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9월 5일 목요일

나토의 전진방어전략에 대한 체코슬로바키아군의 평가

지난번에 올렸던 “1960년대 독일연방군 제1군단의 방어계획”과 관련해서 포스팅을 하나 합니다. 잠깐 언급했던 1965년에 작성된 체코슬로바키아군 참모부의 정보평가입니다. 1960년대 초반 나토군의 전략 변화에 대해 평가한 내용인데 인용한 책의 해제에 따르면 소련에서 제공한 정보를 바탕으로 한 보고서라고 하는군요. 소련이 붕괴되고 동구권의 자료들이 공개되면서 냉전기 바르샤바조약기구에 대해서 파악할 수 있는 사료가 많아졌지만 러시아의 자료 공개는 여전히 제한적이기 때문에 과거 바르샤바조약기구에 속했던 소련 위성국들의 자료가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 점은 꽤 아쉬운 점입니다. 아무래도 소련 자료가 부족한 상태에서 바르샤바조약기구의 하위 동맹이었던 국가들의 부분적인 자료를 통해 전체를 재구성 해야 하니 말입니다.


이 보고서에서 눈에 띄는 것은 나토군의 전략 변화를 공세적인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점 입니다. 즉 독일 영내에서의 방어전 뿐만 아니라 전략적인 공세로 이행하기 위한 준비로서 “전진방어”를 채택했다고 보는 것 이지요. 그리고 2차세계대전의 경험을 반영해서 독일군에 대한 평가가 높은 편입니다.


영어 중역인 점을 감안하고 읽어 주십시오. 영어로 번역하면서 편집자가 생략한 부분이 많은게 유감입니다.


[...전략] 나토 사령부는 현재 사회주의 국가들과 자본주의 국가들의 군사력을 비교하는데 있어 전면적인 핵전쟁은 물론 제한적인 전쟁도 가능하다고 믿고 있다. 이에따라 제한전에 대한 이론을 정교하게 가다듬었는데 이 이론은 중부유럽전역의 연합군의 작전 준비태세, 특히 최근 수년간의 준비태세를 반영하고 있다.
[...중략] 제한전쟁은 두가지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한가지는 부여된 임무를 달성하기 위해서 충분한 병력을 신속하게 동원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다른 한가지 문제는 군사력을 운용하면서  제한전쟁이 전면전쟁으로 확대되는 것을 최대한 막아야 한다는 점이다. 서방은 유럽에 충분한 재래식 전력을 배치하지 못했기 때문에 앞으로 일어날 전쟁에서 제한적인 핵무기 사용을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다.
[...중략] 제한전 개념은 특히 미국이 선도하고 있는데 이 개념에서는 군사적인 목적과 정치적인 목적을 점진적으로 달성하는 동시에 전면적인 핵전쟁이 발생할 위험을 최소화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미국 수뇌부는 전면핵전쟁의 파괴력을 깨닫고 있기 때문이다.
나토에서는 국제적인 긴장이 단기간, 혹은 장기간 이어진 이후 전면 핵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유리한 군사적, 정치적 정세가 조성될 경우 갑작스럽게 발생할 수도 있다고 본다. 전면 핵전쟁이 발생할 수 있는 유리한 정세로는 정치적 갈등이 격화되거나 어느 한 진영의 지도국가가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군사력을 감축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는 것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또 다른 경우로는 단계적으로 특정한 제한조건을 넘어서면서 제한전쟁이 전면 핵전쟁으로 발전하는 경우를 꼽을 수 있을 것인데 이 경우는 가능성이 매우 높다. 또한 어느 한 참전국이 사용하는 수단에 전혀 다르게 대응하거나, 어떤 징후를 잘못 해석하거나, 사람의 실수나 장비의 오류 때문에 제한전쟁이 전면 핵전쟁으로 발전할 가능성도 있다. (현재) 나토군 수뇌부는 기습적인 전면 핵전쟁을 감행하는 계획에 우선 순위를 두고 있다. 
[...중략]  국가안보에 대한 직간접적인 위협에 직면해서 필요한 정치적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수단이 전쟁 말고는 없을 경우 충돌이 일어날 수 있다. 이 모호한 개념은 여전히 나토군 수뇌부, 특히 미국이 전면 핵전쟁이 일어날 수 밖에 없으며 나토가 선제공격을 해야 한다고 믿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현재의 전략개념인 이른바 “유연 대응flexible response”은 제한전, 그리고 유리한 상황이나 어쩔수 없는 막다른 상황에서 전면전을 수행하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 이 개념은 군사적인 관점과 정치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공격적이고, 해로우며 결과적으로 위험하다고 할 수 있다. 제한전 이론은 이론적인 측면, 특히 전쟁의 정치적, 군사적 목표, 병력과 군사적 수단의 활용, 그리고 목표의 선정이라는 관점에서 봤을때 명확하지 않은 요소로 가득차 있어서 일관성이 없다고 할 수 있다. 나토군 수뇌부는 평화시에도 양 진영의 강력한 군사력이 대치하고 있는 유럽 전역에서 제한전이 적절하게 수행될 수 있을지에 대해 확산하지 못하는 것이 분명하다. 제한전에서 핵무기를 사용하는 문제는 아직 완전히 해결되지 못했다. 나토군 수뇌부는 나토군이 심각한 손실을 입거나 요충지를 상실하게 될 경우, 혹은 재래식 전쟁으로 의도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할 수 없을 경우에 핵무기를 선제적으로 사용한다는 원칙을 세우고 있다. 이러한 원칙은 제한전 이론이 특히 중부유럽전역의 정세하에서 적용하기에는 문제가 많다는 점을 보여준다. [중략…]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과 전쟁 그 자체에 대한 생각이 점진적으로 변화하게 되면서 1963년에는 독일연방공화국과 다른 유럽내 나토 가맹국들의 주도로 ‘전진 방어Forward Defense’라는 새로운 개념이 채택되었다. 이 개념에서 다루고 있는 영역은 단지 독일연방공화국의 영토 뿐이다. 본질적으로 전진 방어 개념에는 유럽전역의 환경에 새로운 원칙을 정교하게 가다듬어 적용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 이 개념은  독일연방공화국의 영토를 지켜내는 한편 공세작전을 전개할 수 있는 조건을 조성하여 단기간 내에 전장을 독일민주공화국과 체코슬로바키아로 옮기기 위해서 독일연방공화국의 동부 국경에서 능동적인 전쟁을 수행하는 것이다. 

