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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3월 4일 일요일

1945년 2월 제안된 무장친위대 기갑사단 편제개편안

제2차세계대전 당시 독일군 기갑사단의 마지막 편제개편은 1945년 3월 25일에 이루어 집니다. 이게 잘 알려전 1945년형 기갑사단(Panzerdivision 45) 입니다. 전쟁 말기의 인력 및 물자 부족을 반영해 극단적으로 사단의 규모를 축소한게 특징인 편제죠. 아래의 편제표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기갑사단의 전차연대를 1개 전차대대와 1개 기갑척탄병 대대로 구성된 혼성전차 연대로 개편하고 기존의 기갑척탄병 연대들은 최소한의 차량을 갖춘 보병으로 개편하는게 핵심입니다. 그나마 남아있는 전차대대는 중대당 10대의 4호전차를 장비한 2개 중대와 중대당 10대의 판터를 장비한 2개 중대로 축소된 게 핵심입니다. 뿐만 아니라 기갑척탄병 연대는 사실상 일반 보병부대로 개편되었습니다. 총 12개 중대가 차량이 없는 일반 보병 중대입니다.1) 전쟁 말기의 전차 및 차량 부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편제입니다.

1945년형 기갑사단 편제표

그런데 히틀러는 무장친위대 기갑부대만은 최상의 수준을 유지하려 했던 걸로 보입니다. 1945년 2월 친위대본부에서 작성한 무장친위대 기갑사단용 1945년형 편제는 3월에 정식 채택된 1945년형 기갑사단 편제 보다는 양호한 모양새를 하고 있습니다.

2월에 제시된 무장친위대의 1945년형 기갑사단 편제 가안은 1944년형 편제를 조금 더 축소한 수준입니다. 전차연대의 규모는 1944년형 기갑사단 편제 보다 조금 감소했습니다. 중대당 전차가 22대에서 17대로 축소됐지요. 중대당 17대 편제는 기존에 있던 것이라서 특별할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기갑척탄병 연대의 편제가 꽤 재미있습니다. 기존의 무장친위대 기갑척탄병 연대는 3개 대대로 편성 되었지만, 제안된 편제는 육군의 1944년형 기갑사단과 동일하게 기갑척탄병연대를 2개 대대로 개편하는게 핵심입니다. 그리고 차량의 부족을 고려해 4개 기갑척탄병 대대 중 1개 대대를 자전거 부대(.....)로 편제한게 특징입니다.2)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장친위대에서 제안한 편제는 정식으로 채택된 1945년형 기갑사단 편제에 비해 차량화 수준이 충실한 편 입니다.

친위대에서 제안한 1945년형 무장친위대 기갑사단 편제

하지만 1개월 뒤에 정식으로 채택된 1945년형 기갑사단 편제와 비교해 보면 알 수 있듯 무장친위대에서 제시한 축소 편제 마저도 전쟁 말기의 상황에서 무리였습니다. 무장친위대의 1945년형 기갑사단 편제는 실제로 채택되지 못하고 사라집니다.


1) "Grundgliderung der Panzerdivision 45", OKH/GenStdH/Org.Abt. Nr. I/1600/45 g.Kdos. (1945. 3. 25),  H16/120 Zustandberichte Band 501(Gen Insp d Pz Tr/Org Abt.), RG242 T78 R617.
2) "SS Panz. u. SS Panz. Gren. Div"  SS Führungshauptamt Amt II Org.Abt.Ia/II, Tgb.Nr. 948/45 g.Kdos. (1945. 2. 14), H16/120 Zustandberichte Band 501(Gen Insp d Pz Tr/Org Abt.), RG242 T78 R617.

2017년 11월 1일 수요일

한국전쟁에 참전한 무장친위대원의 이야기: Waffenbrüder- Ein Niederländer in Russland und Korea

제2차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은 군사사에 관심 가진 사람들에게 매우 인기있는 주제고 그중에서도 무장친위대는 독보적인 존재입니다. 무장친위대의 역사, 장비, 군장을 다룬 연구서 뿐만 아니라 무장친위대원들의 회고록도 여러권이 발간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소개할 John J. R. Folmer의 Waffenbrüder- Ein Niederländer in Russland und Korea도 무장친위대원으로 제2차세계대전에 참전한 인물의 회고담입니다.

이 책의 주인공인 John J. R. Folmer는 1923년 5월 4일 오늘날의 인도네시아인 네덜란드령 동인도에서 태어나 1939년 대학입학자격시험을 치기 위해 본국으로 돌아옵니다. 하필이면 그때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이듬해에 네덜란드는 독일군에 점령됩니다. 그는 대학에 진학하는 대신 무장친위대에 자원하기로 결심합니다. 폴머르는 훈련을 수료한 뒤 무장친위대 비킹 사단의 베스트란트(Westland) 연대 2대대 7중대 1소대 1분대 기관총 사수로 독소전쟁에 참전하게 됩니다. 이어지는 독소전쟁의 회고담은 다른 무장친위대원들의 회고담과 비슷합니다. 그는 동부전선에서 전개되는 일련의 격전에 참전해 전공을 세우고 부상을 당하기도 합니다. 폴머르는 1944년 7월 그간의 공훈을 인정받아 바트 퇼츠의 친위대사관학교에 입교하게 됩니다.

전쟁 말기의 경험담은 꽤 흥미롭습니다. 저자는 무장친위대 소위로 임관하면서 전쟁말기에 급조된 부대인 제38사단(니벨룽엔 사단) 제95연대 3대대 대대장 부관으로 다시 전선에 나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무장친위대에 관한 책은 많지만 제38사단은 전쟁 말에 급조된 부대라서 관련된 문헌이 상대적으로 소략합니다. 이 회고담에 묘사된 제95연대 3대대장은 꽤 상식적인 인물입니다. 3대대장은 미군이 추격해 오는 상황에서 중간에 휴식을 취하기 위해 도시에 머무를 때 마다 소년병들을 제대시키고 후퇴합니다. 한 부대가 자발적이고 조직적으로 와해되는 과정에 대한 묘사는 꽤 재미있습니다. 대대장의 부관인 폴머르는 머무르는 도시의 시장과 협의해 소년병들에게 나눠줄 사복을 모으고 '제대시키는'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합니다. 미군에 포로가 된 폴머르는 임시 수용소에서 탈출해 귀향합니다.

여기까지라면 다른 무장친위대원의 회고담과 비슷한 개성없는 이야기가 되었을 것 입니다. 수많은 무용담과 고통스러운 패배의 기억으로 끝나는 이야기지요. 하지만 이 책은 마지막 1장으로 인해 맥락이 바뀌게 됩니다. 폴머르는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네덜란드군에 자원입대해 한국에 파견되기 때문입니다. 1951년 3월 네덜란드군 2진으로 C중대가 한국에 도착합니다. 그는 네덜란드군에 자원입대해 C중대의 기관총 사수로 참전합니다. 그리고 이 전쟁은 그에게 '승리'를 가져다 준 전쟁이 됩니다. 폴머르는 이렇게 회고합니다.

"한국전쟁은 자유세계가 공산주의의 광기에 맞서 싸운 전쟁이었다. 10년전에는 독일만이 홀로 공산주의에 맞서 싸우다 패배했다. 하지만 이제는 전 세계가, 자유세계 전체가 공산주의에 맞서 일어났다."

폴머르는 한국전선에서 1년간 싸운 뒤 1952년 9월 18일 '명예롭게' 군 생활을 마칩니다. 그의 세계관에서 독소전쟁은 공산침략에 맞서싸운 10년 전쟁의 일부였고 한국전쟁은 이를 승리로 마무리한 경험이 됩니다. 다른 무장친위대원의 경험담과 달리 이 책은 한국전쟁으로 인해 '승리'의 기록으로 마무리 됩니다. 꽤 특이한 시각의 회고담이고 한국전쟁 때문에 더욱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 이 책에는 다른 네덜란드 무장친위대원들의 이야기도 있지만 이 책을 쓸 당시(1996년) 살아있었던 가족들의 보호를 위해 모두 가명으로 처리되어 있습니다.


2017년 6월 13일 화요일

만헤이 전투에 대한 뻘글


근자에 먹고사는 문제로 업데이트가 전혀안되고 있어 민망하군요. 블로그에 밀덕썰 푸는게 소소한 삶의 재미 중 하나인데 말입니다.

예전에 어디에 투고하려고 썼던 뻘글 한 편 투척합니다. 만헤이 전투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원래 연재하려 했던 곳의 특성상 자료출처나 주석은 없습니다. 뭐, 전부 다 제 블로그에서 오래전에 했던 이야기이니 이곳을 꾸준히 들르신 분들이라면 지겨우시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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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크만의 기묘한 모험


독일군의 야심찬 아르덴느 공세가 미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좌절되어 가고 있던 1944 12 24, N15도로가 지나가는 교통 요충지인 만헤이(Manhay)가 독일 무장친위대 제2기갑사단 다스 라이히(Das Reich)’에 점령됐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편찬된 미육군의 공간사에서는 이날 밤 독일군이 노획한 셔먼 전차를 앞세우고 미군으로 위장해 만헤이를 점령했다고 기록했다. 하지만 독일측 참전자들의 증언이 공개되면서 만헤이 전투는 미육군의 설명과는 다르게 전개됐음이 밝혀졌다. 이날 만헤이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

아르덴느 전투가 시작될 무렵 다스 라이히사단은 제6기갑군의 예비대로 대기하고 있었다. 1944 12 19, B집단군 사령관 발터 모델 원수는 예비대로 대기하고 있던 다스 라이히사단을 투입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이 무렵 독일군을 괴롭히던 고질적인 연료부족 때문에 다스 라이히사단은 투입 명령을 받고도 이동을 할 수 없었다. ‘다스 라이히사단에 대한 연료보급은 12 22일 오전이 지나서야 마무리 되었다. 보급을 마친 다스 라이히사단은 N15 도로를 따라 북상하다가 바하끄 쁘헤듀흐(Baraque Fraiture)에서 미 82공수사단 325글라이더 보병연대 2대대와 여기에 배속된 미 3기갑사단 32전차연대 3대대 소속의 1개 전차소대의 저항에 부딛혔다. ‘다스 라이히전차연대 7중대의 4호전차와 미 32전차연대 3대대의 셔먼 전차간에 전차전이 벌어졌다. 독일측은 4대의 4호전차를 잃었고 미군은 11대의 셔먼전차와 다수의 차량을 상실하고 바하끄 쁘헤듀흐에서 퇴각했다. 그러나 23일부터 24일까지 미육군항공대의 대대적인 공습으로 만헤이를 목표로 한 독일군의 진격은 저지되었다. 일부 독일 전차병들은 끊임없는 공습으로 공황상태에 빠져 전차를 버리고 도망치기까지 했다. 여기에 바하끄 쁘헤듀흐를 탈환하기 위해 미 3기갑사단과 82공수사단이 병력을 증원하면서 독일군은 더욱 곤경에 빠졌다.

결국 독일군은 미군의 공습을 피해 야습을 감행하기로 결정했다. ‘다스 라이히전차연대장 루돌프엔셀링(Rudolf Enseling) SS중령은 만헤이 방면에 대한 야습에 예비대로 대기하고 있던 1대대 4중대를 투입하기로 결정했다. 4중대는 경험이 풍부한 장교였던 오르트빈 폴(Ortwin Pohl) SS대위가 지휘하고 있었다. 폴 대위는 우수한 지휘관이자 전차 에이스였다. 그는 노르망디 전선에서 12대의 미군 전차를 격파한 바 있었다. 그리고 그의 부관이 바로 유명한 전차에이스 에른스트 바르크만(Ernst Barkmann) SS상사였다. 바르크만 상사는 노르망디 전투에서 큰 활약을 했으며 특히 쿠탕스 가도의 전투로 명성을 떨쳤다. 1소대는 아르덴느 공세 직전 임관한 크노케(Heinrich Knocke) SS소위가, 2소대는 비스만(Alfred Wissmann) SS소위가, 3소대는 경험이 풍부한 부사관인 프란츠 프라우셔(Franz Frauscher) SS원사가 지휘하고 있었다. 각 소대는 모두 5대의 판터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중대본부는 폴 대위의 402호차와 바르크만 상사의 401호차 2대로 이루어져 있었다. 또한 4중대를 지원하기 위해 만프레트 하게샤이머(Manfred Hargesheimer) SS중위가 지휘하는 2중대 소속의 판터 6대가 4중대에 배속됐다. 그리고 전차를 지원하기 위해 제3SS기갑척탄병연대 16중대(공병중대)가 배속됐다.

