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9월 28일 금요일

스탈린의 1941년 7월 3일 라디오연설

독소전쟁 발발이후 한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스탈린은 1941년 7월 3일 라디오 방송을 통해 매우 유명한 이 연설을 합니다. 스탈린의 다른 연설들은 매우 재미가 없고 지루한데 비해 이 7월 3일의 연설은 매우 비장하고 감동적이어서 이 어린양과 같은 반공청년의 마음 조차 움직이는 걸작(?!)입니다.

아래에 인용한 내용은 소련정부가 1947년에 조선어로 번역 출간한 『쏘련의 위대한 조국전쟁에 대하여』라는 스탈린 연설문집에서 가져온 것 입니다. 요즘 문법과 맞지 않는 부분은 고치고 원 번역이 딱딱해서 문체도 좀 부드럽게 바꿨습니다.


동지들이여! 인민들이여!

형제자매들이여!

우리 육해군 병사들이여!

나의 친구들이여! 나는 여러분께 다음과 같이 말하고자 합니다.

우리 조국에 대해 6월 22일에 개시한 히틀러 독일의 배신적 기습공격은 의연히 계속되고 있습니다. 붉은군대의 용맹한 저항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적군의 정예 사단들과 그 우수한 공군 부대들이 격멸되어 전장에 매장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적들은 전장에 새로운 부대를 투입하면서 계속 전진해 오고 있습니다.

히틀러의 군대가 리투아니아, 라트비아의 대부분, 벨로루시아의 서부, 서우크라이나의 일부를 점령했습니다. 파쇼의 공군은 그 폭격기의 활동구역을 넓히면서 무르만스크, 오르샤, 모길료프, 스몰렌스크, 키예프, 오데사, 세바스토폴리에 폭격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조국은 중대한 위협에 처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영광스러운 붉은군대가 파쇼군대에 여러 도시와 지역을 내주게 됨은 어떻게 된 일입니까? 정말 독일 파쇼군대가 허세를 부리는 파쇼 선전자들이 떠들듯이 정말로 무적의 군대이기 때문이겠습니까?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역사는 무적의 군대가 없으며 또 최근에도 없었다는 점을 보여줬습니다. 나폴레옹의 군대는 과거 무적의 군대로 생각됐지만 그 군대는 러시아군, 영국군, 프로이센군에게 연달아 패배했습니다. 제 1차 제국주의전쟁시기에 있어서 빌헬름의 군대도 역시 무적의 군대로 인정되었지만 그 군대 조차도 러시아군 및 영국과 프랑스 군대에 의해 수차 패배를 맛보았고 결국에는 영불군에게 격파되었습니다. 지금 히틀러의 독일 파쇼군대에 대해서도 이렇게 말해야 할 것입니다. 이 군대는 아직까지 유럽 대륙에서 심각한 저항을 받지 않았습니다. 오직 우리 소련에서만이 강력한 저항을 받고 있습니다.그러면 이 항전의 결과로 독일 파쇼군대의 우월한 사단들이 우리 붉은군대에게 격파되었는즉 이는 나폴레옹 및 빌헬름 군대가 분쇄되었던 바와 같이 히틀러 파쇼군대도 분쇄될 수 있음 또는 당장이라도 분쇄될 것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어쨌든 우리 조국의 일부가 독일 파쇼군대에 의해 점령된데 관해서는 그것이 주로 파쇼독일의 소련에 대한 전쟁이 독일군대에 대해 유리한 조건에서, 소련군대에 대해서는 불리한 조건에서 개시된 때문인 것입니다. 이미 전쟁을 수행하고 있던 독일군대는 전시 동원을 끝내고 소련을 대치한 170개 사단이 독일에서 파견되어 소련국경에 도착해 만전의 준비상태에 돌입한 상태에서 오직 공격명령만을 기다리고 있을 때 소련군대는 아직 군사동원을 해서 국경에 집결하는 도중에 공격을 받은 것입니다. 이에 있어 파쇼독일은 불원간 전 세계가 독일을 침략국으로 공인할 것도 개의치 않고 1939년에 체결한 독소불가침조약을 돌연히, 배신적으로 위반한 사실이 중요한 의의가 있는 것입니다. 물론, 평화를 애호하는 우리 나라는 조약 위반에 대한 발단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배신적 길에 들어설 수 없었던 것은 가히 알만한 일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질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 소련정부가 히틀러 및 리벤트로프 따위의 배신자와 원흉과 더불어 불가침조약을 체결할 수 있었는가? 이 점에서 소련 정부에서 과오를 범한 것은 아닌가라고 물을 것입니다. 물론 아닙니다! 불가침조약이란 양국간의 평화조약입니다. 1939년에 독일은 이런 조약을 우리에게 제의했던 것입니다. 소련 정부가 이 제의를 거절할 수 있었겠습니까? 나는 평화를 애호하는 나라라면 설사 이웃 국가에 히틀러나 리벤트로프와 같은 원흉과 식인귀가 지도자라 하더라도 그 이웃나라와의 평화조약을 거절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는 물론 평화조약이 평화애호국가의 전일(全一), 독립 및 영예를 직접 혹은 간접 훼손하지 않는 이상 일정한 필수조건만 충족된다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독일과 불가침조약을 체결하여 무엇을 얻었습니까? 우리는 일년 반 동안 우리나라에 평화를 보장했으며 또는 파쇼독일이 조약을 위반하고 우리나라를 공격하려고 시도할 경우 반격에 필요한 역량을 준비해 왔습니다. 이것은 확실히 우리의 이익이며 파쇼 독일의 손해입니다.

파쇼독일이 배신을 하고 조약을 파기한 채 소련을 침공하여 무엇을 얻었으며 무엇을 잃었습니까? 독일은 이렇게 해서 단기간 자국의 군대에 유리한 정세를 어느 정도 확보했습니다. 그렇지만 독일은 그 자신을 전세계의 눈 앞에 탐욕스러운 침략국가로 드러내 정치상으로는 손실을 입었습니다. 이 단기간의 군사적 이익이 독일에 있어서는 오직 짧은 에피소드에 불과하지만 이 거대한 정치상 이익은 소련에 있어서 중요하고도 장구한 동인(動因)이 되는 바 이에 근거하야 파쇼독일과의 전쟁에서 붉은군대의 결정적인 군사적 승리가 반드시 전개될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우리의 용감한 전 육군, 우리의 용감한 전 해군, 우리의 독수리 같은 모든 조종사, 우리나라의 전체 인민, 유럽, 아메리카 및 아시아의 우수한 인물, 나아가서는 독일의 우수한 인물들 까지도 다 독일 파쇼들의 배신적 행동을 꾸짖고 소련 정부에 동정을 표하며 소련 정부의 행위를 찬동하며 또는 우리의 사업이 정당한 것과 적들이 파멸할 것과 우리가 승리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우리를 전쟁으로 끌어들인 것으로 말미암아 우리나라는 지극히 잔인하고 교활한 원수, 독일 파시즘과의 결사적 전쟁에 나서게 됐습니다. 우리군대는 전차와 비행기로 무장한 적군과 함께 용맹하게 싸우고 있습니다. 붉은군대와 붉은해군은 무수한 난관을 물리치면서 한치의 소련 영토도 희생적으로 방어하고 있습니다. 붉은군대 전사들의 용맹은 유례가 없는 것입니다. 원수들에게 가하는 우리의 타격은 견실한 것이고 가혹(원 번역문에는 重杖)할 것입니다. 전 소련인민이 조국을 지키기 위해서 붉은군대와 함께 일어서고 있습니다.

우리 조국이 처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하고 적을 박멸하기 위해서는 어떤 대책이 필요하겠습니까?

무엇 보다도 우리 인사(人士)들, 즉 소련 인사들은 우리나라에 닥쳐온 온갖 위험의 깊은 의의를 이해하는 동시에 태연함과 무관심을 버리며 전쟁전에는 아주 설득력이 있었지만 전쟁이 근본적으로 정세를 변화시킨 지금에는 일을 망쳐버리는 평화건설론을 버려야 합니다. 원수들은 포악하고 완강합니다. 놈들은 우리의 피땀이 묻은 우리의 땅을 빼앗으며 우리 노력으로 얻은 우리의 곡식과 석유를 빼앗으려 합니다. 놈들은 대지주의 정권을 회복시키고 짜르 제도를 회복시키고 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 벨로루시인, 리투아니아인, 라트비아인, 에스토니아인, 우즈벡인, 타타르인, 몰다비아인, 그루지아인, 아르메니아인, 아제르바이잔인 및 기타 소련 자유인민의 민족문화와 민족국체를 말살하고 그들을 독일인화 시키며 그들을 독일의 공작 및 남작의 노예로 만들려 합니다. 이렇게 해서 문제는 소련국가의 존망에 대하여, 소련인민의 존망에 대하여, 소련민족이 자유롭게 생존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으면 속박에 얽매일 것인가의 것이 되었습니다. 소련 인민들은 이 점을 깨닫고 무관심해서는 안 될 것이며 스스로를 동원하고 개인의 사업을 원수들에게 대한 무자비한 새 전시궤범에 맞게 개조해야 할 것입니다.

