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2월 31일 월요일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의 카이텔에 대한 어떤 미국인의 호의

예전에 카이텔의 마지막 편지를 번역하면서 의외로 담담하고 자기 확신에 찬 모습이 인상적이라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아무래도 전통 있는 독일 장교단의 일원이었으니 비록 패장이고 전범일 망정 최소한의 자존심을 지키려 노력했었겠지요. 이런 모습은 연합국 측에도 영향을 줘서 독일에 우호적인 인사들의 동정을 받았던 모양입니다. 오늘 뉘른베르크 전범재판 당시 자문단장(Chief of Counsel for the Prosecution of Axis Criminality) 이었던 도드(Thomas Joseph Dodd)의 편지를 읽다 보니 카이텔의 평소 태도가 미국인들에게도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뉘른베르크, 독일, 1946년 4월 3일

내 사랑 그레이스(도드의 아내),

리벤트로프의 차례는 끝났고 카이텔의 차례야. (중략) 카이텔은 이날 아침에 재판정에 섰고 나는 그에게 최대한 좋은 모습을 보이라고 말해야 했어. 무슨 까닭인지 나는 그에게 동정심을 느꼈거든. 나는 카이텔이 정직한 군인의 모습을 보여서 매우 기뻤어. 물론 카이텔은 유죄가 분명하지만 내 생각에는 다른 전범들에 비하면 가벼운 죄일 뿐이야. 카이텔은 하루나 이틀 정도 더 재판에 나와야 할 것 같아. (후략)

Christopher J. Dodd, Letters from Nuremberg : My father’s narrative of a quest for justice, Crown Publishing, 2007, pp.278~279

도드가 공정한 재판을 주장하고 또 독일측에 호의적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카이텔은 상당히 좋은 인상을 주었던 것 같습니다. 카이텔의 마지막 편지를 보더라도 그는 최후까지 군인으로서의 긍지를 잃지 않기 위해 노력했던 것은 분명합니다.

2007년 12월 30일 일요일

드디어 나왔습니다!

오래 전 부터 출간된다는 소식이 들려오던 Blitzkrieg -Legende의 한국어판이 드디어 나왔습니다!

독소전쟁사를 번역하신 권도승 선생님이 번역판의 출간을 축하하는 자리를 마련하셔서 번역자인 진중근 대위님을 모셨는데 이 어린양은 여기에 꼽사리를 끼었다가 대위님으로 부터 책을 선물 받는 팔자에도 없는 호강을 하게 됐습니다.



한국어 판의 표지 디자인이 독일어판 보다 훨씬 깔끔하고 좋은 것 같습니다.책 크기는 한국어 판이 가로로 조금 더 큰 것 같은 느낌이군요.

이 책의 독일어 판에 대한 서평으로는 채승병님이 쓰신 글이 있습니다. 이 외에도 독일어 판이나 영어판에 대한 서평은 쉽게 찾으실 수 있을 것 입니다. 한국어 판에 대한 감상은 책을 정독하며 차근 차근 쓰려고 합니다. 엄청난 저작이 나왔으니 만큼 군사사에 관심있는 분들께는 많은 도움이 되리라 믿습니다. 제가 아는 범위 내에서 2차세계대전의 작전사에 대한 제대로 된 연구서적이 국내에 출간되기는 사실상 이 책이 거의 처음이라고 할 만한데 앞으로도 계속해서 우수한 저작들이 많이 소개되었으면 합니다.

사실 이 책은 워낙 유명하다보니 국내에서도 이미 읽으신 분들이 많을 텐데 이것이 한국어로 옮겨지는 것은 생각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일조각의 특성상 꾸준히 나가는 스테디 셀러가 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이렇게 좋은 책이 한국어로 나오기 까지 수고하신 진중근 대위님과 일조각에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2007년 12월 28일 금요일

1940년 5월~9월 독일공군의 항공기 손실율

아래 글과 관련해서 1940년 5월 부터 9월까지 독일 공군이 입은 항공기 손실에 대해 올려 봅니다. Williamson Murray의 The Luftwaffe 1933~45 : Strategy for Defeat, 54쪽에 잘 정리된 표가 있군요.


실제 1개월 평균 손실율은 피해가 가장 막심한 Bf-110의 경우 19% 정도입니다. 피해가 가장 적은 단거리 정찰기들은 5%대군요. 평균 손실율은 5개월간 57%인데 1개월 평균 11%를 조금 넘는 규모입니다. 그렇다면 전투가 격렬하게 전개된 시기의 손실율은 어떨까요? 같은 책 53쪽에는 영국 본토 방공전이 본격적으로 전개된 7월 부터 9월까지의 손실율이 나와 있습니다.


영국 본토 방공전이 전개된 시기의 손실율은 총 37%로 1개 월 평균 12% 정도입니다. 즉 5~9월의 전체 평균과 큰 차이가 없습니다.

아래의 글에서 예측한 1개월 평균 30%의 손실 보다는 훨씬 적지만 그래도 손실율이 굉장히 높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Bf-110의 손실율은 가공할 수준이군요.

2007년 12월 27일 목요일

2차대전 초기 항공전 양상에 대한 당시의 분석

항공기와 조종사의 소모율이 생산량과 보충되는 규모를 훨씬 상회하고 있다.

