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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8월 9일 목요일

외계문명(?????)의 지혜

꽤 즐겁게 읽었던 소설의 한 토막.

빌리는 지구인들이 벌이는 그 전쟁과 같은 살인 행위에 트랄파마도어인들이 곤혹스러워하거나 경악을 금치 못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들이 지구인들의 잔학성과 굉장한 무기들이 결합되면 결국에는 순결한 우주의 한 부분이, 나아가 전체가 파괴될 수도 있다고 염려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전쟁에 관한 질문은 한번도 나오지 않았고, 빌리 자신이 말을 꺼낸 뒤에야 비로소 나왔다. 동물원 관객 중에 누군가가 해설자를 통해 지금까지 트랄파마도어에서 배운 것 중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빌리의 대답은 이랬다.

“한 행성의 모든 주민이 어떻게 이렇게 평화롭게 살 수 있는지요! 아시다시피, 나는 태초 이래 무의미한 살육에 열중해 온 행성에서 왔습니다. 내 나라 사람들이 급수탑에 넣고 산 채로 삶아 죽인 여학생들의 시체를 내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그 사람들은 당시 자기들이 절대 악과 싸우고 있다는 긍지에 차 있었습니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빌리는 드레스덴에서 삶아져 죽은 시체들을 보았다.

“그 뿐입니까? 나는 포로수용소에 있을 때에는 삶아져 죽은 여학생들의 오빠와 아버지들이 살육한 인간들의 지방으로 만든 촛불로 밤을 밝혔습니다. 지구인들은 우주의 골칫거리임이 분명합니다! 다른 행성들이 지금은 무사하더라도 곧 지구 때문에 위험에 빠지게 될 겁니다. 그러니 내게 비결을 좀 가르쳐 주세요. 내가 지구로 가져가서 우리 모두를 구원할 수 있게요. 어떻게 한 행성이 평화롭게 살 수 있습니까?

빌리는 자기가 감동적인 연설을 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트랄파마도어인들이 작은 손을 쥐어 눈을 가리는 것을 보고는 당혹했다. 이제까지의 경험에 비추어 그 몸짓이 무슨 뜻인지는 분명했다. 그가 바보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는 것 이었다.

“제발- 말씀 좀 해 주세요?”

그는 몹시 풀이 죽어 안내원에게 말했다.

“내 말이 뭐가 그리 바보 같다는 거지요?”

“우린 우주가 어떻게 멸망할지 아는데-” 하고 안내원이 말했다. “지구는 그 일과 아무 관계가 없소. 지구도 함께 사라진다는 것만 빼면.”

“어떻게- 우주가 멸망합니까?” 빌리가 말했다.

“우리가 날려 버리지. 비행접시에 쓸 새 연료를 실험하다가 말이오. 트랄파마도어의 시험 조종사 하나가 시동 버튼을 누르면 온 우주가 사라져 버리는 거요.”

그렇게 가는 거지.

“당신들은 그것을 알고 있으니까 예방할 방법도 있을 것 아니에요?” 빌리가 말했다. “그 조종사가 버튼을 누르지 못하게 할 수 없습니까?”

“그는 이제까지 늘 버튼을 눌렀고 앞으로도 늘 그럴 거요. 우리는 늘 그에게 그렇게 하게 했고, 앞으로도 늘 그럴 거요. 그 순간은 그런 식으로 되도록 만들어져 있으니까.”

“그렇다면-” 하고 빌리가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지구에서 전쟁을 예방한다는 생각도 어리석은 거군요.”

“물론이오.”

“하지만 이 행성은 평화롭잖아요?”

“오늘은 그렇소. 다른 날들은 당신이 보았거나 읽은 어떤 전쟁보다 잔혹한 전쟁을 벌이지. 우리가 전쟁에 대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고, 그래서 우리는 그냥 전쟁을 보지 않을 뿐이오. 무시해 버리는 거지. 우리는 영원토록 즐거운 순간들만 보며 지내요. 오늘 동물원에서 처럼. 이 순간은 정말 멋지지 않소?”

“멋집니다.”

“열심히 노력만 한다면 지구인들도 그 방법을 배울 수 있을 거요. 끔찍한 시간은 외면해 버리고 좋은 시간에 관심을 집중하는 것이오.”


커트 보네거트 지음/박웅희 옮김, 『제5도살장, 혹은 아이들의 십자군 전쟁, 죽음과 추는 의무적인 춤』, (아이필드, 2005), 138~141쪽

2011년 8월 7일 일요일

조선족들의 한국전쟁 회고담

한국전쟁에 참전한 조선족들의 회고담 모음집을 읽는 중인데 꽤 재미있습니다. 한국전쟁시기 중국군 수뇌부가 미군의 제공권 장악과 높은 기계화를 두려워 했다는 점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일선 병사들의 기억 속에는 그런 공포가 한층 더 강하게 자리잡았던 것 같습니다. 이 책에서 흥미롭게 읽은 대목을 조금 인용해 보지요.

적기의 폭격은 영화에서 보는 것 보다 훨씬 더 가렬하였다. 하늘은 타래치는 검은 연기와 뽀얀 먼지로 뒤덮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고막이 터질듯한 련속적인 폭발소리에 땅이 뒤집어지는 것 같았고 생사를 가늠할 수 없었다. 아군부대가 마을에 들었다는 소문이 나면 폭격이 사정없이 들이닥쳤다. 폭격이 즘즉해지면 서로 부르는 소리, 우는 소리…… 동네는 처참한 정경으로 수라장을 이루었다. 폭격당할 때에는 살아남을 사람이 있을 것 같지 않았으나 폭격이 끝나고 보면 그래도 살아남은 사람이 많았다.

(중략)

적기의 공습은 수시로 되였다. 우리는 보총, 기관총으로 낮게 뜨는 적기를 쏘아 떨구겠다고 무등 애를 써보았으나 맞을리가 없었고 정작 공습이 시작되면 폭탄을 피하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적들의 공중우세로 하여 우리는 얼마나 많은 희생을 냈는지 몰랐다.

한번은 아군의 야전병원에 적의 전투기 네대가 날아와 기관포사격을 하고 뒤이어 폭격기가 날아와서 폭격하여 우리는 희생자 5명을 내였다. 1차 전역때 남조선에서 참군한 한 전사는 폭격에 목이 거의다 떨어졌다. 그리고 조선 평안남도에서 참군한 리무석이라는 전사는 두 다리에 관통상을 입었는데 처음에는 정신이 말똥말똥하였다. 담가에 눕혀가지고 얼마 안가니 두 다리가 고무풍선처럼 부어나더니 조금 지나더니 눈을 감고 말았다. 조선전쟁은 전후방이 없었고 죽는데에도 군대와 백성의 구별이 없었다.

