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2월 29일 목요일

러시아 정부의 과거사 정책을 비판하는 모스크바 타임즈 기사


모스크바 타임즈에 재미있는 기사가 하나 올라왔습니다.




푸틴 행정부의 과거사 정책을 비판하는 기사입니다. 작년에 화제가 되었던 '판필로프의 28 근위대원'과 같이 소련시절 날조된 영광의 역사를 부여잡으려는 러시아 정부의 태도를 비판하고, 자료 공개를 통해 진실을 탐구하려는 연구자들의 활동을 다루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고르바초프-옐친-푸틴 시기를 거치면서 소련-러시아 정부의 기밀 공개 정책이 변화하는 과정을 설명하는 부분이 재미있습니다.

재미있는 기사네요. 시간이 되면 번역을 해 보겠습니다.

2016년 12월 26일 월요일

소련 전차부대가 소련-핀란드 전쟁에서 얻은 전훈

지난번 스탈린 동지의 현대전 강의라는 포스팅에서 1940년 4월 14일 부터 17일 사이에 모스크바에 열린 핀란드전 전훈을 평가하고 분석하기 위한 주요 지휘관 회의에 대해 언급했었습니다. 이 회의에서는 다양한 주제가 논의되었는데, 역시 가장 중요한 것이라면 기갑부대의 운용에 관한 재검토라고 생각됩니다. 전차의 운용 문제는 여러 차례 간헐적으로 논의됐는데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4월 14일과 17일에 있었던 회의라고 생각됩니다. 여기서는 전차의 분산운용에 대한 비판과 대안이 논의되었습니다.

번역을 하다보니 녹취록이 불완전하게 작성됐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내용이 매끄럽게 연결되지 않는 부분이 더러 있죠.


먼저 1940년 4월 14일 저녁 회의에서 있었던 관련 발언을 인용해 봅니다.



시니친Синичкин(북서전선군 전차-장갑차 병과 정치위원): 여러분. 이 회의에서 몇가지 문제를 제기하는게 저의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제기하고자 하는 문제는 서부 우크라이나 사태(폴란드 병합)과 핀란드와의 전쟁에서 있었던 전차 및 장갑차 부대의 운용에 관한 것 입니다. 
먼저 전차와 보병간의 협동이 잘 이루어지지 못했던 점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전차 부대에 복무했습니다만 대규모 훈련에서 보전협동이 제대로 이루어진 것을 한번도 보지 못했습니다. 제 생각에 보전협동을 제대로 수행하고자 한다면 전차여단을 소총병군단에 배속시키고 각 군단장에게 보전협동을 가르쳐야 한다고 봅니다. 이렇게 한다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것 입니다. 소총병사단에 배속된 T-26이나 T-38을 장비한 전차대대는 효용성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단에 배속된 전차대대는 정비 부대가 없거나 보전협동을 총괄할 주체가 없어 전투력이 형편없었습니다. 제대로 통제할 수단이 없는 상태에서 전차를 분산 운용하는 것은 쓸모가 없습니다. 소총병사단 예하의 전차대대는 폐지해야 합니다. 

다음 문제는 전차 및 장갑차 부대의 지휘 체계입니다. 군관구와 전선군, 야전군 단위에서 전차부대를 올바르게 운용하지 못했습니다. 전차-장갑차 병과 총국Автобронетанкового управления РККА은 감독 및 검열 업무를 담당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차부대가 충분한 준비태세를 갖추기는 어렵습니다. 제 생각에 이러한 구조하에서는 부대에 대한 명령권과 명령을 감독할 권한이 명확하지 않습니다. 어느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다는 느낌입니다. 붉은군대와 전선군, 야전군, 군관구의 전차부대 행정 구조는 공군의 예를 따르는 것이 좋다고 생각됩니다. 이렇게 하면 전차부대에 대한 지휘를 강화하고 훈련을 총괄하여 통제할 수 있다고 봅니다. 지휘와 훈련을 담당하는 부서는 전차 부대의 현황에 관해 해당 군사위원회와 지휘관에 보고할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인사 문제에 대해서 몇마디 더 하겠습니다. 여러 작전에서 전차 부대가 수행한 역할에 대해서는 다들 잘 알고 계실겁니다. 하지만 전차부대의 간부는 제대로 선별되지 못했습니다. 예를들어 레닌그라드 군관구에서는 예하 전차부대들의 인사 교체를 대위 한명에게 맡겼습니다. 이 대위가 어떻게 혼자서 간부들을 파악할 수 있겠습니다. 그는 전차부대 간부들을 제대로 알지 못했고 이들에 대해 검토하지도 못했습니다. 결국 지휘관을 선정하는데 혼란이 초래됐습니다. 제 생각에는 전차-장갑차 병과 총국장이 전차부대의 인사권을 가지는 것이 대안이라고 봅니다. 이게 훨씬 효율적이고 합리적입니다. 

