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6월 25일 일요일

롱보우인가 화승총인가 : 16세기 어떤 영국인들의 이야기

어떤 특정한 기술이 개발됐을 때 반발하거나 거부감을 가지는 집단은 신기술 보다는 기존의 기술로 더 재미를 보거나 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집단이다.

그러면 이제 별 알맹이 없는 본론으로…

이런 것은 전쟁질의 역사를 보더라도 잘 나타나는데 대표적인 것이 16세기 영국의 군인들이 제기한 화약무기와 롱보우(Long Bow)의 효용성에 대한 논의였다.

중세 유럽의 화약무기는 성능과 신뢰도 모두가 신통치 않은 물건이었으나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싹수를 보이고 있었다. 플랑드르인들은 1382년의 베버하우드벨트(Beverhoudsveld) 전투에서 300문의 각종 화약무기를 집중 운용해 6000명에 불과한 병력으로 3만에 달하는 프랑스군을 격파하는 대박을 터트리기도 했다.
프랑스인들도 돌대가리는 아닌지라 화약무기를 도입하는데 많은 자금과 시간을 투자했고 백년전쟁 후기에는 유럽 최고수준에 도달했다 해도 과언이 아닌 상황이 됐다.

반면 영국은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프랑스에 비해 화약무기 경쟁에서 뒤쳐지고 있었다.
영국인들은 이미 15세기 프랑스와의 백년전쟁에서 화약무기를 대규모로 사용한 프랑스 군대에 죽을 쑨 경험이 있었다.

1428년의 오를레앙(Orléans) 포위공격에서 영국군은 프랑스군의 대포에 지휘관인 샐리스버리(Thomas Montagu Salisbury)가 전사한 일이 있었고 프랑스 군은 1449년에서 1450년 사이에 60여 차례의 공성전을 시도해 모두 승리를 기록하는 성과를 거뒀다.
1453년 7월 17일의 Castillon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약 300문의 대포(주로 컬버린)를 투입했고 이와 함께 약 700명의 핸드캐논 사수를 투입해 영국군을 크게 격파했다.

특히 화약무기 중에서도 화승총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핸드캐논의 보급은 유럽본토에서는 가히 놀라운 수준이었는데 1411년 부르군디 공작은 자신의 군대가 핸드캐논 4000정을 가지고 있다고 자랑할 정도였다.
물론 핸드캐논은 당시의 총신 제작 기술이 불량해 종종 쏘는 사람을 잡는 경우도 있었지만 확실한 파괴력과 간편한(?) 조작방법으로 빠르게 보급됐다.
1430년 뉘른베르크 시의 기록에 따르면 시 민병대가 보유한 발사 무기 중 핸드캐논 (Handbüchse)은 501정으로 석궁(607자루)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유럽 본토에서 이렇게 화약무기 도입에 열을 올리는 동안에도 영국은 뭔가 한 걸음 뒤쳐진 상황이었는데 몇가지 이유 중 하나는 롱보우에 있었다.
이미 영국인들은 백년전쟁 기간 내내 롱보우의 파괴력과 연사력을 활용해 여러 차례 재미를 보고 있었고 비록 백년전쟁 말기에 화기에 호되게 당하긴 했어도 야전(野戰)에서는 롱보우의 위력이 더 좋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심지어 백년전쟁이 끝나고 한참 지난 16세기 말 까지도 영국인들은 화약무기와 롱보우의 군사적 가치에 대해 열띤 논의를 하고 있었다.

용병으로 이름을 날린 존 스미티(John Smythe)라는 귀족은 1590년에 발행한 짧은 소책자에서 롱보우가 군사적으로 화약무기보다 더 유용하다고 주장했다.
그 이유로 롱보우는 숙달된 사수가 사용할 경우 화승총에 비해 여섯배 이상 빠른 발사속도를 자랑하고 화약무기가 과열과 총신파열로 파괴될 위험이 있는데 비해 롱보우는 그럴 위험이 없다는 것을 들었다.

반면 역시 용병대장이었던 험프리 바윅(Humfrey Barwick)은 스미티의 주장에 반대했다.
바윅은 발사속도의 경우 기병을 상대할 때는 별 가치가 없다고 주장했다.
기병이 전력으로 돌격해 올 경우 롱보우와 화승총 모두 한번의 일제사격 뒤에는 돌격하는 기병과 육박전을 벌여야 한다는 것 이었다.
또 궁수가 활을 잘 쏘려면 최상의 몸 상태를 유지해야 하지만 화약무기는 방아쇠 당길 힘만 있으면 쏠 수 있다는 점도 장점으로 꼽았다.
바윅은 마지막으로 화약무기의 파괴력은 롱보우에 비해 위력적이라는 점을 지적했다. 무엇보다 당시 유럽은 기병과 보병 모두 두꺼운 흉갑을 장비했기 때문에 롱보우로는 관통하기 어렵다는 것 이었다.
이미 백년전쟁 후반기부터 금속기술의 발달로 롱보우로는 갑주를 입은 적을 무력화 시킬 수 없었다.