[...중략] 나토군의 작전 준비태세에 대한 전략 개념의 영향력. 
연합군의 작전적 준비태세를 보면 전면핵전쟁과 함께 나토군이 재래식 무기와 핵무기를 함께 사용하는 제한전쟁을 감행하는 것을 고려하는 전략 개념을 채택했음을 알 수 있다. [중략…] 
1960년 경까지 실시되었던 대규모의 훈련들은 동서양진영이 무장 충돌을 하게 된다면 어떠한 경우건 모든 종류의 핵무기를 대량으로 사용하는 것에 입각한 “대량보복” 개념에 따라 실시되었으며 병력 동원과 예비 전력의 집결에 필요한 시간을 벌고 반격으로 이행할 준비를 갖추기 위해 유연한 방어를 전개하였다. 핵공격을 가하는 수단은 공군이 유일했다.[중략…] 
이 무렵 실시된 훈련들은 모두 방어 작전을 위해 실시되었다. 이것은 그 당시에 존재하던 개념과 나토 지상군의 임무를 반영한 것이었다. 나토군의 전쟁 시나리오는 전쟁의 위협이 장기간 지속되는 상황을 가정했는데 이러한 상황에서는 군부대의 전투 대비태세를 완료할 시간을 벌 수 있을 것이며, 동원에 필요한 일부 조치를 이행할 수 있을 것이고 사전에 준비된 작전 조치를 준비할 수 있을 것이었다. 핵공격이라는 전략적 수단 중에서 공군이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므로 전쟁에서 완벽한 기습을 달성할 수 있는 가능성은 완전히 배제되었다.[중략…]
[...중략] 훈련 시나리오에서 “대량보복” 개념에 입각한 중요한 변화들은 “전진방어” 개념의 채택으로 폐기되었다. 이러한 훈련들은 유럽전역에서  최소한 일시적으로라도 제한적인 전쟁을 수행한다는 나토의 개념을 따른 것이었다. 교전은 방어작전으로서 짧은 기간 동안 수행되었다. 방어작전 단계에서는 재래식무기만이 사용되었다. 그러나 그 다음 단계에서는 작전-전술단위, 전술단위의 핵무기가 동원되었고 그 시기는 작전이 개시되고 수시간에서 수일이 지난 뒤였다. 나토군은 보통 적군이 선제 핵공격을 실시할 경우 핵무기를 사용했다.
이 시점에서 전쟁의 위협이 증대되는 기간이 훨씬 짧아졌다. 이때문에 전투 준비태세를 갖춰야 할 시간도 훨씬 짧아졌다. 전투 태세를 준비하고 완료하는데 필요한 시간이 줄어들었기 때문에 적이 아군의 준비 태세를 감지하는 것과 대응 수단을 마련하는 것을 회피할 수 있게 되었으며 작전적 기습을 가능하게 했다.
“전진방어”를 채택함으로써 군의 작전 편성은 1960년 이전의 군사 훈련에서 적용되었던 것과 비교하여 근본적으로 변화했으며 특히 중부 집단의 경우가 그러하다. [중략...] 적의 일선 제대는 두개의 야전군(미 제7군과 프랑스 제1군)으로 구성되었고 일선제대와는 별도로 1~2개 집단의 제2선 예비 제대가 편성되었다. 또 다른 중요한 차이점은 체코슬로바키아를 상대하는 제1선 제대에 프랑스군 집단(제3기계화사단, 제1기갑사단)이 배치된 것, 또는 독일군 제2군단이 프랑스 제1군의 작전 통제를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조치로 필센Plzeň-뉘른베르크Nürnberg와 린츠Linz-뮌헨München 축선의 중부 집단 우익이 크게 강화되었다.
이러한 개념상의 변화는 초기 전투 기간에 작전을 수행하는데도 반영되었다. 지금까지의 군사훈련을 보면 나토 연합군이 초기에는 기동 방어를 실시하고 있지만 갈수록 능동적으로 작전하고 있으며 전체 전투 주기가 (2~3일 정도로 ) 짧아졌다. 또한 후퇴 종심도 (최대 120km 정도로) 현저히 짧아졌다. 비록 반격으로 전환하는 것은 훈련하지 않았지만 이전 보다 더 빨리 반격을 하기 위해서 방어 단계를 강력한 역습으로 마무리 하고 있다.
[...중략] 1962년 이래로 중부유럽전구에서는 제한전 개념에 따라 훈련을 실시했다. 초기에는 1개 집단군 단위의 훈련(그랜드슬램1Grand Slam 1과 그랜드슬램2)에 적용되었으나 1963년 부터는 중부유럽전구 전체를 대상으로 한 훈련(Lion Ver)에, 1964년에는 유럽 전체를 대상으로 한 훈련(Fallex-64)에 적용되었다. 
나토군은 1964년 이전에는 적군이 먼저 핵무기를 사용할 경우에만 핵무기를 사용했다. 1964년 훈련에서는 나토군 방어선의 돌파구를 분쇄하거나 공세를 성공적으로 실시하기 위해 핵무기를 선제적으로 사용했다. 이에 대한 적군의 대응, 즉 보복을 위해 핵무기를 무제한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전면 핵전쟁으로 이어졌다.
[...중략] 1962년의 훈련에서는 전투 작전이 시작된 지 3일차(46시간)에 적을 저지하기 위해 국경에서 50~150km 떨어진 지역에서 사용되었다. 1963년에는 전투 작전이 시작되고 불과 10시간 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전력 격차를 줄이기 위해서 핵무기를 사용했다. 적군의 진격은 30~100km 정도에서 돈좌되었다. 체코슬로바키아의 경우 나토군의 성과는 무시해도 될 정도였다. 1964년 가을의 기동훈련에서 핵무기는 전쟁이 시작된 지 34시간차에 사용되었으며 이 시점에서 전방의 방어선이 돌파당해 적군은 국경에서 30~80km를 돌파해온 상태였다.
[...중략] 이같은 훈련을 보면 연합군은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으면 전투를 오랫동안 효과적으로 수행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원인은 전력 격차가 크기 때문이며, 이점은 재래식 전쟁이 시작된 초기에 더욱 분명히 드러날 것이다. 나토군 수뇌부는 전력격차가 크다는 점 때문에 제한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중요한 전제 조건으로 전면 핵전쟁을 감행할 수 있도록 군의 준비태세를 갖추려 하고 있다. 

