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블이 Einsatzgruppen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레이블이 Einsatzgruppen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2013년 5월 1일 수요일

The Rise and Fall of the third Reich : A History of Nazi Germany의 일본어 중역판

집안 정리를 위해 책을 나눠드리는 행사를 하고 있습니다. 이 와중에 책장을 정리하다가 1993년에 에디터 출판사에서 출간한 네권짜리 『제3제국의 흥망』을 발견했습니다. 이 책은 유명한 윌리엄 샤이러의 The Rise and Fall of the third Reich : A History of Nazi Germany의 일본어 중역판입니다. 저는 이 책을 중학생때 샀는데 윈스턴 처칠의 회고록 다음으로 읽은 제2차 세계대전에 관한 책 이었습니다. 히틀러의 유년기 부터 제3제국의 멸망까지를 다루는 통사로서 저자의 언론인적인 통찰력도 엿볼 수 있는 흥미로운 책 이었지요.

일본어 중역본이다 보니 지금 살펴보면 어색한 표기가 많이 보입니다. 특히 인명과 지명에서요. 아무래도 역자분께서 영어 원서는 전혀 참고하지 않으셨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부란덴부르크'처럼 간단한 독일어 표기법만 알아도 틀리지 않을 명칭을 일본어식으로 풀어놓은 것을 보면 말입니다.

그래도 책 정리를 하는 김에 다시 한번 훑어보니 제가 여기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2차 세계대전에 관심을 가졌던 초기에 읽은 책이고 내용도 풍부하니 말입니다. 특히 독일어 고유명사를 옮기는데 이 책의 영향이 컸습니다. 제가 Ersatzheer를 '보충군'으로, Wehrkreis를 '군관구'로, Einsatzgruppen을 '행동대'로 옮기게 된 건 전적으로 이 일본어 중역판의 영향이라 하겠습니다. Einsatzgruppen은 다른 용어가 필요할 듯 싶지만 보충군과 군관구는 지금 생각해도 꽤 적절한 번역 같습니다.

이제 이 책을 다른 분에게 드리기 위해 내놓으니 기분이 좀 묘하군요. 어느 분이 받으실지 모르겠지만 즐겁게 읽으셨으면 합니다.

2006년 12월 19일 화요일

폴란드 침공에 참가한 Einsatzgruppe 주요 지휘관들

독일의 Einsatzgruppen은 소련에서 깽판친 것이 꽤 유명하지만 처음 이들의 깽판에 피박을 본 곳은 폴란드 였습니다. 1939년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할 때는 Einsatzgruppe I 부터 z.b.V 까지 6개 Gruppe가 투입됐다고 합니다. Alexander B. Rossino의 Hitler strikes Poland에는 폴란드전에 참가한 Einsatzgruppen 지휘관들의 약력을 잘 정리해 놨는데 이게 꽤 흥미롭더군요. Rossino가 정리한 주요 지휘관들의 약력은 다음과 같습니다.

Einsatzgruppe I : SS-Brigadeführer Bruno Streckenbach

이 양반은 1902년 2월 7일 생으로 부친은 함부르크의 세관 공무원이었다고 합니다. 1919년 김나지움에 입학했지만 공부가 별로 재미 없었는지 자퇴하고 Freikorps에 자원해 함부르크의 사회주의자들을 열심히 때려잡았습니다. 모범적인 반공청년이었군요. Streckenbach가 소속된 Freikorps는 곧 정규군으로 흡수가 됐는데 군에서 제대한 뒤 이런 저런 자영업을 하다가 1930년 나치당에 가입했습니다. 1년 남짓 돌격대에 있다가 1931년 친위대로 옮겼고 1933년에는 SD에 들어갔습니다. 여기서 또다시 반공의 투사가 되어 이름을 날렸다고 하는 군요. 1939년에 Brigadeführer로 진급했습니다.

Einsatzkommando 1/I : SS-Sturmbahnführer Dr Ludwig Hahn

이 양반은 1908년 1월 23일 생으로 부친은 농부였습니다. 1930년 나치당에 가입해 1년 정도 돌격대원을 하다가 1931년 이 짓을 그만두고 대학에 진학했습니다. 1933년에는 다시 친위대에 가입했고 1935년 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같은해 6월 SD로 전속됐고 1937년에는 바이마르의 게슈타포 지휘관이 됩니다.