독일군이 네덜란드와 벨기에 침공한 이후 벌어진 규모의 공중전이 계속된다면 양군의 공군력은 수개월 이내에 항공 관계자들이 예상한 한계점 까지 떨어질 것으로 보인다.
나치 공군은 개전 첫 날에만 100대의 항공기를 격추당했다. 신뢰도 있는 손실 집계는 아직 들어오지 않았지만 항공기 손실율(ship mortality rate)은 위에서 주장한 수치가 거의 정확한 것으로 보인다. 항공기 100대와 함께 조종사 150명도 손실된 것으로 보인다. 이 손실율은 독일의 일일 최대 항공기 및 엔진 생산량을 상회하는 것인데 독일의 항공기 생산량은 한달 평균 2,500대 또는 일일 평균 80~85대로 추정되며 조종사 보충율도 손실보다는 낮을 것이다. 전투기를 생산하는 데는 수일이면 충분하고 폭격기는 몇 주면 충분하다. 하지만 독일이 조종사 교육기간을 아무리 단축한다 하더라도 최소 5개월 미만으로 단축하기는 불가능하다.
영국군의 손실은 아직 알려지 있지 않으나 영국의 일일 항공기 생산량은 45대 미만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영국공군의 손실이 높지 않더라도 이것은 영국공군이 독일공군 보다 우수하다는 증거는 될 수 없으며 영국공군은 아직 가용 가능한 항공기를 총 동원한 것이 아니다. 영국 정부는 독일이 벨기에를 완전히 점령하고 이곳을 기지로 영국을 공격할 경우에 대비해 예비 기체를 비축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달리 말하면 오늘날의 항공전은 기술 한계의 측면에서 얼마나 항공기를 빨리 만드느냐 그리고 인적 한계의 측면에서는 얼마나 빨리 조종사를 교육시킬 수 있느냐의 양상으로 기울고 있다.
조종사의 교육에는 많은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조종사 보충이 좀 더 심한 제약을 받는다. 독일에 있어서는 연료 문제가 전격전에 제동을 거는 요인이다.
현재 연합군은 조종사가 15,000명에 불과하다. 만약 하루 평균 50대의 항공기를 잃는다면 연합군은 하루 평균 75명의 조종사를 잃는 것이며 한 달이면 2200명에 달하게 된다. 이것은 현재 교육시켜 배출하는 조종사의 숫자를 초과하는 것이다. 영국의 항공 교육 체계는 충분한 항공인력(조종사, 방어기총사수, 관측사 등)을 배출할 수 없으며 조종사의 경우만 따로 보면 교육이 최고로 이뤄지더라도 다음 해에는 조종사가 부족할 것이다. 또한 독일도 하루 최대 75명 이상의 조종사를 배출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각각 다른 공군의 감소율은 항공기 손실과 생산량의 차이에 달려있다. 현재 독일공군의 전력은 11,000대에서 20,000대 사이로 추정된다. 비록 독일의 항공기 생산량이 많더라도 하루 평균 100대의 손실이 계속 누적된다면 몇 달 안에 문제의 심각성을 느끼게 될 것이며 조종사의 손실은 그보다 더 빠를 것이다. 연합군도 비슷한 비율로 손실을 입는다면 한달 이내에 전력이 현재의 절반 수준으로 떨어질 것이다. 현재 연합군의 공군력은 영국 공군이 8,000~11,000대 정도이며 프랑스 공군은 3,500~6,000대 정도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중 많은 수는 중동과 기타 식민지에 배치되어 있다.
현재의 손실율은 전문가들이 1939년 9월 3일 이전에 예측하던 것 보다 더 높다. 미국 육군항공대는 월 손실율을 25%로 잡고 있었고 영국공군은 30%, 독일공군과 이탈리아 공군은 각각 50%와 80%로 잡고 있었다. 이 손실율은 공군의 총 전력에 대한 비율이었다. 간단히 말해 손실율이 100%라면 한 달에 필요한 보충용 항공기는 공군 전체 보유량과 같다는 뜻이며 이것은 현재의 공군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규모이다. 독일이 현재 하루 평균 100대의 항공기 손실을 감당하기 벅차다는 것은 즉 독일이 월 평균 30%의 손실율을 감당하기 어렵다는 것을 의미한다.
조종사와 항공기의 손실은 얼마 안 있어 공군을 대규모로 운용하는 것을 사치로 만들 것이다. 공군력은 보충이 손실을 메꿀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유지해야 한다. 이것은 현재 각 국이 보유한 공군력 보다 훨씬 적은 수준이 될 것이며 교전국들은 많아야 수천대 정도의 항공기를 일선 전력으로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에서는 항공기 생산공장에 대한 폭격은 분석요소에서 제외했음을 밝힌다. 그 이유는 현재 항공기 공장에 대한 폭격이 항공기 생산에 어느 정도 지장을 주는지 알 수 있는 자료가 없기 때문이다. 단지 폭격이 항공기 생산을 감소시킬 것이라는 것 말고는 확실한 것이 없다. 항공기 공장에 대한 폭격은 유지할 수 있는 공군력의 규모를 더 줄이겠지만 그게 어느 정도 수준인지는 단언하기 어렵다.

Science News Letter 1940년 5월 25일

결론은 맞는데 그 결론을 이끌어 내는데 근거로 든 사실들은 황당한 수준입니다. 특히 독일공군에 대한 과대평가는 상당히 심각한 수준입니다. 참고로 서부 전역 개시 당시 독일 공군의 총 보유 기체는 5500대 가량이었습니다. 프랑스의 경우는 개전 당시 3천대 정도의 항공기를 보유했으니 이 글에서 추정한 최저치를 적용할 경우 얼추 비슷하다고 할 수 있는데 영국의 경우는 독일과 마찬가지로 과장이 좀 심한 편 입니다. 손실율의 경우도 황당할 정도로 높게 잡고 있지요.

엉터리 자료를 가지고도 그럭 저럭 말이 되는 결론이 도출되니 참으로 신기한 일 입니다.

2007년 12월 25일 화요일

Letzte Divisionen : Die Panzerdivision Clausewitz / Die Infanteriedivision Schill – Klaus Voss / Paul Kehlenbeck


어제 도착한 책 중 한 놈 입니다.

