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nnet님이 쓰신 「잉여농산물원조와 삼백산업의 발달」을 읽다 보니 재미있는 구절이 하나 눈에 들어왔습니다.
인용해 온 글에 나타난 문제점은 당연히(?) 북조선에서도 나타났습니다.
많은 분들이 잘 아시겠지만 전후 복구과정에서 김일성은 중공업 우선발전을 주장합니다.
김일성은 1953년 8월 당 중앙위원회 제6차 전원회의 보고에서 우선적으로 발전시켜야 할 공업으로 제철, 기계, 조선, 광업, 전기, 화학, 건설자재 공업을 꼽았고 경공업에 대해서는 간략히 언급하는데 그쳤습니다. 중공업을 최우선시하겠다는 의지를 나타낸 것 입니다. 서동만에 따르면 이 발표에서 김일성은 농업에 대해서도 특별한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넵. 수령님은 북조선이 처한 사정은 고려하지 않고 중공업화를 추진하기로 이미 결심한 것 입니다. 소련의 경우 내전 이후 신경제정책에 따라 어느 정도의 전후복구가 이뤄진 상태에서 중공업화가 이뤄졌는데 김일성은 아예 전후복구 자체를 중공업화로 밀어 붙이려 한 것 입니다. 소련의 경우 이 문제를 두고 흐루쇼프와 말렌코프간의 논쟁이 있었는데 소련이야 중공업 기반이 이미 있는 나라이니 북한과는 이야기가 다르죠. 물론 전후 복구의 물주는 소련이었기 때문에 김일성은 1953년 9월 모스크바를 방문하고 돌아온 뒤 중공업 우선 노선을 잠시 보류합니다. 소련의 반대에 따라 1954년 3월의 개각에서는 경제 분야 간부의 임명이 경공업을 우선시하는 방향으로 이뤄졌습니다.
하지만 남의 말은 절대 안들어 처먹는 수령님이니 만큼 물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코 중공업 우선노선의 뜻은 꺾지 않았습니다. 중공업 우선 노선의 반격은 예상보다 일찍 시작되었는데 1954년 11월 소련의 압력에 따라 임명된 재정상 최창익의 해임, 1955년 1월 경공업상 박의완의 해임에 따라 경제 간부들의 개편이 시작됐습니다. 그 결과 중공업화를 지지하는 이주연과 이종옥이 각각 재정상과 경공업상으로 임명됩니다. 중공업 노선을 추구하는 세력이 승리한 것입니다. 중공업 우선론자들은 승리의 여세를 몰아 같은 해 12월 ‘1955년도 인민경제복구발전계획에 관한 내각결정’으로 중공업기업소의 확장과 경공업, 농촌경제를 동시에 복구 발전시킨다는 노선을 천명합니다. 이것은 표면상으로는 병행발전인데 실제로는 중공업우선 노선을 관철시키는 것 이었습니다. 하지만 이게 어디 마음먹은 대로 되겠습니까. 이미 1955년부터 공업생산목표를 달성하기 어렵게 되자 당장 1956년도 공업생산목표에 대한 수정에 들어갑니다. 물론 완전무결한 수령님은 이 문제의 원인을 국가계획위원회의 탁상 행정으로 돌리는 파렴치함을 보입니다. 이에 따라 경공업 발전을 지지하던 국가계획위원장 박창옥은 집중적인 공격을 받습니다. 그리고 1955년 12월 20일에 열린 최고인민회의 제10차 회의에서는 1956년도의 공업총생산액을 오히려 더 늘려 잡습니다. 전후 복구기간 인 1954~56년 사이에 북한은 인민경제에 대한 총 투자 중 49.6%를 공업에 투자했는데 이 중 81.1%가 중공업에 들어갔습니다. 전후 복구 기간 중 국가의 투자가 중공업에 집중되었기 때문에 경공업은 지방공업의 몫이 되었는데 사실상 지방공업은 별다른 투자를 받지 못했습니다. 성과가 신통치 못했으리라는 점은 짐작하실 수 있겠지요. 물론 중공업에 가용 가능한 자원을 싹~ 쓸어넣었기 때문에 ‘공업생산’에서 엄청난 성과를 올린 것은 '사실'입니다.
'통계상'으로.
그렇다면 농업은?
