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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0월 3일 일요일

Thomas E. Hanson저, Combat Ready? : The Eighth U.S. Army on the Eve of the Korean War

몇달 전에 네비아찌님과 트위터로 한국전쟁에 대한 책 이야기를 하다가 올해에 출간된 토마스 핸슨(Thomas E. Hanson)의 Combat Ready? : The Eighth U.S. Army on the Eve of the Korean War에 대한 소감문을 하나 써 보겠다는 이야기를 했었습니다. 제가 늘 그래왔듯 공수표를 발행한 뒤 깜빡 잊고 있었는데 갑자기 생각이 나더군요. 서평이라고 할 정도는 아닌 간단한 감상문입니다.

이 책의 저자인 핸슨은 현역 미육군 장교입니다. 저자의 신분이 육군장교라는 점은 이 책의 문제의식에 꽤 중요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데 이 점은 뒷 부분에서 이야기 하도록 하겠습니다. 저자는 한국전쟁 초기 미육군이 연전연패를 거듭한 책임이 어디에 있느냐는 해묵은 문제를 끄집어내고 있습니다. 사실 이 문제는 한국전쟁 직후부터 제기되었고 오늘날 우리는 그 책임이 바로 “2차대전 직후 평화분위기에서 무리하게 육군을 감축한 트루먼 행정부와 5년간의 일본 점령기간 동안 전투준비를 소홀히 한 극동군사령부 및 8군 사령부”에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저자는 이 답안이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근본적인 책임은 육군을 감축하고 준비태세를 위험할 정도로 떨어트린 트루먼 행정부와 군수뇌부에 있으며 일본 현지의 8군 사령부는 이런 열악한 상황속에서 전투준비태세를 유지하기 위해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였다는 것 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책의 상당부분을 미8군 예하부대들의 훈련 및 전투준비태세 확립을 분석하는데 할애하고 있습니다.

핸슨이 가장 신랄하게 비판하는 것은 바로 오늘날과 같은 인식을 확립한 페렌바흐(T. R. Fehrenbach)의 저서 This Kind of War와 애플만(Roy E. Appleman)이 저술한 미육군의 공간사 South to the Naktong, North to the Yalu입 니다. 저자는 페렌바흐가 한국전쟁 초기 연전연패의 책임은 미군 수뇌부와 일선의 부대 모두에 있다는 입장을 정립했으며 이것이 이후 수십년간 한국전쟁 초기 미육군에 대한 일반적인 서술이 되었다고 지적합니다.(약간 재미있는 점은 페렌바흐가 미해병대를 높이 평가하고 미육군을 평가절하했다고 지적하는 것 입니다. 저자가 현역 미육군 장교라 그런가?) 또한 이런 논리를 비판해야 할 미육군도 공간사를 통해 이런 시각을 확산시키는데 기여했다고 비판합니다.

책의 내용은 어찌보면 꽤 단순합니다. 먼저 2차대전 이후 트루먼 행정부와 군 최고 수뇌부의 안이한 안보정책이 육군을 약화시키는 과정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사실 잘 알려진 것 입니다. 미국은 전통적으로 해외에 대규모 육군을 주둔시킨 경험이 적었으며 트루먼 행정부는 2차대전으로 변화한 국제정세에 적응하는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미육군이 방대한 점령지 유지를 위해 대규모 지상군을 유지해야 한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지만 전후 국방예산의 감축과 대규모 육군의 필요성에 대한 회의적인 여론 때문에 미육군은 급속히 감소했습니다. 근본적으로 초대 국방부장관 포레스탈과 2대 국방부장관 존슨 모두 미국의 안보를 해군이나 공군에 의존하는 정책을 취했기 때문에 육군은 가장 큰 피해를 입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때문에 육군에 대한 예산도 크게 삭감되어 일본에 주둔한 미8군의 예하 사단들은 1950년이 되면 인력과 장비면에서 심각한 상태에 도달하게 됩니다. 여기에 육군 감축으로 인한 장교단의 감축 또한 경험많은 장교와 부사관의 부족을 불러왔습니다.

