강계획"에서 이야기 했던 것 처럼 1948년 이후 기갑전력을 확충하기 위한 여러가지 계획이 구상되고 있었지만 한국전쟁이 터지기 전까지는 본 궤도에 오르지 못하는 상황이었고 그동안 해외에 파병된 육군 부대들의 기갑전력은 꾸준히 악하되고 있었습니다. 1950년 7월 10일 홀싱어(J. W. Holsinger) 대령이 앤더슨(Webster Anderson) 대령에게 보낸 비망록은 개전 직후 극동군 사령부 예하의 기갑전력의 실상을 잘 보여줍니다.

"Memorandum for Colonel Webster Anderson, USA"(1950. 7. 10), RG218 Records of U.S. Joint Chiefs of Staff, Chairman's File: General Bradley, 1949-53, Box1
극동군사령부가 서류상으로는 승인된 전력 보다도 다소 많은 기갑전력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실제 가동률이 처참하게 낮아서 가용 전력이 형편 없었음이 드러납니다. 가장 상태가 양호한 M24의 경우 103대를 보유하고 있었고 가동율도 100%에 달했지만 T-34/85를 상대로는 쓸만한 상대가 아니었지요. 실질적 주력인 M4 셔먼 전차의 경우 161대를 보유하고 있었지만 가동가능한게 단 두대 뿐이었고 M26 전차는 보유량 3대에 가동가능 1대라는 처참한 수준이었습니다.

물론 이런 상황에서도 불과 한달 남짓한 기간에 본토에 비축된 물자까지 한국전선에 전개한 능력은 경이롭긴 합니다만.

2015년 10월 28일 수요일

미육군 제73중전차대대의 1950년 8월 22일 전투보고서


짧은 보고서 한편 번역합니다. 며칠 전 올렸던 미 24보병사단이 실시한 T-34에 대한 2.36인치 바주카포 관통실험와 같은 폴더에 들어있는 보고서입니다. 낙동강 방어전 기간 중 간헐적으로 벌어진 전차전의 전형적인 사례입니다만 보고서에 흥미로운 사진이 몇건 첨부되어 있어 올려 봅니다. 보고서 자체는 짤막합니다.


1950년 8월 24일

수신: 미육군 제8군 사령관
주제: 전차전

1. 제8군 사령관의 구두명령에 따라 다음과 같이 제27연대전투단 지구에서 있었던 전차 부대의 활동에 대한 정보를 첨부함. 
a. 시간: 1950년 8월 22일 03시 30분
b. 날씨: 구름은 없으나 어두웠음
c. 교전에 참여한 전차: T-34 9대, M26 4대
d. 교전양상: M26 전차 1대는 도로가 굽어지는 지점에 위치했고 또 다른 M26전차 한대는 그 전차의 위치로 부터 100야드 후방의 도로 반대편에 위치했음. 또 다른 두대의 M26전차는 선두 전차의 300야드 후방에 있는 개울 위에 위치했음. 교전 계획은 확실하게 명중을 시키기 위해 선두의 T-34가 아군 전차로 부터 50야드 안에 들어올 때 까지 기다렸다가 공격을 개시하는 것 이었음. 조명을 위해 조명지뢰를 설치하고 바주카포 팀도 배치되었음. 첫 번째 전차가 명중탄을 맞았을 때 개울에 배치되어 있던 M26 두 대가 첫 번째 적 전차 후방의 다른 전차들을 확인했음. 선두에 선 세대의 T-34가 격파되거나 기동불능이 되었음. 
e. 사용한 탄약: 고속철갑탄(HVAP) 4발, 철갑탄(APC) 2발, 백린탄(WP) 2발, 고폭탄(HE) 2발 
f. 교전거리: 50야드에서 500야드 사이  
g. 명중: 발사한 9발 중 9발이 명중1) 
h. 관통: 입사각 35도에서 3인치의 장갑을 관통함. 50야드 거리에서 발사한 포탄 한 발은 T-34의 정면 모서리와 기동륜을 뚫고 차체 후부 우측까지 관통했음. 
존 H. 마이켈리스John H. Michaelis 대령, 제27보병연대장.2)


주석
1. e항을 보면 총 10발을 사용한 것으로 나오는데 9발을 발사했다는 것이 오타인지 아니면 생략된 다른 정보가 있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2. “Tank versus Tank combat”(1950. 8. 24), RG330 Entry18 Box69 Korea 400-56


보고서에 첨부된 사진들을 올립니다. 서둘러서 스캔을 하다 보니 약간 삐딱하게 스캔된 사진이 있습니다. 원래 첨부된 사진은 19장인데 피격된 내부를 찍은 사진은 알아보기가 어려워서 일단 제외하고 차체 외부를 찍은 사진 13장만 올립니다. 사진 설명은 보고서에 기재된 그대로 옮겼습니다.

