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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9월 25일 수요일

한국전쟁 초기 북한군에 노획되었던 한국군 문서류

간만에 포스팅 하나 합니다. 먹고 사느라 바빠서 군사사 글 하나 쓰기가 어렵군요.^^

현재 한국전쟁 이전 창군기의 문헌 자료는 매우 부족한 편 입니다. 전쟁 초기 서울이 함락되면서 국방부와 육군본부가 가지고 있던 문헌 상당수가 파괴되거나 북한군에 노획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때문에 창군기를 연구할 때는 미국 문헌에 의존하는 정도가 심합니다. 창군기에 활동한 인물들의 회고록도 유용하지만 회고록의 특성상 엄밀한 교차검증이 필요하죠.

그런데 북한군이 노획한 문서들이 미군에 의해 다시 노획된 사례가 간혹 발견됩니다. 예를들면 1949년 6월 24일 제3보병사단에서 작성한 현황보고서가 있습니다. 이 문서는 개전 초반 북한군에 노획되었다가 미군이 다시 노획해서 미국으로 가져갔습니다. 북한 문서들에 섞여 있다 보니 한국 정부에 반환되지 않고 미국 국립기록관리청에 이관되어 RG242 문서군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 문서는 국사편찬위원회, 국립중앙도서관 등 국내 기관들에 의해 수집되어 온라인으로 쉽게 이용할 수 있습니다. 부처간 교류가 잘 되지 않는 것인지 여러 기관이 중복적으로 수집을 했습니다. 온라인으로 이용할 때는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수집한 것을 보는게 낫습니다. 상대적으로 최근에 수집을 해서 컬러로 깔끔하게 스캔이 되어 있습니다.

한동안 행방을 알수 없었던 정부 수립 초기 문서들을 노획문서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은 불행 중 다행입니다.


출처: RG242 Entry NM44 299-C Box142









2019년 1월 6일 일요일

꽌시(關係)


한국전쟁 당시 국군 제2사단 제17연대에서 학도병으로 복무한 중문학자 김학주 교수의 회고록을 읽다보니 흥미로운 일화가 몇개 보입니다. 그 중에서 특히 재미있었던게 황포군관학교 동기를 전쟁 포로로 만난 국군 장교의 이야기 입니다. 이런 우연이 현실에서 일어나는건 꽤 재미있지요. 회고록의 해당 부분을 인용해 봅니다.


우리를 특공대라고 호칭을 바꾼 목적을 알고 보니 우리를 일선으로부터 후방으로 보내어 후방에 낙오되어 있는 중공군들을 잡아오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때 며칠 동안 국군이 너무 빨리 반격을 하며 진군하는 바람에 우리 후방 산속에 중공군 낙오병들이 무척 많이 남아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현역병은 후방으로 빼어 보낼 수가 없기 때문에 우리를 후방으로 보내어 그 낙오병들을 잡아오게 하겠다는 것이다. 
(중략) 
우리는 그날부터 후방으로 가서 무척 많은 중공군 낙오병을 잡아왔다. 우리 특공대는 후방으로 나가면서 서너 명씩 조를 짜 가지고 패잔병들이 숨어있다고 알려준 지역으로 가서 포로를 잡아오는 작전에 임하였다. 후방으로 나간 우리 친구들이 첫 날 하루에 중공군을 모두 합쳐 60여명이나 잡아왔다. 중공군 낙오병들은 자신들이 후방에 낙오되어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어서 우리 대원들을 보기만 하면 모두 대항할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스스로 두 손을 번쩍 치켜들고 숨어있던 곳으로 부터 걸어 나왔다고 하였다. 그들을 잡아오는 것이 아니라 주워오는 것이라 말하는 편이 옳을 것이라 하였다. 
(중략) 
잡아온 많은 포로들을 한 곳에 모아놓자 그들은 불안한 듯 웅성거렸다. 그때 우리의 지휘관인 문창덕 중위가 그들 앞에 나서서 유창한 중국말로 일장 연설을 하자 포로들은 모두 안심한 듯 조용해졌다. 문 중위는 평안북도 신의주 출신으로 해방 전에 학생운동에 가담했다가 자기 형과 함께 형제가 중국으로 도망쳐 우리 임시정부에 의탁하게 되었다 한다. 마침 우리 임시정부의 김구 선생께서 항일의 중추가 될 광복군을 제대로 조직하고자 하여 광복군의 지휘관인 장교들을 양성할 목적으로 중국국민당 정부에 청탁하여 장제스 총통이 창설한 황포군관학교에 20여명의 우리나라 청년들을 입학시켰다고 한다. 그때 문 중위는 자기 형과 함께 입학하여 교육을 받았고, 군관학교를 졸업한 뒤 중국에서 장교로 복무하다가 해방이 되자 귀국하여 국군에 복무하게 된 것이라 한다. 중국어를 자유롭게 구사하여 중공군 포로들을 무마하는 문 중위의 모습이 무척 존경스럽고 부러웠다. 
이로부터 우리 대원들은 매일 포로 잡아오기에 동원되었다. 6월 3일에는 나도 포로 잡기에 나가서 포로들을 잡아왔다. (중략) 오후 적당한 시기가 되어 다른 친구들과 함께 각자 잡은 포로들을 데리고 부대로 돌아왔다. 도착하여 내가 문 중위에게 장교 같은 포로를 한 명 잡아왔다고 보고하자 문 중위는 직접 나서서 그 중공군 장교를 쳐다보더니 "너 아무개 아니냐?"고 하면서 서로 알아보고 반기는 것 이었다. 그 중공군 장교는 문 중위와 중국의 황포군관학교 동기생이라는 것이었다. 문 중위는 즉시 내가 갖고 온 그의 권총은 자신이 간수하면서 나보고 그 중국 장교를 개별적으로 일정 기간 잘 데리고 있어달라고 부탁하였다. 문 중위는 가능하면 그를 데리고 있다가 포로수용소로 보내지 않고 기회가 생기면 후방으로 빼주고 싶으니 기다리면서 기회를 엿보아야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날부터 문 중위의 부탁을 따라 그 중국 장교를 데리고 부대원들과 약간 떨어진 조용한 곳을 골라 작은 개인천막을 쳐놓고 둘이 지내면서 개별적인 생활을 하기 시작하였다. 나는 낮에는 적당한 곳으로 나와 몸을 숨기고 중공군 장교와 함께 매일 전방에 벌어지고 있는 전투 구겨잉나 하며 지내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참으로 운이 좋았다. 일선에 나가서도 직접 적을 상대로 싸우지는 않고 나처럼 전쟁 구경을 제대로 가까이에서 한 사람은 없으리라고 여겨진다. 다만 중국 친구가 지독히 몸 냄새를 피우면서도 세수조차 잘 하려 들지 않고 계속 음식이 제대로 그에게 맞지 않는 듯 배탈이 나서 설사를 하여 함께 지내는 것이 유쾌하지는 않았다. 골짜기 맑은 시냇물로 데리고 가서 몸을 좀 씻도록 해 보았지만 몸을 제대로 씻으려 들지 않았고 또 씻을 줄도 모르는 사람만 같았다. 그와 지내면서 다만 말이 전혀 통하지 않는 사람도 함께 살아가는데 별로 불편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았을 뿐이다. 
(중략) 
문 중위는 여러날을 기다려 보아도 결국 달리 어찌하는 수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자 한국군 보다는 미군이 포로를 보다 잘 대우한다고 하면서 그를 바로 옆에 있는 미군들에게 넘겨주겠다고 하였다. 먼저 문 중위는 나를 미군들에게 보내어 그가 갖고 있던 리볼버 권총을 미군들에게 기념품으로 팔아보라고 하였다. 나는 그 권총을 들고 미군들에게로 가서 이것은 중공군 장교가 갖고 있던 무기이니 전쟁 참여 기념품으로 사라고 권하였다. 여러 미군들이 서로 자기가 사겠다고 하는 바람에 결국 나는 미군들에게 경매 방식으로 흥정하여 적지 않은 미국돈을 받고 팔았다. 100불을 넘게 받아 문 중위에게 전달해 준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런 뒤에 다시 미군들에게로 나를 보내어 먼저 팔아넘긴 권총의 주인인 중공군 장교를 포로로 맡아달라고 교섭을 하도록 하였다. 나는 다시 미군들에게로 가서 중공군 장교 포로를 넘겨주는 일을 교섭한 뒤에 그들과 합의한 대로 중공군 장교를 데리고 가서 미군에게 넘겨주었다. 역시 미군들로 부터 포로를 넘겨주는 대가로 미불로 받았는데 얼마나 받았었는지 정확한 액수는 기억에 없다. 다만 이때도 적지 않은 액수의 미불을 받아 문 중위에게 전해준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이 무렵의 6월의 2일, 3일을 전후하여 우리 부대가 머물렀던 곳은 자운리라는 동리이다. 
김학주, 『나와 625사변, 그리고 반년간의 군번없는 종군』, 明文堂 2017, 88~95쪽.