1638분에 4중대의 전차들은 오데뉴(Odeigne)에 집결해 해가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공격의 선봉에 서는 것은 베테랑인 프라우셔 원사가 지휘하는 3소대였다. 3소대의 뒤에는 중대본부가 따랐고 그 뒤에는 2소대, 그리고 최후위에는 경험이 부족한 1소대가 배치됐다.
한편 4중대의 정면에는 미 3기갑사단의 올린 브루스터(Olin F. Brewster) 중령이 지휘하는 TF브루스터가 배치되어 있었다. TF브루스터는 3기갑사단 32전차연대 소속의 3개 전차소대, 36기계화보병연대 I중대 병력 일부, 82공수사단 509강하연대 병력 일부, 그리고 75보병사단 290보병연대 C중대 등 잡다한 부대로 급조된 전투단이었다.

오후 10, 예정대로 공격이 개시됐다. 만헤이 방면으로 북상하던 4중대는 곧 TF브루스터 소속의 전차들과 격돌했다. 짧지만 격렬한 전투가 전개됐고 프라우셔 원사의 판터가 피격됐다. 미군은 셔먼 전차 두대를 잃고 북쪽으로 후퇴했다. 4중대는 잠시 진격을 멈추고 재정비에 들어갔으며 프라우셔 원사는 지휘를 위해 전차를 바꿔탔다.

그런데 혼란의 와중에 상황 전달을 받지 못한 바르크만 상사는 중대가 잠시 진격을 멈췄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단독으로 북상했다. 바르크만 상사는 자신이 낙오됐다고 생각한 나머지 아군을 만날 때 까지 계속 북쪽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군이 아니라 만헤이를 방어하고 있던 미 7기갑사단 A전투단 40전차대대 소속의 셔먼 전차였다. 셔먼 전차장 마티어스(Mathias) 하사는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바르크만의 판터를 아군의 셔먼 전차로 착각했다. 남쪽에는 아군이 배치되어 있었으니 당연한 것 이었다. 바르크만 상사는 마티어스 하사의 셔먼 전차를 프라우셔의 판터라고 착각해 그 옆에 정지하고 말을 걸었다. 마티어스 하사는 갑자기 독일어가 들리자 당황해서 포탑 안으로 들어가 해치를 잠궈버렸다. 바르크만도 상대의 반응에 당황했다. 옆에 있는 전차를 다시 살펴보니 후미등이 미군의 붉은 색이 아닌가! 판터의 후미등은 녹색이었다. 당황한 바르크만은 인터폰에 소리를 질렀다.

포수! 옆에 있는 전차는 적 전차다! 쏴라!(Richtschütze! Panzer neben uns ist ein Feindpanzer! Abchießen!)“

사수인 호르스트 포겐도르프(Horst Poggendorf) SS병장도 당황해서 소리를 질렀다.

쏠 수가 없습니다! 포탑을 돌릴 수 없어요!(Abschießen geht nicht! Turmschwenkwerk klemmt!)“

두 대의 전차가 너무 가까이 붙어있다 보니 판터의 포신이 걸려서 포탑을 회전 시킬 수 없었던 것이다. 이때 판터 조종수인 그룬드마이어(Grundmeyer) SS상병이 순발력을 발휘했다. 포탑을 돌릴 수 있도록 판터를 재빨리 후진 시킨 것 이었다. 포겐도르프 병장도 때를 놓치지 않고 셔먼을 격파했다. 놀랍게도 마티어스 하사를 비롯한 셔먼의 승무원들은 살아남았는데 근거리에서 발사된 판터의 포탄이 셔먼의 후부까지 관통해 버리는 바람에 내부에는 피해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마티어스 하사는 부상을을 입은 포수를 구출해 탈출했다.

이제 바르크만은 자신이 적진 한가운데에 고립됐음을 깨달았다. 그런데 그는 이 상황에서 그대로 전진하는 것을 택했다. 마티어스 하사의 셔먼을 격파하고 이동하던 바르크만의 앞에 제814대전차대대 B중대 소속의 M10 구축전차 두 대가 나타났다. 이들도 바르크만의 판터를 아군의 셔먼으로 오인해 사격을 가하지 않았다. 포겐도르프는 신속하게 사격을 가해 두 대의 M10을 격파했다. 바르크만은 미군 전차가 계속해서 나타나자 속도를 줄이고 천천히 이동하기로 했다. 다시 전진하던 바르크만의 앞에 제40전차대대 C중대 소속의 셔먼 아홉대가 나타났다. 바르크만은 천연덕스럽게 계속 이동했고 미군들은 바르크만의 전차를 아군 전차로 생각해 한 발의 사격도 가하지 않았다. 바르크만은 그곳을 벗어나 만헤이 교차로에 도착했다. 바르크만은 원래 그랑므닐 방면으로 가려고 했으나 셔먼 전차 세대가 그랑므닐 방향에서 오는 것을 보고는 충돌을 피하기 위해 그대로 만헤이로 돌입하기로 했다. 만헤이는 철수를 준비하는 미군 차량으로 북적이고 있었다. 미군은 철수 준비로 정신이 없었기 때문에 바르크만의 판터가 만헤이에 돌입했을 때도 한동안은 신경도 쓰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정체를 들키지 않을 수는 없었다. 미군들은 갑자기 만헤이 한 복판에 독일 전차가 나타난 것을 깨닫고 혼란에 빠졌다. 바르크만은 앞에서 다가오던 지프를 그대로 깔아뭉갠 뒤 전속력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미군 운전병들도 질주하는 판터를 피해 차량을 모느라 우왕좌왕했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미군 전차들이 바르크만의 셔먼을 추격하기 시작했다. 한대의 M5 스튜어트가 판터의 앞을 막았으나 바르크만의 판터는 그대로 스튜어트를 들이받고 전진했다. 그리고 포탑을 6시 방향으로 회전시켜 추격해 오는 미군 전차들을 차례대로 격파하기 시작했다. 바르크만의 판터는 만헤이를 벗어나 마을 외곽의 숲으로 달아났다. 바르크만은 혼란에 빠진 미군이 추격을 멈춘 것을 확인한 뒤 숲 속에 숨기로 했다. 판터의 엔진이 이상을 일으켜 더 이상 이동하는 것이 위험했다.

바르크만이 만헤이에서 좌충우돌 하는 동안 전열을 가다듬은 4중대는 다시 전진하기 시작했다. 이때 미 40전차대대 C중대 소속의 셔먼 한 대가 4중대의 판터들을 향해 사격을 퍼부었다. 프라우셔는 즉시 조명탄을 발사한 뒤 이 셔먼을 격파했다. C중대의 나머지 셔먼 전차들도 순식간에 격파됐다. 미군 전차병들은 대부분 전차 밖에 나와 휴식을 취하고 있었기 때문에 완전한 기습이었다. C중대를 전멸시킨 4중대는 만헤이로 돌입했다. 그러나 바르크만이 이미 한바탕 난리를 피운 뒤라 미군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또 다시 프라우셔의 판터가 셔먼의 근거리 사격에 피격됐다. 프라우셔의 뒤를 따르던 판터가 즉시 반격을 가해 셔먼을 격파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프라우셔와 승무원들은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다. 프라우셔는 다시 전차를 갈아타고 지휘를 해야 했다.

4중대는 만헤이를 점령한 뒤 다시 방향을 돌려 그랑므닐 쪽으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628대전차대대 소속의 M10 구축전차들이 포격을 가해 3소대의 베테랑 전차장인 오스카 피셔의 판터가 격파되고 피셔도 전사했다. 피셔의 판터는 도로를 막고 있었기 때문에 독일군은 공격 기동을 하기가 어려웠다. 그랑므닐을 둘러싸고 포격전이 전개되는 와중에 4중대장 폴 대위가 부상을 입고 후송됐다. 폴 대위의 중대장 차량은 크노케 소위의 포수가 인계했다. 중대장 차량은 만헤이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피셔의 판터를 우회하는 와중에 판터 네 대가 미군의 대전차 지뢰를 밟고 기동불능이 됐다. 4중대의 공격이 난관에 부딛혔다. 4중대는 미군의 방어를 물리치고 그랑므닐 서쪽의 에흐제(Erezze)에 도착해 다시 재정비에 들어갔다. 폴 대위가 후송됐기 때문에 4중대에 배속되어 있던 하게샤이머 중위가 지휘권을 인계받았다. 그런데 하게샤이머 중위도 낙오된 미군의 총격에 어깨에 중상을 입고 후송되었다. 결국 4중대의 간부들은 다시 그랑므닐로 후퇴해 방어태세를 갖추기로 결정했다.

12 24일 밤의 전투로 7기갑사단 A전투단은 21대의 전차를 잃었고, 40전차대대 A중대장 앨런(Malcolm O. Allen) 대위가 포로가 되고 D중대장 휴즈(Walter J. Hughes) 대위가 전사하는 등 420여명의 인명 손실을 입었다.

한편, 숲속에 숨어있던 바르크만은 상황이 정리된 것으로 보이자 다시 만헤이로 돌아왔다. 만헤이에는 중대장의 판터가 대기하고 있었다. 바르크만은 중대장차의 임시 전차장과 상의를 한 뒤 건물 사이에 전차를 숨기고 방어 태세를 취하기로 했다. 12 25일 오전, 미군은 만헤이를 탈환하기 위해 7기갑사단 31전차대대 B중대를 투입했다. B중대 소속의 셔먼 다섯대는 만헤이를 향해 전진하다가 바르크만을 비롯한 4중대 본부 판터 두대의 포격으로 전멸했다. 잠시 뒤 올프(Emerson Wolfe) 대위가 지휘하는 본대의 셔먼 10대가 도착했으나 앞서 투입된 선발대가 전멸한 것을 보고는 공격을 머뭇거렸다. 만헤이 탈환을 지휘하기 위해 도착한 7기갑사단 B전투단장 브루스 클라크(Bruce Clark) 준장은 올프 대위에게 즉시 공격하라고 명령했으나 올프 대위는 판터가 매복하고 있는 상황에서 엄폐물 없는 개활지로 돌격하는 것은 불리하다고 설명했다. 클라크 준장은 올프 대위의 주장이 옳다고 생각해 공격 명령을 취소했다. 한편 그랑므닐 방면을 방어하고 있던 4중대의 주력은 TF맥조지(McGeorge) 소속의 셔먼 전차 17대와 교전해 15대를 격파하는 피해를 입혔다.


미군은 만헤이와 그랑므닐을 직접 공격하는 대신 12 25일부터 27일까지 8개 포병대대를 동원해 포격을 퍼부었다. 여기에 미육군항공대가 가세해 만헤이-그랑므닐의 독일군은 옴싹달싹 할 수 없었다. 크노케 소위의 411호차가 미군의 포격으로 격파됐다. 4중대는 포격이 뜸해진 25일 밤에 만헤이를 버리고 남쪽으로 철수했다. 바르크만의 대담한 모험으로 독일군은 만헤이를 비교적 쉽게 점령할 수 있었으나 전쟁을 운으로만 치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바르크만의 모험은 제2차 세계대전의 특이한 일화로만 남았다.

2017년 2월 26일 일요일

조만간 출간될 기대되는 책 몇 권


 흥미로운 책이 홍수와 같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특별히 더 눈에띄는 책이 있습니다.


