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트위터에서 한국군의 건빵 썰을 푼 김에 관련된 문헌을 하나 번역해 봅니다. 아래의 내용은 1958년 5월에 Kenneth W. Myers가 작성한 KMAG’s Wartime Experiences: 11 July 1951 to 27 July 1953의 275~289쪽을 번역한 것 입니다. 해당 연구보고서는 총 3개의 폴더로 나뉘어 태평양사령부 군사실 문서군인 RG550 Records of United States Army Pacific, Entry 2A1-2AA1의 85번 상자와 86번 상자에 나뉘어 있습니다. 건빵 외에 통조림 생산에 관한 내용도 있는데 그건 나중에 번역하도록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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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
1951년 6월 제8군사령부 군수참모처와 군사고문단은 극동군사령부에 9월 15일 부로 일본에서 한국군의 J형 전투식량과 건빵을 생산하는 것을 중단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한국내의 자원을 최대한 활용한다는 정책 기조에 맞춰 전투식량과 건빵은 한국의 민간 공장을 활용하거나 부산에 공장을 지어서 생산하는게 옳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제8군사령부와 군사고문단은 1951년 9월까지는 한국 내에서 건빵 재료와 전투식량에 들어갈 통조림 및 기타 부식 재료를 조달하는게 가능하다고 판단했다.1)
1951년 7월 극동군사령부는 일본에서 생산한 한국군용 건빵 재고가 10월 20일까지 충분한 분량이며, 전투식량은 10월 31일까지 충분한 분량이라고 보고했다. 또한 한국에서 건빵과 전투식량을 생산할 수 있을때 까지 소비할 건빵 재고를 일본에서 조금 더 생산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한국에서의 건빵 생산은 원래 계획한 9월 15일 보다 늦은 10월 1일 부터 시작할 계획이었다.2)
그러나 1951년 9월이 되자 한국 내에서 건빵과 비상전투식량을 생산하는 계획을 좀 더 연기해야 했다. 부산의 건빵 공장은 건축 자재 조달이 늦어져 1951년 12월 말이나 1952년 1월은 되어야 생산을 시작할 수 있을 것으로 예측되었다. 그리고 한국 정부가 전투 식량의 주 메뉴인 생산 통조림 생산에 필요한 재원을 조달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제8군사령관은 한국 국방부장관에게 서신을 보내 건빵 공장 가동과 전투식량 생산 계획에 필요한 재원을 마련하겠다는 확답을 요구했다. 한국 내에서의 생산이 지연되고 있었지만 제8군사령부는 한국에서 생산을 시작하기 전에 일본에서 한국군용 건빵과 전투식량을 계속 생산할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다. 재고량과 일본에 발주한 잔여 물량을 합치면 건빵 5개월 치와 전투식량 2개월 분이 있었다.3)
1951년 10월 초 한국 육군참모총장은 제8군 사령관에게 일본에서 건빵과 전투식량 6개월 치를 추가로 생산해 달라고 요청했다. 제8군 사령부는 한국 국방부장관에게 보낸 서신에서 부산의 건빵 공장을 최대한 빨리 가동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부산의 건빵 공장을 수리하는데 필요한 자재에 소요되는 예산은 한국민간구호계획(Civilian Relief in Korea, CRIK) 기금에서 유용하도록 제안했다. 일본에서 조달한 건빵 재료가 한국에 도착했지만 부산 건빵 공장의 생산 예정일은 확실치 않았다.4)