2018년 6월 9일 토요일

탱크 사냥꾼

트위터에 신녕-영천지구 전투 당시 국군 6사단의 대전차전투에 대한 썰을 풀었는데, 이야기 나온김에 해당 증언을 소개해 봅니다.


변규영(卞圭瑛)(당시 제6사단 19연대 1대대 1중대 1소대장 소위·예비역 중령·현 석공 원주주재 사무소장·49)  
6사단 본부 군수처에서 상사로 근무하면서 신녕(新寧)까지 후퇴했다가 장교가 모자라 830일에 현지임관되어 소대지휘를 맡았읍니다. 영천으로 가는 신녕 고개 위에 배치되어 있었는데 적 16연대가 10여대의 탱크로 공격해서 19연대는 큰 피해를 봤어요. 적 탱크 때문에 장병의 사기가 말이 아니었어요. 적 탱크 포탄이 30리 떨어진 영천 읍내까지 날아갔으니까요. 
94일께인데 새벽 1시에 10여대의 적 탱크가 헤드라이트를 켠 채 일렬종대로 신녕고개 위로 올라왔어요. 아군이 다 후퇴한 것으로 알았는지 보병엄호도 없이 아주 유유히 올라와요. 내 소대원들은 겁이 나서 벌벌떨어요. 군수처의 일을 보았기 때문에 나도 이때 처음으로 적 탱크를 보았지만 춘천에서부터 저놈 때문에 사단이 쫒긴 생각을 하니 이가 부드득 갈립디다. 한번 겨루어보자는 결심이 생겼어요. 강성의(姜成義, 전사), 모 등 2명의 일등중사에게 수류탄 10여발씩을 주고 나를 따르라고 했어요. “내가 혼자서 탱크에 기어오를테니 너희들은 나에게 수류탄을 공급하고 엄호사격을 하라. 그리고 내가 죽거들랑 결혼 6개월된 마누라에게 죽은 날짜나 알려줘라고 당부했어요. 
고갯길을 내려가 길가에 엎드려 있는데 모두 14대의 탱크가 우르렁거리며 지나가요. 탱크들이 나의 매복지점 앞을 지나가는데도 겁이 나서 떤 것은 아닌데 뛰어오르기가 마땅치 않아요. 그냥 엎드려 기회를 보았지요. 좀 있으려니 도로파괴용 매설지뢰가 폭파하여 5미터 직경의 큰 웅덩이가 파지며 선두 탱크가 처박힙디다. 그러니 뒤따르던 탱크들이 차례로 정지해요. 이어 도로지뢰 폭파지점에서 3백미터 아래의 교량에 설치된 TNT가 터졌어요. 그러니까 또 한 대가 개울에 떨어지더군요. 이렇게 해서 모두 8대가 꼼짝 못하게 됐고 나머지 꽁무니의 6대는 도망칩디다. 앞 탱크의 뚜껑이 열리면서 적병들이 기어나오는 것을 셋이서 카빈으로 사살했어요. 
이어 나 혼자 뛰어나가 다음 탱크의 뚜껑을 주먹으로 두드렸어요. “! 빨리 열어했더니 저희 편인 줄 알고 뚜껑을 엽디다. 수류탄 1발을 집어넣었죠. 이런 식으로 차례로 부쉈는데, 마지막 탱크에서 눈치를 챘어요. 길가에 엎드려 있는 사병한테서 수류탄을 받아서 달려드는데 기관총을 냅다 쏩디다. 엎드리며 굴러 길가에 숨었다가 다시 탱크에 올라서서 뚜껑을 두드리며 너희 편 탱크는 다 죽었다. 문 열고 나오라고 했더니 장교 1명과 사병 4명이 손을 들고 나와요. 
이때 동이 트고 있었는데 김익렬 연대장, 김종오 사단장, 미군 고문 등 많은 19연대 장병들이 고개 위에서 내려다 보고 있었어요. 나 혼자서 모두 적 탱크 6(지뢰에 걸린 것 까지 8)를 부수거나 생포했어요. 거짓말 같지만 사실이에요. 보병의 호위 없이 좁은 고갯길에서 탱크는 맥을 못써요. 이 전공으로 나는 임관 7일만에 중위로 특진하고 을지무공훈장을 받았읍니다. 
다시 영천 동북쪽 포항가두(지금의 제2육사 근처)에서 영천공방전을 하다가 적 포탄에 오른쪽 다리가 날아갔어요. 탱크 부술 때 같이 나갔던 강성의 중사는 이때 전사했는데 강 중사는 6·25전에 북에서 혼자 월남한 사람이에요. 단독으로 수색활동을 귀신같이 잘하던 사람인데 지금도 내가 그 사람의 사진을 꼭 갖고 다니지만, 통일된 후에나 찾아갈 사람이 혹 나타날는지요.  
中央日報社, 民族證言: 2을유문화사, 1972, 282~284

