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이야기는
독일육군의 흑역사 - 1938년 오스트리아 병합시의 사례에 이은 속편입니다. 이번의 주인공은 천하의 대인배 스탈린 동지의 지도를 받는 붉은군대입니다.
사실 전편의 독일군은 총통의 갑작스러운 명령으로 만슈타인이 불과 몇 시간 만에 뚝딱 만든 계획으로 움직이다 보니 엉망이 되었는데 1939년 폴란드 침공 당시의 소련군은 오래전부터 계획이 세워지고 준비도 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엉망이었다는 점에서 더 안습이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오늘의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믿거나 말거나, 과거 소련의 공식적인 문헌들은 1939년 폴란드 침공에 대해 대략 다음과 같은 식으로 서술하고 있었다는군요.
소련군대에 폴란드 국경을 넘어 서부 벨로루시와 서부 우크라이나의 근로인민들을 폴란드 의 압제와 파시스트의 노예화로부터 해방하고 보호하라는 명령이 내려지자 마자 벨로루시 전선군과 우크라이나 전선군의 모든 병사와 지휘관들은 그들에게 부여된 영광된 인민해방의 임무를 달성하겠노라고 맹세했다. 전선군 군사평의회의 명령서는 소련 병사들은 서부 벨로루시와 서부 우크라이나로 «정복자가 아니라 우크라이나와 벨로루시의 형제들을 지주와 자본가들의 모든 압제와 착취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진격하는 것이라고 언명했다. 소련 병사들은 특히 인민들을 위협자들로부터 보호하고 민족에 상관없이 인민들의 재산을 보호하며 폴란드군과 폴란드 정부 관료들이라도 소련군에게 저항하지 않을 경우 정중하게 다루도록 명령받았다. 또한 공세작전이 진행되는 동안 도시와 마을에 대한 포격 및 폭격은 금지되었으며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루마니아, 헝가리의 국경을 침범하지 않도록 주의하도록 했다.
소련군대는 부여받은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군작전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것과는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
소련군은 해방 전역을 수행하기 때문에 엄격한 군기와 조직력을 유지해야 했으며 또한 적을 효과적으로 상대하기 위해 철저한 준비태세를 갖추어야 했다. 이 작전은 단지 벨로루시와 우크라이나 서부의 근로인민들을 해방시키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독일 파시스트들의 노예화와 빈곤화, 그리고 완전한 물리적 폭력으로부터 보호하고 수백년 동안 그들의 원래 조국과 민족으로 다시 통합되기를 갈망해온 인민들의 염원을 민주적으로 해결해야 했다.
「Excerpts on Soviet 1938-40 operations from The History of Wafare, Military Art, and Military Science, a 1977 textbook of the Military Academy of the General Staff of the USSR Armed Forces」,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Vol.6 No.1, March 1997, pp.110-111
그런데 실제로 이 임무는 그다지 영광적인 것은 아니었던 것 같고 특히 그 준비 과정은 영광과는 지구에서 안드로메다 까지의 거리 만큼이나 멀었던 것 같습니다.
영광과는 거리가 아주 먼 이 이야기는 대충 이렇게 시작됩니다.
독일과 불가침 조약을 맺은 스탈린은 폴란드의 뒤통수를 치기 위해 즉시 침공준비를 시작합니다. 9월 3일에는 키예프 특별군관구, 벨로루시 특별군관구, 하리코프 군관구, 오룔 군관고, 칼리닌 군관구, 레닌그라드 군관구, 모스크바 군관구에 다음과 같은 지시가 하달됩니다. 1) 전역까지 1년 남은 병사들은 1개월간 복무 연장 2) 각급 부대 지휘관 및 정치장교들의 휴가 취소 3) 모든 부대는 전투 태세를 갖추고 무기, 장비 및 물자를 점검할 것. 그리고 9월 6일에는 22호 동원계획에 따라 위에서 언급한 군관구의 예비역들은 전역 12년차 까지 소집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다음날 보로실로프는 동원 부대들에게 집결지들을 지정하고 이에 따라 폴란드와 인접한 벨로루시 특별군관구와 키예프 특별군관구는 소속 부대들에 대한 재배치를 시작했습니다. 다들 잘 아시다시피 이무렵 독일군대는 폴란드군의 저항을 차근 차근 분쇄하면서 바르샤바로 쇄도하고 있었지요.