이와 함께, 우리의 대열에 비관론자, 비겁자, 낙망자(落望者), 도피분자들이 없어야 하며 우리의 인민들은 투쟁에서 공포를 느끼지 아니하고 파쇼 압제자를 대항하여 우리의 조국 해방전쟁이 몸바쳐 나서야 합니다. 우리나라를 세운 위대한 레닌 동지께서는 소련 인민들의 기본적인 품성에는 용감함, 굳셈(원 번역문에는 剛毅), 전투에서의 담대함, 우리 조국의 원수들에 대항하여 싸우려는 의지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훌륭한 볼세비키적 품성이 붉은군대, 붉은해군의 수백만 명과 소련의 각 민족의 품성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모든 일을 작전상의 목적과 적군의 격멸이라는 조직임무에 종속시키도록 하루 바삐 모든 사업을 개조해야 할 것입니다. 소련의 인민들은 독일의 파시즘이 모든 근로인민들에게 자유 노동과 복지를 보장한 우리 조국에 대해 광신적 증오와 적개심을 도발하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소련 인민들은 반드시 원수들에 대항하여 자기의 권리, 자기의 강토를 지키기 위해 궐기해야 합니다.

붉은군대 육해군과 소련의 전 인민은 소련의 강토의 한 뼘이라도 사수하며 우리의 도시와 농촌을 위해 마지막 피 한방울을 흘릴때 까지 싸울 것이며 우리 인민의 본래 품성인 용맹, 창의성, 지혜를 발휘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붉은군대에 대한 전면적인 지원을 조직하고 그 대열에 보충병을 보내며 군대에 일체의 필수품을 공급하고 군대 및 군수품의 긴급수송, 부상병에 대한 광범위한 구호를 조직할 것입니다.

우리는 붉은군대의 후방을 공고히 하되 이 사업의 필요에 모든 일을 맞추며 전기 업소가 힘차게 일하도록 보장하고 소총, 기관총, 대포, 탄환, 포탄, 비행기를 보다 더 생산하며 공장, 발전소, 전화전신상 연락을 보관하고 지방의 방공시설을 정비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후방의 온갖 와해분자, 도피분자, 낙망자, 유언비어 유포자들과 무자비하게 투쟁할 것이며 밀정, 게릴라, 적의 공수부대를 일망타진하는 이 모든 방편에 있어서 우리의 박멸단을 신속히 조직할 것입니다. 원수들은 교활하고 음험한 기만과 유언비어 유포에 경험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 모든 사실을 헤아려 악선동에 넘어가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누구나 할 것 없이 낙망비겁으로 국방사업을 방해하는 자들은 다 즉시 군법회의에 넘겨야 할 것입니다.

붉은군대가 부득이 퇴각하는 경우에는 반드시 전반적인 철도 교통수단을 옮겨 가면서 원수들에게 한 대의 기관차, 한 대의 차량도 남기지 말고 원수들에게 1킬로그램의 빵, 1리터의 기름도 남겨놓지 말아야 합니다. 콜호즈원들은 모든 가축을 몰아가며 곡물은 후방지역에 옮기기 위하여 국가기관에 넘겨주어 보관해야 합니다. 운반할 수 없을 경우에는 일체의 값어치 있는 재산, 즉 귀금속과 곡물 및 연료를 모두 파괴해야 할 것입니다.

적군이 점령한 지역에는 기병 및 보병 빨치산 부대를 편성할 것이며 적군과 투쟁하기 위하여 방방곳곳에서 게릴라전을 일으켜 도로, 교량을 폭파하고 전화전신연락망을 파괴하며 산림, 창고, 화물에 불을 질러야 할 것입니다. 점령지에는 적군과 그 앞잡이들이 견디지 못하도록 하고 적들을 모든 곳에서 추격, 섬멸하여 그들의 모든 수단을 파탄시켜야 할 것입니다.

파쇼독일과의 전쟁을 그냥 보통의 전쟁으로 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두 군대간의 전쟁이 아닙니다. 이것은 (두 군대간의 전쟁인) 동시에 독일 파쇼군대에 대항하는 전 소련 인민의 위대한 전쟁입니다. 파쇼 압제자들과 대항하는 이 전 인민적 조국수호전쟁의 목적은 우리나라에 떠돌고 있는 위험만을 소멸할 것이 아니오 독일 파시즘의 압제에 신음하는 유럽의 전체 인민을 돕는 것입니다. 이 해방전쟁에 우리만이 외롭게 있겠습니까? 아닙니다. 이 위대한 전쟁에서 우리는 구미(歐米, 美자를 안 쓰더군요)의 각국 인민들, 그리고 히틀러의 주구들에게 압제받는 독일인민들과 같은 성실한 동맹자들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 조국의 자유를 위한 우리의 전쟁은 구미 각국 인민들의 독립, 민주자유를 위한 그들의 투쟁과 함께 할 것입니다. 이는 히틀러 파쇼군대의 압박 또는 그 위협에 반대하는 영국 수상 처칠씨의 역사적인 연설과 우리나라를 원조할 결단에 대한 미국정부의 선언을 통해 십분 알 수 있는 것이며 또한 상징적인 것입니다.

동지들!

우리의 힘은 무한합니다. 오만한 적들은 곧 이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수천명의 노동자, 콜호즈원, 인텔리겐차가 붉은군대와 함께 우리를 침공하는 적과의 전쟁에 궐기하고 있습니다. 수백만명의 우리 인민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의 근로대중은 붉은군대를 지원하려고 어느덧 수천명의 인민지원병을 편성하는 일에 착수했습니다. 우리가 독일 파시즘을 상대하여 벌이는 조국수호전쟁에 있어서, 적군의 침략 위험에 시달리는 각 도시에 우리는 반드시 이런 지원병을 창설할 것이며 희생적으로 자유, 명예, 조국을 방어하기 위한 투쟁에 일반 근로대중을 일으킬 것입니다.

소련 인민의 일체 역량을 급히 동원하며 우리 조국을 배신하고 침공한 적군에게 타격을 가하기 위하여 국방위원회를 설립하였는 바 지금 국내의 모든 정권은 전적으로 이 위원회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국방위원회는 사업에 착수하였으며 붉은육해군을 헌신적으로 도우며 적을 때려 부수고 승리하기 위하여 레닌-스탈린의 당 주위에, 소련 정부의 주위에 모이라고 전체 인민들을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역량을 우리의 용감한 붉은군대, 우리의 용감한 해군을 돕는데 돌립시다!

인민의 일체 역량을 원수의 박멸에 돌립시다!

우리의 승리를 쟁취하기 위하여 앞으로!

2007년 9월 26일 수요일

British Armour in the Normandy Campaign 1944 - John Buckley


이 녀석은 필요 이상으로 비싼 Frank&Cass에서 나온 책 입니다.

이 책의 전반적인 인상은 “꽤 재미있지만 어디서 많이 들어본 듯한 이야기인걸” 입니다.

저자인 Buckley는 노르망디 전투에 대한 기존의 연구들이 지나치게 영국 육군 기갑부대의 전술적 실패와 전차의 열악한 성능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저자는 노르망디 전투에서 영국 기갑부대가 고전을 거듭한 원인을 단순히 전차의 성능적 열세와 전술단위의 역량 부족에만 돌리는 것으로는 노르망디 전역의 기갑전투를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노르망디의 영국 기갑부대에 대한 저자의 평가는 다음과 같습니다.

가장 먼저, 노르망디 전투에서 영국 육군 기갑부대는 여러 가지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나름대로의 역할을 잘 수행했으며 1944년 8월 이후로는 전술적으로 개선되는 경향이 뚜렷했다는 것 입니다. 또 전후 독일군의 회고나 상당수의 연구자들이 영국군의 우수한 항공지원과 포병화력에 주목한 나머지 전차부대의 기여를 과소평가했는데 실제로 전투의 대부분을 담당한 것은 전차와 보병이었다는 점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일반적인 통설과 달리 기술적인 면에서는 영국군 기갑부대는 티거와 판터를 제외한 다른 독일군의 기갑차량에 대해서 동등하거나 우세했다고 주장합니다. 특히 노르망디에 투입된 독일 기갑전력의 3분의 2이상을 차지한 4호전차와 돌격포의 경우 화력면에서 다소 우수한 것을 제외하면 모든 면에서 셔먼이나 크롬웰 보다 부족했다는 평가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였는가? 여기에 대해 Buckley가 주장하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저자가 지적하는 문제점은 작전과 전술교리, 방어자에 절대적으로 유리한 노르망디의 지형, 그리고 기술적인 측면에서는 화력의 부족입니다.

