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파냐 사람들이 북이탈리아의 여러 전쟁에서 프랑스군에 피박을 먹인 이후 강력한 화력을 가지게 된 보병은 서유럽 전장의 주역으로 떠오르게 된다.
그리고 이미 15세기부터 슬금 슬금 한물 가기 시작한 기병은 이제 완전히 전쟁터에서 보조적인 역할로 물러나게 됐다.
그렇지만 기병은 보병이 결코 가질 수 없는 한가지 강점을 가지고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기동력’이었다.
이 때문에 서유럽에서는 기병의 활용도를 높이기 위해 다양한 방책이 강구 됐는데 갑옷의 두께를 늘려 방어력을 향상시켜 전통적인 기병의 역할을 계속하는 것이 그 중 하나였고 나머지 하나는 기병의 기동성에 “화력”을 결합시키는 것 이었다.
기병의 화력 증대는 초보적인 형태의 용기병이라고 할 수 있는 ‘기마 화승총병’과 “Reiter”로 통칭하는 독일의 경기병으로 나타났다.
두 가지 모두 1540년대를 전후하여 등장하기 시작했는데 두 가지 모두 화기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가능했다. 기마 화승총병의 경우 이미 14세기부터 영국의 기마 궁수, 유럽 본토의 기마 석궁수가 성공적으로 운용됐기 때문에 특별히 혁신적일 것은 없었다.
그러나 독일의 튀링엔 지역에서 처음 등장한 “Reiter”는 확실히 기병전술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지고 왔다.
바로 기마전투에서도 화기를 사용할 수 있었던 것 이다.
16세기 초반 독일에서는 바퀴식 격발장치가 발명됐고 이것은 바로 “Pistole”의 등장을 가져왔다. 바퀴식 격발장치가 처음 문헌에 언급된 것은 1505년이라고 하니 실제로 등장한 것은 15세기 말 일 가능성도 있다.
바퀴식 격발장치는 화기의 소형화를 가져와서 이미 1510년대에는 “범죄”에 악용되기 시작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는 1517년에 칙령을 내려 “제국 영내”에서 민간인이 바퀴식 격발장치를 사용하는 화기의 사용을 금지할 것을 명하기도 했고 이와 유사한 사례는 1540년대 까지도 종종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인간은 어떤 동물인가.
이렇게 좋은 물건이 당연히 범죄에만 사용될 리는 없고 독일의 기병을 중심으로 급속히 사용이 확산 됐다.
15세기 중반에 독일 기병들이 주로 사용하던 화기는 faustrohre라고 불리는 길이 50cm 정도의 물건이었는데 당시 기준으로는 획기적인 물건이었던 모양이다.
이 물건은 사람을 제대로 맞출 만한 명중률이 나오는 유효 사거리는 기껏해야 5m에 불과했지만 기본적으로 Reiter 1개 중대(Schwadron)가 400명 정도로 구성됐기 때문에 명중률의 부족은 머리 숫자로 때우는게 가능했다.
1540년대에 이르면 피스톨은 기병의 주요 장비로 자리 매김했고 슈말칼덴 전쟁 당시 황제군과 반란군 모두 기병대의 상당수가 피스톨을 장비했던 것으로 보인다.
슈말칼덴 전쟁 당시 황제군 진영에서 옵저버로 활동했던 베네치아인 Mocenigo는 당시의 Reiter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황제군의 기병대는 반란군의 기병대를 두려워 한다. 반란군의 기병은 숫자도 많고 그들이 타는 말도 품종이 좋은데다가 세 자루의 바퀴격발식 총을 휴대하기 때문이다. 한 자루는 안장에, 한 자루는 안장 뒤에, 나머지 한 자루는 장화 안에 넣고 다닌다.”
1557년의 생-캉탱 전투에서 기병창을 주 무장으로 한 프랑스 기병들이 신성로마제국군의 Reiter 들에게 엄청난 피박을 보면서 유럽각국도 앞다퉈 Reiter와 같은 병종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이때의 영향으로 프랑스어와 이탈리아어에 각각 reitre, raitri라는 단어가 생기게 됐다고 한다.
프랑스군은 생-캉탱 전투의 피박 이후 Reiter를 대폭 증강시켜 1558년에는 8,000명을 확보했다고 한다.(불과 1년 전에는 1,000명 미만이었다.)
이렇게 16세기 중반에 이르자 서유럽의 많은 군사이론가들은 기병 전술도 화력을 극대화 하는 쪽으로 나가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일부 군사이론가들, 특히 프랑스의 De la Noue로 대표되는 보수적인 이론가들은 근접전에서는 창기병이 Reiter를 압도할 수 있다고 주장했지만 프랑스의 종교전쟁을 제외하면 보수적인 이론가들의 주장이 입증된 경우는 거의 없었다.
대부분의 서유럽 군대는 기병 편제를 충격력보다는 화력에 중점을 두는 방향으로 개편했고 전술적으로도 충격은 화력의 우위를 뒤집지 못 했다.
이것이 구체화 된 것이 네덜란드 독립전쟁이었다.
네덜란드는 1597년에 11개 창기병 중대 중 7개를 피스톨을 주 무장으로한 Cuirassier로, 4개를 기마 화승총병으로 개편했고 그해에 벌어진 튀른하우트(Turnhout) 전투에서 기병창을 주무장으로한 에스파냐 기병대를 크게 격파한다.
튀른하우트 전투 결과 신성로마제국도 네덜란드를 모방해 그때 까지 남아있던 창기병을 거의 대부분 Cuirassier로 개편하게 됐다.
16세기 중반부터 적극적으로 군제를 개혁하던 스웨덴은 1611년에 독일의 “기마 화승총병”의 영향을 받아 최초의 “용기병” 부대를 편성했고 네덜란드와 마찬가지로 소규모의 기병을 피스톨을 주 무장으로 하는 체제로 개편했다. 스웨덴의 기병전술의 특징은 기존의 Reiter 부대와는 달리 적과 근접해서 사격을 하도록 해 화력의 효율적인 운용을 꾀했다는 점 이다.
