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3월 24일 목요일

2차대전 당시 소련에 수용된 전쟁포로의 사망률

소련의 수용소라면 당장 떠오르는 것은 열악한 생활환경과 가혹한 중노동입니다. 소련의 강제수용소를 다룬 이야기 중 가장 잘 알려진 솔제니친의 수용소군도의 내용만 보더라도 아름다운 모습이라곤 전혀 떠오르지 않지요.

2차대전 당시 소련은 총 3,777,290명의 포로를 잡았다고 합니다.1) 국적별로 세분화 하면 대략 다음과 같았다는군요.



국적
숫자
독일
2,389,560
오스트리아
156,682
헝가리
513,767
루마니아
201,800
이탈리아
48,957
핀란드
2,377
기타
464,147
G. F. Krivosheev, Soviet Casualties and Combat Losses in the Twentieth Century(Greenhill Books, 1997), p.277


그리고 이 중에서 꽤 많은 수의 포로가 고향땅을 밟지 못하고 사망했습니다. 소련 정부가 모든 포로를 송환한 뒤 1956년에 정리한 기록에 따르면 송환된 포로와 사망한 포로의 숫자는 다음과 같았다고 합니다.(집계 방식의 문제인지 위에서 인용한 자료와는 포로 숫자에서 조금 차이가 납니다.)



국적
포로 총계
송환된 포로
사망한 포로
독일
2,388,443
2,031,743
356,687
헝가리
513,766
497,748
54,753
루마니아
187,367
132,755
54,602
오스트리아
156,681
145,790
10,891
이탈리아
48,957
21,274
27,683
폴란드
60,277
57,149
3,127
체코슬로바키아
69,977
65,954
4,023
프랑스
23,136
21,811
1,325
유고슬라비아
21,830
20,354
1,468
네덜란드
4,730
4,530
199
핀란드
2,377
1,974
403
벨기에
2,014
1,833
177
룩셈부르크
1,653
1,560
92
스페인
452
382
70
덴마크
456
421
35
노르웨이
101
83
18
기타
3,989
1,062
2,927
포로 총계
3,486,206
3,006,423
518,480
Stefan Karner, “Die sowjetische Hauptverwaltung für Kriegsgefangene und Internierte. Ein Zwischenbericht” , Vierteljahrshefte für Zeitgeschichte 42-3(1994), s.470.

2차대전이 끝난 직후 소련의 사회경제적 상황은 말 그대로 최악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얼마전 까지 총부리를 들이댔던 나라의 포로들에게 좋은 대접을 해줄 여유가 있을리 없었습니다. 2008년에 썼던 “독일장교 비더만의 소련 포로수용소 생활”이라는 글에서 간단히 다뤘지만 특히 1945~46년 겨울에는 엄청난 숫자의 포로가 사망했습니다. 사정이 조금 나아지는건 1946년 하반기 이후였다고 하지요.

어쨌든 위에서 인용한 통계에 따르면 포로 생활 중 사망한 포로의 비율은 14.9%입니다. 좀 놀라운 것은 유독 이탈리아인 포로만 엄청나게 사망했다는 것 입니다. 생환된 숫자가 사망자 보다 더 적다는게 충격적이지요. 이탈리아 포로의 사망률은 56.5%로 다른 나라를 뛰어넘는 엄청난 규모입니다.2) 아마도 이탈리아군 포로의 대부분이 1942~43년 겨울 전역에서 생포되었기 때문에 그렇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비슷한 시기 스탈린그라드에서 생포된 포로 9만여명 중 겨우 6천여명 만이 살아돌아온 것과 비교할 수 있겠군요.3) 이탈리아가 1943년 항복한 뒤에는 포로의 대우가 개선되었다는 이야기도 있긴 합니다만 일단 사망률 자체가 덜덜덜한 수준이니별로 와닫지는 않는군요.
정작 가장 고생을 많이 했을 것 같은 독일군 포로의 사망률은 평균적인 수준입니다. 물론 최악이라고 할 수 있는 스탈린그라드의 포로들을 제외한다면 말입니다. 여기에 소련이 1945년에 본국으로 끌고 가지 않고 독일 내에서 석방한 포로들을 더한다면 사망률은 조금 더 내려가지 않을 까 생각됩니다.