작전적 측면에서는 영국군의 고급 지휘관들과 사단장 급 지휘관들의 역량 부족을 심하게 질타하고 있습니다. 특히 몽고메리는 북아프리카와 이탈리아 전역에서는 상당히 좋은 지휘를 했지만 노르망디에서는 그렇지 못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저자가 꼽는 몽고메리의 대표적인 실패사례는 ‘당연히(?)’도 Goodwood 작전입니다. Buckley는 영국군 고급지휘관들은 전반적으로 기갑전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또 전술과 교리도 영국 기갑부대가 큰 손실을 입은 원인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즉 영국군은 1944년까지도 제대로 된 보전협동 전술이나 교리가 없었다는 것 입니다. 노르망디 같은 대규모 전투를 치르는 도중에야 겨우 보전협동을 체득할 수 있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저자는 공격자에게 불리한 노르망디의 지형도 영국 기갑부대에 큰 손실을 강요한 요인 중 하나로 들고 있습니다. 그 예로서 독일군의 기갑부대 역시 방어가 아닌 제한적인 반격 작전에서는 영국군 기갑부대 만큼이나 큰 손실을 입었다고 히틀러유겐트 사단의 몇몇 작전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기술적인 측면에서는 화력의 부족이 가장 큰 문제로 꼽히고 있습니다. 저자는 영국의 전차개발자들이 아프리카 전선의 경험에 주목해 전차의 화력은 독일군의 대전차포를 제압할 수준이면 충분하다고 본 것이 1944년의 실패를 불러온 요인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즉 아프리카에서는 상대적으로 적은 독일군의 전차를 상대했지만 노르망디에서는 갑자기 독일군의 정예 기갑사단들과 대규모로 맞닥뜨리게 됐는데 정착 영국군 전차들의 화력은 대전차포를 상대할 경우를 상정한 수준이었다는 것 입니다. 특히 노르망디의 지형에서는 방어력 보다는 화력이 중요했고 방어력이 비교적 우수한 처칠 전차 조차도 이 점에서 문제였다고 봅니다. 이 점에서는 우수한 화력에 상대적으로 크기가 작아 매복에 유리한 4호전차와 돌격포를 높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쭉 읽고 나니 확실히 재미는 있었는데 정리해 보면 다 한번씩은 들어 봤던 것 같은 이야기들입니다. 그렇지만 재미있다는 점은 확실합니다. 책의 앞부분에서 노르망디 전역에서 영국군이 수행한 중요한 작전들에 대해 잘 정리해 놓았는데 이 부분이 상당히 재미있습니다.

[펌] 심형래 감독 신작영화 M-War

펌글입니다. 퍼온 곳은 여기...

심감독 이번엔 자연주의로 돌아왔다 - 심감독 새영화 매-워

전작에서 용으로 한국의 전설을 세계화하는데 성공한 심감독이 이번엔 자연주의를 표방하며 돌아왔다. 본보는 16년만에 최신개봉작 매-워 를 갖고 돌아온 심감독과 단독인터뷰를 가졌다.


기자: 오랜만이란 말이 맞는지 모르겠다 . 1-2년도 아닌 16년만에 만났다 그간 영화제작외엔 한것이 없는가.

심: 영화제작외엔 이라고 표현하니 불쾌하다. 영화제작을 하면서 영화의 배우처럼 여러 역할을 했다. 제작비도 긁어모으고, 영화도 찍고, 편집하고 밤무대도 뛰는등 일이 많았다

기자: 이번 영화는 유달리 길게 걸렸다.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지

심: 전작을 만드는데 7-8년이 소요되어서 그정도 결과물이 나왔다. 그보다 나은 작품을 만들려면 당연히 더 오래 걸리지 않겠는가

기자 : 그러면 다음영화는 대를 물려가면서 제작해야겠다(웃음) 이번영화의 소재가 특이한데 매미를 선택한 이유와 이 영 화에 대하여 간단히 설명해 달라

심: 한마디로 한국적 스토리로 미국시장을 겨냥해 만든 이야기이다. 최근 트렌드인 환경주의와 한국적 스토리가 결합된 이야기를 찾다가 한국적 소재인 매미를 소재로 하면 이 둘을 다 잡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내용은 수년간 LA가로수아래에 있던 굼벵이가 매미로 변태하려는 순간 악한 굼벵이와 악한시청 방역과 직원들의 위험에 직면한다는 내용이다. 그 이후는 영화를 보라.

기자: 이번 영화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것은?

심: 언제나 세상엔 선 악이 존재한다. 내가 전작을 통해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이 선은 항상 이긴다는 것이었고 이번 영화에도 표현하려고 했다.

기자: 전작은 시나리오가 않좋다는 평이 많았다. 이번에는 어떠한가

심 : 그 비평은 나도 뼈저리게 느낀다. 그래서 이번엔 시나리오 부분에 투자를 많이 했다.

기자: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심: 돈을 많이썼다. 전보다 시나리오 투자비율이 증가했다.

기자: 아주 유명한 시나리오 작가라도 영입했는가?

심: 굳이 그럴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 내가 썼다.

기자: 전작에 비하여 CG는 어떠한가. 전작이 그나마 그정도라도 벌어들인건 CG라는 역할이 크다고 하는 평이 많지 않았는가?

심: 시나리오와 더불어 내가 가장 강조하고 싶은 부분이다. 도심의 가로수에서 굼벵이가 싸우는 신을 표현하는 것은 선진국에서도 시도하지 못한 부분이다. 우리는 이걸 순수 한국기술로 제작했다. 특히 굼벵이가 기어갈 때 잔디와 흙이 쓸리는 모습은 압권이라 자평한다.

기자 : 마지막으로 독자들에게 한마디 해달라

심: 한가지 에피소드를 이야기 하겠다. 이번영화도 만드는데 여러 어려움을 겪었다. 굼벵이의 격투씬, 쏟아지는 비난들 점차 촬영에 회의가 들무렵 매 -워의 대목중 주인공이 “이건 한국의 곤충이야”라고 여주인공에게 이야기 해주는 장면을 촬영하는 순간 눈에서 눈물이 핑 돌았다. 그 눈물이 매-워를 만들어냈다. 이번에도 선진국도 못하는 굼벵이의 격투씬을 순수 우리기술 CG로 만들어냈다. 부족해도 한국영화의 가능성을 다시한번 확인해 달라.

기자 : 바쁜데 시간내줘서 감사하다. 영화의 성공을 바란다.

2007년 9월 24일 월요일

스페인 내전당시 공화파 기갑부대의 작전

소련은 스페인 내전에 약 3,000명의 지원병과 항공기 648~806대, 전차 331~362대, 장갑차 60~120대, 야포 1,044~1,186문, 기관총 15,113~20,486정, 소총 414,645~497,813정, 폭탄 110,000발, 수류탄 500,000발, 포탄 3,400,000발, 소화기 탄약 862,000,000발 등을 지원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내전이 진행되던 기간 중 상당 부분은 프랑스와의 국경이 봉쇄되어 있었기 때문에 공화파에 대한 지원에서 소련이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기갑장비에 있어서는 소련의 지원이 더욱 절대적이었습니다. 1930년대 중반 유럽에 있는 대부분의 어중간한 국력의 국가들은 1920년대에 도입한 프랑스제 르노 FT-17을 제외하면 이렇다 할 기갑전력이 없었는데 이 점은 스페인도 마찬가지여서 독일의 1호전차, 이탈리아의 CV-33, 그리고 소련의 T-26이 대량으로 지원되기 전 까지는 양군 모두 이렇다 할 기갑전력이 없었습니다. 스페인 내전에 참가한 소련항공기들이 전쟁 초반을 제외하면 독일측에 별다른 인상을 끼치지 못한 것과 달리 전차는 독일이 지원한 1호전차가 시원찮은 물건이었던 덕분에 전쟁 말기까지도 상당한 활약을 할 수 있었습니다.

스페인에 대한 군수물자 지원은 НКВД내의 X과(X는 스페인을 의미)에 의해 진행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소련의 지원은 1936년 가을과 1937년 초에 집중되었습니다. 1937년 하반기 부터는 공화파가 가진 금이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에 소련 정부는 더 이상의 지원은 별로 재미가 없을 것이라는 자본주의자 같은 반응을 보였다지요.

소련이 지원한 기갑장비와 인력이 스페인으로 처음 보내진 것은 1936년 9월로 여기에는 50대의 T-26과 전차병 51명, 장갑차 30대, 그리고 탄약 및 유류가 포함되었다고 합니다. 이들은 10월 12월에 카르타헤나에 도착, 곧 바로 전선으로 향했습니다. 이어서 10월 말 보로실로프는 스탈린에게 T-26 111대와 전차병 330명을 파견하자고 건의, 승인을 받습니다. 그리고 스페인 주재 소련무관 고레프(Владимир Горев) 여단지휘관(Командир бригады)은 전차병 양성을 위해 아르헤나(Archena)에 기갑학교를 창설합니다. 이 학교의 교장은 크리보세인(Семён кривошеин) 여단지휘관이 임명되었습니다. 원래 소련 전차병들은 훈련 임무에만 투입될 계획이었지만 마드리드가 압박 받는 상황 때문에 전차병을 양성할 시간이 충분치 못했습니다. 결국 고레프는 소련 전차병들이 직접 전차를 운용하라는 명령을 내리지요.(여기에 약간의 스페인 전차병이 합류합니다.)

