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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6월 13일 화요일

만헤이 전투에 대한 뻘글


근자에 먹고사는 문제로 업데이트가 전혀안되고 있어 민망하군요. 블로그에 밀덕썰 푸는게 소소한 삶의 재미 중 하나인데 말입니다.

예전에 어디에 투고하려고 썼던 뻘글 한 편 투척합니다. 만헤이 전투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원래 연재하려 했던 곳의 특성상 자료출처나 주석은 없습니다. 뭐, 전부 다 제 블로그에서 오래전에 했던 이야기이니 이곳을 꾸준히 들르신 분들이라면 지겨우시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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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크만의 기묘한 모험


독일군의 야심찬 아르덴느 공세가 미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좌절되어 가고 있던 1944 12 24, N15도로가 지나가는 교통 요충지인 만헤이(Manhay)가 독일 무장친위대 제2기갑사단 다스 라이히(Das Reich)’에 점령됐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편찬된 미육군의 공간사에서는 이날 밤 독일군이 노획한 셔먼 전차를 앞세우고 미군으로 위장해 만헤이를 점령했다고 기록했다. 하지만 독일측 참전자들의 증언이 공개되면서 만헤이 전투는 미육군의 설명과는 다르게 전개됐음이 밝혀졌다. 이날 만헤이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

아르덴느 전투가 시작될 무렵 다스 라이히사단은 제6기갑군의 예비대로 대기하고 있었다. 1944 12 19, B집단군 사령관 발터 모델 원수는 예비대로 대기하고 있던 다스 라이히사단을 투입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이 무렵 독일군을 괴롭히던 고질적인 연료부족 때문에 다스 라이히사단은 투입 명령을 받고도 이동을 할 수 없었다. ‘다스 라이히사단에 대한 연료보급은 12 22일 오전이 지나서야 마무리 되었다. 보급을 마친 다스 라이히사단은 N15 도로를 따라 북상하다가 바하끄 쁘헤듀흐(Baraque Fraiture)에서 미 82공수사단 325글라이더 보병연대 2대대와 여기에 배속된 미 3기갑사단 32전차연대 3대대 소속의 1개 전차소대의 저항에 부딛혔다. ‘다스 라이히전차연대 7중대의 4호전차와 미 32전차연대 3대대의 셔먼 전차간에 전차전이 벌어졌다. 독일측은 4대의 4호전차를 잃었고 미군은 11대의 셔먼전차와 다수의 차량을 상실하고 바하끄 쁘헤듀흐에서 퇴각했다. 그러나 23일부터 24일까지 미육군항공대의 대대적인 공습으로 만헤이를 목표로 한 독일군의 진격은 저지되었다. 일부 독일 전차병들은 끊임없는 공습으로 공황상태에 빠져 전차를 버리고 도망치기까지 했다. 여기에 바하끄 쁘헤듀흐를 탈환하기 위해 미 3기갑사단과 82공수사단이 병력을 증원하면서 독일군은 더욱 곤경에 빠졌다.

결국 독일군은 미군의 공습을 피해 야습을 감행하기로 결정했다. ‘다스 라이히전차연대장 루돌프엔셀링(Rudolf Enseling) SS중령은 만헤이 방면에 대한 야습에 예비대로 대기하고 있던 1대대 4중대를 투입하기로 결정했다. 4중대는 경험이 풍부한 장교였던 오르트빈 폴(Ortwin Pohl) SS대위가 지휘하고 있었다. 폴 대위는 우수한 지휘관이자 전차 에이스였다. 그는 노르망디 전선에서 12대의 미군 전차를 격파한 바 있었다. 그리고 그의 부관이 바로 유명한 전차에이스 에른스트 바르크만(Ernst Barkmann) SS상사였다. 바르크만 상사는 노르망디 전투에서 큰 활약을 했으며 특히 쿠탕스 가도의 전투로 명성을 떨쳤다. 1소대는 아르덴느 공세 직전 임관한 크노케(Heinrich Knocke) SS소위가, 2소대는 비스만(Alfred Wissmann) SS소위가, 3소대는 경험이 풍부한 부사관인 프란츠 프라우셔(Franz Frauscher) SS원사가 지휘하고 있었다. 각 소대는 모두 5대의 판터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중대본부는 폴 대위의 402호차와 바르크만 상사의 401호차 2대로 이루어져 있었다. 또한 4중대를 지원하기 위해 만프레트 하게샤이머(Manfred Hargesheimer) SS중위가 지휘하는 2중대 소속의 판터 6대가 4중대에 배속됐다. 그리고 전차를 지원하기 위해 제3SS기갑척탄병연대 16중대(공병중대)가 배속됐다.