1)  G. F. Krivosheev, Soviet Casualties and Combat Losses in the Twentieth Century(Greenhill Books, 1997), p.277
2) Stefan Karner, “Die sowjetische Hauptverwaltung für Kriegsgefangene und Internierte. Ein Zwischenbericht” , Vierteljahrshefte für Zeitgeschichte 42-3(1994), s.470.
3) Guido Knopp, Die Gefangenen,(Wilhelm Goldmann Verlag, 2005), s.72

2011년 3월 18일 금요일

허세 혹은 정신승리

허세 또는 정신승리의 어떤 유형...

최근에 미국대통령 부쉬는 사회주의, 공산주의가 사멸하여 간다고 떠들고 있는데 그것은 터무니 없는 궤변에 지나지 않습니다. 인류의 리상인 사회주의, 공산주의는 절대로 사멸하지 않으며 또 사멸할 수도 없습니다. 사멸하여 가는 것은 사회주의가 아니라 자본주의입니다. 현실적으로 자본주의는 쇠퇴몰락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맑스와 레닌이 말한바와 같이 자본주의가 멸망하고 사회주의가 승리하는 것은 어길수 없는 사회발전의 법칙입니다.

김일성,「이라크 공산당 대표단과 한 담화(1989년 9월 18일)」김일성전집 88 -1989.1-1989.12(조선로동당출판사, 2010), 425-426쪽

김일성이 1980년대에 한 담화를 보면 꽤 재미있습니다. 현실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한 노인네의 악다구니라고 할 까나... 김일성전집을 꾸준히 읽다 보면 김일성은 자신이 패배하고 있다는 것을 조금씩 느끼면서 더 정신승리를 추구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여튼 꽤 재미있지요.

이번에 인용한 김일성전집 88권은 바로 작년에 나온 책인데 무려 『김일성전집』인데도 불구하고 종이의 질이 저질인게 인상적이었습니다. 1970년대에 나온 『김일성저작집』보다도 종이의 질이 개판이란게 참 안습이죠.

2011년 3월 14일 월요일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2-1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연재에 앞서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0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0-1

1. 테렌스 주버vs테렌스 홈즈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1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2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3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4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5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6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7

S. 번외편 및 기타 사항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S-1


원래는 테렌스 주버와 테렌스 홈즈의 논쟁을 계속해서 1-8을 연재해야 되는데 생각이 조금 바뀌었습니다. 일단 2003년에 들어와 다른 학자들이 논쟁에 본격적으로 참여하면서 주버와 홈즈의 논쟁의 흐름이 다소 느려졌기 때문입니다. 2003년 부터는 주버와 로버트 폴리(Robert T. Foley), 그리고 아니카 몸바우어(Annika Mombauer)간의 논쟁이 중심이 되었기 때문에 테렌스 주버와 테렌스 홈즈의 논쟁은 잠시 미뤄두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먼저 이번 글에서는 2003년 부터 시작된 테렌스 주버와 로버트 폴리의 논쟁을 다루겠습니다.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2-1
테렌스 주버vs로버트 폴리
Here comes a new challanger!!!

테렌스 주버와 테렌스 홈즈의 논쟁이 한창 진행 중이던 2003년, 독일 군사사를 전공하던 로버트 폴리가 새롭게 논쟁에 참여했습니다. 폴리는 논쟁의 주 무대인 War in History 10-2호에 The Origins of the Schlieffen Plan이라는 논문을 발표하면서 전통적인 학설을 보완하는 견해를 내놓습니다.

폴리의 주된 논점은 슐리펜 계획의 실체는 인정하되 그 형성 시기를 훨씬 이른 시점으로 잡는 것 입니다. 폴리는 이미 1899년의 전쟁 계획에서 부터 슐리펜 계획의 근간이 되는 요소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필자는 먼저 다이믈링(Berthold von Deimling)의 회고록에 있는 내용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다이믈링은 1900년 중령 계급으로 총참모부에 발령받아 전시 전투서열 작성의 감독과 전시 부대전개와 관련된 업무를 담당했는데 업무가 업무인 만큼 슐리펜의 전쟁 계획 수립을 가까이서 지켜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다이믈링은 1930년에 출간한 회고록에서 그가 총참모부에 발령받았을 때 이미 독일군의 주력을 서부전선에 집중하고 프랑스의 국경지대 요새선을 우회하기 위해 벨기에와 룩셈부르크를 침공하는 기본 개념이 완성되어 있었다고 기록했습니다.