T-26의 성능은 의심할 나위 없이 1호전차나 CV-33에 비해 월등했지만 보전협동이 제대로 되지 않는 다는 점은 문제가 되었습니다. 전차병은 러시아인인데 보병은 스페인 사람인 경우가 대부분이니 말이 통할리가 없었겠지요. 소련이 스페인에 파견한 인력 중 통역병이 204명이나 됐지만 이들이 모든 부대와 전차 한대마다 일일이 붙어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이런 문제점은 월등한 성능에도 불구하고 소련제 전차들이 큰 피해를 입는 원인이 되지요.
T-26이 처음 투입된 1936년 10월 27~29일의 세세냐(Sesena) 전투는 이런 문제점을 확실히 보여줬습니다. 이 전투에는 소련인 노박(А. Новак)이 지휘하는 BA-3 장갑차 6대와 T-26 7대로 편성된 기갑집단과 스페인인으로 구성된 1개 전차소대, 그리고 아르만(Паул Арман) 대대지휘관(Командир батальона)이 지휘하는 1개 중대 등 3개의 전차부대가 투입되었습니다. 전투 초기에 아르만은 전황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고 공격에 긍정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전투가 시작되자 마자 아르만이 지휘하는 15대의 T-26중 세대가 대전차지뢰로 기동불능이 되었고 또 한대의 전차는 보병 지원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세세냐 외곽의 한 마을로 진입해 화염병을 맞고 격파됐습니다.(이게 스페인 내전에서 최초로 화염병에 의해 전차가 격파된 사례라고 합니다.) 아르만의 중대는 마을을 돌파한 뒤 프랑코군의 야포 1개 포대를 유린했습니다. 이때 3대의 CV-33이 반격해 왔지만 1대가 T-26에 의해 격파되고 한대는 T-26에 들이 받혀 전복(!!!)돼 버립니다. 아르만은 보병 지원을 받지 못하는 상태에서 공격을 계속했지만 두 대가 더 화염병에 의해 격파되고 세대는 야포에 의해 파괴되는 손실을 입었습니다.
이 전투는 마드리드가 압박받던 상황에서 공화파의 사기를 높이는 데는 성공적이었지만 내용면에서는 불합격이었습니다. 특히 보전협동이 되지 않으니 전차들이 적 보병을 몰아내고 특정 지점을 점령하더라도 적이 반격을 해 올 경우에는 속수무책이었습니다. 프랑코군은 1938년까지 30개 대전차포 중대(중대당 대전차포 6문)를 편성했는데 이것은 1937~1938년 전역에서 공화파의 전차부대를 저지하는데 큰 기여를 합니다. 이와 함께 지상전에 전용된 88mm 대공포도 괴력을 발휘했습니다.

세세냐 전투 이후 공화파는 전차와 장갑차를 집결시켜 T-26 48대와 BA-3 장갑차 9대로 대대규모의 기갑전력(아랑훼즈Aranjuez 집단)을 만들기는 했지만 실제 운용은 중대 단위로 보병에 분산 배치되는 방식이 계속됐습니다. 당연히 기갑부대의 집중운용에 따른 파괴력을 확보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랑훼즈 집단은 11월부터 12월에 걸쳐 마드리드를 둘러싼 공방전에 투입됐습니다. 공화파는 전쟁 이전에 편성된 제 1전차연대(FT-17 장비) 대부분을 예하에 두고 있었고 제 1전차연대는 아랑훼즈 집단을 지원하는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전술적 미숙함과 기계 자체의 신뢰성 미달로 전차의 손실은 매우 컸습니다. 1936년에 지원된 전차 중 52대가 1937년 2월까지 상실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1937년 9월에 이르면 전차 손실은 170대에 달했습니다.(이때 까지 지원된 전차는 T-26 256대) 흔히 생각하는 것 과는 달리 소련전차들의 기계적 신뢰성은 형편없었는데 T-26의 경우 150시간 마다 정비를 받아야 했으며 600시간 뒤에는 오버홀을 받아야 했습니다.(소련전차의 기계적 신뢰성은 T-34 초기 생산분 까지도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저질 연료에다 끊임없는 격전으로 전차부대를 후방으로 돌려 정비할 시간이 없었으니 손실은 지속적으로 높아만 갔습니다. 여기다가 보충도 간헐적으로 이뤄지다 보니 전차의 집중운용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아르만의 전차중대는 800시간이 넘도록 정비를 받지 못해 살아남은 전차들도 상당수가 고장으로 운용 불능이 됐습니다.

한편, 위에서 언급한 대로 스탈린은 보로실로프의 건의를 받아들여 전차병 제 2진을 파견합니다. 제 2진은 전차병 및 정비병 200명으로 벨로루시 군관구의 제 4 독립전차여단에서 차출한 병력이었고 지휘관은 파블로프(Дмитрий Г. Павлов) 여단지휘관이었습니다. 소련정부는 기존에 파견된 병력을 파블로프의 부대에 합류시켜 기갑여단으로 개편할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나 기갑여단의 편성은 난항을 겪었습니다. 먼저 전차의 손실을 막기 위해 경험이 부족한 스페인 전차병은 포탑에 배치하고 숙련도가 높은 소련 전차병이 조종수를 맡는 식으로 여단이 편성되었는데 러시아 전차병들이 모두 조종수는 아니라는 문제점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위에서 이야기한 대로 전차의 손실률이 높아 여단은 편제(96대) 미달이었습니다.

새로 편성된 제 1기갑여단은 1937년 1월 초부터 작전에 투입되었습니다. 이 여단은 크리보세인이 지휘하는 1대대와 페트로프(М. П. Петров) 대대지휘관이 지휘하는 2대대로 편성되었는데 신규편성인 2대대의 전투력이 1대대 보다는 양호했습니다. 제 1기갑여단은 전투에 투입될 당시 47대의 전차를 보유했습니다. 제 1기갑여단은 1937년 1월 11일 마드리드 서쪽에서 제 12인터내셔널 여단과 제 14인터내셔널 여단이 개시한 반격작전에 투입됐습니다. 인터내셔널 여단의 외국인 지원병들은 스페인 사람 보다는 말이 잘 통했는지 보전협동이 원활히 이뤄져 이 반격은 성공적이었습니다. 그러나 3일간 계속된 이 전투에서는 새로운 위협이 등장했는데 바로 독일의 37mm 대전차포 Pak 36이었습니다. 이 전투에서 격파된 전차 모두가 이 37mm에 의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37mm 대전차포는 독일이 지원한 지상장비 중 가장 효과적인 물건이었습니다.
이어서 전개된 1월 말의 Jarama강 공세는 보전협동이 되지 않는 상황에서 대전차포가 얼마나 위협적인지 잘 보여줬습니다. 이 전투에 투입된 제 1기갑여단의 전차 60대 중 거의 40%가 격파되었고 이 중 상당수는 대전차포에 의한 것 이었습니다.

1937년 3월의 과달라야라(Guadalajara) 전투는 겨울의 전투에 비하면 성공적이었습니다. 이 전투에서 주로 상대한 이탈리아군은 T-26을 장비한 부대와 수차례 교전을 벌인 뒤 전투를 회피하게 됐습니다. 이탈리아군의 주요 장비가 CV-33이었으니 별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3월 18일의 반격에서 이탈리아군은 T-26을 앞세운 공화파군에게 격파당해 패주합니다. 그러나 제 1기갑여단의 손실도 커서 3월 말에는 가동 가능한 T-26이 9대로 줄어듭니다.

그러나 1937년 3월부터 5월에 걸쳐 150대의 T-26이 보충되면서 제 1기갑여단은 129대의 T-26, 43대의 BA-3 장갑차와 30대의 예비전차를 보유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1937년 7월부터 시작된 마드리드 구원 공세에 투입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대규모 공세에서도 37mm대전차포의 집중운용은 공화파에게 큰 타격을 주었습니다. 공세 첫날인 7월 6일 전투에서는 1문의 대전차포가 12대의 T-26을 격파하기도 했다지요. 피해는 급증해서 7월 11일이 되자 여단의 가동 전차대수는 38대로 줄어들었습니다. 이 공세에서 주공을 맡은 5군단과 18군단은 막심한 손실을 입은 끝에 더 이상 공세를 지속할 능력을 상실했습니다. 결국 7월 18일부터 프랑코군의 반격이 시작되면서 마드리드 구원공세도 실패로 돌아갑니다. 프랑코군이 대전차포를 대량으로 운용하면서 보전협동은 더욱 어려워 졌습니다. 전차병들은 대전차포가 조준하는 것을 회피하기 위해 최고 속도로 움직였는데 보병들은 이것을 도저히 따라잡을 능력이 없었던 것이죠.

1937년 여름에 소련은 마지막으로 대규모 전차부대를 지원합니다. 바로 BT-5 전차를 장비한 인터내셔널 전차연대로 이 연대는 소련이 특별히 고리키 전차학교에서 교육시킨 인터내셔널 여단의 외국인 지원병들과 붉은군대 제 5기계화군단 소속의 전차병으로 편성한 것이었습니다. 여기에 스페인인 전차병들이 충원되어 이 부대는 편성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스페인인 전차병의 경우 조종훈련은 충분히 받은 편이지만 소대나 중대단위의 훈련은 전혀 받지 못했다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BT-5를 장비한 인터내셔널 전차연대는 1937년 8월부터 진행되고 있던 사라고사 공방전에 투입되었습니다. 인터내셔널 전차연대의 임무는 제 35보병사단의 공격을 지원, 사라고사를 점령하는 것 이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인터내셔널 전차연대가 공격 개시 하루 전날인 10월 12일 밤에야 집결지에 도착했다는 것이고 작전 명령도 도착 직후에야 전달받았다는 점 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연대참모들은 작전지역에 대한 지형 정찰조차 제대로 마치지 못한 상태에서 공격을 개시해야 했습니다. BT-5가 고속전차라는 점 때문에 제 35보병사단장은 전차에 보병을 태워 돌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는데 전투 기동간에 전차에 올라탄 보병 중 상당수가 전차에서 굴러떨어져 다른 전차에 깔려 죽는 참사가 벌어졌습니다. 게다가 지형도 전차에 불리하기 짝이 없는 관개시설이 된 경작지였습니다. 결국 첫 번째 공격에서는 탄약을 모두 소모할 정도로 교전하고도 별다른 성과를 거둘 수 없었습니다.