1. Kursk 1943: Die größte Schlacht des Zweiten Weltkriegs, Roman Töppel

저자인 로만 퇴펠은 몇년전 있었던 무장친위대에 대한 학술회의에서 쿠르스크 전투 당시 독일 국방군 소속 기갑부대와 무장친위대 소속 기갑척탄병사단의 전투력을 비교한 작전사연구를 발표한 사람입니다. 다음달에 출간될 예정인 Kursk 1943: Die größte Schlacht des Zweiten Weltkriegs는 군사서적을 꾸준히 출간하는 페르디난트 쇠니히 출판사의 새 시리즈, Schlachten – Stationen der Weltgeschichte의 첫번째 세 권 중 하나입니다. 다른 두 권은 러일전쟁의 쓰시마해전, 미국 내전의 게티스버그 전투입니다. 쿠르스크 전투에 대한 가장 최신 저작으로 기존의 연구성과들을 총괄하는 책이 되리라 예상됩니다. 원래는 올해 1월 출간 예정이었다가 3월로 일정이 조정됐습니다.


 2. Krieg in der Geschichte: Die Waffen-SS: Geburt einer Legende: Himmlers Krieger in der NS-Propaganda, Jochen Lehnhardt

 이 책도 역시 다음달에 페르디난트 쇠니히 출판사에서 나올 예정입니다. 독일 국가사회주의 체제의 선전기구의 프로파간다 정책에서 무장친위대가 어떻게 다루어졌는지에 관한 내용입니다. 저자인 요헨 렌하르트도 위에서 언급한 로만 퇴펠 처럼 무장친위대에 대한 학술회의에서 독일의 프로파간다 정책과 무장친위대에 관한 논문을 발표한 바 있습니다. 이 책은 그 논문의 확장판인듯 싶습니다. 요헨 렌하르트의 논문 "Die Inszenierung des nationalsozialistischen Soldaten- Die Waffen SS in der NS-Propaganda"는 전쟁당시 독일의 선전정책이 무장친위대, 특히 친위대의 엘리트부대들을 부각시키면서 무장친위대에 대한 긍정적인 인상을 확산시켰고, 전쟁 중 형성된 이미지가 현재까지 이어진다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꽤 흥미로운 저작이 될 듯 싶습니다.


 3. The Battle of Kursk: Controversial and Neglected Aspects, Valeriy Zamulin

 러시아의 저명한 군사사가 발레리 자물린의 논문집입니다. 올해 6월에 출간될 예정인데 흥미로운 내용이 많을 듯 해 크게 기대하고 있습니다. 러시아어를 못해서 영어로 번역되는 것 만 읽을 수 있으니 개인적으로 참 답답합니다.

2016년 7월 27일 수요일

Robert Forczyk, Tank Warfare on the Eastern Front 1943-1945: Red Steamroller (Pen and Sword, 2016)

매우 흥미롭게 읽었던 책의 후속작이 나온다면 항상 기대를 하게 됩니다. 하지만 전작이 좋았다고 후속작도 좋으란 법은 없지요. Robert Forczyk의 Tank Warfare on the Eastern Front 1943-1945: Red Steamroller (Pen and Sword, 2016)는 딱 그런 경우입니다. 전작인 Tank Warfare on the Eastern Front 1941-1942: Schwerpunkt (Pen and Sword, 2014)가 매우 재미있어서 기대를 했으나 아마존 서평 부터 심상치 않더니 정말 실망스럽군요.

이 책의 단점은 이렇습니다.

1. 서술의 불균형.
- 제목은 Tank Warfare on the Eastern Front 1943~1945라고 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1943년'에 대부분의 서술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제가 읽은 E-Book 기준으로 1943년도의 작전을 다루는 부분은 14쪽 부터 199쪽까지 인데, 1944년 1월 부터 8월까지의 작전을 서술하는데는 216~252쪽, 1944년 9월 부터 1945년 5월까지의 작전은 252~255쪽만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전쟁 말기의 작전을 불과 4쪽만 가지고 대충 서술하고 넘어가는데서는 거의 황당함을 느낄 지경입니다. 물론 저자가 1943년 이후의 작전은 중요성이 덜하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으나 그럴 거라면 애시당초 책을 1943년의 기갑작전에 집중해서 썼어야 한다고 봅니다.

2. 매우 제한적인 1차사료 활용
- 이 책의 주석만으로 판단하면 1차사료 활용이 전작에 비해 격감했습니다. 대부분의 주석이 2차사료를 출처로 하고 있습니다. 전작의 경우도 1차사료 활용이 미국에 소장중인 독일 노획문서에 한정된다는 한계가 있긴 했습니다만 이 책은 독일 노획문서 조차도 그리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지 않아 보입니다.
 사료 활용면에서 이렇다 할 장점이 없으니 책의 내용도 매우 평이하고 결론도 평이합니다. '독일이 연료 소모가 큰 중전차 생산에 집중한 것은 패착이다' '무장친위대와 공군이 많은 자원을 소모해 육군 기갑전력의 증강을 방해했다' '히틀러가 조장한 비효율적 관료제가 독일 군수산업에 악영향을 끼쳤다'와 같은 주장은 합리적이지만 기존의 연구자들도 충분히 지적해 온 문제입니다. 기존의 주장만을 답습하는데 그친다면 이 책의 의의를 어디에서 찾아야 할 지 회의적이군요.


 다만 1943년과 1944년 초의 기갑작전이 잘 정리된 점은 충분한 장점입니다. 저는 뭔가 좀 새로운 내용이 없을까 기대해서 실망했지만, 개설서라는 측면에서는 무난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전작에 비해서는 확실히 실망스럽습니다.


2015년 1월 1일 목요일

[번역글] 노르망디 전투에서 독일군의 패배에 군수보급이 끼친 역할

불법 날림 번역 한편 나갑니다. 이 글은 1996년 War in History 3권 4호에 실린 러셀 하트Russell A. Hart의  “Feeding Mars: The Role of Logistics in the German Defeat in Normandy”를 번역한 것 입니다. 노르망디 전역에 관련된 글은 많아도 보급 문제를 집중적으로 고찰한 글은 매우 드문데 이 글은 바로 그 드문 경우에 속합니다. 20년 가까이 된 오래된 글이긴 해도 오늘날까지 제대로 된 후속연구가 없는 만큼 충분히 유효한 글이라 하겠습니다.



군신(Mars)을 먹여살리기: 노르망디 전투에서 독일군의 패배에 군수보급이 끼친 역할


러셀 하트

역사가들은 오래 전 부터 독일군이 1944년의 노르망디 전역에서 패배한 주된 원인이 군수보급의 어려움에 있었다는 점을 인정했다. 1944년 3월 부터 시작된 연합군 공군의 차단작전이 루아르강과 세느강에서 노르망디에 이르는 독일군의 보급을 심각하게 방해했다는 것이다. 독일군은 보급의 부족으로 인해 연합군의 교두보를 위협하기는 커녕 효율적인 방어를 취하는데도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역사가들은 이렇게 일반적인 내용을 넘어서 보급의 부족이 독일의 노르망디 방어작전에 어떻게, 그리고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는지는 잘 모르고 있다. 이 연구는 1944년 노르망디 전역에서 독일군의 군수보급에 대해 설명하고 보급의 부족이 독일군의 패배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으며 미군이 7월 말의 코브라 작전에서 성공적으로 돌파를 해 나가는데 중요한 영향을 끼쳤음을 논하고자 한다.1)

1943년 무렵 서유럽에 주둔한 독일군, 즉 서부군Westheer은  독일의 전쟁 수행의 우선순위에서 밀려나 있었다.  서부군의 각 부대는 편제 미달에 장비도 부족했고 대부분의 경우 기동력도 매우 떨어져서 방어 능력이 극히 제한적이었다. 또한 서부군은 연료, 탄약, 수송 수단을 비롯한 군수 조직에 필요한 기반이 부족해 연합군의 상륙을 격퇴하기는 커녕 대규모 작전을 펼칠 능력 조차 없었다. 히틀러는 1943년 11월 3일에야 1944년에 있을 연합군의 상륙을 격퇴하기 위해서 서부군을 강화하라는 총통지령 51호를 내렸다. 1943년 11월 부터 1944년 6월까지 대규모로 증원된 부대와 신무기 덕분에 서부군의 전투력은 크게 증강되었다. 하지만 총통지령 51호는 서부군에 보급 우선순위를 두지는 않고 있었다. 그래서 서부군은 병력 증강에 수반되야 하는 군수 지원 체계를 갖추지 못했다. 독일군은 전투 지원 보다 전투 부대에 중점을 두고 증강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서부군은 장기간의 방어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에 문제가 있었다. 얼마 되지도 않는 보급부대와 수송부대, 전투지원부대는 전투 부대를 증강하기 위해 병력을 차출당했다. 서부군이 노르망디 상륙작전 직전까지 보급 능력을 증강하지 못한 이유에는 부분적으로 전쟁이 6년차에 접어들면서 독일의 자원이 고갈되었다는 점이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독일군이 전통적으로 보급지원을 경시해 왔던데 있었다.2)

전쟁 5년차에 독일군을 괴롭힌 가장 심각한 문제는 독일군의 차량화 수준이 갈수록 악화된 점이었다. 독일은 1939년 시점에서 유럽에서도 차량화가 가장 덜 진전된 국가에 속했다. 독일군에서 엘리트 부대와 기계화 부대를 제외한 대부분의 부대는 우마에 의존하는 보병부대였다. 1941년 이후로는 동부전선에서 발생한 손실로 독일군의 차량 수송능력은 걷잡을 수 없이 감소했고 이와 함께 공세와 방어에 필요한 기동력도 감소되어갔다. 1943년까지 독일은 점령지에서 징발한 차량으로 손실을 보충했다. 점령지에서 징발한 차량은 1942년에만 60만대에 달했다. 그러나 쿠르스크 전투 이후 독일군의 차량화 수준은 손실로 인해 꾸준히 하락해갔다. 독일군의 트럭과 견인차량 부족은 1944년 2월에서 4월 사이에만 각각 127%와 46%에 달했다.3)

독일군의 차량 부족은 특히 서부전선이 심각했다. 서부전선에 배치된 기동력이 거의 없는 점령부대들은 수송기능을 프랑스의 우수한 철도망에 의존하고 있었다. 서부전선에 배치된 몇대 안되는 트럭들은 전략단위의 수송예비로 돌려졌다. 게다가 예비 부품이 부족해 차량의 가동률도 낮았다. 이렇게 기동력이 낮았기 때문에 독일 서부군은 노르망디 상륙작전 직전까지 전투 준비에 어려움을 겪었다. 1944년 6월 6일 시점에서도 대부분의 독일군 부대는 심각할 정도로 차량이 부족했고 이 때문에 기동력이 제한적이었다. 독일 서부군은 이렇게 낮은 기동력 때문에 연합군의 상륙 지점에 부대를 전개하고 보급품을 수송하기 위해 철도에 의존해야 했다. 독일군은 1944년 1월에 실시한 워게임에서 프랑스의 철도망을 사용하지 않을 경우 연합군의 침공을 격퇴하기 위해서는 하루에 4만톤을 수송할 수 있는 규모의 트럭을 갖춰야 한다고 추산했다. 이것은 당시 독일 서부군이 확보하고 있던 전략 수송예비의 능력을 여덟배나 초과하는 것 이었다. 하지만 독일군은 프랑스의 철도 수송능력이 충분하고 운하를 통한 수송로가 존재하기 때문에 연합군이 항공차단을 시도하더라도 철도를 통해 충분히 보급을 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래서 서부전구사령부 군수참모처Oberquartiermeister West의 오토 엑슈타인Otto Eckstein 소령은 1944년 3월 연합군이 항공차단작전을 시작했을 때에도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4)