폴리는 다이믈링이 회고록에서 언급한 계획은 바로 1899/1900년도 부대전개계획 I(Aufmarschplan I) 이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연재를 시작 할 때 간략하게 이야기 하기도 했는데 부대전개계획 I은 서부전선에 주력을 집중하는 계획이고 부대전계획 II는 동부전선에 조금 더 중점을 두는 계획입니다. 폴리는 주버와는 달리 부대전개계획 I이 서부전선에 집중한 계획이기는 하지만 제한적인 조건에서 양면전쟁도 고려한 계획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프랑스에 승리를 거둔 뒤 병력을 동부전선으로 재배치하는 개념이 들어있기 때문인데 이 해석은 제 개인적으로도 타당한 것 같습니다. 1899/1900년도 부대전개계획 I은 서부전선에 23개 정규군단, 19개 예비사단, 11개 기병사단, 13개 향토여단(Landwehr brigade)+1개 향토연대를 집중하고 동부전선에는 소규모의 부대만 배치했는데 이것은 슐리펜의 1905년 비망록에 명시된 것과 유사합니다.

한편, 슐리펜은 1899/1900년 부대전개계획을 염두에 두고 1898년 10월에 작성한 대 프랑스전 비망록에서 프랑스군이 개전 2주에서 3주차에 동원을 완료한 뒤 선제공격을 개시하는 상황을 가정하고 이에 대한 대응 방안을 구상했습니다. 슐리펜은 독일의 동원 완료는 4주가 걸릴 것이기 때문에 프랑스군의 선제 공격을 허용할 수 밖에 없는데 프랑스군의 주공은 (독일과 마찬가지로) 국경지대의 요새선을 우회하기 위해 룩셈부르크와 벨기에 남부를 거쳐 독일로 향할 것이라고 예측했습니다. 슐리펜은 프랑스군 주력을 끌어들여서 우익의 1군과 2군, 그리고 좌익의 6군으로 양익 포위를 실시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우익의 1군과 2군은 포위 섬멸을 위해 벨기에와 룩셈부르크를 침공할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프랑스군이 선제공격을 하지 않는 상황에서는 독일이 먼저 공격을 시작할 수 밖에 없었는데 독일 또한 국경의 요새지대를 우회해야 했기 때문에 벨기에와 룩셈부르크를 침공할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었습니다. 스위스는 처음부터 고려 대상에서 제외되었는데 그 이유는 스위스군은 전쟁준비가 잘 되어 있고 프랑스로 이어지는 유라(Jura) 산맥은 요새화가 되어 있어 돌파가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이 경우 먼저 8개 군단으로 구성된 1군과 2군이 마스(Maas) 강을 도하해 프랑스군의 요새선의 후방으로 공격해 들어가고 1군과 2군의 좌익은 3군(4개 군단+2개 예비사단) 이, 우익은 7군(6개 예비사단)이 엄호합니다. 그리고 우익을 엄호하는 3군은 1군과 2군을 후속해 마스강을 도하합니다. 한편 8개 군단으로 구성된 4군과 5군은 자르브뤼켄(Saarbrücken)과 자르부르크(Saarburg)를 잇는 선에 전개해 상황이 유리할 경우 낭시(Nancy) 방면으로 진출, 낭시 동쪽의 요충을 점령한 다음 낭시와 툴(Toul)-에피날(Epinal) 사이를 돌파하도록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6군(4개 군단+6개 예비사단) 은 상 알자스에 전개해 독일군의 좌익을 방어하는 임무를 맡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만약 러시아군이 공격해 온다면 동부전선에서는 지연전을 실시하면 서부전선에서 증원군을 보내도록 했습니다.