1638분에 4중대의 전차들은 오데뉴(Odeigne)에 집결해 해가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공격의 선봉에 서는 것은 베테랑인 프라우셔 원사가 지휘하는 3소대였다. 3소대의 뒤에는 중대본부가 따랐고 그 뒤에는 2소대, 그리고 최후위에는 경험이 부족한 1소대가 배치됐다.
한편 4중대의 정면에는 미 3기갑사단의 올린 브루스터(Olin F. Brewster) 중령이 지휘하는 TF브루스터가 배치되어 있었다. TF브루스터는 3기갑사단 32전차연대 소속의 3개 전차소대, 36기계화보병연대 I중대 병력 일부, 82공수사단 509강하연대 병력 일부, 그리고 75보병사단 290보병연대 C중대 등 잡다한 부대로 급조된 전투단이었다.

오후 10, 예정대로 공격이 개시됐다. 만헤이 방면으로 북상하던 4중대는 곧 TF브루스터 소속의 전차들과 격돌했다. 짧지만 격렬한 전투가 전개됐고 프라우셔 원사의 판터가 피격됐다. 미군은 셔먼 전차 두대를 잃고 북쪽으로 후퇴했다. 4중대는 잠시 진격을 멈추고 재정비에 들어갔으며 프라우셔 원사는 지휘를 위해 전차를 바꿔탔다.

그런데 혼란의 와중에 상황 전달을 받지 못한 바르크만 상사는 중대가 잠시 진격을 멈췄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단독으로 북상했다. 바르크만 상사는 자신이 낙오됐다고 생각한 나머지 아군을 만날 때 까지 계속 북쪽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군이 아니라 만헤이를 방어하고 있던 미 7기갑사단 A전투단 40전차대대 소속의 셔먼 전차였다. 셔먼 전차장 마티어스(Mathias) 하사는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바르크만의 판터를 아군의 셔먼 전차로 착각했다. 남쪽에는 아군이 배치되어 있었으니 당연한 것 이었다. 바르크만 상사는 마티어스 하사의 셔먼 전차를 프라우셔의 판터라고 착각해 그 옆에 정지하고 말을 걸었다. 마티어스 하사는 갑자기 독일어가 들리자 당황해서 포탑 안으로 들어가 해치를 잠궈버렸다. 바르크만도 상대의 반응에 당황했다. 옆에 있는 전차를 다시 살펴보니 후미등이 미군의 붉은 색이 아닌가! 판터의 후미등은 녹색이었다. 당황한 바르크만은 인터폰에 소리를 질렀다.

포수! 옆에 있는 전차는 적 전차다! 쏴라!(Richtschütze! Panzer neben uns ist ein Feindpanzer! Abchießen!)“

사수인 호르스트 포겐도르프(Horst Poggendorf) SS병장도 당황해서 소리를 질렀다.

쏠 수가 없습니다! 포탑을 돌릴 수 없어요!(Abschießen geht nicht! Turmschwenkwerk klemmt!)“

두 대의 전차가 너무 가까이 붙어있다 보니 판터의 포신이 걸려서 포탑을 회전 시킬 수 없었던 것이다. 이때 판터 조종수인 그룬드마이어(Grundmeyer) SS상병이 순발력을 발휘했다. 포탑을 돌릴 수 있도록 판터를 재빨리 후진 시킨 것 이었다. 포겐도르프 병장도 때를 놓치지 않고 셔먼을 격파했다. 놀랍게도 마티어스 하사를 비롯한 셔먼의 승무원들은 살아남았는데 근거리에서 발사된 판터의 포탄이 셔먼의 후부까지 관통해 버리는 바람에 내부에는 피해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마티어스 하사는 부상을을 입은 포수를 구출해 탈출했다.