책 제목을 보시면 아시다시피 이 책은 독일이 말 그대로 막장에 치달은 1945년 전쟁 말기에 편성한 이름만 거창한 사단 두 개의 사단사입니다. Klaus Voss가 클라우제비츠 사단사를 집필했고 Paul Kehlenbeck이 이보다 분량이 더 적은 쉴 사단사를 집필했습니다. 원래 이 사단사를 산 이유는 쉴 사단쪽에 더 관심이 있어서 산 것인데 실제 내용은 클라우제비츠 사단사가 더 많고 충실한 편입니다.

클라우제비츠 사단사는 자료의 부족을 감안하면 상당히 잘 집필되었다는 생각입니다. 먼저 1945년 봄의 절망적인 전황과 전반적인 물자상황(전차, 중화기, 연료)에 대해 설명을 한 뒤 클라우제비츠 사단의 편제였던 45년형 기갑사단 편제에 대해서 해설하고 있습니다.
다음으로는 잡다한 부대를 긁어모아 클라우제비츠 사단이 편성되는 과정을 설명하고 이어 서부전선에서 영국군을 상대로 수행한 첼레(Celle)와 윌첸(Uelzen), 라우엔부르크(Lauenburg) 전투를 다루고 있습니다. 단편적인 문서자료와 독일 참전자들의 증언에 의존하는 한계를 피하기 위해서 맞서 싸운 영국 참전자들의 증언도 함께 인용하고 있으며 영국측의 시각에서 바라본 전투의 상황도 함께 서술되어 있습니다.

쉴 사단사는 분량이 적습니다. 책 전체는 부록까지 포함해 375쪽인데 쉴 사단사는 이 중에서 249~308쪽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별도의 단행본으로 만들기는 턱없이 적은 분량이지요.
클라우제비츠 사단사와 비교하면 서술이 상당히 부실합니다. 실제 남은 기록도 거의 없는 것 같아서 16페이지 정도는 참전자들의 일기로 때우고 있습니다.

위에서도 언급했듯 쉴 사단사 때문에 샀는데 쓸만한 건 클라우제비츠 사단사였습니다. 그래도 쉴 사단에 대한 정보라고는 겔러만(Gellermann)이나 티케(Tieke)의 책에 단편적으로 인용된 것이나 다른 개설서들에 정리된 정도 밖에 없었는데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것이 하나 생겼으니 썩 나쁘지만은 않습니다.

2007년 12월 23일 일요일

지나치게 심각한 영국인들 - 1941년 듀잉(Dewing) 위원회가 예상한 독일군의 영국상륙계획

좀 황당하더라도 웃진 마세요.

1940년 가을의 시점에서 영국군 수뇌부는 여전히 히틀러가 영국을 침공할 것 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 판단은 당시 기준으로는 물론 오늘날의 우리가 생각하기에도 매우 합리적인 추론에 의해 세워진 것 입니다. 즉 독일은 장기전과 두 개의 전선에서 동시에 싸우는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1941년 중으로 영국에 대한 전면적인 침공을 단행할 것 이라는 논리였습니다.

이 때문에 영국은 1940년 11월에 독일군의 예상되는 침공에 대비하기 위한 일환으로 독일측의 의도를 분석하기 위한 FOES (Future Operations Enemy Section)를 설치했습니다. 이 조직은 1941년 3월에 해체됩니다만 독일의 침공에 대한 대비는 계속하게 됩니다. 흥미롭게도 영국은 독소전이 개시된 이후에도 독일군의 영국 본토 침공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1941년 7월, 영국 전쟁성은 혹시라도 있을 지 모를 독일의 본토 침공에 대비하기 위해서 작전국장(Director of Military Operations)인 듀잉(R. II. Dewing) 소장을 책임자로 하는 소위원회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위원회는 1941년 12월 독일군이 1942년 봄에 영국 본토를 침공할 경우를 상정하고 예상되는 침공 작전에 대한 보고서 -"Invasion 1942: Form and Scale of Attack”– 를 제출합니다. 이 보고서의 내용은 현재의 시각에서 봤을 때 독일군의 공격 능력을 지나치게 과대 평가한 물건입니다만 제법 장대한 스케일 때문에 흥미롭습니다. 이 보고서의 내용은 대략 이렇다고 합니다.

이 보고서는 1942년에 독일이 소련을 KO 시킨 뒤 서부전선을 제외한 전 전선에서 전략 방어를 실시하고 그 대신 모든 역량을 영국본토 침공에 쏟는다는 상황을 가정하고 만들어졌습니다. 이 보고서가 가정하고 있는 독일군의 공격계획은 그야말로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즉 모든 전력을 단기간에 집중해 영국 본토에 상륙한다는 것 이었습니다.
이 보고서는 독일군이 기상상태가 호전되기 시작하는 1942년 4월 1일에 침공할 것을 가정하고 구체적인 독일군의 작전과 투입 병력 규모에 대해 추정했습니다. 여기에 따르면 독일군은 1940년 여름과 같은 축차적인 소모전을 피하고 해군의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서 훈련부대를 제외한 모든 공군력을 침공 당일에 출동시키고 상륙부대도 동시에 발진시킬 것으로 상정했습니다. 침공 첫 48시간 동안 독일군의 예상 출격회수는 중형폭격기 2,800소티, 급강하폭격기 600소티, 그리고 전투기 4,000소티였습니다. 이렇게 압도적인 전력을 단기간에 투사해 영국 동남부의 제공권을 장악하고 동시에 침공함대도 발진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사실 이것은 너무 엄청난 것이라 내부적으로도 좀 뻥이 센거 아니냐는 논의가 있었다고 합니다.
다음으로 침공부대의 규모도 실제 독일은 꿈도 못 꿀 수준이었습니다. 먼저 공격 첫날 새벽에 16,000명의 공수부대와 100대의 경전차가 상륙해안에 강하, 또는 글라이더로 투입되어 후속 부대가 착륙할 비행장을 확보하고 인근의 전투기 기지를 쑥대밭으로 만들 것 으로 예상했습니다. 다음 단계로는 양동작전을 위해 티르피츠가 주축이 된 호위함대의 호위를 받는 1개 기갑사단과 2~3개 보병사단 규모의 상륙부대가 첫날 요크셔(Yorkshire) 일대에 상륙을 감행할 것 이었습니다. 그리고 주력 상륙부대의 규모도 독일로서는 꿈도 못 꿀 황당한 것 이었는데 방어군을 압도하기 위해서 320척의 전차양륙정, 1,250척의 중형 바지선, 970척의 소형 바지선을 동원해 병력 22만, 전차 750대, 박격포 및 야포 9,000문에 달하는 전력을 침공 첫 날에 램스게이트(Ramsgate)-세인트 마가렛(St. Margaret), 포크스톤(Folkestone)-뉴 롬니(New Romney), 벡스힐(Bexhill)-이스트본(Eastbourne), 워팅(Worthing)-보그너(Bognor) 지구에 투입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영국인들은 독일측이 해군력의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보급로 주변에 엄청난 규모의 기뢰와 해안포를 설치하는 한편 영국 해군을 분산시키기 위해서 160척의 U-보트를 출동시킬 것으로 보았습니다.
첫날 상륙이 성공하면 당연히 후속 부대가 쏟아져 들어올 것 인데 상륙부대의 규모 만큼이나 후속부대의 규모도 황당한 수준이었습니다. 이 계획은 최소한 상륙 8일차 까지 12개 보병사단(이중 8개 사단은 축소편제)과 6개 기갑사단, 그리고 15개 독립기갑여단이 교두보를 통해 투입될 것으로 상정하고 있었습니다.