폴리는 이것이 1905년 비망록의 내용과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고 주장합니다. 물론 세부적인 면에서는 차이가 있다는 점도 함께 지적하고 있습니다. 먼저 우익에 12개 군단과 8개 예비사단만 배치하고 있다는 점이 큰 차이입니다. 다음으로 우익의 우회기동도 1905년 비망록에 명시한 것 보다는 훨씬 작아서 프랑스군의 국경지대 요새선을 우회 포위하는데 그치고 있습니다. 폴리는 이러한 차이점 때문에 슐리펜 계획의 정설을 확립한 게르하르트 리터를 포함해 기존의 역사가들이 슐리펜 계획의 완성 시점을 훨씬 내려 잡은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이 논문에서는 이러한 차이점은 해당 문서가 작성될 시점의 정세를 반영한 것이며 핵심적인 내용은 1899/1900년의 부대전개계획과 1905년의 비망록 모두 차이가 없다고 봅니다. 필자는 먼저 1898/1900년 계획에서는 프랑스가 공격해 올 가능성을 높게 본 반면 1905년 비망록은 그러할 가능성을 낮게 보았다고 지적합니다. 1905년 시점에서 러시아는 러일전쟁으로 인해 프랑스를 적극적으로 지원할 수가 없었고 프랑스는 러시아 없이 단독으로 행동을 취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프랑스가 방어태세를 취하는 상태에서 독일군은 방어에 필요한 병력을 줄일 수 있기 때문에 1905년 비망록에서는 우익의 병력이 더 많아질 수 있었다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프랑스의 전쟁 계획도 중요한 변수였다고 보고 있습니다. 프랑스는 1899년의 14호 계획에서 독일과의 전쟁에 총 19개 군단과 12개 예비사단을 배정했습니다. 프랑스군이 독불국경에 병력을 밀집 배치하고 그 좌익을 상대적으로 취약하게 내버려둔 상태에서는 우회기동을 큰 규모로 실시하지 않더라도 포위 섬멸을 용이하게 실시할 수 있었습니다. 독일은 이미 1898년에 14호 계획의 상당 부분을 파악할 수 있었고 필자는 이 정보가 슐리펜의  1898년 비망록에 반영되었을 것이라고 봅니다.
하 지만 프랑스가 1903년 3월 15호 계획을 채택하자 상황이 크게 바뀝니다. 이 계획에서 프랑스는 39개 보병사단과 12개 예비사단, 8개 기병사단을 4개 야전군으로 편성했는데 이 중 제4군을 독일군의 벨기에-룩셈부르크 침공을 대비해서 보다 북쪽으로 배치했습니다. 게다가 1905년 시점에서 독일군은 15호 계획에 대해서는 상세한 정보를 입수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독일 정보당국은 프랑스군이 독일군 우익의 돌파에 대응하기 위해 배치한 병력의 규모를 실제 이상으로 과대 평가하고 있었고 이에 맞춰 독일군의 우익을 더 강화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 입니다.
다음으로는 독일의 요새 문제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독일은 프랑스와의 전쟁에 대비해 알자스와 로렌의 방어를 강화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이에 따라 메츠, 디덴호펜(Diedenhofen, 프랑스 명 티옹빌Thionville), 스트라스부르크의 요새가 강화되었습니다. 그리고 1899년 부터는 신형 화포에 대응하기 위해 기존의 요새를 강화하는 공사가 수행되었습니다. 폴리는 국경지대의 요새가 강화되었기 때문에 슐리펜은 그만큼 더 우익의 공세에 필요한 병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고 지적합니다.