하지만 독일군은 연합군의 항공차단작전의 영향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3월 부터 디데이 당일까지 연합군의 공군력은 파리 서쪽에 있는 세느강의 교량을 모두 파괴하여 노르망디를 동쪽과 완전히 차단하고 기차역, 철도조차장, 기관차고, 급탄소, 철도교차점, 정비공장, 기관차를 파괴하여 노르망디 방면으로의 철도교통을 마비시켰다. 공습은 4월 부터 독일군의 부대 이동과 물자 수송에 장애를 초래했다. 이로인해 서부전구 전체에 철도 교통 정체가 발생했으며 대량의 신무기, 건설자재, 보급품의 수송이 지연되었다. 디데이 바로 전날에는 무려 1,700대의 열차가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한 상태에 있었다. 연합군 공군이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것은 연료 수송이었다. 6월 초에는 프랑스 전체를 통틀어 독일이 서부전구에 비축한 연료양의 15%에 달하는 323만3천 갤런의 연료를 실은 열차들이 목적지로 가지 못하고 정체되어 있었다.5)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전에 독일군은 연합군 공군의 차단작전으로 인한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하여 세가지의 대응책을 내놓았다. 교량, 교통 중심지, 철도망을 방어하기 위해 대공포대를 배치했다.  노르망디 지역과 연결되는 교통망을 복구하기 위하여 철도공병과 교량공병 부대들을 증강하여 세느강 일대로 재배치하였다. 마지막으로, 서부전구사령부 군수참모처는 전략수송예비를 증강하기 위해서 군대는 물론 민간 부문의 차량까지 최대한 징발하였다.6) 이와 같은 대응책은 큰 효과가 없었다. 대공포대를 증강하는 것은 독일군의 교통망이 급속히 붕괴되는 것을 조금 늦추는 정도 밖에 되지 못했다. 게다가 대공포 탄약의 소모가 높아지면서 독일군의 보급 사정만 악화시켰다. 독일군의 철도공병과 교량공병 부대는 꾸준히 증강됐지만 급속도로 파괴되는 교통망을 감당할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교통망을 복구하려는 시도는 제대로 통제되지 못했다. 전략수송예비대의 트럭을 증강하려는 독일군의 노력은 세가지 요인과 연동되어 있었다. 독일군은 전반적으로 차량이 부족했으며, 전투부대의 기동력을 증강시켜야 할 필요성이 있었고, 마지막으로 히틀러가 서부군을 대대적으로 증강하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트럭 생산량이 부족했기 때문에 1944년 봄 서부전선에 보급된 트럭은 얼마 되지 않았다. 새로 보급된 트럭들은 히틀러의 지시로 서부 전선에서 새로 편성된 사단과 기존의 사단들의 기동력을 증강하는데 사용되었다. 트럭의 신규 생산이 부족했기 때문에 1944년 5월 전략수송예비대는 보유하고 있던 트럭의 10%를 새로 편성하는 사단에 양도해야 했다. 그래서 히틀러가 대대적인 증강을 지시했음에도 불구하고 서부군은 전략수송예비대를 증강할 수 없었다.(표1을 참고)7) 

표1. 독일군의 전략수송예비대 증강과 운용 가능 규모의 감소(1944년, 미터톤)
날자
수송능력(톤)
운용가능(톤)
운용가능비율(%)
1944.1.1
9,137
7,073
71.5
1944.2.1
8,856
7,225
80.5
1944.3.1
9,309
8,005
86
1944.4.1
10,185
8,379
82
1944.6.1
9,000
5,850
65
1944.7.1
12,500
6,900
55
출처: Sources: ’Transportraum in der Hand der OB West’, Ob. West Qu.1 Br.B.Nr. 01800/44 g.Kdos, v. 8.4.1944, Ob. West Qu.1 Br.B.Nr. 02250/44 G.Kdos, v. 8.5.1944, NARA T-314, 11, 7014858 and 7015007.

그리고 연합군의 공습은 디데이 이전 부터 서부전선에 배치된 독일군의 보급 상황을 서서히 악화시키고 있었다. 공습으로 인한 지연은 보급품의 이동을 늦추어 독일군의 물자 비축량을 감소 시켰다. 공습으로 인해 독일군은 철도대신 도로를 통해 물자 보급을 해야 했고 이로 인해 연료 소비량이 증가했다. 독일 서부군은 연료 비축량이 감소하는 것을 막아보기 위해서 6월 3일 부터 엄격한 연료 배급을 실시해 보유하고 있는 차량의 30%를 운행 중단 시키고 훈련에 사용할 연료도 삭감했다. 전략수송예비대는 도로를 통해 이동할 수 밖에 없었다. 전략수송예비대의 트럭 가동율은 4월 이후 감소하기 시작해 1943년 11월 부터 꾸준히 상승하던 경향이 완전히 반전되었다.(표1을 참고) 이렇게 해서 연합군의 공습은 디데이 이전에 독일 서부군이 상륙 지점에 병력을 전개하고 재배치된 부대에 보급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감소시켰다. 만약 독일군이 상륙 지점에서 연합군을 격퇴할 수 없다면 서부전선에서 장기전을 펼 수 밖에 없으며 이렇게 되면 독일 본토에서 상륙 지점 까지 막대한 양의 보급을 할 수 있어야 했다.8)

결국 1944년 6월 6일 시점에서 프랑스에 배치된 독일군의 보급 능력은 장기간의 방어 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탄약 비축량은 제한적이었다. 독일 서부군은 해안방어 사단의 경우 3주 분량의 탄약을, 항만요새에 배치된 사단의 경우 4주 분량의 확보하고 있었지만 기동예비 사단의 경우는 2주치 탄약을 보유하는데 그치고 있었다. 독일군의 연료 사정은 더욱 더 심각한 상황이었다. 독일 서부군의 전략 예비대는 불과 일주일에서 10일 분량의 연료만 확보하고 있었다. 일선에 배치된 사단들에 대한 보급은 연합군의 상륙 초기 단계까지는 충분한 수준이었지만 연합군의 상륙을 신속하게 격퇴하지 못한다면 비축 물자를 상륙 지점까지 신속히 보급할 수 있어야 했다. 프랑스의 철도망에 대한 타격으로 상륙 지점까지 물자를 수송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었다.9)

독일군의 일지를 통해 연합군의 상륙 직전 프랑스 북서부에 배치된 독일군의 보급 체계의 실상을 재구성 할 수 있다.(표2와 표3을 참고) 방어군인 독일 제7군은 18,748톤의 탄약을 확보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3주간 사용할 수 있는 분량이었다. 하지만 이 중에서 불과 38%(7,172톤)만이 노르망디 지역에 비축되어 있었다. 나머지 탄약은 멀리 떨어져 있는 브르타뉴의 보급창에 비축되어 있었다.(도판1을 참고) 제7군의 유류 보유량은 더욱 더 심각했다. 6월 1일 기준으로 제7군은 103만5천 갤론의 예비 비축 연료를 확보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2주 정도의 기동 작전을 펼칠수 있는 수준이었다.

표2. 제7군의  탄약 비축량(1944년 6월 1일 기준, 단위 미터톤)
노르망디

브르타뉴

총계
보급창
비축량
보급창
비축량

Margot
1,638
Maria
2,650

Michel
2,109
Martin
1,925

Martha
2,008
Manfred
2,516

Max
1,417
Mathilde
2,135



Moritz
2,340

합계
7,172
합계
11,576
18783
출처: ’Versorgungslage A.O.K 7 Stand: 1 Juni 1944’, NARA T-312, 1571, 000607.

표3. 독일군의 연료 비축량(1944년 6월 1일 기준, 단위 1000갤런)
제7군 관할

전략 예비


장소
비축량
장소
암호명
비축량
St. Bertharix
17
Chateaubriant
Bruno
258
Le Mans
38
Domfront
Bertha
255
Rennes
40
Pontivy
Brigitte
132
Lamballe
11



Landemeau
78



Quimper
8



Pluvigner
34



Flain
67



Henneville
23



St. Sauveur
18



Noyers
6



Domfront
5



합 계
355


645
출처: ’Versorgungslage AOK 7 Stand: 1 Juni 1944’, NARA T-312, 1571, 000607.



독일 제7군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물자의 보급에 있었다. 제7군 예하의 보급부대는 노르망디 상륙작전 전날 기준으로 248대의 트럭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그 수송능력은 불과 994톤에 불과했다. 이것은 최하 기준의 보급량도 맞추지 못하는 것이었다. 제7군은 연합군의 공습으로 보급을 파리 일대에 위치한 전략 예비 비축창에 의존하게 되었다. 하지만 연합군의 상륙 초기에 연합군 공군은 루아르강을 통해 남쪽에서 노르망디로 연결되는 주요 철도망을 차단해 버렸고 이로 인해 노르망디 지역은 완전히 고립되어 버렸다.10)

독일 제7군은 6월 6일에서 7일 사이에 작전 기동 예비대들을 노르망디로 이동시키기 시작했다. 하지만 기동 예비대들을 이동시키는데 필요한 수송 능력은 제7군이 보유한 트럭의 20배에 달했다. 그래서 이미 6월 7일 부터 계획된 부대 이동의 규모는 가용 가능한 트럭의 숫자를 아득히 뛰어넘고 있었고 예비대가 전투에 투입된 이후 보급을 할 수 있는 제7군의 보급 역량도 마찬가지였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독일군은 연합군이 교두보를 확고히 구축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잠정적인 조치를 취했다. 전투부대를 노르망디로 수송하는 것에 우선순위가 주어졌다. 일단 부대를 이동 시킨 뒤에야 보급 문제에 신경을 쓸 수 있었던 것이다. 연합군의 철도망에 대한 차단 작전이 효과적이었고 전략수송예비대는 트럭이 부족했기 때문에 노르망디에 배치된 부대에 보급을 하는 것은 독일군이 감당할 수 없는 어려움을 안겨주었다.11)

부대 이동에 우선순위가 주어지면서 독일군의 보급 사정은 악화되어갔다. 그 결과 열악한 보급 상황이 계속되면서 독일군의 노르망디 방어에 영향을 끼쳤다. 프랑스의 철도망이 마비된데다 트럭 수송 능력은 크게 부족했으며 부대 이동에 우선 순위가 주어지면서 서부전구사령부 군수참모처는 일선의 부대가 소모하는 만큼의 물자를 보급해 줄 수가 없게 되었다. 연합군의 작전(공습 및 파괴공작)도 독일군의 보급 작전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 연합군은 6월 동안 전선으로 가는 독일군의 보급물자 중 20%를 파괴했다. 게다가 연합군 공군의 위협으로 전투 지역으로 가는 보급품의 수송은 지연되었다. 보급 작전은 대부분 야간으로 제한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파리 인근에서 노르망디까지 왕복하는 보급 작전은 평균 4~5일이 소요되었다. 그 결과 전선에서 소모하는 물자 중에서 극히 일부만 보충되었다. 6월 15일까지 전선에 보급된 탄약의 양은 하루 평균 소모량에서 15%가 부족했다. 6월 28일 기준으로 제7군에 보급된 탄약 중에서 37%만이 목적지에 도착했다. 독일군의 보급은 전구 차원에서 봤을때 연합군의 공습에 더욱 취약했다. 독일군의 주요 탄약창은 6월에 실시된 공습으로 파괴되었다. 그 결과 독일 제7군의 탄약 재고량은 급속히 줄어들었다. 노르망디 전역 전 기간을 통틀어 독일군은 공세 작전을 실시할 수 있을 만한 탄약을 보급받지 못했다.12)

독일군의 연료 사정은 더욱 더 심각해지기 시작했다. 서부전구사령부 군수참모처는 6월 9일 부터 13일 사이에 예비로 보유하고 있던 유류를 모두 노르망디로 보냈다. 유류수송차량이 부족한데다 이런 종류의 차량은 특히 공습에 더 취약했기 때문에 연료 수송은 더욱 골치아픈 문제였다. 게다가 독일군의 유류집적소는 연합군의 주요 공습 목표였다. 동프롱Domfront에 위치한 연료집적소, 암호명 ‘베르타’는 6월 13일 공습으로 파괴되었다. 6월 22일에는 더 심각한 피해가 있었다. 파리 외곽의 젠빌리에Gennevilliers에 위치한 서부전선에서 가장 큰 독일군의 연료집적소가 파괴되어 607,000갤런의 연료가 파괴된 것이었다. 결국 연료 재고량이 곤두박질쳤다. 6월 14일에는 독일 제7군은 노르망디 지역에 비축해 놓은 연료가 다 떨어졌고 브르타뉴 지역에 고작 하루치에도 못 미치는 63,000갤런을 보유하고 있는데 그쳤다. 심지어 전선에 배치된 부대들은 고작 2~3일치(100~150km 정도를 이동할 수 있는)의 연료만 확보하고 있는 상태였다. 결국 연합군의 상륙 2주차가 되자 독일 제7군은 노르망디 밖에서 철도와 도로로 매일 보급해주는 연료에 의존하게 되었다. 결국 노르망디에 배치된 독일군은 엄격한 연료 배급과 국방군의 다른 병종, 인접한 부대로 부터 획득한 연료로 기동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13)