이제 바르크만은 자신이 적진 한가운데에 고립됐음을 깨달았다. 그런데 그는 이 상황에서 그대로 전진하는 것을 택했다. 마티어스 하사의 셔먼을 격파하고 이동하던 바르크만의 앞에 제814대전차대대 B중대 소속의 M10 구축전차 두 대가 나타났다. 이들도 바르크만의 판터를 아군의 셔먼으로 오인해 사격을 가하지 않았다. 포겐도르프는 신속하게 사격을 가해 두 대의 M10을 격파했다. 바르크만은 미군 전차가 계속해서 나타나자 속도를 줄이고 천천히 이동하기로 했다. 다시 전진하던 바르크만의 앞에 제40전차대대 C중대 소속의 셔먼 아홉대가 나타났다. 바르크만은 천연덕스럽게 계속 이동했고 미군들은 바르크만의 전차를 아군 전차로 생각해 한 발의 사격도 가하지 않았다. 바르크만은 그곳을 벗어나 만헤이 교차로에 도착했다. 바르크만은 원래 그랑므닐 방면으로 가려고 했으나 셔먼 전차 세대가 그랑므닐 방향에서 오는 것을 보고는 충돌을 피하기 위해 그대로 만헤이로 돌입하기로 했다. 만헤이는 철수를 준비하는 미군 차량으로 북적이고 있었다. 미군은 철수 준비로 정신이 없었기 때문에 바르크만의 판터가 만헤이에 돌입했을 때도 한동안은 신경도 쓰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정체를 들키지 않을 수는 없었다. 미군들은 갑자기 만헤이 한 복판에 독일 전차가 나타난 것을 깨닫고 혼란에 빠졌다. 바르크만은 앞에서 다가오던 지프를 그대로 깔아뭉갠 뒤 전속력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미군 운전병들도 질주하는 판터를 피해 차량을 모느라 우왕좌왕했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미군 전차들이 바르크만의 셔먼을 추격하기 시작했다. 한대의 M5 스튜어트가 판터의 앞을 막았으나 바르크만의 판터는 그대로 스튜어트를 들이받고 전진했다. 그리고 포탑을 6시 방향으로 회전시켜 추격해 오는 미군 전차들을 차례대로 격파하기 시작했다. 바르크만의 판터는 만헤이를 벗어나 마을 외곽의 숲으로 달아났다. 바르크만은 혼란에 빠진 미군이 추격을 멈춘 것을 확인한 뒤 숲 속에 숨기로 했다. 판터의 엔진이 이상을 일으켜 더 이상 이동하는 것이 위험했다.

바르크만이 만헤이에서 좌충우돌 하는 동안 전열을 가다듬은 4중대는 다시 전진하기 시작했다. 이때 미 40전차대대 C중대 소속의 셔먼 한 대가 4중대의 판터들을 향해 사격을 퍼부었다. 프라우셔는 즉시 조명탄을 발사한 뒤 이 셔먼을 격파했다. C중대의 나머지 셔먼 전차들도 순식간에 격파됐다. 미군 전차병들은 대부분 전차 밖에 나와 휴식을 취하고 있었기 때문에 완전한 기습이었다. C중대를 전멸시킨 4중대는 만헤이로 돌입했다. 그러나 바르크만이 이미 한바탕 난리를 피운 뒤라 미군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또 다시 프라우셔의 판터가 셔먼의 근거리 사격에 피격됐다. 프라우셔의 뒤를 따르던 판터가 즉시 반격을 가해 셔먼을 격파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프라우셔와 승무원들은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다. 프라우셔는 다시 전차를 갈아타고 지휘를 해야 했다.

4중대는 만헤이를 점령한 뒤 다시 방향을 돌려 그랑므닐 쪽으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628대전차대대 소속의 M10 구축전차들이 포격을 가해 3소대의 베테랑 전차장인 오스카 피셔의 판터가 격파되고 피셔도 전사했다. 피셔의 판터는 도로를 막고 있었기 때문에 독일군은 공격 기동을 하기가 어려웠다. 그랑므닐을 둘러싸고 포격전이 전개되는 와중에 4중대장 폴 대위가 부상을 입고 후송됐다. 폴 대위의 중대장 차량은 크노케 소위의 포수가 인계했다. 중대장 차량은 만헤이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피셔의 판터를 우회하는 와중에 판터 네 대가 미군의 대전차 지뢰를 밟고 기동불능이 됐다. 4중대의 공격이 난관에 부딛혔다. 4중대는 미군의 방어를 물리치고 그랑므닐 서쪽의 에흐제(Erezze)에 도착해 다시 재정비에 들어갔다. 폴 대위가 후송됐기 때문에 4중대에 배속되어 있던 하게샤이머 중위가 지휘권을 인계받았다. 그런데 하게샤이머 중위도 낙오된 미군의 총격에 어깨에 중상을 입고 후송되었다. 결국 4중대의 간부들은 다시 그랑므닐로 후퇴해 방어태세를 갖추기로 결정했다.

