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망디 전역에서 연합군의 항공부대가 독일 지상군을 상대로 직접적인 타격을 가하는 것에는 실패했다는 점은 이제 잘 알려져 있는 사실입니다. 한국 내에서 이 사실이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아마 채승병님이 세테를링(Niklas Zetterling)의 Normandy 1944의 제5장, The Effects of Allied Air Power를 번역해서 소개한 이후일 것 입니다. 체터링의 이 글은 독일군과 연합군의 기록을 비교 분석해 연합군 항공전력의 효과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을 시도했는데 이런 유형의 글이 국내에 처음 소개된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을 것 입니다.
사실 연합군의 항공전력이 독일 지상군을 상대로 신통치 못한 성과를 거뒀다는 것은 비교적 오래전 부터 알려져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예를들어 1952년에 출간된 윌모트(Chester Wilmot)의 The Struggle for Europe에서는 다소 모호하기는 하지만 연합군 항공전력이 지상전에 큰 도움이 되지 못했던 사례를 여러차례 언급하고 있습니다.
1) 하지만 연구자들에 의해 통계적인 분석이 시도된 것은 1990년대 이후였고 그 이전의 연구들은 엄밀성이 결여된데다 서술도 모호한 편이었습니다. 결정적으로 2차대전 연구에 큰 영향을 끼친 독일군 고위 지휘관들은 대부분 연합군 공군의 위력에 대해 높게 평가했는데 이것은 연합군 공군력의 위력에 대한 과장된 평가가 널리 퍼지는데 일조했을 것 입니다. 이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중폭격기를 동원해 독일 지상군을 폭격한 사례일 것 입니다. 그러나 연합군 공군력의 성과를 높게 평가하는 연구자들 중에도 전략폭격기 부대의 중폭격기들을 전술폭격에 투입해 거둔 성과에 대해서는 의문을 표하는 사례도 종종 있어왔습니다.
2)
노르망디 전역에서 연합군 공군이 실제로 어떤 성과를 거두었는지 통계적인 분석을 처음 시도한 것은 구더슨(Ian Gooderson) 이었습니다. 구더슨은 Journal of Strategic Studies에 기고한 두 편의 논문, "Allied Fighter-Bombers versus German Armour in North-West Europe 1944~1945 : Myth and Realities"와 "Heavy and Medium Bombers : How Successful Were They in Tactical Close Air Support During World War II"를 통해 기존에 모호하게 서술되거나 잘못 알려진 사실들에 대한 반박을 시도했습니다. 구더슨의 연구는 미군과 영국군의 자료를 활용해 통계적인 분석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매우 신선한 시도였습니다.
구더슨의 논문 중 전투폭격기 부대가 거둔 전과에 대한 연구는 연합군의 작전조사반(ORS, Operational Research Section)의 기록을 분석해 연합군의 전투폭격기들이 독일군의 기갑차량을 격파하는데는 효과적이지 못했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체터링의 글을 읽어 보신 분들이라면 그 원인을 잘 아실 것 입니다. 노르망디에 투입된 연합군 전투폭격기의 주력은 미육군항공대의 경우 P-47이었고 영국 공군의 경우 타이푼이었습니다. P-47의 경우 8정의 12.7mm기관총이 주무장이고 타이푼은 4문의 20mm기관포가 주무장이었고 이외에 500파운드나 1000파운드 폭탄, 타이푼의 경우는 8발의 3인치 로켓이 있었습니다.
3인치 로켓의 경우 상당한 위력을 가지고 있어서 1944년 초에 있었던 사격 시험에서 목표물인 판터의 엔진실 상부를 관통해 격파시키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라면 시험에서 발사한 64발의 로켓탄 중 겨우 세발이 명중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시험에 사용된 판터가 고정 목표였는데 말이지요. 3인치 로켓은 빗나갈 경우 전차와 같은 중장갑 목표물에 거의 효과가 없었습니다. 타이푼 조종사들은 노르망디 상륙작전 직전 3주간에 걸쳐 3인치 로켓 사격 훈련을 받았는데 이정도 훈련으로는 이 까다로운 무기를 제대로 활용하기가 어려웠습니다.
3)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로켓을 장비한 타이푼은 대규모로 투입되었습니다. 영국공군은 실전을 통해 획득한 자료를 토대로 1945년에 로켓을 장비한 타이푼에 대한 평가를 내렸습니다. 이 조사에 따르면 실전상황에서 5야드 크기의 포진지에 50%의 명중율을 내기 위해서는 350발의 로켓(44소티)이 필요했으며 10야드 크기의 포진지에 대해서는 88발(11소티), 그리고 판터 정도의 전차에 대해서는 140발의 로켓(18소티)이 필요했습니다.