다음 문제는 전차에 관한 것 입니다. 여러분. 아군의 전차는 대구경 포탄은 커녕 일반적인 37mm 포탄 조차 막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입니다. 이제 우리는
적의 대전차 화력을 감안해, 대구경의 주포와 더 두꺼운 장갑을 갖춘 전차를 도입해야 할 때 입니다. 

스탈린: T-26 전차의 45mm 주포*의 성능이 부족하다는 겁니까? 

시니친: 충분합니다. 하지만 KV전차는 45mm 주포*가 적합하지 않습니다. 

스탈린: 75mm 급 주포*라면 충분하겠습니까? 

시니친: 예. 그 정도라면 충분합니다. 신형전차들을 최대한 빨리 배치해야 합니다. 

1940년 4월 14일 저녁 회의, Alexander O. Chubaryan and Harold Shukman(ed.), Stalin and the Soviet-Finnish War 1939~40, (Routledge, 2013), pp.24-25에서 재인용.



* - 원 영어번역문에는 '장갑(Armor)'으로 되어있는데 문맥상 전차의 무장을 뜻하는 것이라고 판단해서 '주포'로 옮겼습니다.

1940년 4월 17일에 있었던 마지막회의에서는 당시 붉은군대 전차-장갑차 병과 총국의 국장이었던 파블로프Дми́трий Григо́рьевич Па́влов가 핀란드전 시기 기갑부대의 전훈에 대한 총괄 평가를 했습니다. 여기서 전차부대의 분산운용을 강력히 비판하고 집중운용을 위해 편제를 개편할 것을 주장했습니다.


쿨릭Григо́рий Ива́нович Кули́к(1급 야전군지휘관, 포병 총감, 회의 진행자): 파블로프 동지의 발언이 있겠습니다. 

파블로프Дми́трий Григо́рьевич Па́влов(2급 야전군지휘관, 붉은군대 전차-장갑차 병과 총국장): 이번 전쟁에는 우리가 보유한 모든 종류의 전차를 투입했습니다. 이에 대해 어떤 평가를 해야 겠습니까? 기존에 우리가 사용하던 전차들은 국내에서 개발된 것들이 아니었습니다. 이것들은 영국과 미국에서 이렇다 할 대전차무기가 없어 기관총이 강력한 위력을 발휘하는 식민지전쟁에 쓰려고 개발한 것들을 개량한 것에 불과했습니다. 
여러분은 아군 전차의 운용 경험과 그 실상에 대해 잘 아실 것 입니다. 저는 제7군 소속 전차부대 전체와 제13군 소속 전차부대 일부의 작전을 검토했습니다. 제34전차여단과 다수의 전차를 보유했던 한 전차대대가 전멸한 일을 구체적으로 조사하기 위해서 관련된 자료들을 검토했습니다. 여기서 도출한 결론은 다른 부대의 사례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핀란드와의 전쟁 중 전차부대 지휘관들은 무지한 행동을 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이로 인해 나쁜 결과가 초래되었음을 솔직히 인정할 수 밖에 없습니다. 작년 12월 제138소총병사단이 실시한 보전협동작전과 최근 전선에 투입됐던 제100소총병사단의 보전협동작전을 비교하면 낮과 밤 만큼이나 큰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지난 12월에 제138소총병사단을 지휘한 사단장은 허세가 심한 겁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사단의 각 병과간 협동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습니다. 반면 제100소총병사단의 사단장은 매우 겸손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전차 부대와 밀접하게 협력하여 효율적으로 작전을 수행했습니다. 
동지여러분, 저는 이 사례를 통해 우리 군대가 지나치게 허장성세를 부리지만 전투는 잘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보여주려는 것 입니다. 이제 핀란드의 전장에 대해 설명하겠습니다. 핀란드 전역은 대규모의 전차 부대를 운용하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점을 먼저 밝히겠습니다. 하지만 키비니에미Kiviniemi에서 전차군단을 돌려보내지 않았다면 전차군단을 투입해서 핀란드군의 후방으로 진출할 수 있었을 겁니다. 그랬다면 확실한 성공을 거둘 수 있었을 겁니다. 전차군단을 돌려보내라고 명령한 것은 야전군 지휘관 메레츠코프
Кири́лл Афана́сьевич Мерецко́в였습니다. 

쿨릭: 그 결정은 잘 못된 것이었소. 