적기의 폭격은 전방과 후방을 가리지 않았고 후방에 있는 백성들도 많이 죽었다. 그때 한 전사는 된감기에 걸려 양지쪽 산비탈에 누워서 햇뱇쪼임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200메터밖에서 터진 포탄파편이 그 전사의 머리를 명중하여 당장에서 즉사하였다. 한 녀성은 아이를 업고 있다가 적기의 공습을 받았는데 적기의 기관포탄알이 그녀의 뒤흉추상부로부터 복부로 관통하여 그 자리에서 죽었으나 업혀있던 아이는 아무 일도 없었다.

적의 폭격기편대가 앞에 한대, 뒤에 두대 이렇게 사람인자를 이룬 편대로 되여 날아가면 온 하늘이 떨리였다.

배태환 구술, 「정전전후」,  정협 연변조선족자치주 문사자료위원회 편, 『돌아보는 력사』(료녕민족출판사, 2002), 262~265쪽
‘비행기 사냥군조’가 미제의 공중비적을 파리 잡듯 때려잡는 북한 쪽 선전보다는 훨씬 솔직한 이야기 같습니다. 물론 조선족들의 회고담도 선전목적이 있기 때문에 무용담이 차지하는 비중이 많지만 북한쪽의 기록에 비하면 훨씬 솔직하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인민군 5사단 소속으로 참전한 다른 조선족의 증언도 비슷합니다.

며칠후 상급에서는 우리 부대에 남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우리는 밤낮 걸어서 락동강반에 이르렀다. 락동강반에 이르니 우리더러 나가보라는 것 이였다. 우리 진지의 포 42문이 한방도 쏘아보지 못하고 적기의 공습에 몽땅 녹아났다. 망원경으로 내려다보니 강변에 시체가 한벌 깔려있었고 땅우에는 피가 질벅하였다. 도하하던 사람들이 실패한 것이였다. 그때에야 우리는 무엇이 전쟁이란 것을 알게 되였다. 우리는 누구나 말 없이 머리를 떨구고 돌아왔다.

김리정 구술, 「청춘도 사랑도 다 바쳐」, 위의 책 184쪽
몇몇 구술은 미군의 현대화된 무기에 대한 공포가 잘못된 지식과 결합해서 군대괴담 수준이긴 한데 그것도 나름대로 재미있습니다. 인민군 4사단 소속으로 참전한 다른 조선족은 미군의 화력과 장비에 대해 이렇게 회고하고 있습니다.

남북전쟁이 일어나 수원전투까지는 인민군과 국방군과의 싸움이였다. 그러나 평택전투부터는 전쟁의 성격이 변하였다. 유엔군이 참전하여 전쟁은 국제전쟁으로 승격하였다. 미국 태평양전선사령부는 팬프리트의 륙전대를 부산에 등륙시켰다. 평택까지 다가든 적들은 땅크와 122미리 대포로 우리와 맞섰다. 그들은 매 한메터에 포탄 하나씩 떨구었다. 미 공군도 B-29폭격기로 무차별 폭격을 가하였고 F-48(F-84의 오기인 듯) 전투기는 지면을 누비면서 소사하였다. F-48전투기가 지면을 소사할 때면 매 한메터 사이에 기관포알 하나씩 떨구었다. 적들의 화력 앞에서 우리는 머리를 쳐들 수 없었다.

(중략)

1950년 8월, 우리는 락동강반의 신반리(경상남도 의령군)까지 쳐들어갔다. 락동강전투는 가렬처절하였다. 적들은 원자무기를 제외한 모든 현대화무기를 썼다. 그들은 비행기 폭격을 한 다음 뒤이어 연막탄을 쉬임없이 던졌다. 그러면 옆의 사람마저 보이지 않아 전투를 할 수 없었다. 그들은 또 세균무기를 썼다. 그러면 전사들은 세균에 감염되어 설사를 하고 토하면서 전투력을 상실하였다. 또 독가스탄을 썼는데 가스탄이 터진후 반시간 동안은 호흡을 할 수 없었다. 병력이 집중되여 있을만한 곳에는 비행기로 류산탄을 투하했다. 류산탄은 공중에서 폭발했기에 파편 쪼각들이 비오듯 쏟아졌고 그 살상력은 다단하였다. 지금도 나의 머리엔 류산탄 파편 두개가 박혀있다.

(중략)

1951년 3, 4월에 서울을 해방하고 부산까지 쳐들어갈 계획이였으나 적군의 강력한 저항을 받았다. 특히는 적들의 공중우세로 하여 아군은 어쩔수 없었다. 우리 부대가 순천에 있을 때 적들은 운수기로 땅크를 투하하였다. 땅크는 공중에서 발동을 걸고 있었는데 땅에 떨어지자마자 앞으로 달리면서 싸울 수 있었다.

류호정 구술, 「피로 바꾸어온 평화」, 앞의 책 232~236쪽

류호정의 구술은 군사문제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이라면 잘못된 점을 쉽게 찾아낼 수 있을 정도로 세부적인 사실에서는 틀린 것이 많지만 나름대로 재미있는 부분이 많습니다. 일단 낙동강 전투에 대한 회고 담에서 세균무기와 독가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 재미있습니다. 이 부분은 중국이나 북한측 참전자들이 미국의 세균무기 사용을 어떻게 사실로 받아들이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갑작스러운 질병의 창궐은 전쟁터에서 쉽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지만 주입된 여러가지 지식이 결합되면 훗날의 기억에서는 다른 방식으로 나타나기도 하는 것 입니다.

“낙동강 전투 때 설사병이 돌았었지” → “미군이 항미원조전쟁에서 세균전을 했다는군” → “아하. 미군이 낙동강 전투에서 세균무기를 썼구나”

실제로 구술을 받다 보면 당시의 소문에 불과했던 것들이 개인적인 경험과 결합되어 사실로 받아들여지는 경우를 볼 수 있는데 이점을 고려하면 류호정의 이상한 회고담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공중에서 투하되는 전차와 같은 미국의 첨단기술에 대한 이야기는 1990년대에 운동권에서 많이 읽힌 김진계의 회고록인 『조국』에도 비슷한 내용이 있을 정도로 당시 공산군이 미국의 군사기술을 어떻게 보았는지 잘 보여주는 내용입니다.(김진계의 회고록에서는 헬리콥터가 고지 정상으로 탱크를 실어 나르죠;;;;;)

체르카시 전투에 대한 걸출한 저작을 낸 군사사가 내쉬(Douglas E. Nash)는 기 사예르의 회록에 대한 논쟁에서 참전자들의 기억에 나타나는 군사지식의 오류문제에 대해 아주 재미있는 지적을 한 바 있습니다. 참전자들의 전쟁 기억은 세부적인, 혹은 전문적인 부분에서 종종 부정확하고 엉터리로 보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그들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 입니다. 조선족들의 회고담도 많은 부분에서 오류가 보이고 종종 과장된 내용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무시할 필요는 없을 것 입니다.