당연히 이 계획은 당시의 영국인들도 좀 황당한 규모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히틀러가 진짜로 침공해온다면 예상 이외의 미친짓을 할 지도 모른다는 견해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계획이 만들어질 10~12월 무렵에는 당장이라도 소련이 붕괴될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이었으니 히틀러가 다음 단계로 전력을 다해 영국을 칠 것이라고 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영국인들에게 이렇게 심각한 구석도 있었다니 나름대로 재미있습니다.

2007년 12월 21일 금요일

연개소문=뭇솔리니???

조광(朝光) 창간호를 보다 보니 아주 재미있는 구절이 하나 있더군요.

나당(羅唐)이 백제를 멸하고나서는 다시 마수(馬首)를 고구려에게 돌리어 해마다 평양성을 진공(進攻)했으나 번번이 실패하드니 고구려의 大‘뭇소리니’인 개소문이 죽고 그 제자(諸子) 사이에 권력 사움이 일어나매 기회를 타서 나당이 또다시 출병하야 평양성을 에우니 고구려는 이에 그 칠백년의 빛나는 역사가 막을 마치고 말었다.

문일평(文一平) 掌篇新羅史, 朝光, 창간호, 1935년 11월, 275쪽.

푸하하. 이때는 연개소문=독재자=뭇솔리니 였던 모양입니다. 연개소문을 뭇솔리니에 비교하다니 이 양반은 미래의 국수주의적인 후손들이 두렵지 않았나 봅니다. 조광 창간호에는 이탈리아의 에디오피아 침공에 대한 분석기사도 실려 있습니다. 이때만 하더라도 이탈리아가 그렇게 한심한 나라일 것이라고는 대부분 상상도 못하고 있었으니 연개소문의 강인한 인상을 뭇솔리니와 비교할 법도 하군요.

2007년 12월 18일 화요일

[妄想大百科事典] 파란잠바단

한나라당의 준군사조직(paramilitary organization). 당의 상징색인 파란색 점퍼를 입고 다닌다고 해서 붙여졌다.


2007년 12월 16일에 일어난 여의도 폭동 당시 국회의사당 무력진입을 시도하면서 경찰과 난전을 벌여 대내외적인 명성을 떨쳤다. 법과 공권력을 두려워 하지 않을 정도로 용맹이 높으며 특유의 파란 점퍼 유니폼으로 저능아들을 설레게 하고 있다. 이들의 과격함에 충격을 받은 FBI가 ‘파란잠바단’을 국제테러조직 명단에 추가한다는 미확인 정보도 있다.

2007년 12월 17일 월요일

성지 순례 결과

오늘 성지순례를 다녀왔습니다.

지름신께서 이런 축복을 내려 주시더군요.


HMSO에서 펴낸 영국군의 한국전쟁 공간사 입니다. 표지만 약간 상했을 뿐 접착제 냄새까지 풍기는 거의 새 책 이더군요. 유감스럽게도 2권 밖에 없었습니다만....


가격이 고작 5,000원이었습니다!

이토록 지름신의 은혜는 무한하니 이 어린양 그저 찬양, 또 찬양할 뿐입니다.

전쟁은 운빨이다! - 수도사단 기갑연대 1대대의 원산비행장 전투(?)

수도사단 기갑연대가 원산에 입성했을 때 제 1대대장이었던 정세진(丁世鎭) 선생의 회고입니다. 이 황당한 이야기는 잘 아시는 분들도 많으리라 생각됩니다.

‘제 1대대는 비행장을 경계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때 대대 보급관이 시내에서 막걸리를 찾아내어 휘발유 드럼통에서 휘발유를 쏟아버리고 9드럼의 술을 가져왔다.
나는 각 중대에 2드럼씩 나누어 주게 하여 오랜만에 쇠고기를 곁들여 소대별로 회식하도록 하였다. 북한의 10월은 저녁이 되자 날씨가 추워지는데다 행군과 전투에 지친 대대 장병들이 술에 곤드레 취했을 때 였다.