변규영씨의 증언 내용은 한국군에서 간행한 공간사와 약간 차이가 있으니 공간사의 해당 전투에 대한 서술도 함께 소개합니다. 일단 날자가 다릅니다. 물론 이 정도는 기억의 착오라고 할 수 있겠죠. 국방부 공간사에도 변규영씨가 대전차 특공대를 지휘한 사실은 확인되지만 세부적인 전투 양상이 다릅니다.


다음날(9월 1일) 21:00쫌 적은 전차 2대와 보병 1개 소대로 편성된 보전 협동부대로 공격을 개시하였으나 아군 포화가 집중되자 곧 고개 중턱에서 철수하였다. 날이 밝은 뒤 대대장은 전날 밤의 교전 상황을 여러 각도로 분석한 결과 이는 적의 차기 작전을 위한 위력수색이라고 판단하고 적정을 수집하기 위하여 대대 수색대를 적 지역에 침투시켰다. 이날 오후 행동을 개시한 대대 수색대는 덕천-인각사(麟覺寺)-화수동 일대의 적정을 수색하였으나 적 부대 배치 지점 가까이 접근하지 못한 때문인지 그들이 공격을 개시할 뚜렷한 징후는 포착되지 않았다.이러한 수색활동을 끝마친 대대 수색대는 대대로 복귀 도중 넌덧마을 뒷산 고개에서 피난가지 않고 그 마을에 남아 있던 장임실(張任實, 당시 64세) 외 2, 3명의 노인을 만났다. 그들은 수색대원들을 보자 반가와서 눈물을 글썽거리며, "오늘 새벽 우리 동네에 많은 인민군과 열 서너 대의 전차가 왔네. 그들은 오늘 밤에 큰 싸움이 벌어진다고 하면서 우리들보고 마을에서 떠나라고 했네. 그래서 지금 우리 늙은이들은 덕천으로 피난가는 중이네"라고 그들이 직접 보고 들은 바 그대로의 적정을 알려 주었다. 그 노인들의 말대로라면 두세시간 이내에 적이 공격을 개시하게 될 것이라고 판단한 수색대장은 고맙다는 한 마디를 남기고 지름길로 달린 끝에 노을이 질 무렵에는 대대장에게 수색결과를 보고하였다. 
대대장은 넌덧마을 노인들이 전해 준 첩보는 비록 신빙성이 희박하다고는 하지만 전날 밤의 적 위력수색과 일맥상통한 데가 있다고 생각하고 지체없이 작전회의를 소집하여 다음과 같이 적의 보전협동공격에 대한 대응책을 강구하였다. 
1. 적 전차가 갑령 고갯마루에 설치된 대전차지뢰지대에 들어설 때 까지 사격을 엄금한다.
2. 적 선두 전차가 파괴되면 즉시 넌덧마을-갑령고개 중턱 일대에 지원포병의 화력을 집중하며, 대대내의 모든 화기도 일제히 사격한다.
3. 전차특공대는 갑령 고개의 두 번째 도로, 굴곡 지점 서쪽 능선에서 매복대기할 것이며, 아군 포병 지원사격이 끝나는 즉시 적 후미 전차부터 먼저 공격한다.
4. 각 중대는 전차특공대가 적 전차를 공격할 때 이를 엄호한다.
5. 사격개시 신호: 예광탄 3발. 
그로부터 약 1시간이 경고한 20:00쯤 적의 공격준비사격이 대대 방어지역에 집중되기 시작하더니 5, 6분이 경과하자 맹렬하기 이를 데 없는 포격으로 아군 방어진지를 강타하였다. 이 바람에 대대 방어진지는 잠깐 동안에 초연으로 휩싸이고 사상자가 속출하였다. 이런 소용돌이 속에서 어느 중대장은 대대장에게 철수를 건의하는가 하면, 제3중대와 대대간의 통신이 두절되어 적정 파악마저 어렵게 되었다.
바로 이 때쯤 넌덧마을 부근에서는 수 미상의 적 전차가 요란한 엔진 소리를 내면서 공격을 개시하였다. 이렇듯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상황하에서 대대장은 철수 건의를 단호하게 물리치고 오직 방어진지의 사수를 강조하여 마지 않았다. 
약 30분간에 걸친 적의 포격이 대대 방어지역 후방으로 연신된 얼마 뒤, 드디어 적 선두 전차가 어렴풋한 달빛 아래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하지만 아군 진지에서는 총 한 방 쏘지 않고 쥐죽은 듯 잠잠하기만 하였다.
고갯마루 20m 앞 까지 육박한 적 선두 전차는 그를 지켜보는 수많은 시선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지뢰지대 전방에서 일단 정지하더니 헷치를 열고 상반신을 전차 밖으로 내민 전차장이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살피기 시작하였다.