연합군 지상부대는 상륙 첫 주에 항공작전의 결과 큰 이득을 얻을 수 있었다. 독일군은 세느강과 루아르강을 넘어 노르망디로 단 한대의 열차도 들여보내지 못했다. 6월 14일에 독일군은 공식적으로 보급 상황을 ‘재앙적’이라고 기록하고 있었다. 이 무렵 독일군은 노르망디로 이어지는 철도망을 복구해야만 장기적인 방어 작전이 가능하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었다. 이후 독일군은 기존의 조율되지 않고 중구난방이었던 철도 복구작전을 중단하고 노르망디로 이어지는 두개의 주요 철도노선을 개통하여 유지하는데 초점을 맞췄다. 하나는 파리-베르사이유-드뢰Dreux-쉬르동Surdon으로 이어지는 동쪽에서 오는 노선이었고 다른 하나는 투르Tours-르망Le Mans-알랑송Alencon-세Sees-쉬르동으로 이어지는 남쪽에서 오는 노선이었다. 필사적인 복구 작업으로 연합군의 상륙 2주차에는 이 두개의 노선이 재개통 되었다. 6월 18일~19일 밤 사이에 파리에서 드뢰, 베르뇌유Verneuil, 그리고 루아르 강을 건너 투르와 르망까지 열차 운행이 재개되었다. 하지만 투르 생 시르Tours St Cyr 다리는 복구가 완료되지 못한 상태여서 화물을 만재한 열차가 통과할 수 없었다.  기관차는 다리로 들어서는 입구에서 분리되었고 화차는 별도로 끌어서 다리를 건너게 한 뒤 강 건너편에서 열차를 다시 연결했다. 6월 25일에는 큰 손상을 입은 투르 생 마르Tours Cinq Mars 다리도 비슷한 조건하에 재개통 되었다. 이 두개의 교량은 상태가 불안정했고 인근 지역의 철도 인프라는 공습으로 심한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남쪽에서 노르망디로 이어지는 철도망은 부분적으로만 운용 가능했다. 이 때문에 7월 말 까지도 대부분의 열차들은 루아르강 남쪽에서 화물을 하역했다.14)

독일군은 철도를 복구하려고 노력하면서 그 동안 도로망을 통해 보급을 했다. 서부전구사령부 군수참모처는 차량을 최대한 모으는 등의 노력을 했지만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지속적인 소모로 인해 차량 수송능력을 충분히 증강할 수 없었다.(표1을 참고) 사실 노르망디 전역을 치르면서 독일군의 차량 손실이 차량 보급을 상회했기 때문에 독일군의 차량화 수준은 급속히 악화되었다. 연합군의 전술 공군은 철도 종점에서 전선으로 보급품을 실어나르는 독일군의 수송수단에 막대한 손실을 입혔다. 게다가 보급 수송 작전을 야간에 실시하게 되면서 차량 사고율이 증가했다. 상륙작전이 시작된 첫 10일 동안에만 독일군이 보유한 전략수송예비대의 차량 20%가 공습, 차량고장, 차량사고로 가동 불능이 되었다. 6월 말에 이르자 독일군은 하루 평균 30대의 수송 차량을 상실하고 있었다. 통계가 완벽하지는 않지만, 독일군은 6월에 보급 작전을 수행하면서 수송능력 2,225톤에 달하는 트럭을 상실했다. 여기에 전선의 부대가 상실한 트럭도 추가될 것이다. B집단군은 6월 한달에만 4,200대의 차량을 잃었는데 이 중에서 1,866대가 트럭이었다. 독일군은 모든 노력을 기울였지만 노르망디 전역 동안에 전략수송예비대의 규모를 확대할 수 없었다.15)

독일군이 보급 수송을 도로에 의존하게 되면서 연료 소모도 증가했고 이것은 가뜩이나 부족한 연료 사정을 악화시켰다. 전략수송예비대는 6월 한달에만 80만 갤런의 연료를 소비했다. 연합군의 공격 또한 독일이 서부전선에 보급한 연료의 상당량이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을 방해했다. 6월에는 990만 갤런의 연료가 보급됐는데 이 중에서 195만 갤런이 노르망디로 수송중에 파괴되었고, 100만 갤런은 연료창에서 파괴되었으며, 최소 17만2천 갤런은 전투 지역에서 상실했다. 그래서 보급된 연료의 60%만이 전선에 도착할 수 있었다. B집단군 사령부는 보급 상황이 호전되지 않는다면 7월 20일에서 25일 사이에 연료가 바닥날 것이라는 비관적인 전망을 하고 있었다.16)

하지만 6월 말에 이르러 독일군의 보급 사정은 호전되기 시작했다. 이것은 네가지 요인이 작용한 결과였다. 노르망디로 이어지는 철도망을 복구한 것은 앞서 언급했다. 노르망디 전선의 양익에 배치된 부대에 페리선을 통한 보급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전선에 배치된 부대들이 보유하고 있는 차량을 투입해 후방의 보급창으로 부터 보급품을 실어 날랐다. 또한 노르망디 전선에 배치된 독일군에 대한 보급 임무가 분리되었다.17)
노르망디와 연결되는 철도망이 제한적이나마 복구되자 독일군은 마침내 제한적인 보급 열차를 전투 지역까지 운행할 수 있었다. 독일군은 6월 하순에 하룻 밤에 평균 두편의 보급 열차를 철도 종점까지 운행하였다. 철도망이 복구되면서 6월 하순에는 전선으로 가는 보급물자의 양이 25%정도 증가했다. 7월 8일 부터 14일 사이에는 탄약의 17%와 연료의 35%가 철도를 통해 보급되었다.18)

독일군은 6월 중순부터 세느강을 통한 페리선 운항을 늘렸다. 1944년 봄 기준으로 세느강에는 17척의 페리선이 운항중이었는데 화물 수송능력은 420톤이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시작되자 독일군은 세느강에 페리선을 추가로 투입하고 현지에서 새로 건조하기도 하였다. 독일 해군은 파리에서 보급품을 수송하는 바지선이 이용할 수 있도록 엘뵈프Elbeuf에 전력을 기울여 새로운 접안시설을 건설했다. 6월 18일 파리에서 첫번째 바지선이 출발해 3일 뒤 엘뵈프에 보급품을 하역했다. 이후 세느강을 통한 보급은 크게 확대되었다. 7월에 이르면 노르망디로 보내는 보급품의 5분의 1이 세느강을 통해 도착했다.19)

세느강과 함께 보르도와 후와양Royan과 같은 대서양에 접한 항구에서 노르망디에 있는 브레스트Brest, 생 나제르St Nazaire, 생 말로St Malo, 셰르부르로Cherbourg도 페리 운항이 추진되었다. 하지만 선박 부족과 연합군의 공습, 그리고 운항 거리가 길다는 점, 프랑스 서부에 만연한 보급 부족 때문에 대서양을 통한 페리 운항은 세느강의 페리 운항 만큼 독일군의 보급 수행에 도움을 주지 못했다. 대서양 연안의 페리 운항은 최대치를 기록한 7월 8일에서 14일 사이에 노르망디에 보급된 탄약의 16%를 보급하였다.
철도 운행이 재개되고 페리선을 통한 보급이 시작되면서 노르망디로 보급되는 보급품의 양은 크게 증대되었다. 7월 중순에는 노르망디로 보내지는 보급품의 절반이 철도와 페리를 통해 보급되었다. 하지만 독일군이 직면한 큰 어려움은 후방의 보급창, 항구, 철도 종점에서 보급품을 환적하여 전선으로 보내는데 있었다. 이러한 어려움은 전선의 부대들이 직접 보급품을 수령함으로써 완화되었다. 6월 중순에는 각 사단의 수송부대가 육군의 보급창이나 철도 종점으로 보급 임무를 나서는 것이 흔한 일이 되었다. 이러한 보급 임무에 투입된 트럭의 손실이 폭증하면서 전선 부대의 기동력은 격감하였다.(표4를 참고)

표4. 독일 기계화 사단의 트럭과 견인차량 가동율의 감소치(1944년 6~8월, 단위%)
부대
6월1일

7월1일

8월1일

21기갑
93
185
67
134
65
133
12SS기갑
65
33
54
24
-
-
교도기갑
77
73
77
80
59
55
2기갑
81
73
35
23
-
-
1SS기갑
-
-
84
69
70
26
월평균
-
-
25
25
15
31
출처: ’Zustandberichte, Panzer Divisionen, Stand 1.6-1.8.1944’, General Inspektor derPanzertruppen, NARA T-78, rolls 616, 623-4, 718-19.

독일 서부군은 7월 초에 노르망디 전선의 보급 책임을 분할하였다. 이때까지 노르망디 전선에 대한 보급은 제7군 사령부가 담당하고 있었다. 7월 초 부터는 서부기갑집단Panzergruppe West이 캉 일대에서 영국-캐나다군과 교전하고 있던 전선 우익의 보급 책임을 인수하였다. 제7군의 책임 범위는 생-로 방면으로 진격해 오는 미군과 맞서는 전선 좌익으로 국한되었다. 이러한 분리 조치로 제7군 사령부 군수참모의 업무 부담은 경감되었다.

7월 동안 독일군 우익의 보급 사정은 비록 느리기는 해도 개선되고 있었다. 독일군은 야간에 드뢰와 베르뇌유 방면으로 수송대를 운행하는 한편 엘뵈프에 수척의 바지선이 싣고 온 화물을 하역했다. 독일군은 두개의 철도 노선에 가용한 수단을 집중했기 때문에 독일 철도공병대는 연합군의 끊임없는 공습에도 불구하고 베르사이유-드뢰 노선을 운행 가능한 상태로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연합군의 공군력은 세느강을 운항하는 페리 노선을 무력화 할 수도 없었다. 선박은 교량이나 철도 시설 보다 명중 시키기 어려운 데다가 대개 야간에만 운항을 했다. 이때문에 서부기갑집단은 남동쪽으로 진격하면서 팔레즈 점령하려 한 영국-캐나다군을 막아내는데 충분한 보급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독일 제7군이 생-로 방면으로 진격하는 미군에 맞서고 있던 좌익의 보급 상황은 7월에 들어와서도 우익 만큼 개선되지 못했다. 오히려 좌익에 배치된 독일군의 보급 상황은 더욱 더 악화되고 있었다. 선박 운행은 우익 만큼 많지 않았고 보급선이 너무 긴데다 동쪽 방면으로의 교통망이 부실했다. 게다가 독일군은 세느강 방면과는 달리 루아르강 방면으로는 많은 보급 열차를 운행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결과 생 로의 함락으로 마무리된 7월 3일에서 21일까지의  미군의 대공세가 끝나자 제7군의 보급품 재고량은 거의 바닥이 나고 말았다. 하지만 루아르강을 넘는 철도선을 유지하지 못해 7월 말 생 로 방면의 전선이 붕괴된 것은 독일측이 철도망을 유지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노르망디의 미군 전선을 담당한 독일 제7군의 보급 상황을 결정적으로 악화시킨 기폭제는 7월 15일에 생 시르의 철교와 교통 중심지인 투르의 철도 조차장이 또다시 파괴된 것이었다. 6월 중순 철도 교통이 재개된 이래 투르는 독일 제7군의 사활이 달린 보급선이었다. 6월 9일 부터 7월 7일 사이에 총 10,400톤, 하루 평균 360톤의 보급품이 투르를 통과하는 철도 노선을 통해 운반되었다. 투르를 통과하는 보급선은 노르망디 서부에 배치된 독일군의 보급품 중 3분의 1을 담당했으며 독일 제7군이 사용하는 연료의 40%가 여기를 통해 보급되었다. 독일군이 즉시 임시 교각을 세워 교량을 복구하려 한 것을 보면 투르를 통과하는 보급선이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알 수 있다.22)