‘적이 역습하고 있으니 대대도 철수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그러나 술에 너무 취해있어 부대행동은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다. 이때 다시 ‘철수하라’는 명령이 내려왔으나 이 실정을 그대로 보고할 수 없었다.
‘여기를 사수하겠습니다’고 白연대장에게 보고하고 말았다. 백연대장은 ‘1개 대대가 빠지지 못하고 적중에 고립되면 곤란하니 즉각 철수하라’고 재차 엄명하여 내가 송요찬 사단장에게 ‘사수하겠습니다’고 보고했더니 ‘빨리 철수하라. 사단이 모두 나왔는데 너희 대대만 안나오면 안돼’하여 ‘사수할 자신 있습니다. 적이 근접해와 전화를 끊겠습니다’고 한 후 아예 모든 유무선을 끊어버렸다.
그런 후 나는 각 중대장에게 ‘종교인이나 술 먹지 않은 사병을 뽑아 경계병으로 배치하되 적이 근접하여도 절대로 사격하지 말라. 적이 사격해와도 응전하지 말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내가 비행장 2층 건물에서 보았더니 몇 대의 적 전차가 굉음을 울리면서 비행장으로 들어오더니 연속적으로 사격을 가한다. 그러나 대대에서는 누구도 응사를 하지 않아 얼마 후 쥐죽은 듯이 고요해졌다. 아군이 없는 것으로 판단했는지 적이 그대로 돌아서 비행장에서 빠져나가는 것을 확인하고 나는 긴 안도의 숨을 내 쉬었다.

아침에 사단이 재 공격해 올 때 나는 대대를 철도 옆에 배치하여 측방에서 엄호사격하여 사단공격에 기여했다. 비행장에는 적 전차 3대가 들어왔던 흔적이 있었다. 곧 송요찬 사단장은 비행장에 들어오자마자 나의 손을 잡으며 ‘너는 용감했다. 전 사단이 빠지는데 너만 남아서 사수하겠다고 하더니 정말 사수해 주었구나. 대대장병들에게 나의 뜻을 전해 달라’고 하면서 몇 번이고 악수하고 돌아갔다. 나의 등에서는 식은땀이 흘렀다. 그렇다고 ‘실상은 대대원들이 술을 너무 많이 먹어서….’라는 말은 송장군께서 돌아갈 때 까지 못 했다.

漢南戰友會, 『번개부대의 6•25혈전기 : 육군독립 기갑연대사』(漢南戰友會,1997), 302~303쪽

독소전쟁 당시 독일측의 기록을 보면 도시나 마을을 점령한 소련군들이 술만 발견하면 일단 먹고 뻗어버리는 통에 역습을 들어가면 어이없게 승리했다는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도 비슷한 사례가 있었다 해도 그려려니 하는데… 문제는 북한군이 공격을 해 오고도 그냥 지나가서 무사했다는 것 입니다.

과연 전쟁에는 운이 따라야 하는 모양입니다.

2007년 12월 16일 일요일

대선후보 도우미를 해본 결과...

어부님과 Bigtrain님 블로그에 가 보니 대선후보 도우미라는게 링크되어 있더군요. 좀 뒷북이긴 한데 결과는 이렇게 나왔습니다.


저는 상당히 보수 우익 성향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닌가 보군요. 아니. 문국현이 보수우익인가...

2007년 12월 15일 토요일

조선일보의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서평

허헛. 간만에 컴퓨터 앞에 진득허니 앉아서 블로그 질을 하고 있습니다. 여행이 취소되긴 했지만 좋은 점이 있긴 있군요.

오늘 자 조선일보를 읽고서 Adrian Goldsworthy의 Caesar : Life of a Colossus가 한국어로 번역돼 나왔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런데 번역본이 864쪽이나 되는군요. 제가 가진 하드커버 영어판은 각주와 색인을 합쳐 583쪽인데 확실히 알파벳으로 된 언어를 우리 말로 옮기면 분량이 확 늘어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서평을 쓴 기자가 책을 읽지 않았거나 대충 읽고 쓴 모양입니다. 핵심적인 내용은 제대로 언급하고 있지 않거든요.

조선일보 서평 - 아내에게 불성실했던 ‘유혹의 달인’

Goldworthy의 이 책은 카이사르의 전기이긴 하지만 그의 군사적 행적에 초점을 둔 책이거든요. 많은 분들이 아시겠지만 Goldworthy는 로마군을 연구하는 군사사가 입니다. 이 책의 내용 상당수는 갈리아전쟁과 내전 등 카이사르가 치른 군사작전에 관한 것인데 서평에는 그런 이야기가 없군요. 책의 핵심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니 굉장히 유감입니다.

한마디로 아주 형편없는 서평입니다. 변죽만 울리는군요.

주말 오전의 상황

1. 어떤 책이 어떤 인터넷 서점에 들어와서 얼씨구나 하고 지르려니 그 서점의 사이트가 갑자기 먹통.

2. 일을 하나 끝냈는데 또 다른 일이 하나 떨어짐. 귀찮긴 한데 먹고는 살아야 하니.

3. 새로 떨어진 일 때문에 여행 계획을 접었음. 약간 우울함.

4. 갑자기 밀려드는 공황감. 이유는 모름.

5. 심각한 기억력 감퇴를 경험함. 벌써 치매인가...

2007년 12월 13일 목요일

임시정부의 임시군제에 규정된 독립군의 병과색

임시정부는 1919년 12월 18일에 대한민국육군임시군제를 제정했습니다. 여기에는 군 편제와 계급, 참모조직, 병력 동원 등 다양한 사항이 규정되어 있는데 당연히 복장 규정도 있습니다. 제 5장 14조를 보면 군복의 카라 부분에 병과색을 넣도록 되어 있더군요.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보병 : 붉은색(紅)
기병 : 남색(藍)
포병 : 회색(灰)
공병 : 자주색(紫)
치중병(輜重兵) : 검은색(黑)
헌병 : 흰색(白)

보병 병과가 붉은 색이었다니. 어쩌면 독립군은 행군속도와 사격속도가 일본군 보다 세 배 빠르게 됐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히히.