대대 관측소와의 거리는 불과 50m 안팎! 이 광경을 보다못한 어느 병사는 총을 겨냥하고 이것을 제지한 대대 작전장교의 손은 떨고 있었다. 잠시 뒤에 적 선두 전차가 다시 움직이자 그 후방 300~400m 지점에서 정지했던 2번 전차도 뒤를 따랐다. 몇 초 뒤 "쾅"하고 천지를 진동하는 폭음과 함께 적 선두 전차가 길 옆으로 비스듬히 전복되었다.
그 직후 대대 관측소에서 예광탄 3발이 발사되어 붉은 포물선 세줄이 밤하늘을 수놓았다. 순간 대대의 모든 화기가 일제히 불을 뿜었으며, 넌덧마을-갑령 고개 중턱에는 제16포병대대의 일제사격(TOT)이 집중되었는데 동 대대 포격은 신속하고 정확하여 매우 큰 위력을 발휘하였다.
약 20분이 경과하였을 때 쯤 대대장은 모든 사격을 중지시켰다. 이 때를 기다리던 변 소위는 전차특공대를 지휘하여 두 번째 굴곡 지점에서 후진중인 적 후미 전차에 3.5inch 로켓탄을 집중사격한 것을 필두로 고개 아래에서 차례로 적 전차 7대를 파괴하고 승무원 다섯 명을 사로잡았다. 
이 날 밤의 적 공격은 단 1회로 끝이 났다. 갑령 고개에서 파괴된 적 전차 8대 중 승무원이 전차 안에서 전사한 전차는 선두와 후미 전차 두 대였고 전차특공대에 대항을 시도한 전차는 단 한대 뿐이었다. 나머지 다섯 대의 승무원들은 아군 포격이 집중될 때 이미 탈출했는지 전차특공대가 접근하였을 때에는 전차 내부가 텅 비어 있었다. 동이 튼 얼마 뒤에 대대는 전장을 정리하여 증강된 1개 중대 규모의 적 시체를 확인하고 트럭 2대분이 되는 각종 화기를 노획하였다. 대대장은 갑령 고개 북쪽에도 적 전차가 있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미군 전방항공통제장교에게 항공지원을 요청하도록 협조하였다.이리하여 06:00쯤 갑령고개 상공에 나타난 우군기는 갑령고개-화수동과 그 북쪽 28번 도로상에 있는 적 전차에 네이팜탄을 투하하여 이를 모두 불태웠다. 신녕전투가 끝난 뒤에 확인된 바에 따르면 이 일대에는 제19연대 제1대대가 파괴한 8대를 포함하여 총 21대의 적 전차가 파괴되어 있었다고 한다.
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신령ㆍ영천전투』 , 1984, 161~165쪽.


2018년 5월 24일 목요일

어떤 장군과 소나무


박정희 준장이 포병학교장으로 부임했을 때이다. 나는 포병학교를 시찰했을 때 교장실 입구에 두 그루의 큰 소나무가 서 있는 것을 보고 근사하고 멋진 나무다라고 혼잣말 비슷하게 말하자 박 교장은 빙슷이 웃으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본래 이 자리에는 버드나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버드나무란 축 늘어져 군인의 기상과도 맞지 않아 뽑아버리고 쭉쭉 뻗은 이 소나무로 바꿔 심었습니다라고 자랑하였다.

좋은 생각이다라는 말을 하고 며칠 후 다시 방문했을 때는 그 싱싱하던 소나무 잎이 빨갛게 마른 채 베어져 입구 한쪽에 쌓여 있지 않은가. “어떻게 된거냐고 물었더니 토질이 맞지 않는지 실패했습니다라며 섭섭해 하였다. 맥아더 원수의 회고록에(그의 아버지가 한 말인지 기억이 애매하나) “인은 나무를 자를 줄은 알아도 성장 과정은 모른다는 구절이 언뜻 생각났다. 상무대는 습지여서인지 소나무가 자라기에는 부적격한 토질이었고, 그런데다 나무에 전문가가 아닌 군인들이 그 큰 소나무를 옮겨 심었으니 살 리가 만무했다. 그러나 그의 기분만은 이해할 수 있었다. 젊은 피교육 장교들이게 버드나무처럼 축 늘어진 모습이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에서 소나무를 심었던 것이다.
 
유재흥, 『激動歲月: 劉載興 回顧錄』, 을유문화사, 1994, 352~353쪽.

