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성공보다는 실패에서 더 많은 것을 배운다는 말이 있다. 누가 한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꽤 그럴싸하게 들리는 건 사실이다.
전쟁질도 인간이 하는 짓이라 그런지 패전, 또는 실패한 작전에서 더 많은 교훈이 얻어지는 모양이다.
1차 대전 당시 영국군에겐 솜(Somme) 전투가 거기에 가장 잘 부합하는 사례가 아닐까 한다.
꽤 유명한 군사사가인 하우스(Jonathan M. House)는 1차대전 직전의 영국군에 대해서 “신무기로 무장했지만 무기를 다룰 교리는 가지지 못한”군대라고 혹평했다. 실제로 1차 대전 중반기 까지 영국군 장군들의 “무시무시”한 지휘를 보면 하우스의 지적이 꽤 타당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일례로 1914년 8월 26일에 벌어진 르 샤토(Le Cateau)전투에서 영국군 포병은 보병을 근접 지원하기 위해서 전선 가까이에 포진했다. 유감스럽게도 영국 포병은 독일군이 관측하기에 좋은 위치에 있었으며 후방에 있던 독일군의 중포는 영국 포병을 일방적으로 학살해 버렸다. 공황상태에 빠진 영국 포병들은 야포 42문중 25문을 내버리고 달아나 버렸다고 한다.
영국군 대규모 육군을 유지해 본 경험이 전무했으므로(심지어 나폴레옹 전쟁에서도) 1차대전과 같은 전쟁은 국가적으로 생소한 경험일 수 밖에 없었다.
그리피스(Paddy Griffith)는 영국육군이 1915년 까지도 제대로 된 공격교리가 없어 프랑스군의 교리를 도입했다고 지적하고 있다.
실제로 1차 대전 발발 이전 영국육군에서는 “현대전에서 화력의 증대로 밀집대형의 제파공격은 비효율적이다”라는 공감대는 형성돼 있었지만 “그러면 어떤 공격전술이 필요한가?”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논의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어쨌거나 1915년부터 영국 원정군은 집단군 규모로 증강됐고 항공기, 유무선 통신, 기관총 등 다양한 신기술을 써먹을 기회도 늘어나 자체적인 전술교리를 만들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16년 솜 전투 이전까지 영국육군의 공격전술은 적의 방어선을 정면으로 돌파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고 공격에서 보병중대의 소총화력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있었다.
결국 이런 느린 변화는 솜 전투의 끔찍한 피해로 이어졌다.
솜 전투의 참상은 여러 서적과 매체에서 다뤄졌기 때문에 잘 알려져 있다.
예를 들어 공격 첫날 29보병사단의 랭카셔 수발총 연대가 공격 선봉에 내세운 2개 중대는 공격개시선에서 불과 50미터도 전진하지 못 한 채 거의 전멸 당하는 등 수많은 공격부대가 말 그대로 개죽음을 당했다.
공격부대의 중앙에 배치된 3군단 역시 소름끼치는 피해를 입었다.
전쟁이전 전통을 자랑하는 정규연대들을 다수 가진 8사단의 경우 연대 당 손실이 최저 50%에서 최고 93%에 달했다. 제 2 미들섹스 연대는 공격 개시 수시간만에 연대병력의 93%가 죽거나 부상당하는 신기록(?)을 세웠다.
역시 솜 전투에서 유명한 일화라면 독일군의 기관총 1정이 영국군 1개 대대에 괴멸적인 피해를 입혔다는 이야기 일텐데 당시 삼각대에 얹은 중기관총 1정은 양호한 시계만 확보되면 정면 2500야드(대충 2.3km 정도?) 정도의 범위를 방어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미 독일군은 전쟁 초기인 1914년 말-1915년 초에 기관총을 중심으로 한 방어전술을 확립하고 있었고 영국육군 역시 1915년의 Loos전투에서 독일군의 기관총 운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솜 전투이전까지 이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전술이 나타나지 못했다. 참 희한한 일이다.