파블로프: 전차군단을 돌려보내라고 한 결정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저 또한 그 결정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때문에 아군은 확실한 성공을 거두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돌파를 활용할 수 있는 독립적인 행동의 가능성을 실험하기 위해서 연대지휘관 바라노프가 지휘하는 전차여단을 투입한 바 있습니다. 저는 우리가 아주 명확한 구상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라노프의 전차여단은 1개 소총병대대를 배속받아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했습니다. 이것은 어떠한 상황에서라도 보병을 배속받은 전차여단을 독립적인 임무에 투입하는 구상을 포기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다른 전차여단들(35, 40전차여단 등)은 대대단위로 분산되어 소총병사단에 배속됐습니다. 이들은 공군이 ‘지원 요청을 수행하는’ 방식으로 운용됐습니다. 물론 대대단위로 분산된 전차들도 잘 싸웠고 때로는 탁월한 결과를 얻어내기도 했습니다. 
우리 붉은군대는 여러가지 악재를 안고 있었습니다. 사단단위로 전차를 분산 운용한다면 다른 전쟁에서도 재앙을 면치 못할 겁니다. 제가 딱 잘라 말하는 것을 이해해 주십시오. 우리가 전차와 타 병과의 협동 작전에 대해 가르쳐 온 것들은 아무 쓸모가 없었습니다. 전차부대는 아무런 것도 배우지 못했습니다. 7,000여대의 전차를 소총병사단에 배속시켜 분산운용했기 때문에 전차부대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야말로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소총병사단에 배속된 전차대대는 T-37과 T-36전차를 장비하고 있었는데 이 차종은 매우 약하고 무력했습니다. T-37전차의 기동력으로는 진창을 돌파할 수 없었습니다. 이 전차를 배속받은 소총병사단들은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했습니다. 지금 말한 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거나 오류를 지적해 주십시오. 전차부대를 연대본부나 사단본부를 호위하는데 사용하는 경우도 잦았습니다. 

신원미상 참석자: 사실입니다. 

파블로프: 핀란드전에 투입된 전차는 7,000여대에 달합니다. 전차여단에 편성되어 여단 단위로 작전한 전차대대들은 여단본부가 지속적으로 통제했기 때문에 올바르게 전투를 수행할 수 있었으며, 훨씬 유용했습니다. 여단 참모장교들 뿐만 아니라 여단 정치장교들도 예하 전차대대들의 지휘통제에 참여했다는 점도 지적하고 싶습니다. 렐류센코Дми́трий Дани́лович Лелюше́нко 동지는 다음과 같이 증언했습니다. 

‘공격할때 정치장교들은 보병진지로 가서 보병들이 전차를 엄호하는 것을 직접 감독했습니다. 그래서 보전협동이 매우 원활히 이루어졌습니다. 전차여단이 파견한 전차와 보병의 협동작전을 항상 감독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이야기하려는게 뭐겠습니까. 당장 소총병사단에 배속된 전차들을 전차여단을 증강하는데 사용해야 한다는 겁니다. 현재 키예프 군관구의 4개 전차여단은 각각 전차 14대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핀란드와의 전쟁 때문에 키예프 군관구의 전차여단들이 축소된 것 입니다. 만약 전시동원에 들어간다면 키예프 군관구의 전차여단들은 준비를 갖추지 못할 것입니다. 레닌그라드 군관구에서는 원래 키예프 군관구 소속이던 전차들을 원대복귀 시키고 있습니다. 이런 관행을 중단해야 합니다. 제가 지휘관으로 있는 한 전차부대들의 편제를 파괴하는 행위는 용납할 수 없습니다. 전차가 필요하다면 부대 전체를 배속 변경하면 됩니다. 

또 한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인력 보충 문제입니다. 전차부대는 많은 손실을 입었습니다. 새로 병력을 보충 받을때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T-26 전차로 구성된 전차여단장은 T-26이 BT전차보다 우수하다고 할 것이고, BT전차로 구성된 전차여단장은 반대로 이야기 할 겁니다. 이것은 일종의 애국심입니다. 자신이 사용하는 무기에 애정을 가진 것은 좋은 일입니다. 설사 T-26과 BT전차가 중기관총을 막을 능력은 없다해도 말입니다. 적 대전차포 진지가 무력화되기 전에 공격을 시작해서는 안된다는 주장은 옳은 말 입니다. 하지만 전차병은 단일한 보충체계를 통해 보충되어야 합니다. 
당과 정부는 전차 생산에 반영할 사항들을 지적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앞으로는 45mm 대전차포는 물론 3인치급의 포탄도 방어할 수 있는 전차를 생산해야 합니다. 그러한 방어력을 갖춘 신형 전차가 지금 생산 중입니다. 현재 우리는 부상을 입은 전차병들이 어디에 수용되어 있는지 파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귀향 조치를 받아 가족과 재회할 때에나 파악할 수 있을 겁니다. 본인은 전차여단을 다음과 같이 편성해야 한다고 봅니다. 각 전차여단은 더 많은 전차병과 지휘관들을 훈련할 수 있는 훈련대대를 가져야 합니다. 치료를 받고 원대복귀한 지휘관들은 먼저 훈련대대에 배치된 뒤 새로운 보직을 받아야 합니다. 