결국 사라고사에 대한 공격 이후 공화파의 기갑부대는 별다른 보충을 받지 못 한채 지속적으로 감소되어 갔습니다. 그리고 1937년까지도 상당수를 차지하던 소련인 전차병들은 전사하거나 본국으로 귀환해 스페인인들이 전차부대의 중추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1937년 10월에 공화국 전차부대를 총괄하는 페랄레스(Sanchez Perales) 대령은 그때까지 살아남은 전차부대를 2개 기갑사단으로 개편했습니다. 이 “기갑사단”은 지원부대가 부족해 거의 전차로만 편성된 부대였습니다. 그러나 소련은 1938년에 T-26 25대를 보낸 것을 끝으로 전차 공급을 중단했기 때문에 새로 편성된 기갑사단은 주로 자동차를 개조한 장갑차를 장비하게 됐습니다. 공화파의 기갑전력은 1938년 5월에 전차 176대와 장갑차 285대였는데 이것이 같은 해 12월에는 전차 126대와 장갑차 291대가 됩니다. 장갑차만이 겨우 보충이 가능했던 것 입니다.

공화파군의 기갑사단이 처음으로 전투에 투입된 것은 1937년 12월 15일로 이때 투입된 기갑사단은 T-26을 장비한 2개 전차대대와 인터내셔널 전차연대의 잔존병력으로 편성되었습니다. 이 사단은 작전 개시 당시 104대의 전차를 보유했는데 대부분의 전차가 기계 수명을 훨씬 초과한 상태였습니다. 특히 63대는 오버홀을 받아야 했는데 상황이 여의치 않다 보니 현지 부대에서 어떻게든 수리를 해서 쓰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들은 1938년 2월 22일까지 전선에서 활동했는데 특별한 전과를 올리지는 못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소련은 스페인 내전 기간 중 전차병 351명을 지원했고 이중 53명이 전사했습니다. 소련은 이 전쟁에서 T-26과 BT-5의 성능이 현대적 대전차 병기를 견디기 어렵다고 보고 신형전차를 개발하는데 더 박차를 가했지만 대규모 전차부대의 운용에 대해서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특히 스페인 내전이 진행되는 기간 중에 대숙청이 함께 진행된 것도 문제를 야기했습니다. 소련의 전차지휘관들은 예상치 못한 실전 결과 때문에 위축되어 교훈을 도출하기 보다는 실패를 변명하기에 바빴습니다. 그 결과 1930년대 중반까지 꾸준히 발전하던 대규모 기계화부대의 편성과 교리개발이 일시적으로 위축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특히 실전 경험을 반영해 기계화 부대를 개혁해야 할 기계화부대지도국(Авто-бронетанковое управление)이 숙청으로 풍비박산 난 것은 가장 큰 타격이었습니다.

참고자료

Michael Alpert, "The Clash of Spanish Armies: Contrasting Ways of War in Spain, 1936~1939'", War In History, Vol.6. No.3(1999)
Mary Habeck, Storm of Steel: The Development of Armor Doctrine in Germany and the Soviet Union, 1919~1939, (Cornell University Press, 2003)
G. F. Krivosheev, Soviet Casualities and Combat Losses in the Twentieth Century, (Green Hill Books, 1993, 1997)
Stanley G. Payne, The Spanish Civil War, The Soviet Union, And Communism, (Yale University Press, 2004)
Steven J. Zaloga, "Soviet Tank Operation in the Spanish Civil War",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Vol.12. No.3(September 1999)

2007년 9월 16일 일요일

천하의 쓰레기 출판사 - 도서출판 615

S대인의 블로그에서 트랙백…

87년 6월 항쟁으로 인해 대한민국의 모든 시민들이 민주화의 혜택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약간의 부작용도 있는 법. 공개적으로 나타나지 않던 저능아들이 민주화의 혜택을 입어 양지로 나오게 된 것 입니다. 게다가 유감스럽게도 이들은 21세기에도 맹위를 떨치고 있습니다.

오늘날 이 저능아들은 대한민국 헌법에 보장된 언론의 자유를 이용해 합법적으로 자원을 낭비하는 중대한 범죄를 저지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범죄의 한 가운데 바로 도서출판 615라는 괴이한 출판사가 있습니다.(이 출판사는 홈페이지가 없는 것 같더군요)

이 출판사에서 나온 책 중 제가 본 것은 아래의 세 종류입니다.

북한의 미사일 전략 : 대포동 미사일의 실체와 대미 정치학 – 전영호

북한의 경제발전 전략 : 선군정치와 북한경제 – 전영호

핵과 한반도 – 최한욱

특히 전영호가 쓴 두 권의 책은 ZRYB의 극치를 달리고 있습니다.
조금도 과장하지 않고 북한의 선전을 그대로 받아 적은 종이낭비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는데 예를 들어 ‘북한의 경제발전 전략’에서는 북한의 과학기술이 너무나 뛰어나기 때문에 미국의 경제 봉쇄만 풀리면 두자리 수의 경제 성장이 가능하다라던가 북한의 교육 제도는 창의적인(!!!!) 인재를 길러내는데 남한의 그것은 입시위주의 저급한 교육이라던가 하는 황당무계한 이야기들이 그냥 실려있습니다.
‘북한의 미사일 전략’ 또한 황당하기로는 감히 대적할 책이 마땅치 않은 쓰레기입니다. 대포동이 미사일이라는 것은 미국과 일본의 모략이며 북한은 미국, 러시아, 중국에 이은 세계 4대 우주기술 강국(!!!!) 이라는 헛소리를 아무런 부끄러움도 없이 늘어놓고 있는데 놀랍게도 이런 책이 팔리긴 팔리는지 ‘북한의 경제발전 전략’은 교보에서는 무려 품절(!!!!) 이라는군요.
‘핵과 한반도’는 더 이상의 설명을 생략해야 할 지경입니다.

이런 쓰레기들이 당당히 굴러다니는 것은 대한민국이 개방적이고 열린 사회라는 점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다행이지만 한편으로는 저런 쓰레기들 때문에 열대우림이 파괴되고 있다는 점에서 비극이라 하겠습니다.

1970년대 남북한의 2차대전사 인식 - 아주 단적인 예 하나

꽤 많은 분들이 김일성 정권이나 박정희 정권이나 폐쇄적, 권위주의적 체제였다는 점에서는 동급이었다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본질적으로는 맞는 말인데 개인적으로는 개방성 측면에서 박정희 정권이 김일성 정권에 비하면 낫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경우에는 오십 보 백보를 엄격히 구분해야 할 필요가 있지요.

사소한 예 하나.

노르망디 작전

제2차세계대전 시기인 1944년 프랑스의 서북쪽 노르망디에서 진행한 미영제국주의 련합군의 상륙작전.

6월 6일부터 7월 21일까지 진행되었다. 미영제국주의자들은 쏘련과의 국제협약에 의하여 1942년에 구라파에서 제2전선을 형성하기로 되여있었다. 그러나 미영제국주의자들은 제2전선의 형성을 2년동안 태공함으로써 전쟁을 지연시키며 쏘련의 약화를 기도하였다.

쏘련군대가 능히 단독으로 파쏘독일을 쳐부시고 구라파인민들을 파쑈독일의 기반으로부터 해방시킬수 있게 된 1944년에 이르러 미영제국주의자들은 전후 구라파에서의 제놈들의 정치경제적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이 작전을 조직하였다. 당시 파쑈독일은 쏘독전선에 기본력량을 투입한 관계로 프랑스 북부 연안지대방어에는 한 개 집단군만이 동원되였고 상륙지대에는 다만 3개 보병사단만이 배치되어 있었다. 쏘독전선에서 쏘련군대의 결정적인 진출과 프랑스에서의 항쟁운동의 강화, 독일무력의 상대적인 약화는 미영제국주의군대로 하여금 이 작전을 비교적 쉽게 수행할 수 있게 하였으며 그것은 구라파에서의 반파쑈전쟁행정에서 그 어떤 본질적인 영향도 주지 못하였다.

력사사전, 1971년판, 상권 433쪽

왜곡으로 가득찬 헛소리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참고로, 력사사전 1971년 판에는 독소전쟁 관련 전투로는 스탈린그라드 전투만이 기재되어있습니다. 반면 김일성의 빨치산 전쟁은 전투라고 할 수 없는 보천보전투를 포함해 셀 수 없이 많이 있더군요.

그렇다면 박정희 정권은?

북조선과 비교하면 게임 오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북한이 고작 이 정도의 저급한 역사 인식만 가지고 있던 반면 박정희 정권 치하에서는 비록 미국을 거쳐 들어온 것일 망정 소련의 역사 인식을 반영한 서적들이 합법적으로 유통이 되고 있었거든요.

1973년에 출간된 발렌타인 2차대전사 시리즈, 즉 승리와 패배의 6권 스탈린그라드와 11권 쿠르스크는 미국인 저자인 제프리 쥬크스가 썼지만 기본적인 서술은 소련의 공식 역사서술을 거의 그대로 반영하고 있습니다. 특히 쿠르스크는 거의 전적으로 소련 공간사의 입장을 반영하고 있지요.

박정희가 독재자인 것은 맞지만 김일성 정권과 비교한다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낫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최소한 박정희 정권하에서는 생각하고 저항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이라도 있었지만 북조선에서는 지금까지도 그런게 없지 않습니까.

정부가 모든 출판물을 통제하는 국가와 제약은 있을 망정 출판의 자유가 있는 나라를 어떻게 동일 선상에 놓고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2007년 9월 15일 토요일

프로이센의 징병제에 대한 미국의 시각

1차대전 이후로 프로이센 하면 보수 반동과 군국주의의 상징이 되었는데 한때는 프로이센의 군대 조차 자유주의의 상징으로 생각되던 곳이 있었답니다.