다시 요약하면 로버트 폴리는 슐리펜 계획의 기본 개념이 이미 1899/1900년에 확립되어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폴리와 마찬가지로 전통적인 학설을 지지하는 테렌스 홈즈가 슐리펜 계획이 완성된 시점을 1904년 이후로 보는 것과 이 점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 입니다.

2011년 3월 13일 일요일

신이 없다는건 정말 확실하군

내가 신이라면 목사라고 불리는 마귀 새끼들의 혓바닥 부터 뽑아 버렸을 것이다.

할 말과 해서는 안되는 말도 구분 못하는 쓰레기 같은 놈들.

다른 나라의 재앙에 예수를 안 믿어서 벌을 받았다는 말을 공개적으로 하다니.

이런 천박한 개잡놈들이 사회 지도층 대접을 받는 나라에 살고 있다는게 정말 부끄럽다.

2차대전 후반기 소련군 소총병사단의 규모

2차대전 당시 소련은 가공할 동원능력을 발휘해 전쟁 초반의 수많은 참패에도 불구하고 패전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 소련이 전쟁 발발 첫 6개월 동안 입은 인명손실은 끔찍한 수준이었습니다. 1941년 12월 31일까지 입은 인명손실(전사, 포로, 행방불명, 부상)이 무려 4,473,820명이었다고 하니 전쟁 첫 해에 붕괴되지 않았다는게 놀라울 지경이죠.1) 하지만 소련은 전쟁 첫해에 무려 600여만명을 동원하는 괴력을 보여줍니다.2) 글자 그대로 전멸당한 부대만큼 새로운 부대를 다시 만들어 내보내는 방식으로 위기에 대응한 것이지요.

전쟁 초기 이런 총알받이의 역할을 수행한 근간은 바로 소총병 사단(Стрелковая Дивизия) 이었습니다. 유능한 지휘관과 훈련도 부족하고 게다가 기동력 조차 낮은 소총병 사단들은 개전 초반 독일군의 밥이었습니다. 비록 용감히 맞서 싸웠다고는 하나 작전과 전술 단위의 능력이 부족하니 그 결과는 안 봐도 뻔한 것 이었습니다.

하지만 1942년과 1943년을 거치면서 상황은 조금씩 호전되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동안 누적된 인명손실이었습니다. 소련이 독일보다는 가용한 인적자원이 많다고는 해도 1942년에 7,369,278명, 1943년에 7,857,503명이라는 무시무시한 손실을 입었으니 병력 충원에 곤란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3) 그 결과 소련군의 소총병사단은 계속해서 편제병력을 줄여 나갑니다. 1942년 3월 18일의 편제에서 소총병사단의 총병력은 12,725명이었는데 이것이 1942년 7월 28일 편제에서는 10,386명, 1942년 12월 10일 편제에서는 9,435명, 1943년 7월 15일 편제에서는 9,380명으로 줄어듭니다.4) 문제는 편제 병력을 계속 줄여도 병력소모가 커서 편제를 맞추기가 어려웠다는 것 입니다. 1942-43년 동계 공세 기간 중 소련군의 소총병 부대들의 실제 병력은 부대에 따라 편제의 55~95% 수준이었습니다. 그러나 1943년 7월의 하계 전역에서는 편제의 75~80% 정도였고 편제의 90%를 넘어가는 부대는 극히 드문 실정이었다고 합니다.5)

쿠르스크 전투 당시 소련군은 독일군의 대공세를 맞아 방어준비에 심혈을 기울였고 종심깊고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하는데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독일군의 공세를 맞아 병력 보충에 상당한 힘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소총병사단들의 병력 수준은 위에서 언급한 정도에 그쳤습니다. 1943년 7월 5일, 독일 제4기갑군의 공격에 맞선 보로네지 전선군 예하 6근위군 소속 소총병사단들의 병력 규모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6근위군1943년 7월 5일 병력
51 근위소총병사단8,590
52 근위소총병사단8,900
67 근위소총병사단8,003
71 근위소총병사단8,796
89 근위소총병사단8,189
90 근위소총병사단8,417
375 소총병사단 8,647
[표: Валерий Замулин, Курский Излом(Эксмо, 2007), с.904]

이 정도 병력은 당시 수준에서 매우 양호한 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쿠르스크 방어전은 소련의 승리로 끝났지만 그 피해도 상당한 수준이어서 소련군의 1943년 하계 대공세 중 하리코프에 대한 루미얀체프 작전 당시 소련군 수뇌부가 병력 충원에 심혈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소총병사단들의 평균 병력은 사단 당 7,180명으로 편제의 75%에 불과했습니다.6) 장기간에 걸친 소모전의 여파가 나타난 셈이지요.  

소총병사단들은 1943년 부터 시작된 반격에서도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소련군이 1943년에서 1945년 까지 입은 총 병력손실 중 84.23%가, 그리고 사망자는 85.95%가 보병부대에서 발생한 것 이었습니다.7) 1941-42년과 달리 1943년 후반 이후의 소련군은 수십개 사단이 송두리째 전멸당하는 사태는 없었고 그 덕분에 각각의 부대들도 ‘작전 중의 소모’만 감당하면 되는 정도로 상황이 좋아졌지만 문제는 이 ‘작전 중의 소모’도 만만한 수준은 아니었다는데 있습니다.

1943년 9월 20일 보로네지 전선군 예하 38군 소속의 소총사단들의 병력 현황을 예로 들어보면 좋을 듯 싶습니다. 이 당시 보로네지 전선군은 쿠르스크 방어전과 루미얀체프 작전이라는 공세작전을 마치고 추격전을 위해 병력 보충을 어느 정도 받은 상태였습니다.