투르를 통과하는 보급선이 다시 끊어지는 동시에 서부전구사령부 군수참모처가 도로를 통해 제7군에 보급을 해 줄 수 있는 능력도 트럭의 숫자가 줄어들면서 감소하고 있었다. 노르망디 서부 지역에는 동쪽으로 연결되는 도로가 많지 않았고, 거리도 멀었기 때문에 제7군에 보급품을 수송하는 것은 우익의 서부기갑집단에 보급을 하는 것 보다 훨씬 더 힘들었다. 게다가 제7군에 보내진 보급품 중에서 전선에 도착하는 것은 일부에 불과했다. 제7군은 이미 투르가 파괴되기 이전 부터 자체적으로 보유한 트럭으로 보급품을 수송하는 비중이 높아지고 있었다.23)

투르를 통과하는 보급망이 붕괴되면서 제7군의 보급 상황은 급속히 악화되어갔다. 유류를 철도로 수송하는 것이 중단됐지만 서부전군사령부 군수참모처에서는 이것을 도로 수송을 통해 보충할 능력이 없었다. 그결과 투르가 파괴되고 일주일이 지나자 제7군에 대한 유류보급은 22%나 감소했다. 게다가 7월 16일 샤토브리앙에 있던 제7군의 유류창 ‘브루노’가 연합군의 공습으로 파괴되자 독일군의 연료난은 더욱 심화되었다. 생 로를 방어하고 있던 독일 제84군단에 대한 유류 보급을 살펴보면 미군이 돌파를 위해 ‘코브라’ 작전을 개시하기 바로 직전 독일군이 만성적인 유류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표5를 참고)24)

표5. 생 로와 캉 지구에 배치된 독일군의 연료 가용량(1944년 6~7월, 단위 V.S., Verbrauchssatz*)

6.6
6.14
6.18
7.3
7.7
7.8
7.10
7.24
캉 방면
3.0
1.5
1.6
1.3
1.3
1.8
1.3
?
생 로 방면
3.0
1.0
1.3
0.9
0.9
0.9
0.9
0.7
출처: Versorgungslage u. Tagesmeldungen, I SS Pz. Korps, LXXXIV Korps, Pz.Gr.West, 7th Army, Army Group B, OB West, O.Qu. West, NARA T-311, rolls 1-5, 27-8; T-312, 1569-70 ; T-313, 420-2, T-314, 1568.
*1V.S.는 해당 부대의 전 차량이 100km 이동할 수 있는 연료량을 뜻함.

독일측은 7월 23일에 투르 철교를 다시 개통했다. 하지만 이때는 7월 25일에 개시될 코브라 작전에 맞설 제7군에 보급을 해주기에는 너무 늦은 시점이었다. 한편 영국-캐나다군은 우익의 독일군 예비대를 붙잡아두기 위해서 ‘굿우드(7월 18~20일)’ 작전을 개시했다. 굿우드 작전이 코브라 작전의 성공에 기여한 것에 관해서는 여전히 논쟁이 진행 중이다. 하지만 역사가들이 놓치고 있는 사실 하나는 굿우드 작전이 독일군의 군수 역량에 끼친 영향이다. 독일군의 군수 역량에 끼친 영향에서 본다면 굿우드 작전은 결정적이었다. 서부전구사령부 군수참모처는 굿우드 작전과 코브라 작전 사이에 일주일에 하루씩만 도로를 통해 연료를 보급할 수 있었고 소속된 유조차들은 굿우드작전으로 심각하게 소모된 연료를 보충하기 위해 대부분 우익에 투입되었다. 제7군은 보유한 트럭들을 르망, 알랑송, 드뢰의 철도 종점에 보내 연료를 보급한 결과 겨우 굿우드 작전이전에 받던 연료량의 73%를 보충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브라 작전 직전에 생 로 방면의 전선을 방어하고 있던 독일 제84군단은 고작 74km를 행군할 수 있는 수준의 연료만 보유하고 있었으며 이것은 이틀 정도의 격렬한 전투를 수행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사실 미군이 코브라 작전을 개시하던 7월 25일에 연료를 실은 첫 번째의 열차가 투르를 거쳐 르망에 도착했지만 이때는 독일군의 전선이 붕괴되던 첫 48시간 동안 전선의 독일군 부대에 연료를 보급해 주기에 너무 늦었다.25)

자료들을 살펴보면 투르 방면의 보급로가 막힌 것은 독일 제7군의 탄약 보급에 연료 만큼 악영향을 끼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투르 방면의 보급망이 무너진 것은 전선의 탄약 보유량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다. 서부전구사령부 군수참모처는 투르가 파괴되자 예하 수송부대의 왕복시간을 단축시키기 위해서 운행 거리를 감축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독일군은 7월 17일에 그랑빌로 부터 동쪽으로 40km 떨어져 있는 세베르Sever에 위치한 제7군 예하의 가장 규모가 크고 최전선에 위치해 있었던 탄약창 ‘미헬Michel’을 폐쇄했다. 이어서 7월 21일에는 탄약창 ‘미나Mina’와 유류창 ‘브렘제Brehmse’도 폐쇄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그대신 보급품을 수송하는 종착지는 동포르 동쪽에 위치한 탄약창 ‘마르타’와 같이 훨씬 후방에 위치한 보급창으로 변경되었다. 이렇게 되자 생 로 방면에 배치된 사단 예하의 수송대들은 탄약을 보급받기 위해 더 먼 거리를 이동해야 했고 연료 소비도 증가했다. 그 결과 생로 지구를 방어하는 독일군의 탄약 보유량은 7월 내내 꾸준히 감소했다. 6월 말에서 7월 24일 사이에 켄트너 전투단Kampfgruppe Kentner의 기관총탄과 박격포탄 보유량은 각각 64%와 75%로 감소했다. 코브라 작전이 개시될 당시 생 로 지구를 방어하고 있던 17SS 기갑척탄병사단 괴츠 폰 베를리힝엔 소속의 쿠스케 전투단Kampfgruppe Kuske의 남아있는 희귀한 탄약재고량 보고서는 독일군의 탄약 부족이 어떠했는가를 보여준다. 이 전투단은 기관총 1정당 1,000발, 소총 1정당 30발의 탄약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격렬한 전투를 하루 수행할 수 있는 양이었다.26)

코브라 작전의 성공에 대한 분석은 거의 대부분 신속하고 효율적인 미군의 연합 작전 실행과 독일군의 전력이 심각하게 약화된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하지만 코브라 작전 직전 생 로와 캉 일대의 독일군 방어선의 밀집도를 자세히 분석해 보면 두 지역간의 차이는 크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표6을 참고) 게다가 8월 동안 독일군은 코브라 작전 보다 병력차가 훨씬 큰 열세한 상황에서도 영국-캐나다군의 공세를 세 차례나 막아냈다.27)

표6. 1944년 7월 25일 생 로와 캉 지구의 독일군 방어 밀도(단위 km)
사령부(지구)
보병 대대
포대
기갑차량
1SS기갑군단(캉)
2
2
19
84군단(생 로)
2
3
16
출처: Tagesmeldungen, Kriegsgliederungen, u. Zustandberichte I SS Pz. Korps, LXXXIV Korps, Pz.Gr. West, u. Seventh Army, NARA T-312, 1568-70; T-313, 420-2; T-314, 1568.

코브라 작전의 성공을 설명하는데 필요한 잃어버린 고리는 바로 독일군의 보급 부족이었다. 코브라 작전에서는 노르망디 전역에서 처음으로 독일군이 보급 부족 때문에 효과적인 방어를 펼치지 못했다. 독일군이 이전에 있었던 연합군의 공세와 달리 7월 25~26일에 있었던 코브라 작전의 돌파 단계를 저지하지 못한 이유는 독일군 부대가 소모되어 있었던 것에 더해 보급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코브라 작전의 첫째날 저녁에 방어를 하고 있던 제84군단은 대전차 방어의 중핵을 담당하고 있던 88mm 대공포의 포탄을 모두 소모해 버렸다. 제7군의 예비대로 있었던, 엘리트 부대이며 여전히 강력한 전투력을 가지고 있었던 무장친위대 2기갑사단 다스 라이히가 코브라 작전에서 별다른 활약을 하지 못한 원인도 보급 부족으로 설명할 수 있다. 제7군 사령부는 7월 26일에 방어를 담당하고 있던 제84군단이 휘발유 부족으로 대응을 하는데 ‘심각한 제약’이 있었다고 보고했다. 이날 다스 라이히 사단은 연료 부족으로 2개 중대에 달하는 판터 전차를 유기해야 했다. 7월 28일에 이르러 제84군단의 탄약 사정은 ‘심각하게 낮아졌다.’ 독일군은 숫적인 열세에 더하여 탄약과 연료가 부족해 코브라 작전을 저지할 수 없었다.28)

미군이 돌파에 성공하자 그동안 누적되었던 보급 문제와 저하되고 있던 기동력으로 독일군의 노르망디 방어는 와해되기 시작했다. 전선의 상황이 위급해지자 독일군은 7월 말 부터 다시 주간에 보급 작전을 시작할 수 밖에 없었고 독일군의 차량 손실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8월 첫째주에 최전방에 있던 독일군 보급창은 탈취당했고 이후 독일군은 전선을 유지할 도리가 없었다. 노르망디에서 독일군의 패배는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서부기갑집단을 개칭한) 제5기갑군은 이후 노르망디 전선의 보급 임무를 전담하게 되었고 세느강 일대에 위치한 멀리 떨어진 보급창에서 보급품을 수송해야 했다. 그 결과 퇴각하는 독일군은 전 전선에 걸쳐 급속히 연료가 바닥나기 시작했다. 8월 15일 부터 연료 부족은 제7군 예하부대들을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었고 독일군은 처음으로 전차들을 대량으로 유기하기 시작했다. 8월의 마지막 2주간 독일군은 퇴각하면서 수천대의 차량을 버렸다. 세느강을 건너 퇴각할 수 있었던 독일군의 규모는 노르망디에 투입된 병력의 3분의 1, 차량의 4분의 1, 중화기의 10% 남짓에 불과했다.29)

군수 보급의 어려움 때문에 노르망디의 독일군 방어가 붕괴했다는 것은 확실하다. 독일군은 보급 부족 때문에 연합군의 교두보에 심각한 위협을 가할 수 없었고 방어도 약화되었다. 철도노선의 두절과 차량을 통해 전선으로 보급되는 부족한 보급품, 그리고 비축해 놓은 물자가 급속히 소모되면서 독일군은 보급 수준에 맞춰 방어적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세느강과 루아르 강을 건너는 핵심 철도노선의 복구와 페리선 운항의 확대로 6월 말에 이르러서야 노르망디의 독일군에 대한 보급 상황은 호전되기 시작했다. 7월 동안 보급사정이 호전된 것은 서부기갑집단이 영국-캐나다군을 상대하고 있던 노르망디 전선의 우익이었다. 노르망디 전선의 우익에 대한 보급 사정이 호전된 것에는 세느강을 통한 선박 운항과 파리에서 드뢰, 베르뇌유로 연결되는 철도노선이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이 노선의 철도 종점에서 도로로 전선까지 가는 거리는 상대적으로 짧았고 이 때문에 전선에 보내는 보급물자의 대부분이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독일 제7군이 미군을 상대하고 있던 노르망디 전선 서부에서는 7월 내내 보급 상황이 크게 개선되지 못했다. 독일군은 동쪽과 달리 투르-알랑송-르망으로 이어지는 철도 노선을 통해 보급 열차를 많이 운행할 수 없었다. 대서양을 통한 선박 수송도 큰 도움이 되지 못했고 전선까지의 거리도 멀었다. 그리고 알랑송에서 르망까지, 브레타뉴 반도의 항구에서 전선까지 이어지는 도로의 길이도 상대적으로 길었다. 그래서 제7군에 보내는 보급품 중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적었고 운반에 걸리는 시간도 길었다. 그 결과 노르망디 전선 서쪽에 배치된 독일군의 보급 사정은 7월 내내 악화되었다. 7월 15일에 투르가 또 한번 파괴되면서 독일 제7군에 대한 보급은 치명타를 맞았다. 제7군에게 노르망디 동부의 철도 종점에서 부터 도로를 통해 보급하는 것을 늘리려는 노력은  그 긴 거리와 7월 18일에 개시된 영국-캐나다군의 굿우드 작전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독일군은 7월 23일에 투르 노선을 다시 복구했지만 이것은 이틀 뒤에 시작될 코브라 작전에 대응해 제7군에 대한 보급을 재개하기에 너무 늦은 시기였다. 제7군은 연료와 탄약이 극도로 부족해 7월 말에 개시된 미군의 돌파를 저지할 수 없었고 이로 인해 노르망디의 독일군은 패배했다. 돌이켜 보면 코브라 작전이 개시되기 10일 전에 운 좋게도 투르가 파괴된 것은 미군의 돌파가 성공하는데 있어 최적의 시기였음이 입증되었다. 만약 투르가 그보다 일찍 파괴되었다면 독일군은 제때 보급을 재개할 수 있도록 다리를 복구했을 것이다. 그렇게 되었다면 독일군의 보급 상황은 미군의 돌파를 확실하게 할 정도로 충분히 악화되지 못했을 것이다.

