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계적 대인배 푸틴좌의 한 말씀(sonnet)
※ 오늘(2월 26일) sonnet님이 쓰신 글을 보니 제가 앞 부분에서 심각한 오타를 냈습니다. 잘못 쓴 부분을 수정했습니다.
우리 같은 거스름돈 입장에서는 불쾌하지만 사실 저게 살벌하고 정나미 떨어지는 국제정치의 현실이지요.
발트 3국이 거스름 돈이라면 동유럽은 부수입 정도는 될 것입니다. 1994년에 출간된 Origins of the Cold War : an international history에 실려 있는 Charles Gati의 Hegemony and Repression : Eastern에는 이 부수입 분배를 둘러싼 처칠과 스탈린이라는 두 대인배의 거래에 대해 실려있습니다.
1944년 10월, 처칠은 전후 동유럽 5개국의 처리 문제를 결정하기 위해 모스크바를 방문했습니다. 첫 번째 회담은 10월 9일 처칠과 이든, 스탈린과 몰로토프 참석하에 치러졌는데 이날 회의에서 처칠이 소련측에 제시한 세력 분할안은 다음과 같았다고 합니다.
헝가리 – 소련 50%, 영국 50%
유고슬라비아 – 소련 50%, 영국 50%
불가리아 – 소련 75%, 영국 25%
루마니아 – 소련 90%, 영국 10%
그리스 – 소련 10%, 영국 90%
처칠의 첫번째 제안은 그리스에서 영국의 압도적 우위를 달성하는 대신 불가리아와 루마니아에서는 소련의 우위를 인정하고 헝가리, 그리고 유고슬라비아는 적당히 세력 균형을 유지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 이었습니다. 사실 이때는 소련군이 루마니아와 불가리아를 휩쓸고 헝가리에 육박하던 시점이었고 영국은 발칸반도에 별다른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지요. 스탈린은 처칠의 제안에 대해서 큰 이견은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10월 10일에는 이든과 몰로토프간에 회담이 이뤄 집니다. 그런데 이든은 루마니아에서 소련의 지배적 위치를 인정하게 된다면 헝가리와 불가리아에서는 영국이 조금 더 많은 지분을 확보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몰로토프 또한 이날 좀 더 센 제안을 내놓습니다. 이날 몰로토프가 처음 제시한 분할안은 다음과 같았다고 합니다.
헝가리 – 소련 50%, 영국 50%
유고슬라비아 – 소련 50%, 영국 50%
불가리아 – 소련 90%, 영국 10%
루마니아 – 소련 90%, 영국 10%
그리스 – 소련 10%, 영국 90%
그리고 이든의 제안을 접한 뒤 다시 다음과 같이 제안을 수정합니다.
헝가리 – 소련 75%, 영국 25%
유고슬라비아 – 소련 75%, 영국 25%
불가리아 – 소련 75%, 영국 25%
루마니아 – 소련 90%, 영국 10%
그리스 – 소련 10%, 영국 90%
몰로토프는 이날 두 번 더 수정안을 제안하는데 헝가리, 유고슬라비아, 불가리아가 협상 대상이었습니다. 몰로토프가 세 번째 수정안에서 제시한 세 국가에 대한 세력분할안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헝가리 – 소련 75%, 영국 25%
유고슬라비아 – 소련 60%, 영국 40%
불가리아 – 소련 75%, 영국 25%
이든이 여기에 대해 다시 내놓은 안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헝가리 – 소련 75%, 영국 25%
유고슬라비아 – 소련 50%, 영국 50%
불가리아 – 소련 80%, 영국 20%
몰로토프는 이든의 수정안에서 헝가리 부분은 동의하고 유고슬라비아와 불가리아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변경안을 제시합니다.
유고슬라비아 – 소련 50%, 영국 50%
불가리아 – 소련 90%, 영국 10%
그리고 다음날인 10월 11일, 몰로토프가 마지막으로 제안한 것은 유고슬라비아에 대한 영국측의 요구를 수용하는 것 이었습니다. 몰로토프의 최종 수정안은 영국측도 암묵적으로 동의한 것으로 보입니다. 몰로토프의 최종안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헝가리 – 소련 80%, 영국 20%
유고슬라비아 – 소련 50%, 영국 50%
불가리아 – 소련 80%, 영국 20%
루마니아 – 소련 90%, 영국 10%
그리스 – 소련 10%, 영국 90%
전쟁이 끝난 뒤 유고슬라비아는 제멋대로의 길을 걸었고 헝가리, 불가리아, 루마니아는 소련의 지분이 100%가 돼 버리고 그리스는 거꾸로가 돼 버립니다.