신원미상 참석자: 전차 조종수는 어떻게 합니까? 

파블로프: 보충대대가 전차여단의 모든 보충인력을 담당합니다. 저는 전차여단의 보직을 거치지 않은 장교는 군관구사령부에 발령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전차여단에 배속될 장교들은 먼저 보충대대에 가서 교육을 받아야 합니다. 이것은 제정 시절에 하던 방식이지만 우리도 따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보충부대에서 교육훈련을 담당할 기갑 장교들이 필요합니다. 여단에 배속된 장교들을 교육훈련에 차출하는 것은 안됩니다. 스페인 내전에 참전했던 인력이 있습니다. 이들은 같은 부대의 부상병들을 돌보았으며 부상병들도 그들을 돌보는 게 누구인지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부대를 이탈하는 인원도 많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본받아야 합니다. 

이제 수륙양용 T-37 경전차에 대해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이 전차는 특수한 차종이므로 예비대에 넣어야 합니다. 군단 직할의 강력한 대대로 편성해 필요한 경우 군단장의 승인하에 투입할 수 있도록 하는 것 입니다. 신형전차 문제에 있어서, 저는 여러 동지들이 국방인민위원장이나 스탈린 동지께 전문을 마구 보내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당은 우리에게 군 조직 문제를 올바른 방법으로 다룰 기회를 주었습니다. 많은 동지들이 신형 전차가 나온다는 소식을 듣자 마자 기존의 전차가 형편없다는 불평을 쏟아냅니다. 그리고는 ‘T-34와 KV 전차를 보내주십시오. 이 전차들은 다른 지역에는 적합하지 않고 우리 담당 지역에 적합합니다’라고 합니다. 사실이 이렇습니다. 저는 이런 요청에 대해 일일이 답을 하지 않겠습니다. 총참모부가 신형 전차를 어떤 군관구에 대량으로 배치하겠다고 결정하면, 다른 군관구에서는 자신의 차례가 올 때 까지 기다리면 될 일입니다. 
여러분에게 군사훈련 및 T-34와 KV전차를 T-26, T-37, BT전차 등과 함께 운용하는 방식을 가르칠 것 입니다. 구식전차들은 메뚜기떼 처럼 T-34와 KV전차의 뒤를 따라 어떠한 임무라도 수행해야 하며, 또한 적의 대전차 방어선을 돌파해야 합니다. 

포병에 관해서도 할 말이 많습니다. 저는 포병을 높게 평가합니다. 하지만 종종 전차는 무시하곤 합니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보병은 전차의 지원 없이는 머릿이 한마리 죽이지 못합니다. 보병은 전차 없이 공격할 수 없습니다. 

스탈린: 전차는 이동식 포병이오. 

파블로프: 전차는 직사를 하지만 포병은 간접사격을 합니다. 이런 차이점이 있습니다. 

스탈린: 전차는 장갑을 두른 포병이오. 

파블로프: 저와 보로노프가 지휘관으로 있는 이상 우리 두 사람의 협력은 막을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포병과 기갑 병과를 갈라놓아 협력을 방해할 수도 없습니다. 이게 첫 번째 요점입니다. 두 번째로, 보로노프 동지께서 좋은 문제제기를 했습니다. 보병과 포병의 협력 문제입니다. 만약 어떤 기갑 병과 장교가 보병 병과 장교보다 보병전술과 작전술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다면 부끄러워 해야 합니다. 이런 장교는 전차부대에 필요 없습니다. 

신원미상 참석자: 파블로프 동지가 옳습니다. 

파블로프: 우리는 이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기갑 병과는 전차 부대의 교범 보다 보병 교범을 더 신경써서 연구해야 합니다. 전차 부대는 보병 부대에 맞춰서 움직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전차를 이런 식으로 운용해서는 안됩니다. ‘7km 앞으로 진격해 숲에 있는 적을 소탕하라’ 또는 ‘우리가 식사하거나 세면을 하고 있는데 전차 부대가 경비를 서지 않는다면 너희 중대를 포격해 버리겠다.’  

스탈린: 그건 근거없는 풍문이오. 

파블로프: 아닙니다. 

스탈린: 동지.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거 아니요? 

파블로프: 아닙니다. 전차 부대가 큰 피해를 입은 이유는 부적절한 운용 때문입니다. 제86소총병사단에는 용맹한 지휘관이 한 명 있었습니다. 이 사단에 대해서는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그는 울거나 정신적으로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각 연대에 말 20마리를 배속시켜 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부대에 배속된 차량이 야지에서 제대로 기동하기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요구는 전적으로 옳았습니다. 
과거의 실수를 바로잡기 위해서 루마니아로 진격할 경우를 염두에 두고 남부 지역의 군사-지리 현황을 연구했습니다. 루마니아 지역의 기후와 토양은 말이 끄는 수레라 할 지라도 두달 이상을 버티지 못할 것 입니다. 이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현재 야지에서 기동할 수 있는 차량을 개발 중입니다. 하지만 이 차량은 겨우 100m를 달리고 고장나 버렸습니다. 이 차량은 GAZ-65입니다. 