38군1943년 9월 20일 병력
71 소총병사단3,755
136 소총병사단5,376
163 소총병사단5,045
167 소총병사단8,488
180 소총병사단8,517
232 소총병사단7,138
240 소총병사단8,442
340 소총병사단5,404
[표 : В. Гончаров, Битва за Днепр 1943 г.(Хранитель, 2007), с.549]

이른바 근위 사단이라는 부대라고 해서 별반 나을 것은 없었습니다. 역시 9월 20일 같은 보로네지 전선군 예하 6근위군 소속 근위소총병사단들의 병력 현황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위에서 인용한 쿠르스크 전투 당시의 병력 수준과 비교해 보면 전투 손실을 제대로 보충받지 못한 상태라는 걸 한눈에 알 수 있습니다.


6근위군1943년 9월 20일 병력
51 근위소총병사단4,064
52 근위소총병사단4,977
67 근위소총병사단4,103
71 근위소총병사단5,451
90 근위소총병사단4,651
[표 : В. Гончаров, Битва за Днепр 1943 г.(Хранитель, 2007), с.553]

1944년에 들어가면 상황이 더욱 더 심각해 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바그라티온(Багратион) 작전 당시 소련군의 주공축선에 배치된 소총병사단들의 평균병력은 6,000~6,500명 수준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8)

소련군이 점령된 영토를 해방하면서 그만큼 더 병력자원을 동원할 수 있었지만 장기간의 소모전 때문에 전쟁 말기로 갈수록 소총사단의 병력 규모는 별로 나아지지를 않았습니다. 예를 들면 베를린 작전에 투입된 제1 벨로루시 전선군 예하 47군의 경우 작전 시작직전 병력 5,000명을 넘는 소총병사단이 하나도 없을 정도입니다.(주력 공격부대인데도 말입니다!)9)


47군1945년 4월 5일 병력
185 소총병사단4,203
260 소총병사단4,111
328 소총병사단4,163
80 소총병사단4,210
76 소총병사단4,190
175 소총병사단4,189
82 소총병사단4,055
132 소총병사단 4,597
143 소총병사단4,409

[표: Алексей Исаев, Берлин 45-го(Эксмо, 2007), с.708]

상황이 조금 나은 5충격군(Ударной Армий)의 병력 현황도 47군 보다 조금 나은 수준입니다.


5충격군1945년 4월 10일 병력
230 소총병사단5,032
248 소총병사단5,006
301 소총병사단5,638
89 근위소총병사단5,470
94 근위소총병사단5,823
266 소총병사단5,520
60 근위소총병사단5,348
295 소총병사단5,383
416 소총병사단4,649
[표: Алексей Исаев, Берлин 45-го(Эксмо, 2007), с.710]

최후의 공세를 앞두고 준비를 갖춘 사단의 병력 수준이 편제의 절반 남짓한 수준인 것을 보면 소련군 또한 인력 소모가 극도에 달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 G. F. Krivosheev, Soviet Casualties and Combat Losses in the Twentieth Century(Greenhill Books, 1997), p.94
2) David M. Glantz, Colossus Reborn : The Red Army at War, 1941-1943(University Press of Kansas, 2005), p.540
3) Kreivosheev, ibid, p.94
4) Steven J. Zaloga and Leland S. Ness, Red Army Handbook 1939-45(Sutton, 1998), p.35
5) Glantz, ibid, p.190
6) David M. Glantz, From the Don to the Dnepr : Soviet Offensive Operations, December 1942-August 1943(Frank Cass, 1991), p.223
7) Kreivosheev, ibid, p.219
8) Walter S. Dunn, Jr., Soviet Blitzkrieg : The Battle for Whiter Russia 1944(Lynne Rienner, 2000), pp.41~42
9) Алексей Исаев, Берлин 45-го(Эксмо, 2007), с.708

"Parliament to the Rescue" by Bruce Ackerman

지난번 글 “이집트의 ‘헌정’이라는 유령(Egypt's Constitutional Ghosts)”에 이어 이집트의 국민투표에 대한 글 한편을 번역해 봤습니다. 이번 글은 지난 3월 1일 포린 폴리시 인터넷판에 올라온 브루스 애커만(Bruce Ackerman)의  Parliament to the Rescue입니다. 군부가 내놓은 개혁안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글인데 대안으로 내놓는 것이 유럽식의 의회중심제라는게 흥미롭습니다.

