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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2월 4일 일요일

[번역글] 전차는 1918년에 영국군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을까?



불법날림번역 한 편 나갑니다. 원래 전차 등장 100주년을 맞아 기념 포스팅(?)을 하나 하려다가 정신이 없어 타이밍을 놓쳤습니다. 그냥 넘어가기는 찝찝해서 개인적으로 재미있게 읽었던 논문 한편을 번역해 봅니다. 이 논문은 좀 오래된 논문인데, 1992년 Journal of Contemporary History 27-3에 실린 팀 트래버스Tim Travers의 “Could the Tanks of 1918 Have Been War-Winners for the British Expeditionary Force?”입니다. 이 글은 1차대전 당시 전차의 잠재력을 높게 평가하는 전통적인 시각의 연구입니다. 전차 등장 100주년에 알맞은 글이 아닐까 싶네요. 이 글에서는 영국원정군 사령부가 전차 운용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평가하고 있는데 이에 관해서는 상반되는 견해도 존재합니다. 관련된 글도 나중에 소개할 수 있으면 좋겠군요.

※ 영국쪽 직제의 번역어는 마땅한게 생각나지 않아서 임시로 붙인게 많습니다. 적합한 번역어가 있으면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번역어에 대한 조언 환영합니다.



전차는 1918년에 영국군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을까?

팀 트래버스

제1차 세계대전 당시의 전차에 관해서는 다양한 평가와 주장이 있다. 가장 먼저 윌리엄스-엘리스Clough Williams-Ellis 소령, 풀러J. F. C. Fuller 소장, 리델 하트B. H. Liddell-Hart소령 등의 전차 옹호자들이 집필한 영국원정군 전차군단Tank Corps의 공간사에서는 전차를 제병협동전투의 한 요소였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전차야 말로 1918년의 승리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 혁명적인 무기체계였다는 주장을 견지했다. 하지만 그 뒤 영국 기갑병과에서는 1918년 당시의 전차에 약점이 많았고, 기계적인 신뢰성도 낮았으며, 손실율이 높았다는 점을 들어 비판적인 평가를 내렸다. 이러한 비판적인 평가 중 하나로는 군사사가 존 터레인John Terraine의 주장이 있다. 그는  “1918년 당시의 전차는 기계적인 측면에서, 그리고 그것을 운용했던 인간의 관점에서 볼때 결코 승리를 가져다 준 무기가 아니었다.”라고 잘라말했다. 비드웰Bidwell과 그레이엄Graham은 터레인 보다는 좀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이들은 전차를 보병과의 적절한 협동을 통해 운용했을때는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동시에 “가장 중요한 문제는 당시 전차의 신뢰성이 부족했다는 점이다.”라고 지적하기도 했다.1)
 만약 전차를 올바르게 운용했고, 대량으로 투입할 수 있었다면 전차가 ‘승리의 무기’는 못 됐더라도 최소한 1918년 전역에서 보다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주장을 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 하려면 밀접하게 연관된 두 가지의 문제를 고려해야 한다. 첫 번째는, 1918년 당시 일련의 연속적인 공세작전을 펼칠 수 있을 만큼 많은 수의 전차를 확보해서 기계화 전략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핵심 무기체계로 사용할 수 있었는가 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1918년 전역에서 전차를 보다 효율적인 방식으로 운용했다면 더 큰 성과를 거두고 실제 역사와는 달리 막대한 손실도 없었을 것인가 이다. 만약 그렇다면 충분한 준비와 병과간 협동이 이루어진 주요 공세작전에서 전차를 보다 많이 운용했을 것이며, 공세에 투입할 수 있는 전차의 숫자도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투입가능한 전차의 숫자에 대한 첫번째 물음에 대한 답을 구하기 전에, 1917년 말 부터 1918년 중반까지 영국 육군과 육군최고회의Army Council, 영국 전시 내각에서 ‘기계화 전쟁’이라고 불리게 될 전쟁 방식을 지지하는 집단과 전통적인 전쟁 방식을 지지하는 집단 간에 중요한 논쟁이 있었다는 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이 논쟁은 인력 부족 문제로 인해 시작되었는데, 캉브레Cambrai, 아멜Hamel, 아미앵Amiens 등의 성공적인 제병협동 공세로 인해 기계화 전쟁의 지지자들이 논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겼다.2)
기계화 전쟁의 지지자들은 기계화된 수단을 최대한 활용해야 하며, 전차ㆍ항공기ㆍ기관총ㆍ박격포ㆍ화학무기와 포병에 중점을 두고 보병은  공격이나 방어시 이를 지원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전통적인 전쟁 방식의 지지자들은 보병(인력)을 중점에 두고 포병, 그리고 전차와 항공기 같은 기계들은 보병의 전진을 지원하는 보조적인 수단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영국 육군은 이 두가지 주장으로 양분되지는 않았다. 많은 장교들이 두 주장 사이의 중간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이 논쟁은 전쟁에 대한 태도와 관점에 대한 본질적인 문제를 다루는 것이었다. 하지만 두 주장은 극단적으로 대립했다. 영국원정군 사령관 더글라스 헤이그Douglas Haig 장군은 전통적인 관점을 지지하고 있었다. 반면 군수장관 윈스턴 처칠, 전차 및 기관총 병과의 장교 대부분, 병기감Master General of the Ordnance 윌리엄 퍼즈Sir William Furse 장군, 총참모장CIGS 헨리 윌슨Henry Wilson 장군, 부참모장DCIGS 팀 해링턴Tim Harington 장군을 비롯한 집단은 기계화 전쟁을 지지했는데 기계화의 수준에 대한 입장은 상이했다.3)
기계화의 수준이 다양했음을 보여주는 사례중 하나는 퍼즈 장군의 입장이다. 퍼즈 장군은 공세시 보병을 대규모로 집중하는 것에 반대하고 그 대신 전차와 연막탄, 포병 활용을 늘리고 보병은 줄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영국 제1군 사령관 혼Lord Horne 장군은 1918년 6월에 다음과 같이 썼다.

“병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기계화 장비를 늘려 대응해야만 한다. 나는 이것을 기계력machine-power이라고 정의한다. 기계력이란 포병, 기관총, 자동소총, 전차를 비롯해  보병을 지원하여 적에게 피해를 입힐 수 있는 모든 수단을 포함한다.”

영국 제1군의 기관총 참모Machine Gun Advisor 린제이Lindsay 중령도 기계화를 지지하는 인물이었는데 그는 1918년 7월에 다음과 같이 썼다.

“미래의 공격 작전에서는 항공기, 전차와 같은 기계가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며 자동화기와 박격포를 주무장으로 한 병력과 함께 작전을 펼칠 것이다.”4)

이 글에서는 해당 논쟁을 구체적으로 다루지 않을 것이다. 다만 이 논쟁이 특히 헤이그 장군과 영국원정군사령부 단위에서 전차를 평가하고 운용하는 방식에 영향을 끼쳤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이제 전차의 숫자라는 첫번째 질문으로 돌아가자. 1918년 8월 8일 부터 12일에 걸쳐 진행된 아미앵의 보전포 협동 공세 이후 비슷한 규모의 공세를 계속할 만큼의 전차가 부족했다는 통념이 있다. 이러한 통념은 아미앵 공세 당시의 전차 손실 통계로 인해 생겨났는데, 통계를 오독한 결과였다. 여러 역사가 중, 존 터레인은 그의 저서 To Win a War에서 아미앵 공세가 끝난 1918년 8월 12일 당시 가동 가능한 전차는 단 여섯대만 남아있었으며, “독일 제국을 전차 여섯대로 무너트릴  수는 없은 것 이었다.”고 평했다. 마찬가지로 비드웰과 그레이엄도 아미앵 공세당시 414대의 전차가 투입됐으나 “공세 이틀째에는 185대로 줄어들었고, 사흘째에는 85대, 나흘째에는 38대, 그리고 마지막 날에는 6대로 줄어들었다.”고 서술했다. 이 통계는 영국육군 공간사Official History에서 인용한 것이기 때문에 정확할 것이다.5)
아미앵 공세에서 전차 손실이 많았다는 점은 확실하다. 당시에 작성된 영국육군 전차군단의 기록에도 유사한 통계가 나타난다. 영국육군 전차군단이 집계한  통계에 따르면 8월 8일 공세 시작당시에는 425대의 전차가 있었으나 8월 9일에는 145대로 줄어들었고, 8월 10일에는 74대, 8월 11일에는 39대만이 남아있었다. 이것은 8월 11일까지 386대의 전차가 손실처리되었다는 의미이다.(425대 중 39대 만이 남았으므로) 하지만 이 기록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이 수치는 해당 날자가 시작했을때 투입할 수 있었던 전차의 숫자를 집계한 것이지, 가동가능한 전차를 모두 집계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풀러에 따르면 8월 8일 저녁 당시 전차 승무원들의 상태는 다음과 같았다고 한다.

“장거리를 진격한 끝에, 그리고 하루 종일 격렬한 전투를 치른 탓에 극도로 피로한 상태였다.(가장 많이 진격한 곳에서는 7.5마일을 진격했다.) 이때문에 다음날의 작전을 위해 혼성중대를 편성하기 위해서라도 휴식이 필요했다. 예비 전차는 몇대 없는 상태였다….”