4)
실제로 조종사들은 매우 높은 전과를 기록했다고 믿었지만 전투 뒤의 조사결과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았습니다. 7월 29일 영국공군은 미군의 요청에 따라 가브레(Gavray) 북동쪽 라 발랭(La Baleine)을 지나가는 독일군을 공격했습니다. 영국공군은 이 공격으로 17대의 전차를 격파하고 27대의 전차를 파손시켰다고 보았는데 작전조사반의 조사결과 항공기에 의해 격파된 것이 확실한 것은 타이푼의 로켓에 의해 격파된 판터 1대와 4호전차 1대였고 이밖에 3대의 판터가 자폭, 3대의 판터가 그냥 유기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5) 전투폭격기들이 대 활약을 했다고 알려진 모르탱(Mortain) 전투에서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이 전투에서 영국공군 제2전술항공군은 독일 전차 84대를 확실히 격파하고 35대를 미확인 격파했으며 21대에 손상을 입혔다고 보고했습니다. 미 육군항공대 제9항공군은 69대의 격파, 8대의 미확인 격파, 35대에 손상을 입혔다고 보고했습니다. 하지만 전투 뒤 영국육군의 작전조사반과 영국공군의 작전조사반이 모르탱 지구를 조사한 결과 33대의 판터와 10대의 4호전차, 3대의 돌격포가 전장에 남겨졌으며 이 중 항공기에 의해 격파된 것은 판터 6대(로켓에 의해 5대, 폭탄에 의해 1대)와 4호전차 3대(로켓에 의해 2대, 폭탄에 의해 1대)에 불과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6) 이 전투에서도 항공기에 의해 격파된 것 보다는 승무원들이 버리고 도망친 경우가 더 많았습니다. 항공기에 의해 판터 6대가 격파된 반면 승무원들이 유기하거나 자폭시킨 판터는 10대였다고 하니 말입니다.
7) 전투폭격기가 중포보다는 훨씬 신속하고 정확한 대응을 할 수 있었다는 평가도 있습니다만
8) 실전에서 거둔 성과는 다소 실망럽게 보입니다.
이 점은 중폭격기들도 비슷했던 것 같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것 처럼 중폭격기들의 효용에 대해서는 전후에도 상당한 논란이 있었습니다. 굿우드(Goodwood) 작전과 코브라(Cobra) 작전 당시의 유명한 사례가 보여주듯 중폭격기에 의한 폭격은 폭격 초기에는 어느 정도 혼란을 일으킬 수 있었지만 독일군은 대개 초기의 혼란을 극복하고 끈질긴 저항을 했습니다. 찬우드(Charnwood) 작전 당시인 1944년 7월 7일 독일군 방어선에 467대의 랭카스터와 핼리팩스 중폭격기가 동원되어 2,560톤의 폭탄을 투하했습니다만
9) 그 효과는 매우 미미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영국군의 주공을 상대한 12SS 기갑사단의 경우 이러한 대규모 폭격에도 불구하고 사기에 큰 영향을 받지 않고 격렬하게 저항했으며 오히려 연합군의 폭격으로 캉에 남아있던 민간인 300~400명이 부상을 당하는 등 '부수적 피해'가 발생했습니다.
10) 실제로 영국 제21집단군의 작전조사반은 중폭격기를 동원한 폭격의 효율성에 대해 의문을 표하고 있었습니다.
11) 이당시 전투에 참여한 영국 육군 장교들도 캉에 대해 폭격을 해야 했는지 회의감을 나타냈을 정도라고 합니다.
12) 유사한 사례는 꽤 많이 있는데 잘 알려진 체터링의 저작에 따르면 6월 29일 100대의 중폭격기가 9SS기갑사단의 20기갑척탄병연대 3대대를 폭격했을 때 사망자는 20여명에 그쳤으며 80% 가까운 차량이 그날 저녁까지 가동가능한 상태가 되었다고 합니다. 앞서 언급한 12SS사단의 경우 어느정도 방어선을 구축한 상태였지만 9SS기갑사단의 경우 공격을 위해 집결하고 있어 매우 취약한 상태였음에도 말입니다.
13)
그리고 잘 알려져 있다시피 연합군의 근접항공지원은 상당한 오폭을 일으켰습니다. 가장 유명한 코브라 작전 당시의 오폭은 111명의 미군을 사망하게 했으며 서유럽전선에서 가장 높은 계급의 미군 사망자를 발생시키기도 했지요. 미국측의 조사에 따르면 이날 35대에서 60대 정도의 중폭격기와 42대의 중형폭격기가 미군을 폭격했다고 합니다.