제목은 적당히 의역했습니다.



이집트 군부가 혁명을 제멋대로 이용하기 시작했다. 군부가 선발한 법학자들로 구성된 위원회는 무바라크 실각 이후의 시대에 적합한 정도로 기존의 헌법을 수정하는 방안을 추천했다.  겨우 10일 남짓한 시간과 광범위한 대중의 참여가 배제된 채 이렇게 위에서 부터 아래로의 개혁이 이루어 진 것이다. 개혁안은 대통령 선거에 개별적인 후보자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하고 현직의 임기를 4년 중임으로 제한했다. 하 지만 위원회는 기존 체제에서 가장 심각했던 문제들은 건드리지도 않았으며 근본적인 문제를 피하고 있다. - 이집트가 과거 권위주의를 가능하게 했던 대통령제를 유지해야 하느냐 아니면 새로운 헌법이 유럽식의 의회 민주주의를 모방해야 하느냐?

대통령제는 무슬림 형제단의 손바닥 안에서 놀아날 수도 있다. 무슬림 형제단은 단 하나의 잘 조직된 반대 정파여서 후보자는 대통령 선거가 조기에 실시된다면 20에서 25퍼센트의 표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이집트의 세속 반대세력이 여러 정파로 분열된다면 이들이 결성하는 새 정당은 첫 선거에서 무슬림 형제단에게 크게 뒤쳐질 것이다. 현 시점에서는 오직 이집트의 군부만이 이슬람주의자들의 정권 장악을 막기 위해 개입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군부가 자제하고 선거가  치뤄지도록 허용 한다면 무슬림 형제단의 운명은 세속 정파 후보자들의 선거 경쟁력에 좌우될 것이다.

무슬림 형제단의 지도부는 이러한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서 차기 대통령 선거에 후보를 내지 않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일단 개혁이 실행되면 무슬림 형제단은 이집트의 29개 주 중 15개 주에서 3만명의 유권자로 부터 서명을 받아 후보를 내보낼 수 있게 된다. 설사 무슬림 형제단이 약속을 지킨다 하더라도 형제단은 그들의 목표에 더 부합하는 “독립된” 후보에 힘을 밀어줘 킹메이커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특정 후보가 무슬림 형제단에 우호적인 태도를 취하게 하도록 훼방을 놓는 것은 헌정질서에 위배되는 것 일 뿐 아니라 수많은 이집트 인들을 국가건설과 관련된 모든 문제로 부터 멀어지게 할 것이다.

의회 중심 체제는 이슬람주의자들에게 더 건설적인 방식으로 영향을 끼칠 것이다. 만일 이슬람주의자들이 투표의 4분의 1을 획득하더라도 의석의 4분의 3은 훨씬 더 세속적인 경쟁자들에게 돌아갈 것이다. 세속주의자들은 무슬림 형제단의 지원이 없어도 연립정부를 구성하는데 유리한 위치를 차지할 것이다. 만일 몇몇 이슬람주의자들이 입각하더라도 그들은 세속주의자들의 지지를 얻어야 하기 때문에 목표를 낮추게 될 것이다. 내각의 자리를 둘러싸고 대결하는 것이 정치적인 긴장을 조성할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대통령제가 일으키는 심각한 위기와는 비할바가 아니다.

만약 세속주의자들이 대통령제 하에서 경쟁을 하게 된다면 이들은 무슬림 형제단이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단일 후보로 결집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전략이 성공하더라도 세속주의자들은 그들에게 필요한 민주주의를 실험할 시간을 잃을 것이다. 무바라크 정권하에서 체계적으로 탄압받았기 때문에 이집트의 세속주의자들은 경쟁력 있는 정당을 결성할 여유가 필요하다. 그러나 만약 세속주의자들이 무슬림 형제단의 대통령 후보를 꺾기 위해 단일 후보로 결집하게 된다면 여기서 논하는 이집트의 미래에 장애가 초래될 것이다.