제8군사령부, 군사고문단, 한국민간구호계획의 대표단은 1951년 11월 건빵을 생산하기로 계약한 업자와 회의를 했다. 그런데 공장 건물은 커녕 부지도 마련하지 못한 상태였다. 한국민간구호계획의 대표는 45일 내로 부지를 마련하고 건설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면 건설 자재를 제공하되, 그 기한을 지키지 못하면 계약을 파기하기로 했다. 11월 말이 됐는데도 계약한 업자는 이 조건을 만족하지 못했다. 군사고문단에 따르면 그 무렵 한국군은 건빵과 전투식량을 생산할 다른 곳을 물색하고 있었다. 한국측은 설사 임시방편이라 하더라도 일본에서 건빵과 전투식량을 생산하는데 반대했다. 제8군 사령관은 군사고문단장에게 서신을 보내 이런 상황이 계속된다면 건빵 부족 사태가 발생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5)
1951년 초 군사고문단은 제8군사령부에 한국군의 급식 부족 문제를 제기했다. 전투부대는 최소 기준의 급식을 받고 있었다. 최소기준으로는 병사들의 체력과 사기를 높게 유지할 수 없었다. 후방 부대의 급식은 칼로리, 단백질, 지방이 권장량 이하 수준이었다. 한국군이 굶주림에 시달리게 된 원인은 주로 한국 정부의 책임이었다. 한국 정부는 시장 가격의 폭등에 대응해 원화 예산을 증액하지도 않았고 대량 구매를 통해 식량 예비분을 확보하지도 않았다. 제8군사령부 군수참모처는 한국 정부에 생선 공급량을 늘리고, 예산을 증액하고, 늘어난 예산을 육군본부 군수국에 지급해 필요한 식량을 구매하도록 요구했다.6)
한국내에서 건빵을 생산하는 일이 지체되자 군사고문단은 1951년 12월 극동군사령부에 한국군의 1952년 3월 및 4월분 수요를 맞추도록 일본에서 건빵 500만 봉지를 추가로 생산해 달라는 요청을 했다. 군사고문단에 따르면 한국 육군본부는 기존에 계약했던 업자가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자 모든 계약을 취소하고 부산에 있는 다른 회사와 이 회사의 서울 지사에 건빵 생산을 맡기고자 했다. 하지만 이렇게 한다 해도 한국 육군의 건빵 수요 중 50%를 충족하는데 불과했다. 그리고 서울 공장은 1952년 1월, 부산 공장은 1952년 3월은 되어야 건빵 생산을 시작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극동군사령부는 군사고문단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일본에 발주한 건빵은 1951년 12월 말 생산에 들어갔으며 1952년 2월 15일~29일 사이에 500만 봉지를 배송할 예정이었다.7)
군사고문단은 동시에 한국군의 일선 병사들이 일원화된 조달 체계를 통해 김치, 고추장, 된장 등의 부식을 충분히 보급 받을 수 있도록 노력했다. 또한 일원화된 조달 체계 하에서 광주에 각종 장류와 신선한 야채를 공급할 지역 기구를 설치하는 방안도 연구했다. 한국 육군이 일원화된 조달 체계를 받아들이는데 있어 가장 큰 장애물은 각 부대 지휘관들이 급식 수당에 대한 통제권이 약화되는걸 우려했다는 점이었다.8)
서울의 건빵 공장은 1952년 1월 중순 소규모 생산을 시작했다. 얼마 있지 않아 서울 공장의 건빵 생산량은 하루 20,000~25,000봉지에 달했다. 부산 대신 1952년 5월 1일까지 대구에 두 번째 건빵 공장을 세우는 계획도 수립되었다.9) 극동군사령부는 1952년 1월 초 제8군사령부와 주한미군사고문단에 보낸 서신에서 한국의 건빵 생산 현황에 대해 평가했다. 이 서신은 한국 국방부가 건빵 공장 건설에 필요한 예산을 승인하지 않았으며, 그 이유는 한국군에 대한 급식을 미국 정부에 무한정 의존하려는 의도라고 지적했다. 극동군사령부는 6개월치의 건빵 재료 공급이 확정되었고, 한국 내의 건빵 생산이 본 궤도에 오를 때 까지 임시방편으로 500만 봉지의 건빵을 공급할 계획도 확정되었다고 지적하면서 “즉시 한국 정부에 건빵의 추가 공급은 없다고 통보하라. 한국 정부가 건빵 생산을 위해 조치를 취하고 있다는 증거를 제시하지 않는 한 극동군사령부는 건빵의 추가 공급을 거부할 것이다.”라고 했다. 추후의 원조는 건빵 생산 공장을 운영하는데 제한하기로 했다. 이것도 한국측이 완전하고 구체적인 정보를 제공하고, 한국정부와 한국군, 건빵 공장 운영진에게서 자구책 마련을 위해 납득할 만한 노력을 기울이고, 요청한 원료와 기자재를 원조받으면 건빵을 생산해 공급할 수 있다는 확실한 보증을 받은 뒤에만 제공하기로 했다.10) 제8군사령부는 한국 국방부장관과 군사고문단에 이 사실을 알렸다. 제8군사령부는 4월 30일까지는 한국군의 건빵 수요를 맞출 수 있지만 이때까지 한국 내에서 생산하는 양으로 4월 30일 이후의 수요를 맞출 수 있을지 회의적이었으며, 1952년 6월에서 7월쯤이 되면 건빵 부족 사태가 일어날 거라고 예상했다.11)