신원미상 참석자: 궤도차량이 필요하다는 것이군요. 

파블로프: 그렇습니다. 자동차 부대의 경우 기동이 힘든 진흙탕 길 때문에 트럭을 운용하는데 부담이 클 것 입니다. 트럭을 정상적으로 운용하기 위해서는 과감한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최선의 방법은 연대에 배속된 트럭들을 모두 모아서 사단의 중앙 통제를 받는 특수 연대, 혹은 특수 대대로 운용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면 예비부품을 확보하고 정비하는데 용이할 것입니다. 그렌달Владимир Давыдович Грендаль 동지는 예비부품 공급과 정비가 문제라고 지적했는데 이것은 절대적으로 옳습니다. 기동부대들을 위해 민간 차량들을 대규모로 징발했는데 이것들은 결국 다시 민간에 돌려줘야 합니다. 예비부품 수급은 아주 어려웠습니다. 공장은 전선의 부대에 예비 부품을 제대로 공급해주지 못했습니다. 공장 규모가 크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군이 보유한 차량 중 많은 수가 예비부품 부족에 시달리고 있으며 정비 시설도 부족한 상태입니다. 

스탈린: 차량 정비를 이야기 하는거요? 

파블로프: 예비부품을 확보해야 차량을 운용할 수 있습니다. 전쟁은 무자비하고 이것은 우리가 어찌할 수 없습니다. 가용한 수단은 모두 동원해야 합니다. 저는 다음과 같은 제안을 하겠습니다. 각 군관구에는 군수보급과 전차-장갑차부대를 담당하는 부서를 별도로 설치해야 합니다. 스탈린 동지께서는 동원 및 훈련을 통제하고 예상되는 전역에 대해 연구를 수행하기 위해서 전차-장갑차부대 총국의 조직을 분리하도록 명령하셨습니다. 

스탈린: 그 문제는 해당 총국의 관할이오. 그 조치를 취하는 것이 틀릴 수도 있고 옳을 수도 있소. 

파블로프: 스탈린 동지. 저는 전차-장갑차병과 총국을 분할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문제를 명확히 해야 합니다. 군사훈련만을 담당할 조직이 필요합니다.  

1940년 4월 17일 저녁 회의, Ibid., pp.259~263에서 재인용.

2016년 12월 25일 일요일

짤하나 만들어 봤습니다.


 "'있잖아 그거 해봐' 생성기"가 있다길래 짤방을 하나 만들어 봤습니다.






 여기에 대한 해설은 아래의 글 두개를 참고하세요.


 스티븐 잘로가의 2차대전 기갑전 저작에 관한 잡담

중국의 UN가입 요구를 조롱하는 LA타임즈 만평

이 만평은 1950년 8월 LA타임즈의 브루스 러셀(Bruce Russell)이 그린 것인데 게재된 신문의 동의를 얻어 오클랜드 트리뷴에 다시 실린 것 입니다. 윌리엄 놀랜드(William F. Knowland) 상원의원이 스크랩해서 1950년 8월 10일 당시 국무부장관 특별보좌관이었던 존 포스터 덜레스에게 보낸 서신에 첨부한 것 입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뒤 UN에서 중화민국을 축출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이 상임이사국 지위를 가지겠다고 주장했을때 미국내의 비난 여론을 반영하고 있는 작품이죠. 중국을 소련의 괴뢰로 단순하게 묘사하는 점은 문제가 있으나 스탈린과 마오쩌둥의 미묘한 권력관계는 부분적으로 잘 묘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2016년 12월 23일 금요일

월드오브탱크 블리츠를 하다가 M60을 봤습니다


월드오브탱크 블리츠를 하는데 갑자기 양쪽팀에서 M60이 튀어나오는게 아니겠습니까. 데이터상으로 구현해 두고 아직 내놓지 않은 전차가 많다더니 M60도 있었네요. 으으. 빨리 구매할 수 있도록 상점에 추가하면 좋겠습니다.



2016년 12월 17일 토요일

어떤 기묘한 인도주의



나는 네이팜 폭격이 정말 싫소. (이 무기는) 일반적인 화재가 아니라 인화성 물질로 공포에 질린 민간인들을 태워버리기 때문이오. 
(중략) 
지상군이 근접 전투를 하는 경우라던가 공군의 지상군 지원을 위해서 네이팜탄을 사용하는 것은 괜찮소. 하지만 수많은 비무장 상태의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기위해 네이팜을 사용하는건 이와 다른 문제요. 
1952년 8월 21일 윈스턴 처칠이 영국 국방부장관에게 보낸 비밀서신. Edwin A. Martini, 'World on fire: the politics of napalm in the Global Cold War' Cold War History 16-4(2016), p.468에서 재인용.