2018년 4월 27일 금요일

한국전쟁기 한국의 건빵 생산

얼마전 트위터에서 한국군의 건빵 썰을 푼 김에 관련된 문헌을 하나 번역해 봅니다. 아래의 내용은 1958년 5월에 Kenneth W. Myers가 작성한 KMAG’s Wartime Experiences: 11 July 1951 to 27 July 1953의 275~289쪽을 번역한 것 입니다. 해당 연구보고서는 총 3개의 폴더로 나뉘어 태평양사령부 군사실 문서군인 RG550 Records of United States Army Pacific, Entry 2A1-2AA1의 85번 상자와 86번 상자에 나뉘어 있습니다. 건빵 외에 통조림 생산에 관한 내용도 있는데 그건 나중에 번역하도록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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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

1951년 6월 제8군사령부 군수참모처와 군사고문단은 극동군사령부에 9월 15일 부로 일본에서 한국군의 J형 전투식량과 건빵을 생산하는 것을 중단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한국내의 자원을 최대한 활용한다는 정책 기조에 맞춰 전투식량과 건빵은 한국의 민간 공장을 활용하거나 부산에 공장을 지어서 생산하는게 옳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제8군사령부와 군사고문단은 1951년 9월까지는 한국 내에서 건빵 재료와 전투식량에 들어갈 통조림 및 기타 부식 재료를 조달하는게 가능하다고 판단했다.1)
1951년 7월 극동군사령부는 일본에서 생산한 한국군용 건빵 재고가 10월 20일까지 충분한 분량이며, 전투식량은 10월 31일까지 충분한 분량이라고 보고했다. 또한 한국에서 건빵과 전투식량을 생산할 수 있을때 까지 소비할 건빵 재고를 일본에서 조금 더 생산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한국에서의 건빵 생산은 원래 계획한 9월 15일 보다 늦은 10월 1일 부터 시작할 계획이었다.2)

그러나 1951년 9월이 되자 한국 내에서 건빵과 비상전투식량을 생산하는 계획을 좀 더 연기해야 했다. 부산의 건빵 공장은 건축 자재 조달이 늦어져 1951년 12월 말이나 1952년 1월은 되어야 생산을 시작할 수 있을 것으로 예측되었다. 그리고 한국 정부가 전투 식량의 주 메뉴인 생산 통조림 생산에 필요한 재원을 조달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제8군사령관은 한국 국방부장관에게 서신을 보내 건빵 공장 가동과 전투식량 생산 계획에 필요한 재원을 마련하겠다는 확답을 요구했다. 한국 내에서의 생산이 지연되고 있었지만 제8군사령부는 한국에서 생산을 시작하기 전에 일본에서 한국군용 건빵과 전투식량을 계속 생산할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다. 재고량과 일본에 발주한 잔여 물량을 합치면 건빵 5개월 치와 전투식량 2개월 분이 있었다.3)
1951년 10월 초 한국 육군참모총장은 제8군 사령관에게 일본에서 건빵과 전투식량 6개월 치를 추가로 생산해 달라고 요청했다. 제8군 사령부는 한국 국방부장관에게 보낸 서신에서 부산의 건빵 공장을 최대한 빨리 가동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부산의 건빵 공장을 수리하는데 필요한 자재에 소요되는 예산은 한국민간구호계획(Civilian Relief in Korea, CRIK) 기금에서 유용하도록 제안했다. 일본에서 조달한 건빵 재료가 한국에 도착했지만 부산 건빵 공장의 생산 예정일은 확실치 않았다.4)

제8군사령부, 군사고문단, 한국민간구호계획의 대표단은 1951년 11월 건빵을 생산하기로 계약한 업자와 회의를 했다. 그런데 공장 건물은 커녕 부지도 마련하지 못한 상태였다. 한국민간구호계획의 대표는 45일 내로 부지를 마련하고 건설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면 건설 자재를 제공하되, 그 기한을 지키지 못하면 계약을 파기하기로 했다. 11월 말이 됐는데도 계약한 업자는 이 조건을 만족하지 못했다. 군사고문단에 따르면 그 무렵 한국군은 건빵과 전투식량을 생산할 다른 곳을 물색하고 있었다. 한국측은 설사 임시방편이라 하더라도 일본에서 건빵과 전투식량을 생산하는데 반대했다. 제8군 사령관은 군사고문단장에게 서신을 보내 이런 상황이 계속된다면 건빵 부족 사태가 발생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5)
1951년 초 군사고문단은 제8군사령부에 한국군의 급식 부족 문제를 제기했다. 전투부대는 최소 기준의 급식을 받고 있었다. 최소기준으로는 병사들의 체력과 사기를 높게 유지할 수 없었다. 후방 부대의 급식은 칼로리, 단백질, 지방이 권장량 이하 수준이었다. 한국군이 굶주림에 시달리게 된 원인은 주로 한국 정부의 책임이었다. 한국 정부는 시장 가격의 폭등에 대응해 원화 예산을 증액하지도 않았고 대량 구매를 통해 식량 예비분을 확보하지도 않았다. 제8군사령부 군수참모처는 한국 정부에 생선 공급량을 늘리고, 예산을 증액하고, 늘어난 예산을 육군본부 군수국에 지급해 필요한 식량을 구매하도록 요구했다.6)
한국내에서 건빵을 생산하는 일이 지체되자 군사고문단은 1951년 12월 극동군사령부에 한국군의 1952년 3월 및 4월분 수요를 맞추도록 일본에서 건빵 500만 봉지를 추가로 생산해 달라는 요청을 했다. 군사고문단에 따르면 한국 육군본부는 기존에 계약했던 업자가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자 모든 계약을 취소하고 부산에 있는 다른 회사와 이 회사의 서울 지사에 건빵 생산을 맡기고자 했다. 하지만 이렇게 한다 해도 한국 육군의 건빵 수요 중 50%를 충족하는데 불과했다. 그리고 서울 공장은 1952년 1월, 부산 공장은 1952년 3월은 되어야 건빵 생산을 시작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극동군사령부는 군사고문단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일본에 발주한 건빵은 1951년 12월 말 생산에 들어갔으며 1952년 2월 15일~29일 사이에 500만 봉지를 배송할 예정이었다.7)
군사고문단은 동시에 한국군의 일선 병사들이 일원화된 조달 체계를 통해 김치, 고추장, 된장 등의 부식을 충분히 보급 받을 수 있도록 노력했다. 또한 일원화된 조달 체계 하에서 광주에 각종 장류와 신선한 야채를 공급할 지역 기구를 설치하는 방안도 연구했다. 한국 육군이 일원화된 조달 체계를 받아들이는데 있어 가장 큰 장애물은 각 부대 지휘관들이 급식 수당에 대한 통제권이 약화되는걸 우려했다는 점이었다.8)