이 책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부분은 주일미군의 훈련 및 전투준비태세를 분석한 4~7장 입니다. 분석의 대상은 25보병사단의 27보병연대, 7보병사단의 31보병연대, 24보병사단의 19보병연대, 1기병사단의 8기병연대입니다. 저자는 이 4개연대에 대한 분석을 통해 미8군이 점령기간 중 부대의 전투력 유지를 위해 어떠한 노력을 기울였는지 상세히 서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경험많은 장교와 부사관의 부족, 예산 삭감으로 인한 장비와 훈련장의 부족에도 불구하고 미8군의 예하부대들은 훈련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음을 보여줍니다. 저자는 이를 통해 한국전쟁 직후 널리 유포된 “게이샤들과 놀아나느라 기강이 해이해진 육군” 이라는 인식을 깨고자 합니다. 비록 미육군이 개전 초기에 연전연패 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일선 부대의 장교나 사병들의 책임이라기 보다는 육군을 약화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한 미국의 거시적인 안보정책에 있다는 것 입니다.

위에서 이야기 했듯 저자인 핸슨은 현역 미육군 장교입니다. 저자는 단순히 한국전쟁 당시 미육군에 대한 인식을 바꾸기 위해 책을 쓴 것이 아닙니다. 저자는 군사사를 연구하는 군인답게 한국전쟁의 교훈을 통해 오늘날 미국 안보정책의 문제점을 이야기 하고자 합니다. 저자는 미국이 여전히 충분한 육군을 유지하는데 적극적이지 않다고 지적하고 특히 부시 행정부 초기를 비판합니다. 저자는 정부의 잘못된 안보정책의 댓가를 전장에 투입된 장병들이 치뤄야 했던 한국전쟁으로 부터 배울 것을 강조합니다. 이라크 전쟁과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드러났듯 미국은 강력한 해군과 공군을 가지고 있었지만 지상군이 충분하지 못했기 때문에 고전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저자가 현역 미육군 장교라는 점 때문에 육군에 대한 변호로 읽힐 소지도 다분하지만 저자가 제기한 문제들은 충분히 경청할 가치가 있습니다.

잡담 하나. 공수표 하나를 처리했으니 공수표 하나를 또 발행해야 겠군요. 그래도 올해가 한국전쟁 60주년이라고 관련저서들이 꽤 나왔는데 그 중에서 브루스 커밍스가 올해에 낸 한국전쟁에 대한 소개글도 써볼까 합니다.

2010년 6월 20일 일요일

대인배들의 사고방식

sonnet님의 오늘의 한마디(Al Capone/Theodore Roosevelt)를 읽고나니 떠오르는 일화가 있습니다.

트루먼은 취임한 직후 스탈린이 루즈벨트 행정부에서 추진하고 있던 정책들을 계속해서 수용할 것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해리 홉킨스(Harry Hopkins)를 특사로 파견하기로 합니다. 트루먼의 회고록에 따르면 트루먼은 홉킨스에게 다음과 같은 주의사항을 주었다고 하는군요.

나는 홉킨스에게 스탈린과 회견할 때 그가 적절한 방식이라는 생각이 들면 외교적 수사나 야구 방망이를 재량껏 사용해도 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I made it plain to Hopkins that in talking to Stalin he was free to use diplomatic language or a baseball bat if he thought that was the proper approach.

Harry S. Truman, Memoirs vol. 1 : Year of Decisions (doubleday, 1955), p.258

대인배라면 언제든지 채찍을 휘두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2010년 5월 19일 수요일

트루먼 - 꽤 재미있는 미국 대통령

요즘 읽는 책 중에는 마이클 펄만(Michael D. Pearlman)의 Truman and MacArhur : Policy, Politics, and the Hunger for Honor and Renown이 꽤 재미있습니다. 작년에 조금 읽다가 책장에 꽂아두고 1년이 지나서 다시 읽기 시작했는데 지금은 맥아더를 해임하는 부분을 읽고 있습니다.

트루먼 재임기는 군사사에 관심을 가진 입장에서 매우 재미있는 시기입니다. 제 개인적으로도 트루먼 행정부 시기는 꽤 매력적입니다. 트루먼은 2차대전이 종결되고 냉전이 시작되는 시점에서 미국 대통령이라는 막중한 지위에 있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잘 아시다 시피 트루먼은 약간 난감한 상황에서 대통령의 직위에 앉았습니다. 루즈벨트가 급사해서 대통령직을 이어받았는데 트루먼에게 남겨진 임무는 전후 세계질서의 재편이라는 엄청난 것 이었지요. 상대해야 할 인간들도 스탈린이나 처칠 같은 희대의 대인배들이었으니 말입니다.