Einsatzkommando 2/I : SS- Sturmbahnführer Dr Bruno Müller

이 양반은 1905년 9월 13일 생으로 알자스 태생입니다. 부모가 골수 독일 민족주의자 인지라 1차대전이 끝나고 프랑스가 알자스를 다시 점령하자 독일로 이주합니다. 1925년에 착실하게 김나지움을 마친 뒤 취직을 했는데 자리가 잡힐만 하니 대공황.... 결국 이 양반 대학에 진학합니다. 올덴부그크 대학에서 법학박사 학위 취득. 1932년 친위대에 입대한 뒤 역시 SD로 전출됩니다.

Einsatzkommando 3/I : SS- Sturmbahnführer Dr Alfred Hasselberg

1908년 8월 30일생. 전형적인 독일 중산층 가정 출신으로 김나지움을 졸업한 뒤 군에 지원하지만 경쟁률이 높아 탈락. 1927년 대학에 진학해서 1935년 5월 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합니다. 박사과정 진학 이전에 지방법원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다는군요. 1935년 돌격대에 가입했다가 몇 달 뒤 다시 친위대에 자원합니다. 1936년 잠시 베를린의 게슈타포 본부에서 근무하다가 1937년부터 폼메른의 슈나이데뮐(Schneidemühl) 게슈타포 책임자로 근무합니다.

Einsatzkommando 4/I : SS- Obersturmbahnführer Dr Karl Brunner

1900년 7월 26일 생. 1917년 육군에 자원해 2급 철십자훈장을 수여 받았습니다. 1919년 제대한 뒤 다시 고등학교에 복학해서 학업을 하려는 찰나... 우익 학생들과 Freikorps에 가입해 빨갱이 사냥을 시작합니다. 역시 반공청년이로군요. 1923년까지 이렇게 자유의 투사를 하다가 대학에 진학합니다. 1927년에 학위를 취득한 뒤 1933년까지는 비교적 조용하게 보낸것으로 돼 있군요. 1933년 돌격대에 가입했다가 다시 1934년 SS로 옮겼고 여기서 SD 차출돼 1937년에는 뮌헨의 게슈타포 책임자가 됩니다. 1938년 Obersturmbahnführer로 진급했습니다.


Einsatzgruppe II : SS- Obersturmbahnführer Dr Emanuel Schaefer

1900년 4월 20일 생으로 실레지엔이 고향입니다. 부친이 작은 호텔을 운영해서 집안은 비교적 넉넉했던 모양입니다. 재수없게 전쟁 막판인 1918년에 징집됐지만 여기서 다시 인생역전으로 전투 한번 안하고 동원해제가 돼서 귀향합니다. 그런데 인생만사 새옹지마라 집에 돌아와보니 고향은 폴란드 민족주의자들이 국경을 넘어들어와 깽판을 치는지라 살벌해 졌습니다. 결국 이 양반도 우익 민병대에 가입해 폴란드인들과 싸우게 됩니다.
1926년 브레슬라우 대학에서 법학 석사를 받은 뒤 경찰에 취직합니다. 1933년 나치당에 가입하는데 이미 학위도 있는데다가 경찰 경력이 만만찮아 게슈타포에서 승승장구 합니다. 1936년 SD로 전출됐습니다.

Einsatzkommando 1/ II : SS- Sturmbahnführer Otto Sens

1898년 4월 14일 데사우(Dessau)에서 태어났습니다. 전쟁 중에는 해군에서 복무했으며 제대 뒤 Freikorps에서 활동했습니다. 1919년부터 실레지엔에서 폴란드인들과 피박터지게 싸웁니다. 1931년 SS에 입대했고 1934년에 SD로 전출됩니다.

Einsatzkommando 2/ II : SS- Sturmbahnführer Karl-Heinz Rux

1907년 9월 3일 서 프로이센 브롬버그 태생. 1936년 SS에 입대했는데 1938년에 무려 세번 진급해 순식간에 Sturmbahnführer가 됐습니다.

Einsatzgruppe III : SS- Obersturmbahnführer Dr Hans Fischer

1906년 8월 21일생. 1926년 예나 대학에 입학해서 1933년 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합니다. 1932년 친위대에 입대했으며 에어푸르트와 뮌스터의 게슈타포 책임자를 지냈습니다. 1938년 Obersturmbahnführer로 진급합니다.