전후 복구기간 중 중공업화와 동시에 농업집단화도 적극적으로 추진됩니다. 북한은 1945년 이후 농업집단화에 성공한 매우 드문 사례에 속합니다.(여기에 대해서는 김성보의 단행본이 설명을 잘 해 놓고 있습니다.) 이미 북한의 농업집단화 비율은 1955년 봄에 전체 농가호수의 44%에 달하고 있었던 것 입니다. 이 과정에서 개인농으로 남아있던 농민, 특히 중농층은 엄청난 동요를 보입니다. 집단화에 반발한 농민들은 이미 소련의 농민들이 했던 것 처럼 가축을 도살하거나 곡물수매에 비협조 하는 방식으로 저항합니다. 농민들의 가축 도살로 인해 한우와 돼지의 두수는 1954~55년 사이에 감소했다가 집단화가 진전되어가면서 점차 증가세로 들어섭니다. 또한 집단농장의 농민들은 소극적 저항의 표시로 태업을 일삼았는데 그 결과 벼의 생산은 1954에 감소했다가 1956년에야 1953년의 생산량을 겨우 넘어섭니다. 그리고 일부 농민들은 적극적인 저항의 표시로 협동조합의 탈퇴를 시도하기도 합니다. 특히 중농이 발달했던 황해도에서의 저항은 상당한 규모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농업이 엉망으로 돌아가니 당연히 식량사정은 엉망이 됩니다. 1955년 1월 북한에서는 식량 부족에 대처하기 위해서 공업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한 달에 하루 치 식량을 아끼자는 운동을 벌입니다. 김일성은 그의 선배(?)들 처럼 농촌을 쥐어짜(?) 중공업 육성의 기반으로 삼으려 했는데 당장 공장 노동자들이 먹을 식량이 줄어드는 것은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당시 쌀 1kg의 공정가격은 5원이었는데 이미 1955년 2월 암시장에서는 400원에 거래되고 있었습니다. 일반 노동자들의 한달 임금은 1,000~1,500원 수준이었으니 고깃국은 고사하고 이밥도 못 먹을 지경이었습니다. 식량난은 매우 심각해서 함경남도의 경우 식량을 구하기 위해 주민들의 대규모 이동이 보고될 정도 였습니다. 그나마 식량 사정이 좋았던 황해도에서도 아사자가 발생할 정도였는데 헝가리 의료진이 파견된 사리원의 한 병원에는 1955년 4월~5월 사이에 20명 정도의 아사자 또는 아사직전의 환자가 실려올 정도였습니다. 수도인 평양의 사정도 좋지 않아서 소련 외교관들의 보고에 따르면 평양 일대의 야산에서는 새싹을 뜯는 여성과 어린이들이 가득했다고 합니다. 이 해 5월 춘궁기가 닥치자 식량 상황은 위기에 도달했고 북한은 소련과 중국으로 부터의 긴급 식량원조로 간신히 급한 불을 끄게 됩니다.
물론 이런 난감한 상황들은 결코 중공업화에 대한 수령님의 의지를 꺾지 못합니다. 비록 1957년 이후 소련과 동유럽의 경제원조도 줄어들었지만 북한은 천리마운동 같은 대중동원운동 등으로 60년대까지 통계상으로는 엄청난 성장을 이룩합니다.
'통계상'으로만.
대략 수박 겉핧기로 몇 가지 사례를 소개해 드렸는데 전후 복구기간 중 북한이 이룩한 인상적인 공업생산의 증가는 뒤로는 이렇게 심각한 부작용을 초래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공업생산 자체도 성장률이라는 통계수치 이면에는 심각한 문제점을 안고 있었습니다. 북한은 60년대에 베트남, 쿠바 등에 공산품을 수출하려고 노력했지만 성과는 신통치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1963년 북한이 북베트남에 수출한 강철 4,000톤 중 3,300톤이 저질이라서 반송된 것은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쿠바도 유사한 사례가 있는데 1962년 북한이 10만톤의 설탕을 기계류와 교환하는 조건으로 수출해달라고 요청했을 때 쿠바는 35,000톤의 설탕만을 보냅니다. 왜냐. 북한이 생산한 기계는 도저히 받아 쓸 만한 수준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90년대 이후 전후복구 과정에서 북한의 문제점을 예리하게 지적한 많은 연구들이 나왔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80년대 운동권에서 돌던 ‘북한바로알기’류의 괴담(?)들이 여전히 인터넷을 떠돌아다니는 것은 참으로 난감한 일 입니다.