Dodge 같은 군사사가들이 지적했듯 스웨덴의 기병은 소규모고 제국군의 기병 보다 종합적인 무장은 뒤떨어졌지만 효율적인 화력 운용으로 전장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이렇게 17세기 초-중반으로 접어 들면서 전통적인 중기병은 거의 흔적조차 남지 않게 됐고 기병은 더 이상 특수한 계층의 상징이 아니게 됐다. 화기는 기병을 전장의 주역에서 밀어냄과 동시에 그 계급적 특수성도 없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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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낀 책들.
Thomas Arnold, The Renaissance at War
Hans Delbruck, Geschicte der Kriegskust im Rahmen der politischen Geschichte
Theodore Dodge, Gustavus Adolphus
Bert S. Hale, Weapons and Warfare in Renaissance Europe
B. Hughes, Firepoewr, Weapon Effectiveness on the Battlefield, 1630-1850
V. Vuksic , Cavalry
2006년 7월 22일 토요일
2006년 7월 19일 수요일
[불펌]북한은 무슨 낮짝으로 식량을 달라고 했을까?
어떤 인간의 블로그에서 불법 ctrl + C + 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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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이런 인류역사상 파렴치한 상황에 대한 질문에 여러가지 생각을 해봤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해석을 해봤다
해석의 키워드는 쌀과 비료라는 점으로 미루어 볼때 '식량난'이었다. 이것을 중심으로 두고 해석하니 다음과 같은 세가지 가설이 나왔다.
1. 북한의 미사일 발사가 일종의 고기를 잡기 위한 시도 였다는 점이다. 왜 있잖은가 호수에 수류탄을 던져 물고기를 잡는.. 가장 빠른 시간안에 많은 어획량을 올릴 수 있는.. 식량난에 허덕이는 북한이 택할 수 있는 방법 아닌가. 더군다나 바다에 떨어졌다는 점이 더욱 신빙성을 더한다. 그러나 이럴경우 물고기를 어떻게 회수하냐가 관건이다. 아마도 회수 못한듯 하다. 식량을 다시 요구한걸로 봐서.
2.미사일 발사 자체를 미사일 발사가 아니라 다른 일을 위한 실험이라고 보고 생각해보자. 자.. 식량난에 허덕이는 북한이 당장 필요한것은 식량의 증산이다... 그러나 이제 모래알로 쌀을 만드시던 수령님은 유리관에서 관광상품이 되어 있고, 그의 아들은 불행히도 모래알로 쌀을 만들지 못한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에 필적할 그런 능력을 보여줘야할 입장이다.
그것이 무엇인가? 식량의 증산이 어렵다면 이미 있던 쌀과 강냉이를 부풀리는거다.. 하지만 언제 그걸 다 기계에 넣고 돌려서 하겠는가. 단기간의 증산은 많은 열로 부풀리는 것인데.. 아마 미사일 발사는 이것과 관련되지 않나 싶다. 그러나 불행히도 현재 북한의 미사일 기술은 쌀창고나 강냉이 창고를 정확히 타격할 기술에 확신이 서지 않는다. 그래서 줄기찬 발사 연습밖에 없는것이다. 이것은 북한의 생존권과 연결되어 있다.
이런 가설을 세우니 그런 짓을 하고도 다시 식량을 요구하는 비상식적인 상황이 상식화가 되었다. 음. 역시 북한을 한민족으로 이해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한민족이 어디가겠는가.
나머지 가설은 어디갔냐고? 폭죽이었는데 그건 장마에 떠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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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이런 인류역사상 파렴치한 상황에 대한 질문에 여러가지 생각을 해봤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해석을 해봤다
해석의 키워드는 쌀과 비료라는 점으로 미루어 볼때 '식량난'이었다. 이것을 중심으로 두고 해석하니 다음과 같은 세가지 가설이 나왔다.
1. 북한의 미사일 발사가 일종의 고기를 잡기 위한 시도 였다는 점이다. 왜 있잖은가 호수에 수류탄을 던져 물고기를 잡는.. 가장 빠른 시간안에 많은 어획량을 올릴 수 있는.. 식량난에 허덕이는 북한이 택할 수 있는 방법 아닌가. 더군다나 바다에 떨어졌다는 점이 더욱 신빙성을 더한다. 그러나 이럴경우 물고기를 어떻게 회수하냐가 관건이다. 아마도 회수 못한듯 하다. 식량을 다시 요구한걸로 봐서.
2.미사일 발사 자체를 미사일 발사가 아니라 다른 일을 위한 실험이라고 보고 생각해보자. 자.. 식량난에 허덕이는 북한이 당장 필요한것은 식량의 증산이다... 그러나 이제 모래알로 쌀을 만드시던 수령님은 유리관에서 관광상품이 되어 있고, 그의 아들은 불행히도 모래알로 쌀을 만들지 못한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에 필적할 그런 능력을 보여줘야할 입장이다.
그것이 무엇인가? 식량의 증산이 어렵다면 이미 있던 쌀과 강냉이를 부풀리는거다.. 하지만 언제 그걸 다 기계에 넣고 돌려서 하겠는가. 단기간의 증산은 많은 열로 부풀리는 것인데.. 아마 미사일 발사는 이것과 관련되지 않나 싶다. 그러나 불행히도 현재 북한의 미사일 기술은 쌀창고나 강냉이 창고를 정확히 타격할 기술에 확신이 서지 않는다. 그래서 줄기찬 발사 연습밖에 없는것이다. 이것은 북한의 생존권과 연결되어 있다.
이런 가설을 세우니 그런 짓을 하고도 다시 식량을 요구하는 비상식적인 상황이 상식화가 되었다. 음. 역시 북한을 한민족으로 이해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한민족이 어디가겠는가.
나머지 가설은 어디갔냐고? 폭죽이었는데 그건 장마에 떠내려갔다.