2009년 4월 24일 금요일

1942년 8월 28일, 스탈린그라드의 대공황

마이클 존스(Michael K. Jones)의 Stalingrad는 참전자들의 증언을 통해 전투의 진행과정을 따라가는 내용입니다. 개개인의 체험을 통해 내용을 전개하는 방식은 군사작전을 중심으로 내용을 건조하게 서술하는 것에 비해 훨씬 재미있게 읽힙니다.(물론 저는 개인적으로 작전 중심의 딱딱한 내용을 선호하긴 합니다만) 내용은 스탈린그라드에 포위되어 독일군의 공세를 격퇴한 62군에 초점을 맞추고 있고 시기도 독일군이 스탈린그라드로 진격해 오던 1942년 8월부터 독일군이 시가지에 대한 최후의 공세를 펼친 11월 중순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반격작전 이후의 내용은 에필로그 형식으로 짧게 서술되어 있는데 저자가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은 소련군이 독일군의 포위 공세에 대한 공황상태에서 벗어나 조직적인 반격능력을 되찾아 가는 과정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 같습니다.

개인 체험 위주의 서술이어서 소련 시절에는 검열 등의 문제로 논의 될 수 없었던 이야기들이 많이 나온다는 점은 큰 장점입니다. 전장에서의 비겁행위라던가 독일군에 대한 공포 같은 것이 체험자들의 경험을 통해 전달되기 때문에 그만큼 잘 와 닫는다고 할 수 있지요.

책을 읽으면서 가장 흥미로웠던 대목은 독일군이 스탈린그라드로 진격해오던 1942년 8월 말 스탈린그라드 시내에서 벌어진 대규모 공황사태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1942년 8월 28일, 전후 모든 소련의 역사서술에서 언급하는 것이 금기시 되었던 일이 일어났다. 스탈린그라드에서 대규모의 피난이 시작된 것이었다. 세르게이 자차로프는 당시 시내의 레닌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독일군의 폭격에도 불구하고 병원의 기능은 많은 노력을 기울여서 유지되었다. 그런데 8월 28일에 매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내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간호사도 없었고 의사도 없었다. 정말 단 한 명도 없었다. 병원 원장이 우리를 돌봐주기 위해서 나타났다. 그가 말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병원의 직원들이 모두 떠났습니다. 모두 도망쳤습니다.’

우리는 병원 바깥의 불안한 움직임에 대해서 알게 되었고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들은 창가 쪽으로 갔다. 우리는 엄청난 혼란을 목격했다. 모두가 공포에 빠져 제정신이 아니었다. 마치 도시 전체가 집단적인 광란에 빠진 것 같았다. 사람들은 상점과 건물들에 들어가 물건을 약탈했다. 모두가 소리를 질렀다. ‘도데체 어떻게 돌아가는 겁니까?’ 그리고 여기에 대한 답변이 돌아왔다. ‘도시가 텅 비었어’, ‘ 공무원들이 모두 사라졌어!’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나쁜 소식이 들려왔다.

‘독일놈들이 온다!’

우리는 창 밖으로 계속해서 펼쳐지는 장면들을 바라보았다. 사람들은 사방으로 뛰어다니며 비명을 지르고 울부짖었다. 그리고 갑자기 엄청난 힘이 밀려왔다. 모든 사람들이 가능한 모든 운송수단을 찾아 도망치기 시작했다. 나는 어떤 가족이 말 한마리가 끄는 수레에 가재도구를 싣고 거리를 지나가던 장면을 기억한다. 모두가 스탈린그라드를 떠나고 있었다! 내가 속한 연대의 지휘관이 나타났다. 그가 말했다. ‘동무들을 병원에서 이송할 것이오! 이 도시는 포기되었소!’

우리는 움직일 수 있는 환자는 모두 불러모았다. 백 명 정도가 병원에서 나왔다. 우리는 시가지를 따라 볼가강 쪽으로 이동했다. 그때 갑자기 여러 대의, 아마도 열 다섯 대에서 스무 대 정도의 독일군 비행기가 나타났다. 독일 비행기들은 병원 쪽으로 가서 연속적으로 병원에 폭탄을 투하했다. 아마도 병원에 남아있던 환자 대부분이 죽었을 것이다. 우리는 폭격이 있기 직전에 빠져 나온 것 이었다.

내가 속한 일행은 순간 조용해 졌다. 기분 나쁜 침묵이 이어졌다. 모두가 기력이 없어 보였다. 우리는 밤이 되어야 볼가강을 도하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우리의 지휘관 알렉세이는 우리에게 이렇게 지시했다. ‘제군들, 보급품을 구해야 겠네’ 버려진지 얼마 되지 않은 민간인의 아파트나 주택에서 식량을 가져 오는 것은 적절하지 않은 것 같아 우리는 일반 상점으로 갔다. 상점들은 모두 문이 열린 채 방치되어 있었고 과자, 꿀, 빵, 소시지 같은 각종 식품으로 가득 차 있었다. 우리는 식량을 구한 뒤 강변으로 다시 집합했다.

우리는 오후 내내 강을 건너기를 기다리다가 놀라운 소식을 들었다. 트랙터 공장의 노동자들이 긴급회의를 가진 뒤 스탈린그라드를 떠나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렸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탱크 생산을 계속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단호한 결심을 내린 일부의 시민들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도망치지 않았다. 그들은 도시를 버리는 것을 거부하고 지하실이나 방공호로 들어갔다. 분위기가 갑자기 달라졌다. 집단적인 공황이 단호한 저항 의지로 바뀌었다.

스탈린그라드는 살아 남았다.”

발렌티나 크루토바는 이 날을 이렇게 기억했다.

“상점들은 그냥 열린 상태로 방치되었고 수천명의 사람들은 갈 수 있는 모든 방향으로 도망쳤다. 그러나 일부의 사람들은 남았다. 우리는 여전히 스탈린그라드가 포위를 면할 수 있을 것 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대규모의 피난 사태를 촉발한 것은 스탈린그라드 경찰과 민병대가 갑자기 시내에서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Michael K. Jones, Stalingrad : How the Red Army Survived the German Onslaught, Casemate, 2007, pp.59~61

전쟁 이야기에서 제 관심을 가장 끄는 것은 이러한 집단 공황상태입니다. 통제 불가능한 혼란 상태에서 표출되는 인간의 다양한 본성은 정말 흥미로운 이야기 입니다.