1952년 2월에는 한국군에 대한 건빵 공급이 개선되었다. 서울 공장의 생산량은 하루 평균 25,000봉지에 달했고 3월 초에는 33,000봉지로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었다. 한국 육군의 하루 건빵 수요는 90,000봉지였으니 이것은 수요의 3분의 1 수준에 불과했다. 대구의 건빵 공장이 4월 말에서 5월 초 생산을 시작하면 하루 평균 30,000봉지를 생산할 것으로 예측되었다.12)
1952년 2월 제8군은 한국군이 그해 6월까지 미육군의 보급시설에서 건빵 생산에 필요한 재료를 보급받을 수 있도록 조치를 취했다. 1952년 6월 1일 부터 9월 30일까지의 재료는 한국 육군이 항구에 하역되는 대로 인수하도록 했다. 한국군이 재료를 직접 인수하면 미군 보급고가 한국군 건빵 재료를 보관할 필요가 없어지게 되고, 향후 들어올 재료들도 마찬가지였다.13) 1952년 3월 초 군사고문단은 제8군사령부에 서울의 건빵 공장의 생산 수율을 일본 공장의 85% 수준에서 81% 수준으로 낮출필요가 있다고 보고했다. 군사고문단은 서울 건빵공장을 시찰했을때 굽는 과정에서 재료 낭비가 심하고, 필요 이상으로 건빵의 수분함량을 낮추기 위해 과하게 가열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서울 공장의 초도 계약 물량 1백만 봉지 생산 수율은 일본 공장의 85% 수준으로 이루어졌다. 제8군사령부는 서울 공장의 생산 수율을 낮추지 말도록 지시하는 한편, 군사고문단에 다음 사항을 권고했다.
-서울 공장의 오븐 온도를 순간적인 가열과 재료 손실을 막고, 제빵 표준을 맞출 수 있도록 할 것.
-건빵의 수분함량을 줄이고 덜 단단하게 만들고, 가능하다면 일본에서 생산한 제품과 비슷한 품질로 만들도록 할 것.-서울 공장의 오븐 온도를 순간적인 가열과 재료 손실을 막고, 제빵 표준을 맞출 수 있도록 할 것.
-생산 설비의 벨트를 교체할 것.
-건빵에 숱검댕이 묻지 않도록 화덕을 밀폐할 것14)
1952년 4월에 이르러서도 한국군용 건빵 생산은 희망한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다. 서울 공장의 하루 생산량은 평균 30,000봉지에 머물렀다. 군사고문단은 대구에 건설 중인 건빵 공장은 대규모의 작업이 필요해 8월 1일은 되어야 첫 생산이 가능할 것으로 예상했다. 유엔군사령부는 고위 인사들에게 건빵 생산 문제를 브리핑 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1951년 10월 부터 1952년 3월까지 미육군은 한국군에 비상식량으로 26,040,000봉지의 건빵을 제공했으며 달러화로 환산하면 1,939,685달러에 해당한다. 동시에 미국은 비슷한 양의 건빵을 생산할 수 있는 재료를 공급했다. 한국 정부는 건빵 공장 설립을 지체했다. 건빵 공장을 세워서 가동하기 전에는 건빵 완제품과 건빵 재료를 더 이상 지원하지 않겠다고 통보한 뒤에야 한국측은 조치를 취했다. 최근의 보고에 따르면 서울 공장의 건빵 생산은 한달에 488,000봉지라고 한다. 이를 위해 한국정부에 아홉달 동안 압력을 넣어야 했다.”15)
1952년 5월과 6월에 서울 건빵 공장은 하루 30,000봉지의 건빵을 생산하고 있었다. 한국군의 하루 건빵 수요의 3분의 1 수준이었다. 군사고문단은 대구에 새로 짓고 있는 건빵 공장은 8월 15일 쯤 되어야 생산을 시작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서울 공장은 1952년 2월 1차분 계약 물량 1,800,000봉지 생산을 완료했다. 6월 부터는 새로 계약한 1,077,000봉지에 대한 생산을 시작해 814,980봉지를 납품했다.16) 대구 건빵 공장은 1952년 7월 초도생산을 시작했다. 당초 예상한 8월 15일 보다 일정을 당긴 것이었다. 대구 공장의 하루 생산 예상치 30,000봉지에 서울 공장의 하루 평균 생산량 30,000봉지를 합치면 일선 부대의 장병들은 하루 평균 1/3봉지의 건빵을 배급받을 수 있었다.17) 한국육군 군수국은 군사고문단의 자문을 받아 공장들에 압박을 가했다. 그 결과 8월 부터 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9월에 이르러서는 서울 공장과 대구 공장의 생산량을 합쳐 하루 60,000봉지의 건빵이 생산되기 시작했다.18)