결과가 어찌 됐건 도박판의 판돈 신세를 면한 것은 유고슬라비아 정도였고 나머지 네 나라는 그 운명을 바꾸지 못 합니다. 티토는 개인적으로는 별로 좋아하지 않은 인물이지만 유고슬라비아가 강대국의 노름판에서 판돈으로 전락하는 것은 막았으니 그럭저럭 쓸만한 지도자 인 것은 부인할 수 없지 않나 싶습니다.
아 정말 강대국식 지도에 줄긋기 외교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군요. 감동입니다.
답글삭제어찌되었든 유고연방 해체 후의 개판을 보면 그런 나라를 묶어놓은 티토가 걸출한 인물인 건 맞는 것 같습니다.
지도에 줄긋기라면 차라리 이해하기가 쉬울 텐데, 무슨 기준으로 영향력을 90%, 10% 식으로 산출하자고 했던 건지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원조액이나 주둔 병력일 성 싶지도 않고... 친러/영파 정부 각료의 머릿수쯤 될까요?
답글삭제티토가 걸출한 인물이긴 한데 그 사후에는...(그래서 더 커보이는 건지도요.)
답글삭제그나저나 체코슬로바키아는 어떻게 되는걸까요? 불로소득?
이 회견의 주된 목적은 지중해로부터 소련을 배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독 그리스에 대한 영국의 지분이 높았던 것이고요. 스탈린과의 합의가 있었던 덕분에 영국은 그리스 공산주의자들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영국 군대를 투입할 수 있었고, 이탈리아에서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겠다는 스탈린의 협력도 얻을 수가 있었습니다.
답글삭제하지만 처칠에게는 그정도 일을 하는 것만으로도 역부족이었고, 폴란드나 체코까지 구해낼 능력은 없었죠. 미국이 적극적으로 유럽에 개입했다면 혹 모르지만, 그러지 않았으니까요.
sonnet님 // 저런걸 읽을 때 마다 남의 이야기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답글삭제하얀까마귀님 // 생각하신 대로 정부 구성 비율에 기타 다른 요소를 포함한 것 인데 정부 구성말고는 저도 약간 이해가 안가더군요.
행인님 // 체코슬로바키아는 보너스입니다.
슈타인호프님 // 맞습니다. 영국인들은 미국이 이 지역에 무관심한데 대해 아주 갑갑해 했다지요.
지분이라는 단어에서 추론되듯이 설령 미국이 적극적으로 나섰다고 해도 동유럽을 구하긴 힘들었을 것 같습니다. 44년 여름부터 이미 해당지역에 대한 '정치적 영향력 확대'의 과정으로 달려가던 소련이나 이를 확인할 수 있을만한 현지정보력을 보유한 영국과는 달리 미국은 '의지'도 없었지만 기초적인 정당 조사도 제대로 해놓지 못했을 정도로 행동에 나설만한 기반이 없었다고 합니다.
답글삭제다종족문제에 있어 티토를 뛰어난 인물이라고 보는 시각이 대다수인듯한데 티토가 진짜 뛰어난 인물이라면 자신이 아닌 누가 해먹더라도 계속유지해나갈수 있게끔 해주는 시스템(이라고 해야할까요?)같은것들을 구축해두었어야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입니다.
답글삭제저것이 바로 홍건적 협상 스타일의 진수로군요!
답글삭제사실 유고는 답이 없지요.
티토 스스로도 크로아티아인이라는 약점이 있으니.
결국 티토조차도 유고의 덫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나마 티토야 한 일이 있으니 다들 인정하지만.
나머지는 아마 티토가 예수를 후계자로 지명한들
사후 내전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티토가 살아있는 동안만이라도 유고슬라비아가 유지되었다는 점에서 정녕 티토는 위대한 겁니다.
답글삭제라피에사쥬님 // 동유럽 문제는 일본에 대한 미국과 소련의 나와바리 조정을 뒤집은 것과 유사한게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답글삭제아텐보로님 // 발칸반도에서 가장 콩가루인 지역을 그럭 저럭 통합해서 끌고간 것만해도 대단하지요.
티앙팡님 // 믿음이 부족하시군요. 주님의 역사에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슈타인호프님 // 네. 저도 동의합니다.
주님은 주님이기 이전에 유태인인데요?(히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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