물론 제3자의 입장에서.

제가 당사자가 된다면 그건 진짜 고역이겠죠. 그런 사태를 제 생전에 겪고 싶은 생각은 별로 없습니다.

이것과 비슷하게 1945년 독일이 붕괴될 무렵 동부 독일의 이야기나 1975년 베트남 붕괴시의 이야기도 많은 관심을 끕니다. 요즘도 가끔씩 읽는 안병찬 기자의 ‘사이공 최후의 표정 컬러로 찍어라’ 같은 책은 전체 내용이 이런 혼란으로 가득 차 있지요.

2009년 4월 21일 화요일

독일 군사사 연구자들의 공통적인 불만

요즘 읽는 책 중에 폴리(Robert T. Foley)의 German Strategy and the Path to Verdun : Erich von Falkenhayn and the Development of Attrition - 1870~1916이 있습니다. 독일의 군사상에서 다소 특이한 위치에 있는 소모전 전략의 등장과 퇴조를 다룬 연구인데 팔켄하인에 대한 조금 다른 해석이 재미있군요.

그리고 역시 두 세계대전을 다루는 연구 답게 2차대전 말기 연합군의 폭격으로 소실된 독일 사료의 문제점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독일 군사사 연구자들이 공통적으로 토로하는 불만 중 하나가 1945년의 포츠담 폭격으로 이곳에 소장 중이던 프로이센군 및 제3제국기 독일육군의 1차사료들이 대량으로 유실되었다는 점 입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폭격에서 살아남은 문서들은 소련군이 수집해 갔고 이것들은 1988년 고르바초프 정권기에 동독정부에 반환되었다는 정도 입니다. 소련이 문서를 반환한 뒤 1차대전과 관련된 새로운 연구가 여럿 발표되었지요.

육군 뿐 아니라 공군의 경우도 전쟁 말기 문서가 대량으로 파기되어 골치아프다는 지적이 많습니다. 이에 대한 언급을 처음 접한 것은 코럼(James Corum)의 독일 공군 창설기에 대한 연구 였는데 읽는 입장에서도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미군의 경우는 많은 자료가 남아 있기 때문에 독일군에 비해서 훨씬 미시적인 부분까지도 서술이 가능합니다. 대대 단위의 전투일지를 종합해 일일 전투식량 재고량까지 파악할 수 있으니 크레벨드(Martin van Creveld)가 지적한 것 처럼 미군은 자료가 많아 문제고 독일군은 자료가 적어 문제라는 말이 허언은 아닙니다.

군사사에 많은 관심을 가진 입장인지라 자료의 소실을 아쉬워하는 연구자들의 한탄을 읽을 때 마다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독일인들이 마이크로 필름 사본이라도 만들어서 별도로 보관했다면 전쟁통에 중요한 사료들이 완전히 소실되는 참사는 피할 수 있었을 텐데 왜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의문을 품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기도 하지요.

쿠르스크 전투와 관련해서 소련군이 프로호로브카 전투에서 전술적 승리를 거뒀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진 이유도 전투에 참여한 무장친위대의 일지가 1980년대 까지도 제대로 활용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찾아보면 1차대전의 경우도 비슷한 문제가 있을 것 입니다.

잡담을 조금 더 하자면.

이런 문제는 우리나라도 마찬가지 인데 한국전쟁 초기에 서울이 순식간에 함락되다 보니 국방부의 주요 문서들을 이송하지 못한 채 상당수를 잃어 버린 경험이 있습니다. 결국 빈 공백을 미국 군사고문단의 문서에 절대적으로 의존해야 하는데 그럴 때 마다 우리가 남긴 기록이 단 한 장만 더 있었더라면 하는 생각이 듭니다. 백선엽 장군도 한국전쟁 당시 우리가 남긴 기록이 너무 없어서 아쉽다는 이야기를 한 일이 있지요.

조지 오웰이 남긴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한다'는 말은 정말 핵심을 찌르는 것 같습니다. 미군 기록에 많이 의존하다 보니 어떤 경우에는 정말 미국의 시각으로만 문제를 바라보게 되더군요. 그럴때는 정말 식은 땀이 흐르는 것 같았습니다.

2009년 3월 3일 화요일

게르니카 폭격 - 독일 측의 관점

오래된 떡밥이라 많은 분이 아시는 내용입니다.

게르니카(Guernica)에 대한 콘도르군단의 공습은 민간인을 상대로 한 테러 폭격으로 파시즘의 잔악상을 알리는 상징이 되었습니다. 197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독일 자료를 활용한 연구들이 나오기 전 까지는 민간인에 대한 테러 폭격이라는 시각이 지배적이었습니다. 아래에 인용한 ‘타임라이프 2차대전사’의 기술은 그런 시각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4월에 접어들자 내셔널리스트군은 북부로 이동하여 독일군의 위력을 빌린 폭격에 의해 이윽고 이목을 끌게 되는 작전을 개시했다. 콘도르병단은 소이탄과 고성능폭탄을 병용하는 새 전술의 연습지로서 바스크지방을 선정했다. 맨 먼저 폭격을 당한 곳은 빌바오와 그에 버금가는 공업중심지 두랑고였다. 그러나 결코 잊을 수 없는 폭격의 표적이 되고 이 내전 전체를 상징하는 도시가 된 것은 그 근처의 게르니카였다.

빌바오의 동쪽 30km에 위치하는 인구 약 7,000명의 게르니카는 가도와 철도의 분기점이었다. 도시에 있든 그 밖의 군사목표는 공화국군이 철퇴할 때 필요한 교량과 두개의 조그만 군수공장 뿐이었다. 1937년 4월 26일 오후 4시, 두 사람의 수녀가 경보의 종을 울리며 “비행기, 비행기”하고 외쳤다. 상공에 날아온 것은 하인켈 폭격기 한 편대였다. 그 가운데 1대가 몇 개인가의 250킬로 폭탄을 역전 광장에 모여있는 군중 속에 투하했다. “여자와 어린이의 일단이 하늘 높이 흩날렸다. 그들의 몸은 분쇄되고 발, 팔, 머리 따위가 산산조각이 난 채 곳곳에 흩어졌다.” 생존자 한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도시를 습격한 8회를 넘는 비행기의 파상공격이 밤까지 계속되었다. 약 1600명이 살해되고 900명이 부상했다. 독일의 폭격기는 군수공장을 폭격하지 못했다. 그들의 폭격장치는 매우 원시적이었으므로 정확히 목표를 포착할 수 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해외 제국의 공화국 지지자는 비무장 시민 대량살륙의 소식에 충격을 받고 무차별폭격을 비난했다.