2006년 7월 17일 월요일
War before Civilization : The Myth of the Peaceful Savage - by Lawrence H. Keeley
이번 미사일 사태를 통해 나타난 국내 일부 지식인들의 매우 “나이브”한 국제 정세와 군사문제 인식은 꽤 심각한 수준이다.
일단 이들은 “미국”만이 동북아의 전쟁 유발 요인이며 “미국”만이 침략전쟁을 한다는 괴상한 발상을 두뇌에 탑재하고 있다.
문제는 이런 나이브한 인식이 이들 소수의 머릿속에만 머무르지 않고 좀 더 겉 멋 든 바보들에게 전염되는 것이다. 이미 소위 인터넷 논객이라는 머저리들에게 이런 경향이 전염되는 것으로 보여 우려를 금할 수 없다.
대한민국 사회가 좀 더 건전하게 발전하기 위해서는 이런 가방 끈 긴 바보들의 망상을 깨 줄 필요가 있다.
사족이 길었는데 이번에 살펴볼 책은 나온지 10년(1996년 출간)이 넘은 책으로 전쟁에 대해 안이한 발상을 하는 바보들을 위한 책이다.
이름하여 “War before Civilization”. 부제는 “The Myth of the Peaceful Savage”.
제목에서부터 책의 내용을 짐작할 수 있다.
저자인 Lawrence H. Keeley는 책의 서문에서부터 서구 지식사회에 만연된 “평화로운 문명 이전 시대”와 “야만적인 문명사회”라는 말도 안 되는 망상을 통렬히 비판하고 있다.
특히 자신이 학부생 시절 참여했던 발굴을 예로 들며 확실한 증거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망상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 지식인들을 직접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이 책의 저자는 고고학자이기 때문에 풍부한 고고학적 증거와 인류학자들의 연구성과를 인용하면서 인간이라는 존재가 이미 수만년 전부터 지독하게 폭력적인 존재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특히 재미있는 것은 “선사시대의 사회”가 기술적으로 뒤떨어졌기 때문에 살상 능력도 부족했고 이 때문에 전쟁을 하더라도 살상률은 낮을 것 이라는 주장에 대한 반박이다.
그러나 저자는 1960년대 이후 인류학자들이 뉴기니 등 오지에서 벌어진 부족전쟁을 관찰한 내용을 인용하며 “오히려” 비 문명화된 사회의 전쟁이 더 잔인하고 살상률도 높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미국의 대학들이 1960년대부터 80년대 까지 선사시대의 전쟁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평화로운 선사시대”라는 왜곡된 인식을 확산 시켜왔다고 통렬히 비판하고 있다.(특히 베트남전쟁으로 인한 지식인 사회의 염전 풍토도 언급하고 있다.)
저자의 비판 대상으로는 유명한 브라이언 페이건의 개설서도 포함돼 있다.
저자는 각 장에서 “비 문명화된 사회”의 전쟁 수행 방식, 조직 등을 고고학과 인류학적 증거를 동원해 설명하고 있다.
여러 자료들을 통해 재 구성한 “비 문명화된 사회”의 전쟁 양상은 보통 사람들의 생각과는 크게 다르다.
비문명화된 사회는 정교한 행정 조직이 없더라도 인구 대비 병력 동원률이 현대 국가들 보다 높으며 인구 당 전사율은 현대 국가들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다.
저자의 주장은 실증적인 자료들을 동원해 구성됐기 때문에 설득력도 높고 무엇보다 “재미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책이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이유는 앞에서도 설명했듯이 “지식인”들의 망상을 비판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고고학자들이 선사시대의 폭력과 전쟁에 대해 무관심한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일침을 가하고 있다.
그러나 전쟁에 대해 안이하게 생각하는게 어디 미국 지식인 사회만의 문제이겠는가.
유감스럽게도 지금 우리 사회에서도 야만적이고 문명화 된 미국이 쏴대는 “토마호크”와 순박한 북조선이 쏴대는 “대포동”은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믿는 바보들이 넘쳐나고 있다.
결정적으로 이 바보들이 자신들의 망상을 전염시키기 위해 광분하고 있어 더더욱 불안하다.
일단 이들은 “미국”만이 동북아의 전쟁 유발 요인이며 “미국”만이 침략전쟁을 한다는 괴상한 발상을 두뇌에 탑재하고 있다.
문제는 이런 나이브한 인식이 이들 소수의 머릿속에만 머무르지 않고 좀 더 겉 멋 든 바보들에게 전염되는 것이다. 이미 소위 인터넷 논객이라는 머저리들에게 이런 경향이 전염되는 것으로 보여 우려를 금할 수 없다.
대한민국 사회가 좀 더 건전하게 발전하기 위해서는 이런 가방 끈 긴 바보들의 망상을 깨 줄 필요가 있다.
사족이 길었는데 이번에 살펴볼 책은 나온지 10년(1996년 출간)이 넘은 책으로 전쟁에 대해 안이한 발상을 하는 바보들을 위한 책이다.
이름하여 “War before Civilization”. 부제는 “The Myth of the Peaceful Savage”.
제목에서부터 책의 내용을 짐작할 수 있다.
저자인 Lawrence H. Keeley는 책의 서문에서부터 서구 지식사회에 만연된 “평화로운 문명 이전 시대”와 “야만적인 문명사회”라는 말도 안 되는 망상을 통렬히 비판하고 있다.
특히 자신이 학부생 시절 참여했던 발굴을 예로 들며 확실한 증거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망상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 지식인들을 직접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이 책의 저자는 고고학자이기 때문에 풍부한 고고학적 증거와 인류학자들의 연구성과를 인용하면서 인간이라는 존재가 이미 수만년 전부터 지독하게 폭력적인 존재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특히 재미있는 것은 “선사시대의 사회”가 기술적으로 뒤떨어졌기 때문에 살상 능력도 부족했고 이 때문에 전쟁을 하더라도 살상률은 낮을 것 이라는 주장에 대한 반박이다.