그것은 바로 자유의 나라 미리견이었습니다.

(전 략)

비록 그랜트 행정부는 중립을 표방하고 있었지만 그랜트 대통령 자신과 유럽 각국의 미국 외교관들은 프로이센의 북독일연방에 지지를 보내고 있었으며 “시민”으로 이뤄진 그 군대를 좋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랜트 대통령은 주미 프랑스 대사를 접견한 자리에서 “북독일 연방은 내전당시 북부 연방을 지지했으며 또 연방의 공채를 구매해 주었다”고 이야기 한 바 있었다. 8월 말에 접어들어 전세가 프로이센에 유리하게 기울자 주불 대사에게 “사실 나는 프로이센이 프랑스를 단독으로 상대하는 것은 좀 어려울 것 같다고 생각했었는데 프로이센의 군사제도는 너무 완벽하네”라고 털어놓았다.

행정부와 마찬가지로 미국의 일반 언론들과 정치, 문화계의 지도급 인사들도 독일은 『전제군주정이며 제국주의적인 나폴레옹 3세 치하의 프랑스』와는 달리 (비록 프로이센도 군주정이기는 했으나) 지방 분권적이며 자유를 존중하는 방향으로 나가고 있으며 (지방 분권과는 다소 일치하지 않긴 하지만) 또 독일의 민족 통일을 향한 열망에 대해서도 긍정적으로 보고 있었다. 저명한 역사가이며 또 비스마르크의 절친한 친구이기도 했던 베를린 주재 미국대사 밴크로프트(George Bancroft)는 독일의 승리를 찬양하면서 “무기를 든 인민들이 전제왕정의 타락한 무리들을 쳐부쉈다”고 적었다. 밴크로프트는 뒤에 국무장관 피쉬(Hamilton Fish)에게 “우리 나라가 유럽 대륙에서 진정으로 믿을 수 있는 국가를 하나 꼽으라면 저는 주저하지 않고 독일이 최고의 선택이라고 하겠습니다. 독일의 국가 제도와 우리의 그것은 거의 같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다. 독일을 지지하는 수많은 사람들은 1871년 1월 베르사이유에서 선포된 독일 제국이 앞으로 미국이 그랬던 것 처럼 강력한 공화적 연방국가를 지향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랜트 대통령은 1871년 2월 상원 연설에서 미국과 독일 민족국가의 유사성을 강조했다.

비록 일부 미국인들은 단순히 나폴레옹 3세 체제에 대한 혐오감에서 프로이센을 지지했지만 많은 수의 미국인들은 비록 매우 깊지는 않더라도 독일에 대한 긍정적인 인상이 강했기 때문에 독일을 지지했다. 당시 미국인들은 독일을 “지적이며 근면한 인민들의” 국가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미국인들은 독일은 종교의 자유를 가진 국가이며 국민들은 교육을 중요시하며 문학, 음악, 철학 그리고 과학에서 높은 수준에 도달한 국가라는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또 프로이센의 군사적 전통에 대해서도 개별 인물들의 장점을 위주로 보고 있었다. 예를 들어 프리드리히 대왕은 작은 나라인 프로이센을 압도적으로 많은 적들로부터 지켜냈으며 폰 스토이벤(Friedrich Wilhelm von Steuben) 남작은 미국의 독립을 지원했고 또 뷜로우(Friedrich von Bülow)는 워털루 전투에서 웰링턴을 도와 나폴레옹을 물리쳤다는 식이었다.

또 미국언론들은 북독일 연방과 개별 가맹국들이 남북전쟁 당시 북부 연방을 지지했으며 독일의 자본가들이 개별적으로 연방 정부를 지지했음을 상기시켰다. 또 현재의 프로이센 지도자들은 미국이 남북전쟁에서 연방정부를 유지하기 위해 싸웠듯 독일 민족으로 이뤄진 연방국가를 만들기 위해 고분분투하는 것으로 보도되었다. 뉴욕 헤럴드(New York Herald)는 이 매체가 종종 그랬듯 과장적인 어조로 “미국인들은 빌헬름 국왕과 비스마르크 수상이 그동안 분열되었던 위대한 민족을 정치적, 경제적으로 통합하려는 신의 섭리를 수행하는 도구라고 보고 있다”고 보도했다. 물론 프로이센의 보수적인 융커 지주층에 대한 비판적 여론도 있었지만 상당수의 미국인들은 머지 않아 독일에서도 사회적, 문화적, 경제적 진보가 이뤄지면 자연히 정치적 자유화도 이뤄질 것이라고 낙관적으로 보고 있었다. 로드 아일랜드의 한 유력 일간지는 “독일은 프랑스에 비해 훨씬 자유주의적인 헌법을 가지고 있으며 독일의 인민들은 자유를 지향하는 성향이다”라고 주장했다.

독일에 대한 지지 여론의 배후에는 독일인들이 19세기에 미국에 이주한 이민자 중 가장 큰 민족집단이라는 이유도 있었다. 실제로 1870년 당시 외국에서 이주해온 1세대 미국시민 중 30%가 독일계였다. 1860년대에 독일계 미국인들 대다수는 공화당을 지지했는데 이것은 이들 중 상당수가 노예제를 반대했으며 또 강력한 연방 지지자였다는 것을 뜻했다. 1870년에 미국에서 가장 규모가 많은 외국어 언론이었던 독일어 신문들은 앞다투어 프랑스의 패배를 환영하고 독일 연방의 승리와 새로 탄생한 독일 제국을 찬양했다. 자유주의적 성향의 독일계 미국인들은 프로이센의 군사제도에 대해 상반된 견해를 보였다. 독일에서 군생활을 했으며 1848년 혁명이 실패한 뒤 미국으로 이민 온 하인첸(Kark Heinzen)은 프랑스의 패배와 독일 제국의 수립에도 불구하고 프로이센식 군사제도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1848년 혁명당시 바덴(Baden)의 혁명 지도자 중 하나였으며 프로이센의 개입으로 혁명이 실패한 뒤 미국으로 망명한 헤커(Friedrich Hecker)는 대다수가 지지하는 입장에 섰다. 1871년에 세인트 루이스에서 있었던 독일의 승전 축하 행사에서 주 연설자로 나선 그는 독일이 거둔 군사적 승리를 찬양하고 의무교육제도와 국민개병제야 말로 독일 군대가 진정한 평등적 집단임을 보여준다고 주장했다.

나폴레옹 3세 치하의 프랑스는 왕정에 충성하는 정규군에 의존하고 있었다. 나폴레옹 3세는 군대내의 사회적 분열을 우려했기 때문에 징집병의 비중을 줄이는 정책을 취했다. 그 결과 1870년 전쟁에서 프랑스군은 빈농과 도시 빈민, 그리고 북아프리카 식민지 출신(주아브나 투르코)의 장기복무 직업군인에 의존하고 있었다. 프랑스군은 독일군에 비해 훨씬 사거리가 긴 우수한 소총으로 무장하고 있었지만 이것은 프로이센의 우수한 훈련과 애국심, 그리고 프로이센군의 지휘관들에 의해 압도되었다.(그리고 포병의 경우 프로이센이 우세했다) 전쟁이 벌어진지 겨우 한달도 채 안된 1870년 9월 1일의 스당 전투에서는 나폴레옹 3세는 그의 군대 10만과 함께 항복했다. 그리고 3일뒤 파리의 민중은 봉기를 일으켜 제정을 무너뜨리고 공화정을 선포했다.

(후 략)

John Whiteclay Chambers II, 『American View of Conscription』The People in Arms : Military Myth and National Mibilization since the French Revolution,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3, pp82~85

2007년 9월 13일 목요일

오늘 산 책 한권


길을 가다가 우연히 범한서적이라는 서적 수입회사에서 책을 저가에 처분하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뭘 팔고 있나 해서 가 보니 주로 해리포터같은 것들이 많이 나와 있더군요. 그런데 그 중에서 유독 튀는 책이 하나 있었습니다.

네. 바로 이 책입니다.

이 책을 잠깐 뒤적이고 있으니 책 파는 아주머니(?)가 "5,000원에 드릴테니 사가세요" 라고 하시더군요.

헉. 5,000원? 아무리 페이퍼백이라지만 깨끗한 새책을 이정도 가격에 구할 기회가 또 오기는 쉽지 않을터.

그래서 얼씨구나~ 하고 샀습니다.

지도도 충실하고 내용도 재미있게 서술된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미리견 태조 폐하의 치적을 담고 있으니 경건한 마음으로 일독할 생각입니다. 히히히.

2007년 9월 12일 수요일

로마군의 중장기병은 어느 정도 규모였을까?

번동아제님이 쓰신 고수전쟁 당시 수나라 기병 부대의 편성에 대한 글을 읽고 나니 로마의 경우는 어땠을까 하는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진 로마군과 관련된 책을 몇 권 뒤져서 계산을 대략 한 번 해 봤습니다.

몇몇 연구자들의 2차 문헌을 가지고 대략 추정한, 정확성은 전~혀 기대할 수 없는 글이니 진지하게(?) 받아들이지는 마시고 그냥 재미삼아 한번 읽어 주셨으면 합니다.