이 글에 따르면 문제는 실제 전차 손실 보다는 예비 전차가 부족했던데 있었다. 아미앵 공세의 마지막 날이었던 8월 12일에 전차군단 본부가 작전을 중단한 이유는 전차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사령관GOC, General Officer Commanding 휴 엘리스Hugh Elles 소장이 전장의 지형을 공세에 부적합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아미앵 공세의 마지막날 영국군은 과거 솜 전투가 있었던 지역에 도착했다.) 그래서 제10전차대대만 제3군단을 지원해 계속 작전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마지막으로, 1918년 8월 17일 전쟁성War Office이 군수산업부Ministry of Munitions에 보낸 서신을 보면 “아미앵 방면의 작전에서 포병 사격에 의해 상실된 전차는 120대에 달한다.”는 내용이 있다. 즉 실제로 여러가지 원인으로 가동불능이 된 전차가 많기는 해도 독일군에 의해 격파된 전차는 425대 중 120대 정도에 불과했다는 뜻이다.6)
이 통계는 실제로 전투 손실 처리된 전차가 통념에 비해 훨씬 적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이 통계를 뒷받침 해 줄 자료가 더 있다. 이 자료들에 따르면 아미앵 공세가 끝나고 5일이 지난 뒤인 1918년 8월 17일 당시의 전차 통계를 알 수 있다. 이 자료에 따르면 당시 프랑스의 영국원정군이 1918년 8월 17일 당시 보유한 가동 가능한 전차의 숫자는 다음과 같았다. 마크V(병력 수송형) 122대, 마크V 중전차 242대, 마크IV 중전차 250대, 중형전차A 휘펫 124대, 야포 견인용 전차 29대, 수송용 전차Tank Tender 175대, 르노 경전차 10대, 장갑차 16대 등 총 968대의 기갑차량이 있었다.
이 통계에는 전장에서 회수해 수리중인 것은 빠져있다. 당시 마크V 중전차 153대가 수리중이었다. 그런데 이 문서에서는 별도로 언급하고 있지 않으나, 영국군이 보유한 968대의 기갑차량 중에는 당시 프랑스의 훈련소에 배치되어 훈련용으로 사용되던 차량도 포함되어 있다.7) 그렇다면 5일간의 아미앵 공세에서 가동 가능한 전차 중 많은 수가 상실되었다는 주장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실제로는 격파됐다고 간주된 전차 중 많은 수가 경미한 수준의 손상, 일시적인 전열 이탈, 혹은 기계적 고장, 연료 부족, 또는 정비를 위해 후방으로 이동 했거나 승무원의 피로로 인해 작전 수행이 불가능해 진 것을 포함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승무원의 피로가 누적되어 작전 수행이 어려워 진 것이 가장 큰 문제였을 것이다. 전차 승무원들은 보통 하루 평균 여덟시간 이상의 작전을 버틸 수 없었다. 기계적 고장이나 전차 승무원의 피로와 같은 문제들은 대부분 단기간 내에 극복할 수 있는 것이었다.8)
즉 아미앵 전투 당시 다수의 전차와 전차 승무원은 일시적으로 작전을 수행할 수 없는 상태였던 것이며, 단기간 내에 전열에 복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완전히 전투 불능이 되어 후방의 대규모 정비소에서 수리를 받아야 했던 차량은 386대가 아니라 200대 정도였을 것이다. 아미앵 공세 당시 전차군단이 대규모의 전차로 공세를 계속할 수 없었던 가장 큰 원인은 예비 전차와 예비 승무원의 부족이었다. 전차 숫자를 추정할 수 있는 다른 요소는 심각한 손상을 입은 전차를 수리하는 속도이다. 영국군의 전차 정비 기간을 알 수 있는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1918년에는 정비에 소요되는 시간이 단축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1918년 8월 하순에는 일주일에 수리되는 전차가 18대 정도였고 9월 초에는 20~30대 수준으로 증가했다. 그리고 10월 하순에는 일주일에 정비되는 마크V 중전차의 숫자가 33~35대 수준으로 늘어났다.9) 아미앵 공세와 그 직후에 전차군단의 가용 전력이 회복된 데는 전차 정비의 효율이 높아진 것이 부분적으로는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하지만 큰 손상을 입은 전차를 수리한 것이 가용가능한 전차의 숫자에 큰 영향을 끼칠 수준은 아니었다. 아미앵 공세 이후 가용 가능한 전차의 숫자가 전차 생산량에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도 있다. 공식 통계에 따르면 1918년 6월까지 400대의 마크V 중전차가 생산될 예정이었고, 동시에 마크IV 전차의 생산이 중단되면서 마크VIII 전차와 중형C 전차의 생산이 개시될 계획이었다. 하지만 군수산업부의 통계에 따르면 1918년 7월까지 생산된 전차는 129대에 불과했으며, 8월에는 81대가 생산되는데 그쳤다. 프랑스의 전장에 보급된 전차의 숫자는 1918년 9월 첫째주에 총 34대에 불과했으며, 10월에 배치된 숫자도 평균적으로 이 수준에 머물렀다.10)  다양한 생산차종과 영국의 노동력 및 생산 문제로 인한 전차 생산 부족은 전선에 배치된 전차의 숫자를 늘리는데 큰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대규모 전투 직후에 심각한 손상을 입은 전차를 회수하는 것 때문에 일시적으로 가용가능한 전차의 숫자가 줄어들기는 했지만, 전차의 높은 내구성과 전차 승무원들의 빠른 회복, 그리고 경미한 손상을 입은 전차를 신속하게 수리해 투입할 수 있는 능력 덕분에 전선에 배치된 전차의 숫자는 비교적 높은 수준을 유지할 수 있었다.
전차의 내구성은 전차를 완전히 파괴하고 승무원을 살상하는 것이 매우 어려웠다는 점과 연관되어 있다. 수리가 불가능할 정도로 파괴된 전차는 극소수였다. 1918년 8월 8일에서 11월의 종전시까지 전투에 투입된 1,993대의 전차와 장갑차 중에서 손상을 입거나 참호에 빠져 회수된 것은 총 887대였다. 그러나 윌리엄스-엘리스와 풀러의 저작에 따르면 이중 수리가 불가능할 정도로 손상을 입은 것은 15대에 불과했으며 완전 손실로 처리된 비율은 0.75%라는 극히 낮은 수준이었다. 비록 기록으로 남지는 않았으나, 전차군단 사령관이었던 엘리스 소장에 따르면 실제로는 이보다 약간 높은 손실율을 예측했다고 한다. 1918년 9월 5일, 엘리스는 8월 8일 부터 투입한 1,173대의 전차와 장갑차 중에서 30~40대 가량의 완전 손실이 있을 것이라고 예측했는데 이것은 완전손실율이 2.5~3.4%라는 뜻이었다. 1918년 10월 말 엘리스는 실제로 완전 손실로 처리된 전차가 50대 정도로 완전손실율이 2.5%일 것이라고 평가했다. 어떤 통계를 옳은 것으로 받아들이더라도 손상을 입거나 참호에 빠진 전차와 장갑차는 대부분 수리를 할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경미한 손상은 승무원들이 직접 수리할 수 있었고 그렇지 않다면 회수하여 수리할 수 있었다. 영국군은 계속해서 진격했기 때문에 전장에 남은 전차들을 대부분 회수하는 것이 가능했다. 회수된 전차 중에서 수리할 수 없을 정도로 파손된 것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또한 1918년 10월 12일 전차군단의 기록을 보면 8월 8일 부터 전투에 투입되어 손상을 입거나 참호에 빠진 전차들은 사실상 모두 회수되었다.11)
전차와 전차 승무원들이 쉴새 없이 전투에 투입됐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에 배치된 가용가능한 전차의 숫자는 높은 수준을 꾸준히 유지했다. 일반적으로 전쟁 말기에는 영국원정군에 가용가능한 전차가 격감했을 것이라는 인식이 있다. 하지만 마크IV, 마크V, 마크V*와 중형A 전차를 모두 합쳐서, 10일간의 격전에도 불구하고 8월 30일에는 261대(마크V 127대 포함), 9월 7일에는 177대(마크V 85대 포함), 10월 15일에는 357대(마크V 125대 포함), 10월 19일에는 317대(마크V 134대 포함), 11월 9일에는 235대(마크V 98대 포함)의 전차가 가용가능한 상태였다.  이것은 훈련소에 배치된 전차와 수리중인 전차는 제외한 통계다.12) 또한 이 통계로는 고질적으로 부족했던 예비부품 문제를 파악할 수 없다. 더 많은 예비부품이 있었다면 가용가능한 전차의 숫자는 더 많아졌을 것이다. 부품부족이 초래된 것은 기계화전투 보급국MWSD, Mechanical Warfare Supply Department의 앨버트 스턴Albert Stern대령의 책임이었는데, 그는 예비부품을 충분하게 확보하지 않은 상태에서 전차의 숫자만 늘리려 했다. 새로 생산된 전차 한대와 이에 필요한 완전한 예비 부품의 비율은 1대 3이 되는 것이 이상적이었다. 하지만 1918년 10월까지도 이 비율을 맞추지 못했다. 1917년에 추산한 바에 따르면 마크IV 전차 한대가 하루에 3마일씩 이동할 경우 14일간의 작전에 필요한 예비 부품은 20톤에 달했고, 한달간 작전할 경우에는 50톤이 필요했다. 그 결과 1916년 말 부터 1918년 말 까지 프랑스의 영국 전차군단과 기계화전투 보급국 간에는 ‘예비 부품을 확보하기 위한 전투’가 벌어졌다. 전차군단의 전차 수리 능력은 실제로 필요한 수준에 미치지 못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용가능한 전차의 숫자는 많은 편이었다.13)
전차의 내구성과 관련해서, 전차 자체가 생산되어 전쟁이 끝날 때 까지 완전손실로 처리되지 않았다고 한다면 전차 승무원은 어땠는가하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전차 승무원도 대부분의 피격에서 생존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1918년 8월 23일의 전투에서, 한 지역에 투입된 전차 중 8대가 피격됐으나 인명 손실은 경상 1명에 그쳤다. 물론 피격된 전차가 ‘단기간 가동 불능’ 상태에 빠지긴 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전차군단은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은 부대였으며 이때문에 전차 승무원들은 쉴새없이 전투에 투입될 수 밖에 없었다. 이때문에 1918년 8월에는 장교의 사상율이 27.5%, 부사관과 사병의 사상율이 20.56%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것을 실제 사상자 숫자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아미앵 공세당시 전차군단의 사상자 숫자는 700여명에 불과했다. 사상율을 계산하는데는 부상, 전사, 포로가 된 인원 뿐만 아니라 일시적인 탈진, 그리고 전차의 부실한 환기로 인한 일산화탄소 중독 및 체온 상승으로 인한 손실까지 집계했다. 마찬가지로 마크V* 전차에 탑승한 보병들도 전차 내부의 과열로 인해 피해를 입었는데, 당시 전차 내부의 온도는 습구온도계 기준으로 화씨 86도에 달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이것은 인간이 체온 조절 능력을 상실하는 것 보다 겨우 3도 낮은 수준이었다.14)  아미앵 공세당시 전차 승무원의 사상율은 낮은 편이었지만, 만약 8월 8일 이후의 공세에서 더 많은 포병 지원을 받으면서 충분한 예비대와 함께 대규모로 작전을 펼칠수 있었다면 훨씬 더 낮아졌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글의 서두에서 제기한 두 번째 문제로 넘어가도록 하자. 과연 1918년 당시 전차를 보다 효율적으로 운용할 수 있었을까?

영국원정군이 전차를 보다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이 존재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그랬더라면 1918년의 전역에서 전차는 더욱 더 결정적인 병기가 됐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던 이유가 몇가지 있다. 전차가 보다 핵심적인 역할을 하지 못한 첫 번째,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이유는 헤이그 장군과 영국원정군 사령부의 부정적인 태도에 있었다. 풀러가 지적한 것 처럼 비판의 대상은 전차 자체가 아니라 전차군단이 전차를 다루는 태도였다. 이글의 서두에서 언급한 기계화 전쟁 방식과 전통적인 전쟁 방식을 두고 전개된 논쟁에서 헤이그 장군과 영국원정군 사령부가 취한 입장과는 별개로, 구조적인 문제가 있었다. 전차군단은 자체적인 장성급 사령관과 참모부 조직을 갖추고 전차군단의 작전, 훈련, 정보 및 행정을 수행하고 있었으며, 전차 운용 교리와 개념을 독자적으로 개발하고 있었다. 1918년 6월, 전차군단 감찰감Director-General of the Tank Corps 캐퍼John. E. Capper 소장은 이 구조적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다른 모든 특수한 조직들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상황은 전차에 관해 이렇다 할 경험이 없는 고급 지휘관들과 총참모부가 전차와 전차의 운용에 대해 제대로 연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했다. 총참모부가 다른 병종과 동일하게 전차의 운용과 한계에 대해 연구하지 않는한 전차의 대규모 운용을 통해 실질적인 성공을 거두기란 어렵다.”

캐퍼 소장은 영국원정군 사령부 참모부가 전차를 병기로서 연구하고 이해하려는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으며, 육군본부 참모부와 다른 고위 장성들도 전차에 대해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는 전차군단 사령관도 포병과 마찬가지로 영국원정군 사령부에 병과 참모로 참여해야 하며, 육군본부 내에도 포병과 마찬가지로 전차병단Tank Group을 두고 고급 장교를 양성하기 위해 기갑전술학교를 세울 것을 제안했다. 엘리스 소장도 이 견해야 전적으로 동의하면서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그동안의 가장 큰 과오는 총참모부가 전차에 관해서 아무 역할도 하지 않았으며, 이것이 육군 전체에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다. 이때문에 각 야전군은 위로 부터 어떠한 지침도 받을 수 없었으며 받은 것은 기껏해야 제안 수준에 불과했다.”15)
이러한 조직 구조는 최종적으로 전차군단이 전장에서 필요로 한 것들이 대부분 묵살되도록 만들었다. 한 소령은 아미앵 공세와 같은 대규모 공세가 시작되기 전에 예비 차량으로 사용할 수 있는 충분한 전차를 보급받아, 전차와 승무원을 교체해 가면서 효율성을 잃지 않고 공세를 계속할 수 있도록 할 수 없었던 점을 지적했다. 1918년 10월, 풀러는 100%의 예비 차량이 없으면 ‘전차 부대의 전투 효율성은 전투 개시 72시간 내에 격감할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풀러의 주장은 아미앵 고에 당시 가용 가능한 전차의 숫자가 격감했던 사실에서 도출한 것이었다. 비록 손실 원인의 대다수는 적의 공격 이외의 것이었지만, 리델 하트는 전차의 손실로 인해 투입 가능한 전차의 숫자가 감소했음을 지적했다. 그러므로 100%의 예비 차량을 갖추고 전차가 대규모로 공격에 투입된다면 다른 모든 요인들이 동일할 경우 전차가 큰 우위를 점할 수 있었을 것이다. 충분한 예비 차량을 확보할 수 없었던 원인 중 하나는 전차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던데 있었고, 또 하나는 영국원정군 사령부의 무관심 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전차의 숫자가 부족했던데 있었다. 영국육군의 공간사 저자 중 한명이었던 제임스 에드몬즈James Edmonds 준장은 전차의 부족을 초래한 원인이 전차를 소규모로 무분별하고 비효율적으로 분산 운용한데 있었다고 서술했다. 그는 이렇게 지적했다. “(아미앵 공세 이후) 공세작전에 전차를 집중적으로 투입하지 못하고, 심지어 그러한 계획조차 수립하지 못한 것은 심히 유감스러운 일이었다.” 만약 공세 마다 충분한 숫자의 전차를 확보하고 충분한 예비 차량을 마련하는 한편, 초기 돌파를 달성한 뒤인 공세 2~3일 차에는 전차 부대를 후방으로 돌리는 등의 적절한 전술을 사용했다면 전차는 1918년의 전역에서 훨씬 큰 활약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16)