주석 
1) 필자는 Jason Coy, Allison Gough, Mark Grimsley가 이 논문의 초고를 검토해 준 데 대해 감사드린다. 독일군의 군수 체계에 대한 유일한 선행 연구는 US Army Historical Division, European Theater of Operations, Foreign Military Studies Manuscript B-827, Maj. Otto Eckstein, ’Activities of the Oberquartiermeister West During the Time of Preparation for Warding Off an Invasion and During the Initial Combats’, Germany, 1947, published in Donald Detweiler, ed., WWII German Military Studies (New York, Garland, 1979), XII. 
2) 독일 서부군이 1943년 여름에 처해 있었던 열악한 상황에 대한 포괄적인 분석은 National Archives Record Administration, Captured German Documents (이하 NARA) microfilm series T-311, roll 27, frame 7032324ff. Concerning Normandy specifically, see ’Personelle Zusammensetzung’, Beilage zu Anlage zu Gen. Kdo. LXXXIV A. K. Ia. Nr. 1808/43 g.Kdos., v. 4/10/1943, NARA T-314, 1604, 001032; and ’Hebung der Kampfkraft der Infanterie’, 709 Inf. Div. Abt. Ia Nr. 745/43 g.Kdos., d. 12/7/1943, NARA T-314, 1604, 000731를 참고하라. 
3) 독일군의 낮은 차량화 수준에 대해서는 Richard DiNardo, MechanizedJuggernaut (New York, Greenwood Press, 1991) and W. Victor Madej (ed.) GermanWar Economy: The Motorization Myth (Allentown, PA, Game Publishing, 1984)를 참고하라. 트럭과 견인 차량의 부족은 1944년 2월 1일 36,093대와 5,772대에서 1944년 5월 1일에는 82,096대와 8,423대로 늘어났다. Werner Stang, ’Zahlenmaterial zur Materiellen Lage der faschistischen Wehrmacht im Zweiten Weltkrieg’, Militärgeschichte IV (Apr. 1973), pp. 61-80. 또한 ’Waffe: Stand 1 Juni 1944’, OKH O. Qu., NARA T-78, 168, 000401-403도 참고하라. 
4) 1944년 6월 1일 기준으로 서부전선에 배치된 독일군의 기계화사단들은 평균적으로 트럭은 편제의 39%, 견인차량은 편제의 22%정도만 보유하고 있었다. ’ZustandberichtePanzer-Divisionen Stand: 1 Juni 1944’, General Inspektor der Panzertruppen, NARAT-78, 623-4. 같은 날자 기준으로 독일 서부군은 트럭 11,447대와 견인차량 1,760대가 부족했다.; ’Kraftfahrzeuge (ungepanzert) Heer: Western’. OKH Gen. Qu., d. 5/8/1944, NARA T-78, 726, 6076170. For discussion of the spring 1944 war games, see Eckstein, ’Activities’, p. 24를 참고하라. 
5) 노르망디 전역에서 연합군이 승리를 거두는데 있어 항공차단의 중요성에 관해서는 Public Record Office, Kew (hereafter PRO, Kew) AIR 40/1669, RAF Bombing Analysis Unit, ’The Effect of the OVERLORD Air Plan to Disrupt Enemy Rail Communications’; PRO W[ar] O[ffice] 205/172, ’Pre-invasion Bombing Campaign’; Wesley Frank Craven and James Lea Cate, The Army Air Forces in World War II I: II Europe: Argument to V-E Day, january 1944 to May 1945 (Chicago, Univ. of Chicago Press, 1951); Sir Charles Webster and Noble Frankland, The Strategic Air Offensive Against Germany, 1939-1945 III: Victory pt.5 (London, HMSO, 1961); Walt W. Rostow, Pre-invasion Bombing Strategy: General Eisenhower’s Decision of 25 March, 1944 (Austin, Univ. of Texas Press, 1981); Maj. O. Jaggi, ’Normandie 1944: Auswirkung der allierten Luftüberlegenheit auf die deutsche Abwehr’, Allegemeine schweizerische Militärzeitschrift, CXXIV (H5) (1958), pp. 333-61를 참고하라. 1944년 봄에 독일군은 제6 철도공병연대 단 하나만을 서부전선에 배치해 놓고 있었다. 기차 운행의 지연에 관해서는 ’Vortragnotiz’, Anl. zum Ktb. Ob. Kdo. Hg. B Vers. Abt. Ib, d. 3/6/1944, NARA T-311, 1, 7000664를 참고하라. 이 글에서 제시한 수치는 미국 갤런으로 표기하였다. 
6) 1944년 4월 독일군은 서부전선으로 3개의 중교량부설단schwere BrückenKolonne(60-ton)과 6개의 경교량부설단leichte BrückenKolonne(8-ton)을 재배치하였다. 5월 17일에는 각각 4개와 11개로 증강됐다. 철도 보수 작업에 투입된 인력은 3월 11일에는 1,300명이었는데 6월 3일에는 12,200명으로 증가했다.PRO, Kew, WO233/30, ’Report by SHAEF on the Effects of the OVERLORD Air Plan to Disrupt Enemy Rail Communications’, Nov. 1944, p. 33. 
7) 독일 서부군은 1944년 4월부터 8월 사이에 11,254대의 트럭을 보급받았다. 이렇게 증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히틀러가 서부군을 대폭 증강하도록 했기 때문에 1943년 8월 1일에는 7,281대의 트럭이 부족했으나 1944년 6월 1일에는 11,447대가 부족했다. ’Kraftfahrzeuge (ungepanzert) Heer: (Western)’, 15 Aug. 1943; 5 Sept. 1943, OKH Gen. Qu., NARA T-78, 614, 000552, 000601; ’Kraftfahrzeuge (ungepanzert) Heer: Western’, 5 Aug. 1944;  5 Oct. 1944, OKH Gen. Qu., NARA T-78, 726, 6076089, 6076170. 1944년 4월 1일에서 7월 31일 사이에 제6철도공병연대는 교량 136개, 총연장 16.824km를 복구했는데 이것은 하루에 다리 한개를 복구하는 꼴이었다. Tkb. Juni 1944 Ia/Stopi Hg. B, NARA T-311, 28, 7034030; Pz.Gr.Kdo. West Ia/Stopi Meldung Ia Nr. 2809/44 geh., NARA T-311, 28, 7034003. 세느강 하류에 있던 10개의 철교 중에서 단 한개만이 6월애 재개통 됐지만 이것 마저 7월 초에 다시 파괴되었고 또 다른 한개는 7월에 재개통 되었지만 역시 7월 말에 다시 파괴되었다. 그리고 다른 두개의 철교는 7월 말에 재개통 되었다. 
8) 5월 한달동안 독일군의 연료 소모는 하루 평균 45만 리터로 증가했다. Anl 581 zu Ktb. Ob. West Ia Nr. 3898/44 geh. Kdos., v. 16/5/44, NARA T-311, 24, 7028565-7. 연료 절약을 위한 대책으로 6월 3일 부터는 2리터 엔진 이상을 탑재한 승용차의 운행을 금지 시켰고 훈련용 연료는 15%를 감축하였다. ’Betreibstoff Einschränkung’, Ob. West Ia/O.Qu. West/Qu. 1 Nr. 027921/44 g.Kdos., v. 3/6/1944, NARA T-311, 29, 7183272. 독일군이 서부에 비축한 연료량은 아주 조금 증가하는데 그쳐서 1944년 1월 1일 7415만7천리터에서 1944년 5월 1일 8110만 리터로 늘어났다. Anlage 6 zu Ob. West/O.Qu. West/Qu.1 Nr. 0700/44 g.Kdos., v. 12/2/44, NARA T-311, 14, 7014621-4; Anlage 6 zu Ob. West/O.Qu. West/Qu.1/Betr. Stoff Nr. 02290/44 g.Kdos. v. 8/4/44, NARA T-311, 014, 7015022-3. 
9) 디데이 직전 독일의 군수보급 상황에 대해서는 Eckstein, ’Activities’, pp. 14-20, and ’Mun. Bevorratung im Westen’, GenStdH/Gen. U./Gr. Mun. I Az. 2359 Nr. I/011 901/44 geh. Kdos., vom 25/5/44, NARA T-311, 24, 7028940를 참고하라. 노르망디 상륙작전 직전 독일군의 기동예비대는 3.5에서 5V.S.(Verbrauchsatz)의 연료를 보유하고 있었다. 1V.S.는 100km를 이동할 수 있는 분량으로 전투상황에서 이틀치 연료에 해당한다. 
10) 제7군사령부의 보급상황 보고서 1944년 6월 1일자.NARA T-312, 1571, 000607. 독일 제7군은 1944년 1월 1일 기준으로 745만리터의 가솔린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것은 6월 18일에 466만3천 리터로 감소했다. ’Auszüge aus Versorgungs-Tagesmeldungen’, Hg. B Ib Nr. 0355/44 geh. d. 18/6/44, NARA T-311, 1, 7000704-5. 연합군과 독일군이 사용한 트럭의 수송능력을 일대일로 비교하는것은 두가지 요인 때문에 어렵다. 첫 번째는 무게톤(imperial ton)이 미터톤 보다 1.6% 무겁다는 점이다. 두번째는 연합군에서는 트럭을 수송능력에 따라 구분한데 비해 독일군은 짐을 실은 트럭의 무게에 따라 구분했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차량이 자체 중량과 비슷한 수준을 실어나른 다는 점을 감안하면 독일군의 등급 체계는 실제 수송 능력의 두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연합군의 1.5톤 트럭이 독일군의 3톤 트럭과 같은 수송능력을 가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노르망디 상륙작전 당시 제7군이 보유한 수송능력은 대략 500톤 정도였을 것이다. ’Stärke des Transportraumes für Verlastungszwecke’, AOK 7 Ia Nr. 2702/44 g.Kdos., NARA T-311, 1, 7000677-8. 연합군은 디데이 이전에는 루아르강에 있는 교량들을 심각하게 공격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노르망디 지역이 고립되면서 루아르강은 작전 지역으로 분류되었기 때문이다. 
11) ’Stärke des Transportraumes für Verlastungszwecke’, AOK 7 Ia Nr. 2708/44 g.Kdos., NARA 311, 1, 1000677-8. 부대 이동에 우선순위가 두어졌다는 점은 6월에 도착한 보급품 수송열차와 부대 수송열차의 숫자가 균형이 맞지 않는다는 점을 보면 알 수 있다. 보급품 열차는 겨우 41대 도착한 반면 부대 수송열차는 최소한 157대가 도착했다. 
12) 6월 15일까지 제7군은 5,000톤의 탄약을 소모했지만 재보급 받은것은 3,000톤에 불과했다. ’Auszüge aus Versorgungs Tagesmeldungen’, Hg. B Ib Nr. 0355/44 geh., d. 18/6/1944, NARA T-311, 1, 7000704-5을 참고하라. 보급창의 파괴에 관해서는 O. Qu. West, ’Besonders der Ereignisse’, 30 June 1944, NARA T-311, 14, 7014553을 참고하라. 제7군의 불완전한 보고서에 따르면 6월 동안 654,000리터의 연료와 2,308톤의 탄약, 그리고 수송능력 2,225톤에 달하는 트럭을 잃었다고 한다. ’Ausfallmeldungen’, O. Qu. AOK 7 Nr. 9654/44 geh., d. 30/6/44, NARA T-312, 1571, 000841. On the effectiveness of Allied interdiction efforts, see Ktb. O. Qu. West, d. 28/6/1944, NARA T-311, 14, 000550. 
