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7월 13일 화요일

역지사지 - 어떤 육사생도의 실전 경험담

오랫만에 박경석 장군의 회고록 『야전지휘관』을 읽고 있는데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이 한국전쟁 초기 포천 방면 방어에 투입된 일화가 눈에 들어옵니다. 박경석 장군 본인이 자신의 이야기를 3인칭으로 풀어놓는 서술방식도 재미있네요. 첫 전투에서 패배하여 후퇴할때의 비참한 심정을 토로하는 내용입니다. 상당히 솔직한 회고담이 아닌가 싶어서 인용을 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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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대장을 빼놓고 그들은 모두 동기생이었다. 1950년 6월 1일 태능 육군사관학교 생도 제2기로 입교하여 청운의 꿈을 안고 교육을 받은지 25일째 되는 날 6ㆍ25가 발발하자 M1소총 조작법도 제대로 모르는 사관생도가 국가의 위기에 대처하기 위하여 생도 제1기생(현 제10기)과 더불어 대대를 편성 포천 방면 전투에 투입되었다.

홍안의 청소년들인 그들은 생도 제1기생이 하라는대로 행동했다. 호를 파라면 호를 팠고 잠복조에 차출하면 잠복근무에 열중했다. 그들은 포천지역에 배치된 능선에 개인호를 파고 M1소총을 겨누면서 북쪽을 향해 응시하고 있었다. 생도 제1기생들은 포천지역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었으나 생도 제2기생들은 전혀 어디가 어딘지 모르는 생소한 곳 이었다. 동서남북도 잘 알지를 못했으며 겨우 다음날 이른 새벽에 햇살이 비치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서야 방향을 알 정도였다. 

전선에 배치된 얼마 후 이윽고 멀리서 둔탁한 북소리 같은 것이 울리더니 잠시 뒤 천지를 뒤흔드는 진동과 더불어 '쾅쾅 쿵쾅 쿵쾅...' 벼락치는 소리와 함께 포탄이 진지 주위에 떨어지기 시작하였다. 평생 처음 당하는 포탄세례인지라 모두들 호속에 웅크리고 앉아 눈을 감고 이제는 다 죽는가보다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포탄소리가 뜸하면서 곧 이어 따발총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따. 따. 따. 따...' 따발총 소리에 기가 질려 어쩔줄을 모르는 생도 제2기생들을 향하여 뒤에서 생도 제1기생의 호령소리가 들려왔다.

"전방 보이는 적, 사거리 500m 사격개시!"

생도들은 일제히 사격을 개시했다. 사격을 하면서 자세히 살피니 적이 500미터 정도에 있는 것이 아니고 멀리 가물가물 메뚜기 같이 뛰었다가 엎드렸다 하면서 달려오는데 약 1키로미터 거리 쯤 되는 것 같았다.

적의 진출 속도는 상당히 느렸다. 그들도 겁이 났는지 별로 계속 전진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러나 사격명령이 내려졌으니 안쏠 수도 없어 무턱대고 방향만 어림잡아 쏘아 대었다. 처음에는 총소리와 진동에 겁이 나는 것 같기도 하더니 몇 크립 정도 쏴보니 신이 나는 것 같았다. 계속 삽탄 장전 하면서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나 일부 생도 제2기생들은 M1 8발을 다 쏘고난 다음 장전이 서툴러 호에서 뛰어나와 생도 제1기생 호를 찾아다니며 삽탄장전을 부탁하는 모습도 보였다.

그렇게 교전한 지 30분 정도 되었을까 '부릉 부릉 부릉'하는 무거운 금속성 자동차 엔진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더니 집채만한 괴물이 이쪽을 향하여 움직이고 있었다. 생도 제2기생들은 아무도 그 물체가 무엇인지 몰랐다. 그러나 무조건 그 물체를 향해 M1 소총을 쏘아댔다.

"야! 전차닷! M1으론 안돼!"하는 고함소리가 들리더니 이어서 쿵쾅 하는 벼락치는 소리에 뒤이어 "이크! 웅웅"하는 신음소리가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적의 직사포탄에 의해 아군의 희생자가 발생한 것이다. 바로 옆 개인호 속으로 달려가니 이름모를 동기생 한 명이 죽어있었다.

"전원 후퇴! 화랑대로 집결이닷."

생도들은 무슨 영문인지 몰랐다. 그때까지만 해도 적과 마주치면 죽을때까지 싸우는 것인줄만 알았던 그들에게 후퇴명령이 내려지니 도무지 뭐가 뭔지 알수가 없는 일어었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줄 모른다더니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육사입교 25일째를 맞이하는 그들인지라 전차의 위력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생도 제1기생들은 전차의 위력을 알고 있었다. 맨손으로 개죽음을 당하느니 일단 후퇴하여 전열을 가다듬어야 되겠다는 판단이 내려진 것이다.

박생도는 엉엉울면서 뛰기 시작했다. 사관생도의 긍지가 무참히 짓밟힌 것이다. 그 화려하던 꿈이 무너진 것이다. 뛰면서도 박생도는 주마등처럼 어린 시절의 일들이 생각났다. 어린시절에 본 만화책에는 중국군 병사들이 일본군에게 쫒기어 도망가는 그림이 실리곤 했다. 그당시 기억으로는 일본군은 공격만 하는 군인이고 중국군은 도망만 하는 패잔병인 줄만 알았다. 그것이 커가면서 뇌리에 박혀있어 도망은 으례히 중국인만 하는 것으로 인식이 돼 중국집에 음식 먹으러 가면 중국인들이 쏼라쏼라 떠들면서 우동을 나르는 모습과 도망가는 모습을 연상하면서 혼자서 웃기도 하였던 것을 아스라히 생각하면서 지금 박생도는 자신이 전차가 나타났다고 하여 적에게 뒤를 보이며 뛰는 모습이 너무나도 비참하게 느껴지는 것 이었다. 신라의 화랑들처럼 또한 화랑 관창처럼 멋있게 싸우겠다고 다짐한 나이어린 사관생도들의 아름다운 꿈을 무참히 꺾어 버린 것이었다. 박생도는 계속 엉엉울면서 뛰었다.


박경석, 『야전지휘관: 야전지휘관의 사생관』 (서울: 병학사, 1981) 143~14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