처칠이 한국전쟁 당시 미국의 북한 폭격을 비판하면서 한 소리라고 하는군요. 네이팜이 잔인한 무기라는게 틀린말은 아닌데 이 소리를 처칠이 했다니까 정말 기분이 묘하군요. 다들 잘 아시다시피, 윈스턴 처칠은 2차대전 당시 독일 민간인에게 독가스를 사용하자고 주장한 일이 있습니다. 영국쪽의 요구 때문에 실제로 독가스탄을 투하하는 계획까지 수립된 바 있지요.

2016년 12월 14일 수요일

주취폭력-2



주취폭력


 우리 제3사단 제23연대는 포항을 지나 동해안을 따라 계속 북진하기 시작하여 영덕시를 점령하였다. 당시에는 확실히 몰랐는데 아마도 그때가 UN군에 의한 인천 상륙작전이 성공한 그 무렵이 아니었나 짐작된다. 아무튼 인민군은 패주하기 시작하였고 그를 추격하는 최전방의 아군부대는 중대 대대 등 전투병력과 연대본부가 거의 동시에 움직였으므로 연대장과 미고문관 Morris 대위와 함께 영덕시에 들어갔을 때에는 바로 몇 백 m 전방에서 교전하는 총소리가 들렸다. 영덕시 중심가에는 "인민공화국 만세!"라고 쓴 플래카드가 걸린 높은 탑이 그냥 서 있었으며 그 꼭대기에는 인민공화국의 국기가 걸려 있었다. 연대장은 도끼를 가져오게 하여 그 탑을 직접 찍어 넘어뜨렸다.
 그때, 도시 뒷산으로 개미떼처럼 도망쳐 올라가는 인민군들을 육안으로 볼 수 있었으며 우리 연대 장병들은 도망가는 인민군을 향하여 총을 쏘아 댔다. 미처 도망가지 못한 인민군들은 줄줄이 붙잡혀 와서 양손을 박박 깎은 머리 위에 얹고 길가에 꿇어앉아 있었는데, 대부분이 16세에서 20세까지의 어린 나이로 보였다.
 그때 미고문관은 나를 통하여 연대장에게 "장교는 장교임과 동시에 신사여야 한다"고 하면서 잡힌 포로들에 대한 신사적인 대우를 강조하였다. 뒤에 그 말이 "전시 포로에 대한 대우에 관한 제네바 협약"을 준수하여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하였지만 당시 내 마음에는 죽고 죽이는 살벌한 전쟁터에서 신사가 되라는 미고문관의 비현실성을 이해할 수가 없었으며 어딘지 위선적인 면이 있는 것 처럼 느꼈다.

 그로부터 약 4개월 후 중공군의 개입으로 우리 제3사단이 후퇴하여 중동부 전선에 배치되었을 때의 일이 생삭난다. 연대장이 한 미고문관에게 술 한잔 하자고 권하여 일선 산속에서 간단한 술상을 차려놓고 잔을 주고받는 자리에 통역으로 동석하였다.
 술이 거나하게 취하여 연대장이 미고문관에게 "아주 질이 나쁜 적의 첩자를 두 놈 잡았는데 그놈 중 한명은 내가 직접 쏴 죽이겠다"고 하자 같이 얼큰하게 취한 미고문관이 "나도 한 놈을 쏴 죽이겠다"고 하지 않는가. 연대장과 고문관을 따라 계곡에 가 보니 거지같이 너덜너덜한 평복을 입은 두 명이 묶인 채 악을 쓰고 있었다. 연대장이 M1 소총으로 그 중 한 명을 쏘아 죽이자 잇따라 미고문관이 45구경 권총으로 다른 한 명을 쏴 죽였다.
 그중 한 명은 끝내 "인민공화국 만세!"를 울부짖으며 쓰러졌다. 평복을 입었으나 인민군이 틀림없었고 아마도 첩보수집을 하는 정보대 요원이었던 것 같았다.


조광제, 『한 직업외교관의 회상록: 나라를 생각하고 나를 돌아보다』 (나남, 2016) 50~51쪽

2016년 12월 7일 수요일

스탈린그라드 삼부작 번역 기획안을 넣었을 때 제출했던 번역문의 일부


예전에 추진했다가 실패한 일이 떠오른 김에, 6년전 출판사 몇곳에 보냈던 원고의 일부분을 올려봅니다. 스탈린그라드 삼부작의 프롤로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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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수하야 베레이카 강 일대, 1942 7 23

독일군은 리쥬코프(A. I. Liziukov) 소장을 세 방향에서 조여가고 있었다. 리쥬코프의 지휘를 받는 제2 전차군단의 절반은 포위망에 갇혀 있었고 그는 이들을 구해내기 위해  필사적으로 독일군을 저지하고 있었다.