마침내 9월 11일에는 벨로루시 특별군관구가 벨로루시 전선군으로, 우크라이나 특별군관구가 우크라이나 전선군으로 개칭되어 침공준비에 박차가 가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 작전에 동원된 붉은군대의 전력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벨로루시 전선군 : М. П. 코발레프 2급 야전군지휘관
- 제 3군 : В. И. 쿠즈네초프 군단지휘관
- 제 11군 : Н. П. 메드베데프 사단지휘관
- 제 10군 : И. Г. 자하르킨 군단지휘관
- 제 4군 : В. И. 추이코프 사단지휘관
- 볼딘 기병-기계화집단(Конно-механизированная Группа) : В. И. 볼딘 군단지휘관. 제 3, 6기병군단, 제 15전차군단
- 제 23 독립소총병군단
- 제 22 항공연대
우크라이나 전선군 : С. К. 티모셴코 1급 야전군지휘관
- 제 5군 : И. Г. 소베트니코프 사단지휘관 : 제 8, 27소총병군단, 제 14, 36전차여단
- 제 6군 : Ф. И. 골리코프 군단지휘관 : 제 13, 17, 49, 36소총병군단, 제 2기병군단, 제 24, 10, 38전차여단
- 제 12군 : И. В. 튤레네프 2급 야전군지휘관 : 제 6, 37소총병군단, 제 23, 26전차여단
- 제 13군 : 제 35소총병군단
- 기병-기계화집단 : 제 4, 5기병군단, 제 25전차군단
- 제 15 독립소총병군단
- 제 13 항공여단
이렇게 출동할 부대가 정해지고 집결지도 지정되었으니 해당 부대들이 기동을 할 차례가 되었습니다. 이미 소련은 1938년부터 22호 동원계획에 따른 준비를 해 왔다는 것을 위에서 언급했지요.
그런데 황당하게도 1년 동안 준비를 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준비가 첫 단계부터 엉망으로 꼬이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동원령이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병력 동원이 느리게 이뤄져서 우크라이나 전선군의 경우 이 작전을 위해 신규 편성하는 야전군들은 9월 17일이 돼서야 “대충” 동원을 완료할 수 있었고 폴란드 침공이 개시되었을 때는 계획과는 달리 이미 편성이 완료된 부대들만 진격을 해야 했습니다. 최종적으로 동원이 완료된 것은 9월 27일의 일이었는데 이 때는 상황이 거의 종료됐을 무렵이죠;;;
우크라이나 전선군의 핵심 기동전력인 제 25전차군단은 동원 3일차 까지 편제의 30%도 채우지 못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병력 뿐 아니라 장비 동원도 문제였습니다. 사람이야 억지로 머릿수를 채울수는 있을텐데 없는 물건은 땅에서 솟는게 아니니까요. 예를 들어 제 36전차여단의 경우 완전편제시 트랙터 127대가 있어야 했는데 실제로 동원된 것은 42대에 불과했으며 ZIS-6 트럭은 187대가 필요했는데 실제로는 15대에 불과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제 25전차군단은 편제상 각종 차량 1,142대가 있어야 했는데 9월 11일 까지 451대를 확보하는 데 그쳤습니다. 제 13소총병군단은 편제상 2,500대의 트럭이 있어야 했는데 실제로 9월 7일까지 확보한 것은 1200대에 그쳤고 게다가 이 중에서 20%는 예비부품이나 타이어가 없어 사용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여기에 이 사단은 1,400통의 연료를 확보하고 있어야 했는데 실제로는 160통만 가지고 있었으니 차량이 있어도 모두 굴리기는 어려웠습니다. 벨로루시 전선군의 제 6전차여단은 장갑차가 단 1대도 없었습니다.
차량 같은 것은 대형 장비니 그렇다 치더라도 동원된 예비군에 지급할 개인 장비까지 부족했습니다. 제 27소총군단은 철모 16,379개가 모자랐으며 제 15소총군단은 군화 2,000족이 없었고 제 36소총군단은 허리띠 2,000개가 부족했습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동원된 부대들을 폴란드 국경까지 이동시킬 수단이 마땅치 않았다는 것 입니다.