그러나 저자는 1960년대 이후 인류학자들이 뉴기니 등 오지에서 벌어진 부족전쟁을 관찰한 내용을 인용하며 “오히려” 비 문명화된 사회의 전쟁이 더 잔인하고 살상률도 높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미국의 대학들이 1960년대부터 80년대 까지 선사시대의 전쟁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평화로운 선사시대”라는 왜곡된 인식을 확산 시켜왔다고 통렬히 비판하고 있다.(특히 베트남전쟁으로 인한 지식인 사회의 염전 풍토도 언급하고 있다.)
저자의 비판 대상으로는 유명한 브라이언 페이건의 개설서도 포함돼 있다.
저자는 각 장에서 “비 문명화된 사회”의 전쟁 수행 방식, 조직 등을 고고학과 인류학적 증거를 동원해 설명하고 있다.
여러 자료들을 통해 재 구성한 “비 문명화된 사회”의 전쟁 양상은 보통 사람들의 생각과는 크게 다르다.
비문명화된 사회는 정교한 행정 조직이 없더라도 인구 대비 병력 동원률이 현대 국가들 보다 높으며 인구 당 전사율은 현대 국가들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다.
저자의 주장은 실증적인 자료들을 동원해 구성됐기 때문에 설득력도 높고 무엇보다 “재미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책이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이유는 앞에서도 설명했듯이 “지식인”들의 망상을 비판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고고학자들이 선사시대의 폭력과 전쟁에 대해 무관심한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일침을 가하고 있다.
그러나 전쟁에 대해 안이하게 생각하는게 어디 미국 지식인 사회만의 문제이겠는가.
유감스럽게도 지금 우리 사회에서도 야만적이고 문명화 된 미국이 쏴대는 “토마호크”와 순박한 북조선이 쏴대는 “대포동”은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믿는 바보들이 넘쳐나고 있다.
결정적으로 이 바보들이 자신들의 망상을 전염시키기 위해 광분하고 있어 더더욱 불안하다.
2006년 7월 10일 월요일
무늬만 1류 공군 - Regia Aeronautica
2차 대전에 참전한 주요 교전국 중 이탈리아처럼 어정쩡한 국가는 찿아보기 힘들다. 이탈리아는 마치 체중 미달인 주제에 수퍼헤비급
경기에 나간 권투선수 같다고 해야 할까… 하여튼 2차 대전 같은 괴수들의 격전에는 뭔가 어울리지 않는 국가다.
그나마 지중해에서 그럭저럭 밥값은 하던 해군과는 달리 시작부터 끝까지 졸전을 거듭하며 호사가들의 안주거리가 된 육군과 그 육군의 뒤치닥 거리만 하다가 종전을 맞은 공군, Regia Aeronautica는 그야말로 비참함 그 자체다.
이탈리아 공군은 육군과 마찬가지로 적들에 비해 뒤떨어진 장비, 그리고 불충분한 항공기 생산량으로 대표되는 결정적인 약점을 안고 있었다. 질과 양 모두 뒤떨어지는 비참한 케이스라고 할 수 있겠다.
이탈리아 공군이 193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세계적인 수준이었다는 점을 보면 불과 10년도 안된 사이에 이렇게 몰락했다는 것은 괴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먼저 항공기 생산을 살펴 보면 이탈리아는 전쟁 이전부터 싹수가 글러먹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탈리아 공군의 2차 대전 이전 항공기 생산 계획과 실제 생산량은 다음과 같았다.
위의 수치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이탈리아는 전쟁 이전에도 계획된 생산량을 달성하지 못 했고 이 때문에 1937년부터 생산계획량을 줄였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목표에 도달하지 못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가장 큰 원인은 이탈리아는 전쟁 발발 이전부터 골머리 아픈 경제문제에 시달리고 있었다는 점이다.
일단 국방예산을 보자.
이탈리아는 동원체제에 들어간 나라도 아닌 주제에 전쟁 이전부터 국방비가 국가 예산의 30%를 돌파하고 있었다!
아래의 수치를 보자.
국방비가 이렇게 많은데 왜 공군은 저 모양이었는가?
가장 먼저 예산 우선순위가 해군과 육군으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1933년부터 1940년 까지 이탈리아 공군에 배정된 예산은 평균 전체 국방비의 24.5%였는데 독일 공군은 재무장 직전인 1934년에도 36%, 영국 공군도 전시 동원 이전인 1938년에 국방예산의 38%를 배정 받고 있었다.
그리고 공군에 들어오는 예산도 신장비 도입보다는 기존에 있는 장비를 관리하는데 더 많이 배정이 됐다.
결정적으로 오지랖만 넓은 두체가 사방에 허세를 부리는 통에 그나마 배정 받은 예산도 괴상한 곳으로 많이 흘러 들어갔다.
먼저 1938년까지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공군을 지원하기 위해서 이탈리아 공군의 예산(!)이 지원됐고 뒤이어 이디오피아와 스페인 내전 개입으로 더 많은 예산이 새 나갔다.
내실을 다져야 할 시기에 삽질만 한 셈이다.
1938년 12월 이탈리아 공군의 항공기 보유대수는 1년 전보다 500대 이상 줄어들었고 생각이 조금 있는 이탈리아 장군들은 미래의 전쟁을 점점 더 암담하게 바라보기 시작했다.
특히 스페인 내전 개입은 1938년까지 공군 전력을 170개 비행대로 증강시킨다는 공군 증강계획을 말아먹는데 일조했다.
물론 이탈리아 공군도 1936년 스페인 내전에 본격적으로 개입하면서 미래 전쟁을 대비한 ‘R 계획’을 만들어 항공 전력을 확충하긴 했지만 영국 같은 강대국과 한판 벌이기에는 상당히 부실했다.
