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애리조나 주립대학에서 나온 Yan Mann의 박사학위 논문 Writing the Great Patriotic War's Official History During Khrushchev's Thaw를 읽었습니다. 현재까지 대조국전쟁사 서술을 둘러싸고 계속되는 논쟁의 시발점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매우 유익한 글입니다. 개인적으로 이 논문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주장은 소련 체제의 프로파간다에 의해 만들어진 집단 기억이 소련 국민 개개인의 전쟁 체험에 스며들고 심지어는 개인의 기억과 문헌 기록 자체에 영향을 끼치는 단계까지 나갔다는 겁니다. 소련 체제의 특성상 공산당이 정보 유통 수단을 장악하고 집단 기억의 흐름을 통제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흐루쇼프와 브레즈네프 정권이 대조국 전쟁의 신화화를 통해 정권의 정당성을 얻으려 했다는 점을 지적하는 점도 주목할 만 합니다. 저자는 오늘날 푸틴 정권 치하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관변 역사학의 준동이 소련 시절, 특히 브레즈네프 집권기의 흐름과 유사하다고 봅니다.
이 논문은 크게 여섯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제1장은 스탈린 정권기 대조국 전쟁사의 기본적인 맥락이 형성되는 과정을 다룹니다. 저자는 스탈린 시기에 주로 프로파간다를 통해 형성된 집단 기억이 스탈린 사망 이후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고 봅니다. 제2장은 스탈린 사후에서 흐루쇼프 집권 초기까지의 대조국전쟁사 서술을 다룹니다. 흐루쇼프가 정권을 잡은 뒤 스탈린을 공격하고 자신의 정치적 권위를 위해 정부 차원의 공식 대조국전쟁사 서술을 필요로 했다는게 골자입니다. 제3장 부터는 이 논문의 핵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제3장과 제4장은 흐루쇼프 정권이 대조국전쟁의 공식 역사서의 1권과 2권을 편찬하는 과정을 다루고 있습니다. 제3장은 소련 공산당이 대중을 대상으로 한 공식대조국전쟁사 집필을 결정하고 저작의 골격을 잡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오늘날까지 통용되는 대조국전쟁을 3기로 구분하는 시대구분이 바로 흐루쇼프 시기에 완성되었습니다. 4장은 대조국전쟁사의 초기 집필과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장에서는 전쟁 초기의 패배에 대한 공식 해석이 만들어지는 과정, 전쟁 초기의 주요 군사작전에 대한 서술, 전쟁 시기 프로파간다를 통해 날조된 영웅담들이 공식 역사의 일부로 포함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제5장은 소련 정부의 공식 대조국전쟁사의 첫 번째 권이 집필된 직후 소련 사회의 반응을 다룹니다. 정치적, 군사이론적, 군사작전에 관한 비평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제6장은 대조국전쟁사 집필 과정에서 스탈린의 역할을 둘러싸고 벌어진 논쟁, 그리고 소련 정치인들의 책임 회피와 대조국전쟁사 편찬이 완결되기 까지를 다루고 있습니다.
제가 이 글을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던 이유는 지속적으로 반복된 소련 정권의 프로파간다가 역사 서술에 영향을 끼친 점을 지적하기 때문입니다. 이 점은 제5장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저자는 키예프 전투에 대한 서술을 예로 들어 소련군의 인명손실을 서술할때 상대적으로 정확한 독일측의 주장을 비난하고 소련군의 피해를 축소하는 경향이 있었음을 지적합니다. 또한 개전 초반 소련군의 장비 대다수가 성능적으로 구식이었다는 서술에 참전자들 상당수가 불쾌감을 드러냈다는 점도 흥미롭습니다. 참전자들은 소련군의 무기가 성능적으로 뒤떨어졌다는 서술 자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반발을 했는데 이런 경향은 오늘날의 러시아에서도 나타나고 있지요. 이 밖에도 이 논문에서는 스탈린을 비롯한 소련 정치인과 군인들의 역할을 둘러싼 논쟁, 군사작전과 소련 군사학의 역할을 둘러싼 논쟁 등 대조국전쟁사 집필 과정에서 있었던 수많은 요인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제2차세계대전에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한번 읽어보실 필요가 있다고 생각이 됩니다.
이거 또 흥미로운 글이네요. 참고문헌 빼고 403p면 바쁜 때 지나고 한번 몰아봐야겠군요.
답글삭제정말 흥미로운 논문입니다. 포스팅에는 제 관심사 위주로 내용을 소개했는데 실제로는 집단기억, 기억의 정치 문제를 잘 다루고 있는 수작이라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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