로버트 T. 엘슨(Robert T. Elson), 『라이프 2차 세계대전 : 대전의 서곡』, 한국일보 타임-라이프, 1981, 172쪽

그러나 폭격을 주도한 콘도르 군단의 보고서 등 독일 사료를 활용한 연구들이 출간 되면서게르니카 폭격은 민간인을 목표로 한 테러폭격이 아니라 통상적인 전술폭격의 일환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게르니카에 대한 폭격을 지휘한 리히트호펜(Wolfram von Richthofen)이 게르니카를 폭격하기로 결심한 이유는 이곳이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기 때문입니다. 게르니카를 폭격해 이곳의 도로망과 철도를 마비시킨다면 바스크군이 빌바오로 철수하는 것을 방해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고 있었습니다. 게르니카 일대에 전개한 바스크군의 병력은 23개 대대에 달했고 빌바오로 통하는 주요 도로 하나가 게르니카를 지나고 있었습니다. 만약 게르니카에 주둔한 바스크군이 제때 철수를 하지 못한 상태에서 국민군이 신속히 진격한다면 바스크군에게 큰 타격을 입힐 수 있었을 것 입니다. 그리고 당시 국민군 측이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게르니카에는 바스크군의 제 18 로얄라(Loyala) 대대와 사세타(Saseta) 대대가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만약 이 두 대대가 게르니카에서 저항을 한다면 국민군의 진격을 저지하면서 주력 부대가 게르니카를 따라 후퇴할 수 있는 시간을 벌 수도 있을 것이었습니다.

게르니카 일대에 대한 공습은 4월 25일 시작됐습니다. 리히트호펜은 전투기 부대에 빌바오와 게르니카를 잇는 도로를 따라 이동하는 바스크군에 공습을 가하도록 명령했습니다. 한편 국민군이 게르니카 방면으로 진격하면서 위에서 언급한 대로 게르니카의 교통망에 타격을 가해 바스크군의 퇴각을 방해할 필요성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1937년 4월 26일에 감행된 게르니카 폭격은 전술적으로 기대했던 성과를 달성하지 못했습니다. 무엇보다 콘도르군단의 폭격기들은 주요 목표 중 하나였던 렌타리아(Rentaria) 다리를 파괴하지 못했으며 도로 및 철도에 대한 폭격도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이 작전에 투입된 폭격기 중 많은 수를 차지한 Ju-52는 기본적으로 수송기 였고 초보적인 조준기를 장비했기 때문에 폭격의 정확도가 매우 떨어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 하루 정도 게르니카의 도로망은 마비되었으며 리히트호펜은 ‘전반적으로 성공적’이라는 평가를 내렸습니다. 리히트호펜은 공습이 끝난 뒤 스페인 국민군의 느린 진격속도 때문에 게르니카 공습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바스크군에 타격을 입히지 못했다고 불쾌해 했습니다.

스페인 내전에 참여한 독일 공군 지휘관들은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테러 폭격이 정치적으로 나쁜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독일공군 장교들은 빌바오나 바르셀로나에 대한 국민군과 이탈리아 공군의 테러 폭격에 대해 비판적이었습니다. 특히 국민군의 경우 자국의 국민과 산업기반을 파괴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습니다.

문제는 게르니카 폭격의 후폭풍 이었습니다. 바스크 자치정부는 게르니카 폭격으로 1,654명이 사망하고 889명이 부상했다는 발표를 했습니다. 민간인에 대한 폭격이 국제적인 비난을 불러온 것은 당연했습니다. 이상하게도 국민군이나 이탈리아군에 의한 테러 폭격이 아니라 테러 폭격에 관심 없었던 독일 콘도르군단의 전술 폭격이 테러 폭격의 대명사가 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독일 측은 전혀 의도하지 않았지만 게르니카 폭격으로 영국의 전략폭격 지지자들은 공군의 위력과 민간인에 대한 테러폭격의 효과를 더욱 확신하게 됐습니다.

최근의 연구들은 게르니카 공습으로 250명에서 300명의 민간인이 사망했다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희생된 민간인들은 콘도르군단의 목표는 아니었지만 ‘군사목표’에 있었기 때문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물론 의도하지 않았다고 해서 리히트호펜과 콘도르군단에게 면죄부가 주어질 수는 없습니다. 리히트호펜의 전기를 쓴 코럼(James S. Corum)에 따르면 리히트호펜은 냉정한 군인으로 군사작전을 감행하면서 발생할 민간인의 피해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고 하는군요. 게르니카가 함락된 뒤 게르니카를 방문한 리히트호펜은 폭격의 성과에 만족하면서 특히 250kg 폭탄의 위력이 입증된 것에 주목했다고 합니다. 물론 민간인의 피해에 대해서는 별반 언급하지 않았다는 군요.


참고문헌
로버트 T. 엘슨(Robert T. Elson), 『라이프 2차 세계대전 : 대전의 서곡』, (한국일보 타임-라이프, 1981)
James S. Corum, The Luftwaffe : Creating the Operational Air War, 1918~1940, (University Press of Kansas, 1997)
James S. Corum, Wolfram von Richthofen : Master of the German Air War,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08)

2007년 12월 27일 목요일

2차대전 초기 항공전 양상에 대한 당시의 분석

항공기와 조종사의 소모율이 생산량과 보충되는 규모를 훨씬 상회하고 있다.