그리고 관점을 군대로 돌려보더라도 트루먼이 처한 상황은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재임하는 기간 동안 미군은 전시동원체제에서 평화시의 급격한 병력 감축을 경험했으며 동시에 냉전의 시작과 함께 소련이라는 새로운 적을 상대하기 위해 체제 개편을 단행합니다. 그리고 트루먼 행정부에서는 각 군을 총괄하는 국방부가 조직되지요. 물론 초기 구상과는 매우 다른 형태의 국방부가 만들어졌습니다만.(자유주의자 놈들의 딴지란!) 그리고 이런 혼란의 와중에 초대 국방부장관인 포레스탈이 자살하고 이른바 제독의 반란이라는 민군관계에 파란을 몰고오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이런 와중에 한국에서는 또 다른 전쟁이 벌어지지요. 어수선한 사건들을 그럭 저럭 잘 수습하면서 대통령직을 수행한 것 만 보더라도 트루먼에게는 개인적으로 후한 평가를 할 수 밖에 없습니다.

특히 민군관계에 있어서 2차대전을 통해 등장한 수많은 전쟁영웅들은 골치 아픈 존재였습니다. 별일이 없었어도 거만했을 맥아더 같은 인물이 전쟁 영웅이라는 간판까지 달게 되었으니 군 통수권자로서 이들을 적절히 제어하는 것은 골치 아팠을 것 입니다. 전쟁영웅이란 민주주의 체제에서 필요로 하는 대중적 인기를 가진 존재들이니 말입니다. 이런 문제는 바로 제독의 반란에서 잘 드러났습니다. 문민통제에 반기를 든 제독들 상당수가 전역과 같은 처분을 받았지만 몇몇 유명한 제독들은 그렇게 되지 않았지요. 아마 맥아더도 중국군의 개입으로 참패를 하지 않았다면 쉽게 축출하기가 어려웠을 것 입니다.(뭐, 마샬과 그 계열의 인물들은 맥아더를 싫어했다고 하니 좀 다른 이야기가 나올 수도 있었겠습니다만) 맥아더는 한국전쟁 기간 중 행정부와 군수뇌부의 아시아 정책을 공공연히 비판했는데 이것은 문민통제의 관점에서 보면 그다지 바람직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문제가 발생할 때 마다 트루먼은 단호한 결단을 내렸습니다. 트루먼은 초대 국방부 장관에 임명한 포레스탈이 자신을 기만했다고 판단하자 가차없이 교체했으며 한국전쟁에 개입하는 과정에서도 단호한 면을 보여주었습니다. 의회에 대해서도 자신의 영역에 쓸데없이 간섭한다고 툴툴댔다죠. 물론 포레스탈의 후임으로 앉힌 존슨은 별로 좋지 않은 평가를 받기도 했습니다만;;;; 대중적으로 인기가 상당했던 맥아더를 교체할 때에도 맥아더가 일정한 선을 넘었다고 판단하자 해임시키지요. 문제가 아예 없다고는 못하겠습니다만 그래도 민군관계의 측면에서 꽤 모범적인 군통수권자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2010년 5월 5일 수요일

대답없는 메아리

다들 잘 아시겠지만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 방송은 2차대전 당시 선전방송으로 출발한 이후 냉전을 맞으면서 서방측 선전공세의 선봉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미국의 소리는 냉전 초기 부터 급진적 민족주의가 확산되고 있던 아시아를 향한 방송을 시작합니다. 특히 호치민이 이끄는 베트남 민족주의 집단이 프랑스를 엿먹이고 있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는 골치 아픈 화약고 였습니다. 이때문에 베트남어 방송은 1940년대 후반에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한가지 있었습니다.

1949년에 아시아지역을 순방한 미국 하원의원단은 트루먼 대통령에게 순방 보고서를 보냅니다. 이 보고서에서는 미국의 소리 베트남어 방송에 대해 이렇게 평가하고 있었습니다.

인도차이나에서는 미국의 소리 방송이 무용지물입니다. 인도차이나 전역에 걸쳐 라디오가 겨우 1만대 정도에 불과한데다 이중 대부분은 프랑스인들이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The Voice of America program in Indo-China are ineffective. There are only some 10,000 radios in the entire conuntry and large percentage of these are French owned.)

"Notes on Recent Observations of Conditions in the Far East"(1949. 11. 19), p.20, RG330 Secretary of Defense, Office, Administrative Secretary Correspondence Control Section Decimal File 1951, CD092 Far East to Greece Box. 229

아아. 대답없는 메아리여~

2009년 5월 10일 일요일

Mission Accomplished???