12 24일 밤의 전투로 7기갑사단 A전투단은 21대의 전차를 잃었고, 40전차대대 A중대장 앨런(Malcolm O. Allen) 대위가 포로가 되고 D중대장 휴즈(Walter J. Hughes) 대위가 전사하는 등 420여명의 인명 손실을 입었다.

한편, 숲속에 숨어있던 바르크만은 상황이 정리된 것으로 보이자 다시 만헤이로 돌아왔다. 만헤이에는 중대장의 판터가 대기하고 있었다. 바르크만은 중대장차의 임시 전차장과 상의를 한 뒤 건물 사이에 전차를 숨기고 방어 태세를 취하기로 했다. 12 25일 오전, 미군은 만헤이를 탈환하기 위해 7기갑사단 31전차대대 B중대를 투입했다. B중대 소속의 셔먼 다섯대는 만헤이를 향해 전진하다가 바르크만을 비롯한 4중대 본부 판터 두대의 포격으로 전멸했다. 잠시 뒤 올프(Emerson Wolfe) 대위가 지휘하는 본대의 셔먼 10대가 도착했으나 앞서 투입된 선발대가 전멸한 것을 보고는 공격을 머뭇거렸다. 만헤이 탈환을 지휘하기 위해 도착한 7기갑사단 B전투단장 브루스 클라크(Bruce Clark) 준장은 올프 대위에게 즉시 공격하라고 명령했으나 올프 대위는 판터가 매복하고 있는 상황에서 엄폐물 없는 개활지로 돌격하는 것은 불리하다고 설명했다. 클라크 준장은 올프 대위의 주장이 옳다고 생각해 공격 명령을 취소했다. 한편 그랑므닐 방면을 방어하고 있던 4중대의 주력은 TF맥조지(McGeorge) 소속의 셔먼 전차 17대와 교전해 15대를 격파하는 피해를 입혔다.


미군은 만헤이와 그랑므닐을 직접 공격하는 대신 12 25일부터 27일까지 8개 포병대대를 동원해 포격을 퍼부었다. 여기에 미육군항공대가 가세해 만헤이-그랑므닐의 독일군은 옴싹달싹 할 수 없었다. 크노케 소위의 411호차가 미군의 포격으로 격파됐다. 4중대는 포격이 뜸해진 25일 밤에 만헤이를 버리고 남쪽으로 철수했다. 바르크만의 대담한 모험으로 독일군은 만헤이를 비교적 쉽게 점령할 수 있었으나 전쟁을 운으로만 치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바르크만의 모험은 제2차 세계대전의 특이한 일화로만 남았다.

2017년 5월 23일 화요일

잡담입니다...

먹고사는 문제로 도통 번역할 시간이 안생기니 잡담이나 풀어봅니다.

1990년대 이후로 영어권에서 소련의 시각을 반영한 군사사 서적들이 폭발적으로 출간됐습니다. 2차대전의 다른 측면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이 현상을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약간의 부작용도 있었는데 소련이 프로파간다 목적으로 생산한 주장들이 여과없이 '진실'로 받아들여진 것 입니다. 물론 2차대전사 연구가 꾸준히 진행되면서 이런 문제에 대한 보완이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습니다만 여전히 부족한 면이 많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면에서 데이빗 글랜츠의 When Titans Clashed와 독소전쟁 항공전에 대한 개설서인 본 하데스티의 Red Phoenix Rising 증보개정판은 꽤 흥미로운 책이었습니다. 두 서적 모두 1990년대에 소련의 시각을 대중에게 알리는데 공헌했지만 동시에 소련 중심의 시각에서 오는 문제점도 고스란히 안고 있었습니다. 증보개정판으로 이런 문제점은 다수 해결됐으나 여전히 미진한 점이 몇가지 보입니다. 글랜츠는 여전히 독일 기록과 상충되는 일부 기록에서 소련쪽 주장을 옹호하고 있으며(체르카시 전투 등), 본 하데스티의 책도 쿠반 전투 같이 소련 기록이 완전히 엉터리인 경우 '양쪽 모두 전과를 과장했다' 같은 애매한 태도를 취하고 있습니다. 전쟁 당시에 정확한 전과 산정이 어려워 과장이 발생하는건 만국공통이지만 사실 소련처럼 역사서술의 방향을 뒤틀 정도로 심각한 과장을 하는 것은 비판받아야 할 점 입니다. 쿠반 항공전을 예로 들면, '독일 공군이 천여대의 항공기를 상실하고 제공권을 빼앗겼다'와 '독일 공군이 쿠르스크 공세를 위해 쿠반 지구의 공군력을 대거 북부로 이동시켜 소련 공군이 우세를 차지할 수 있었다'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이지요.