2008년 7월 29일 화요일
2008년 7월 27일 일요일
1차대전 이후 미 육군 장교단의 인사적체 문제
1차대전이 종결된 뒤 미국은 고립주의 노선을 취하며 국제연맹에도 참여하지 않습니다. 이런 대외정책의 기조에 따라 군 병력도 급격히 감축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육군의 감축 규모가 해군 보다 더 컸습니다. 미국 전쟁부는 최소 현역 병력을 장교 17,717명과 사병 280,000 수준으로 유지해야 한다는 의견이었지만 의회에서 국방예산을 감축했기 때문에 결국에는 이에 한참 미치지 못하는 수준으로 감군을 해야 했습니다. 이에 따라 1923년 까지 미 육군은 장교 14,021명과 사병 119,222명으로 줄어들었습니다.
이렇게 제한된 인원만 군대에 남다 보니 진급 적체현상은 굉장히 심했고 장교단의 노화 현상이 두드러 졌다고 합니다. 아이젠하워의 경우 소령에서 중령으로 진급하는데 16년이 걸릴 정도였다고 하지요. 어찌나 진급적체 현상이 심했는지 1930년의 경우 육군항공대 소속의 중위 계급의 장교 494명 중 400명이 1차대전에 참전한 경험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1931년의 통계를 보면 육군의 현역 중위 중 50세 이상이 46명이었는데 이 중 최고령자는 61세였고 현역 대위 중에서는 274명이 50세 이상에 최고령자는 62세였다고 합니다. 이때 최연소 대위가 32세였으니 진급적체가 얼마나 심각했는지 알 수 있으실 겁니다. 초급 간부들이 이 정도였으니 위로 올라가면 더 심각했다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같은 해에 대령은 470명이었는데 이 중 109명이 60을 넘겼고 이 중 8명은 64세였습니다.
이런 난감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조사를 보면 현역 장교의 90%는 군대에 남길 희망했다고 합니다.
왜냐?
사회에 나가면 대공황이 기다리고 있었으니까요.
이렇게 제한된 인원만 군대에 남다 보니 진급 적체현상은 굉장히 심했고 장교단의 노화 현상이 두드러 졌다고 합니다. 아이젠하워의 경우 소령에서 중령으로 진급하는데 16년이 걸릴 정도였다고 하지요. 어찌나 진급적체 현상이 심했는지 1930년의 경우 육군항공대 소속의 중위 계급의 장교 494명 중 400명이 1차대전에 참전한 경험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1931년의 통계를 보면 육군의 현역 중위 중 50세 이상이 46명이었는데 이 중 최고령자는 61세였고 현역 대위 중에서는 274명이 50세 이상에 최고령자는 62세였다고 합니다. 이때 최연소 대위가 32세였으니 진급적체가 얼마나 심각했는지 알 수 있으실 겁니다. 초급 간부들이 이 정도였으니 위로 올라가면 더 심각했다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같은 해에 대령은 470명이었는데 이 중 109명이 60을 넘겼고 이 중 8명은 64세였습니다.
이런 난감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조사를 보면 현역 장교의 90%는 군대에 남길 희망했다고 합니다.
왜냐?
사회에 나가면 대공황이 기다리고 있었으니까요.
2008년 7월 26일 토요일
이승만 시기 수출정책에 대한 잡상
지난번에 sonnet님이 올리신 「미국의 대한원조와 경제성장의 시작」이라는 포스팅에 반론이 하나 달렸습니다. 거기에 대해서는 sonnet님이 「일본이 가진 모든 것을 우리에게 달라, 그것도 내일 당장 달라」라는 포스팅으로 다시 반론을 제기해 주셨으니 저는 사족을 조금 더 달아볼까 합니다.