무 엇보다 이탈리아 공군은 매우 부실한 장비만 두루 갖추고 있었다는 점이 문제였다. 이탈리아 공군이 그나마 최신형이라고 내놓은 MC.200 전투기는 성능은 Bf-109 E나 스핏파이어 Mk.I 같은 동시기의 전투기보다 성능은 뒤떨어지는 주제에 생산성도 무려 다섯배나 떨어졌다.
Bf-109E의 생산에 소요되는 시간이 평균 4,500 시간이었는데 MC.200은 21,000시간(!)이나 잡아 먹고 있었다.
이탈리아 공군 전력은 1939년 10월 말 ‘서류상’으로는 총 5,200대에 달했으나 이 중 2,700대는 너무 구식이어서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900대는 정비 상태가 매우 불량해 즉시 폐기 처분해야 했다.
이결과 삽질의 제왕인 두체께서 영국과 프랑스에 호기롭게 선전포고를 했을 때 이탈리아 공군이 보유한 항공기 3,296대 중 가동 가능한 물건은 2,000대를 겨우 채우는 수준이었다고 한다.
이 중 폭격기가 995대, 전투기가 574대 였는데 전투기 중 그나마 현대적인 물건으로 분류할 수 있는 것은 MC.200 77대와 Fiat G.50 89대에 불과했다!
이탈리아는 전쟁에 돌입하고 나서도 주력 전투기가 CR.42라는 당시의 시각에서 보더라도 확실히 구식화 된 물건이었다.
반면 독일 공군은 이미 1939년 8월에 세계 최고수준의 전투기인 Bf-109 D 112대와 Bf-109 E 631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어쨌거나 선전포고를 한 이탈리아는 먼저 가장 만만한 코르시카 등 지중해 일대의 프랑스 군을 공격했는데 6월 11일부터 24일까지의 짧은 교전 기간 중 지상에 주기된 70대의 프랑스 항공기를 격파하고 40대의 손실을 입었다.
그리고 프랑스가 곧바로 백기를 들고 이탈리아는 어쨌든 승전국 행세를 할 수 있게 됐다.
여기서 끝났다면 정말 행복했겠으나…
영국과의 본격적인 게임이 시작되면서 이런 재미도 더 이상 볼 수 없게 돼 버렸다.
두체는 동업자(실은 상전) 히틀러가 프랑스에서 대박을 터트리자 곧 영국도 나자빠질 것으로 보고 Corpo Aereo Italiano라고 간판을 달고 CR.42, G.50 등 구닥다리 비행기 178대로 구성된 부대를 파견했다.
이 부대는 영국에 27톤의 폭탄을 투하한 것 외에는 특별히 하는 일 없이 빈둥대다가 리비아의 이탈리아군이 박살나자 땜빵을 위해 아프리카로 보내졌다.
1940년 말, 영국군이 이집트에서 공세를 개시하자 구식 항공기로 머리 숫자만 채운 이탈리아 공군은 2개월도 되지않아 풍비박산 나 버렸다. 단 2개월의 전투로 이탈리아 공군은 700대가 넘는 항공기를 잃어 버린 것이다!
이 중 100대가 공중전에서 격추됐고 140대는 영국공군의 공습으로 지상에서 격파 됐다. 그리고 약 400대는 이탈리아군이 패주하면서 자폭시키거나 소각시켰다고 한다.
2월 말 리비아에 남은 이탈리아 공군 전력은 채 70기가 되지 않았고 그나마 트리폴리의 제공권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독일 공군이 파견한 ZG26의 20대 남짓한 Bf-110 장거리 전투기 덕분이었다.
이렇게 부실한 상태에서 전쟁에 뛰어든 허약한 공군은 지속적인 소모전으로 재미한번 보지 못한 채 역사의 뒷길로 초라하게 사라져갔다.
이탈리아 공군은 1940년 6월부터 1941년 3월까지 3,500대의 항공기를 상실했는데 같은 기간 보충된 항공기는 3,100대에 불과했다.
적자가 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 결과 이탈리아 공군의 전력은 계속해서 감소했다!!!
이탈리아 공군은 1940년 6월 전쟁 발발 당시 2,000대의 작전 가능한 항공기를 보유하고 있었지만 1941년 12월에는 1,493대, 1942년 11월에는 860대로 그 숫자가 계속 줄어들었다.
이탈리아 공군이 이렇게 전쟁 중반도 지나지 않아 나자빠진 원인은 이탈리아의 부실한 공업력과 전시동원 능력이었다.
먼저 이탈리아의 항공기 생산이 가장 큰 문제였다. 전쟁 기간 중 이탈리아의 항공기 생산은 다음과 같았다.
이탈리아의 항공기 생산은 1942년에 이미 엄청난 감소세로 돌아서는데 독일과 달리 산업시설에 대한 대규모 공격이 없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정말 괴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탈리아의 항공산업 노동자는 1934년 9,700명에서 1938년 45,700명으로 증가했지만 같은 기간 동안 생산성은 불과 50% 증가하는데 그쳤다.
결정적으로 노동력의 증가에도 불구하고 노동 숙련도가 낮은 수준이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항공산업 노동자는 1943년 초 까지 115,000명으로 증가했지만 월 평균 항공기 생산량은 266대로 1940년의 308대 보다도 오히려 더 감소한 비참한 수준이었다.
여기다가 신형 항공기 생산 부족과 생산 라인의 전환이 매우 더뎌 1943년까지도 CR.42같은 구식 기종의 생산을 계속해야만 했다. 어차피 아예 없는 것에 비하면 낫지 않은가.
어쨌거나 1943년 휴전이 성립된 뒤 이탈리아 공군은 정부와 마찬가지로 독일, 또는 연합군에 합류해 전쟁을 계속했다.
독일측은 무솔리니에 충성하는 병력을 근간으로 항공기 100대로 편성된 소규모 공군을 재건했다.
독일은 이탈리아군의 무장 해제시 약 1,200대의 이탈리아 항공기를 압수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대부분의 항공기가 성능 미달이었고 쓸만한 조종사의 충원도 어려운 문제였다.
