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3월 2일 금요일

짜증

선거를 앞두고 서점에 깔리는 몇몇 책을 보니 황당하기 짝이 없다. 그런 쓰레기들에 따르면 우리는 자애로운 노짱의 통치를 받다가 이명박이 통치하는 지옥에 살게 된 모양이다.  몇년 되지도 않은 시절의 사실에 대한 왜곡과 기만이 넘쳐나는 요즘 꼴을 보다보니 속이 뒤집히지 않을 리가 있겠나.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노무현 귀신을 팔아먹는 쓰레기들에겐 쇼스타코비치의 일갈이 적절할 듯. 휴머니스트라는 단어를 수괴급 노빠로 대체하면 딱 맞겠다.

나는 이런 질문을 자주 받는다. “당신은 왜 이러저러한 서류에 서명했습니까?” 그러나 수백만의 인명이 희생된 백해 운하의 건설을 왜 찬미했는지 말로(Andre Malraux)에게 이유를 물어본 사람이 있었던가? 아니다. 아무도 묻지 않았다. 정말 유감이다. 사람들이 질문을 더 자주 해야 하는데. 어쨌든 이런 신사들이 대답하는데 장애물은 하나도 없지 않은가. 그때나 지금이나 이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면 저 유명한 휴머니스트 포이트벵거(Lion Feuchtwanger)의 경우는 어떤가? 나는 그가 쓴 책 『1937년의 모스크바』를 읽고 극도로 불쾌했었다. 책이 출판되자 마자 스탈린은 그것을 번역시키고 대규모로 출판하도록 지시했다. 책을 읽으면서 저 찬양받는 휴머니스트에 대한 경멸과 역겨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포이트벵거는 스탈린이 단순한 사람이고 선한 의지가 충만하다고 썼다. 나는 한때 포이트벵거가 눈에 무엇이 씌웠나 보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중에 다시 읽어보니 그 위대한 휴머니스트는 고의로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내가 알게 된 사실은 굉장한 것이다.” 그는 선언했다. 그가 알게 되었다는 것은 모스크바에서는 정치 재판이 필요하며 또 훌륭한 재판이라는 것 이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그런 재판이 민주주의의 발전에 도움이 된다. 이럴 수가 있을까. 그런 말을 하려면 바보라는 사실만으로는 부족하다. 악당이어야 하고 또 유명한 휴머니스트이기도 해야 한다.

그에 비해 명성이 조금도 덜하지 않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의 경우는 또 어떤가. 그는 이런 말을 했다. “나는 독재자라는 말에 겁먹지 않는다.” 당연한 일이지. 쇼가 겁낼 필요가 있을까? 그가 살던 영국에는 독재자가 하나도 없었으니까. 영국의 마지막 독재자는 크롬웰이었지 싶다. 쇼는 그냥 독재자를 구경하러 왔을 뿐이다. 소련에서 돌아가는 길에 쇼는 이렇게 말했다. “러시아 사람들이 굶주린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모스크바에서만큼 식사를 잘한 곳이 없는데?”
바로 그때 수백만이 굶주리고 있었고 농부 수백만은 이미 굶어 죽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쇼의 말을 듣고 그의 재치와 용기에 환호를 보냈다. 그에 관한 내 입장은 확고하다. 그가 유명한 휴머니스트라고 내 교향곡 제7번의 악보를 보내 주라는 억지 명령도 받았지만 말이다.

또 로망 롤랑의 경우는 어떤가? 그는 생각만 해도 구역질이 난다. 이런 유명한 휴머니스트들이 내 음악을 찬양했기 때문에 특히 더 속이 뒤집힌다. 쇼도 그렇고 롤랑도 그렇다. 그는 『멕베스 부인』을 특히 좋아했다. 나는 은하계처럼 빛나는 진실한 문학과 음악 애호가의 스타 군단 중에서도 특히 더 유명한 이 휴머니스트를 만나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러나 나는 가지 않았다. 아프다는 핑계를 댔다.

한 번은 이런 의문에 괴로워 한 적이 있었다. 왜? 왜? 왜 이런 사람들이 전 세계에 거짓말을 하는가? 왜 이런 유명한 휴머니스트들이 우리에 대해, 우리의 생명과 명예와 존엄성에 대해서는 조금도 유념하지 않는가? 그러다가 갑자기 침착해졌다. 우리 생각을 조금도 하지 않겠다면 하지 말라고 해. 지옥에나 가라지. 그들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유명한 휴머니스트로서의 쾌적한 생활이다. 이는 그들을 진지한 사람으로 여길 수 없다는 뜻이다. 내 눈에는 그들이 어린아이나 마찬가지다. 버릇 나쁜 어린이. 푸쉬킨이 흔히 말하듯이 그런 애들은 천차만별이다.
(중략)

여기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분명하다. 유명한 휴머니스트들과의 우정이란 있을 수 없다. 우리, 그들과 나는 극단적으로 정반대의 위치에 있다. 그들 누구도 믿지 않는다. 그들 중 어느 누구도 내게 좋은 일을 해 준 적이 없다. 그들이 내게 질문할 권리가 있다고 인정하지 않는다. 그렇게 할 도덕적 권리도 없고 감히 내게 설교할 수도 없다.
나는 그들의 질문에 한 번도 대답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절대 그러지 않을 것이다. 그들의 설교는 한 번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절대 그러지 않을 것이다. 나는 흐릿하고 끔찍한 내 인생의 씁쓸한 경험으로 무장되어 있다. 내 제자들이 나의 의심을 물려받았다는 점을 생각하면 기분이 씁쓸하다. 내 제자들도 유명한 휴머니스트들을 신뢰하지 않는데, 그런 점에서 그들은 옳다.
정말 불행한 일이다. 제자들이 유명한 휴머니스트 중에서 누구든지 신뢰할 만한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면 정말 기뻤을 텐데. 꽃이나 형제애 또는 평등과 자유 아니면 유럽 축구 선수권이나 기타 고상한 주제에 관해 함께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났더라면. 그러나 그런 휴머니스트란 태어나지도 않았다. 불한당은 지나칠 만큼 많지만 그런 작자들과는 이야기하고 싶은 기분이 아니다. 그들은 몇 푼의 달러나 검은 캐비어 한 통에 당신을 싸구려로 팔아 넘길 것이다.
그래서 우수한 내 제자들이 나의 경험을 본받아 휴머니스트들과의 친교를 삼가는 모습을 보고 서글픈 만족감을 느끼는 것이다. 외로워지지 않도록 개라도 기르라고 진심으로 권한다.
여러분, 휴머니스트들을 믿지 말라. 예언자들도 믿지 말고 유명인사들도 믿지 말라. 그들은 돈 한 푼 때문에 당신을 속일 것이다. 자기 일을 성실하게 하라.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지 말고 그들을 도와 주도록 노력하라. 단번에 전 인류를 구원하려고 애쓰지 말라. 먼저 한 사람을 구하려고 노력하라. 그 편이 훨씬 더 어렵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한 사람을 도와주는 일은 지극히 어렵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어렵다. 때문에 전 인류를 한꺼번에 구하려는 유혹에 빠지는 것 같다. 그러다 보면 불가피한 일이기는 하지만 그냥 수백만 명만 없애면 모든 인류의 행복이 보장될 것 같이 생각하게 된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 그리 많은 수도 아니다.

솔로몬 볼코프 엮음/김병화 옮김, 『증언 :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회상록』, (이론과 실천, 2001), 336~344쪽

그런데 버나드 쇼는 노무현 귀신을 팔아먹는 쓰레기들과 비교하기엔 좀 과분한 것 같기도 하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