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는 철모도, 총검도 없었다. 리볼버나 피스톨도 없었다. 폭탄은 다섯 명이나 열 명에 하나 씩이었다. 이 시기에 사용되던 폭탄은 ‘F.A.I.수류탄’으로 알려진 무시무시한 것 이었다. 전쟁 초기에 무정부주의자들이 생산하던 것 이었다. 이것은 원리상으로는 달걀 모양의 밀스 수류탄과 같았으나, 레버가 핀이 아닌 테이프 조각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테이프를 떼는 즉시 최대한 빠른 속도로 수류탄을 던져야 했다.
이 수류탄을 “공평하다”고들 했다. 맞은 사람과 던진 사람을 다 죽였기 때문이다.
다른 종류도 몇 가지 있었는데, ‘F.A.I. 수류탄’보다 더 원시적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약간은 – 그러니까 던지는 사람에게 – 덜 위험할 것 같았다. 그나마 던질 만한 수류탄을 보게 된 것은 (1937년) 3월 말이 지나서였다.
조지 오웰/정영목 옮김, 『카탈로니아 찬가』, 민음사, 2001, 50쪽
※F.A.I.는 1927년에 조직된 무정부주의 단체입니다. Federación Anarquista Ibérica의 약자이죠.
예전에 한국전쟁 당시 제주도에서 수류탄 개발에 참여하셨던 원로 기술자 한 분을 뵌 적이 있었습니다. 찾아 뵈었을 무렵에는 화장품 회사 고문으로 계시면서 가끔 글을 쓰고 계셨지요. 그 분 말씀이 수류탄을 개발하면서 시험할 사람이 따로 없다 보니 기술자들이 직접 수류탄 시제품 시험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귀한 기술자들이 어이없게 희생된 사례가 꽤 있다고 하시더군요. 그 분의 증언을 들으면서 수류탄도 의외로 만들기 어려운 물건이구나 싶었는데 뒤에 조지 오웰의 글을 읽으면서 다시 한번 그 분의 이야기를 떠올렸습니다.
생각해 보면 17세기 말에 원시적 수류탄이 사용된 뒤 요즘과 같은 모양을 가지기 까지 거의 300년 정도가 걸렸으니 지금 보면 참 단순한 물건 이라도 우습게 봐선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