박정희 시기의 경제개발도 그렇지만 이승만시기 수출정책에 대해서도 당연히 평가가 상이합니다. 하지만 한가지 확실한 것은 한국전쟁 이후 이승만의 하야까지 한국의 수출은 큰 증가 없이 정체상태에 있었습니다. 이미 sonnet님의 글에서 지적되었지만 한국의 수출은 1958년까지 계속해서 내리막길에 있었고 1958년 이후 부터의 성장도 겨우 1953년 수준의 수출을 회복하는 정도였습니다. 게다가 이승만정부의 수출5개년계획의 목표는 1961년까지 1억달러 수출을 돌파하는 것 이었는데 실제로는 1961년의 수출액은 3864만6천달러로 목표의 3분의 1 수준에 그쳤고 겨우 1953년의 수출실적과 비슷한 수준이었습니다. 1959년의 실적과 1960년의 실적도 목표치를 한참 밑돌고 있었으니 사실상 이승만정부의 수출5개년계획은 대실패였습니다. 이걸 단순히 성장률로 평가 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승만 정부하의 수출5개년계획에도 불구하고 수출 실적은 형편없었는가? 여기에 대해서는 이대근의 지적이 귀담아 들을 만 합니다. 이대근은 『해방후ㆍ1950년대의 경제』라는 저서에서 이승만 정부하에서 이뤄졌던 수출 계획의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승만 정부의 수출5개년 계획은 농수산물 등 1차 산품을 위주로 한 것이었는데 수출의 핵심이었던 미국에 대한 텅스텐 수출이나 일본에 대한 수산물 수출은 정책적인 요인에 의해서 좌우되는 경향이 강해 정부의 수출 의지만으로는 목표를 기대하기 어려웠다는 것 입니다. 이대근은 경제적 요소에 대해서는 크게 고려하지 않고 수출 상대국의 정책적 요소에 좌우되었다는 점에서 수출5개년계획은 확고한 실현가능성이 크게 부족한 상태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목표를 달성하기 어려웠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왜 이렇게 이승만 정권 하에서는 수출이 제자리 걸음을 했는가 하는 문제도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많은 경제사 연구자들이 직접적인 수출진흥책이 부족했다는 점을 이유로 들고 있습니다. 이승만 정부의 수출5개년계획이 1960년대 이후 수출에 필요한 잠재력을 축적하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이상철 조차도 이승만 정부하에서는 적극적인 수출진흥책이 사실상 전무했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습니다. 또한 산업 육성에 필요한 자금은 거의 절대적으로 원조에 의존해야 했는데 원조자금은 수출산업이 아니라 수입대체산업을 중심으로 배분되었다는 점도 많은 경제사 연구자들이 지적하는 부분입니다.
이승만 정권기에 적극적인 수출 지원책이 부족했다는 근거로 연구자들에게 많이 이용되는 것이 바로 수출보조금입니다. 수출5개년계획이 진행 중이던 1958년~1960년까지 수출 보조금은 1달러당 1.2원에서 1.3원에 불과했는데 이것은 군사정권이 들어선 직후인 1962년에는 1달러당 21.5원으로 폭증합니다. 그리고 1963년을 제외하면 수출보조금은 계속 증가하는데 1964년에는 27.4원이던 것이 1966년에는 51.6원으로 가파르게 상승합니다. 군사정권과 제 3공화국 초기에 급격한 수출 증가가 있었던 원인으로는 이렇게 직접적인 수출지원정책이 중요한 요인이었습니다. 게다가 수출5개년계획 기간인 1957년부터 1961년까지의 대외원조액이 2억7400만 달러였는데 적극적인 수출진흥책이 시행된 1962년부터 1966년까지의 대외원조액은 1억6800만 달러로 이승만 정권은 돈이 없어 적극적인 수출진흥책을 시행하지 못했다고는 보기 어려울 것 입니다.
물론 이승만 정권하에서는 직접적인 수출보조금 지급의 부족을 외화예치제도를 통한 프리미엄으로 대신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대해서도 김낙년 같은 연구자들은 외화예치제도를 통한 프리미엄이 실제로는 수출해서 벌어들인 달러를 시세로 매도해서 얻는 것이었기 때문에 결국은 과대평가된 공정환율에게 기대는 것은 마찬가지였다고 그 한계를 지적합니다.