전술은 전차군단에 있어서 또 하나의 큰 문제였다. 전차는 아군 포병의 지원이 없을 경우 독일군의 포병 사격에 취약했으며, 보병의 근접지원, 연막이나 안개, 또는 여명의 보호 아래 움직여야 했으며, 기습적인 운용도 필요했다. 전차를 지원하기 위한 연막 및 포병 사격 훈련, 보병과의 사전 훈련(특히 오스트레일리아 군단이 전차와의 협동 작전에 탁월했다.) 강화, 항공기 정찰 및 적의 대전차 화점에 대한 공습 등이 실시됐다. 그러나 영국원정군 사령부와 고급 참모들은 전차를 단지 지원 수단으로 간주하고, 보병과 포병을 중시했기 때문에 전차군단의 요구 사항을 부차적인 것으로 간주했다. 이로인해 전차 부대는 필요이상으로 손실을 입었다. 예를들어 아미앵 전투 당시 제5전차여단은 공세 이틀째인 8월 9일에는 포병이 적절한 지원 사격을 해 주지 못했다고 보고했다. 제5전차여단의 보고에 따르면 이날 여명에 맞춰 연막의 보호를 받으며 공격을 시작했지만 해가 뜬 뒤에는 ‘포탄이 부족하다’는 이유에서 포병의 지원을 전혀 받지 못하고 공격에 나서야 했다. 이때문에 아미앵 공세가 진행되면서 전차에 대한 지원 체계는 무너지고 양적으로도 감소했다. 8월 11일 한 캐나다 여단 지휘관은 파르빌리에Parvillers 외곽에서 15대의 전차가(실제로는 16대 중 12대였다.) 단 1문, 혹은 1개 대전차포대에 의해 격파된 것으로 추정된다는 보고를 했다. “이것은 극히 곤란한 상황에서 전차가 연달아 격파됐으며 보병의 지원을 받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엄청난 일 이지만 이걸 전쟁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즉 전차 부대는 아무런 지원도 없이 소모됐다는 것이다. 그리고 8월 21일 이후 독일군의 대전차 방어는 강화되었고, 전차 부대는 소규모의 취약한 집단으로 운용되기 시작하면서 역량 이상의 임무를 부여받았다. 이러한 사례 중 하나는 전차군단의 고위 참모 장교 한명의 회고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그는 8월 25일에 있었던 제9전차대대의 작전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이날 야간에 10대의 전차가 이동을 시작했다. 이 부대는 다음날 여명에 캐나다 제2보병사단과 함께 작전을 수행할 예정이었다. 전차병들은 피로한 상태였으며 정찰을 실시할 시간도 부족했고 보병과의 연락 체계도 없었기 때문에 만약 다음날 그대로 투입할 경우 성공을 거둘 수 없을 것이었다.”17)
전쟁이 끝나고 한참 지난 뒤 전차군단의 참모 장교였던 마텔le Q. Martel 장군은 일부 사단장들은 전차 부대가 할 수 있는 이상의 역할을 요구했다고 올바르게 지적했다. 하지만 전차부대 지휘관들이 이러한 요구에 반대할 경우 영국원정군 사령부와 그 예하 사령부의 지휘관들은 군기가 빠졌다고 비난했다. 이러한 사례 중 하나가 1918년 9월 27일에 캐나다 군단에서 있었다. 한 캐나다 여단장은 그의 여단에 배속된 전차가 세 대 밖에 되지 않았는데, 부를롱Bourlon 숲 외곽 까지 진출했을 때 배속된 전차 부대 지휘괸이 전차들을 후방으로 돌려 연료를 보급 받을 수 있게 해 달라고 요청했으며, 전차들의 기계적 상태가 좋지 않고(마크IV로 추정) 승무원들의 상태도 좋지 않다고 말했다고 기록했다. 캐나다 여단장은 전차부대가 이렇다 할 지원을 해 주지 못했으며 전차 부대 지휘관과 그의 전차들 때문에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하기는 싫었다고 비난했다.  이 여단장은 고작 세대 밖에 되지 않는 배속된 전차부대에 대해 잘 알지 못했으며, 이들의 처지를 이해할 생각도 없었다. 또 다른 사례가 있다. 제4전차여단은 1918년 9월 말에서 10월에 걸친 기동작전이 전차에 심각한 영향을 초래했다고 보고했다. 보병 지휘관들은 전차가 매일 기동하면서 받는 기계적 피로에 대해 이해하질 못했으며, 계속해서 기동을 하는 상황에서는 전차를 이틀 연속으로 운용할 수는 없다는 점도 이해하지 못했고, 네대의 전차만 투입해도 충분한 상황에서 세배나 되는 전차를 투입했으며, 단지 전차를 배속받았다는 이유 만으로 불필요하게 전차를 투입했다. 이 보고서에는 1918년 10월 5일 보르부아르Beaurevoir 마을에 대한 공격 사례를 기록하고 있다. 이 전투에서 제25사단의 보병은 두 차례나 전차를 따라잡지 못했지만, 전차들은 독일군의 기관총 진지를 성공적으로 제압했다. 아마도 보병부대 지휘관들이 전차가 배속된다는 사실을 사전에 통보받지 못했기 때문에, 전차를 어떻게 운용해야 할 지 미처 생각을 못했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졌을 수 있다. 어쨌거나 이로 인해서 “보병과 전차 부대의 협동 작전이 이루어지지 못했다.”18)
이때문에 1918년 8월 말 부터 전쟁이 끝날 때 까지 두가지 방식의 완전히 상이한 전술이 사용됐다. 하나는 전차를 중심으로 한 기계화 전술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전통적인 방식의 전술이었다. 만약 전차가 화력 지원을 받고, 정찰 및 타 병과와의 연락을 취할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보병이 전차와의 협동작전을 위해 사전에 훈련을 받은 상태였다면 전차 부대는 보병의 피해를 줄이고 동시에 큰 성과를 거둘 수 있었을 것이다. 공식 문건인 ‘전차부대 주간 활동 요약Weekly Tank Notes’에는 아미앵 전투 당시 오스트레일리아 군단이 전차와의 협동 작전에 탁월했으며, “전차를 일렬 종대로 운용했으며, 전차가 돌파를 하면 그것을 곧바로 활용하여” 보병의 손실이 적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안개가 낀 상태에서 보병의 근접지원을 받을 경우 전차는 성공을 거둘 수 있었으며 보병의 손실도 적었다. 이를 입증해 주는 통계도 있다. 오스트레일리아 군단은 아미앵 전투 당시 전차와의 협동 작전에 탁월했다는 평가를 받았는데, 캐나다 군단은 전차와의 협동에서 나쁜 평가를 받았다. 캐나다 군단의 사상자는 3,500명이었는데 오스트레일리아 군단의 사상자는 3,000명 미만이었다. 오스트레일리아 군단은 독일군 장교 183명, 사병 7,742명을 포로로 잡고 야포 173문을 노획했는데, 캐나다 군단은 장교 114명과 사병 4,919명을 포로로 잡고 야포 161문을 노획했다. 또한 오스트레일리아 군단과 여기에 배속된 전차 부대는 인접 부대인 제3군단이 Chippily 능선을 점령하는데 실패해 이 능선의 독일군의 포격과 기관총 사격에 측면을 공격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손실이 적었다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19)

미시적인 단위에서 전차의 효율성을 평가할 수 있는 유용한 방법으로는 각 전차장(전차장이 전사하거나 부상당했을 경우는 그 다음 계급)이 전투가 끝난뒤 2~3일 내에 작성하는 전투보고서Tank Battle Sheet를 분석하는 것이 있다. 전투보고서는 단차 단위의 전투에 대해 풍부한 정보를 담고 있다. 여기에는 각각의 전차가 지원한 부대, 작전 시작 및 종료 시간, 전차와 승무원의 상태, 승무원의 피해 상황, 6파운드 포탄과 기관총탄의 소모, 작전 시간, 전차와 전술 개선에 유용한 지적, 그리고 작전 진행 상황에 대한 서술 등이 실려있다. 기존의 연구들은 개별 전차의 전투 보고서를 제대로 활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문서는 전차가 실제로 운용된 방법을 분석하는데 극도로 유용하다. 예를들어 아미앵 전투 당시 오스트레일리아 제4보병사단과 함께 작전을 했으며, 위에서 언급한 Chippily 능선으로 부터 측면을 공격받았던 제8전차대대의 전투 보고서들을 살펴보면, 전차 승무원들은 일반적으로 아래에서 언급할 세 가지 상황 중 한가지를 겪었다. 첫 번째는 기계적 문제나 승무원의 상태 때문에 전차를 제대로 운용하지 못한 경우이다. 예를 들자면 작전 중 전차의 기계적 문제로 인해 보병에 대한 지원에 실패했거나 아예 지원에 나서지 못한 경우라던가, 전차병들은 보병을 지원하려 했으나 차내의 연기와 열기 때문에 작전을 중단해야 했던 경우 등이다. 두 번째는 전차가 피격되거나 참호에 빠지기 전 까지 보병과 함께 좋은 결과를 얻은 경우이다. 세 번째는 전차가 피격되거나 참호에 빠지지 않고 보병과 함께 좋은 결과를 얻은 경우이다. 제8전차대대의 작전 결과를 모두 살펴본 결과 작전에 투입된 36대의 전차 중에서 8대가 첫번째 사례(기계적 문제)에 해당했으며, 16대가 두번째 사례(유용했지만 피격되거나 방기됨)에 해당되었으며, 12대가 세번째 사례(유용했으며 피해가 없었음)에 해당되었다.(1개 전차대대는 36대의 전차로 구성되었으며, 제8전차대대의 경우 마크V 전차와 6대의 훈련용 전차로 편성되었다.) 피격되거나 참호에 빠진 전차들은 거의 대부분 수리해서 다시 투입할 수 있었다. 그리고 두번째 사례와 세번째 사례를 합치면 제8전차대대는 잘 조직된 보전합동 작전으로 77%의 전차가 성공을 거뒀음을 알 수 있다.20)
 
그러나 전차를 평가하는데 있어 보다 위험한 방법이 하나 더 있다. 그것은 아미앵 공세에 참여한 전차장들이 그들의 작전을 서술한 글에서 당시의 상황과 분위기를 포착하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세번째 사례에 해당되는 마크V 전차 9363호의 전차장이었던 브라운 중사의 기록을 살펴보자.(브라운 전차의 전차는 수컷형식으로 2문의 6파운드포와 4정의 기관총을 장비했다. 암컷형은 이와 달리 6정의 기관총을 장비했다.)

“오전 5시 집결지를 출발해 오전 7시 30분 공격개시선인 그린 라인에 도달했다. 오스트레일리아군 제13보병대대가 합류해 전차들을 그린 라인까지 인도했다. 작전 시작후 4시간 뒤 우리는 제13보병대대와 함께 그린 라인을 출발했다. 보병은 1/100야드의 속도로 따라왔다. 전진하는 도중 전차들이 급경사 지대를 통과할 때를 제외하면 보병들은 대형을 유지하며 잘 따라왔다. 우리는 적의 기관총과 보병들, 그리고 3문의 야포를 호치키스 기관총과 6파운드 포로 공격했다. 가까이 접근하자 적은 야포들을 버리고 달아났다. 작전을 마칠 무렵 우리는 참호가 구축된 가파른 능선에 도착했다. 나는 참호 중 하나로 들어가 약 50명의 적군을 포로로 잡았다. 보병이 도착한 뒤 총 300여명을 생포한 것으로 기억한다. 사수 한명, 홰틀링(부 조종수), 버처트(사수)가 피로와 차내의 열기로 약간 탈진했다. 작전 시작후 6시간 뒤 우리는 목표인 레드라인에 도착했다. 여기서 한시간 동안 보병이 재집결 하는 동안 우리는 전차 집결지인 던전 숲에서 반장의 지휘하에 집결했다.”21)

브라운 중사의 전차는 큰 문제 없이 작전에 성공했다. 하지만 머레이 중위의 9152호차는 이보다 운이 없었다. 이 차량의 사례는 위에서 언급한 두번째 사례에 해당된다.