Einsatzkommando 1/ III : SS-Hauptsturmführer Dr Wilhelm Scharpwinkel

1904년 7월 4일 반네-아이켈(Wanne-Eickel)에서 태어났습니다. 1933년 돌격대에 가입했습니다. 특이하게도 보험 조사원 경력이 있습니다. 3년간 했군요. 역시 게슈타포에서 능력을 인정받았습니다.

Einsatzkommando 2/ III : SS-Hauptsturmführer Dr Fritz Liphardt

1905년 5월 3일 슈테틴에서 판사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1924년 육군에 입대했으나 1926년 장교로 진급하지 못하고 전역됩니다. 결국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려 했는데 10학기가 넘도록 졸업을 못 했다는군요. 머리는 약간 별로였나 봅니다. 1933년 돌격대에 가입했다가 1936년 친위대로 옮깁니다. 차를 갈아타는게 늦은거로 봐서는 확실히 두뇌회전이 별로인 모양입니다. 어쨌건 박사학위는 취득했는데 언제인지는 안나오는군요. 1938년 베를린의 SD 본부로 전출됐다가 여기서 전쟁을 맞습니다.


Einsatzgruppe IV : SS-Brigadeführer Dr Lothar Beutel

이 아저씨는 1902년 5월 2일 라이프치히에서 태어났습니다. 나이가 어려서 전쟁에는 참전하지 못했지만 싹수가 노랬는지 17세부터 우익 단체에서 활동했습니다. 1921년 군에 입대해서 1923년에 제대했습니다. 대학 전공이 재미있는게 미학, 그리고 약학이라고 합니다. 박사학위를 약학으로 받은 유일한 Einsatzgruppe 지휘관입니다. 1931년 돌격대에 입대했으나 바로 그해 친위대로 옮깁니다. 1932년 SD로 전출됐고 1939년 4월 Brigadeführer로 진급합니다.

Einsatzkommando 1/IV : SS- Sturmbahnführer Helmut Bischoff

1908년 3월 1일 생으로 아버지는 정육점을 했던 것으로 돼 있습니다. 1930년 돌격대에 입대한 뒤 1935년 친위대로 옮겼고 1936년에는 SD로 전출됐습니다.

Einsatzkommando 2/IV : SS- Sturmbahnführer Dr Walter Hammer

1907sus 6월 30일 하겐 출생. 부친은 판사로 전형적인 중산층 집안 출신입니다. 1931년 법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1933년 주법원에서 근무하던 중 돌격대에 가입합니다. 1935년에는 게슈타포로 옮겼고 2년간 베를린 본부에서 근무한 뒤 1937년 에어푸르트의 게슈타포 책임자로 임명됩니다.


Einsatzgruppe V : SS-Standarteführer Ernst Paul Damzog

1882년 10월 30일 생으로 폴란드전에 참가한 Einsatzgruppe 지휘관 중 최고령자입니다. 1912년 경찰에 들어갔으며 1915년에는 육군에 입대해 헌병이 됩니다. 1933년 SS에 지원한 뒤 장기간의 경찰 경력을 인정받아 1934년 SD로 전출됩니다.

Einsatzkommando 1/V : SS- Sturmbahnführer Dr Heinz Graefe

1908년 7월 15일 생으로 아버지는 1914년 전사했습니다. 1928년 하이델베르크 대학에 진학해 법학을 전공했습니다. 1932년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작센의 법률사무소에 취직했습니다. 1937년 박사학위를 취득했습니다. 1933년에 돌격대에 들어갔다가 같은해 말 친위대로 옮겼고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에는 베를린에서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Einsatzkommando 2/V : SS- Sturmbahnführer Dr Robert Schefe

1909년 8월 23일 생으로 폴란드전에 참가한 주요 Einsatzgruppe 지휘관 중 최연소 였습니다. 1934년 친위대에 입대해 1935년 SD로 전출됐습니다. 이 사람의 경력이 흥미로운 점은 친위대에 들어 온 뒤 법학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는 점 입니다. 1936년 법학박사학위를 취득한 뒤 베를린의 게슈타포 본부에서 근무했습니다.

Einsatzgruppe z.b.V : SS-Obergruppenführer Udo von Woyrsch

주요 지휘관 중 유일한 귀족 출신으로 1895년 7월 24일 생입니다. 1차 대전당시 기병장교로 참전했으며 전후 Freikorps에 가입해 활동했습니다 1930년 친위대에 입대했는데 장교에다가 귀족출신이어서 그런지 진급이 빨랐습니다. 히믈러는 실레지아의 친위대를 책임지게 하기 위해서 직접 von Woyrsch를 직접 관리했던 모양입니다. 지역 친위대를 관리하다가 1936년 베를린으로 전출돼 히믈러의 참모진에 들어갑니다. 1938년에는 히믈러의 배려로 경찰 간부 교육과정을 이수합니다.