1952년 10월과 11월에는 서울과 대구 공장을 합친 생산량이 목표치에 미달하는 하루 평균 52,000봉지에 머물렀다. 건빵 생산은 줄어드는데 한국군 병력이 늘어나는 한편, 건빵 보급량을 늘리려는 계획이 수립되었기 때문에 군사고문단은 1952년 10월 영등포의 건빵 공장을 재가동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기 시작했다. 공장 복구에 필요한 건설 자재를 확보하고 이 공장에 살고 있던 사람들을 이주시키는 게 큰 문제였다.19)
군사고문단은 하루에 병사 1인당 건빵 1/3봉지를 배급하는 수준으로는 겨울철에 일선 장병들에 충분한 급양을 제공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또한 훈련병에게는 건빵 배급이 허가되어 있지 않았는데, 이들에게도 건빵을 배급해야 한다고 보았다. 훈련병들은 훈련소에 입소할 당시 충분한 급식을 받지 못하는 상태로 하루 평균 12~15시간의 격렬한 훈련을 받아야 했다. 그러니 훈련병에게는 칼로리와 영영가가 더 높은 급식을 하는게 옳았다. 군사고문단은 훈련병에게 건빵을 보급하면 체력을 증진하고 사기를 높이는데 도움이 되리라 보았다.20) 1952년 11월 제8군 사령부는 군사고문단과 한국 육군 군수국의 건의를 받아들여 극동군사령부에 한국에서 건빵 생산을 늘릴 수 있도록 재료를 더 공급해 줄 것을 요청했다. 건빵 생산을 늘려서 병사 1인당 건빵 배급량을 하루 평균 1/3봉지에서 1/2봉지로 늘린다는 계획이었다. 이 계획에 따르면 하루 평균 129,536봉지의 건빵이 필요했다. 이정도 양이면 일선부대의 205,740명에게 하루 평균 1/2봉지, 훈련병 80,000명에게 하루 평균 1/3봉지의 건빵을 배급할 수 있었다.21) 1952년 12월 육군부는 한국군에 대한 건빵 배급량 증대를 허가하고 하루에 130,000봉지를 생산할 수 있도록 지원하기로 했다. 이 인가량은 전방 부대 장병들이 하루 1/2봉지, 훈련병들은 하루 1/3봉지의 건빵을 배급받을 수 있는 양이었다. 하지만 한국 내의 건빵 생산은 한국 육군 군수국의 요구치를 미달하고 있었다. 1952년 12월 한국내의 건빵 생산량은 하루 평균 45,000봉지였다. 군사고문단은 영등포 공장 재건을 위한 건설자재 확보에 노력해 약간의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1953년 1월은 되어야 공장 부지에 있던 피난민들을 이주시킬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22) 영등포 공장의 생산 설비 복구는 만족스럽게 진행됐지만 건설 자재 확보가 문제였다. 1953년 1월 군사고문단의 조달 고문관은 일본을 방문해 극동육군사령부 조달과와 건설자재 확보 문제를 상의했다.23) 1953년 3월, 제8군 사령부는 이 문제를 연구한 뒤 극동육군사령부에 나중에 상환받는 조건으로 제8군 사령부가 보유한 건설자재를 제공하도록 허가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리고 건빵 공장이 추가로 건설될 때 까지 미국 고문관들이 한국군 취사병들을 훈련시켜 건빵 생산을 감독하도록 하는 방안을 제시했다.24)
1953년 4월, 미국정부는 한국군에 43,000달러에 상당하는 양의 건설자재를 공급해 영등포 건빵 공장을 복구하도록 했다. 공장 소유주와 한국군은 영등포 건빵 공장이 군납만을 한다는 계약을 체결했다. 영등포 공장의 건빵 생산은 1953년 5월에 시작될 것으로 예상되었다. 하지만 영등포 공장이 생산을 시작하더라도 한국군의 수요를 맞추기는 어려웠다. 당시 한국군의 하루 건빵 수요는 294,233봉지였다. 한국내에 있는 건빵 공장을 최대한 가동해도 최대 생산량은 하루 평균 210,000봉지에 불과할 것으로 예측되었다. 적절한 건빵 보급을 위해 부대 단위에서 임시변통의 조치를 계속 취할 필요가 있었다.25) 모든 한국군 부대는 기본적인 재료를 공급받아 국수, 경단, 건빵 등을 자체적으로 생산하는 조치를 취했다. 건빵을 생산한 부대들은 낡은 드럼통, 진흙, 점토 등을 동원해 오븐을 만들었다. 한국군의 일선 부대들은 건빵과 비슷한 수준의 칼로리를 가진 대체품을 생산할 수 있었다.26)