이후 이탈리아 공군은 독일, 또는 연합군의 지원을 받아 생계를 유지해 나가다가 역시 궁색한 최후를 맞았다.
참고한 자료들...
F. D’Amico & G. Valentini, Regia Aeronautica
Olaf Groehler, Geschichte des Luftkriegs
Hans W. Neulen, Am Himmel Europas : Luftstreitkrafte an deutscher Seite 1939-1945
Brian R. Sullivan, “The Impatient Cat : Assessments of Military Power in Fascist Italy, 1936-1940”
Brian R. Sullivan, “Downfall of the Regia Aeronautica 1933-1943”
그나마 지중해에서 그럭저럭 밥값은 하던 해군과는 달리 시작부터 끝까지 졸전을 거듭하며 호사가들의 안주거리가 된 육군과 그 육군의 뒤치닥 거리만 하다가 종전을 맞은 공군, Regia Aeronautica는 그야말로 비참함 그 자체다.
이탈리아 공군은 육군과 마찬가지로 적들에 비해 뒤떨어진 장비, 그리고 불충분한 항공기 생산량으로 대표되는 결정적인 약점을 안고 있었다. 질과 양 모두 뒤떨어지는 비참한 케이스라고 할 수 있겠다.
이탈리아 공군이 193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세계적인 수준이었다는 점을 보면 불과 10년도 안된 사이에 이렇게 몰락했다는 것은 괴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먼저 항공기 생산을 살펴 보면 이탈리아는 전쟁 이전부터 싹수가 글러먹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탈리아 공군의 2차 대전 이전 항공기 생산 계획과 실제 생산량은 다음과 같았다.
연 도
|
생산계획
|
생산량
|
1933
|
424
|
386
|
1934
|
455
|
328
|
1935
|
1,236
|
895
|
1936
|
2,031
|
1,768
|
1937
|
1,900
|
1,749
|
1938
|
1,700
|
1,610
|
1939
|
1,930
|
1,750
|
위의 수치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이탈리아는 전쟁 이전에도 계획된 생산량을 달성하지 못 했고 이 때문에 1937년부터 생산계획량을 줄였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목표에 도달하지 못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가장 큰 원인은 이탈리아는 전쟁 발발 이전부터 골머리 아픈 경제문제에 시달리고 있었다는 점이다.
일단 국방예산을 보자.
이탈리아는 동원체제에 들어간 나라도 아닌 주제에 전쟁 이전부터 국방비가 국가 예산의 30%를 돌파하고 있었다!
아래의 수치를 보자.
회계연도
|
국가예산
|
국방비
|
1934/35
|
22.5
|
5.3
|
1935/36
|
35.2
|
12.1
|
1936/37
|
39.2
|
13.1
|
1937/38
|
39.6
|
12.3
|
1938/39
|
40.9
|
13.4
|
1939/40
|
54.4
|
24.7
|
국방비가 이렇게 많은데 왜 공군은 저 모양이었는가?
가장 먼저 예산 우선순위가 해군과 육군으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1933년부터 1940년 까지 이탈리아 공군에 배정된 예산은 평균 전체 국방비의 24.5%였는데 독일 공군은 재무장 직전인 1934년에도 36%, 영국 공군도 전시 동원 이전인 1938년에 국방예산의 38%를 배정 받고 있었다.
그리고 공군에 들어오는 예산도 신장비 도입보다는 기존에 있는 장비를 관리하는데 더 많이 배정이 됐다.
결정적으로 오지랖만 넓은 두체가 사방에 허세를 부리는 통에 그나마 배정 받은 예산도 괴상한 곳으로 많이 흘러 들어갔다.
먼저 1938년까지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공군을 지원하기 위해서 이탈리아 공군의 예산(!)이 지원됐고 뒤이어 이디오피아와 스페인 내전 개입으로 더 많은 예산이 새 나갔다.
내실을 다져야 할 시기에 삽질만 한 셈이다.
1938년 12월 이탈리아 공군의 항공기 보유대수는 1년 전보다 500대 이상 줄어들었고 생각이 조금 있는 이탈리아 장군들은 미래의 전쟁을 점점 더 암담하게 바라보기 시작했다.
특히 스페인 내전 개입은 1938년까지 공군 전력을 170개 비행대로 증강시킨다는 공군 증강계획을 말아먹는데 일조했다.
물론 이탈리아 공군도 1936년 스페인 내전에 본격적으로 개입하면서 미래 전쟁을 대비한 ‘R 계획’을 만들어 항공 전력을 확충하긴 했지만 영국 같은 강대국과 한판 벌이기에는 상당히 부실했다.
무 엇보다 이탈리아 공군은 매우 부실한 장비만 두루 갖추고 있었다는 점이 문제였다. 이탈리아 공군이 그나마 최신형이라고 내놓은 MC.200 전투기는 성능은 Bf-109 E나 스핏파이어 Mk.I 같은 동시기의 전투기보다 성능은 뒤떨어지는 주제에 생산성도 무려 다섯배나 떨어졌다.
Bf-109E의 생산에 소요되는 시간이 평균 4,500 시간이었는데 MC.200은 21,000시간(!)이나 잡아 먹고 있었다.
이탈리아 공군 전력은 1939년 10월 말 ‘서류상’으로는 총 5,200대에 달했으나 이 중 2,700대는 너무 구식이어서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900대는 정비 상태가 매우 불량해 즉시 폐기 처분해야 했다.
이결과 삽질의 제왕인 두체께서 영국과 프랑스에 호기롭게 선전포고를 했을 때 이탈리아 공군이 보유한 항공기 3,296대 중 가동 가능한 물건은 2,000대를 겨우 채우는 수준이었다고 한다.
이 중 폭격기가 995대, 전투기가 574대 였는데 전투기 중 그나마 현대적인 물건으로 분류할 수 있는 것은 MC.200 77대와 Fiat G.50 89대에 불과했다!