[...중략] 요약, 결론.
[...중략] 각 국의 참모진 중에서 이것을 가장 잘 준비하고 있는 것은 독일에 주둔한 미군 참모부다. 독일주둔 미군은 지난 한해 동안 심혈을 기울여 준비를 했다. 미군은 연합 훈련에 참가하는 것 외에도 자체적으로 대규모의 훈련을 실시했다. 
서독군 참모부는 작전적 준비태세를 갖춘다는 목표를 달성했다. 서독군은 연합훈련을 진행하면서 연합군의 범주 내에서 임무를 달성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주었다. 서독군 참모부의 고급 장교들은 대부분 과거 히틀러 군대에서 풍부한 실전 경험을 쌓은 이들로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이들은 나이가 많기 때문에 얼마 안가 이것이 문제가 될 것이다. 독일군의 작전적 준비태세는 미육군과 거의 맞먹는다. 
프랑스군에서 가장 준비가 잘 된 참모진은 제1군의 참모진이다. 프랑스 본토에 주둔하고 있는 부대의 참모진은 준비태세는 최근에 와서야 강화되었다. 프랑스군은 오랫 동안의 식민지 전쟁으로 생긴 문제점을 없애고 미군과 동등한 수준으로 준비태세를 끌어올리는 것을 목표로 한다. 하지만 프랑스군 참모진은 특정한 상황하에서의 전투 행동에 필요한 조직과 운영에 있어서는 많은 경험을 갖추고 있다. 

영문번역 : Marian J. Kratochvil.
“Document No.28 : Warsaw Pact Intelligence on NATO’s Strategy and Combat Readiness, 1965”, Vojtech mastny and Malcolm Byrne(ed.), A Cardboard Castle? : An Inside History of the Warsaw Pact 1955~1991, (CEU Press, 2005) pp.170~1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