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2월 6일 일요일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7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연재에 앞서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0

1. 테렌스 주버vs테렌스 홈즈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1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2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3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4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5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6


안녕하세요.

진도가 참 안나가는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입니다. 아직도 테렌스 주버와 테렌스 홈즈의 논쟁을 다루고 있는데 2010년 말에 테렌스 주버가 테렌스 홈즈를 비판하는 논문을 또 냈습니다. 한마디로 이 논쟁은 여전히 진행 중이고 언제 끝날지 아직 알 수 없습니다. 초장기 연재가 되겠군요. 일단 지금까지 나온 논문과 책을 소개하는 것 만으로도 시간이 꽤 걸릴 것 같습니다. 제가 매우 게으르다는 점도 문제군요.

2003 년 부터는 홈즈 외에도 전통적인 학설을 지지하는 학자들이 대거 참여했기 때문에 논쟁의 범위가 넓어집니다. 하지만 이 연재물에서는 논쟁을 시간 순서대로 다루기 보다는 개별 연구자별로 이야기를 진행하려 합니다. 일단은 현재까지 진행 중인 테렌스 주버와 테렌스 홈즈의 논쟁을 마무리 짓고 다음 논쟁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7

지난번 글,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6’에 서는 테렌스 주버의 재반론인 “Terence Holmes Reinvents the Schlieffen Plan – Again’”을 소개했습니다. 테렌스 홈즈는 주버의 반론에 대해 “Asking Schlieffen: A Further Reply to Terence Zuber”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대응합니다.

먼저 지난번 글을 간략하게 요약하고 넘어가도록 하지요.

테렌스 주버는 “Terence Holmes Reinvents the Schlieffen Plan – Again”에서 홈즈의 견해를 다음과 같이 비판했습니다.

1. 테렌스 홈즈의 주장에 따르면 슐리펜 계획에서 독일군 주력, 즉 독일군 우익이 파리를 우회해서 포위하는 것은 프랑스군 주력이 조직적으로 후퇴할 경우 취하는 최악의 경우였다. 하지만 슐리펜 계획에 대한 기존의 학설들은 파리 서쪽으로 우회 포위하는 것이 슐리펜 계획의 핵심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2. 테렌스 홈즈는 슐리펜의 1905년 비망록에서 당시 편성되지 않은 가상의 부대들이 존재하는 것에 대해 전시에 편성되는 부대라고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홈즈가 예로 든 21, 22군단과 근위예비군단은 이미 1902년에 서류상으로 존재하고 있었으며 당시 독일군 내부에서는 전쟁이 발발하더라도 이 부대들을 편제에 맞춰 편성하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또한 슐리펜은 항상 독일군의 병력이 부족하다는 점을 심각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전쟁이 발발할 경우 파리 서쪽으로 대규모 우회기동을 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3. 러일전쟁에도 불구하고 러시아군은 숫적으로 위협적인 규모였으며 슐리펜은 이점을 심각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사실상 동부전선을 비워두고 서부에 주력을 집중시키는 것은 어려운 문제였다.

4. 홈즈는 1904년과 1905년의 서부전선에 대한 참모부연습을 잘못 해석하고 있다. 참모부 연습에서 결전이 벌어지는 지역은 아르덴느와 로렌 지역이다. 이 시기의 참모부연습에서 대규모 우회 기동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5. 슐리펜의 1905년 비망록과 소몰트케가 입안한 계획은 유사하지 않다.


홈즈는 War in History 10-4에 기고한 “Asking Schlieffen: A Further Reply to Terence Zuber”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이러한 주버의 비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반박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슐리펜이 작성한 1905년 비망록에서 주력부대가 파리 서쪽으로 우회기동하는 것이 필수적인 요건이냐의 문제입니다. 주버는 프랑스군이 선제공격에 나선다면 독일군 주력이 파리 서쪽으로 대규모 우회기동을 실시할 필요가 없었겠지만 슐리펜은 그럴 가능성에 부정적이었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홈즈는 슐리펜이 프랑스군의 예상 반응에 대해 여러가지 예측을 하고 있었다고 봅니다. 하나는 프랑스군이 수세로 일관하되 독일군 주력이 메지에흐(Mézières)-덩케르크 선에 도달할 경우 공세를 취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독일군 주력이 엔(Aisne)-랭스(Rheims)-라 페레(La Fère)를 잇는 선에 도달했을 때 측면의 위협을 피하기 위해 라 페레 방면으로 반격을 실시하는 것 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번째가 프랑스군이 조직적으로 철수를 단행할 경우인데 이때는 파리 서쪽으로 대규모 우회기동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슐리펜은 프랑스군이 공세를 취해 최대한 독불국경 가까운 곳에서 프랑스군 주력을 섬멸할 기회를 포착하길 원했으며 프랑스군이 새로운 방어선 까지 퇴각하는 것은 독일에게 불리한 상황으로 여겼다고 지적합니다.
그리고 주버는 슐리펜 계획이 파리 서쪽으로 우회 포위를 실시하는 것 뿐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슐리펜의 1905년 비망록에서 독일군 주력이 우아즈(Oise) 강을 건너는 경우도 상정하고 있었던 것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고 지적합니다.