이승만 정부가 전후 복구과정에서 어느 정도 경제를 안정시키고 향후 60년대 경제발전의 기초를 닦았다는 점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평가를 할 수 있을 것 입니다. 하지만 이 시기의 대외 수출은 제자리 걸음이었으며 이렇다 할 적극적인 수출 정책이 시행된 것도 아닙니다. 1957년부터 시행된 수출5개년계획은 구체적인 수출 증대 방안도 없이 만들어 졌으며 결과적으로 목표액의 30% 수준을 달성하는 실패로 끝났습니다. 시행된 수출 진흥책도 결과적으로는 과대평가된 공정환율에 기대는 것 이었는데 이런 방식이 계속되는한 원조 달러에 대한 의존을 끊기가 어려웠겠지요. sonnet님의 「미국의 대한원조와 경제성장의 시작」에 대해 반론하려면 이승만 시기의 수출정책이 과연 원조에 의존하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나갔는가를 설명해야 할텐데 당시의 사례를 보면 그 점에 대해서는 부정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박정희 시기의 경제개발도 그렇지만 이승만시기 수출정책에 대해서도 당연히 평가가 상이합니다. 하지만 한가지 확실한 것은 한국전쟁 이후 이승만의 하야까지 한국의 수출은 큰 증가 없이 정체상태에 있었습니다. 이미 sonnet님의 글에서 지적되었지만 한국의 수출은 1958년까지 계속해서 내리막길에 있었고 1958년 이후 부터의 성장도 겨우 1953년 수준의 수출을 회복하는 정도였습니다. 게다가 이승만정부의 수출5개년계획의 목표는 1961년까지 1억달러 수출을 돌파하는 것 이었는데 실제로는 1961년의 수출액은 3864만6천달러로 목표의 3분의 1 수준에 그쳤고 겨우 1953년의 수출실적과 비슷한 수준이었습니다. 1959년의 실적과 1960년의 실적도 목표치를 한참 밑돌고 있었으니 사실상 이승만정부의 수출5개년계획은 대실패였습니다. 이걸 단순히 성장률로 평가 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승만 정부하의 수출5개년계획에도 불구하고 수출 실적은 형편없었는가? 여기에 대해서는 이대근의 지적이 귀담아 들을 만 합니다. 이대근은 『해방후ㆍ1950년대의 경제』라는 저서에서 이승만 정부하에서 이뤄졌던 수출 계획의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승만 정부의 수출5개년 계획은 농수산물 등 1차 산품을 위주로 한 것이었는데 수출의 핵심이었던 미국에 대한 텅스텐 수출이나 일본에 대한 수산물 수출은 정책적인 요인에 의해서 좌우되는 경향이 강해 정부의 수출 의지만으로는 목표를 기대하기 어려웠다는 것 입니다. 이대근은 경제적 요소에 대해서는 크게 고려하지 않고 수출 상대국의 정책적 요소에 좌우되었다는 점에서 수출5개년계획은 확고한 실현가능성이 크게 부족한 상태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목표를 달성하기 어려웠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왜 이렇게 이승만 정권 하에서는 수출이 제자리 걸음을 했는가 하는 문제도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많은 경제사 연구자들이 직접적인 수출진흥책이 부족했다는 점을 이유로 들고 있습니다. 이승만 정부의 수출5개년계획이 1960년대 이후 수출에 필요한 잠재력을 축적하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이상철 조차도 이승만 정부하에서는 적극적인 수출진흥책이 사실상 전무했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습니다. 또한 산업 육성에 필요한 자금은 거의 절대적으로 원조에 의존해야 했는데 원조자금은 수출산업이 아니라 수입대체산업을 중심으로 배분되었다는 점도 많은 경제사 연구자들이 지적하는 부분입니다.
이승만 정권기에 적극적인 수출 지원책이 부족했다는 근거로 연구자들에게 많이 이용되는 것이 바로 수출보조금입니다. 수출5개년계획이 진행 중이던 1958년~1960년까지 수출 보조금은 1달러당 1.2원에서 1.3원에 불과했는데 이것은 군사정권이 들어선 직후인 1962년에는 1달러당 21.5원으로 폭증합니다. 그리고 1963년을 제외하면 수출보조금은 계속 증가하는데 1964년에는 27.4원이던 것이 1966년에는 51.6원으로 가파르게 상승합니다. 군사정권과 제 3공화국 초기에 급격한 수출 증가가 있었던 원인으로는 이렇게 직접적인 수출지원정책이 중요한 요인이었습니다. 게다가 수출5개년계획 기간인 1957년부터 1961년까지의 대외원조액이 2억7400만 달러였는데 적극적인 수출진흥책이 시행된 1962년부터 1966년까지의 대외원조액은 1억6800만 달러로 이승만 정권은 돈이 없어 적극적인 수출진흥책을 시행하지 못했다고는 보기 어려울 것 입니다.