로마군에 중기병이라는 병과가 등장한 것은 생각보다는 제법 이른 시기입니다. 이르면 1세기 중엽(68년, 유대전쟁 당시)에서 늦어도 2세기 초 사이에는 로마군에도 중기병창(kontos)를 장비한 기병부대가 확인된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후 로마군에는 지속적으로 중기병이 증가합니다. 그리고 숫자만 늘어나는 것도 아니고 종류도 제법 다양해졌던 모양입니다. 로마군을 연구하는 군사사가들은 문헌상에 남아있는 로마군의 기병 병과가 보병 보다 다양하다는 점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3~4세기 경에 이르면 로마군의 중기병 부대는 scutarii, promoti, stablesiani, 그리고 clibanarii와 cataphracti 등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이 중에서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중장기병, 즉 말갑옷 까지 완벽하게 갖춘 기병은 clibanarii와 cataphracti 두 종류 입니다.

그렇다면 전체 기병에서 중장기병이 차지하는 비중은 얼마나 됐을까요? Hugh Elton의 Warfare in Roman Europe AD 350~425에서는 clibanarii와 cataphracti, 이 두 병과의 기병이 로마군의 전체 기병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중앙군이라고 할 수 있는 comtatenses에서는 대략 15%, 지방군에 해당되는 limitanei에서는 2%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pp.106~107)

그 다음으로는 로마군의 총 병력 중 기병은 얼마나 됐는가가 되겠습니다. 그냥 단순하게 로마군의 전체 기병 숫자에다가 위에서 언급한 Elton의 추정치를 곱해서 중장기병의 숫자를 산출해 보겠습니다.

그렇다면 이 중에서 기병은 대충 어느 정도였을까요?

4~5세기경 동로마와 서로마의 중앙군 및 지방군의 병력 규모는 당연히 학자들 마다 추정치가 차이가 납니다. (로마사 전공자가 아니긴 하지만)Edward N Luttwak의 The Grand Strategy of the Roman Empire에는 후기 로마군의 규모에 대한 여러 학자들의 추정치를 정리해서 실어 놓았습니다. 여기에 따르면 서로마군은 최저(J. Szilagyi의 추정) 226,000(중앙군 94,000/지방군 122,000) 최대(A. H. M. Jones의 추정) 311,000(중앙군 111,000/지방군 200,000)이고 동로마군은 최저(Varady의 추정) 262,000(중앙군 96,300/지방군 165,700) 최대(E. Nischer의 추정) 426,500(중앙군 94,500/지방군 332,000)입니다.

문제는 총 병력에서 기병이 어느 정도냐 인 것인데… 유감스럽게도 Luttwak의 책에는 보병대 기병의 비중에 대해 두리뭉실하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서적에 실린 통계를 이용해 봤습니다.
Warren Tredagold의 Byzantium and Its Army 284~1081에는 Notitia Dignitatum에서 인용한 395년경의 동로마군 편제가 실려 있습니다. 다행히도 여기에는 전체 병력 중 기병의 비중이 나와 있군요. 여기에 따르면 중앙군에서 기병이 차지하는 비중은 20.7%(104,000명 중 21,500명)이고 지방군에서 기병이 차지하는 비중은 동부군이 49.9%(병력 195,500명 중 97,500명), 서일리리쿰군이 44.4%(병력 63,000명 중 28,000명)입니다.

그렇다면 다시 여기다가 위에서 언급한 중장기병의 비중을 넣어서 계산을 해 보겠습니다.

중앙군 : 21,500 ⅹ 0.15 = 3225
지방군 동부군 : 97,500 ⅹ 0.02 = 1950
지방군 서일리리쿰군 : 28,000 ⅹ 0.02 = 560

395년경 동로마군의 중장기병은 대략 5,735명으로 나옵니다.

그리고 다시 위에서 언급한 Luttwak의 저서에 실린 수치를 가지고 Notitia Dignitatum의 기병 비율과 Elton이 추정한 기병 중 중장기병의 비중을 가지고 계산하면 대략 이런 결과가 나옵니다.

동로마군의 중장기병(4~5세기경)
총 병력 426,500 기준 : 중앙군 2,977 지방군 3,320
총 병력 262,000 기준 : 중앙군 3,033 지방군 1,657

서로마군의 중장기병(4~5세기경)
총 병력 311,000 기준 : 중앙군 3,497 지방군 2,000
총 병력 226,000 기준 : 중앙군 2,961 지방군 1,220

신뢰도는 전혀 기대할 수 없는 심심풀이 수준의 계산이지만 나름대로 꽤 재미있는 결과가 나온 것 같습니다.^^

2007년 9월 11일 화요일

이현상 평전 - 안재성

얼마전에 이준님의 블로그에서 이현상 평전과 관련된 글을 읽고 시간이 나는대로 이 책을 한번 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마침 저녁 먹으러 가는 길에 종각역의 반디 앤 루니스에 들렀는데 인문서적 코너에서 이 책이 눈에 확 띄더군요.

책 디자인도 예쁘게 잘 되어 있고 저자도 제법 재미있게 읽었던 경성 트로이카의 안재성씨 인지라 어떤 내용인가 보자 하고 집어서 쭉 훑어 봤는데…

아아. 대 실망입니다.

대한민국의 평전 문화가 너무 수준이 낮다는 것을 다시 한번 실망했습니다.

열심히 쓰신 저자 분께 죄송하지만 이 책의 수준은 그저 분량만 많은 아동용 위인전에 불과했습니다.

경성 트로이카나 이관술에 대한 책을 읽을 때도 느꼈지만 안재성씨는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애정이 많은 분 같습니다. 그렇지만 최소한 평전을 쓸 때는 그 애정을 자제하는 법도 알아야 하는데 이현상 평전은 그 도가 지나쳤습니다. 내용 중 상당수가 빨치산을 미화하는 것이아니냐 싶을 정도로 유치한 표현으로 이뤄져 있더군요. 하도 한심한 문장이 많아서 여기다가 옮겨 적지는 않겠습니다. 그리고 책 부록으로 딸려 있는 이현상 약력을 보니 1950년 여름에 미군 후방에서 유격전을 펼치면서 미군 수백명을 사살(!) 했다는 허무맹랑한 이야기도 별다른 교차 검증 없이 실어 놓았습니다.

유감스럽지만 평전이라는 제목을 달기에는 책의 수준이 낮았습니다. 문장이 깔끔하다는 것을 빼면 연예인 팬클럽의 오빠 찬양글과 거의 다를바가 없더군요.

책을 읽다 보니 저자는 빨치산 활동에 대해 약간의 낭만 같은 것도 가지고 있는 것 같던데 앞으로 책을 쓸 때는 그런 망상은 버리고 썼으면 싶습니다. 하긴, 망상에 가까울 정도의 애정이 없었다면 이현상 같은 인물의 평전을 쓰기도 힘들었을 것 같습니다.

한국의 사회 특성상 이현상 같은 사회주의자에 대한 평전이 많을 수는 없으니 이 책은 최소한 그 희소성으로는 가치가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평전으로서는 수준 미달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특별히 한국전쟁이나 이현상에 관심 있는 분이 아니라면 비추입니다.

2007년 9월 8일 토요일

Löwen von Carentan - Volker Griesser


제 나쁜 습성 중 하나는 표지 디자인이 촌스러우면 책 내용도 신통치 않을 것이라는 선입견을 가지는 것 입니다. 그래서 요즘은 표지 디자인이 신통치 않은 책은 더 신경써서 살펴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에서 나오는 책이라면 이것이 가능하지만 외국 서적이라면 어렵습니다. 특히 아마존 같은 곳에서 미리 보기를 지원하는 책이 아닌, 작은 출판사의 책이라면 외국 포럼의 서평에 의존해야 하는데 이런 것 조차도 없을 때는 난감하기 그지 없습니다. 특히 요즘 같이 쪼들릴 때에는…

이번에 도착한 책 중 하나인 Löwen von Carentan도 뭔가 촌스러운(또는 오덕스러운?) 표지 때문에 살지 말지 고민하다가 큰 마음을 먹고 지른 물건입니다. 그런데 다행히도 한번 훑어 보니 표지의 촌스러움을 훌륭한 내용으로 완벽히 커버하고 있어 안심이 됩니다.

이 책은 예전에 페리스코프 포럼에 쓰던 제 6강하엽병연대의 노르망디 전투의 수정판을 쓰려고 산 책입니다. 예전에 썼던 글은 Willi Kammann의 제 2강하엽병사단사인 Der Weg der 2. Fallschirmjagerdivision과 Hans-Martin Stimpel의, Die deutsche Fallschirmtruppe 1942-1945 제 2권을 기반을 썼기 때문에 부족한 부분이 많았습니다. 특히 Stimpel의 책에는 제 6강하엽병연대의 작전이 카랑탕 전투까지는 잘 서술된 편이지만 이후 제 2SS 기갑사단에 배속되어 벌인 7월~8월의 방어전은 부실하게 묘사가 되어 있어서 더 이상 쓰기도 곤란했습니다.

나중에 자료를 조금 더 보강해서 다시 쓰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제 6강하엽병연대 부대사가 나오다니 매우 즐겁습니다. 추가로 이 연대의 지휘관이었던 하이테의 회고록을 입수하는 대로 제 6강하엽병연대의 노르망디 전투를 다시 쓸 생각입니다.

2007년 9월 6일 목요일

책은 이렇게 만들어진다

(전략)

그러나 과연 독일 장군들은 리델 하트가 생각했던 것 처럼 정치와는 무관한 군인들이었을까? 또 독일 장군들은 리델 하트와의 대화를 통해 자신들의 2차대전 경험을 바탕으로 군사사에 대한 심도 깊은 논의를 하려고 했을까? 또는 리델 하트에게 한 말들은 아무런 의도가 없는 것이었을까?