위의 지도에서 알 수 있듯 독일군 주력이 우아즈 강을 도하할 경우 파리 동쪽으로 우회기동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슐리펜이 가장 선호한 것은 프랑스군의 주력이 공세에 나서고 독일군 주력은 우아즈 강을 건너 프랑스군 주력을 포위하는 것 이었습니다. 그리고 프랑스군 주력이 방어에 주력하면서 조직적으로 철수한다면 세느강 하류를 도하해 파리 서쪽으로 대규모 우회기동을 실시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겁니다.

두 번째는 주버가 “Terence Holmes Reinvents the Schlieffen Plan – Again”에서 상당한 분량을 할애해 비판한 독일군의 가용병력 문제입니다. 홈즈는 먼저 주버가 지적한 Kriegskorps문제는 부분적으로 타당한 비판이라고 인정합니다. 자신이 푀르스터의 연구를 잘못 이해했지만 주버도 푀르스터의 주장과 자신이 잘못 인용한 푀르스터의 견해를 혼동했다는 것 입니다. 홈즈는 다시 한번 푀르스터의 주장을 소개합니다. 푀르스터가 말하고자 한 것은 1905/06년 부대전개계획에는 52개 현역사단과 20개 예비사단이 있었으나 1906/07년 부대전계계획에는 52개 현역사단과 27개 예비사단으로 가용병력이 늘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푀르스터의 주장을 교차검증할 사료가 없다는 주버의 비판에 대해서는 독일의 1차대전 공간사(Der Weltkrieg 1914 bis 1918)중 전시동원을 다룬 Kriegsrüstung und Kriegswirtschaft 1권을 인용하여 반박합니다. 독일의 공간사에 따르면 독일군의 예비사단이 1902년에서 1910년 사이에 27개 사단으로 증가했으며 이것은 푀르스터의 주장과 일치한다는 것 입니다. 또 한 슐리펜은 1905년 비망록에서 독일군이 동원 가능한 병력이 971개 대대에 불과하다고 지적하고 있는데 1906/07년 부대전개 계획에 명시된 52개 현역사단과 27개 예비사단을 대대로 환산하면 970개 대대가 되므로 푀르스터의 주장은 타당하다는 것 입니다.
한편, 1905년 비망록에서 1906/07년 부대전개계획 보다 2개 사단이 더 많은 53개 현역사단과 28개 예비사단을 명시한 것에 대해서는 전시동원이 이루어질 경우 추가로 편성되는 사단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먼저 1개 현역사단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1904년에 2개의 Kriegskorps가 해체되면서 여기에 소속될 여단과 연대 일부는 남아서 다른 군단에 분산 배속되었는데 이러한 여분의 부대를 유사시 통합하면 신규 사단이 만들어진다는 것입니다. 먼저 알자스의 15군단은 1개 보병연대를 더 가지고 있었고 로렌의 16군단은 1개 보병여단을 더 가지고 있었는데 이것들을 통합하면 1개 사단을 편성할 수 있다는 것 입니다. 그리고 슐리펜의 1905년 비망록에는 전시에 16군단 예하에 43사단이 편성되는 것으로 나와있다는 점도 함께 지적합니다. 그리고 1개 예비사단에 대해서는 예비 보병대대들을 통합해 편성하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물론 슐리펜은 이 정도 병력도 파리 동쪽으로 대규모 우회 기동을 하는데는 부족하기 때문에 전시 동원이 시작되는 대로 8개의 보충군단(Ersatzkorps)를 편성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주버는 슐리펜이 8개의 보충군단이 편성되도 병력이 여전히 부족할 것으로 생각했으며 그렇기 때문에 슐리펜의 1905년 비망록은 실제 작전계획으로 볼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홈즈는 여기에 대해 슐리펜 비망록에 기술된 내용을 바탕으로 반론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먼저 공세초기에는 우익에 23개 현역군단이 투입되고 공세가 진행됨에 따라 좌익에 있던 2개 군단이 추가로 우익으로 이동합니다. 그리고 진격이 계속되어 우아즈강에 도달할 무렵 후방은 예비군단과 향토여단(Landwehr-birgade)이 담당하게 됩니다. 우선 안트베르펜 공격에 최소 5개의 예비군단을 투입하고 주력부대가 공격하지 않고 지나간 요새들을 견제하는데 14개의 향토여단을 투입합니다. 그리고 주력 부대의 측면과 후방을 엄호하는데 2개 예비군단과 1개 예비사단, 2개 향토여단을 배정하는 것 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다시 세느강 하류를 도하해 파리 서쪽으로 우회기동을 실시하려면 병력이 더 필요합니다. 홈즈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위에서 언급한 8개의 보충군단을 더 편성한다면 이중 6개 군단을 파리 봉쇄에 사용하고 주력인 현역부대들은 우회하면서 포위망을 완성할 수 있다는 것 입니다. 주버는 슐리펜이 8개의 보충군단을 적시에 동원할 수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고 주장하는데 홈즈는 슐리펜이 의문을 가진 것은 기술적으로 보충군단 중 몇개를 우익에 투입할 수 있는지의 문제였다고 봅니다. 그리고 슐리펜은 8개의 보충군단이 편성된다면 세느강 하류를 도하해 파리 동쪽으로 우회 기동하는데 필요한 병력을 확보할 수 있다고 보았다고 강조합니다.
한편, 주버는 1905년 비망록이 사실상 슐리펜이 총참모장에서 퇴임한 이후 작성되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사실상 부대 운용에 대한 권한이 없는 슐리펜이 보충군단 편성과 같은 신규 부대 편성에 관여할 수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하지만 홈즈는 1905년 비망록에 명시된 8개의 보충군단 편성은 바로 1904년 참모부연습에서 편제상에 없던 신규부대를 동원한 것과 논리적으로 연결된다고 반박합니다. 즉 슐리펜은 이미 현역시절 부터 유사시 부족한 병력을 신규부대 동원으로 충당한다는 구상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것이 고스란히 1905년 비망록, 즉 슐리펜 계획에 반영됐다는 겁니다.

