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르니카(Guernica)에 대한 콘도르군단의 공습은 민간인을 상대로 한 테러 폭격으로 파시즘의 잔악상을 알리는 상징이 되었습니다. 197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독일 자료를 활용한 연구들이 나오기 전 까지는 민간인에 대한 테러 폭격이라는 시각이 지배적이었습니다. 아래에 인용한 ‘타임라이프 2차대전사’의 기술은 그런 시각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4월에 접어들자 내셔널리스트군은 북부로 이동하여 독일군의 위력을 빌린 폭격에 의해 이윽고 이목을 끌게 되는 작전을 개시했다. 콘도르병단은 소이탄과 고성능폭탄을 병용하는 새 전술의 연습지로서 바스크지방을 선정했다. 맨 먼저 폭격을 당한 곳은 빌바오와 그에 버금가는 공업중심지 두랑고였다. 그러나 결코 잊을 수 없는 폭격의 표적이 되고 이 내전 전체를 상징하는 도시가 된 것은 그 근처의 게르니카였다.
빌바오의 동쪽 30km에 위치하는 인구 약 7,000명의 게르니카는 가도와 철도의 분기점이었다. 도시에 있든 그 밖의 군사목표는 공화국군이 철퇴할 때 필요한 교량과 두개의 조그만 군수공장 뿐이었다. 1937년 4월 26일 오후 4시, 두 사람의 수녀가 경보의 종을 울리며 “비행기, 비행기”하고 외쳤다. 상공에 날아온 것은 하인켈 폭격기 한 편대였다. 그 가운데 1대가 몇 개인가의 250킬로 폭탄을 역전 광장에 모여있는 군중 속에 투하했다. “여자와 어린이의 일단이 하늘 높이 흩날렸다. 그들의 몸은 분쇄되고 발, 팔, 머리 따위가 산산조각이 난 채 곳곳에 흩어졌다.” 생존자 한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도시를 습격한 8회를 넘는 비행기의 파상공격이 밤까지 계속되었다. 약 1600명이 살해되고 900명이 부상했다. 독일의 폭격기는 군수공장을 폭격하지 못했다. 그들의 폭격장치는 매우 원시적이었으므로 정확히 목표를 포착할 수 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해외 제국의 공화국 지지자는 비무장 시민 대량살륙의 소식에 충격을 받고 무차별폭격을 비난했다.
로버트 T. 엘슨(Robert T. Elson), 『라이프 2차 세계대전 : 대전의 서곡』, 한국일보 타임-라이프, 1981, 172쪽
그러나 폭격을 주도한 콘도르 군단의 보고서 등 독일 사료를 활용한 연구들이 출간 되면서게르니카 폭격은 민간인을 목표로 한 테러폭격이 아니라 통상적인 전술폭격의 일환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게르니카에 대한 폭격을 지휘한 리히트호펜(Wolfram von Richthofen)이 게르니카를 폭격하기로 결심한 이유는 이곳이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기 때문입니다. 게르니카를 폭격해 이곳의 도로망과 철도를 마비시킨다면 바스크군이 빌바오로 철수하는 것을 방해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고 있었습니다. 게르니카 일대에 전개한 바스크군의 병력은 23개 대대에 달했고 빌바오로 통하는 주요 도로 하나가 게르니카를 지나고 있었습니다. 만약 게르니카에 주둔한 바스크군이 제때 철수를 하지 못한 상태에서 국민군이 신속히 진격한다면 바스크군에게 큰 타격을 입힐 수 있었을 것 입니다. 그리고 당시 국민군 측이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게르니카에는 바스크군의 제 18 로얄라(Loyala) 대대와 사세타(Saseta) 대대가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만약 이 두 대대가 게르니카에서 저항을 한다면 국민군의 진격을 저지하면서 주력 부대가 게르니카를 따라 후퇴할 수 있는 시간을 벌 수도 있을 것이었습니다.
게르니카 일대에 대한 공습은 4월 25일 시작됐습니다. 리히트호펜은 전투기 부대에 빌바오와 게르니카를 잇는 도로를 따라 이동하는 바스크군에 공습을 가하도록 명령했습니다. 한편 국민군이 게르니카 방면으로 진격하면서 위에서 언급한 대로 게르니카의 교통망에 타격을 가해 바스크군의 퇴각을 방해할 필요성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1937년 4월 26일에 감행된 게르니카 폭격은 전술적으로 기대했던 성과를 달성하지 못했습니다. 무엇보다 콘도르군단의 폭격기들은 주요 목표 중 하나였던 렌타리아(Rentaria) 다리를 파괴하지 못했으며 도로 및 철도에 대한 폭격도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이 작전에 투입된 폭격기 중 많은 수를 차지한 Ju-52는 기본적으로 수송기 였고 초보적인 조준기를 장비했기 때문에 폭격의 정확도가 매우 떨어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 하루 정도 게르니카의 도로망은 마비되었으며 리히트호펜은 ‘전반적으로 성공적’이라는 평가를 내렸습니다. 리히트호펜은 공습이 끝난 뒤 스페인 국민군의 느린 진격속도 때문에 게르니카 공습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바스크군에 타격을 입히지 못했다고 불쾌해 했습니다.
스페인 내전에 참여한 독일 공군 지휘관들은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테러 폭격이 정치적으로 나쁜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독일공군 장교들은 빌바오나 바르셀로나에 대한 국민군과 이탈리아 공군의 테러 폭격에 대해 비판적이었습니다. 특히 국민군의 경우 자국의 국민과 산업기반을 파괴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습니다.
문제는 게르니카 폭격의 후폭풍 이었습니다. 바스크 자치정부는 게르니카 폭격으로 1,654명이 사망하고 889명이 부상했다는 발표를 했습니다. 민간인에 대한 폭격이 국제적인 비난을 불러온 것은 당연했습니다. 이상하게도 국민군이나 이탈리아군에 의한 테러 폭격이 아니라 테러 폭격에 관심 없었던 독일 콘도르군단의 전술 폭격이 테러 폭격의 대명사가 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독일 측은 전혀 의도하지 않았지만 게르니카 폭격으로 영국의 전략폭격 지지자들은 공군의 위력과 민간인에 대한 테러폭격의 효과를 더욱 확신하게 됐습니다.
최근의 연구들은 게르니카 공습으로 250명에서 300명의 민간인이 사망했다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희생된 민간인들은 콘도르군단의 목표는 아니었지만 ‘군사목표’에 있었기 때문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물론 의도하지 않았다고 해서 리히트호펜과 콘도르군단에게 면죄부가 주어질 수는 없습니다. 리히트호펜의 전기를 쓴 코럼(James S. Corum)에 따르면 리히트호펜은 냉정한 군인으로 군사작전을 감행하면서 발생할 민간인의 피해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고 하는군요. 게르니카가 함락된 뒤 게르니카를 방문한 리히트호펜은 폭격의 성과에 만족하면서 특히 250kg 폭탄의 위력이 입증된 것에 주목했다고 합니다. 물론 민간인의 피해에 대해서는 별반 언급하지 않았다는 군요.
참고문헌
로버트 T. 엘슨(Robert T. Elson), 『라이프 2차 세계대전 : 대전의 서곡』, (한국일보 타임-라이프, 1981)
James S. Corum, The Luftwaffe : Creating the Operational Air War, 1918~1940, (University Press of Kansas, 1997)
James S. Corum, Wolfram von Richthofen : Master of the German Air War,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