남한 단독정부가 수립되자 트루먼 대통령은 주한미군 사령관 하지 중장에게 다음과 같은 축하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백악관, 워싱턴
1948년 8월 15일.

친애하는 하지 장군.

남한에 합법적 정부를 건설함으로서 장군에게 부여된 어려운 임무가 완결되었습니다. 귀관의 임무는 크나큰 성공으로서 완료되었습니다.

이 지역의 정권이 한국인들에게 이양된 것은 우리 정부가 그렇듯 귀관도 매우 만족스럽게 생각할 것이며 귀관은 박해 받는 민족이 자유를 되찾는데 크나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귀관은 미합중국 군대를 지휘해 한국을 잔인무도한 지배자들의 폭정으로부터 해방시켰습니다. 장군이 담당한 이 불행한 나라의 국민들은 투표권을 가진 유권자들이 대규모로 참여한 자유 선거를 치렀습니다. 해방된 국민들이 선출한 대표에게 부여한 그들 자신의 운명에 대한 책임은 매우 막중합니다.

장군은 자신의 수완, 솔선, 외교적 재능으로 해결할 수 없을 것 같았던 문제들을 극복했으며 미국과 한국 국민은 장군에게 고마움을 느낄 것 입니다.

해리 트루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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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hite House, Washington,
August 15, 1948

My dear General Hodge

The Achivement of constitutional government in southern Korea completes the difficult task that was assigned to you. Your mission has been accomplished with outstanding success.

As the government of this area is turned over to the Korean people, it must be very satisfying to you, as it is to our Government, to know that you have been largely instrumental in restoring freedom to a persecuted nation.

You led United Stataes troops to liberate Korea form the tyranny of a ruthless conqueror. The people of your area of this troubled country have held a free election in which a remarkably high percentage of the qualified voters participated. How the responsibility for their own destiny rests with the elected representatives of a free people.

By your skill, initiative and diplomacy you have overcome seemingly insurmountable obstacles and you have earned the gratitude of the people, both of the United States and of Korea.

Very sincerely yours.

Harry Truman

August 17, 1948, Press Release on Replacement of Commanding General, US Armed Forces in Korea, RG 319 Army Staff Plans & Operations Division Decimal File 1946-48 091.Korea TS Sec. IV & V Box 22 (Folder #2)

그러나 본 게임은 이제부터 시작이었으니...

2008년 12월 13일 토요일

마누라의 실수랍니다.

미국의 1948년 대선은 여론조사의 대표적인 실패 사례로 꼽힙니다. 대부분 트루먼 대통령이 재선에 실패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민주당 내부에서도 상황을 낙관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하지요. 그래서 트루먼 대통령은 선거자금을 모금할 때 애를 먹었다고 합니다.

민주당은 대선을 불과 두 달 앞둔 9월 1일에도 재정위원장이 공석인 상태였다. 트루먼은 9월 첫 째 주에 선거 자금 문제를 의논하기 위해서 루이스 존슨(Louis Johnson)을 포함한 80여명의 부유층 당원들을 백악관으로 초청했다. 초대 받은 당원 중 50명만이 참석한 이 모임에서 트루먼은 필요한 자금이 조달된다면 자신이 재선에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낙관적인 전망을 했다. 그리고 트루먼은 당 재정위원회의 위원장에 지원할 사람은 없는지 물었다. 당연하게도 어느 한 사람 앞으로 나서지 않았다. 한 민주당 당원은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선거에 질 것이 거의 확실한 사람을 위해 앞장서서 사람들에게 후원금을 받아내는 어려운 일을 누가 하려고 했겠는가?”

Keith D. McFarland and David L. Roll, Louis Johnson and the Arming of America : The Roosevelt and Truman Years, Indiana University Press, 2005, p.137

결국 트루먼의 절친한 친구인 루이스 존슨이 이 어려운 일을 맡게 됩니다.

그런데…

다들 아시다 시피 트루먼이 이겨 버렸습니다.

내가 이겼지롱!

그러자…

대선이 끝난 다음날부터 루이스 존슨에게 자신의 비서나 부인이 자신의 선거후원금을 ‘깜박하고’ 보내지 않은 것을 ‘이제 막’ 알았다고 하는 개인 기부자들이 대선 이전 날자로 서명한 수표가 쇄도하기 시작했다. ‘해리’에게 자신들이 ‘언제나’ 그를 후원하겠다는 성의를 보이려는 사람들이 뒷북으로 보낸 기부금은 수십만 달러에 달했다. 마가렛 트루먼(Margaret Truman)이 뒤에 회고했듯 트루먼이 선거가 끝난 뒤 워싱턴으로 돌아왔을 때 트루먼 선거캠프의 재정 담당자인 루이스 존슨은 승자의 편에 붙으려는 사람들이 보낸 ‘날자를 앞당겨 쓴’ 엄청난 양의 수표를 받았고 그 액수는 75만 달러에 달했다.