개인적으로 독소전쟁사는 앞으로도 수십년간 새로운 사실이 발굴되면서 기존의 서술도 지속적으로 변화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1990년대를 뒤흔든 연구자들의 나이를 생각하면 세번째 개정판은 무리겠지만 그들의 업적을 이어받을 후속 연구자들이 등장하겠지요.

2017년 5월 7일 일요일

렌드리스에 대한 흥미로운 논문 한편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최신호(40-2)에 렌드리스에 관한 흥미로운 논문이 한 편 실렸습니다. 저자는 빈대학의 데니스 하블라트(Denis Havlat)이고 논문 제목은 Western Aid for the Soviet Union During World War II: Part I입니다. 논문의 분량이 많아 나뉘어 실렸는데 완결되면 번역해서 이 블로그에 올려보려 합니다.

하블라트의 핵심 주장은 소련과 러시아가 렌드리스의 영향력을 축소하기 위해 역사를 왜곡했으며 실제로는 렌드리스가 독소전쟁의 주요 국면에 지대한 영향력을 끼쳤다는 것 입니다. 그리고 러시아 정부의 공식 통계인 크리보셰프의 보고서가 소련군의 손실을 축소 왜곡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소련과 러시아가 렌드리스의 기여도를 깎아내리기 위해 통계를 조작하는 등 여러가지 날조를 했다는 것 입니다.

꽤 재미있는 논문입니다. 아마 올해안에는 완결이 날 듯 싶은데 시간이 되는대로 번역하도록 하겠습니다.

2017년 5월 4일 목요일

한국에 남아있는 일본 육해군 항공대 비행장의 흔적들


 일본은 대한제국 시기부터 한반도에 슬금슬금 군사시설을 건설하기 시작했고, 이것은 2차대전 말기로 가면서 더욱 심해졌습니다. 다들 잘 아시겠지만 현재 한국 방방곳곳에는 아직도 일본군이 건설한 군사시설의 잔해들이 남아있습니다. 밀양의 육군항공대 격납고처럼 문화재 지정이 되어 보호받는 경우도 있고 무안 처럼 아직 문화재 지정이 되지 않아 지속적으로 철거되는 경우도 있지요.

 개인적으로는 특히 일본이 본토결전에 대비해 규슈방면 지원을 위한 후방기지로 건설한 한반도 남부의 비행장 유적들에 관심이 많습니다. 현재 남아있는 비행장 유적들은 주로 1944~45년 시기에 집중적으로 건설된 것이 특징입니다.

제가 답사했던 곳의 사진들을 올려봅니다.


1. 제주도 서귀포시 대정읍 알뜨르비행장(일본해군항공대)

현재 남아있는 일본군 비행장 유적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알뜨르비행장일 것입니다. 제주도는 일본군의 결7호작전에 따라 45년에 필사적으로 방어준비가 이루어졌던 지역입니다. 하지만 알뜨르비행장은 이미 중일전쟁 이전인 1931년에 건설되어 중일전쟁 당시 오무라(大村)해군항공부대의 기지로 사용될 정도로 오래된 곳 입니다. 그리고 전쟁이 격화되면서 제주도 방어의 주력이 육군으로 넘어가면서 육군 레이더기지가 근처에 설치되는 등 육해군공용기지로 바뀌게 되지요.1)

 일본해군은 1943년 말 알뜨르비행장 확장공사를 하면서 20개의 콘크리트 격납고를 건설했습니다. 현재 남아있는 격납고의 외형은 비교적 양호한 편 입니다.





2. 밀양시 상남면 기산리ㆍ연금리 (일본육군항공대)


밀양시 상남면에는 전쟁 말기 일본육군항공대가 건설한 콘크리트 격납고 두 개가 남아있습니다. 밀양과 아래에서 이야기할 무안군의 비행장은 일본육군항공대 관할이었습니다. 1944년까지 한반도 남부(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의 육군항공대 비행장은 대구에 위치한 제45항공지구사령부의 관할이었습니다.

朝鮮軍残務整理部, 『朝鮮軍関係史料 2/2』, p.0280-2.