서울의 건빵 공장은 1952년 1월 중순 소규모 생산을 시작했다. 얼마 있지 않아 서울 공장의 건빵 생산량은 하루 20,000~25,000봉지에 달했다. 부산 대신 1952년 5월 1일까지 대구에 두 번째 건빵 공장을 세우는 계획도 수립되었다.9) 극동군사령부는 1952년 1월 초 제8군사령부와 주한미군사고문단에 보낸 서신에서 한국의 건빵 생산 현황에 대해 평가했다. 이 서신은 한국 국방부가 건빵 공장 건설에 필요한 예산을 승인하지 않았으며, 그 이유는 한국군에 대한 급식을 미국 정부에 무한정 의존하려는 의도라고 지적했다. 극동군사령부는 6개월치의 건빵 재료 공급이 확정되었고, 한국 내의 건빵 생산이 본 궤도에 오를 때 까지 임시방편으로 500만 봉지의 건빵을 공급할 계획도 확정되었다고 지적하면서 “즉시 한국 정부에 건빵의 추가 공급은 없다고 통보하라. 한국 정부가 건빵 생산을 위해 조치를 취하고 있다는 증거를 제시하지 않는 한 극동군사령부는 건빵의 추가 공급을 거부할 것이다.”라고 했다. 추후의 원조는 건빵 생산 공장을 운영하는데 제한하기로 했다. 이것도 한국측이 완전하고 구체적인 정보를 제공하고, 한국정부와 한국군, 건빵 공장 운영진에게서 자구책 마련을 위해 납득할 만한 노력을 기울이고, 요청한 원료와 기자재를 원조받으면 건빵을 생산해 공급할 수 있다는  확실한 보증을 받은 뒤에만 제공하기로 했다.10) 제8군사령부는 한국 국방부장관과 군사고문단에 이 사실을 알렸다. 제8군사령부는 4월 30일까지는 한국군의 건빵 수요를 맞출 수 있지만 이때까지 한국 내에서 생산하는 양으로 4월 30일 이후의 수요를 맞출 수 있을지 회의적이었으며, 1952년 6월에서 7월쯤이 되면 건빵 부족 사태가 일어날 거라고 예상했다.11)

1952년 2월에는 한국군에 대한 건빵 공급이 개선되었다. 서울 공장의 생산량은 하루 평균 25,000봉지에 달했고 3월 초에는 33,000봉지로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었다. 한국 육군의 하루 건빵 수요는 90,000봉지였으니 이것은 수요의 3분의 1 수준에 불과했다. 대구의 건빵 공장이 4월 말에서 5월 초 생산을 시작하면 하루 평균 30,000봉지를 생산할 것으로 예측되었다.12)
1952년 2월 제8군은 한국군이 그해 6월까지 미육군의 보급시설에서 건빵 생산에 필요한 재료를 보급받을 수 있도록 조치를 취했다. 1952년 6월 1일 부터 9월 30일까지의 재료는 한국 육군이 항구에 하역되는 대로 인수하도록 했다. 한국군이 재료를 직접 인수하면 미군 보급고가 한국군 건빵 재료를 보관할 필요가 없어지게 되고, 향후 들어올 재료들도 마찬가지였다.13) 1952년 3월 초 군사고문단은 제8군사령부에 서울의 건빵 공장의 생산 수율을 일본 공장의 85% 수준에서 81% 수준으로 낮출필요가 있다고 보고했다. 군사고문단은 서울 건빵공장을 시찰했을때 굽는 과정에서 재료 낭비가 심하고, 필요 이상으로 건빵의 수분함량을 낮추기 위해 과하게 가열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서울 공장의 초도 계약 물량 1백만 봉지 생산 수율은 일본 공장의 85% 수준으로 이루어졌다. 제8군사령부는 서울 공장의 생산 수율을 낮추지 말도록 지시하는 한편, 군사고문단에 다음 사항을 권고했다.

-서울 공장의 오븐 온도를 순간적인 가열과 재료 손실을 막고, 제빵 표준을 맞출 수 있도록 할 것.
-건빵의 수분함량을 줄이고 덜 단단하게 만들고, 가능하다면 일본에서 생산한 제품과 비슷한 품질로 만들도록 할 것.
-생산 설비의 벨트를 교체할 것.
-건빵에 숱검댕이 묻지 않도록 화덕을 밀폐할 것14)

1952년 4월에 이르러서도 한국군용 건빵 생산은 희망한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다. 서울 공장의 하루 생산량은 평균 30,000봉지에 머물렀다. 군사고문단은 대구에 건설 중인 건빵 공장은 대규모의 작업이 필요해 8월 1일은 되어야 첫 생산이 가능할 것으로 예상했다. 유엔군사령부는 고위 인사들에게 건빵 생산 문제를 브리핑 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1951년 10월 부터 1952년 3월까지 미육군은 한국군에 비상식량으로 26,040,000봉지의 건빵을 제공했으며 달러화로 환산하면 1,939,685달러에 해당한다. 동시에 미국은 비슷한 양의 건빵을 생산할 수 있는 재료를 공급했다. 한국 정부는 건빵 공장 설립을 지체했다. 건빵 공장을 세워서 가동하기 전에는 건빵 완제품과 건빵 재료를 더 이상 지원하지 않겠다고 통보한 뒤에야 한국측은 조치를 취했다. 최근의 보고에 따르면 서울 공장의 건빵 생산은 한달에 488,000봉지라고 한다. 이를 위해 한국정부에 아홉달 동안 압력을 넣어야 했다.”15)