이 살인 전문가들을 보시면 일부 예외를 제외하면 중산층 이상에 고등 교육을 이수한 사회 엘리트층이라는 점 입니다. 이런 걸 보면 배운자들이 무서워 집니다.
하여간 이렇게 깡패집단인 친위대에 고등교육을 받은 지식인들이 많이 가담한 것을 1920년대 후반 독일 지식인 사회의 급속한 보수화가 원인이라고 보는 시각이 많습니다.

뭐, 상황이 다르긴 하지만 대한민국도 먹고 살기가 힘들어서 그런지 지식인계층의 보수화가 눈에 보이는 듯 합니다. 이제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은 히총통뿐?

2006년 4월 23일 일요일

소련군 포로들의 생 고생(재탕+약간 수정)

다들 잘 아는 이야기지만 독일군은 독소전쟁 첫 해인 1941년에 기록적인 대 승리를 연달아 거두면서 엄청난 숫자의 포로를 사로 잡았다. 전쟁 첫해의 붉은군대 수뇌부가 삽질을 많이 하다 보니 박살나지 않아도 될 부대들까지 무더기로 박살나 버렸고 그 덕에 독일군은 좀 지나치게 포로를 많이 잡았다. 독일군이 첫 6개월간 잡은 소련군 포로는 1차 대전 전 기간동안 잡은 러시아군 포로의 숫자보다도 훨씬 많았으니.

독일측의 기록(독일연방문서보관소 III W 805/5-7, 재인용)을 보면 1941년 6월부터 1941년 12월 말 까지 사로잡힌 소련군 포로의 숫자는 다음과 같다.

1941년 6월 22일~ 6월 30일 : 112,784명
1941년 7월 1일 ~ 7월 31일 : 701,246명
1941년 8월 1일 ~ 8월 31일 : 698,580명
1941년 9월 1일 ~ 9월 30일 : 989,203명
1941년 10월 1일 ~ 10월 31일 : 1,037,778명
1941년 11월 1일 ~ 11월 30일 : 291,934명
1941년 12월 1일 ~ 12월 31일 : 75,440명


확실히 좀 많이 잡혔다…

소련/러시아 측에서 주장하는 수치는 독일쪽 기록 보다는 다소 적은 편인데 그렇다 치더라도 기록적인(!) 수치인 것은 틀림 없다.

물론 독일측도 전쟁 이전부터 포로를 어떻게 대우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대략적인 계획이 있었던 모양이다. 소련 침공 직전인 1941년 6월 16일에 독일 국방군 최고 사령부는 동부전선에 투입될 집단군과 야전군 사령부에 포로 대우에 대한 지침을 하달했다고 한다. 이 지령에서는 비록 소련은 제네바 조약 가입국이 아니지만 소련군 포로에 대해서 제네바 조약이 금지하는 행위를 하지 말 것을 명시하고 있다. 물론 별도의 예외 조항을 첨가 하기는 했지만…

그러나 막상 전쟁이 터지고 위에 적힌 것과 같이 엄청난 숫자의 포로가 계속 잡히자 독일군은 포로를 처리하는데 엄청난 어려움을 겪었다. 당장 포로에게 먹일 만한 식량이 충분히 공급된 것도 아니고(진격하는 독일군 부대들도 보급 추진이 안 돼서 애를 먹었으니 포로를 고려하는건 애당초 어려운 문제였다.) 일반 독일인들이 러시아인들을 인종적으로 깔보는 경향도 있다보니 포로들에 대한 대우는 좋다고 하기엔 문제가 많았다. 독일측의 많은 지휘관들도 소련과의 전쟁은 “독일 문명”의 수호를 위한 전쟁으로 영국-프랑스 같은 “문명국가”와의 전쟁과는 다르다고 인식하고 있었으니 전쟁의 성격이 좀 별날 수 밖에 없었다.

일반 독일 지휘관들의 소련에 대한 인식을 잘 보여주는 예를 하나 들어보자. 다음은 전쟁 발발 직전인 1941년 5월 2일에 제 4기갑집단 사령관 회프너 상급대장이 예하 지휘관들에게 하달한 문서의 내용 중 일부다.