독일군이 네덜란드와 벨기에 침공한 이후 벌어진 규모의 공중전이 계속된다면 양군의 공군력은 수개월 이내에 항공 관계자들이 예상한 한계점 까지 떨어질 것으로 보인다.
나치 공군은 개전 첫 날에만 100대의 항공기를 격추당했다. 신뢰도 있는 손실 집계는 아직 들어오지 않았지만 항공기 손실율(ship mortality rate)은 위에서 주장한 수치가 거의 정확한 것으로 보인다. 항공기 100대와 함께 조종사 150명도 손실된 것으로 보인다. 이 손실율은 독일의 일일 최대 항공기 및 엔진 생산량을 상회하는 것인데 독일의 항공기 생산량은 한달 평균 2,500대 또는 일일 평균 80~85대로 추정되며 조종사 보충율도 손실보다는 낮을 것이다. 전투기를 생산하는 데는 수일이면 충분하고 폭격기는 몇 주면 충분하다. 하지만 독일이 조종사 교육기간을 아무리 단축한다 하더라도 최소 5개월 미만으로 단축하기는 불가능하다.
영국군의 손실은 아직 알려지 있지 않으나 영국의 일일 항공기 생산량은 45대 미만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영국공군의 손실이 높지 않더라도 이것은 영국공군이 독일공군 보다 우수하다는 증거는 될 수 없으며 영국공군은 아직 가용 가능한 항공기를 총 동원한 것이 아니다. 영국 정부는 독일이 벨기에를 완전히 점령하고 이곳을 기지로 영국을 공격할 경우에 대비해 예비 기체를 비축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달리 말하면 오늘날의 항공전은 기술 한계의 측면에서 얼마나 항공기를 빨리 만드느냐 그리고 인적 한계의 측면에서는 얼마나 빨리 조종사를 교육시킬 수 있느냐의 양상으로 기울고 있다.
조종사의 교육에는 많은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조종사 보충이 좀 더 심한 제약을 받는다. 독일에 있어서는 연료 문제가 전격전에 제동을 거는 요인이다.
현재 연합군은 조종사가 15,000명에 불과하다. 만약 하루 평균 50대의 항공기를 잃는다면 연합군은 하루 평균 75명의 조종사를 잃는 것이며 한 달이면 2200명에 달하게 된다. 이것은 현재 교육시켜 배출하는 조종사의 숫자를 초과하는 것이다. 영국의 항공 교육 체계는 충분한 항공인력(조종사, 방어기총사수, 관측사 등)을 배출할 수 없으며 조종사의 경우만 따로 보면 교육이 최고로 이뤄지더라도 다음 해에는 조종사가 부족할 것이다. 또한 독일도 하루 최대 75명 이상의 조종사를 배출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각각 다른 공군의 감소율은 항공기 손실과 생산량의 차이에 달려있다. 현재 독일공군의 전력은 11,000대에서 20,000대 사이로 추정된다. 비록 독일의 항공기 생산량이 많더라도 하루 평균 100대의 손실이 계속 누적된다면 몇 달 안에 문제의 심각성을 느끼게 될 것이며 조종사의 손실은 그보다 더 빠를 것이다. 연합군도 비슷한 비율로 손실을 입는다면 한달 이내에 전력이 현재의 절반 수준으로 떨어질 것이다. 현재 연합군의 공군력은 영국 공군이 8,000~11,000대 정도이며 프랑스 공군은 3,500~6,000대 정도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중 많은 수는 중동과 기타 식민지에 배치되어 있다.
현재의 손실율은 전문가들이 1939년 9월 3일 이전에 예측하던 것 보다 더 높다. 미국 육군항공대는 월 손실율을 25%로 잡고 있었고 영국공군은 30%, 독일공군과 이탈리아 공군은 각각 50%와 80%로 잡고 있었다. 이 손실율은 공군의 총 전력에 대한 비율이었다. 간단히 말해 손실율이 100%라면 한 달에 필요한 보충용 항공기는 공군 전체 보유량과 같다는 뜻이며 이것은 현재의 공군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규모이다. 독일이 현재 하루 평균 100대의 항공기 손실을 감당하기 벅차다는 것은 즉 독일이 월 평균 30%의 손실율을 감당하기 어렵다는 것을 의미한다.
조종사와 항공기의 손실은 얼마 안 있어 공군을 대규모로 운용하는 것을 사치로 만들 것이다. 공군력은 보충이 손실을 메꿀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유지해야 한다. 이것은 현재 각 국이 보유한 공군력 보다 훨씬 적은 수준이 될 것이며 교전국들은 많아야 수천대 정도의 항공기를 일선 전력으로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에서는 항공기 생산공장에 대한 폭격은 분석요소에서 제외했음을 밝힌다. 그 이유는 현재 항공기 공장에 대한 폭격이 항공기 생산에 어느 정도 지장을 주는지 알 수 있는 자료가 없기 때문이다. 단지 폭격이 항공기 생산을 감소시킬 것이라는 것 말고는 확실한 것이 없다. 항공기 공장에 대한 폭격은 유지할 수 있는 공군력의 규모를 더 줄이겠지만 그게 어느 정도 수준인지는 단언하기 어렵다.

Science News Letter 1940년 5월 25일

결론은 맞는데 그 결론을 이끌어 내는데 근거로 든 사실들은 황당한 수준입니다. 특히 독일공군에 대한 과대평가는 상당히 심각한 수준입니다. 참고로 서부 전역 개시 당시 독일 공군의 총 보유 기체는 5500대 가량이었습니다. 프랑스의 경우는 개전 당시 3천대 정도의 항공기를 보유했으니 이 글에서 추정한 최저치를 적용할 경우 얼추 비슷하다고 할 수 있는데 영국의 경우는 독일과 마찬가지로 과장이 좀 심한 편 입니다. 손실율의 경우도 황당할 정도로 높게 잡고 있지요.

엉터리 자료를 가지고도 그럭 저럭 말이 되는 결론이 도출되니 참으로 신기한 일 입니다.

2007년 8월 30일 목요일

이탈리아 공군의 지브롤터 폭격

2차대전 당시 이탈리아군의 주 전장은 “당연히” 지중해 지역이었습니다. 지중해 전역에서 치열한 공중전이 펼쳐진 곳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지역은 “몰타” 입니다. 몰타는 1943년까지 지중해 지역에서 이탈리아와 독일공군의 주요 공격 목표였지요. 그런데 몰타의 유명세에 가려 잘 알려지지 않은 이탈리아 공군의 공격 목표가 하나 있었으니 바로 지중해의 영국해군 거점 중 하나인 “지브롤터”였습니다.

이탈리아 공군은 1940년부터 1943년까지 지브롤터에 대해 15회의 폭격을 실시했습니다. 그런데 한 두 차례도 아니고 무려 15회에 걸쳐 꾸준한 공격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지브롤터 같은 중요한 전략 목표에 대한 공격이 잘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래의 내용을 보시죠.