2007년 12월 12일 수요일

한국군의 M8 운용에 대한 미군사고문단의 평가

한국전쟁에서 M8의 운용 결과는 매우 실망스러웠던 모양입니다. 아래의 보고서는 한국군이 M8을 실전에서 1년 이상 운용한 결과 미군측이 이 물건에 대해 어떤 결론을 내렸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장갑차(M8) 조달 문제

수신 : 군사고문단 본부 / 발신 : G-4 고문단 / 날자 : 1951년 9월 6일

1. 다음과 같은 이유로 통신 내용에 동의 하지 않는 바임.

a. 장갑차는 정비에 많은 노력이 필요하며 한국군의 정비 부대는 훈련 받은 정비병의 부족과 특수한 부품의 심각한 부족 때문에 장갑차를 원활히 유지할 수 없는 상태임. 부품의 부족은 장비의 가동율을 저해시키고 (부품 조달을 위해) 고장난 차량을 분해하도록 만들 것 임.
b. M8장갑차는 한국육군에게 인가 되어 있지 않으며 본 사령부는 미국 장비를 국립경찰에 지급할 권한이 없음
c. 기존의 전투 경험에 따르면 이 장갑차는 소화기 공격에 조차 취약하며 무장도 빈약함. 과거 한국군은 장갑차의 정비와 운용에 있어 극도로 무신경 했기 때문에 (한국군에 장갑차를 계속 지급하는 것은) 값비싼 장비를 무의미하게 낭비하는 것에 불과함.
d. 한국군 사단에 배치된 선임 고문관들은 이 장갑차를 부대에 남겨두도록 조언해야 하는 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으며 그들의 경험에 따르면 잘못된 운용 때문에 이 장갑차들은 거의 쓸모가 없었고 모든 전투 부대로부터 퇴역시켜야 한다고 보고 있었음. G-3와 정비부는 일선 고문관들의 조언에 따라 판단한 결과 해당 차량을 회수하는 조치를 취했음.
e. 이 장갑차의 유일한 장점은 민간인들에게는 공포감을 줄 수 있다는 것 임.

2. M8 장갑차를 보유한 부대는 다음과 같음
-정비학교 1
-헌병사령부 1
-보병학교 2

3. 위에서 언급된 이외의 M8장갑차들은 모든 일선 부대에서 회수되었으며 한국군의 정비 계통을 통해 미국 내 병기창으로 이동 중에 있음. 현재 한국군이 가지고 있는 나머지 네 대도 회수해서 미군 물자로 돌려 놓는 것을 추천함.

RG338, KMAG, Adjutant General, Decimal File, File No. 400.73, 451, Box 58

어쩔 수 없는 일 이지만 한국군의 정비능력 부족은 한국 전쟁 이전부터 누누히 지적되고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미 군사고문단은 1950년 초에 독립기갑연대의 장갑대대도 기병으로 개편하자는 건의까지 했었다고 합니다. 이 문서를 보면 전쟁이 터진 지 1년이 넘었지만 정비 능력 부족은 개선이 전혀 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2007년 12월 8일 토요일

대자연을 떡실신 시키는 위대한 마오주석의 한마디

주말에는 블랙코메디를..

참새에 대한 공격을 위해 어린이 전사들이 자연과의 전쟁에 대거 투입되었으며 특히 학교에 재학중인 연령대의 어린이들은 ‘해악’에 대한 공세의 주력군이었다. 마오는 1958년 5월 18일에 열린 제 8기 전국인민대표대회 2차회의에서 이 전쟁에 참여할 최저 연령대를 설정했다.

“다섯살 어린이를 포함한 모든 인민은 ‘네 가지 해악을 격멸(除四害)’하기 위해 총궐기해야 할 것입니다.”

당시 학교를 다녔던 사람들은 이 전쟁이 학교 수업을 땡땡이 치는 즐거운 경험이라고 회고했다. 사천지방의 한 사람은 자신의 초등학교 시절 참새 박멸 경험에 대해 이렇게 회고했다.

“’네 가지 해악을 격멸’하는 것은 너무 신났습니다. 학교의 학생 전체가 참새를 죽이기 위해 동원되었지요. 우리는 사다리를 만들어 참새 둥지를 부수고 참새들이 쉬기 위해서 돌아오는 저녁에는 종을 쳐댔습니다. 참새가 유익한 동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은 한참 뒤의 일이죠. 우리는 그때만 해도 참새가 곡식을 축내는 동물이라고 알고 있었습니다.”

군사작전과 마찬가지로 이 전쟁에서도 합동 전술이 기본이었다. 참가자들은 일제히 공격을 퍼부었고 참새들은 보다 조용한 장소로 피신해야 했다. 그러나 모든 연령대의 중국인 수백만명이 온 들판에 산개해 동시에 난리 법석을 떨어댔기 때문에 참새들은 안전한 피신처를 찾을 수 없었다. 참새와의 전쟁에서 보인 동시성은 이 전쟁의 결과만큼이나 충격적인 수준이었다. 중경의 남서농업대학에 재직하던 한 농업화학 전문가는 베이베이(北碚)구의 모든 인민들이 야간에 소집되어 언덕에 투입됐던 때를 회고했다.

우리는 불쌍한 참새들이 지쳐 떨어질 때 까지 솥을 두들겼습니다. 우리는 며칠 동안 이 짓을 계속했습니다. 그 뒤로는 참새가 눈에 띌 정도로 줄어들었습니다. 나는 항일전쟁 당시 서주에서 중경으로 옮겨온 한 유명한 식당을 알고 있습니다. 그 식당의 별미는 소금에 절인 참새 두 마리를 꼬치로 만든 것 이었습니다. 하지만 ‘네 가지 해악을 박멸’하는 투쟁 이후로는 더 이상 그 요리를 맛 볼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1959년이 되자 더 많은 해충이 생겨났습니다. 사람들은 쉽게 눈치채지 못 했지만 우리 대학의 농작물보호연구소에 따르면 곡식에 대한 병충해가 더욱 증가했습니다.”