 그러다가 1944년 말 부터 본토결전준비로 인해 일본육군항공대가 대대적으로 증강됩니다. 이것은 화북에 있던 일본 제5항공군이 본토결전 준비를 위해 1945년 5월 20일 경성에 사령부를 설치하는 것으로 절정에 달합니다. 이무렵 밀양에 주둔한 것이 확실한 항공부대는 제176야전비행장설정대, 제10비행장중대, 제1활공비행대 등입니다.2) 조선군잔무정리부가 남긴 기록에는 항복당시 제5항공군 예하부대 목록과 병력 현황만 있을뿐 주둔지에 대한 자세한 정보가 없네요.

朝鮮軍残務整理部, 『朝鮮軍関係史料 2/2』, p.0281.

 현재 밀양시 상남면에는 기산리에 1개, 연금리에 1개 등 총 2개의 격납고가 남아있습니다.

 기산리의 격납고는 사유지 한가운데에 있어서 사진 촬영이 상당히 까다롭습니다.








 연금리의 격납고는 민가로 개조되어 사용되다가 방치됐습니다. 기산리에 있는 격납고 보다는 촬영이 편합니다.











3. 무안군 현경면ㆍ망운면 (일본육군항공대)

 무안은 현재 일본군의 비행장 관련 유적이 가장 많이 남아있는 지역입니다. 하지만 그 중에 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없어서 계속해서 남아있는 유적들이 철거되고 있습니다. 제가 최근에 확인한 바로는 무안군 현경면과 망운면 일대에 콘크리트 벙커 1개와 콘크리트 격납고 6개가 남아있었습니다. 하지만 관광자원으로 개발하기도 어렵고 지역 주민들의 인식도 좋지 않아 언제 남아있는 것도 철거될지 모르겠습니다.

 현재 남아있는 격납고의 위치는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현경면에 5개(A, B, C, E, F), 망운면에 1개(E)를 확인했습니다. 전부 확인하지 못해서 추가 조사를 할 예정입니다.


 먼저 평산 3리(통정)과 평산 4리(유수정)에 있는 격납고의 사진을 올리겠습니다. 편의상 평산 3리 통정에 있는 것을 A, 평산4리 유수정에 있는 것이 B와 C로 칭하겠습니다.

 A 격납고입니다.








70년이상 방치되어 상태가 별로 좋지 않습니다. 다른 것들도 마찬가지 입니다만.

 B 격납고 입니다.










C격납고는 현재 창고로 개조되어 사용되고 있습니다. 현지 신문의 설명에 따르면 고구마 저장고로 사용했던 것 같습니다.









A, B, C 격납고의 구체적인 위치는 아래와 같습니다. 가까운 곳에 몰려있어 찾는데 어려움은 없습니다.



다음은 D, E, F 격납고입니다. 재미있게도 D격납고는 현경면과의 경계인 망운면에 위치해 있습니다. 딱 경계면에 붙어있어서 저는 처음에 D격납고도 현경면에 있다고 착각했을 정도입니다.


망운면 목동리의 D격납고 사진입니다. 밭 한가운데에 있어서 사진을 찍기 어려웠습니다. 농한기에 다시 가서 조사할 생각입니다.




 다음은 현경면 송정리의 E격납고 입니다. 현재 쓰레기장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현경면 송정리의 F격납고 입니다. 여기는 민가로 개조되어 사용된 흔적이 있습니다. 물론 지금은 여기도 쓰레기장입니다. 현경장례식장 바로 옆에 있어 찾기는 가장 쉽습니다.










4. 부산광역시 강서구 대저2동 신평마을 (일본해군항공대)

부산광역시 강서구 대저2동, 즉 김해공항 옆에도 일본해군항공대가 사용하던 격납고 세 곳이 남아있습니다. 재미있게도 이곳들은 아직까지도 민가로 사용되고 있어서 외형 자체는 꽤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이곳이 대한민국 공군 소유의 국유지이기 때문에 건축물 신설이나 철거가 어려운게 그 원인인 듯 합니다.














앞으로도 계속 조사해서 관련정보를 업데이트 할 계획입니다.



1) 츠카사키 마사유키(塚崎昌之), 「제주도에서의 일본군의 '본토결전' 준비: 제주도와 거대 군사 지하시설」, 조성윤 엮음 『일제말기 제주도의 일본군 연구』 (보고사, 2008) 64~72쪽.
2) 양영조 편, 『일제 조선주둔군과 625전쟁 일본소해대』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2016), 32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