1952년 5월과 6월에 서울 건빵 공장은 하루 30,000봉지의 건빵을 생산하고 있었다. 한국군의 하루 건빵 수요의 3분의 1 수준이었다. 군사고문단은 대구에 새로 짓고 있는 건빵 공장은 8월 15일 쯤 되어야 생산을 시작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서울 공장은 1952년 2월 1차분 계약 물량 1,800,000봉지 생산을 완료했다. 6월 부터는 새로 계약한 1,077,000봉지에 대한 생산을 시작해 814,980봉지를 납품했다.16) 대구 건빵 공장은 1952년 7월 초도생산을 시작했다. 당초 예상한 8월 15일 보다 일정을 당긴 것이었다. 대구 공장의 하루 생산 예상치 30,000봉지에 서울 공장의 하루 평균 생산량 30,000봉지를 합치면 일선 부대의 장병들은 하루 평균 1/3봉지의 건빵을 배급받을 수 있었다.17) 한국육군 군수국은 군사고문단의 자문을 받아 공장들에 압박을 가했다. 그 결과 8월 부터 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9월에 이르러서는 서울 공장과 대구 공장의 생산량을 합쳐 하루 60,000봉지의 건빵이 생산되기 시작했다.18)

1952년 10월과 11월에는 서울과 대구 공장을 합친 생산량이 목표치에 미달하는 하루 평균 52,000봉지에 머물렀다. 건빵 생산은 줄어드는데 한국군 병력이 늘어나는 한편, 건빵 보급량을 늘리려는 계획이 수립되었기 때문에 군사고문단은 1952년 10월 영등포의 건빵 공장을 재가동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기 시작했다. 공장 복구에 필요한 건설 자재를 확보하고 이 공장에 살고 있던 사람들을 이주시키는 게 큰 문제였다.19)
군사고문단은 하루에 병사 1인당 건빵 1/3봉지를 배급하는 수준으로는 겨울철에 일선 장병들에 충분한 급양을 제공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또한 훈련병에게는 건빵 배급이 허가되어 있지 않았는데, 이들에게도 건빵을 배급해야 한다고 보았다. 훈련병들은 훈련소에 입소할 당시 충분한 급식을 받지 못하는 상태로 하루 평균 12~15시간의 격렬한 훈련을 받아야 했다. 그러니 훈련병에게는 칼로리와 영영가가 더 높은 급식을 하는게 옳았다. 군사고문단은 훈련병에게 건빵을 보급하면 체력을 증진하고 사기를 높이는데 도움이 되리라 보았다.20) 1952년 11월 제8군 사령부는 군사고문단과 한국 육군 군수국의 건의를 받아들여 극동군사령부에 한국에서 건빵 생산을 늘릴 수 있도록 재료를 더 공급해 줄 것을 요청했다. 건빵 생산을 늘려서 병사 1인당 건빵 배급량을 하루 평균 1/3봉지에서 1/2봉지로 늘린다는 계획이었다. 이 계획에 따르면 하루 평균 129,536봉지의 건빵이 필요했다. 이정도 양이면 일선부대의 205,740명에게 하루 평균 1/2봉지, 훈련병 80,000명에게 하루 평균 1/3봉지의 건빵을 배급할 수 있었다.21) 1952년 12월 육군부는 한국군에 대한 건빵 배급량 증대를 허가하고 하루에 130,000봉지를 생산할 수 있도록 지원하기로 했다. 이 인가량은 전방 부대 장병들이 하루 1/2봉지, 훈련병들은 하루 1/3봉지의 건빵을 배급받을 수 있는 양이었다. 하지만 한국 내의 건빵 생산은 한국 육군 군수국의 요구치를 미달하고 있었다. 1952년 12월 한국내의 건빵 생산량은 하루 평균 45,000봉지였다. 군사고문단은 영등포 공장 재건을 위한 건설자재 확보에 노력해 약간의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1953년 1월은 되어야 공장 부지에 있던 피난민들을 이주시킬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22) 영등포 공장의 생산 설비 복구는 만족스럽게 진행됐지만 건설 자재 확보가 문제였다. 1953년 1월 군사고문단의 조달 고문관은 일본을 방문해 극동육군사령부 조달과와 건설자재 확보 문제를 상의했다.23) 1953년 3월, 제8군 사령부는 이 문제를 연구한 뒤 극동육군사령부에 나중에 상환받는 조건으로 제8군 사령부가 보유한 건설자재를 제공하도록 허가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리고 건빵 공장이 추가로 건설될 때 까지 미국 고문관들이 한국군 취사병들을 훈련시켜 건빵 생산을 감독하도록 하는 방안을 제시했다.24)

1953년 4월, 미국정부는 한국군에 43,000달러에 상당하는 양의 건설자재를 공급해 영등포 건빵 공장을 복구하도록 했다. 공장 소유주와 한국군은 영등포 건빵 공장이 군납만을 한다는 계약을 체결했다. 영등포 공장의 건빵 생산은 1953년 5월에 시작될 것으로 예상되었다. 하지만 영등포 공장이 생산을 시작하더라도 한국군의 수요를 맞추기는 어려웠다. 당시 한국군의 하루 건빵 수요는 294,233봉지였다. 한국내에 있는 건빵 공장을 최대한 가동해도 최대 생산량은 하루 평균 210,000봉지에 불과할 것으로 예측되었다. 적절한 건빵 보급을 위해 부대 단위에서 임시변통의 조치를 계속 취할 필요가 있었다.25) 모든 한국군 부대는 기본적인 재료를 공급받아 국수, 경단, 건빵 등을 자체적으로 생산하는  조치를 취했다. 건빵을 생산한 부대들은 낡은 드럼통, 진흙, 점토 등을 동원해 오븐을 만들었다. 한국군의 일선 부대들은 건빵과 비슷한 수준의 칼로리를 가진 대체품을 생산할 수 있었다.26)