“나의 전차는 오전 8시 20분 그린라인을 출발해 공격개시선 800야드 전방에서 적 보병과 조우했다. 여기서 부터 2km를 전진하는 동안 적의 기관총 진지와 보병들을 6파운드 포와 기관총으로 공격했다. 남북방향의 배수로에 도착했을때 … 은폐된 기관총 진지에서 완강하게 저항하는 적을 마주쳤다. 하지만 아군은 아무 손실 없이 보병을 적 기관총 진지로 돌입시켰다. 작전 지역의 지형 문제와 함께 내가 전차의 바깥에서 차량을 지휘해야 했기 때문에 큰 어려움이 있었다. 이무렵 승무원 중 네명이 차내의 열기와 배기가스 때문에 탈진했고 주포를 조작할 수 없었다. 결국 내가 직접 6파운드 포를 조작해야 했다. 이때 전투가 가능한 승무원은 조종수, 사수 한명과 나 뿐이었다. 레드 라인으로 진격하면서 수많은 적을 쓰러트렸으며 레드 라인도 쉽게 점령할 수 있었다. 나는 보병의 최종 목표로 전진했으며, 200야드 앞에서 50명 정도의 적을 포로로 잡았다. 이때 나는 좌익의 보병이 원래 목표에서 다소 못미친 지점에 있다는 점을 깨달았다. 나는 보병들에게 가서 지원을 부탁했으며 보병들은 전진했다. 나는 다시 전과확대선인 블루 라인으로 전진해 몇개의 적 참호를 마주쳤다. 조준 사격을 하자 참호에서 무장한 적 몇명이 나타났으며 내 조종수와 나는 15야드 거리에서 권총 사격으로 9명을 사살했다. 나머지 적 30여명은 항복했으며 나는 포로들을 아군 보병에게 인계했다. 그리고 나는 다른 마크V 전차들과 함께 계속 전진하다가 직격을 맞아 승무원 한명이 전사하고 네명이 부상당했다. 또 다른 명중탄으로 한쪽 궤도가 끊어졌다. 결국 나는 아군의 집결지로 돌아갔다.”22)

머레이 중위의 전차는 직격을 당할때 까지 먼 거리를 진격했는데, 이것은 두번째 사례에 속하는 다른 전차들도 비슷했다. 하지만 첫번째 사례에 속하는 전차의 전차장들은 기계적 고장으로 인해 작전을 수행할 수 없었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조종수와 부조종수가 열기로 인해 탈진해 전차를 후퇴시켰다고 보고한 암컷형식인 9385호차의 전차장 셔우드Sherwood 중사와 같은 보고 사례도 있었다. 실제로 많은 전차장들이 차내의 열기와 탈진에 대해 보고했다. 하지만 제8전차대대의 전투보고서들을 분석해 파악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점은 전차가 아미앵 공세가 성공하는데 있어 매우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특히 독일군의 기관총 진지를 격파해 오스트레일리아군 보병의 손실을 줄이는데 기여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성공을 거둘수 있었던 원인은 오스트레일리아 제4보병사단의 작전 구역에서는 전차와 보병의 상호 지원이 잘 이루어졌으며, 전투보고서에 기록된 내용을 토대로 했을때 전차가 보병을 선도하고 보병은 전차의 150~200야드 후방에서 근접하여 전진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Chippily 능선의 독일군이 측면에서 큰 피해를 입혔음에도 불구하고 기습효과와 안개, 그리고 연막으로 제8전차대대의 작전은 성공적이었다.23)

마지막으로, 전차를 중심으로 한 전쟁 수행방식의 효율성을 판단하기 위해서는 사상자 통계를 간략하게 살펴보는 것이 유용할 것이다. 아미앵 공세당시 영국원정군의 인명손실은 22,000명이었는 데, 전차의 지원 없이 작전한 프랑스 제1군의 사상자는 24,000명이었다. 8월 21일에서 9월 17일 사이에 영국원정군의 보병과 기병 사상자는 105,943명이었는데, 8월 1일 부터 31일 시기에 가용가능했던 전차의 숫자는 1,184대였다. 그리고 9월 18일에서 11월 11일까지 영국원정군의 보병 및 기병 사상자는 158,440명이었는데 9월 1일에서 10월 20일 사이에 가용가능한 전차의 숫자는 706대로 줄어들었다. 비록 기간이 완전히 같지는 않고 다른 변수도 고려해야 하지만 이와같이 대조되는 통계로 미루어 볼때 잘 준비된 대규모의 보전포 협동 작전이 적은 숫자의 전차의 지원을 받는 보병 공격보다 적은 수의 사상자를 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전차군단이 아미앵 공세에서 입은 사상자는 앞서 언급한대로 대략 700명 정도였으며, 8월 8일에서 10월 10일 까지의 사상자는 총 3,188명이었다.24)
그리고 군수참모부의 자료Munutions files에 있는 일련의 통계자료들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예를들어 1918년 7월 아멜Hamel에서 실시된 보전포 협동 작전에서 전차 2개대대의 지원을 받는 보병사단 한개는 전차의 지원이 없는 3개 보병사단에 필적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풀러도 1918년 7월에 낸 전차의 효율성에 대한 연구에서 전차를 중심으로 한 전투 수행 방식이 사상자를 크게 줄인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1918년 9월에 기계화 장비 보급 부부장ACMS, Assistant Controller of Mechanical Supply 데이비슨G. F. Davidson은 1,000야드의 공격정면에서 공격을 감행하려면 1야드 당 여러명의 소총병과 함께 1,000,000발의 소총탄이 필요하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10대의 전차만 배속시킨다면 전차 한대당 10명의 보병만 배속시키고 탄약 소모도 최소화 할 수 있을 것으로 평가했다.25)

결론을 내리기 위해서 두 가지의 질문을 제기하려고 한다. 과연 1918년 전역에 기존에 생각했던 것 보다 더 많은 전차를 투입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1918년 전역에서 전차를 보다 효율적으로 운용할 수 있었을까? 첫번째 질문에 대한 답으로는 아미앵 공세 직후 968대의 가용 가능한 전차와 장갑차가 있었으며, 아미앵 전투 부터 종전시 까지 가용가능한 ‘전차의 숫자가 많았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전차의 숫자가 많았다’는 표현은 가용가능한 전차의 수가 충분했다는 것을 뜻하며, 아무런 계획 없이 마구잡이로 전차를 투입하는 대신 전차를 아껴서 사용하고 충분한 숫자를 모을 수 있었다면 1918년 말에도 대규모의 보전포 협동 작전을 펼칠 수 있을 만큼 많은 수의 전차를 확보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적절한 운용이 무엇이냐는 두 번째 질문을 제기한다. 이에 대한 답은 충분한 예비 전차를 확보하고 전차에 대한 지원을 충분히 하는 상태에서 공세 시작 2~3일차 까지만 전차를 투입했다면 전차는 아미앵 전투 당시처럼 1918년 말에 있었던 일련의 대규모 공세에서도 핵심적인 역할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전적으로 영국원정군 총사령부와 고위 지휘관들의 태도가 바뀌어야만 가능한 것이었다. 1918년 8월 말 생포된 한 독일군 장교가 진술한 것 처럼, 영국군이 보전포 협동 공격을 해 올 경우에는 독일군의 방어선이 대부분 붕괴됐다. 하지만 이 포로는 다른 방식은 그리 성공적이지 않았다고 평가했다.26) 이 주장을 입증하는 자료는 많다. 하지만 전차군단을 다른 방식으로 운용하고 지원을 했다면 어떤 결과를 거둘 수 있었을 것이냐는 질문에 대해 완벽한 답을 할 수 는 없다. 그렇지만 전차만 가지고 전쟁을 승리할 수 는 없었지만 전차 덕분에 보병의 희생을 크게 줄일 수 있었다는 주장을 증명해 줄 수 있는 자료는 많다. 그리고 캉브레, 아멜, 아미앵에서 실시한 기습적인 보전포 협동 공격이 거둔 성공을 가지고 평가한다면, 전차는 적합한 지형이라면 어디에서건 돌파에 성공하여 기동전으로 전환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1918년 당시의 전차는 기계적 신뢰성이 낮았고 전차 및 예비 부품 생산도 문제가 있었으며, 1939~40년 시기의 전차가 훨씬 높은 평가를 받았던 것에 비교하기도 어렵다. 또한 1918년에 전차를 통해 승리를 거두기 위해서는 영국의 동맹군들도 비슷한 수준으로 노력을 기울였어야 했다. 물론 1917~1918년 시기 전차의 문제가 기계적인 요소 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요소에도 기인했으며, 정신적인 문제가 영국원정군 사령부와 전차의 중요성에 반대해 전차군단의 인력과 물자를 감축하려 한 고위 지휘관들에 기인하는 것이냐는 점은 의문의 여지가 있다. 만약 전차를 낭비하지 않고 적적하레 운용하는 한편 최고사령부 단위에서 전차 부대에 충분한 지원을 해 줬다면 전차는 훨씬 더 큰 기여를 할 수 있었을 것이며 1918년에 연합군의 승리를 훨씬 더 적은 희생으로 앞당길 가능성도 있었다. 전차만 가지고 제1차 세계대전을 승리한 것은 아니며, 전차군단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런 주장을 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좀 더 공정하게 평가 한다면, 철학적인 표현을 사용하여 전차는 반드시 필요한 무기였지만 1918년에 승리할 수 있었던 원인으로 꼽기에는 충분치 못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주석
1. Major Clough Williams-Ellis and A. Williams-Ellis, The Tank Corps (London 1919); Brevet Colonel J.F.C. Fuller, Tanks in the Great War, 1914-1918 (London and New York 1920); Captain B.H. Liddell Hart, The Tanks. The History of the Royal Tank Regiment and its Predecessors, Vol. 1, 1914-1939 (London 1959); John Terraine, To Win A War. 1918. The Year of Victory (London 1978, Papermac edition, 1986), 117; the same idea is noted in Terraine, White Heat. The New Warfare, 1914-1918 (London 1982), 224, and in Daniel Dancocks, Spearhead to Victory: Canada and the Great War (Edmonton 1987), 556; Shelford Bidwell and Dominick Graham, Fire-
Power, British Army Weapons and Theories of War, 1904-1945 (London 1982, 1985), 137. A recent book, which emphasizes the problems of tank production is A. J. Smithers, A New Excalibur: The Development of the Tank, 1909-1939 (London 1986). 또한 David Fletcher, Landships: British Tanks in the First World War (HMSO:403 London 1984), 와 Fletcher in J.M. Winter, The Experience of World War I(London 1988), 100도 참고하라. 플레처는 “전차로 인해 전쟁에 승리했다는 것은 잘못된 주장이다. 하지만 전차는 참호전이라는 교착 상태에 해답을 제시했다.”고 평가했다.
2. 이 논쟁은 Tim Travers, 'The Evolution of British Strategy and Tactics on the Western Front in 1918: GHQ, Manpower and Technology'. The Journal of Military History, 54, 2 (April 1990), 179 ff.에서 다루고 있다.
3. ibid.
4. W.T. Furse, MGO, 'Notes on the Report of a Conference', 17 December 1917, J.F.C. Fuller papers, 1/299, Liddell Hart Centre for Military Archives, King's College, London University (hereafter KCL). General Lord Home, GOC First Army, to GHQ, 16 June 1918; and Lindsay to HQ, First Army, 2 July 1918; in 'Pr6cis of Lectures' by Lindsay on the Machine-Gun Corps, December 1918, Lindsay Papers, Royal Armoured Corps Tank Museum, Bovington, Dorset.
5. Terraine, To Win a War, 116; Bidwell and Graham, Fire-Power, 137; Brigadier-General Sir James Edmonds, Military Operations France and Belgium, 1918 (London 1947), vol. 4, 517, and vol. 5, 95.
6. 아미앵 공세 시작 당시 공식적인 전차 숫자에 대해서는 Tank Note #7, in MUN 4/4979/2, Public Record Office, Kew Gardens (hereafter PRO). J.F.C. Fuller, Tanks in the Great War. 224. For Elles on 12 August 1918, Minutes of Tank Corps Conferences, 12 August 1918, WO 158/840, PRO. For numbers lost to artillery fire, see Cubitt (War Office) to Ministry of Munitions, 17 August 1918, MUN 4/2799, PRO.등을 참고하라.
7. 'Return of tanks, week ending 17th August 1918', signed by J. Keane, Assistant Director of Artillery, MUN 4/348, PRO.  An exactly similar return for the week ending 19 August 1918 occurs in MUN 4/4979, PRO에는 1918년 8월 19일을 종결일로 하는 한 주간의 보고 내용이 실려있는데 거의 동일하다.
8. 5th Tank Brigade, 'Report of Operations with Australian Corps from 8 August to 15 August, 1918, Supplementary Report', vol. 4, 1/259, J.F.C. Fuller Papers, KCL.
9. Tank Note #4, concerning 21-25 August 1918, MUN 4/4979/2; Tank Board Committee, 5 September 1918, and 24 October 1918, MUN 4/4949/4; PRO.
10. Official M.W.D. '[Mechanical Warfare Department] Programme, 1st April 1918 to 30th March 1919'. MUN 4/348; 'Comparative Tables Showing Estimates of Tank Production 27 February 1918 and September 1918'. MUN 4/2801. On tank delivery, Tank Board Committee, 12 September 1918, and 10 October 1918, MUN 4/4979/4; PRO.
11. 전차 손실 통계는 Williams-Ellis, The Tank Corps, 271; Fuller, Tanks in the Great War, 286-7; and Major-General Elles, speaking at the Tank Board Committee, 5 September 1918, MUN 4/4979/4, PRO를 참고하라. 풀러는 같은 위원회에 소속되어 있었는데, 8월 8일 부터 21일 까지의 전차 통계를 정리했다. 회수한 장비의 통계는 Tank Note #10, 12 October 1918, MUN 4979/2, PRO를 참고하라.
12. 전차 숫자는 'Weekly Tank State' figures in MUN 4/6400, PRO, except for the 15 October figures which come from History of the Ministry of Munitions (HMSO: London 1922), 12 volumes, vol. 12, part 3, 69에 실린 자세한 통계에서 인용한 것이다.
13. 스턴에 대한 불평은 Liddell Hart, Talk with Sir John Keane (Assistant Director of the Artillery in 1918), 9 November 1947, 11/1947/20, Liddell Hart Papers, KCL을 참고하라.; 필요한 예비 부품 통계는 Lt.-Col Searle (Technical Advisor to Heavy Branch, Machine-Gun Corps [forerunner of the Tank Corps]). 'Report on Tanks', 24 March 1917, WO 158/838, PRO를 참고하라.; 예비 부품의 부족에 대한 불평은 Elles to Capper (Director-General Tank Corps), 26 April 1918; Capper to Elles, 29 April 1918; and Elles to Capper, 15 June 1918; WO 158/816, PRO을 참고하라.; 그리고 2년 뒤 예비부품 문제를 해결한 것은 Fuller to Tank Board, no date, in Tank Board Committee, 10 October 1918, MUN 4/4979/4, PRO를 참고하라.
14. Weekly Tank Note #4, Concerning Operations 21-25 August, 1918; 사상자의 백분율통계는, Weekly Tank Note #10, 12 October 1918; MUN 4/4979/2를 참고하라.; 마크V전차의 차내 과열 문제에 대해서는 Tank Corps HQ Report, 21 September 1918, MUN 4/4979/4를 참고하라.; 아미앵 전투 당시 전차군단의 사상자에 대해서는 Major-General Elles to GHQ, 20 October 1918, WO 95/94; PRO를 참고하라.
15. Fuller, Tanks in the Great War, xviii. Major-General Sir J.E. Capper to Elles, 'Proposed reorganization of the Tank Corps to bring it more into the Army', 18 June 1918; and Elles to Capper, 23 June 1918; WO 158/816, PRO.
16. J.F.C. Fuller to Tank Board, no date, in Tank Board Committee, 10 October 1918, MUN 4/4979/4, PRO; Edmonds, Military Operations France and Belgium. 1918, vol. 4, 156; Liddell Hart, The Tanks, 184.
17. 5th Tank Brigade. 'Report of Operations with the Australian Corps from 8 August to 15 August 1918', Appendix G; and 'Report on Operations with the Australian Corps, 23 August 1918', 4; vol. 4, Tank Corps Operations, 4th and 5th Brigade, J.F.C. Fuller Papers, 1/259, KCL. Brigadier-General Griesbach to 1 Canadian Division, 'Lessons from the recent fighting', 24 August 1918, 5, vol. 5, Griesbach Papers, MG30 El5, Public Archives, Canada. Major Hotblack (GSO 1,
Tank Corps HQ), '3rd Tank Brigade State [includes 9th Tank Battalion] 8pm 25 August 1918', 25 August 1918, WO 95/94, PRO.
18. Liddell Hart, Talk with General Martel, 29 March 1948, 11/1948/7/, Liddell Hart Papers, KCL. Brigadier-General Victor Odlum, GOC I th Canadian Brigade, 'Narrative of Operations . .. from September 27th to October 2nd, 1918', 4 December 1918, 2, vol. 22, Odlum Papers, MG30 E300, Public Archives, Canada. 4th Tank Brigade, 'Report on Operations, September 27 to October 17, 1918', 11, vol. 4, Tank Corps Operations, 4th and 5th Tank Brigades, J.F.C. Fuller Papers, 1/259, KCL.
19. Weekly Tank Notes #2 and #3, referring to Amiens, 8 August to 12 August 1918, MUN 4/4979/2, PRO. Terraine, To Win A War, 111.
20. 8th Tank Battalion Battle Sheets, Tank Museum, Bovington.
21. Ibid.
22. Ibid.
23. Ibid. Liddell Hart, The Tanks, 180-1.
24. Liddell Hart, The Tanks, 185, for French and BEF Amiens figures. The other statistics come from Edmonds, Military Operations France and Belgium, 1918, vol. 5, 562; 'Operations on the Western Front', Green File, 2, 'Total Estimated Casualties', Lawrence Papers, National Library of Scotland; Major-General Elles to GHQ, 29 October 1918, WO 95/94, PRO.
25. Tank Statistics, MUN 4/6400; J.F.C. Fuller, 'Notes on Tank Economics', 25 July 1918, MUN 4/4979/27; G.F. Davidson, ACMS, 'Comparison of Utility of Armament, CMS', 18 September 1918, MUN 4/6400; PRO.
26. General Sir John Coleridge to Edmonds, 12 March 1938, recalling the statement of the German officer captured on 21 August 1918, CAB 45/184, PRO.