Ibid, p.144

네.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똑같지요;;;;

그리고 문제가 생기면 마누라 탓을 하는 찌질한 남편들은 언제 어느 곳에나 있군요;;;;

2008년 6월 17일 화요일

天朝의 兵部尙書 두 양반에 대한 책

세상이 우울하게 돌아가는 와중에도 이 어린양 같은 소시민에게는 소소한 즐거움이 계속되고 있으니 그나마 다행입니다. 오늘은 아마존에 주문 넣은 책이 몇 권 도착했습니다.


발송한 날자는 다른데 도착은 같은 날 했습니다. 그야말로 Time on Target이로군요!

경제사정도 갈수록 악화되어 지르는 책의 양이 줄어들다 보니 그에 맞춰 책을 고를때도 좀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신간을 바로 지르는 경우는 거의 없어졌고 나온지 최소한 두어달 이상은 된 책들을 서평을 살펴가며 사 보게 되었지요.

이번에 도착한 책 중에는 미국의 국방부 장관 두 명에 대한 책이 있습니다.

첫번째 양반을 다룬 책은 바로 이 책 입니다.


루즈벨트 행정부에서 전쟁부 차관을 지내고 트루먼 행정부에서 국방부 장관을 역임했으며 냉전 초기 미국의 국방정책 형성에 큰 역할을 한 루이스 존슨(Louis Arthur Johnson)을 다룬 책 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양반을 다룬 책은...

표지에 낚였습니다?

민군관계의 권위자인 허스프링(Dale R. Herspring)이 작심하고 럼즈펠드를 까기위해 쓴 책 입니다.

예전에 허스프링이 루즈벨트 이래의 미국 민군관계에 대해 쓴 책을 한 번 소개한 적이 있었지요. 그때도 허스프링은 럼즈펠드를 열심히 까고 있었는데 그때 까지도 럼즈펠드 국방장관은 현재 진행형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전직' 국방부 장관이 되었지요. 까기에 아주 이상적인 환경이 조성된 것이죠. 그래서 허스프링은 단행본 한 권을 할애해서 럼즈펠드를 까고 있습니다. 결론 부분을 먼저 읽어 보니 허스프링은 민군관계에 있어 갈등은 당연히 존재하는 것이고 국방부장관의 임무는 이 갈등을 조정하고 체계적으로 관리해서 협력적으로 끌고 가야하는데 럼즈펠드는 이 점에서 실패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장마철의 무료함을 덜어줄 물건들이 생기니 아주 즐겁습니다.

2007년 12월 5일 수요일

트루먼도 인정한 일본인의 근성

매우 유명한 이야기이긴 합니다만 배군님의 글을 읽고 나니 이 부분이 떠올라서 올려 봅니다. 트루먼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태평양 전쟁 말기 미군이 겪었던 끔찍한 인명손실과 일본군들의 결사적인 항전에 대해서 언급하고 이 때문에 소련의 참전을 필요로 했다고 언급했습니다. 특히 오키나와와 이오지마의 경험은 일선 부대 뿐 아니라 대통령인 트루먼 조차도 경악하게 할 정도였던 것 같습니다.

트루먼 회고록의 해당 부분은 다음과 같습니다.

1941년 12월 7일에 시작된 태평양에서의 전쟁은 매우 고되고 희생이 컸다. 우리는 진주만과 바탄반도의 패전 이후 긴 여정을 거쳤다. 우리의 군대는 남쪽으로는 오스트레일리아와 뉴 칼레도니아와 동부 태평양으로는 하와이 제도로부터 필리핀과 일본 본토를 방어하는 마지막 도서 방어선들을 향해 싸워나갔다. 오키나와와 이오지마의 적은 결사적으로 항전했으며 아군의 인명손실은 극도로 높았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해서 일본 본토를 직접 공격할 수 있는 기지를 얻게 되었다. 우리는 일본 본토에 가까워 질수록 적의 저항은 더욱 단호하고 필사적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일본 본토와 조선, 만주, 그리고 중국의 화북지방에는 아직도 4백만에 달하는 일본군이 남아 있었다. 또한 일본은 본토의 최종방어를 위해 향토방위대를 편성하고 있었다.
합동참모본부는 일본 본토를 침공할 경우 발생할 손실에 대해서 매우 비관적인 전망을 내놓고 있었다.
태평양의 아군은 일본 본토에 다가갈수록 더 많은 손실을 치르고 있었기 때문에 러시아를 전쟁에 끌어들이는 것이 시급해졌다. 러시아가 전쟁에 개입한다면 미국인 수십만명의 생명을 구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Harry Truman, Memoirs - Year of Decisions(Doubleday&Company 1955), p.414