(중략)

농부들은 뒤늦게야 참새야 말로 병충해 퇴치에 있어 가장 큰 아군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1960년 4월에는 참새를 대신해서 빈대가 네 가지 해악 중 하나로 지정되었지만 이미 이 무렵 중국의 많은 지역에서는 참새의 씨가 마르고 말았다. 운남지역의 한 식물학자는 마오가 참새를 박멸하자는 선동을 한 뒤 갑자기 이것을 중단하라고 한 일을 이렇게 기억했다.

“우리는 참새의 둥지를 부수고 알을 깨 버리고 새끼들을 죽였습니다. 뒤에서야 과학자들은 참새가 벌레도 먹는다는 사실을 발표했고 중국과학원은 참새가 먹는 벌레와 곡식의 비율을 계산한 보고서를 내 놓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참새 사냥을 멈췄습니다. 마오 주석은 그냥 ‘이제 그만하면 됐어(算了)'라고 말했답니다. 이 때는 이 한 사람의 말이 모든 것을 규정하던 때였지요.”

Judith Shapiro, Mao’s War Against Nature : Politics and the Environment in Revolutionary China(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1), pp.86~88

과연. '마오주석의 말은 매 구절이 진리이고 한 구절이 우리의 일만 구절을 초월한다'는 린뱌오 동지의 말은 허언이 아니었습니다. 말 한마디로 한 생물종을 멸종의 위기로 몰고가는게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랍니까.

2007년 12월 6일 목요일

무능함으로 적을 괴롭힌 사나이 - 비스마르크도 벌벌 떨게한 나폴레옹 3세

Cato님의 글에서 트랙백합니다.

유능해서 적에게 피해를 입히는 경우는 셀 수 없이 많지만 그 반대로 무능해서 적을 괴롭히는 경우는 찾아 보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역시 우주의 법칙은 오묘한지라 무능함으로서 적을 괴롭힌 특출난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나폴레옹 3세였습니다.

사실 나폴레옹 3세는 비스마르크가 던진 떡밥을 덥석 집어 물고 전쟁에 뛰어들 때 까지만 해도 쓸모있는 바보였습니다. 그렇지만 전쟁이 진행되면서 이 나폴레옹 3세는 비스마르크의 골치거리가 되고 맙니다.

나폴레옹 3세가 직접 출전을 결심한 이유로는 역시 국내 정치적으로 인기가 없었다는 점이 꼽히고 있습니다. 갈수록 대중들의 지지가 감소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쟁의 승리를 통해 이것을 만회하려 했다는 것 입니다. 그리고 전쟁에 승리할 경우 자신이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는다면 승리를 거둔 야전 사령관들에게 영광과 명예가 집중될 것도 우려했다고 설명되지요.

마침내 나폴레옹 3세는 7월 28일 기차편으로 프랑스의 주력군인 라인 야전군(Armée du Rhin) 사령부가 있던 메츠를 향해 출발합니다. 그러나 라인 야전군은 전쟁 초반에 포위되어 버리고 결국 나폴레옹 3세는 샬롱 야전군(Armée de Chalons)에 합류해 스당 방면으로 진출합니다. 이 후의 이야기야 뭐 다들 잘 아시는 스당 전투지요.

나폴레옹 3세가 군을 이끌고 나타났다는 정보가 입수되자 비스마르크와 몰트케는 실망감을 감추지 않았습니다. 나폴레옹 3세를 생포한다면 비스마르크와 몰트케가 구상한 신속한 전쟁 종결은 물 건너 갈 수 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천재인 비스마르크는 무능한데다 인기도 없는 나폴레옹 3세를 생포하면 그대로 프랑스 제정은 붕괴되고 공화정이 들어서 전쟁을 계속할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몰트케 또한 나폴레옹 3세가 이끄는 샬롱 야전군을 포위하기 위해 기동 중이던 8월 25일에 바이에른의 레오폴드 공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집니다.

“우리가 나폴레옹 3세를 생포한다면 이건 우리에게 크나큰 골치거리가 될 게요.”

그래서 비스마르크와 몰트케는 포위망이 완성되기 직전까지 빨리 나폴레옹 3세가 군대를 버리고 파리로 도망치기를 바랬다고 합니다. 그러나 나폴레옹 3세는 맥없이 생포되고 말았습니다. 어쨌건 이 인기 없는 황제는 약간의 센스는 있었는지 항복 직후 비스마르크와 회견하는 자리에서 약간의 독일어를 사용했다고 합니다.

그 후의 역사는 다들 아시다시피 전쟁의 장기화였습니다. 어쨌거나 전쟁에 이기긴 했는데 비스마르크가 구상했던 신속하고 깔끔한 승리는 이뤄지지 못했습니다. 전쟁이 장기화 되면서 독일군은 프랑스 곳곳에서 약탈과 학살을 저질렀고 이건 결국 독일과 프랑스간에 갈등을 깊게 하는 계기가 되었지요.

2007년 12월 5일 수요일

트루먼도 인정한 일본인의 근성

매우 유명한 이야기이긴 합니다만 배군님의 글을 읽고 나니 이 부분이 떠올라서 올려 봅니다. 트루먼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태평양 전쟁 말기 미군이 겪었던 끔찍한 인명손실과 일본군들의 결사적인 항전에 대해서 언급하고 이 때문에 소련의 참전을 필요로 했다고 언급했습니다. 특히 오키나와와 이오지마의 경험은 일선 부대 뿐 아니라 대통령인 트루먼 조차도 경악하게 할 정도였던 것 같습니다.

트루먼 회고록의 해당 부분은 다음과 같습니다.