영등포 공장 복구에 필요한 마지막 건설자재는 1953년 5월 중순 전달되었다. 5월 말까지의 공장 복구 수준으로 봤을때 6월 10일 쯤이면 건빵 생산이 가능할 것으로 예상되었다.27) 1953년 5월 영등포 건빵 공장의 복구 공사는 거의 6개월째에 접어들었다. 군사고문단은 공장 복구가 완수되도록 여러 번에 걸쳐 개입했다. 군사고문단의 개입은 정치적인 문제를 불러올 위험이 있었다. 한국육군은 군수국 보급과에 공장소유주와 교섭할 권한을 주고 한국은행에 대출을 주선 했는데, 이것은 모두 군사고문단이 추가로 확인조치를 취해야 했다.28)

1953년 5월 초 제8군사령부, 군사고문단, 한국후방관구사령부(KCOMZ) 대표들은 한국군의 실제 건빵 수요량을 평가하기 위해 회의를 가졌다. 한국군은 병력 602,880명을 기준으로 병사 1인당 하루 평균 건빵 1/2봉지를 보급하기 위해서 일일 건빵 생산량을 130,000봉지에서 294,233봉지로 늘리기를 원했다. 한국군의 요구량은 미국 육군부가 하루 생산량을 130,000봉지로 승인했을때 고려한 변수와 일치하지 않았다. 육군부는 영등포 공장이 복구되어  재가동에 들어가면 건빵 생산량을 늘리는데 기여할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한국군 병력이 급속히 증강되면서 최저 보급 기준이 악화되자 한국군은 건빵을 더 많이 소비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한국군의 급식을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건빵을 통해 탄수화물을 더 공급할 필요는 없었다. 회의에 참석한 군의관은 영영학 관점에서 하루에 건빵 1/4봉지면 충분하고 1/3봉지는 과하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회의 참석자들은 육군부에서 파견한 조사단이 한국군 급식 소요를 영양학적으로 분석한 결과가 나올때 까지는 최종결정을 유보하고, 그대신 1952년 4월 기준 한국군 병력 525,000명에 맞춰 하루 1/3봉지의 건빵을 보급하기로 했다. 525,000명을 기준으로 하면 한국군의 하루 평균 건빵 수요는 175,000봉지였다. 육군부에서 허가한 양 보다 45,000봉지를 더 생산해야 했다.29) 1953년 7월 말에도 한국군의 일선 부대들은 서울, 대구, 영등포 공장에서 생산하는 건빵으로는 부족한 양을 보충하기 위해 자체적으로 건빵을 생산해야 했다.



주석

1) Comd Rept(S), HQ EUSAK, Jun 51, Narrative, p.118.
2) Comd Rept(S), HQ EUSAK, Jul 51, Narrative, p.97.
3) Comd Rept(S), HQ EUSAK, Sep 51, Narrative, pp.80~81.
4) Comd Rept(S), HQ EUSAK, Oct 51, Narrative, pp.78~79.
5) Comd Rept(S), HQ EUSAK, Nov 51, Narrative, pp.71~72.
6) Staff Sec Rept(S), QM G4 EUSAK, Dec 51, p.12; Comd Rept(S), HQ EUSAK, DEC 51, Narrative, pp.54~55.
7) Staff Sec Rept(S), QM G4 EUSAK, Dec 51, p.12; Comd Rept(S), HQ EUSAK, Dec 51, Narrative, pp.54~55.
8) Comd Rept(S), HQ KMAG, Jan 52, Narrative Summary, p.24.
9) Ibid.
10) Comd Rept(TS), GHQ UNC/FEC, Jan 52, p.104; Comd Rept(S), HQ EUSAK, Jan 52, Narrative, p.54.
11) Comd Rept(S), HQ EUSAK, Jan 52, Narratvie, p.55.
12) Comd Rept(S), HQ EUSAK, Feb 52, Narratvie, p.60.
13) Ibid.
14) Comd Rept(S), HQ EUSAK, Mar 52, Narratvie, p.54.
15)Comd Rept(S), HQ KMAG, Apr 52, Narratvie Summary, p.16; Briefing for VIP’s, HQ UNC, Apr 52, Sec. 16, p.7.
16) Staff Sec Repts(S), G4 KMAG, May 52, Summary, p.2; Jun 52, Summary, p.1; Comd Repts(S), HQ KMAG, Narrative Summaries, May 52, p.18; Jun 52, p.18.
17) Comd Rept(S), HQ KMAG, Jul 52, Narratvie Summary, p.18.
18) Comd Rept(S), HQ KMAG, Aug 52, Narratvie Summary, pp.15, 17.
19) Staff Sec Rept(S), G4 KMAG, Oct 52, Summary of Activities, p.1.
20) Staff Sec Rept(S), QM G4 EUSAK, Nov 52, p.46.
21) Comd Rept(S), HQ EUSAK, Nov 52, Narrative, pp.132~133.
22) Comd Rept(S), HQ EUSAK, Dec 52, Narrative, p.143; Staff Sec Rept(S), G4 KMAG, Dec 52, Summary of Activities, p.1.
23) Staff Sec Rept(S), G4 KMAG, Jan 53, Summary of Activities, p.1.
24) Comd Rept(S), HQ EUSAK, Mar 53, Narratvie, p.146; Staff Sec Rept(S), QM G4 EUSAK, Mar 53, p.23.
25) Comd Rept(S), HQ EUSAK, Apr 53, Narratvie, p.149; Staff Sec Rept(S), G4 KMAG, Apr 53, Summary of Activities, p.1.
26) Staff Sec Rept(S), QM G4 EUSAK, Mar 53, p.23.
27) Staff Sec Rept(S), G4 KMAG, May 53, Summary of Activities, p.2.
28) Staff Sec Rept(S), G4 KMAG, May 53, Summary of Activities, p.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