2016년 4월 17일 일요일

[신간소개] 독일군의 신화와 진실-게하르트 그로스 저, 진중근 역(길찾기 2016)


『독일군의 신화와 진실』 게하르트 그로스 저, 진중근 역(길찾기 2016)


독일 장교단과 그들의 군사사상은 수많은 군사사 연구자들을 사로잡는 주제입니다. 2차대전 이래로 수많은 연구자들이 전쟁 초기 독일이 승승장구한 원인은 무엇이며, 독일이 우수한 군대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철저하게 패배한 원인은 무엇인가를 탐구해 왔습니다. 냉전시기에는 전쟁 초기의 승리에 초점을 맞추고 독일군의 장점에 주목하는 연구가 많았다면 1990년대 이후로는 독일군과 그 군사사상의 한계에 대한 비판적 연구가 점차 늘어나는 추세라고 보여집니다. 특히 이런 경향은 미군의 주도하에 작전사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된 미국 학계에서 두드러졌습니다. 그러나 언어적 장벽 때문에 독일어권의 연구는 활발하게 소개되지 못했습니다. 독일인들은 자신들의 역사적 실패에 대해 어떤 시각을 가지고 있었을까요?  최근 길찾기 출판사에 발행한 『독일군의 신화와 진실- 총참모부 작전적 사고의 역사』는 이러한 90년대 이후의 경향을 반영한 독일 학계의 최신 연구성과입니다. 저자인 게하르트 그로스는 2000년대 초중반 국제 군사사학계의 주목을 끌었던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에 참여해 이름을 알린 연구자로 독일의 전통 군사사상에 대한 독일 학계의 권위자라 할 수 있습니다.


먼저 이 책의 눈에 띄는 장점을 이야기 하는게 좋겠습니다. 영어권의 독일 작전사 연구는 대개 군사적인 측면에 집중하는 경향을 보여왔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독일군사상의 기원과 한계에 천착한 미국의 로버트 시티노(Robert Citino), 전간기 독일군 교리의 발전을 연구한 제임스 코럼(James Corum) 등이 당장 떠오르는 군요. 그런데 그로스는 군사적 측면에 더해 사회적, 정치적 측면도 중요하게 고려합니다. 군사사상의 형성을 군사적 측면 뿐만 아니라 사회적 집단인 독일 장교단의 세계관, 정치적 이해관계라는 측면에서도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은 독일이 두 차례의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중요한 원인인 장교단의 전략적 식견 부족을 설명하는데 유용합니다. 1차 대전에서는 실패할 경우 마땅한 대안이 없는 양면전쟁을 단지 작전적인 차원에서 실행하고, 2차 대전에서도 작전적 수준의 우위만을 믿고 소련과의 전쟁에 돌입한 것 등을 예로 들 수 있겠군요. 이 점은 저자가 독일인이라는 데서 기인하는게 아닐까 싶습니다. 국제 정치에서 독일이 우위에 서야 한다는 민족주의적 열망, 러시아와 동유럽에 대한 인종적 멸시 등이 전쟁계획에 영향을 끼치고 결국 독일 민족국가의 파멸로 치닫게 했다는 설명은 여러 모로 설득력이 높고 교훈적입니다.


군사적인 측면에서는 독일의 지정학적인 위치가 군사사상의 형성이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논의는 미국의 시티노도 한 바 있는데, 시티노가 그 시기를 17세기 프로이센의 형성과정으로 까지 올려잡는데 비해 그로스는 독일 제국의 형성과 19세기 산업혁명으로 인한 군사기술의 발전에서 기원을 찾는 점이 차이점 입니다. 저자는 독일 제2제국이 유럽의 정 중앙에 위치해 전략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있고 국가가 형성될 무렵에는 잇따른 군사적 혁신으로 군대의 규모가 증가했기 때문에 독일 군사사상가들은 독일의 지리적 위치를 활용한 공세 중심의 군사사상을 가지게 됐다고 설명합니다. 이러한 설명은 위에서 언급한 정치적인 비판과 밀접하게 연결됩니다. 근본적으로 독일 군부가 독일을 중심으로 하는 국제질서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전쟁을 피할 수 없었고 그 결과는 1차대전으로 귀결되는 양면전쟁이었다는 겁니다.


이 저작은 군사학계의 최신 연구성과를 집약한 서적입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것 처럼 게하르트 그로스는 ‘슐리펜 계획 논쟁’에 참여하면서 국제적으로 이름을 알렸습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19세기 후반~1차대전 시기를 논한 5장과 6장이 가장 훌륭했다고 생각됩니다. 이 책에서는 10여년에 걸친 슐리펜 계획 논쟁의 결과를 반영하여 슐리펜 계획과 소(小)몰트케의 전쟁계획을 구분하는 새로운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이 점은 군사사에 관심을 가진 분들이라면 반드시 알고 넘어가야 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영어권을 중심으로 한 외국학계에서 진행된 논쟁이 국내에 지속적으로 소개되지 않았기 때문에 기존의 학설에 익숙한 분들이시라면 조금 어색함을 느끼실 것 같기도 합니다. 물론 이 책에서도 ‘슐리펜 계획 논쟁’에 대해 어느정도 설명하고 있긴 합니다만 조금 아쉽습니다.
1차대전과 2차대전 사이의 전간기 바이마르 공화국의 독일군과 2차대전 시기 독일 국방군에 대해서는 매우 비판적인 관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영미권과 이스라엘 학계에서 독일 국방군의 전쟁 수행을 높이 평가하는 연구자가 많았다는 점을 생각하면 꽤 흥미롭습니다. 이 시기의 독일군에 대한 비판은 사실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닙니다. 독일 군부의 전략적 식견 부족, 오직 작전이라는 군사적 수준으로 전쟁을 수행해 나간 점은 영미권 군사학계에서도 지속적으로 비판해 온 바 있습니다. 또한 히틀러와 독일 군부의 관계에 대한 평가도 완전히 새로운 것이라고 할 수 는 없을 것 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3제국 시기 민군관계에 대한 서술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저자는 독일 군부가 히틀러에 대해 맹목적으로 충성을 하다가 전황의 악화에 따라 장교단의 충성에 균열이 가는 모습을 매우 잘 서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전쟁 직후 패전의 책임에서 벗어나기 위해 전쟁 지도의 실패를 히틀러 한 사람의 책임으로 돌렸던 독일 군부를 날카롭게 비판합니다. 히틀러가 군사적인 측면에서, 특히 전략적으로 일정한  통찰력을 보유했지만 본질적으로 아마추어적인 전략가에 불과했다는 저자의 결론은 공정한 평가라고 생각이 듭니다. 독일 군부에 대해서는 매우 비판적인데, 최소한 1차대전 말기의 독일 군부는 새로운 작전-전술 단위의 해결책을 마련하는 등 제한적 혁신이 있었지만 2차대전 말기에는 군사적 해결책 보다는 국가사회주의에 기반한 사상 무장에 의존하는 등 퇴행적인 면을 보였다는 것 입니다. 저자는 이점이 고질적인 전략적 시야의 부족과 결합해 독일의 철저한 패배로 이어졌다고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이 책의 마지막 장에서는 냉전 시기 독일군부의 작전적 사상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한국에서는 상대적으로 생소한 분야라고 생각되며 그 때문에 이 책의 가치를 더욱 높여준다 봅니다. 독일이 패권을 다투는 강대국으로서 국가전략을  수행하던 시기에 형성된 군사사상이 독일의 몰락 이후에는 냉전이라는 새로운 환경에서 생명력을 유지하는 과정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다만 냉전 시기를 다룬 부분은 상대적으로 내용이 소략해 에필로그 같은 느낌을 주는게 아쉽습니다.