13) 서부전구사령부 군수참모처는 6월 9일 부터 10일 사이에 924,000갤런의 연료를 보급했다.  6월 13일에 이르자 서부전구사령부의 연료 예비 비축량은 겨우 7,150갤런에 불과했다. Tkb. Ib Hg. B, v. 10/6/1944, NARA T-311, 1, 000710, NARA T-311, 14, 7014537, 그리고 Ultra Intercept, KV 8122, 15/6/1944, PRO, Kew, DEFE 3/172. 제7군의 보급 통계는NARA T-311, 15, 7015185에 기록되어 있다. 서부전구사령부 군수참모처는 예하에 겨우 2개 종대의 유조차를 보유하고 있었다. 연료창에 대한 공습은 NARA T-311, 14, 7014539, and Ob. West Ia Nr. 5676/44 geh., v. 23/6/44, NARA T-311, 14, 7029783를 참고하라. 
14) 6월 25일과 27일에 소뮈르와 샬론느(La Posoniere)의 다리도 재개통 되었다. 그리고 6월 말에는 다음의 노선들이 임시로 재개통 되었다. Le Mans-Sable-Segre-Redon-Quimper;  Nantes-Rennes-Dol (6월 23일); Saumur-Chateau du Loir-Le Mans; Nantes-Angers-Le Mans (6월 28일). 6월 동안 노르망디 방면으로 부대를 수송한 열차의 3분의 2는 루아르강 남쪽에서 부대를 하차시킬 수 밖에 없었다. ’Seit Beginn der Invasion wurde folgende Wehrmacht-Transporte in Frankreich-Belgien-Holland gefahren’, General des Transportwesens West Abt. Ib, n.d., ’Zusammenstellung der Ausladungen der Reichs- u. Basis-züge im Juni 1944’, n.d., ’Ausladungen der Einzelnachschubsendungen innerhalb der besetzten Westgebiete’,n.d., NARA T-78, 611, 000088, 000089, 000092; Chef Trspw./vorgesch. Staffel, untitled bridge report, 23/6/1944, General des Eisenbahntruppen, NARA T-78, 613, 000340-1; Zusammenstellung der in der Zeit vom 1/4-30/6/44 im Armeebereich durchgeführten bewegungen’, AOK 7 BVTO, NARA T-312, 1571, 000983; ’Eisenbahn-Nachschubtransporte’, O. Qu. West/Qu.1/NTBr.B.Nr. 03039/44, g.Kdos., v. 22/6, 23/6., 27/6/1944, NARA T-312, 1571, 000766, 000787, 000834.  
15) ’Auszüge aus Versorgungs-Tagesmeldungen’, Ib Hg. B Nr. 0355/44 geh., NARA T-311, 1, 7000704. 독일 B집단군은 6월 동안 1,866대의 트럭, 33대의 버스, 103대의 견인차량, 2,198대의 기타 차량을 상실했다고 보고했는데 이것은 하루 평균 75대의 트럭을 잃어버린 것이다. ’Zusammenstellung der Totalausfälle an Kfz. in der Zeit vom 6/6-30/6/44’, Obkdo. d. Heeresgr. B, Anlage 1 zu Tgb. Nr. 11287/44 geh., d.29/7/1944, NARA T-311, 1, 7000828. 
16) 연료 손실 통계는 Tagesmeldung O. Qu. West v. 1/7/1944, NARA T-311, 15, 7015271를 참고하라. 
17) 제7군은 두개의 철도노선이 복구되면서 6월 18일의 보급 상황에 대해 처음에는 ‘다소 개선되었다.(’Geringe verbesserung’)’고 기록했다., KTB O. Qu.West, 18/6/1944, NARA T-311, 14, 000543. 
18) 연합군은 독일군의 보급열차 한대는 트럭 180대분의 수송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했다. PRO, Kew, CAB44/243, Lt-Col. A.E. Warhurst, ’OVERLORD: D-Day, 6 June 1944’, p. 26. 노르망디에 첫 번째 보급열차가 도착한 것은 6월 14일 이었으며 독일군은 이후 6월 내내 하루 평균 2.4대, 7월에는 하루 평균 2.7대의 열차를 보낼 수 있었다. General des Transportwesens West lb, ’seit Beginn der Invasion wurde folgende Wehrmacht-Transporte in Frankreich-Belgien-Holland gefahren’, n.d., NARA T-78, 611, 000088. 
19) 제846, 850중가교종대는 세느강으로 이동해 선박을 건조하고 운용했으며 조금 지난 6월 13일에는 제86도하공병대대의 선박 중대가 증원되었다. 7월 23일까지 운항하는 페리는 26척, 수송능력은 603톤으로증가했다. 7월 1일에서 10일 사이에는 하루 평균 433톤이 페리로 보급되었다. 7월 8일에서 14일 사이에 세느강 페리는 노르망디로 보내지는 탄약의 16%, 연료의 19%를 보급하였다. 8월 1일에 연합군은 항공정찰을 통해 세느강 하구에서 운항중인 선박 104척을 발견했다. ’Fähren übersetzmittel Lagekarte’, A.Pi.Füh. 15 Br.B.Nr. 16/44 geh., v. 28/2/44, NARA T-312, 519, 8118913; Ktb. des Ia/Stopi, Ob. West, Mai-Juni 1944, NARA T-311, 28, 7033993 ff.; ’Flüßübergänge u. d. Seine: Stand 23/7/1944’, Anl. zu A.Pi.Füh. 15 Br.B.Nr. 2950/44 g. vom 24/7/1944, NARA T-313, 421, 8714680; ’Seineschifffahrt Stand: 10/7/44’, Tkb. d. Ktb. Qu. Abt. Ib, Anl. zu KTB O.Qu.West, Juli 44, NARA T-311, 15. 
20) 6월에는 운하를 통해 1,445,900갤런의 연로가 서부전선에 보급되었다. ’Wehrmachttransporte auf Binnenwasserstrassen’, Tätigkeitsbericht des General des Transportwesens West, T-78, 611, 000092를 참고하라. 
21) 7월 8일 부터 14일 까지의 한주동안 총 26%의 연료와 탄약이 기차로 보급되었고 28%는 수운으로, 그리고 46%가 차량으로 보급되었다. Ob. West, ’Versorgungsberichten Stand: 10/6-27/7/1944’, AOK 7 O. Qu., NARA T-311, 15, 7015166-472. 거의 완전하게 보존되어 있는 서부전구사령부 군수참모처의 일일보급보고서는 노르망디로 보내진 모든 차량수송대와 거의 대부분의 보급열차편의 출발지, 도착지, 그리고 도착 예정 일자를 기록하고 있다. 이 자료는 독일군의 재보급 시도에 대해 정확한 모습을 보여준다. 
22) 소뮈르와 투르 생 마스의 철교는 7월 초에 또다시 파괴되었으며 7월 20일에는 낭트의 철교도 파괴되었다. 그리고 같은 날 샬롱느의 철교도 또다시 파괴되었다. 이렇게 해서 코브라 작전이 실행되기 전날에는 루아르강 전체를 통틀어 포르 불레Port Boulet의 철교 만이 남아있었다.연합군은 이 철교가 별로 중요하지 않으며 통과 하중도 낮은 곳이어서 공습하지 않았다. PRO, Kew, DEFE 3/62, Ultra Intercept XL 3649, 27/7/1944. 투르의 파괴와 이곳이 군수 보급에 있어 얼마나 중요한 곳이었는지는 Hg. B Ib Br.B.Nr. 0908/44 geh., d. 15/7/1944, NARA T-311, 1,0000804를 참고하라. 루아르강의 철교들, 특히 투르 생 시르 다리가 또다시 파괴된 것은 이 공습이 후방차단 작전의 일환으로 당시 준비 단계였던 코브라 작전 계획과는 무관했다는 점에서 행운이었다. 
23) 7월 8일에서 14일 사이에 제7군에 보급된 탄약의 48와 연료의 43%가 철도와 바지선을 통해 도착했다. 투르가 파괴된 뒤에는 모든 보급품이 차량으로 운반되었다. 제7군이 보유한 차량을 가지고 자체적으로 연료를 보급한 비율은 7월 17일에서 21일 사이에는 51%에서 22일에서 26일 사이에는 86%로 늘어났다.Ob. West, ‘’Versorgungsberichten Stand: 10/6-27/7/1944’, AOK 7 O. Qu., NARA T-311, 15, 7015166-472. 24) Ob. West, ’Versorgungsberichten Stand: 10/6-27/7/1944’, AOK 7 O. Qu., NARA T-311, 15, 7015166-472. 
25) 7월 17일에서 21일 사이에는 하루 평균 85,260갤런의 연료가 제7군에 보내졌다. 7월 22일에서 26일 사이에는 62,500갤런으로 줄어들었다. Ob. West, ’Versorgungsberichten Stand: 10/6-27/7/1944’, AOK 7 O. Qu., NARA T-311, 15, 7015166-472. 
26) 미나와 브렘제의 폐쇄에 관해서는 PRO, Kew, DEFE 3/62, Ultra Intercept XL 3573, 26/7/1944. Kampfgruppe Kentner, munitions return, G2 Periodic Reports, First U.S. Army, No. 51, 31/7/1944, Annex 1, Washington National Record Center, Suitland, MD, (hereafter WRNC), Record Group 401, 101-20를 참고하라. 88mm 대전차포탄 보유량은 7월 10일에 포1문당 146발에서 7월 25일에는 1문당 54발로 줄어들었다. LXXXIV Army Corps Weapons Returns, 10/7, 25/7/1944, PRO, Kew, DEFE 3/55, Ultra Intercept XL 1897, 13.7.1944,; DEFE 3/62, Ultra Intercept XL 3709, 27/7/1944. Kampfgruppe Kuske, ’Tagesmeldung’, 23/3/1944, NARA T-354, 156, 3800792. 쿠스케 전투단이 보유한 탄약의 양은 독일군의 일반적인 탄약 지급량의 30%에 불과한 것이었다. 독일군의 평균 탄약 보급량은 노르망디 전선에서 보통 5~6일 정도면 소모되었다. Grosse Munitions Ausstatung (Heer)’, Anl. 2 zu Ob. West/O.Qu. West/Qu.1 Nr. 0700/44 G.Kdos., v. 12/2/1944, NARA T-311, 14, 70104599. 
27) 코브라 작전에서 미군은 독일군에 대해 2대1의 수적 우세를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영국-캐나다군은 7월 30일의 블루코트 작전, 8월 8일의 토탈라이즈 작전, 8월 14일의 트랙터블 작전에서 3대 1의 수적 우세를 가졌다. 
28) 독일군의 88mm 대공포탄 고갈은 PRO, Kew, DEFE 3/62, Ultra Intercept, XL 3568, 26/7/1944에 나타나 있다. 독일군의 탄약 상황은 USAHD FMS A-968, Genltnt. Otto Elfeldt, ’LXXXIV Corps, 28 July-20 August, 1944’ (Germany, 1946), p. 11에서 다루고 있다.29) 영국 제30군단은 7월 29일 독일군이 주간 수송작전을 재개한 것을 확인했다. PRO WO 171/310, XII Corps, G. Branch (Ops.), ’Intel. Notes, 29/7/1944’, War Diary, July 1944, Appendix H를 참고하라. 독일 제5기갑군이 노르망디에 배치된 전 독일군의 보급 임무를 인수한 것에 대해서는 Tätigkeitsbericht, Qu. LVIII Pz. Korps, 13/8/44, NARA T-311, 497, 000271. 8월 15일 이후 많은 독일군 부대가 연료 부족으로 기동력을 상실했다.. ’Abend-meldung’, Abt. IIa Ob. West, v. 15/8/1944, NARA T-311, 29, 70355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