결과적으로 영국육군은 솜 전투 첫날인 1916년 7월 1일 전사자 2만을 포함해 5만7천의 사상자를 냈고 11월에 백해무익한 대공세가 끝날 무렵에는 43만2천명의 사상자를 냈다.
솜 전투에서 발생한 막대한 피해는 영국군에 큰 충격을 줬고 이후의 공격전술을 크게 변화 시켰다.
먼저 포병과 보병의 유기적인 협동이 강조됐다.
2차대전 당시의 영국군도 마찬가지 혹평을 들었지만 1916년 이전 영국군은 병종간 협동작전이 매우 서툴렀으며 이것은 솜 전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포병은 유동적으로 변하는 전선의 상황에 따라 보병에 화력지원을 제공하지 못 했고 독일군의 거점을 제압하는데도 비효율적이라는 악평을 들었다.
또한 소규모 보병전술에서는 소총분대의 지원을 받는 수류탄 돌격조가 선봉에 서고 총류탄 발사기의 지원을 받는 루이스 경기관총이 소대화력의 중심이 되는 공격 전술로 변화했다.
※여단급 3인치 박격포는 공격부대가 운용하기엔 좀 거추장스러운 물건이라 좀 센 펀치가 필요할 땐 총류탄 발사기가 유용하게 사용됐다고 한다.
또 화력 운용의 융통성과 함께 독일군의 거점을 마주치면 우회공격으로 제압하는 등 뼈저린 손실로 배운 교훈을 잘 살리게 됐다고 한다.
쓰라린 교훈을 얻기 전에 좋은 방법을 찿는 것은 누구나 원하는 일 이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일이 잘 풀리는 사례가 별로 없는 듯 싶다.
영국육군 역시 솜 전투에서 아주 쓰디쓴 교훈을 얻었고 그 결과 1917년 이후에는 독일군에 대해 전술적으로 대응할 만한 수준에 도달하게 됐다.
수십만명의 희생을 대가로 교훈을 얻은 셈이다.
참고로, 솜 전투당시 영국육군의 사단별 손실은 다음과 같았다.
(자료 : Robin Rrior and Trevor Wilson, The Somme, Yale University Press, 300-301p)
30보병사단 : 17374명
18보병사단 : 13323명
21보병사단 : 13044명
5보병사단 : 12667명
17보병사단 : 12613명
56보병사단 : 12333명
34보병사단 : 11239명
25보병사단 : 11239명
12보병사단 : 11089명
33보병사단 : 10787명
9보병사단 : 10538명
4보병사단 : 10496명
1보병사단 : 10451명
3보병사단 : 10377명
7보병사단 : 10237명
19보병사단 : 9830명
뉴질랜드사단 : 9408명
8보병사단 : 8969명
11보병사단 : 8954명
49보병사단 : 8461명
오스트레일리아 2사단 : 8113명
50보병사단 : 7902명
14보병사단 : 7643명
55보병사단 : 7624명
47보병사단 : 7560명
오스트레일리아 4사단 : 7248명
39보병사단 : 7215명
근위사단 : 7204명
6보병사단 : 6966명
캐나다 2사단 : 6876명
20보병사단 : 6854명
캐나다 1사단 : 6555명
23보병사단 : 6282명
51보병사단 : 6202명
24보병사단 : 6119명
48보병사단 : 6115명
41보병사단 : 5928명
31보병사단 : 5902명
36보병사단 : 5482명
32보병사단 : 5272명
15보병사단 : 4877명
35보병사단 : 4663명
16보병사단 : 4330명
캐나다 4사단 : 4311명
오스트레일리아 1사단 : 7883명
2보병사단 : 7856명
29보병사단 : 7703명
캐나다 1사단 : 7469명
63보병사단 : 4075명
38보병사단 : 3876명
46보병사단 : 2648명
37보병사단 : 2000명
솜 전투당시 영국군 보병사단들의 규모는 10,000-12,000명 수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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