1941년 12월 7일에 시작된 태평양에서의 전쟁은 매우 고되고 희생이 컸다. 우리는 진주만과 바탄반도의 패전 이후 긴 여정을 거쳤다. 우리의 군대는 남쪽으로는 오스트레일리아와 뉴 칼레도니아와 동부 태평양으로는 하와이 제도로부터 필리핀과 일본 본토를 방어하는 마지막 도서 방어선들을 향해 싸워나갔다. 오키나와와 이오지마의 적은 결사적으로 항전했으며 아군의 인명손실은 극도로 높았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해서 일본 본토를 직접 공격할 수 있는 기지를 얻게 되었다. 우리는 일본 본토에 가까워 질수록 적의 저항은 더욱 단호하고 필사적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일본 본토와 조선, 만주, 그리고 중국의 화북지방에는 아직도 4백만에 달하는 일본군이 남아 있었다. 또한 일본은 본토의 최종방어를 위해 향토방위대를 편성하고 있었다.
합동참모본부는 일본 본토를 침공할 경우 발생할 손실에 대해서 매우 비관적인 전망을 내놓고 있었다.
태평양의 아군은 일본 본토에 다가갈수록 더 많은 손실을 치르고 있었기 때문에 러시아를 전쟁에 끌어들이는 것이 시급해졌다. 러시아가 전쟁에 개입한다면 미국인 수십만명의 생명을 구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Harry Truman, Memoirs - Year of Decisions(Doubleday&Company 1955), p.414

2007년 12월 3일 월요일

영국인 교사 일단은 위기를 모면

곰인형 덕분에 요단강을 건널 위기에 처했던 영국 교사가 수단 대통령에 의해 사면 받았다고 하는 군요.

Sudans Präsident begnadigt britische Lehrerin

그런데 이제 수단 대통령 각하가 대신 욕을 먹게 생겼군요. 이제 이 양반에게 애도를.

2007년 12월 2일 일요일

곰 인형이 사람을 잡는다!

워싱턴타임즈에 아주 난감한 기사가 하나 실렸습니다.

Militants demand teacher's death

사연인 즉슨 영국인 여교사가 애들에게 곰인형의 이름을 무함마드로 짓도록 해서 수단인들이 분개했다는 군요. 분노한 무슬림들이 이 여교사를 처형하라고 대규모로 시위를 하고 있답니다.

푸아. 광신도들이란. 이슬람은 도통 호감이 안가는 종교입니다.

낚시의 왕국

언제부터인가 대한민국은 낚시의 사회가 되어 만인의 만인에 대한 낚시질이 횡행하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세상이 낚는 자와 낚이는 자로 나뉘는 형국입니다. 유감스럽게도 대한민국의 낚시질에는 점잖아야 할 언론사들까지 끼어들고 있지요. 게다가 소위 메이저 신문들도 어떻게는 더 많은 사람을 낚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더욱 한심한 것은 낚시나 일삼는 언론들끼리 서로의 낚시질을 비난한다는 것입니다. 메이저 언론들에 반대하는 인터넷 언론들도 낚시질에는 환장을 하지요.

오늘 소개할 인터넷언론의 낚시질 피해 사례는 친일 매국노로 지탄받는 이영훈 교수의 이야기입니다.

2004년 9월 2일 저는 MBC방송의 토론회에 나갔습니다. 현 정부가 추진 중인 과거사청산이 토론의 주제였습니다.

(중략)

그런데 그 다음부터가 문제였습니다. 제 말을 듣고 있던 반대편의 어느 국회의원이 “일본군 위안부를 미국군의 위안부와 등치시키는 것은 일본의 우익이 위안부를 가리켜 총독부가 강제 동원한 것이 아니고 자발적으로 돈 벌러 간 공창이라고 하는 주장과 같은 것이 아니냐”는 취지로 저를 몰아 세웠습니다. 이후 저와 그 국회의원 사이에 어지러운 논쟁이 오고 갔습니다만, 그에 대해서까지 소개할 필요는 없겠습니다.
그 다음날 그 논쟁을 지켜본 오마이뉴스라는 웹 신문의 어느 경박한 기자는 제가 위안부를 공창이라고 했다고, 실제로는 하지도 않은 발언을, 대문짝만 하게 보도를 하였습니다. 그 뒤에 어떤 사태가 벌어졌는지는 새삼스레 기억도 하기 싫을 정도입니다.

(중략)

경상도 거창의 어느 초등학교 교장 선생은 제가 이완용의 손자라는 이야기가 사실이냐고 물어 왔습니다. 서울 강동구의 어느 고등학교 교사와의 언쟁도 기억납니다. “교수님 때문에 학생들을 더 이상 가르칠 수 없으니 어떡하면 좋겠습니까”라는 겁니다.
제가 말했습니다. “정대협이 출간한 위안부들의 증언 기록을 읽어 보셨습니까. 그것을 읽고 그대로 가르치면 되지 무엇 때문에 고민을 합니까.” 그랬더니 그 교사는 “그런 것을 왜 자기가 읽어야 합니까”라고 반박하더군요. 읽을 필요가 없다고요. 진정 그러합니까. 그렇다면 이 나라에 희망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영훈,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강의 - 대한민국이야기, 기파랑, 2007, 162~166쪽

우리 사회의 낚시질은 대책이 없습니다. 더 우울한 것은 낚시에 낚이는 사람들에게는 낚이고 싶은 심리가 내재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특정한 낚시에 꾸준히 낚이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더더욱 우울한 것은 낚이고도 떡밥만 입맛에 맞다면 낚시질도 옹호하는 붕어들입니다.
정치적 견해가 다른 상대방의 주장은 무조건 틀리다고 악을 쓰는 사회는 정말 우울하고 재미없는 사회입니다. 유감스럽게도 우리 사회가 그런 것 같군요. 자신의 입맛과 다른의견은 아예 들어보려 하지도 않을 정도로 꽉막힌 사회에 무슨 발전의 여지가 있겠습니까.

개인적으로 봤을 때 그나마 낚시질을 자제하는 언론이라고는 한국일보 정도 밖에 없는 것 같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