소련과의 전쟁은 독일 민족의 생존을 위한 투쟁에서 가장 중요한 싸움이다. 이 전쟁은 과거부터 이어져온 게르만 민족 대 슬라브족의 투쟁이며 유럽의 문명을 모스크바와 아시아적인 것들로부터 수호하기 위한 투쟁이고 유대-볼셰비즘을 막기 위한 투쟁이다.
이 싸움의 목적은 지금의 러시아 그 자체를 격멸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귀관들은) 이전보다 더욱 더 치열하게 싸워야 한다.(후략)


다들 잘 아시다 시피 개전 초반부터 소련군 포로들에 대한 대우는 좋지 않았다. 그리고 전투가 격화된 9-10월에 사로 잡힌 포로들은 그야말로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최악의 상태에 처하게 됐다. 7월에 독일 중부집단군 지구에서 생포된 소련 포로들이 후방으로 이송되는 동안 지급 받은 식사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날자 불명 : 수수 20 그램, 빵 100 그램
날자 불명 : 수수 100 그램
날자 불명 : 수수 50 그램, 빵 200 그램


이렇게 부실한 식사를 제공 받고 후방의 수용소로 강행군을 해야 했기 때문에 포로의 사망률은 지독하게 높았다. 1941년 10월 말에 가면 중부 집단군 지구의 포로 사망률은 하루 평균 2%에 달했다고 한다. 1941년 10월에 후방으로 이송 되지 못하고 벨로루시아 지역에 있던 포로 361,000명 중 99,000명 가량이 사망했다고 하니 소련군 포로들이 얼마나 혹독한 대우를 받았는지는 잘 아실 수 있을 게다.

소련 포로들에 대한 기본적인 식량 배급도 엉망이었으니 그 외의 다른 것들은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특히 더 고통 받은 것은 부상 당한 포로들 이었다. 독일측은 포로들에게 식량을 보급하는 것 조차 벅찼기 때문에 의료 지원은 더더욱 어려웠다. 1941년 8월에 우만에 세워진 소련군 포로 임시 수용소의 예를 한번 들어보자. 이곳에 수용된 약 15,000명에서 20,000명 정도의 부상당한 포로들은 의료 도구와 약품이 없어 치료를 못 한 채 방치되어 사망자가 많았다고 한다. 군의관이 있으면 뭐하나 치료할 의약품과 의료기구가 없는데…

부상당한 포로들은 노동도 시킬 수 없었기 때문에 쓸모없는 식충이(nutzlose Esser)로 취급 받았다. 포로 부상자들은 비 노동인력으로 분류되어 하루 평균 1,500칼로리의 식사만 지급 받도록 규정 되었기 때문에 사망률이 높았다. 끔찍하다.
소련 포로들과는 반대로 미국이나 영국군 포로의 대우는 그런대로 좋은 편 이었다고 한다. 독일은 1941년 9월에 부상이 심한 영국군 포로 1,500명을 중립국을 통해 이송했다고 한다. 거참. 하지만 중상을 입은 소련 포로들은 이런 대우를 받기는커녕 치료조차 못 받고 죽는 경우가 많았다. 심한 경우 부상당한 포로들을 의학 실험에 쓰기도 했다니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망할 녀석들.

그리고 덤으로 소련 포로들을 괴롭힌 것은 악명 높은 행동대(Einsatzgruppen)였다. 이미 행동대는 폴란드 전역에서 포로 및 민간인 학살을 훌륭히(?) 수행한 전력이 있었기에 대 소련전에서는 그 실력을 한층 더 발휘해서 소름끼치는 활약을 했다. 1941년 7월 17일에 독일 국방군 사령부 전쟁포로국(Abteilung Kriegsgefangene)은 소련군 포로들 중 “정치적으로 불온한자들(politisch untragbaren)”을 선별해서 행동대에게 이관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정치적으로 불온한자들에는 인텔리 계층, 광신적인 공산당원, 그리고 모든 유태인이 포함 되어 있었다.
1941년 가을 보리소프 수용소에 투입된 Sonderkommado 4a가 학살한 유대인 포로 1,109명 중 78명은 부상을 입은 포로들이었다고 한다. 망할 놈들 같으니. 한 독일인 연구자는 행동대의 무자비한 학살에 희생된 소련 전쟁 포로의 숫자를 약 50만 명 정도로 추산 하고 있기도 하다. 물론 좀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없진 않다.