이탈리아는 전쟁에 돌입하고 나서도 주력 전투기가 CR.42라는 당시의 시각에서 보더라도 확실히 구식화 된 물건이었다.
반면 독일 공군은 이미 1939년 8월에 세계 최고수준의 전투기인 Bf-109 D 112대와 Bf-109 E 631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어쨌거나 선전포고를 한 이탈리아는 먼저 가장 만만한 코르시카 등 지중해 일대의 프랑스 군을 공격했는데 6월 11일부터 24일까지의 짧은 교전 기간 중 지상에 주기된 70대의 프랑스 항공기를 격파하고 40대의 손실을 입었다.
그리고 프랑스가 곧바로 백기를 들고 이탈리아는 어쨌든 승전국 행세를 할 수 있게 됐다.
여기서 끝났다면 정말 행복했겠으나…
영국과의 본격적인 게임이 시작되면서 이런 재미도 더 이상 볼 수 없게 돼 버렸다.
두체는 동업자(실은 상전) 히틀러가 프랑스에서 대박을 터트리자 곧 영국도 나자빠질 것으로 보고 Corpo Aereo Italiano라고 간판을 달고 CR.42, G.50 등 구닥다리 비행기 178대로 구성된 부대를 파견했다.
이 부대는 영국에 27톤의 폭탄을 투하한 것 외에는 특별히 하는 일 없이 빈둥대다가 리비아의 이탈리아군이 박살나자 땜빵을 위해 아프리카로 보내졌다.
1940년 말, 영국군이 이집트에서 공세를 개시하자 구식 항공기로 머리 숫자만 채운 이탈리아 공군은 2개월도 되지않아 풍비박산 나 버렸다. 단 2개월의 전투로 이탈리아 공군은 700대가 넘는 항공기를 잃어 버린 것이다!
이 중 100대가 공중전에서 격추됐고 140대는 영국공군의 공습으로 지상에서 격파 됐다. 그리고 약 400대는 이탈리아군이 패주하면서 자폭시키거나 소각시켰다고 한다.
2월 말 리비아에 남은 이탈리아 공군 전력은 채 70기가 되지 않았고 그나마 트리폴리의 제공권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독일 공군이 파견한 ZG26의 20대 남짓한 Bf-110 장거리 전투기 덕분이었다.
이렇게 부실한 상태에서 전쟁에 뛰어든 허약한 공군은 지속적인 소모전으로 재미한번 보지 못한 채 역사의 뒷길로 초라하게 사라져갔다.
이탈리아 공군은 1940년 6월부터 1941년 3월까지 3,500대의 항공기를 상실했는데 같은 기간 보충된 항공기는 3,100대에 불과했다.
적자가 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 결과 이탈리아 공군의 전력은 계속해서 감소했다!!!
이탈리아 공군은 1940년 6월 전쟁 발발 당시 2,000대의 작전 가능한 항공기를 보유하고 있었지만 1941년 12월에는 1,493대, 1942년 11월에는 860대로 그 숫자가 계속 줄어들었다.
이탈리아 공군이 이렇게 전쟁 중반도 지나지 않아 나자빠진 원인은 이탈리아의 부실한 공업력과 전시동원 능력이었다.
먼저 이탈리아의 항공기 생산이 가장 큰 문제였다. 전쟁 기간 중 이탈리아의 항공기 생산은 다음과 같았다.
연도
|
생산계획
|
생산량
|
1940
|
3,785
|
3,257
|
1941
|
4,200
|
3,503
|
1942
|
4,800
|
2,821
|
1943
|
3,822
|
2,024
|
이탈리아의 항공기 생산은 1942년에 이미 엄청난 감소세로 돌아서는데 독일과 달리 산업시설에 대한 대규모 공격이 없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정말 괴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탈리아의 항공산업 노동자는 1934년 9,700명에서 1938년 45,700명으로 증가했지만 같은 기간 동안 생산성은 불과 50% 증가하는데 그쳤다.
결정적으로 노동력의 증가에도 불구하고 노동 숙련도가 낮은 수준이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항공산업 노동자는 1943년 초 까지 115,000명으로 증가했지만 월 평균 항공기 생산량은 266대로 1940년의 308대 보다도 오히려 더 감소한 비참한 수준이었다.
여기다가 신형 항공기 생산 부족과 생산 라인의 전환이 매우 더뎌 1943년까지도 CR.42같은 구식 기종의 생산을 계속해야만 했다. 어차피 아예 없는 것에 비하면 낫지 않은가.
어쨌거나 1943년 휴전이 성립된 뒤 이탈리아 공군은 정부와 마찬가지로 독일, 또는 연합군에 합류해 전쟁을 계속했다.
독일측은 무솔리니에 충성하는 병력을 근간으로 항공기 100대로 편성된 소규모 공군을 재건했다.
독일은 이탈리아군의 무장 해제시 약 1,200대의 이탈리아 항공기를 압수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대부분의 항공기가 성능 미달이었고 쓸만한 조종사의 충원도 어려운 문제였다.
이후 이탈리아 공군은 독일, 또는 연합군의 지원을 받아 생계를 유지해 나가다가 역시 궁색한 최후를 맞았다.
참고한 자료들...
F. D’Amico & G. Valentini, Regia Aeronautica
Olaf Groehler, Geschichte des Luftkriegs
Hans W. Neulen, Am Himmel Europas : Luftstreitkrafte an deutscher Seite 1939-1945
Brian R. Sullivan, “The Impatient Cat : Assessments of Military Power in Fascist Italy, 1936-1940”
Brian R. Sullivan, “Downfall of the Regia Aeronautica 1933-1943”
2006년 7월 8일 토요일
SBS 연개소문을 보다...
몇 달 동안 TV를 치우고 살다가 다시 TV를 보기 시작했다. TV야 보지 않더라도 사는 데 지장은 없지만 몇 달 동안 뉴스도 보지 않았더니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각설하고.