리쥬코프는 3주전 까지만 하더라도 제5전차군의 지휘관이었다. 소련군은 독일군의 기갑군단에 준하는 대규모 기계화 부대를 만들기 위한 첫 번째 시도로 제5전차군을 편성했다. 소련군 최고사령부(Stavka)는 제5전차군을 전차 641대로 증강했다. 그리고 그 무렵 러시아 남부의 도시 보로네지를 막 점령한 독일 48기갑군단의 후방을 차단하기 위해 제5전차군에게 남진하여 새로운 공세를 시작한 독일군의 측면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돈 강에 인접한 주요 도시였던 보로네지는 독일군이 동쪽의 스탈린그라드와 남쪽의 카프카즈로 진격하는데 아주 적절한 북쪽의 거점이 되었기 때문에 순식간에 전투의 중점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오시프 스탈린은 리쥬코프가 상대하고 있는 것은 겨우 독일군의 기갑사단 한 개 뿐이라고 믿었으며, 5전차군은 독일군 기갑부대가 강행군 중인 보병사단들의 증원을 받기 전에 보급선이 지나치게 길어진 독일군의 선봉 기갑부대를 분쇄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모든 것은 시작부터 엉망으로 꼬였다. 소련군 지휘관과 참모 장교 중에는 대규모 기계화 부대를 전투에서 운용하는데 필요한 경험을 갖춘 사람이 소수에 불과했다. 리쥬코프의 전차군 사령부는 편성된 지 겨우 6주 밖에 되지 않았고 전차군 예하의 기갑사단급 부대였던 3개 전차군단은 4월에 막 편성된 상태였다. 소련군은 한 번의 작전에서 3개 전차군단은 커녕 3개 전차여단을 연계시켜 운용할 능력조차 없었다. 세 개의 전차군단은 강력하게 공격을 집중하는 대신 7 6일부터 10일 사이에 따로 따로 전투지역에 도착해 축차적으로 투입되었다. 게다가 소련군은 300대의 전차를 보유한 2개 기갑사단과 맞닥뜨렸으며 곧 수개의 보병사단이 여기에 증원되었다. 독일군의 압도적인 제공권은 리쥬코프의 임무를 더 어렵게 만들었다.

리쥬코프의 상급자들은 그를 도울 방도가 없었다. 소련군 최고사령부는 늘 하던대로 전투를 미시적인 부분 까지 통제하려 했으며 소련군 기갑국장을 포함한 고급 장교들과 함께 구체적인 지침을 연달아 내려 리쥬코프의 행동을 직접 감독하게 했다. 그동안 제5전차군을 지휘하는 전선군 사령부(집단군에 해당하는 소련군 부대단위)는 갈피를 잡을 수 없을 정도로 명령을 바꾸고 있었다. 브랸스크 전선군 사령관은 연달아 세명이 교체됐다. 리쥬코프와 그의 예하 지휘관들이 이 와중에 교체된 지휘관이 내렸던 지시를 따르려고 조치를 취하면 소련군 최고사령부가 비판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문제에도 불구하고 리쥬코프는 독일군의 주의를 끄는데 성공했고 독일군은 북쪽 측면을 방어하기 위해서 대규모의 병력과 항공기를 집결시켜야 했다. 스탈린은 이러한 성공을 전혀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7 15일에 전차군 사령부를 해체하고 리쥬코프를 전차군단 사령관으로 좌천시켰다.

하지만 이것은 고난의 끝이 아니었다. 브랸스크 전선군은 모스크바로부터 끊임없이 시달림을 받으면서도 독일군에 대한 반격을 계속했는데 독일군은 북쪽 측면을 방어하기 위해서 7 20일이 되자 제9기갑사단의 지원을 받는 보병사단들로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했다. 소련군은 여러 차례의 반격 끝에 7 21일에서 22일에 걸쳐 소규모의 돌파구를 열 수 있었으나 한 개의 소총병사단과 선봉을 맡은 리쥬코프의 제2전차군단에 소속된 두 개 전차여단으로 편성된 공격 부대는 곧 독일군의 보병 및 기갑 부대에게서 세 방향으로 포위당했다.

