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주의 시대의 절정기에 있었던 이탈리아-이디오피아 전쟁과 러일전쟁은 백인의 인종적 우월성에 대한 믿음을 뒤흔드는 사건이었습니다. 특히 먼저 있었던 이탈리아-이디오피아 전쟁은 아프리카 전역이 식민지로 전락하던 무렵 유색인종이 처음으로 유럽의 '백인' 군대를 격파했다는 점에서 전세계적으로 엄청난 충격을 안겼습니다. 백인 군대가 '검둥이'들에게 박살났다는 충격적인 소식이 미국에 전해지자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하는군요.
아두와 전투의 소식이 미국 전역을 뒤흔들기 하루 전날, 애틀랜타 컨스티튜션(Atlanta Constitution)이라는 신문은 아프리카로의 귀환 운동을 전개하던 300명의 흑인이 3월 1일 조지아주의 사바나를 출발했다는 소식을 조롱하는 기사를 실었다. 이 기사는 아프리카는 모두 유럽인에 의해 분할될 것이기에 아프리카인들은 주권을 유지할 수 없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남부 백인들의 입장에서는) 3월 1일까지만 하더라도 이런 주장을 전개하는게 이치에 맞았을 것이다. 그러나 3월 1일 이후로는 그러한 신념이 흔들리게 되었다.
애틀랜타 컨스티튜션의 논조는 짐 크로우(Jim Crow) 법안과 유럽의 제국주의를 옹호하던 당대의 기류와도 연결되어 있었다. 1896년의 플레시 대 퍼거슨 사건에서 미국 대법원은 짐 크로우 법안의 기저에 깔린 "분리하되 평등하다"는 주장이 미국 헌법에 합치된다는 결정을 내렸다. 애틀란타에서 발행되던 신문들은 이른바 '대서양을 아우르는 지배권'이라는 원대한 구상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즉 아프리카의 미래는 유럽의 통치에 따라 결정될 것이며 이와 마찬가지로 미국 또한 유럽계 미국인의 통치에 따라 움직이게 될 것이라는 논리였다.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은 미국에 남건 아프리카로 돌아가건 간에 유럽인에 의해 지배받는 암울한 미래만 있을 뿐이라고 전망했다. 즉 짐 크로우 법안은 제국주의의 절정기에 팽배한 인종적 우월성에서 나온 것이었다. 제국주의는 짐 크로우 법안의 친척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두와 전투는 애틀랜타 컨스티튜션의 기사에서 아프리카인의 열등성을 주장할 수 있도록 했던 신념을 산산조각 내 버렸다. 최소한 전투의 소식이 알려진 직후에는 말이다. 3월 4일의 머릿기사는 이디오피아인들이 3천명의 이탈리아군을 죽였다는 내용이었다. 또한 이탈리아군 지휘관 오레스테 바라티에리(Oreste Baratieri)가 패배의 수치심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했다는 오보도 실렸다. 이후에 실린 기사들도 아프리카에 대한 엄청난 무지와 심리적인 충격 때문에 오류 투성이었다. "이탈리아의 불운"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는 이디오피아가 아프리카 남부에 있다고 썼으며, 이탈리아가 실패한 것이 이디오피아의 막강한 군사력 때문이라고 암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애틀랜타 컨스티튜션은 이디오피아인들이 검둥이가 맞냐는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아비시니아인에 대한 의문"이라는 기사에서는 아프리카인의 인종적 특성에 대해 황당무계한 이야기를 늘어놓으면서 독자들에게 이디오피아인들의 특성에 대해 면밀히 관찰하라는 제언을 했다. 이 기사는 이디오피아인에게서는 "호텐토트 인종에게서 나타나는 평발과 펑퍼짐한 코"를 찾아볼 수 없으므로 콩고에 사는 아프리카인들과 동일하다고 볼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사실 이디오피아인들은 완벽한 흑인이 아니라 "페니키아인을 조상으로 두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런 시각은 애틀랜타 컨스티튜션에 실린 삽화들에도 반영됐다. 이 신문에 처음 실린 메넬리크의 초상화는 그를 1895년에 즉위한 러시아의 짜르 니콜라이 2세와 놀라우리 만치 비슷하게 묘사하고 있었다.
아도와 전투에서 이디오피아인들이 거둔 승리의 규모가 자세히 알려지면서 미국인들은 더 큰 혼란에 빠졌다. 하지만 남부의 언론들만 메넬리크가 백인이라고 주장한 것은 아니었다. 뉴욕 월드(New York World)지도 기사에서 비슷한 주장을 했으며 시카고 트리뷴(Chicago Tribune)도 다음날 뉴욕 월드의 기사를 전제했다. 미국 남부와 중서부, 그리고 대서양 지역의 주요 언론들은 모두 이디오피아인이 백인이라는 기사를 실었다. 뉴욕 월드는 "아비시니아인의 대부분은 코카서스 인종이다"라고 쓰고 여기에 덧붙여 "이디오피아인들은 외모가 수려하고 멋지다"고 주장했다.
Raymond Jonas, The Battle of Adwa: African Victory in the Age of Empire, (2011, Harvard University Press), pp.268~269.
백인만 사람이라고 주장한건 좀 오래됐죠. 심지어 철인이라 불린 볼테르도 '저 검은 피부 안에 우리와 같은 영혼을 신께서 넣어주시리 없다.'는 식으로 말했으니... 근데 십자군중에는 흑인도 있던게 함정.
답글삭제개인적으로 이탈리아를 좋아하긴 합니다만, 솔직히 1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은 참 무슨 근거없는 자신감으로 전쟁했는지 모르겠어요. 사실 털어놓고 보면 무장의 질적인 면에서도 큰 우위가 있다고 말하기 힘들었던 상태였는데 지형 파악도 제대로 안하고 7배가 넘는 병력을 깨려고 달려들다니...
답글삭제뭐, 일단 1895~96년 초의 분쟁에서 메넬리크가 승리를 거두면서 이탈리아를 지지하던 부족들이 이탈하고 있었기 때문에 바라티에리는 결전을 시도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탈리아군이 패배했다는 소식이 퍼지면서 이탈리아의 식민통치 자체에 위협이 되고 있었으니 본국에서 증원병력이 오는대로 서둘러 결전을 벌일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삭제생각 외로 정치적으로 심하게 몰려있었나 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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