2006년 4월 29일 토요일

[美理堅史] - 平和王 문선명 世家

문선명은 본시 한국 사람으로 우드로 윌슨 8년 태어났다.

문선명은 어려서부터 천주를 섬겨 그 믿음이 남달랐다고 전해진다.

트루먼 원년 8월, 노서아(露西亞)왕 스탈린이 천자의 명을 받들어 왜국을 토벌했다. 이에 천자가 스탈린의 노고를 위로하며 한국의 절반을 봉읍으로 하사했다.

노서아는 사교가 성행한 나라로 그 왕 스탈린도 본시 홍건적의 무리에 속해있었다. 노서아 군사와 함께 홍건적이 들어왔는데 홍건적의 수령 김일성은 노서아 왕의 위세를 빌어 천주를 섬기는 백성들을 핍박했다.

이때 문선명도 도적들에 잡혀 노역을 하게 됐는데 도적들이 핍박할 때 마다 천주의 은혜를 입어 터럭하나 다치지 아니하였다고 전한다.
도적들이 문선명을 핍박하기를 그치지 않았으나 해를 입히지 못하니 크게 두려워 하며 말하였다.

"이자는 범상한 인물이 아니로다!"

트루먼 6년, 한국의 홍건적이 난을 일으켰다. 이때 문선명은 천병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왔다.

트루먼 7년, 문선명이 천주를 영접하여 큰 깨달음을 얻었다. 문선명은 반공(反共)의 큰이치를 깨달아 도를 닦는 근본으로 삼았다.

아이젠하워 2년, 문선명이 서울에서 통일교회를 만들고 전도하매 소인배들의 핍박을 받았다. 한국에서 천주를 섬긴다 자처하는 자들은 많았으나 하나같이 어리석어 그 도의 심오함을 열에 하나도 깨치지 못하였다.

문선명은 어리석은 자들을 깨쳐 반공의 이치를 깨닫게 하려 힘썼으나 마침내 그 뜻을 이루지 못하여 크게 한탄하였다.

"하늘아래 내 뜻이 받아질 곳이 어디인가!"

마침내 한국같은 번방에서는 뜻을 이룰 수 없음을 알고 천자국에 나아가기를 소망하였다.

존슨 3년, 문선명이 식솔을 이끌고 미리견에 도착했다.

이때 미리견은 백성들의 믿음이 박하여 천주를 섬기는 아름다운 기풍이 사라져가고 음란한 풍속이 성행하고 있었다. 마침내 어리석은 백성가운데 사교에 빠져 마르크스, 레닌 등 잡스런 귀신을 섬기는 자도 나타났다.

문선명이 이를 보고 크게 한탄하며 땅에 떨어진 믿음을 일으켜 세우기로 결심했다.

문선명이 힘을 다하여 반공의 이치를 강론하고 미풍양속을 일으킬 것을 권하니 갈수록 그를 따르는 무리가 늘어났다.

닉슨 황제가 문선명의 선행을 듣고 백악궁으로 불러 반공의 이치와 인의예지에 대해 물었는데 선명이 대답함에 막히는 것이 없었다. 황제가 문선명의 고상함에 탄복하였다.

"아. 짐이 어리석어 세상을 보는 안목이 없었는데 이제 선생을 만나 반공의 이치를 깨치니 답답한 가슴이 후련하오!"

이에 문선명이 여러 제후와 대소신료들에게 도를 강론하게 되었다. 많은 제후들이 문선명에게 감복하여 마음으로 우러르게 되었다. 천자가 문선명을 "평화왕(King of the Peace)"에 봉하니 마침내 문선명이 제후의 반열에 올랐다.

닉슨 이후 여러 천자들이 문선명의 지혜를 마음속으로 흠모하니 레이건, 상황(上皇) 부시 시니어 등이 그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