(리델 하트와의 대화 중에 있었던) 한 사건은 독일 장군들이 리델 하트를 어떤 생각을 가지고 대했는지 보여준다. 그리즈데일(Grizedale) 수용소에서 근무하던 장교 중 한 명인 헨리 펄크(Henry Faulk) 중령의 회고 중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1945년 12월 28일에 리델 하트가 독일 장군들에게 면담을 신청했을 때 펄크 중령은 그들에게 리델 하트가 찾아 왔으니 만날 생각이 있는지 물었다. 그러자 독일 장군들은 모여서 리델 하트와 이야기 할 때 어느 정도 선 까지 정보를 알려 줄 것인지에 대해 논의했다. 독일어가 유창했던 펄크 중령은 독일 장군들의 대화를 엿듣고는 이것을 그대로 리델 하트에게 이야기 해 주었다. 그런데 리델 하트는 펄크 중령의 말을 듣고도 그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다는 것이다. 펄크 중령은 아마도 리델 하트는 독일 장군들은 엘리트적이고 기사도 정신에 바탕을 둔 집단이므로 신사적으로 행동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자신의 말을 믿지 않았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그런데 정말 리델 하트가 펄크 중령의 말대로 독일 장군들의 인격을 믿고 있었다면? 전범재판이 시작될 무렵인 1945/46년 겨울에 리델 하트는 독일 장군들에게 우호적인 몇 안되는 인물이었다. 게다가 리델하트 자신도 영국측의 전범 기소 책임자인 쇼크로스(Hartley Shawcross)를 만난 1945년 9월 무렵부터 전범재판의 추이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리델하트는 자신이 전쟁성과 영국 정부의 고위층에 가지고 있는 모든 연줄을 동원해 독일 장군들을 도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Alaric Searle, "A Very Special Relationship : Basil Liddell Hart, Wehrmacht Generals and the Debate on West German Rearmament 1945~1953", War in History Vol 5 Issue 3,(1998), pp.332~333

이 이야기는 리델 하트가 포로가 된 독일 장군들을 면담하면서 The Other side of the Hill의 저술을 준비할 무렵의 이야기입니다. 많은 분들이 잘 아시다 시피 The Other side of the Hill은 2차대전 초기 아주 큰 삽질로 거의 매장(???) 당할 뻔 한 리델 하트가 다시금 명성을 되찾도록 해 준 저작이고 또 냉전시기 독일 국방군 장성들에 대한 우호적인 시각이 정립되는데 큰 기여를 한 저작입니다.

이 글의 저자인 Alaric Searle은 2차대전이 끝날 무렵 군사이론가와 군사사가로서의 명성에 타격을 받았던 리델 하트가 자신의 명성을 되찾기 위해 포로가 된 독일 장군들에게 우호적으로 접근했으며 독일 장군들은 리델 하트의 이런 점을 잘 이용해 자신들에게 유리한 여론을 조성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펄크 중령의 증언은 리델 하트의 저작이 가지고 있는 한계를 잘 지적해 주는 것 같습니다.

진위 여부가 어떻든 간에 리델 하트는 자신의 명성을 상당 부분 회복하는데 성공했으며 독일 장군들은 리델 하트를 이용해 독일 장교단은 나치나 히틀러의 범죄와는 무관한 애국적인 집단이었다는 이미지를 효과적으로 퍼트릴 수 있었습니다. 리델 하트는 지속적으로 독일 장군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데 만토이펠은 프랑스에 억류되어 있던 무장친위대 장군 비트리히를 구하기 위해서 리델 하트의 협조를 이끌어 내기도 했다지요.

사실 진위 여부를 떠나서 이런 종류의 뒷이야기들은 꽤 재미있습니다.

어떤 승려와 목사의 말싸움 중에서

좀 오래전에 어떤 목사가 불교도들을 개종시키겠노라고 공개적으로 종교 토론을 신청한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토론에 나온 승려 한명이 이런 말을 했다더군요.

만약 그 누군가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항상 볼 수 있는, 이 세상의 상식을 초월한 지혜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이러한 눈을 갖고 있는 것 만으로도 그것은 지옥과 같은 괴로움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불타에게 그러한 지옥의 눈의 지혜는 없는 것 입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그러한 지혜의 눈을 가지고 있다고 기독교의 친구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여호와께서는 이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나쁜일들, 예를 들어서 인간들이 대변을 보고 있는 것, 혹은 소변을 보는 것 등을 항상 보고 계시는 것이 아닐까요?

이와 같이 이 세상에서 참으로 차마 볼 수 없는 것들을 언제나 보고 계시는 여호와의 괴로움은 그야말로 지옥의 괴로움에 비유할 수가 있지 않겠습니까?

실론의 승려 모호티왓테 구나난다가 불교도들을 개종시키기 위해 여호와의 전지전능을 자랑하는 영국 목사 데이비드 데 실바를 조롱하면서

석오진 편역, 『파아나두라 대논쟁 : 기독교인가 불교인가?』, (운주사, 2001), 202쪽

과연, 전지전능한 것이 다 좋은건 아닌가 봅니다.

2007년 9월 4일 화요일

슈페어가 1945년 3월 18일 히틀러에게 보낸 비망록

알베르트 슈페어, 베를린 W 8, 1945년 3월 18일

경제의 붕괴가 기정 사실화 된데다 국토가 적에게 함락되는 속도도 빨라지고 있기 때문에 라인강과 오데르강 선을 사수하기 위해서는 특단의 조처가 필요합니다.
라인강과 오데르강 양 쪽이 돌파된 상황에서 방어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중무장한 적군이 두 강을 도하하기 시작한다면 강력한 기동력을 바탕으로 기동전을 수행할 것이기 때문에 장비와 연료가 부족한 아군은 속수무책이 될 것 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 8주간의 전투에는 동원 가능한 전 병력을 투입해야 할 것이며 여기에는 어떤 예외도 없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동부전선과 서부전선의 각 집단군 사령관들은 자신들의 관할 구역에 있는 모든 병력 자원을 투입하는데 전권을 가져야 할 것 입니다.
만약 병력 동원이 제때 이뤄지지 못하고 많은 수의 아군 병력이 여전히 편성 지역에서 훈련중인 상태에서 적군이 두 강을 도하해 공세로 나올 경우에는 1940년에 프랑스군이 아군에게 당했던 것과 마찬가지의 재앙이 벌어질 것 입니다.
또한 현재의 전선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동원 가능한 각 지역의 국민돌격대도 모두 투입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부터 제국의 모든 병력을 라인강과 오데르강 선을 사수하는데 투입해야 합니다.

각 집단군 사령관들은 어떤 문제가 있더라도 자신의 관할구역에 있는 모든 군 병력에 대해서 절대적인 통제권을 가져야 하며 이렇게 해서 자신들의 의도대로 작전을 펼쳐야 합니다.
전선에 배치된 대공포 부대들은 반드시 단일한 지휘관의 통제를 받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지휘 범위가 너무 넓어져 신속한 판단이 필요할 경우 어려움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노르웨이 북부와 중부, 이탈리아 북부의 산업기반은 현 상황에서는 교통망의 문제로 전혀 활용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지역의 경제적 중요성은 없는 것으로 보고 이 지역에 있는 부대들을 차출해 독일로 이동시켜야 합니다.

위에서 언급한 모든 조치를 취한 후에야 라인강과 오데르강의 상황을 어느정도 안정시킬 수 있을 것 입니다.
한 걸음의 후퇴만으로도 패배는 가속화 될 것 입니다. 몇주만이라도 현재의 전선을 사수하는데 총력을 다 한다면 적은 우리의 단호한 의지를 알게 될 것이고 이렇게 해서 우리는 조금 더 유리한 조건에서 전쟁을 종결할 수 있을 것 입니다.

슈페어

Heinrich Schwendemann, ‘Drastic Measures to Defend the Reich at the Oder and the Rhine…’ A Forgotten Memorandum of Albert Speer of 18 March 1945, Journal of Contemporary History, Vol 38, 2003, pp.605~606

슈페어가 1945년 3월 18일에 히틀러에게 보낸 이 글은 상당히 흥미로운 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슈페어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전쟁말기에 히틀러의 초토화 명령에 반대했다는 점을 강조해 전쟁의 책임을 회피하려 했습니다. 슈페어는 광기에 휩싸인 히틀러가 패배에 직면해 독일 전체를 초토화시키려 했지만 자신은 전후 독일의 재건을 위해 히틀러에게 반대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런 종류의 문건들을 놓고 보면 1945년의 어느 시점까지는 슈페어 자신도 연합국과 유리한 조건에서 휴전이 가능할 것이라는 희망을 조금이라고 가지고 있었다는 것 으로 보입니다. 즉 이 글에서 나타나듯 슈페어 자신도 총통 만큼이나 유리한 조건에서의 종전 가능성을 믿고 필사적으로 저항을 계속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아마도 연합군이 라인강을 도하해 파죽지세로 밀고들어올 무렵에는 슈페어의 생각도 상당히 바뀐것 같긴 합니다만.

각 지역의 군지휘관들에게 절대적인 권한을 부여한다던가 아직 훈련도 마치지 못 한 병력이나 국민돌격대까지도 모두 전선에 투입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대목에서는 완전한 패배라는 절망적인 상황에 직면한 슈페어의 정신적 공황이 느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