지브롤터에 대한 이탈리아 공군의 공격(1940~1943년)

1940년 7월 17/18일 : SM.82 3대 출격 : 민간인 3명 포함 4명 사망
1940년 7월 25/26일 : SM.82 3대 출격 : SM.82 1대 파손(대공포)
1940년 8월 20/21일 : SM.82 2대 출격 : SM.82 1대 격추(대공포)
1941년 6월 6일 : SM.82 2대 출격 : 1대는 이륙 후 다시 귀환, 1대는 지브롤터를 찾지 못하고 돌아옴
1941년 6월 13일 : SM.82 1대 출격 : 스페인의 La Linea 폭격, 스페인 민간인 4명 사망
1941년 7월 11일 : SM.82 1대 출격
1941년 7월 13일 : SM.82 1대 출격
1941년 7월 14일 : SM.82 1대 출격
1942년 4월 1일 : SM.82 3대 출격
1942년 6월 28/29일 : P.108B 5대 출격 : 4대가 지브롤터 도착, 3대는 연료 부족으로 스페인에 불시착
1942년 7월 3일 : P.108B 1대 출격 : 중간에 추락
1942년 9월 24일 : P.108B 2대 출격 : 아무 전과 없음
1942년 10월 20일 : P.108B 4대 출격 : P.108B 1대 비상착륙 중 대파
1942년 10월 21일 : P.108B 3대 출격 : P.108B 1대 비상착륙 중 대파
1943년 6월 19일 : SM.79 9대 출격 : SM.79 5대 엔진고장으로 귀환

Hans Werner Neulen, Am Himmel Europas : Luftstreitkräfte an deutscher Seiter 1939~1945, Universitas Verlag, 1998, s.31

최대 출격 기수는 9대이고 전과는 민간인 7명(이 중 4명은 중립국 민간인)을 포함해 8명 사망에 불과합니다. 손실은 완전손실 2기, 대파 3기로 전과에 비해 큰 손실을 입었습니다. 이탈리아인들에겐 미안하지만 관심을 가져달라 하기가 난감한 수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즉 후대에 알려지는 것 자체가 민망한 일이었습니다.

2007년 4월 17일 화요일

1주일 전에 커트 보네것이 사망했었군요

회원으로 가입한 어느 북클럽의 뉴스레터를 받고야 커트 보네것이 1주일 전에 사망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Kurt Vonnegut dies at 84

이상하게도 요 몇달 동안 제가 좋아하는 작가들이 세상을 뜨고 있습니다. 부흐하임도 그렇고.

보네것을 추모(?)하기 위해서 제 5도살장을 다시 읽어 볼까 생각중입니다.

2007년 2월 14일 수요일

창의력 넘치는 어떤 장군

Conrad C. Crane의 Bombs, Cities and Civilians를 읽고 있는데 아놀드(Henry H. Arnold)의 무한한 상상력에 대한 부분이 나왔습니다. 뭔가 기묘한 느낌을 들게 하더군요. 해당 구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아놀드는 전문가들이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 놓는 것을 좋아했다. 기발하고 창의적인 발상은 그를 흥분시키는 요소였다. 아놀드의 초기 저작들을 읽으면 그에게 폭격기만 충분했다면 어떤 일이든지 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아놀드는 도쿄 주변의 화산을 폭격하는 것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었고 일본 연안의 물고기를 몰살 시키는 것도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또 그는 독일의 V-1과 유사한 무인비행폭탄에 열띤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독일군이 부비트랩을 사용하는데 대해 만년필이나 작은 책으로 위장한 폭탄을 독일 본토에 투하하는 것에도 관심이 많았다. 그리고 그와 그의 참모진은 일본인들 보다 먼저 풍선에 소이탄을 매달아 일본을 공격하는 것을 구상했다.

Conrad C. Crane, Bombs, Cities and Civilians : American Airpower Strategy in World War II, University Press of Kansas, 1993, p35

B-29들이 후지산 분화구에 폭탄을 쏟아 넣는걸 생각하니 뭔가 난감한 느낌이 드는군요.

2006년 12월 3일 일요일

1940~41년 독일 공군의 런던 폭격

이른바 영국 본토 방공전에서 영국 공군을 제압하지 못한 독일은 다들 잘 아시다시피 런던에 대한 폭격을 1941년 봄 까지 줄기차게 실시합니다. 그러나 육군이 1940년 10월부터 소련 침공을 본격적으로 준비하면서 결과적으로 독일 공군의 런던 폭격은 쓸데없이 영국의 민간인만 희생시켜 적개심만 고취시키는 삽질로 끝나 버렸지요.

생각없는 전쟁 지도층의 삽질의 대표 사례가 아마도 이 런던 공습이 아닐까 합니다.

런던 공습기간 독일 공군의 공격 패턴은 상당히 재미있는데 1941년 1월 까지는 소이탄의 비율도 특별히 높지 않고 출격 빈도가 잦은 대신 출격 규모는 그다지 크지 않습니다. 그런데 소련 침공이 임박한 1941년 봄, 특히 3월 말~5월에는 출격 빈도가 줄어드는 대신 공격 규모가 커지고 소이탄 사용이 크게 늘어나는 것이 특징입니다.

아래의 통계는 Ulf Balke, Die Einsätze des Kampfgeschwaders 2, 422~425쪽에서 발췌한 것 입니다.

고폭탄(톤) / 소이탄(개) / 당일 출격 기수

1940년 9월

5/6일 야간 : 68.80 / 112 / 68
6/7일 야간 : 22.35 / 38 / 23
7/8일 야간 : 655.00 / 806 / 625
8/9일 야간 : 206.50 / 327 / 290
9/10일 야간 : 336.75 / 307 / 286
10/11일 야간 : 151.00 / 400 / 148
11일 : ? / ? / 73
11/12일 야간 : 216.80 / 148 / 178
13일 : 130.00 / 250 / 53
13/14일 야간 : 123.50 / 200 / 105
14일 : 12.00 / 0 / 49
14/15일 야간 : 55.40 / 43 / 38
15일 : 133.00 / 108 / 148
15/16일 야간 : 224.00 / 279 / 181
16일 : 40.00 / 90 / 38
16/17일 야간 : 172.00 / 318 / 170
17일 : 12.75 / 0 / 13
17/18일 야간 : 333.50 / 591 / 268
18일 : ? / ? / 30
18/19일 야간 : 349.75 / 628 / 280
19/20일 야간 : 310.20 / 533 / 255
20/21일 야간 : 153.70 / 79 / 109
21/22일 야간 : 164.37 / 329 / 113
22/23일 야간 : 95.85 / ? / 103
23/24일 야간 : 310.25 / 611 / 249
24/25일 야간 : 256.30 / 384 / 96
25/26일 야간 : 260.20 / 441 / 220
26/27일 야간 : 162.00 / 101 / 155
27/28일 야간 : 168.50 / ? / 163
28/29일 야간 : 325.05 / 303 / 249
29/30일 야간 : 294.00 / 136 / 246
30/10월 1일 야간 : 113.00 / 109 / 104

