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휴. 간만에 블로그에 뭘 하나 쓰는군요.
'산처럼' 출판사에서 로널드 스멜서(Ronald Smelser)와 에드워드 데이비스 2세(Edward J. Davies)의 공저 The Myth of the Eastern Front: the Nazi-Soviet war in American popular culture의 한국어판『제2차 세계대전의 신화와 진실: 독소전쟁과 냉전, 그리고 역사의 기억』이 출간되었습니다. 류한수 교수님이 한국어판 역자이시군요. 예전에 РККА님이 블로그에 이 책을 번역해서 올리셨기에 이 책의 한국어판이 나오면 РККА님의 번역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예상이 빗나갔습니다.
이 책은 냉전기에 만들어진 '무결한 독일국방군'의 신화가 오늘날 미국의 밀리터리 오타쿠들에게 끼친 부정적인 영향을 비판하는 내용입니다. 독일국방군의 신화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설명한 이 책의 절반 이상(1~5장)은 기존에 생산된 연구의 정리에 불과하기 때문에 새로운 내용이나 특별히 주목할 만한 이야기 없습니다.
이 책의 후반부(6~8장)에서 미국인들의 왜곡된 2차대전 인식을 본격적으로 비판하면서 상당히 재미가 있어집니다. 특히 냉전기에 형성된 2차대전 인식을 확대재생산하는 북미권의 군사서적 출판사들과 아마추어 군사연구자에를 비판하는 부분이 좋습니다. 미국인들이 냉전기에만들어진 독일인들의 변명을 재생산하고 이것이 인터넷이라는 수단과 결합하면서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과정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저자들은 페도로위츠(J. J. Fedorowicz) 출판사 같이 독일군 관련 서적을 주력으로 하는 출판사들이 미국인의 역사인식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비판합니다. 실제로 페도로위츠, 쉬퍼(Schiffer) 출판사와 같은 군사서적 전문 출판사들이 간행하는 서적들은 균형이 잡힌 연구서라기 보다는 독일측의 입장을 일방적으로 서술하는 수준에 그치는 책들입니다. 페도로위츠 출판사는 악명높은 오토 바이딩어가 집필한 무장친위대 제2기갑사단사 같은 것들을 영어로 번역해서 간행하고 있죠.
2차대전을 다루는 영어권 인터넷 사이트들에 대한 비판도 아주 좋습니다. 이 책에서 언급한 아흐퉁 판처와 같은 웹사이트들에 실린 내용은 2000년대 초반 저와 같은 한국의 밀리터리 오타쿠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제7장은 인터넷이라는 영향력 있는 수단이 독일국방군 무오설을 확대재생산하면서 밀리터리 오타쿠들이 편협한 역사관을 가지도록 유도하는 과정을 잘 설명합니다. 밀리터리 오타쿠들은 독일인에 감정이입을 하면서 가해자와 피해자 뒤바뀐 왜곡된 역사관을 가지게 됩니다. 밀리터리 오타쿠들의 '군사사 연구'는 정치적인 맥락이 깔끔하게 제거되어 있습니다. 그럼으로서 독일의 전쟁범죄를 암묵적으로 부정하는 방향으로 나가게 됩니다.
이 책은 소위 '독빠'들을 비판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밀리터리 오타쿠 전반에 적용되는 비판이라고 생각합니다. 전쟁을 낭만화 하고 탈정치화하는 위험한 경향은 굳이 독빠가 아니라 밀리터리 오타쿠 다수에 내재해 있으니까요. 책의 내용도 재미있고 번역이 아주 좋습니다. 저자들은 미국의 밀리터리 오타쿠들에게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이들을 Guru라고 칭하는데 류한수 교수는 이걸 '본좌'로 옮겼습니다. 아주 탁월한 번역어 선정입니다. 하지만 진짜 좋은 번역은 독일군 애호가들을 칭하는 romancer를 '낭만무협인'으로 옮긴 부분입니다. 너무나 탁월한 초월번역이라 감탄할 수 밖에 없습니다. 제가 1~5장의 내용은 기존에 간행된 연구들과 차별점이 없다고 쓰기는 했는데 사실 이 주제에 대해서는 한국어 문헌이 그리 많지 않아서 한국어판은 충분한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전쟁을 낭만화 하는 밀리터리 오타쿠라면 자기 반성을 위해서라도 한번 읽어보면 좋지 않을까요.
부대명인 JG52를 JU52로 표기 한 것 같은 사소한 오탈자가 있는데 이런 것들이 수정될 수 있게 이 책이 시장에서 좋은 반응을 얻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