물론 이승만 정권하에서는 직접적인 수출보조금 지급의 부족을 외화예치제도를 통한 프리미엄으로 대신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대해서도 김낙년 같은 연구자들은 외화예치제도를 통한 프리미엄이 실제로는 수출해서 벌어들인 달러를 시세로 매도해서 얻는 것이었기 때문에 결국은 과대평가된 공정환율에게 기대는 것은 마찬가지였다고 그 한계를 지적합니다.
이승만 정부가 전후 복구과정에서 어느 정도 경제를 안정시키고 향후 60년대 경제발전의 기초를 닦았다는 점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평가를 할 수 있을 것 입니다. 하지만 이 시기의 대외 수출은 제자리 걸음이었으며 이렇다 할 적극적인 수출 정책이 시행된 것도 아닙니다. 1957년부터 시행된 수출5개년계획은 구체적인 수출 증대 방안도 없이 만들어 졌으며 결과적으로 목표액의 30% 수준을 달성하는 실패로 끝났습니다. 시행된 수출 진흥책도 결과적으로는 과대평가된 공정환율에 기대는 것 이었는데 이런 방식이 계속되는한 원조 달러에 대한 의존을 끊기가 어려웠겠지요. sonnet님의 「미국의 대한원조와 경제성장의 시작」에 대해 반론하려면 이승만 시기의 수출정책이 과연 원조에 의존하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나갔는가를 설명해야 할텐데 당시의 사례를 보면 그 점에 대해서는 부정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2008년 7월 23일 수요일
남한과 북한의 5개년 계획에 대한 몇 가지 잡상
지난 해에 북한 경제 관련 논문을 조금 읽다가 생각난 것들을 「북한의 50~60년대 경제성장에 대한 잡상」이라는 제목으로 끄적인 적이 있었는데 최근 sonnet님 등 여러 대인들께서 이 썰렁한 잡글을 인용해 주셔서 조회수가 대폭 증가했습니다! 그리고 이 글이 인용된 것을 보니 박정희와 김일성의 공업화를 어떻게 볼 것이냐에 대한 토론이 진행되고 있더군요. 많은 분들의 견해를 접하게 되어 좋은 공부가 되었습니다.
여러 대인들께서 이 어린양의 싱거운 글에 관심을 보여주셨으니 변변찮으나마 예전에 했던 이야기에 몇 가지 사족을 달아 볼까 합니다. 깔끔하게 정리가 안된 어수선한 글이라서 미리 읽으시는 분들께 양해를 구합니다.
먼저 남한과 북한의 5개년 계획의 성격 문제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이미 sonnet님이 「미국의 대한원조와 경제성장의 시작」이라는 글에서 양자의 차이에 대해 이야기 해 주셨습니다.
요상하게도 박정희를 싫어하는 분들은 간판이 똑같다는 이유로 박정희의 5개년 계획이 김일성의 그것을 그대로 베낀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물론 근거는 전혀 없죠. 기본적으로 남한의 5개년 계획은 무역에 기반한 성장을 추구한 것인 반면 북한의 5개년 계획은 ‘자립적 민족경제’ 건설이라는 망상적 목표에 가용 자원을 싹 쓸어넣은 정신병적 도박이었기 때문입니다.
북한의 5개년 계획의 성격은 1958년 3월의 당 제1차 대표자 회의에서 채태된 결정서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 결정서에서는 “제 1차 5개년 계획 기간에 사회주의적 공업화의 토대를 확고히 축성함으로써 우리 공업의 식민지적 편파성과 기술적 락후성을 완전히 퇴치하고 민족경제의 자립적 토대를 더욱 공고히”한다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즉 5개년 계획의 목표가 ‘자립적 민족경제’ 건설에 있음을 명확히 하고 있는 것 입니다. 해외 무역을 통한 성장을 추구한 남한의 5개년 계획과 근본적인 성격 부터가 다릅니다. 그리고 이 5개년 계획은 기본적으로 중공업에 의해 이끌어져 나갈 것 이었습니다. 김일성은 이 회의에서 중공업이 없이는 경공업과 농업이 도저히 발전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1957년의 경제 성과를 예로 들어 중공업 우선노선을 반대한 세력을 공격합니다.