제27연대전투단에 배속된 73중전차대대 C중대에서 바라본 모습. 북한군의 T-34전차 네대가 있다. 세대는 불에 탔다. 전차 포신이 터져 버린 전차는 502호차이다. 미군 전차가 90mm포탄으로 이 전차의 포신을 파괴했다.

미군의 90mm전차포탄이 502호차의 차체 상면에 튕긴 뒤 포탑의 무전기가 설치되는 위치로 뚫고 들어갔는데 이 위치에 전차포탄이 적재되어 있었다.

T-34, 329호차. 불에 타지 않았다.

3.5인치 바주카포탄이 관통한 흔적으로 추정됨.

T-34의 외부 연료통. 디젤유를 실었기 때문에 불이 붙지 않았다.

T-34, 502호. 불에 탔다.

T-34, 329호

T-34, 502호

T-34, 502호

제73중전차대대 C중대 차량이 적의 20mm 기관포를 향해 사격하고 있다.

329호차 정면의 관통 흔적. 관통흔 왼쪽의 구멍은 전조등을 부착하는 위치이다.

T-34, 502호

T-34, 502호. 화재를 일으킨 명중 흔적이 보인다.


2015년 10월 25일 일요일

미 24보병사단이 실시한 T-34에 대한 2.36인치 바주카포 관통실험

잡담 하나.

T-34 쇼크는 한국전쟁 초기의 지상전 전개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입니다. 그 중에서 특히 유명한 이야기는 보병의 주력 대전차화기였던 2.36인치 바주카포가 T-34를 상대로 무력함을 드러냈다는 것 입니다. 잘 아시다 시피 전쟁 초기에 투입된 미군 보병도 2.36인치 바주카포를 주력 대전차 화기로 운용했고 미군 역시 한국군과 마찬가지로 2.36인치 바주카포가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는 것에 충격을 받게 되지요. 그래서 미군은 2.36인치 바주카포의 T-34에 대한 관통력을 구체적으로 평가하기 위해 실험을 실시하게 됩니다. 그 중에서 잘 알려진 것이 1950년 8월 제24보병사단에서 실시한 관통 실험입니다. 보고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950년 8월 25일

주제: 소련제 T-34 전차에 대한 2.36인치 바주카포의 효과 
수신: 제24보병사단장

1. 사단장의 구두 명령에 따라 1950년 8월 24일 두대의 소련제 T-34전차에 2.36인치 바주카포의 성형작약탄(HEAT)으로 사격한 효과를 정리한 도표를 첨부하였다. 

2. 통계자료를 평가할 때 다음과 같은 요인을 고려해야 한다.
a.실험에 사용한 전차들은 화재로 인한 고열에 영향을 받은 상태였다. 
b.후방에서 사격한 경우를 제외한 모든 사격은 최대한 90도에 가까운 입사각을 얻기위해 전차 보다 15피트 높은 위치에서 행해졌다. 

3. 전차의 조립 상태는 다음과 같다.
a. 포탑: 주조 공법으로 일체형으로 만들어 졌으며 장갑의 두께는 부위에 따라 2¼에서 2 ¾인치 사이이다. 
b. 차체: 적층 강판으로 조립되어 있다. 
(1)차체 전면을 포함한 차체 상부의 장갑 두께는 1¾인치이다. 차체 측면의 경사각은 약 60도이고 차체 정면의 경사각은 약 45도이다. 
(2)차체 후부의 장갑 두께는 1½인치이며 마찬가지로 적층 강판으로 조립되어 있다.
(3)차체 하부의 장갑 두께는 ⅞인치이며 연철로 만들어졌으며  6인치 정도의 가용접으로 차체와 결합되어 있다. 
(4)궤도의 재질은 다량의 구리를 함유한 질 낮은 철로 판단된다. 

4. 사격 실험을 통해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었다.
a. 2.36인치 바주카포는 
(1) 입사각이 90도일 경우 2½인치 두께의 용접 포탑을 관통할 수 있을 것이다. 대부분의 명중탄은 입사각이 90도가 아니어서 튕겨나갔다. 
(2) 전면 장갑의 경사각 때문에 차체 정면에서는 관통을 할 수 없을 것이다. 
(3) 차체 하부의 1¾인치 두께의 장갑은 관통할 수 있을 것이며 관통 효과도 좋을 것이다. 궤도와 차체 상부의 틈을 명중시킬 수 있다면 전차 승무원을 살상하거나 그 부분에 적재된 포탄을 유폭시켜 전차를 전투불능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틈새의 폭은 3인치에서 4인치 사이에 불과하다. 
(4) 차체 후부의 1½인치 장갑을 쉽게 관통하고 변속기를 파괴할 수 있을 것이다. 
(5) 전차의 현가장치에 대해서는 무력할 것이다. 
b. 차체 하부는 매우 부실하게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중(重)대전차지뢰에 극도로 취약하다. 