세속주의자들의 문제는 이집트의 “지도자 없는 혁명” 때문에 복잡해져 있다. 다른 시기와 장소에서 조지 워싱턴이나 레흐 바웬사 같은 영웅들은 혁명적 공화국을 이끌 확실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이집트에는 이렇게 핵심적인 역할을 맡을 인물이 아무도 없다. 대통령제 하에서 세속주의자들은 조기에 단일 후보를 선출해야 하는 압력을 받게 될 것이다. 반면 여러 정당이 참여하는 의회 체제는 이집트 인이 정치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대안에 대한 논의는 이제 막 시작이며 여러 지도자들 간에 경쟁이 이루어 지는 것은 자유에 대한 건강한 반응이라는 근본적인 신뢰를 줄 것이다.

의회정치는 매우 험난할 것으로 예상되는 이행기에 이집트에 절실히 필한 안정을 제공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이집트의 (혁명 이후) 첫 번째 대통령은 선의를 가진 혁명의 영웅은 아닐 것이며  지체하지 않고 일련의 강경한 결정을 내려야 할 것으로 보인다. 대통령은 대중의 지지를  순식간에 잃을 수 있으며 이집트는 4년의 재임 기간의 대부분을 고립된 채로 지내는 지도자를 가지게 될 것이다.

의회정치 체제는 지도자 숭배가 아니라 지도자들간의 연합을 이끌어 내어 서로 다른 연합 정당들이 이집트 사회의 다른 구성원들과 접촉할 수 있도록 해 줄 것이다. 만약 첫번째 연립정부가 대중의 지지를 잃는다면 이들은 4년이나 5년씩 버틸 수 없을 것이다. 이들은 신뢰가 없어 표를 잃을 것이며 다른 연립 정부가 그 자리를 차지하거나 의회 자체가 해산될 수도 있다. 그리고 정당들은 유권자들의 새로운 요구에 응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조기 선거에 문제가 많다 하더라도 인기 없는 대통령이 적대적인 유권자들을 상대로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투쟁하는 것 보다는 나을 것이다.

헌정정치라는 계획은 만병통치약이 아니다. 현명하고 민주적인 지도자와 시민의 참여가 훨씬 더 중요한 것이다. 하지만 잘못된 계획은 좋은 정치가 등장하는 것을 더 어렵게 할 수 있다.

군부는 그들의 “개혁안”을 국민투표에 붙이려 하지만 이것은 단지 잘못된 소통 방식일 뿐이다. 한 차례의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를 통해 이집트의 다음 독재자를 뽑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현재 체제의 위험성은 무시하기에는 너무나 심각한 것이다. 만약 이집트의 현재 지도부가 활기찬 민주주의의 건설을 진심으로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다면 다당제 의회정치 체제를 도입하는 방향으로 시급히 움직여야 할 것이다.

그런데 사실 저는 여러 정파가 대립하는 상황에서 내각제가 더 좋은 대안이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물론 이집트의 대통령제가 장기독재를 가능하게 했던 제도이긴 합니다만. 어쨌든 현재 이집트 군부가 잔머리를 굴려서 땜질만 하는 선에서 마무리를 하려는 것은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결과가 어찌 될지 지켜봐야 겠지요.

2011년 3월 12일 토요일

사이비 역사학의 영향력이 정말 크긴 크군

며칠 전 아는 선생님 한 분과 식사를 하다가 교육과학기술부에 있는 간부 중 꽤 많은 숫자가 환단고기로 대표되는 사이비 역사학에 빠져있다는 이야길 들었습니다. 이 때문에 교육과학기술부의 예산 중 일부가 사이비 역사학자들에게 돌아간다고 하더군요;;;;  생각해보면 국회의원 중에도 사이비 역사학에 심취한 자들이 더러 있으니 관료 중에 환빠가 더러 있다해도 놀랄일은 아닙니다만 그들이 자신들의 지위를 이용해서 국가 예산을 낭비하고 있다니 기가 차는 노릇입니다.

사이비 역사학의 영향력은 정말 큰데 초기의 사이비 역사학자 중 어떤 이는 1960년대에 윤보선의 집에서 고위 정치인들에게 역사학(?!?!) 강의를 하기도 했다죠. 뭐, 사회적인 지위가 반드시 지적인 수준과 일치하라는 법은 없습니다만 사이비 역사학의 광범위한 영향력을 볼 때마다 섬뜩함을 느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