하지만 1957년의 경제적 성과는 소련과 동유럽의 막대한 경제 원조를 바탕으로 달성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김일성은 이 문제점에 대해서는 별로 고려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북한은 자체적으로 중공업 위주의 발전을 수행할 만한 자본이 아직 축적되어 있지 않았고 여전히 외부의 경제적 원조가 결정적인 요인이었습니다. 이 문제점은 김연철의 연구가 잘 지적하고 있는데 이미 전후 복구 3개년 계획이 종결된 시점에서 사회주의권의 원조는 감소추세에 있었고 북한은 축적된 자본의 부족과 기술수준의 저열함을 ‘정신력’으로 상쇄한다는 심히 일본제국주의 스러운 방식으로 나갑니다. 대표적인 것이 천리마 운동이지요. 외형적으로 보면 분명히 북한의 1차 5개년 계획은 생산량의 증대를 가져왔지만 실제로 그 내용을 분석하면 생산품의 질적 저하가 두드러지게 나타났습니다. 게다가 1950년대 후반기부터 소련과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에너지 공급이 감소하자 대외의존적인 북한의 중공업은 치명적 타격을 받습니다.
※ 1950년대 소련과 동유럽의 대북한 원조에 대해서는 「북한의 전후 복구에 대한 "사회주의 형제국가"들의 지원」에 조금 적은 것이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잘 알고 계시겠지만 한가지 더 이야기 하자면 1960년대 북한의 공업생산 성장률은 1950년대의 전후 복구기와 비교하면 급격히 저하되는 것이 특징입니다. 1954년부터 1960년까지의 공업 총생산액은 연평균 39%에 달했지만 1961년에 들어오면 이것은 14%로 낮아지고 1963년에는 8%로, 그리고 1964년에 17%로 증가했다가 다시 감소해 1966년에는 아예 마이너스 성장을 합니다. 북한경제는 벌써 1960년대부터 엉망이었던 것 입니다.
일단 정리하자면 김일성은 소련의 5개년 계획을 모방해 지속적인 중공업화를 추진했지만 이것은 북한 자체의 경제적 역량 미비로 실패하게 됩니다. 사회주의 국가들의 중공업화는 근본적으로 국가 자체의 자기완결적 경제체제를 만드는 것이 목표인데 이것은 제한된 자원을 중공업에 올인하는 도박이기 때문에 위험도가 높은 정책입니다. 스탈린 시절의 소련은 자체적인 경제적 자원 규모가 컸기 때문에 중공업화로 인한 후유증을 자체적으로 어느 정도 흡수할 수 있었지만 경제 규모가 작은데다 외국의 원조에 의존한 북한은 실패할 경우 그 충격을 흡수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이 실패하면서 북한 경제는 1960년대 내내 심한 부침을 거듭하며 침체에 빠졌는데 김일성은 끝까지 중공업화를 포기 하지 않기 위해서 1970년대에 서방의 자본을 통한 중공업화를 추진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다 아시다시피 대 재앙이었습니다. 지난 글에서도 이야기 했지만 1970년이 되면 이미 남한은 전체 수출의 50% 이상을 경공업 제품으로 할 수 있을 정도로 수출 기반을 마련했지만 1970년대 초반 국제 경제체제에 발을 담근 북한은 여전히 1차산업 위주의 수출에 의존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오일쇼크로 인한 원자재가 하락은 북한에게 결정타로 작용했지요.