5. 3.5인치 바주카포는 T-34를 모든 방향에서 완벽하게 관통할 수 있었다. 포탑에 명중한 3.5인치 포탄은 관통하는데 그치지 않고 관통한 반대쪽 장갑의 내측에 직경 6인치, 깊이 3/8인치의 피해를 입혔다. 

John Wetherholt 중령, 사단 병기장교1)


이 보고서에 첨부된 도표는 다음과 같습니다.


표1. T-34/85에 대한 2.36인치 바주카포 HEAT탄 사격 결과(1950. 8. 24)
거리
(야드)
입사각
번호
장갑두께
(인치)
명중 부위
효과
100
90
1
포탑 중앙
관통 실패, 1⅜인치를 뚫음
100
90
2
포탑 중앙
포탑 상단 내부까지 완벽히 관통. 관통흔의 크기는 내측 ⅞인치, 외측 1과 1/16인치.
100
85
3
포탑 중앙
내부까지 완벽히 관통. 관통흔의 크기는 내측 ⅜인치, 외측 1과 1/16인치.
50
35
4
포탑 좌측
약간의 손상을 입히고 튕겨나감.
50
45
5
포탑 하부
내부까지 완벽히 관통. 관통흔의 크기는 내측 1인치, 외측 ½인치.
40
65
6
포탑 하부 모서리
내부까지 완벽히 관통. 관통흔의 크기는 내측 1인치, 외측 ½인치.
50
45
7
4
포탑(터렛링 부위의 1½되는 부분)
2인치 정도를 뚫은 흔적. 크기는 1½×1¼인치.
50
85
8
차체상부 중앙
내부까지 관통하는데 실패. 피격된 흔적의 크기는 직경 1¾인치, 깊이 1½인치.
50
85
9
차체상부
내부까지 관통하는데 실패. 피격된 흔적은 길이 2¾인치, 폭 1인치, 깊이 1과 9/16인치.
50
85
10
차체상부 모서리
관통하지 못하고 튕겨나감.
40
85
11
차체상부
내부까지 완벽히 관통. 관통부위의 크기는   ½인치.
60
45
12
차체하부 중앙, 궤도와 차체상부 사이의 틈
내부까지 관통하는데 실패. 1⅜인치 정도를 뚫음.
50
90
13
차체하부
완전 관통. 관통흔 직경 ⅞인치
50
90
14
차체하부
완전 관통. 관통흔 직경 ⅞인치
50
85
15
엔진 배기구 커버
내부까지 관통하여 브레이크 드럼에 경미한 손상을 입힘.
50
65
16
후부 점검창 경첩
½크기의 경첩 볼트에 명중하여 장갑을 ¾인치 가량 뚫음. 관통 실패.
50
45
17
차체 후부 좌중앙 좌측 귀퉁이
내부까지 완전히 관통하여 트랜스미션 하우징까지 피해를 입힘. 관통흔의 직경은 ⅞인치
50
45
18
차체 후부 하단 중앙
내부까지 완전히 관통하여 트랜스미션 하우징까지 피해를 입힘. 관통흔의 크기는 직경 1¼×⅞인치.
50
45
19
차체 후부 하단 중앙
상동
50
45
20
차체 후부 해치
완전 관통. 시동 모터를 파괴하고 팬에 경미한 손상을 입힘. 관통흔의 바깥쪽 직경은 1⅜인치, 안쪽 직경은 ⅞인치.
50
90
21
?
차체 후부 좌측 최동 구동축 커버
3¼인치를 뚫음. 관통흔의 바깥쪽 직경은 1¼인치이며 안쪽으로 갈수록 좁아짐.
50
30
22~25
차체 정면 상하단 결합부
결합부에 다섯발이 명중했으나 한발도 관통하지 못함. 피격 흔적의 크기는 깊이 5/16인치, 길이 1¾인치, 폭 1/4인치.
50
90
26~27
주행륜
주행륜
2발 명중. 효과 없음.
50
90
28~32
궤도
궤도 모서리
5발 명중. 효과 없음.
[표 출처. “Effect of 2.36 inch Rockets on T-34 Tank(Russian)”(1950.8.25), RG330 Entry18 Box69 Korea 400-56]

보고서의 도판을 첨부합니다. 시험 사격시의 명중 부위가 번호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클릭하시면 원본 크기로 커집니다.







주석.
  1. “Effect of 2.36 inch Rockets on T-34 Tank(Russian)” (1950. 8. 25), RG330 Entry18 Box69 Korea 400-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