철도 수송은 매우 중요한 문제였는데 유감스럽게도 소련의 철도는 이탈리아의 철도와 비슷하게 돌아갔던 모양입니다. 예를 들어 제 96소총병사단의 선발대인 41소총병연대는 두 시간 늦게 열차에 탑승했는데 제 44소총병사단의 경우 포병연대와 직할대는 침공이 개시될 때 까지 기차를 타지 못했다고 합니다. 기차 시간이 늦는 것은 그렇다 치고 집결지에서 기차역으로 이동하는 것도 문제였습니다.
특히 전차부대의 경우는 심각했다고 합니다. 침공에 투입된 부대들 중에는 T-26을 장비한부대가 많았는데 T-26은 기계적 신뢰성이 낮아 기차역으로 행군하는 동안 자주 도로에 주저앉아 버렸다지요. 간신히 기차역에 도착한 몇몇 부대는 전차들의 엔진 및 동력계통의 수명이 행군도중(!!!!) 초과되어 기차를 탈 수 없었다는 어이없는 사태도 발생했습니다. 머리가 세개 달린 T-28을 장비한 제 10전차여단은 12일에 기차에 탑승해 이동해야 했으나 실제로는 제때 화차가 준비되지 못 해서 16일에야 장비 적재를 완료할 수 있었습니다. 이 부대가 국경에 전개를 완료한 것은 19일 이었고 결국 폴란드 침공이 시작됐을 때는 일부 부대는 아직 화차에서 내리지도 못 한 상태였다고 합니다.
철도는 물론이고 도로 이동도 엉망이었습니다. 이런 대규모 부대의 기동을 위해서는 사전에 도로를 잘 배분해 놔야 하는데 그걸 제대로 하지 못 해 한 도로에 여러 부대가 뒤섞이는 문제가 곳곳에서 발생했습니다.
한편, 소련군대가 사전에 준비된 동원조차 완료하지 못해 쩔쩔매는 동안 독일군은 폴란드를휩쓸고는 독소불가침조약에서 합의된 소련 영역까지 넘어오고 있었습니다. 결국 소련은 동원이 완료되지 못한 상태에서 당장 준비된 병력만 가지고 침공을 시작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국경을 넘은 부대들도 상당수는 편성이 완료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 360독립통신대대의 경우 침공 당시 편제의 60%에 불과했고 제 362독립무전대대는 편제의 82% 수준이었습니다.
결국 1939년 9월 17일 오전 5시 40분, 폴란드 침공은 동원이 대충 완료된 상황에서 시작됐고 선발대가 국경을 넘는 동안 원래 침공에 같이 투입될 나머지 부대들은 계속 편성 중 이었습니다.
제 60소총병사단은 침공이 시작되었을 때 편제의 67%까지만 동원이 된 상태였습니다. 특히 특수병과의 동원률은 매우 낮았습니다. 제 81소총병사단의 경우 기술병과는 45%, 행정 및 보급병과는 69%, 의무병과는 47%, 수의병과는 79%만 동원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사단을 수송할 자동차 대대의 정비중대는 편제의 20%만 채운 상태였습니다. 제 99소총병사단은 침공 직전인 16일 까지도 포병연대가 편성되지 않아 보병만 달랑 있는 상태였다고 합니다.
한편, 먼저 나간 침공부대들은 폴란드군의 저항이 신통치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병력 및 장비 부족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습니다. 특히 비전투 부대는 편제율이 낮았는데 이것은 작전 수행에 악영향을 끼쳤습니다. 우크라이나 전선군의 경우 제빵부대들의 편제미달이 심각해 사단당 하루 12톤의 빵만 배급되고 있었습니다.(실제 배급 소요량은 17톤) 대부분의 침공 부대들은 배고픔에 시달리며 진격했고 폴란드군의 식료품을 탈취하지 못한 부대들은 작전이 종료될 때 까지 배를 곯았다고 전해집니다.
폴란드 침공에서 드러난 소련군의 문제라면 크게 두 개를 들 수 있을 것 입니다. 첫째, 사전에 계획과 준비가 꾸준히 있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실제 동원은 엉망이었다는 점. 둘째, 자국 영토 내에서 이동하는 것 조차 엉망이었다는 점. 이런 문제점은 핀란드 전에서도 거듭되었고 결국 1941년의 대재앙의 기원이 되고 말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