오늘은 S(ex)BS가 야심차게 준비했다는 연개소문이 하는 날 이었다. 장안의 화제라는 주몽은 단 한편도 보지 못했으니 그렇다 치고 과연 S(ex)BS가 과연 어떤 물건을 내 놓았는가 보기로 했다.
시청 결과.
정말 해괴망칙한 물건이 나왔다!!!
끔찍한 감상포인트
1. 연개소문이 민족 타령을 한다!!! 맙소사.
2. 연개소문이 치우천황 타령을 한다!!! 이럴수가!
3. 연개소문이 망할 때 망하더라도 멋지게 죽자는 요지의 연설을 한다!!! 얼씨구!
4. 연개소문이 결전을 치르러 나가기 전에 단군 성조(!!!)들에게 기도를 한다!!!
5. 작가가 이환경 작가다!!!
6. 머리를 괴상하게 한 여자 칼잡이 두명이 나온다!!!
7. 온달의 손자가 나온다!!! 낄낄낄
8. 무예 수련 집단이라는 조의는 도데체 어디서 기어나온 물건인가?
9. 안시성 주민들이 먹을게 없다고 사람 고기를 먹는다. 역시 S(ex)BS
10. 결정적으로 연개소문이 안시성에서 싸운다!!!
도데체 비싼 돈 들여서 뭐하자는 수작이람.
설마 이환경 작가가 환단고기 같은걸 믿는게 아니겠지?
각설하고.
오늘은 S(ex)BS가 야심차게 준비했다는 연개소문이 하는 날 이었다. 장안의 화제라는 주몽은 단 한편도 보지 못했으니 그렇다 치고 과연 S(ex)BS가 과연 어떤 물건을 내 놓았는가 보기로 했다.
시청 결과.
정말 해괴망칙한 물건이 나왔다!!!
끔찍한 감상포인트
1. 연개소문이 민족 타령을 한다!!! 맙소사.
2. 연개소문이 치우천황 타령을 한다!!! 이럴수가!
3. 연개소문이 망할 때 망하더라도 멋지게 죽자는 요지의 연설을 한다!!! 얼씨구!
4. 연개소문이 결전을 치르러 나가기 전에 단군 성조(!!!)들에게 기도를 한다!!!
5. 작가가 이환경 작가다!!!
6. 머리를 괴상하게 한 여자 칼잡이 두명이 나온다!!!
7. 온달의 손자가 나온다!!! 낄낄낄
8. 무예 수련 집단이라는 조의는 도데체 어디서 기어나온 물건인가?
9. 안시성 주민들이 먹을게 없다고 사람 고기를 먹는다. 역시 S(ex)BS
10. 결정적으로 연개소문이 안시성에서 싸운다!!!
도데체 비싼 돈 들여서 뭐하자는 수작이람.
설마 이환경 작가가 환단고기 같은걸 믿는게 아니겠지?
2006년 7월 4일 화요일
스크린밖의 한국 영화사 - 김학수 저
가끔 책을 산 뒤 내가 이걸 왜 샀나 싶은 게 있다.
몇 달 전에 샀다가 땅을 치고 후회한 책이 바로 이 '스크린 밖의 한국 영화사'다.
과장을 조금 하자면.
이 책의 내용의 50%는 영화계를 장악한 친일파들에 대한 이야기고 나머지는 군사독재에 빌붙은 영화인들에 대한 내용이다.
이 책을 정독 하게 되면 대한민국 영화계의 만악의 근원은 친일파와 그 뒤를 이은 군사독재의 기생충들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정말 그런가?
이쪽으로 공부를 안해 봐서 잘 모르겠다.
물론 내용이 아주 형편없다는 것은 아니다.
상당히 도움이 되는 유익한 내용도 많지만 그걸 상쇄시키고도 남는 것이 친일파에 대한 저자의 과도한 집착이다.
참고로. 이책의 출판사는 "인물과 사상사".
몇 달 전에 샀다가 땅을 치고 후회한 책이 바로 이 '스크린 밖의 한국 영화사'다.
과장을 조금 하자면.
이 책의 내용의 50%는 영화계를 장악한 친일파들에 대한 이야기고 나머지는 군사독재에 빌붙은 영화인들에 대한 내용이다.
이 책을 정독 하게 되면 대한민국 영화계의 만악의 근원은 친일파와 그 뒤를 이은 군사독재의 기생충들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정말 그런가?
이쪽으로 공부를 안해 봐서 잘 모르겠다.
물론 내용이 아주 형편없다는 것은 아니다.
상당히 도움이 되는 유익한 내용도 많지만 그걸 상쇄시키고도 남는 것이 친일파에 대한 저자의 과도한 집착이다.
참고로. 이책의 출판사는 "인물과 사상사".
2006년 7월 2일 일요일
김구 = 테러리스트???
주문한지 한참 된 Allan R. Millett의 "The War for Korea, 1945-1950 : A House Burning"이 얼마 전에 도착했다. 좀 싼 책을 찿아서 좋아라 했는데 잊어 버릴만 하니 도착했다. 그건 그렇다 치고.
이 책을 받아 본 뒤 한번 훑어 봤는데 중간에 김구 선생에 대한 소개가 있다.
대략 이렇게 돼 있다.
Kim Ku : terrorist, patriot, president of the Korean Provisional Government in China, rival to Syngman Rhee, and victim of political assassination, 1949
아니!
김구 선생님이 테러리스트라니!
나의 선생님은 그러지 않아!
빌어먹을 양키들아~
이 책을 받아 본 뒤 한번 훑어 봤는데 중간에 김구 선생에 대한 소개가 있다.
대략 이렇게 돼 있다.
Kim Ku : terrorist, patriot, president of the Korean Provisional Government in China, rival to Syngman Rhee, and victim of political assassination, 1949
아니!
김구 선생님이 테러리스트라니!
나의 선생님은 그러지 않아!
빌어먹을 양키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