세 번째로는 양면전쟁 문제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주버는 “Terence Holmes Reinvents the Schlieffen Plan – Again”에서 비록 러일전쟁으로 러시아군의 취약점이 폭로되었지만 러시아군은 여전히 유럽전선에 대규모의 병력을 투입할 능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사실상 동프로이센을 텅 비워두고 서부전선에 전력을 집중하는 계획을 세우는 것은 비현실적이라고 지적했습니다. 홈즈는 이에 대해 독일군의 부대전개계획을 예로 들어 반박하고 있습니다. 주버는 빌헬름 디크만(Wilhelm Dieckmann)의 연구에 크게 의존해 슐리펜 계획이 실제 작전계획이 아니라는 주장을 펴고 있습니다. 디크만의 연구에 따르면 독일군의 부대전개계획은 서부전선에 대한 Aufmarsch I과 동부전선에 대한 Aufmarsch II 두가지가 있습니다. 이중 서부전선에 대한 전개계획 I에서는 동프로이센에 10개 사단을 남기고 주력을 서부에 집중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주버는 슐리펜이 동부전선에 대한 부대전개계획 II를 중시했다고 강조했습니다. 하지만 디크만의 연구는 1903/04년의 부대전개계획 까지만 다루고 있습니다. 양면전쟁 문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러일전쟁의 결과가 독일군의 부대 전개계획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 이므로 디크만의 연구는 한계가 있습니다. 홈즈는 주버도 인용한 1905/06년의 계획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이 계획에서는 양면전쟁이 발발할 경우 동부전선에 10개 사단, 서부전선에 62개 사단을 배치하지만 전쟁이 서부전선으로 한정될 경우에는 72개 사단을 모두 서부전선에 투입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1905년 비망록, 즉 슐리펜 계획에서 81개 사단을 모두 서부전선에 투입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러일전쟁 이후의 부대전개계획 I을 바탕으로 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슐리펜은 러일전쟁의 결과 러시아군이 적극적인 공세로 나설 역량이 감소했다고 생각했으므로 프랑스는 전쟁이 시작되면 방어에 주력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는 것 입니다.