독일측의 가혹한 포로 대우는 독일내에서 조차 말이 많았다. 1941년 9월에 카나리스 제독은 소련군 포로 처우에 대한 보고를 받고 국방군 총사령부에 소련군 포로의 처우 개선을 위한 조치를 취할 것을 요청했지만 별 성과가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비참한 대우를 받으며 폴란드와 독일 동부의 수용소에 도착한 포로들에겐 아직 고생이 끝난 게 아니었다. 독일의 전쟁 포로 수용에 대한 준비가 신통치 않았기 때문에 고생은 계속 됐다.
사실 독일 국방군 사령부는 1941년 초에 소련과의 전쟁에 대비해서 수용인원 3만에서 5만 명 정도의 인원을 수용할 포로 수용소 단지들을 건설한다는 계획은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전쟁이 터진 다음에 포로들이 쏟아져 들어올 때 까지 독일측이 해 놓은 것은 포로수용소 부지에 철조망 울타리를 쳐 놓는게 고작이었다고 한다. 포로들은 도착하자 마자 부실한 도구와 자재로 자신들이 지낼 막사를 만들어야 했다. 게다가 생포된 포로가 예상외로 너무 많았던 것이 결정적인 문제였다. 폴란드 지역에서는 교도소와 텅 빈 공장 단지를 수용소로 전용해야 할 정도로 시설이 부족했다.

대략 1941년 겨울 이 되자 독일측도 그럭저럭 독소전 초반의 어수선한 포로 관리를 정리하고 소련 포로에 대한 처우도 약간은 개선 되었다. 1941년 12월에 독일 국방군 사령부가 하달한 소련 포로에 대한 식량 배급 규정은 다음과 같았다.

소련 포로에 대한 일일 식량 배급 규정(단위 : 그램)

빵 214
고기 29
지방 19(주로 마가린)
치즈 9
설탕 32
마멀레이드 25
오트밀, 시리얼 21
감자 1214
야채 161
절인 양배추 39
분말 음료 4
소금 25

※참고로 소련 정부의 육체 노동자에 대한 1944년도 식량 배급 규정은 다음과 같았다.

소련 정부의 육체노동자 공식 배급량(단위 그램)

빵, 또는 밀가루 700(매일)
설탕 800(한달 치 배급)
곡물 1,500(한달 치 배급)
지방 600(한달 치 배급)
고기, 생선 2200(한달 치 배급)

하지만 소련 포로들이 규정된 식량을 받는 대가는 가혹한 중노동이었기 때문에 그다지 좋은 처우라고 하기도 그랬다. 소련 포로들에게 지급된 빵은 러시아빵(Russenbrot)라고 불렸는데 그 재료는 호밀 기울 50%, 사탕무 20%, 가루 20%, 셀러리가루 20%, 밀짚 가루 10%로 만들어 졌다고 한다. 재료만 봐서는 그다지 구미가 당기지 않는다.

중노동과 충분치 못한 식량 때문에 포로 수용소에서도 사망자가 많았다. 1944년 12월 독일측 기록에 따르면 독일의 포로수용소에 수용된 소련 포로 숫자는 다음과 같았다.

장교 47,980
군의관 1,265
부사관 22,595
사병 845,272
민간인 3,587

위의 통계를 보면 전쟁 기간 동안 잡힌 500만이 넘는 소련 포로 중 독일군에 자원한 150만 명을 빼더라도 수백만의 소련 포로가 목숨을 잃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쟁이 끝난 뒤 에는 거꾸로 수백만의 독일 포로가 소련에서 고생을 해야 했는데 독일 포로들은 짧게는 4년에서 길게는 10년까지 포로 생활을 해야 했다. 아마도 많은 독일 포로들은 수용소에서 소련을 건드린 건 큰 실수였다는 후회를 했을거다. 하여튼 전쟁은 남는장사가 되긴 어려운 비즈니스다.


이 글이 베낀 자료들.

John Barber and Mark Harrison, The Soviet Home Front 1941-1945
Joachim Hoffmann, Die Ostlegionen 1941-1943
Hartmut Schustereit, Vabanque : Hitlers Angriff auf die Sowjetunion 1941 als Versuch, durch den Sieg im Osten den Westen zu bezwingen
Christian Streit, Die Behandlung der sowjetischen Kriegsgefangenen und völkerrechtliche Probleme des Krieg gegen Sowjetunion
Christian Streit, Das Schicksal der verwundeten sowjetischen Kriegsgefangen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