1940년 10월

1일 : 6.95 / 0 / 27
1/2일 야간 : 250.10 / 115 / 214
2/3일 야간 : 130.95 / 300 / 105
3일 : 49.40 / 32 / 46
3/4일 야간 : 61.40 / 0 / 44
4일 : 65.15 / 12 / 66
4/5일 야간 : 189.50 / 236 / 134
5일 : 11.65 / 0 / 44
5/6일 야간 : 242.10 / 176 / 177
6일 : 55.95 / 0 / 57
6/7일 야간 : 8.50 / 0 / 7
7일 : 23.00 / 0 / 96 (Jabo)
7/8일 야간 : 210.55 / 143 / 179
8일 : 24.00 / 0 / ? (Jabo)
8/9일 야간 : 257.00 / 264 / 208
9일 : 22.25 / 0 / 78 (Jabo)
9/10일 야간 : 263.50 / 245 / 216
10/11일 야간 : 269.00 / 718 / 222
11일 : 12.00 / 0 / 47
11/12일 야간 : 213.00 / 126 / 152
12일 : 34.00 / 0 / 135 (Jabo)
12/13일 야간 : 148.00 / 24 / 119
13/14일 야간 : 248.40 / 131 / 255
14일 : 19.00 / 0 / 19
14/15일 야간 : 304.00 / 292 / 242
15일 : 46.00 / 0 / 185 (Jabo)
15/16일 야간 : 538.00 / 177 / 410
16/17일 야간 : 346.00 / 187 / 280
17/18일 야간 : 322.00 / 134 / 254
18/19일 야간 : 172.00 / 132 / 125
19/20일 야간 : 386.00 / 192 / 202
20/21일 야간 : 356.00 / 192 / 298
21일 : 37.00 / 0 / 37
21/22일 야간 : 115.00 / 52 / 100
22/23일 야간 : 98 / 40 / 85
23/24일 야간 : 55.00 / 0 / 64
24/25일 야간 : 75.00 / 0 / 64
25일 : 46.00 / 0 / 186 (Jabo)
25/26일 야간 : 193.00 / 193 / 159
26/27일 야간 : 253.00 / 176 / 203
27일 : 53.00 / 0 / 159 (Jabo)
27/28일 야간 : 127.00 / 0 / 114
28일 : 16.00 / 0 / 61 (Jabo)
28/29일 야간 : 176.00 / 111 / 146
29일 : 25.00 / 0 / 77 (Jabo)
29/30일 야간 : 236.00 / 109 / 186
30일 : 13.00 / 0 / 52 (Jabo)
30/31일 야간 : 178.00 / 92 / ?
31일/11월 1일 야간 : 48.00 / 83 / 67

1940년 11월

1/2일 야간 : 215.00 / 130 / 171
2일 : 11.00 / 0 / 33 (Jabo)
2/3일 야간 : 117.00 / 126 / 102
3일 : 17.00 / 0 / 11
4/5일 야간 : 184.00 / 16 / 157
5/6일 야간 : 139.00 / 0 / 119
6/7일 야간 : 223.00 / 4 / 192
7/8일 야간 : 242.00 / 9 / 193
8일 : 7.00 / 0 / 25 (Jabo)
8/9일 야간 : 133.00 / 0 / 125
9일 : 19.00 / 0 / 24
9/10일 야간 : 124.00 / 0 / 125
10/11일 야간 : 212.00 / 7 / 171
12/13일 야간 : 165.00 / 92 / 126
13/14일 야간 : 28.00 / 0 / 25
14/15일 야간 : 24.00 / 2 / 21
15일 : 5.35 / 0 / 33 (Jabo)
15/16일 야간 : 413.50 / 1142 / 358
16/17일 야간 : 104.00 / 68 / 87
17/18일 야간 : 56.00 / 64 / 49
18/19일 야간 : 5.00 / 0 / 10
19/20일 야간 : 33.00 / 0 / 37
20/21일 야간 : 48.00 / 32 / 45
21/22일 야간 : 31.00 / 32 / 40
22/23일 야간 : 34.00 / 20 / 43
24/25일 야간 : 37.00 / 0 / ?
27일 : 15.00 / 0 / 18
28/29일 야간 : 22.00 / 44 /21
29/30일 야간 : 380.00 / 820 / 335

1940년 12월

1/2일 야간 : 31.00 / 0 / 17
4/5일 야간 : 48.00 / 39 / 42
5/6일 야간 : 33.00 / 0 / 29
8/9일 야간 : 387.00 / 3,188 / 413
11/12일 야간 : 17.00 / 0 / 15
19/20일 야간 : 39.65 / 36 / 49
22/23일 야간 : 11.20 / 0 / 28
27/38일 야간 : 111.20 / 393 / 108
29/30일 야간 : 127.00 / 613 / 136

1941년 1월

5/6일 야간 : 67.00 / 24 / 63
7일 : 17.10 / 0 / 25
9/10일 야간 : 65.60 / 470 / 67
11/12일 야간 : 144.00 / 598 / 137
12/13일 야간 : 155.00 / 823 / 141
15/16일 야간 : 15.00 / 20 / 15
19/20일 야간 : 48.00 / 160 / 54
28일 : 5.90 / 28 / 19
29/30일 : 58.25 / 86 / 37
30일 : 18.50 / 38 / 26
31일 : 22.80 / 19 / 32

1941년 2월

5/6일 야간 : 17.60 / 70 / 30
26/27일 야간 : 80.00 / 0 / 53

1941년 3월

4/5일 야간 : 10.00 / 0 / 10
8/9일 야간 : 130.00 / 693 / 131
9/10일 야간 : 95.00 / 444 / 126
15/16일 야간 : 107.70 / 388 / 101
18/19일 야간 : 35.00 / 70 / 33
19/20일 야간 : 467.00 / 3,398 / 479
20/21일 야간 : 24.00 / 222 / 32

1941년 4월

16/17일 야간 : 890,00 / 4,200 / 685
19/20일 야간 : 1,026.00 / 4,252 / 712

1941년 5월

10/11일 야간 : 711.00 / 2,409 / 507

독일이 1940년 8월 1일부터 1941년 3월 31일까지 런던에 투하한 폭탄은 총 19,634톤이라고 합니다. 2위인 버밍엄(Birmingham)은 1,822톤 으로 1위의 10%에도 못 미치는군요. 그만큼 단기결전에 실패한 독일군, 특히 독일 공군은 영국을 압박하기 위해 수도에 공격을 집중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이것은 이후 1943년부터 1945년까지 미 육군항공대의 중폭격기들이 쏟아 부은 폭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요.

참고로, 독일 공군이 1944년 1월 21일부터 개시한 런던 공습작전인 Steinbock 작전에서 가장 많은 폭탄을 투하한 날은 2월 18일~19일의 야간 공습으로 총 178톤을 투하했다고 하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