전체적으로 평을 하자면, 국제정치와 군사문제에 관심을 가지신 분들에게는 필독서라고 생각됩니다. 특히 국내에 드물게 소개된, 독일인의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바라본 독일 군사사라는 점에서 더욱 더 가치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최근 군사서적을 활발히 간행하고 있는 길찾기 출판사가 처음으로 발행한 학술서적인 만큼 큰 호응을 얻었으면 하는 기대가 있습니다.

2015년 10월 27일 화요일

주취폭력



우리가 중단되었던 점심식사를 하던 곳으로 채 돌아가기도 전에, 대혼란이 벌어졌다. 상황 전체를 갑자기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바꿔버릴 수 있는 이상한 사건 중 하나였다. 우리 왼쪽에 있는 연대에서 어느 장교가 우리와 연락을 취하려고 고함을 질렀던 것 이었다. 그는 격노에 휩싸인 것 같았다. 천성적으로 타고 난 용기가 술 때문에 광기로 발전한 듯 했다.

"영국놈들은 어디 있나? 제군, 저놈들을 박살내러 가자! 빨리! 누가 같이 갈 건가?"

격분한 그는 우리의 멋진 바리케이드를 파괴했고, 수류탄으로 길을 내면서 앞으로 돌진했다. 당번병이 그의 앞에서 참호를 따라 미끄러지듯 달리면서, 수류탄을 피한 자들을 소총으로 쏘아 쓰러뜨렸다.

두려움을 모르고 과감하게 자신의 몸을 던지는 용기는 언제나 감동을 준다. 우리 역시 그의 도취 상태에 전염되어 수류탄 몇 개를 거머쥐고 그 미친 전투에 뛰어들었다. 곧 나는 진지를 따라 질주하는 그의 옆에 있었고 다른 장교들 역시 내 중대의 소총수들을 데리고 주저 없이 달려나갔다. 폰 브릭슨 대위마저, 자신이 대대장이라는 걸 잊고 소총을 들고 선두에서 달리면서, 적군의 수류탄 투척병들을 쏘아 거꾸려뜨렸다.

에른스트 윙거/노선영 옮김, 『강철 폭풍 속에서』 (뿌리와 이파리, 2014),  264~265쪽.

2014년 11월 13일 목요일

[번역글] 영국 해군은 전간기에 쇠퇴했던 것인가?

몇달 전에 The RUSI Journal 159권 4호에 실린 Joseph A. Maiolo의 Did the Royal Navy Decline between the Two World Wars?를 읽고 흥미로운 관점이라고 생각해서 번역을 하겠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이제서야 번역을 하게 됐습니다. 제가 해군에 대해서는 아는게 많지 않아 특별히 덧붙일 이야기는 없습니다만 전간기 영국의 가상 적국에 대한 서술이 부족한 점만 제외하면 괜찮은 글 같습니다.




영국 해군은 전간기에 쇠퇴했던 것인가?

Joseph A. Maiolo


비교적 최근까지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전간기에 영국 해군이 쇠퇴한 것이냐는 질문을 받으면 단호하게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했을 것이다.1)  영국 해군은 제1차세계대전에서 승리하여 독일의 대양함대와 잠수함대를 무찔렀다. 그리고 전투력과 명성에 대해 말하자면, 세계의 어떤 해군도 영국 해군에 비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영국 해군의 좋은 시절은 너무나 빨리 지나갔다. 영국 정부는 전쟁이 끝난 뒤 국방비 보다 사회 복지에 더 많은 지출을 하려고 했다. 즉 영국 해군의 쇠퇴가 시작됐다는 것이다. 1919년의 파리 평화회담과 국제연맹의 등장으로 평화가 지속될 것이고 군축이 이루어 질 것이라고 순진하게 생각한 영국 정부는 미국의 압력에 굴복하여 영국 해군의 규모를 영국의 안보 상황에 맞추지 않고 군축 회의의 합의 결과에 맞추었다. 전후 영국 정부가 영국 해군의 우위를 지켜내지 못한 것은 영국 해군 수뇌부의 실책과 맞물려 더욱 악화되었다. 게다가 영국 해군 수뇌부는 새로운 사상과 신기술을 싫어했고 위협에 대처하는 태도도 안이했다는 것이다. 

영국의 쇠퇴를 주목한 역사학계의 경향은 1960년대에서 1970년대에 생겨났는데, 이러한 학설은 영국의 전 세계에 대한 영향력 감퇴와 전후 영국 경제의 상대적인 쇠퇴의 원인을 설명하고자 했다. 영국 해군은 국력의 주요한 척도였기 때문에 영국의 쇠퇴를 연구하는 학파가 여기에 주목한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2) 영국 해군의 쇠퇴했다거나 정체되어 있었다는 이야기는 흥미롭긴 하지만 사실과는 거리가 있다.3) 존 페리스John Ferris, 크리스토퍼 벨Christopher Bell, 데이빗 이거튼David Edgerton, 그리고 본 필자의 최신 연구는 영국 해군이 그 훌륭한 전통을 이어가며 탁월한 기술로 양차 세계대전 사이에도 그 위용을 유지했음을 증명하였다. 영국 해군은 영국의 안보를 위해 새로운 기술을 도입하고 군비 통제를 활용했으며 기만을 통해 경쟁국들의 건함 계획에 영향을 끼쳤다. 

영국 해군의 쇠퇴를 주장하는 학설에서는 1914년 이전의 10년간을 ‘팍스 브래타니카’의 종언으로 서술한다. 영국 해군은 1906년 세계 최초의 단일 구경 주포 전함인 HMS 드레드노트를 건조하여 독일 해군이 촉발한 건함 경쟁에서 승기를 잡았다. 12인치 주포와 강력한 터빈엔진을 장비한 22,000톤의 드레드노트와 그 후속 전함들은 기존의 전함들을 시대에 뒤떨어진 퇴물로 만들어 버렸다. 이후 계속된 건함 경쟁에서도 영국 해군은 질과 양 모두 상대를 압도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때 영국 해군은 21척의 드레드노트형 전함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독일은 같은 종류의 전함을 13척만 보유한데 그쳤다. 이같은 격차는 독일 해군이 기지에 묶여 있는 동안 영국 해군은 독일의 해운을 봉쇄하고, 독일의 전시 경제를 옭죄어 독일 국민의 사기에 타격을 입힐 수 있다는 것을 뜻했다. 1916년의 유틀란트 전투에서는 세계 1위와 2위의 함대가 격돌했지만 승패를 가르지는 못했다. 하지만 독일 해군은 결전에서 승리를 거두지 못해 독일이 절실히 필요로 했던 영국의 해상 봉쇄 분쇄와 독일 수상함대 및 잠수함대를 통한 영국 봉쇄에 실패했기 때문에 이 전투는 영국의 전략적 승리로 끝났다.4)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영국 해군이 직면한 가장 큰 도전은 영국, 미국, 일본의 군비 경쟁이었다. 1916년 미 의회는 영국의 해상 봉쇄 가능성과 독일의 잠수함대가 미국의 이해관계를 침해할 것을 우려하여 66척의 군함을 건조하는 것을 승인했는데 여기에는 4척의 전함, 4척의 순양전함, 4척의 순양함, 20척의 구축함, 30척의 잠수함이 포함되었다. 이 전례없는 건함 계획은 다시 1917년에는 전함 10척, 순양전함 6척과 기타 지원함정을 건조하여 1925년 까지 세계 최대의 해군을 건설하는 것으로 확대되었다.5)  미해군의 팽창은 단지 영국 해군을 위축시키는데 그치지 않고 이미 세계 3위의 해군국이었던 일본의 해군 증강을 촉발했다. 1919년 파리 평화회담에서 있었던 미국과 영국간의 해군력 균형에 관한 회담은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듬해에 영국은 미국의 해군력 증강에 맞서기 위해 18인치 주포를 장비한 5만톤급의 전함과 순양전함 8척을 건조하기로 했다. 1922년에는 영국과 미국, 일본 모두가 기존의 전함을 훨씬 뛰어넘는 화력과 방어력을 갖춘 16인치에서 18인치 주포를 장비한 4~5만톤 급의 전함 건조를 추진하고 있었다.6) 

하지만 영국은 미국이 전력을 다해 함대를 건설할 경우 건함 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재정적, 공업적 기반이 없었다. 1920~21년에 열린 워싱턴 회의에서 영국측은 현명하게도 미국에게 조약상의 평등한 지위라는 상징성을 양보하는 대신 미국이 건함 경쟁에 나서지 못하도록 유도했다. 워싱턴 해군조약에서는 영국, 미국, 일본, 프랑스 이탈리아 해군의 전함 및 항공모함의 총톤수를 5:5:3:1.75:1로 정했다. 하지만 한 미해군 제독이 씁슬하게 토로했듯이 문서상의 동등함이 실전에서의 동등함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미국과 일본은 조약을 이행하기 위해서 새로 건조하는 전함을 폐기 처분하거나 취소해야 했지만 영국은 기존의 구형 전함을 폐기하는 것으로 그쳤다. 영국 해군은 1920년대에 전함 배수량에서 미해군 보다 54,000톤의 우위를 가지고 있었고 가장 유력한 가상적인 일본 해군에 대해서는 279,130톤의 우위를 가지고 있었다. 워싱턴 조약에서는 미해군과 일본 해군의 16인치급 전함에 대응할 수 있도록 영국 해군이 두 척의 16인치급 전함을 건조할 수 있게 했는데, 이렇게 해서 건조된 넬슨과 로드니는 세계대전을 통해 얻은 전훈을 반영한 함포, 기뢰, 어뢰 방어 기술을 적용한 전함이었다. 그리고 조약에서는 각 함선의 성능에 제약을 걸었는데, 전함의 경우 16인치 주포에 35,000톤, 순양함은 8인치 주포에 10,000톤이었다. 이렇게 해서 영국 해군성은 재무성에 더 큰 전함에 필요한 설비에 필요한 재원을 마련해 줄 것을 요청하는 것과 같이 힘든 일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영국측에서 미국이 순양함의 총톤수를 늘리려 한 것을 저지함으로써 영국 해군은 큰 이득을 얻었다. 영국 해군은 세계 최대의 순양함대를 보유했을 뿐만 아니라 세계 각지에 있는 해군 기지를 확보했고, 보조 순양함으로 개장할 수 있는 상선을 충분히 확보함으로써 전 세계에 걸쳐 해상 봉쇄를 수행할 수 있는 특수한 능력을 확보했다.7) 

영국 해군이 협상을 통해 전함 배수량에서 우위를 달성하고자 노력했다는 사실을 낡은 무기 체계에 대한 집착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영국 말고 다른 국가들도 전함의 숫자에 해군력과 국제적인 위신이 달려있다고 생각했다. 전투 함대의 숫적 우위를 달성하기 위한 전략적인 흥정은 영국 해군성의 주특기였다.8) 그리고 영국 해군은 전함이 항공기와 잠수함의 위협에 맞서 발전할수 있는 무기 체계라고 생각했다. 워싱턴해군군축조약에서 주요 열강들은 10년간 전함의 신규 건조를 중단하기로 했기 때문에 영국 해군은 평화로운 긴축 재정의 시기에 막대한 예산을 들여 전함을 교체하는 것을 늦출 수 있었고 동시에 새로운 설계와 건조 기술을 시험해 볼 수 있었다. 동시에 낡은 전함들의 엔진과 방어력, 사격 통제장치를 개량할 수 있었다. 영국 해군성은 새롭게 전함을 건조할 수 있는 1930년대 초반이 될 때 까지 건함 예산을 잠수함, 구축함, 항공모함, 순양함을 현대화 하는데 사용하고자 했다.