어쨌든 영국 군대는 백년전쟁 이후 화약무기 장비에서 유럽의 대륙국가들에 뒤쳐졌는데 다행히도 대규모 전쟁을 치루진 않아 크게 문제가 되진 않았던 모양이다.

한가지 재미있는 이야기.

16세기 말 까지도 영국 뱃사람(대개는 해적)들은 롱보우나 석궁을 들고 돌아다녔는데 서부아프리카에서 노예사냥을 하러 갔다가 화승총을 쏴대는 현지인들에게 피박을 봤다는 기록이 많다.
총을 쏘는 흑인이 활을 쏘는 백인을 때려잡는 모습이라니. 여러분은 이 모습이 상상이 가시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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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쓰면서 베낀 책 들

Kenneth Chase, Firearms : a Global History to 1700
A. Curry, M. Hughes,Arms and Fortifications in the Hundred Years War
B. S. Hall, Weapon and Warfare in Renaissance Europe
J. R. Hale, War and Society in Renaissance Europe

댓글 10개:

  1. 이 글도 조만간 역블에 퍼가겠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m(__)m

    아.. 그러고보니 M-16을 미군이 처음 도입할 때 그 SF적인 디자인을 싫어해서 도입에 부정적인 군인들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갑자기 떠오릅니다..

    다만 초기 M-16은 베트남전에서 문제를 일으켰다는 것 같으므로 위의 경우와는 조금 다를지도 모르겠습니다. 주워들은 이야기라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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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화승총 든 원주민과 롱보우를 든 침략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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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반갑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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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서아프리카 흑인들이 든 화승총이라...아랍 상인들을 통해 손에 넣은 총이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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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지금도 저런일이 많겠죠?
    그리고 활쏘는 백인과 화승총쏘는 흑인의 대결이라...... 영화로 만들면 재미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전에는 이틀에 한번정도는 눈팅하러 들어왔는데 요즘에는 방학기간에 일하려고 위장취업한 곳이 바빠서 제대로 못들어왔습니다. 잘지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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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랄라라님 // 꾸준히 들러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하핫.

    행인님 // 뭔가 언밸런스 하지요?

    번동아제님 // 방문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슈타인호프님 // 네. 맞습니다. 서부아프리카 지역은 주로 튀니지 쪽 상인들로 부터 흘러들어갔다고 하는군요.

    아텐보로님 // 아이고. 더운여름에 산업현장을 지키시느라 고생많으십니다. 몸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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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그래도 장궁 위력은 나름대로 대단했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숙련을 위한 기간을 생각하면 역시 화승총에 비교가 안 되겠죠. 그리고 요즘 안 사실인데, 핸디 크로스보우(한손으로 쏘는 녀석)는 위력이 형편없었더군요. 발로 밀어서 장전을 해야 했던 표준 크로스보우의 위력을 생각해서 나름대로 대단한 줄 알았었는데 완전히 착각이었습니다. 우리 나라 3류 판타지 소설을 제가 너무 많이 봤나 봅니다.

    그리고 이건 다른 얘기인데, 혹시 SS경찰 기갑척탄병 사단 계통 상세에 관해서 아시면 조언 좀 해 주십시오. 찢어졌다가 합쳐졌다가 아주 제멋대로라서 도저히 모르겠습니다.

    http://panzerkatz.egloos.com/2182046
    http://panzerkatz.egloos.com/2177435

    위에 있는 건 펠트그라우에서 퍼온 거고, 아래 있는 건 "무장친위대 (1) 1-5사단"이라는 책에서 발췌한 겁니다. 대개 비슷한데 문제는 기갑척탄병 사단으로 재편성되는 부분부터 그리스 파르티잔 토벌 임무까지입니다. 이 내용이 많이 다릅니다. 거기다 후자는 기사십자장 수훈자를 19명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액시즈 히스토리에는 25명으로 나와 있습니다. 불가사의할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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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마지막으로 이 블로그 서비스는 좀 신기합니다. 리멤버 미는 도대체 뭡니까? 생각 없이 앞의 두 댓글에다가는 체크했습니다. 이번 댓글은 체크하지 말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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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장갑냐옹이님 // 하핫. 저도 SS Polizei Division에 대해선 특별히 읽은 책이 없어 잘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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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이건 아쉽되었군요. 아무래도 서적 쪽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러 해외 사이트 뒤져보니 경찰 사단 기사십사장 수훈자는 25명이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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