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이러한 스탈린의 혐오감은 소련의 언론들에 다소 기묘한 방식으로 표현되었습니다. 바로 ‘무시’ 였습니다.
프라우다와 이즈베스티야는 1933년 1월 30일에 있었던 히틀러의 집권을 1면에 싣지 않고 그 대신 다른 면에 짤막한 단신으로 처리했다. 두 신문은 같은 해 2월 제국의회 방화사건이 일어나자 이것을 대서특필했고 또 히틀러에게 절대권력을 안겨준 3월의 수권법(授權法, Ermächtigungsgesetz) 통과에 대해서는 더 많은 비중을 뒀으나 얼마 있지 않아 이 사건들은 ‘제1차 소연방 집단농장 돌격노동자 대회’의 개최 소식에 밀려 지면에서 사라져버렸다. 프라우다는 독일에서 공산당원에 대해 자행되는 테러에 대해서는 자주 보도했지만 독일의 정치적 상황 변화에 대해서는 몇 달 동안 한 줄의 사설도 내지 않았다. 비록 히틀러의 등장으로 서구의 지식인들 중 일부가 소련을 민주주의의 보루로 인식하기 시작했지만 소련 자체의 인식에는 그다지 큰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Jeffrey Brooks, 『Thank you, Comrade Stalin! : Soviet Public Culture from Revolution to Cold War』,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00, 2001, p.151
물론 1939년의 독소불가침 조약으로 독일과 히틀러에 대한 태도는 갑자기 돌변했지만 오래 지속될 관계는 아니었습니다. 결국 레닌과 트로츠키에 이어 ‘스탈린의 세 번째 스승(라진스키의 표현을 빌리자면)’ 히틀러는 스탈린에게 패배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집니다.
아. 그러나 서쪽의 호적수가 사라지자 이번에는 동방에서 새로운 골칫거리가 등장했습니다.
그는 바로.
네. 스탈린은 마오 주석에게도 히총통과 마찬가지의 혐오감을 나타냈습니다. 그러니 소련의 언론들이 마오 주석을 어떻게 취급했을지는 다들 짐작하시겠지요.
이렇게 중국혁명에 대한 찬사가 이어지고 있었지만 거기에는 한 가지 빠진 것이 있었다. - 소련 언론들은 마오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을 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관영지인 ‘노보예 브레먀(Новое Время)’는 마오에 대해 단지 혁명의 지도자라고만 언급했을 뿐 그가 제2차 전원회의에서 채택된 여러 계획들의 창시자라는 점과 그가 맑스-레닌주의에 기여한 점을 모두 무시했다. 그리고 뒤에 중화인민공화국이 공식적으로 수립되었을 때 ‘노보예 브레먀’의 사설은 마오의 이름 자체를 언급하지 않았다; 전원회의에 대해서는 스탈린의 “천재적인 예언”이 실현된 것이라고 지적했을 뿐이다. 이와 비교했을 때 프라우다의 사설은 마오에 대해 단 한번 언급했으나 그것도 마오의 발언 중 중국혁명의 승리는 소련의 영향과 원조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것을 인용하기 위한 것 이었다.
Sergei N. Goncharov, John W. Lewis, Xue Litai, 『Uncertain Partners : Stalin, Mao, and the Korean War』, Stanford University Press, 1993, p.46
그렇습니다. 대인배가 갖춰야 할 품성에는 쪼잔함이 필수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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