1922년 부터 1926년 사이에 영국 정부는 해군에게 같은 기간 동안 미국과 일본 해군이 건조한 군함의 총 톤수에 필적하는 규모의 신규 건조를 승인했다. 영국 해군은 순양함 전력을 성공적으로 확충했고 이로 인해 영미관계에 위기를 초래했다.9) 일본과의 전쟁을 고려해서 배수량 1만톤에 8인치 주포를 탑재한 순양함을 선호했던 미해군은 순양함 전력에 있어서도 균형을 맞춰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미국 의회는 순양함 증강을 계속해서 거부했다. 영국 해군은 해상 교역로 보호를 위해서 중순양함과 6인치 주포를 탑재한 경순양함을 골고루 건조하기를 원했는데 이를 위해 미해군 보다 더 많은 순양함을 필요로 했다. 1927년에 있었던 제네바 회담에서 영국과 미국 협상단은 절충점을 찾지 못하면서 상대방에게 책임을 전가했고 영국과 미국의 갈등은 극에 달했다. 미의회는 영국과의 협상이 실패하자 순양함을 추가로 건조하는 것을 승인했다. 일각에서는 순양함 건조를 둘러싼 영국과 미국의 경쟁이 해양 패권을 둘러싼 양국간의 전쟁 신호라고 보기도 했지만 이것은 다소 과장된 견해였다.10) 어찌되었건 영국과 미국은 자유주의 국가로서 당시의 국제 질서로 부터 서로 이득을 얻고 있었고 국제적인 문제를 대화로 해결하는 것을 선호했다. 순양함을 둘러싼 논쟁에서 중요한 점은 영국 해군이 워싱턴 조약에 의거해 주요 경쟁 상대에 대해 유리한 점을 최대한 끌어냈다는 점과 영국 해군성이 영국 해군의 우위를 유지할 수 있는 능력에 확신을 가지게 됐다는 점이다. 

전간기의 영국 해군은 일본 해군이 적이 될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봤는데 그 이유는 일본이 정치적인 이유, 예산상의 이유, 그리고 조직의 목표라는 측면에서 너무나도 유용했기 때문이다. 일본과의 전쟁을 상정한 계획은 영국 정부가 대규모 함대는 물론 연료와 탄약을 비축하기 위해 싱가포르의 해군 기지를 증강하도록 설득하기에 적합했다.11) 해군성은 일본과 전쟁을 하게 된다면 주력함대를 싱가포르에 파견해 일본 해군이 전투에 임하도록 끌어낼 것이었다. 일본 해군을 무찌르기 위해서는 전함, 항공모함, 순양함과 기타 지원함정이 균형을 이룬 함대가 필요했다. 달리 말하자면 해군성에서 대영제국의 방위를 위해 필요한 가장 경제적인 전력 구조라 할 수 있었다. 전간기 영국 해군 전략에서 기본적으로 전제한 것은 주력 함대를 가상적의 주력 함대에 대응하기에 적절한 지점에 배치하여 영국의 대외 무역을 보호하고 적국을 해상 봉쇄하는 것 이었다. 그러므로 영국 해군은 장차 벌어질 일본과의 전쟁에서 제1차 세계대전 당시에 독일을 상대했던 방식으로 대영 제국을 방어할 것이었다. 

하지만 항공모함 관련 기술을 놓고 보자면 영국 해군은 캐터펄트와 어레스팅 와이어 부문에서 미해군이나 일본 해군 보다 뒤떨어진 것이 사실이었다. 그 원인은 해군본부가 새로운 장비들을 시험하도록 결정을 내리는데 너무 많은 시간이 걸렸던 것과 영국 공군과 해군항공대의 역할에 대해 논쟁이 있었던데 있다. 하지만 영국 해군이 기술적인 진보에 거부감을 가진 보수적인 집단이었다고 서술하는 쇠퇴 신화와는 달리 영국 해군은 1918년에 세계 최초의 항공모함인 아르거스Argus를 건조했으며 해군 본부의 입안가들은 미래의 전쟁에서 항공기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고 예측했기 때문에 전간기에도 항공모함 건조에 많은 예산을 투자했다. 해군항공대는 적 함대를 포착하고, 적의 항공기를 격추시키고, 적의 전함을 어뢰와 폭탄으로 타격한 뒤 아군 전함에게 끌어들여 최후의 승리를 가져올 것이었다.12) 미래의 함대전에서 최종 단계를 전함의 포격으로 마무리 한다는 영국 해군의 구상이 실제로 일어난 것은 매우 드물었다.(예외라고 할 수 있는 사례는 두 건이 있다. 1941년 3월 영국 해군이 이탈리아 해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 마타판 곶 해전과 1941년 5월의 비스마르크 격침 이었다.)13) 제2차 세계대전 동안에 항공모함에서 발진하는 폭격기는 전함의 주포를 해전의 주역에서 밀어냈다. 하지만 전간기에는 미해군과 일본 해군 역시 마찬가지로 작전 교리에서 항공모함을 부차적인 위치에 놓고 있었고, 항공모함이 해전에 변화를 가져오기는 하겠지만 혁명적인 영향을 미치지는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14) 

영국 해군이 전간기에 잠수함의 위협을 과소평가했다는 쇠퇴론자들의 주장 또한 잘못된 것이다. 1920년대에서 1930년대에 영국 해군본부의 전쟁 계획과 작전 연구는 미래의 전쟁에서 적국이 영국의 해상 교통로를 차단하거나 교란시킬 가능성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표하고 있었다. 해군본부의 참모장교들은 제1차 세계대전의 교훈을 잘 이해하고 있었고, 적국이 영국의 해상 교통에 타격을 가하기 위해서 가장 좋은 방식은 오늘날의 말하는 ‘비대칭’ 전략이라는 점을 알았다. 바로 영국 주력 함대를 피해서 영국의 민간 상선단을 격침시킬 수 있는 함정을 건조하는 것 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시기이 독일 해군은 영국이 해상 교통에 타격을 입히기 위해서 잠수함을 사용했고 일정한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하지만 1917년에서 1918년 사이에 영국과 연합국은 호송선단 방식을 도입해 잠수함의 위협에 대처했다. 해군본부의 참모 장교들은 다음번 전쟁에서도 적국이 동일한 방식을 택하겠지만 그때에는 훨씬 더 큰 잠수함과 중순양함, 항공모함을 함게 운용하여 호송선단을 타격할 것이라고 보았다.15)  영국 외무성과 해군본부는 다른 국가들이 잠수함을 발전시키는 것을 막기 위해서 외교적 수단과 기만책을 사용했다. 영국은 외교 분야에서 잠수함을 없앨 것을 제안했고 보다 현실적인 차원에서는 다른 국가들의 잠수함 보유량에 제한을 걸려고 했다.16) 예를 들어, 프랑스 해군이 1920년대에 개발한 새로운 대형 잠수함은 영국과 프랑스의 외교 회담에서 자주 논의된 주제였다. 영국 해군 또한 미래의 전쟁에서는 적국이 대규모의 잠수함대를 준비해 놓을 것이라는 점을 이해하고 있었다. 영국의 대잠외교에 있어서 핵심은 어떠한 적이라도 대규모의 잠수함 공세로 전쟁을 시작하는 것을 방지하는데 있었다. 전쟁이 유럽이나 극동에서 일어날 경우 영국 해군은 상선단을 호위 하기 위한 대잠용 함선을 신속히 증강시켜 적의 잠수함 위협을 무력화 시킬 대비가 되어 있었다. 

영국 해군은 대잠외교를 뒷받침 하기 위해서 영국이 소나를 발전시켜 잠수함의 위협을 완전히 해소했다는 선전을 해서 외국의 해군을 기만하려고 했다. 수중의 물체를 음향으로 탐지할 수 있는 기술을 실전에서 사용할 수 있을 정도가 된 것은 1917~18년 무렵으로 이때는 해상 작전에 영향을 끼치기에 너무 늦은 시점이었다. 영국 해군은 전간기에 소나 개발에 대한 정보를 일급 비밀로 하면서 동시에 치밀하게 소나의 성능을 부풀린 정보를 퍼뜨렸다. 1930년대 초반 정보당국으로 부터 독일 해군이 조약을 위반하고 잠수함을 다시 건조하기 위한 실험을 시작할 것이라는 정보가 입수되자 영국 해군은 언론과 정치권을 통해 가짜 정보를 더욱 더 많이 흘렸다. 해군 본부는 1937년에 스페인 내전에서 프랑코 군을 지원하는 독일과 이탈리아의 잠수함을 소나를 활용해 격침시켜 소나의 성능을 과시하는 방안을 고려하기도 했다. 기만 공작의 효과를 평가하는 것은 언제나 어렵고 평화시에 오랫동안 지속된 경우는 특히 그러하다. 1939년, 2차대전 중 독일의 잠수함 공세를 총지휘한 칼 되니츠 제독은 히틀러에게 영국이 소나의 성능을 과장한 기만 전술을 구사하는 가장 큰 원인은 유럽에서 전쟁이 발발했을 때 독일이 충분한 잠수함을 확보해 전면적인 잠수함 공세에 나서는 것을 저지하는데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17) 물론 영국 해군도 독일 잠수함의 위협을 잘못 평가한 측면이 있다. 영국 해군은 독일 해군이 1918년 이래로 잠수함 기술에서 어떠한 결정적인 발전도 없었다는 점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되니츠가 새로운 기술 대신에 야간에 부상하여 상선단을 공격하는 것과 같은 새로운 전술을 개발해 소나를 장비한 호위 함대를 회피할 것이라고 잘못 받아들였다.18) 그렇기는 해도 영국 해군의 대잠외교와 기만책은 상당한 효과가 있었다. 1939년 이후 5년간의 전쟁을 치르면서 독일군의 잠수함 공세는 천천히 강화되었고 영국 해군은 이에 맞설 대비책을 충분히 강구할 수 있었다.19) 

그럼에도 불구하고 1930년대로 접어들면서 영국 해군에 대한 도전은 급격히 증대되었다. 전세계적인 경제 및 정치 위기에 독일이 1차대전의 설욕을 꿈꾸면서 군비 경쟁을 시작함으로써 영국의 해군 정책의 근간이 크게 흔들렸다. 예를 들어 해군은 일본을 제1의 가상적으로 삼고 막대한 예산을 필요로 했는데 해군의 몫이 크게 줄어들었다. 1933년 히틀러가 집권하자 독일 공군의 폭격기는 매우 큰 위협으로 받아들여졌다. 1933년에서 1936년 사이에 독일의 군사력 증강이 유럽의 질서에 가한 전략적, 외교적 도전이 일본 해군 내부의 과격파와 상호작용을 일으켰다. 일본 해군 내에서는 1936년 워싱턴 조약이 만료되자 일본 해군 내에서는 총톤수를 영국 및 미국과 맞추지 못하는 이상 군비 통제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20) 1934년 이후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 소련은  군함 건조에 더 많은 투자를 시작했는데 이때 영국 해군은  구식 전함들을 개장하고 전체 함대의 규모를 일본 해군과 유럽 제2위의 해군을 합한 것 과 대등한 규모로 증강시킬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영국 해군이 새롭게 시작된 군비 경쟁에 대처하는데 가장 큰 문제는 1930년대 초반 영국 조선업계를 강타한 위기였다.21) 

이러한 위기는 전혀 예측하지 못한 사태가 맞물리면서 생긴 결과였다. 1930년 주요 해군국들은 런던에서 회담을 열고 순양함의 비율을 등을 포함한 몇가지 사안을 결정했다. 런던해군군축조약에서 영국, 미국, 일본은 1936년까지 전함의 신규 건조를 하지 않기로 합의했다. 경제 상황이 정상적이었다면 1936년까지 전함 건조를 연기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을 터였다. 정상적인 상황이었다면 해군성에서 민간 조선소와 국영 조선소에 꾸준히 계약을 발주하고 보조금을 지급하는 방식으로 선박 건조 능력을 유지하여 낡은 전함들을 대체했을 뿐 아니라 가상적국의 공격적인 함대 건설에 맞설 대규모의 함대 증강도 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1930년 런던해군조약이 조인되고 얼마 있지 않아 대공황의 파도가 영국 조선업계를 휩쓸었다. 1929년에서 1935년 사이에 해군성의 신규 발주 감소와 전반적인 공업계의 침체 여파로 군함과 민간 선박 발주는 절반으로 뚝 떨어졌다.22) 비록 갑작스럽게 산박 건조량이 감소하기는 했어도 영국은 1930년대  내내 세계 최대의 조선국으로 남아 있었지만 1940년대 이전까지는 함대를 증강하기에는 부족하고 현존하는 함대를 현대화 할 수 있을 정도의 수준에 그쳤다. 이렇게 위태로운 상황에서 군비 경쟁은 시기상조였다. 만약 일본, 미국,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소련이 1941년 이전에 총력을 다해 함대를 증강했다면 영국의 조선 능력으로는 이를 압도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해군성과 외무성은 이런 취약한 시기를 넘기기 위해서 1934~35년 사이에 영국 해군이 세계 최대의 해군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도록 세계 각국의 해군력 증강을 제약할 새로운 국제해군조약을 추진했다. 