14) 사실 아군에 의한 오폭은 꽤 흔한 일이었습니다. 노르망디 전역 초기인 6월 8일에서 18일까지 미 육군항공대의 제9전술항공사령부(Tactical Air Command)는 13건의 오폭이 발생했다고 기록했습니다.
15) 이런 오폭은 노르망디 전역 내내 계속되었고 심한 경우에는 한 부대가 계속해서 오폭을 당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모르탱 전투당시 미육군 제30보병사단 120보병연대 본부는 단 하룻동안 아군 항공기에 의해 10번이나 공격받았고 이 공격으로 연대 군수참모가 전사했다고 하지요.
16)
노르망디 전역에서 연합군 공군의 전술항공지원은 직접적인 타격 보다는 간접적으로 피해를 입혔다는 견해가 많습니다. 특히 연합군 항공력의 전과에 대해 낮게 평가하는 연구자들도 심리적인 영향에 대해서는 높게 평가하고 있지요. 실제로 영국군이 독일군 포로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저공비행하는 전투폭격기의 기총소사나 로켓 사격은 지상부대의 사기에 심각한 악영향을 끼쳤다고 합니다.
17) 체터링도 그의 저작에서 연합군 공군이 독일 지상군에게 심리적으로 영향을 끼쳤다고 서술하고 있지요.
18) 부대의 이동과 집결에 지장을 끼친 것도 중요한 성과라고 할 수 있을 것 입니다. 독일측 기록을 활용한 체터링의 경우는 연합군 공군이 부대의 이동과 집결에 끼친 영향에 대해서 보다 회의적인 입장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예를들어 교도기갑사단 사단장 바이어라인은 6월 8일 전선으로 이동하던 중 공습으로 5대의 전차와 84대의 보병수송장갑차 및 견인용 하프트랙, 자주포와 130대의 자동차를 상실했다고 회고한 바 있습니다.
19) 이에 대해 체터링은 6월 10일의 보고서에는 교도기갑사단이 노르망디로의 행군 중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들어 바이어라인의 회고는 오류일 가능성을 제기합니다.
20)
이미 잘 알려져 있는 이야기 이긴 합니다만 2차대전 당시 전투폭격기나 폭격기에 의한 근접항공지원은 적군에게 직접적인 타격을 입히기에는 능력이 부족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장갑화 되지 않은 차량이나 포병에 대해서는 상당한 위력을 발휘했고 심리적인 위력이 크긴 했지만 공군력 단독으로는 결정적인 요인이 될 수 없었습니다.
주
1) Chester Wilmot,
The Struggle for Europe(London, Collins, 1952)
2) Alan Wilt, "The Air Campaign", Theodore A. Wilson(ed.)
D-Day 1944(Lawrence, University Press of Kansas, 1971/1994), pp.150~151
3) Ian Gooderson, "Allied Fighter-Bombers versus German Armour in North-West Europe 1944~1945 : Myth and Realities",
Journal of Strategic Studies 14-2(1991), pp.211~212
4) Ian Gooderson, 1991, p.213
5) Ian Gooderson, 1991, pp.217~218
6) Ian Gooderson, 1991, pp.221~222
7) Ian Gooderson, 1991, p.222; Mark J. Reardon,
Victory at Mortain : Stopping Hitler's Panzer Counteroffensive(Lawrence,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02), p.137
8) Alan Wilt, ibid., p.149
9) Chester Wilmot, ibid., p.351
10) Hubert Meyer,
Kriegsgeschichte der 12.SS-Panzerdivision Hitlerjugend, band I(Coburg, Nation Europa, 1999), ss.253~254
11) Ian Gooderson, "Heavy and Medium Bombers : How Successful Were They in Tactical Close Air Support During World War II",
Journal of Strategic Studies 15-3(1992)
12) Carlo D'Este,
Decision in Normandy(Old Saybrook, Konecky&Konecky, 1983/1994), p.315
13) Niklas Zetterling,
Normandy 1944 : German Military Organization, Cobat Power and Organizational Effectiveness(Winnipeg, Fedorowicz, 2000), p.44
14) Richard G. Davis,
Carl A. Spaatz and the Air War in Europe(Washington, Center for Air Force History, 1993), p.474
15) Alan Wilt, ibid., p.151
16) Mark J. Reardon, ibid., p.113
17) Ian Gooderson, 1991, p.216
18) Niklas Zetterling, ibid., p.37
19) Ian Gooderson, 1991, p.216
20) Niklas Zetterling, ibid., p.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