알렉산드르 일리치 리쥬코프는 유능하고 용감한 지휘관으로 1941년 모스크바 전투 당시 서부전선군의 제20군 사령관 블라소프(A. A. Vlasov) 중장의 부사령관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한 것을 통해 처음으로 소연방영웅의 칭호를 받은 사람 중 하나였다. 그러나 7 23, 리쥬코프는 1942년 한여름에 3주 동안 실패만 거듭한 끝에 마침내 막다른 골목에 몰리고 말았다. 브랸스크 전선군이 반격을 위해 편성한 특수작전집단 지휘관인 치비소프(N. E. Chibisov) 중장은 리쥬코프에게 독일군의 후방 깊숙히 고립된 제2전차군단의 두 전차여단을 찾아내 후방으로 안전하게 이끌고 나오라는 명령을 내렸다. 리쥬코프는 7 23일 오전 9시에 군단 정치위원과 함께 KV 중전차에 올라탔다. 그는 볼샤야 베레이카에 있는 군단사령부에서 직접 전차를 지휘해 남쪽으로 향했고 수하야 베레이카 강을 건너 그의 두 전차여단을 구출하기 위해서 독일군의 보병과 기갑부대를 돌파하려 했다. 리쥬코프의 전차는 독일군 방어선에서 조금 못 미친, 188.5 고지에서 서쪽으로 몇 백미터 떨어져 있는 레뱌즈예 마을 남쪽의 숲에서 대전차포에 맞아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옴싹달싹 못하게 된 전차는 독일군의 집중 포화를 맞게 되었고 리쥬코프는 전차 승무원들에게 탈출하라고 명령했다. 해치를 열고 탈출하던 도중 조종수는 기관총에 부상을 입었고 무전수는 전사했다. 리쥬코프는 전차에서 탈출하다가 포화에 휩쓸려 전사했다.

독일군은 제5전차군과 그 예하의 군단과 여단이 지리멸렬한 상태로 제각각 공격을 감행한 것을 보고는 그들이 가지고 있던 소련군의 참모 역량과 지휘관들의 능력에 대한 경멸감을 더 굳혔을 것이다. 그러나 소련군이 이런 식으로 반격을 거듭했기 때문에 독일군은 스탈린그라드에 도착하기도 전에 진격의 기세가 둔화되고 약화되었다. 그리고 리쥬코프가 자살적인 돌격을 감행한 지 불과 네 달도 지나지 않아 살아남은 소련군 기갑부대 지휘관들은 그들이 독일의 적수들과 충분히 맞설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게 되었다.

데이빗 글랜츠의 '스탈린그라드 전투' 축약판이 나온다고 합니다


데이빗 글랜츠의 스탈린그라드 전투 삼부작은 자료집까지 포함해 다섯권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을 자랑했습니다. 군사사 연구에 있어 중요한 저작이긴 했습니다만 그 엄청난 볼륨은 읽는이에게 부담을 주는 면이 있었죠.

그런데 이 대작을 한권의 분량으로 압축한 단행본이 내년 봄에 나온다고 합니다.




 기존의 삼부작은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대한 연구서 중 최고수준의 내용을 담고 있는 만큼 여기에 부담을 가지고 계시던 분들은 축약본을 구매하시는 것도 좋겠습니다. 이 축약본도 640쪽의 두툼한 단행본이라고 합니다만 그래도 훨씬 부담이 덜 가는 분량으로 줄어들었군요.

 예전에 스탈린그라드 삼부작의 번역출간을 추진하다가 그 방대한 분량때문에 좌절한 경험이 있는데 축약본으로 재도전 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습니다.

2016년 12월 6일 화요일

독일어 군사용어에 관한 잡담 -2


독일어 군사용어에 관한 잡담


번역을 할 때 마다 문장의 전체적 의미 뿐만 아니라 개념어도 명확히 구분해야 한다는 점을 깨닫습니다. 제가 번역을 할 때 취약한 점도 바로 개념어를 옮기는 데 있지요. 부분적으로 한국어 어휘의 부족을 탓할 수는 있겠지만, 어쨌거나 최종적으로는 번역자인 제 문제인 것 입니다.

독일어 Gegenstoß와 Gegenangriff가 개념적으로 명확히 구분된다는 것을 알게 된 것도 비교적 최근의 일 입니다. 2012년에 로버트 폴리가 쓴 논문 "A Case Study in Horizontal Military Innovation The German Army, 1916–1918"를 읽고서야 독일어 용어에서 이 두 단어가 구분되는 개념이라는걸 알게 됐습니다. 폴리의 설명에 따르면 전자는 1차대전 당시 전장 상황에 맞춰 즉각적으로 실시하는 임기응변적인 역습을 지칭할때 사용하는 단어였고, 후자는 사전 계획하에 실시하는 반격에 사용하는 단어였다 하는군요.

다음에 번역할 책을 두 권 선정했는데 그 중 하나는 독일쪽 저작입니다. 역시나 몇가지 독일어 용어가 신경이 쓰입니다. 일차적으로 독한사전의 빈약한 어휘에 불평을 늘어놓다가도 결국에는 제 어휘력과 상상력의 부족이 가장 큰 문제임을 깨닫게 됩니다. 비록 시간이 많이 걸리고 효율이 떨어지긴 하지만 번역은 여러 모로 좋은 공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