영등포 공장 복구에 필요한 마지막 건설자재는 1953년 5월 중순 전달되었다. 5월 말까지의 공장 복구 수준으로 봤을때 6월 10일 쯤이면 건빵 생산이 가능할 것으로 예상되었다.27) 1953년 5월 영등포 건빵 공장의 복구 공사는 거의 6개월째에 접어들었다. 군사고문단은 공장 복구가 완수되도록 여러 번에 걸쳐 개입했다. 군사고문단의 개입은 정치적인 문제를 불러올 위험이 있었다. 한국육군은 군수국 보급과에 공장소유주와 교섭할 권한을 주고 한국은행에 대출을 주선 했는데, 이것은 모두 군사고문단이 추가로 확인조치를 취해야 했다.28)
1953년 5월 초 제8군사령부, 군사고문단, 한국후방관구사령부(KCOMZ) 대표들은 한국군의 실제 건빵 수요량을 평가하기 위해 회의를 가졌다. 한국군은 병력 602,880명을 기준으로 병사 1인당 하루 평균 건빵 1/2봉지를 보급하기 위해서 일일 건빵 생산량을 130,000봉지에서 294,233봉지로 늘리기를 원했다. 한국군의 요구량은 미국 육군부가 하루 생산량을 130,000봉지로 승인했을때 고려한 변수와 일치하지 않았다. 육군부는 영등포 공장이 복구되어 재가동에 들어가면 건빵 생산량을 늘리는데 기여할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한국군 병력이 급속히 증강되면서 최저 보급 기준이 악화되자 한국군은 건빵을 더 많이 소비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한국군의 급식을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건빵을 통해 탄수화물을 더 공급할 필요는 없었다. 회의에 참석한 군의관은 영영학 관점에서 하루에 건빵 1/4봉지면 충분하고 1/3봉지는 과하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회의 참석자들은 육군부에서 파견한 조사단이 한국군 급식 소요를 영양학적으로 분석한 결과가 나올때 까지는 최종결정을 유보하고, 그대신 1952년 4월 기준 한국군 병력 525,000명에 맞춰 하루 1/3봉지의 건빵을 보급하기로 했다. 525,000명을 기준으로 하면 한국군의 하루 평균 건빵 수요는 175,000봉지였다. 육군부에서 허가한 양 보다 45,000봉지를 더 생산해야 했다.29) 1953년 7월 말에도 한국군의 일선 부대들은 서울, 대구, 영등포 공장에서 생산하는 건빵으로는 부족한 양을 보충하기 위해 자체적으로 건빵을 생산해야 했다.
주석
1) Comd Rept(S), HQ EUSAK, Jun 51, Narrative, p.118.
2) Comd Rept(S), HQ EUSAK, Jul 51, Narrative, p.97.
3) Comd Rept(S), HQ EUSAK, Sep 51, Narrative, pp.80~81.
4) Comd Rept(S), HQ EUSAK, Oct 51, Narrative, pp.78~79.
5) Comd Rept(S), HQ EUSAK, Nov 51, Narrative, pp.71~72.
6) Staff Sec Rept(S), QM G4 EUSAK, Dec 51, p.12; Comd Rept(S), HQ EUSAK, DEC 51, Narrative, pp.54~55.
7) Staff Sec Rept(S), QM G4 EUSAK, Dec 51, p.12; Comd Rept(S), HQ EUSAK, Dec 51, Narrative, pp.54~55.
8) Comd Rept(S), HQ KMAG, Jan 52, Narrative Summary, p.24.
9) Ibid.
10) Comd Rept(TS), GHQ UNC/FEC, Jan 52, p.104; Comd Rept(S), HQ EUSAK, Jan 52, Narrative, p.54.