네 번째로는 1905년의 참모부연습에서 독일군 우익의 역할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주버는 1905년의 참모부연습에서는 결전이 아르덴느와 로렌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슐리펜 계획과 유사한 요소가 나타나지 않는다고 주장했습니다.  홈즈는 이 주장에 대해서 뵈티허(Friedrich von Boetticher)가 1930년에 쓴 ‘근대전쟁의 스승(Der Lehrmeister des neuzeitlichen Krieges)’이라는 소논문을 인용해 반박하고 있습니다. 뵈티허의 연구에 따르면 슐리펜은 참모부연습에서 독일군을 맡아 프랑스군이 로렌으로 공격해 올 경우 우익에서 소수의 병력을 차출해 좌익을 증원하는 한편 나머지 병력으로 우회기동을 실시, 랭스와 베르덩 사이를 돌파했습니다. 그리고 프랑스군 주력이 공세에 나서지 않는 경우에는 우익의 주력 부대로 공세를 감행, 파리 동쪽으로 대규모 우회기동을 실시해 작전 56일 차에 프랑스군 주력을 격파하는 것으로 연습을 종료했습니다. 홈즈는 여기서 첫번째 연습은 바로 우아즈 강을 도하하는 슐리펜 계획의 첫번째 안과 동일한 것이고 두번째 연습은 바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슐리펜 계획, 즉 비망록에 명시된 두번째 안과 동일한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그리고 1905년 11~12월에 슐리펜이 총참모장으로서 마지막으로 실시한 워게임에 대한 논평에 대한 반박도 이어집니다. 주버는 홈즈가 문법적인 문제로 말꼬리 잡기를 한다고 비판했습니다. 홈즈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재반박합니다. 슐리펜은 마지막 워게임을 실시할 당시 양면전쟁의 가능성은 높지 않을 것으로 보았습니다. 일단 주버는 1905년 겨울의 워게임이 독일 단독으로 영국, 프랑스, 러시아와 양면전쟁을 벌이는 것으로 해석했는데 이것 자체가 오독이라는 것 입니다. 슐리펜은 워게임에서 독일이 고립된 상태로 양면전쟁을 치르는 것이 아니라 오스트리아의 지원을 받을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또한 슐리펜은 워게임에서와 마찬가지로 동부전선에서 대규모의 러시아군을 상대하는 것은 러일전쟁의 영향으로 당분간 없을 것으로 보았습니다. 물론 홈즈는 슐리펜도 러시아군이 점차 러일전쟁의 피해에서 회복될 것으로 보고 있었지만 1905년 겨울의 워게임을 실시할 당시에는 양면전쟁의 가능성을 낮게 보았던 것이라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는 슐리펜 계획과 소(小)몰트케의 계획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주버는 양자 사이에 유사점이 적다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홈즈는 몇가지 사례를 들어 이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먼저 1914년 8월 27일 제1군 사령관 클룩(Alexander von Kluck)에 내려진 명령은 진격방향을 남서쪽에서 보다 서쪽으로 돌려 루앙(Rouen)과 망테(Mantes)를 잇는 선으로 진출, 세느강에 도달하라는 것 이었는데 이것은 파리를 서쪽에서 우회하려는 의도가 명백하다는 것 입니다. 홈즈는 주버가 이것을 소몰트케가 파리 자체를 포위하려는 의도가 있었다는 것으로 해석하려 한다고 지적합니다.(파리를 우회하는 것과 그 자체를 포위하는 것은 명백히 다른 것이죠)
그리고 소몰트케는 1911년에 작성한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평에서 국경지대의 프랑스 요새선을 무력화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우익을 최대한 강화해 벨기에를 통해 공격하는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이것은 루덴도르프가 전후에 남긴 저술에서도 확인되는데 이에 따르면 소몰트케는 1914년에 슐리펜이 계획한 것과 마찬가지로 우익에 주력을 집중해 벨기에를 통해 공격할 생각을 굳히고 있었다고 합니다. 소몰트케가 슐리펜과 차이를 보인 것은 네덜란드를 공격하지 않는 것 정도였는데 소몰트케는 네덜란드까지 침공할 경우 병력이 분산되어 그만큼 우익의 타격력이 감소할 것으로 생각했다고 합니다. 또한 소몰트케는 전후에 펴낸 회고록에서도 이점을 거듭해서 강조했습니다. 물론 전쟁 초기 소몰트케는 로렌 지방에 슐리펜의 원래 구상 보다 6개 사단이 더 많은 16개 사단을 배치해 우익을 다소 약화시키기도 했으며 프랑스군 주력이 알자스-로렌으로 침공해 올 경우 우익의 상당부분을 이 방면으로 돌릴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홈즈는 소몰트케가 실질적으로는 우익에 주력을 집중하는 기본 개념은 유지하고 있었다고 강조합니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강화된 독일군 좌익은 우익의 주공을 지원하기 위해 정면의 프랑스군을 능동적으로 붙잡아두는 임무를 가지고 있엇습니다.
한편, 주버는 독일군의 병력이 크게 부족한 상태에서 어떻게 슐리펜의 계획을 그대로 수행할 수 있었겠는가 하는 의문을 꾸준히 제기하고 있습니다. 홈즈는 병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슐리펜의 원래 계획 처럼 파리를 봉쇄하는 것은 실시할 수 없었고 독일군 우익의 임무는 프랑스군 주력이 후방의 위협을 느껴 (유사시 강력한 보루가 될 수 있는) 파리를 버리게 하고 남동쪽으로 몰아 내는 것 으로 변경되었다고 지적합니다. 그렇지만 슐리펜의 기본적인 개념은 유지되었다는 것이 홈즈의 주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