1936년의 새로운 해군조약의 협상 과정은 복잡했다. 해군성은 영국이 군비 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기 전에 경쟁이 시작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새로운 해군조약에서 함대의 총 톤수를 제약할 것이 아니라 함종별로 주포의 구경과 톤수를 제약하는 것이 옳다는 결론을 얻었다. 함대의 총톤수 제약을 철폐함으로써 군비 경쟁을 억제한다는 발상이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영국 해군성과 외무성은 총톤수의 비율에 국가별로 위계질서를 부여한 것이야 말로 각국 해군의 불만 요인이라는데 합의를 보았다.23)  함대의 총톤수 비율에서 국가의 명예와 위신이라는 요인을 제외하면, 해군력의 규모에는 각 국가의 전략적 필요성과 자원의 수준에 따른 전략적 이해관계가 반영되는 것이며 여기에서 영국을 최우선 순위로 놓고 미국, 일본, 그리고 다른 국가들은 그 뒤에 놓아야 한다는 점을 인식한 것이다. 영국의 군함 건조능력이 구식 전함을 신형 전함으로 교체할 수 있는 수준에 불과하다면 영국의 입장에서는 전함의 성능이 급격히 향상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군함의 함종 별로 성능의 한계를 통일하는 국제조약을 체결하는 것이야 말로 합리적인 것 이 아닐 수 없었다. 1930년대에 제1해군경을 지냈으며 해군 정책의 큰 틀을 만든 어니 채트필드Ernie M. Chatfield경은 해군 군비통제를 통해 “어느 한 국가가 전함의 크기와 성능에서 우위에 서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24) 

이와 같은 관점에서 1935년 6월에 히틀러가 독일의 해군력을 영국의 35% 수준으로 맞춰달라고 제안한 것을 영국 정부가 신속히 승락한 것은 합리적인 결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25) 영국해군의 관점에서 영독해군협정은 독일의 해군력 증강을 덜 위협적이고 지리멸렬한 방향으로 유도하기 위한 외교적 미끼였다고 할 수 있다. 독일 정부가 해군조약을 준수하여 독일 해군을 작지만 균형을 맞춘 전력으로 만든다면 영국으로서는 이것을 쉽게 제압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를 통해 독일 해군이 영국이 두려워 하던 비대칭 전략을 채택하는 것도 막을 수 있었다. 독일의 해군력 건설이 베르사이유조약의 제약을 받고 있었던 1920년대 후반에 독일 해군은 배수량 1만톤에 11인치 주포를 장비해 전함 보다는 빠르면서 순양함 보다는 중무장을 갖춰 영국의 해상 교통을 교란하는데 적합한 혁명적인 전함을 개발했다.26) 영독해군협정의 조항들은 포켓전함과 신형 순양함의 개발을 제약할 것 이었다. 

1936년 3월 영국, 미국, 프랑스는 제2차 런던해군군축조약에 서명하였고 이 조약은 영국 해군성이 원하던 규정들을 대부분 담고 있었다.  독일과 소련도 1937년 7월 조약에 서명함으로서 해군군비통제에 따랐다. 이탈리아는 1938년 조약에 서명했다. 영국 해군은 영국이 세계 제일의 해군국으로 남아있겠다는 의지를 천명하기 위하여 1937년 대규모의 전함 건조계획을 발표하고 다섯척의 킹조지5세급 전함의 기공을 시작했다. 1930년대 초반 영국의 조선업계는 위축되어 있었지만 이제 영국 해군은 새롭게 대규모 투자를 단행했고 노동력도 증가했다. 1928년 부터 1941년 까지 신규 건조한 물량으로 영국은 미국과 일본을 포함한 다른 열강의 해군력을 상회할 수 있었다. 영국 해군은 전반적으로 1백만톤의 새 군함을 획득했지만 미국은 70만톤, 일본은 60만톤에 그쳤다.27)  즉, 가상적과 우방국의 해군력을 능가하는 군함을 건조하고 자국의 전략적 목적에 맞춰 해군군비통제를 유도한 국가를 쇠퇴했다고 서술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겠다. 

영국 해군의 계획이 성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5년간의 평화가 필요했다. 이때문에 제1해군경이자 참모총장위원회Chiefs of Staff committee 위원장이었던 채트필드 제독은 네빌 체임벌린 수상의 대독유화정책을 지지했던 것이었다.28)  해군성은 너무 이른 시기에 독일과 전쟁을 벌이게 된다면 대형 군함을 건조할 예산이 호송선단을 호위할 군함을 건조하는데 전용되거나 제1차 세계대전때 처럼 육군과 공군으로 돌려질 수 있으며 미국과 일본의 군함 건조를 촉진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해군성은 영국과 미국, 일본이 보조를 맞추는 한 일본은 군축협상을 준수할 것이라고 생각했다.29) 영국 해군과 미해군은 일본을 건함 경쟁에서 압도할 수 있으며 전쟁에서도 승리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1938년 3월, 일본 정부가 새로운 군함 건설 계획에 대한 자료를 공개하지 않겠다고 하자 제2차 런던해군군축조약 조인국들은 전함의 성능 기준을 배수량 35,000톤에서 40,000톤으로, 주포 구경은 15인치에서 16인치로 상향하기로 했다. 영국과 미국 정보당국은 일본이 새로 건조하는 전함이 이정도 수준일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측은 배수량 70,000톤에 18인치 주포를 갖춘 첫번째 전함을 기공한 상태였다.30) 영국 해군성은 영국 조선소의 건조 능력의 한계 때문에 40,000톤급의 전함을 건조하기로 결정했다.31) 
 
영국 해군이 배수량 40,000톤에 16인치 주포를 장비한 라이온급 전함의 건조를 시작할 무렵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해군성의 예상대로 전쟁이 발발하자 영국 해군의 우선순위는 장기적인 함대 건설 경쟁에서 승리하는 것에서 전쟁에 승리하기 위해 당장 필요한 것을 갖추는데 돌아갔다. 전쟁 초기에 영국 해군은 소중한 전함을 독일의 잠수함과 일본군의 폭격기에 잃어버리는 등 많은 패배와 재앙을 겪었다. 하지만 싸우는 군대의 질적인 요소는 그 군대가 고난을 이겨내는 것으로 평가해야 한다. 이 점에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해군의 성과는 특히 독일이 프랑스와 노르웨이를 정복해 영국 해군이 전쟁 이전에 구상한 해상전 수행 계획을 뒤틀어 놓았다는 점을 고려할 때 놀라운 것이라 할 수 있다. 영국 해군은 1939~40년에 독일과 이탈리아의 수상함대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혔으며 비시 프랑스의 해군을 무력화 했고 독일의 잠수함 공세를 막아내는 동시에 히틀러가 영국 침공 계획을 단념하게 만드는데 큰 기여를 했다. 영국 해군이 대서양과 지중해를 장악함으로써 추축국에 맞설 연합이 결성될 시간을 벌 수 있었다. 

1945년 이후의 세대의 역사가들은 제2차세계대전 중 영국 해군의 업적에 대해서는 칭송했지만 전간기의 영국 해군에 대해서는 혹독하게 비판했는데 그 이유는 전쟁 초기 패배의 원인이 거기에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간기 영국 해군의 역사를 단지 불운한 막간극으로 해석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전간기의 영국 해군을 당시의 환경을 고려해 바라본다면 전간기의 역사가 불가피한 쇠퇴의 시기가 아니라 수많은 난제에 직면해 탁월한 기량과 대담한 용기를 발휘한 시기였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주석

1) 이에 관한 고전적인 연구로는 Paul Kennedy, The Rise And Fall of British Naval Mastery (London: Macmillan, 1984), pp. 267–98과  Stephen Roskill, Naval Policy Between the Wars, 2 vols. (London: Collins, 1968/76)가 있다. 
2) Gordon Martel, ‘The Meaning of Power: Rethinking the Decline and Fall of Great Britain’, International History Review (Vol. 13, No. 4, November 1991), pp. 662–94. 
3) 영국의 쇠퇴를 주장하는 학설에 대한 가장 최근의 반론으로는 David Edgerton, Warfare State: Britain, 1919–1970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6)가 있다. 
4) Matthew S Seligmann, The Royal Navy and the German Threat 1901–1914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12); Paul G Halpern, A Naval History of World War I (London: UCL Press, 1994). 
5) William J Williams, ‘Josephus Daniels and the US Navy’s Shipbuilding Program during World War I’, Journal of Military History (Vol. 60, No. 1, 1996), pp. 7–38. 
6) John Jordan, Warships After Washington: The Development of the Five Major Fleets 1922–1930 (Barnsley: Seaforth Publishing, 2011), pp. 1–24. 
7) John Ferris, ‘“It Is Our Business in the Navy to Command the Seas”: The Last Decade of British Maritime Supremacy, 1919–1929’, in Keith Neilson and Gregory C Kennedy (eds),Far Flung Lines: Studies in Imperial Defence in Honour of Donald Mackenzie Schurman (London: Frank Cass, 1997), pp. 129–34. 
8) Colin S Gray, The Leverage of Sea Power: Strategic Advantage of Navies in Major Wars (New York, NY: The Free Press, 1992). 
9) Ferris, ‘“It Is Our Business in the Navy to Command the Seas”’, pp. 129–34. 
10) Christopher M Bell, ‘Thinking the Unthinkable: British and American Naval Strategies for an Anglo–American War, 1918–1931’, International History Review (Vol. 19, No. 4, 1997), pp. 789–808. 
11) Christopher M Bell, The Royal Navy, Seapower and Strategy between the Wars (Basingstoke: Macmillan, 2000), pp. 59–98. 
12) Geoffrey Till, Air Power and the Royal Navy, 1914–1945 (London: Jane’s, 1979). 
13) Duncan Redford, A History of the Royal Navy: World War II (London: I. B. Tauris, 2014), pp. 102–08,133–54. 
14) Geoffrey Till, ‘Adopting the Aircraft Carrier: The British, American and Japanese Case Studies’, in Alan R Millett and Williamson Murray (eds), Military Innovation in the Interwar Period(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6), pp. 191–226. 
15) Joseph A Maiolo, The Royal Navy and Nazi Germany, 1933–1939 (Basingstoke: Macmillan, 1998), pp. 63–86. 
16) David Henry, ‘British Submarine Policy, 1918–39’, in Brian Ranft (ed.), Technological Change and British Naval Policy, 1860–1939 (London: Hodder & Stoughton, 1977), pp. 81–163. 
17) Joseph A Maiolo, ‘Deception and Intelligence Failure: Anglo–German Preparations for U-Boat Warfare’, Intelligence and National Security (Vol. 11, No. 1, 1996), pp. 32–58. 
18) Joseph A Maiolo, ‘“I Believe the Hun is Cheating”: British Admiralty Technical Intelligence and the German Navy, 1936–39’, Intelligence and National Security (Vol. 11, No.1, 1996), pp.32–58. 
19) Marc Milner, ‘The Battle of the Atlantic’, Journal of Strategic Studies (Vol. 13, No. 1, 1990), pp. 45–66. 
20) Sadao Asada, From Mahan to Pearl Harbor: The Imperial Japanese Navy and the United States (Annapolis, MD: Naval Institute Press, 2006), pp. 99–157. 
21) Maiolo, The Royal Navy and Nazi Germany, 1933–1939, pp. 133–38. 
22) Ferris, ‘“It Is Our Business in the Navy to Command the Seas’”, pp. 76–95; Jon T Sumida, ‘British Naval Procurement and Technological Change, 1919–39’, in Phillips P O’Brien (ed.), Technology and Naval Combat in the Twentieth Century and Beyond (London: Frank Cass, 2001), pp. 128–47. 
23) Maiolo, The Royal Navy and Nazi Germany, 1933–1939, pp. 15–19. 
24) Ibid., pp. 1–19. 
25) Ibid., pp. 19–62. 
26) Jost Dülffer, Weimar, Hitler, und die Marine: Reichspolitik und Flottenbau, 1920 bis 1939 (Düsseldorf: Droste Verlag, 1973), pp. 109–30. 
27) Edgerton, Warfare State, pp. 26–33. 
28) Maiolo, The Royal Navy and Nazi Germany, 1933–1939, pp. 138–58. 
29) Stephen E Pelz, Race to Pearl Harbor: The Failure of the Second London Naval Conference and the Onset of World War II (Cambridge, MA: Harvard University Press, 1974), pp. 149–64. 
30) Malcolm Muir, ‘Rearming in a Vacuum: United States Navy Intelligence and the Japanese Capital Ship Threat, 1936–45’, Journal of Military History (Vol. 54, No. 4, 1990), pp. 473–85; Maiolo, The Royal Navy and Nazi Germany, 1933–1939, pp. 133–58. 
31) David K Brown, Nelson to Vanguard: Warship Design and Development, 1923–1935 (London: Chatham Publishing, 2000), pp. 35–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