11) Comd Rept(S), HQ EUSAK, Jan 52, Narratvie, p.55.
12) Comd Rept(S), HQ EUSAK, Feb 52, Narratvie, p.60.
13) Ibid.
14) Comd Rept(S), HQ EUSAK, Mar 52, Narratvie, p.54.
15)Comd Rept(S), HQ KMAG, Apr 52, Narratvie Summary, p.16; Briefing for VIP’s, HQ UNC, Apr 52, Sec. 16, p.7.
16) Staff Sec Repts(S), G4 KMAG, May 52, Summary, p.2; Jun 52, Summary, p.1; Comd Repts(S), HQ KMAG, Narrative Summaries, May 52, p.18; Jun 52, p.18.
17) Comd Rept(S), HQ KMAG, Jul 52, Narratvie Summary, p.18.
18) Comd Rept(S), HQ KMAG, Aug 52, Narratvie Summary, pp.15, 17.
19) Staff Sec Rept(S), G4 KMAG, Oct 52, Summary of Activities, p.1.
20) Staff Sec Rept(S), QM G4 EUSAK, Nov 52, p.46.
21) Comd Rept(S), HQ EUSAK, Nov 52, Narrative, pp.132~133.
22) Comd Rept(S), HQ EUSAK, Dec 52, Narrative, p.143; Staff Sec Rept(S), G4 KMAG, Dec 52, Summary of Activities, p.1.
23) Staff Sec Rept(S), G4 KMAG, Jan 53, Summary of Activities, p.1.
24) Comd Rept(S), HQ EUSAK, Mar 53, Narratvie, p.146; Staff Sec Rept(S), QM G4 EUSAK, Mar 53, p.23.
25) Comd Rept(S), HQ EUSAK, Apr 53, Narratvie, p.149; Staff Sec Rept(S), G4 KMAG, Apr 53, Summary of Activities, p.1.
26) Staff Sec Rept(S), QM G4 EUSAK, Mar 53, p.23.
27) Staff Sec Rept(S), G4 KMAG, May 53, Summary of Activities, p.2.
28) Staff Sec Rept(S), G4 KMAG, May 53, Summary of Activities, p.3.
건빵 하나 좀 제대로 생산하게 하려고 9개월을 압박해야 하다니...
답글삭제아무래도 저때 생산된 건빵은 아무래도 미군식 하드택에 가깝겠죠?
기본적인 레시피와 제조 공정에도 군사고문단이 개입했으니 비슷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실물이 있다면 확실히 알 수 있을텐데 말이죠.
삭제본문과는 관계없지만 제가 따로 어디 물어볼만한데가 없어서 질문 좀 드립니다.
삭제슬라빅 밀리터리 스터디 저널 이전 걸 좀 훑어보다가 "The Evaluation of the Military Qualities of the Red Army in 1941–1945 by German Memoirs and Analytic Materials"을 읽어보게 되었는데요. 이 글 대해서는 어떻게 보시나요?
개인적으로는 다른쪽은 아는 게 없어서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나마 좀 뒤져본 공군 쪽은 일선에 있던 사람들의 기록을 무시하는 듯한 느낌까지 좀 드는데요.
회고록에서 묘사하는 소련군의 이미지는 개인별로 다를 수 밖에 없지 않습니까. 예를들어 바그라티온 작전 때 쓴맛을 단단히 본 티펠스키르히 같은 경우 리델 하트와의 대담에서 소련공군의 지상공격 능력을 높게 평가한 경우도 있습니다. 말씀하신 그 글에서 인용하는 회고록이 그리 많은편은 아니라서 이로 인한 한계는 좀 있지 않나 싶습니다. 다만 전쟁의 추이에 따라 소련군에 대한 평가가 높아진다는 기본적인 논지 자체는 동의할 만 하다고 봅니다.
삭제그렇군요. 저는 공군 쪽을 너무 슈바베디센 회고록 하나에만 의지하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여쭤봤습니다. 감사합니다!
삭제책을 찾아보니 티펠스키르히가 리델하트에게 이야기 한건 소련 공군이 아니라 소련 빨치산이었습니다. 하도 읽은지 오래되다 보니 이런 착오가 생기는군요.
삭제읽으면서 암 걸리는 기분은 오랜만이네요. 70년 동안 이 나라가 얼마나 변했는지 제조업 분야 종사자로써 감회를 느끼게 됩니다. 번역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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