그리고 다음으로는 「원조라는 관점을 약간 확장해 보면...」이라는 기린아 님의 글에 인용된 도표에 대해서 조금 이야기를 해 볼까 합니다. 저는 처음에 이 도표를 봤을 때 이 도표가 10년 단위의 수출 통계를 정리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가진 책을 몇 권 뒤져보니 그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 도표는 이대근의 『한국무역론』(2003)에 실린 도표와 비슷한데 이대근과 같은 자료를 참고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이대근의 한국 무역론에 실린 도표는 1961년과 1970년을 기준으로 한 수출상품의 구성 변화를 나타낸 것 입니다. 즉 기린아님의 블로그에 인용된 표의 “1960”은 아직 박정희가 집권하기 전인 1961년의 수출구조를 나타내는 것이고 “1970”은 글자 그대로 1970년의 수출구조를 보여주는 것 입니다.
이대근의 연구에 따르면 1961년도의 수출은 1위가 철광석(13.0%), 2위가 중석(12.6%), 3위가 생사(6.7%), 4위가 무연탄(5.8%), 5위가 오징어(5.5%), 6위가 활선어(4.5%), 7위가 흑연(4.2%), 8위가 합판(3.3%), 9위가 쌀(3.3%), 10위가 돼지털(3.0%)로 나타납니다. 하지만 1차 5개년 계획의 성공과 뒤 이은 2차 5개년 계획의 성공으로 이런 구조는 급격히 변화합니다. 1970년의 수출 구조를 보면 1위는 섬유류(40.8%), 2위는 합판(11.0%), 3위는 가발(10.8%), 4위는 광산물(5.9%), 5위는 전자제품(3.5%), 6위는 과자류(2.3%), 7위는 신발류(2.1%), 8위는 담배(1.6%), 9위는 철강제품(1.5%), 10위는 금속제품(1.5%)로 변화되어 있습니다. 즉 이미 1960년대 중반 이후 남한의 수출구조는 1차산업에서 2차산업으로 변화해 있었고 1970년의 수출구조 통계는 그 것의 결과를 보여주는 것 입니다. 북한이 여전히 1차산업 생산품 위주의 수출을 구상하고 있을 때 남한은 이미 오래 전에 수출구조를 혁신하는데 성공한 것 입니다. 물론 김낙년이 지적한 것 처럼 1960년대 남한의 공업화는 부실한 재무구조를 가진 수출기업 등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지만 시작부터 제자리에서 부침을 거듭하다가 스스로의 모순에 짓눌려 자빠져 버린 1960년대의 북한의 공업화와는 비교할 수 없는 대성공이었습니다.
여러 대인들께서 이 어린양의 싱거운 글에 관심을 보여주셨으니 변변찮으나마 예전에 했던 이야기에 몇 가지 사족을 달아 볼까 합니다. 깔끔하게 정리가 안된 어수선한 글이라서 미리 읽으시는 분들께 양해를 구합니다.
먼저 남한과 북한의 5개년 계획의 성격 문제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이미 sonnet님이 「미국의 대한원조와 경제성장의 시작」이라는 글에서 양자의 차이에 대해 이야기 해 주셨습니다.
요상하게도 박정희를 싫어하는 분들은 간판이 똑같다는 이유로 박정희의 5개년 계획이 김일성의 그것을 그대로 베낀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물론 근거는 전혀 없죠. 기본적으로 남한의 5개년 계획은 무역에 기반한 성장을 추구한 것인 반면 북한의 5개년 계획은 ‘자립적 민족경제’ 건설이라는 망상적 목표에 가용 자원을 싹 쓸어넣은 정신병적 도박이었기 때문입니다.
북한의 5개년 계획의 성격은 1958년 3월의 당 제1차 대표자 회의에서 채태된 결정서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 결정서에서는 “제 1차 5개년 계획 기간에 사회주의적 공업화의 토대를 확고히 축성함으로써 우리 공업의 식민지적 편파성과 기술적 락후성을 완전히 퇴치하고 민족경제의 자립적 토대를 더욱 공고히”한다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즉 5개년 계획의 목표가 ‘자립적 민족경제’ 건설에 있음을 명확히 하고 있는 것 입니다. 해외 무역을 통한 성장을 추구한 남한의 5개년 계획과 근본적인 성격 부터가 다릅니다. 그리고 이 5개년 계획은 기본적으로 중공업에 의해 이끌어져 나갈 것 이었습니다. 김일성은 이 회의에서 중공업이 없이는 경공업과 농업이 도저히 발전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1957년의 경제 성과를 예로 들어 중공업 우선노선을 반대한 세력을 공격합니다.
하지만 1957년의 경제적 성과는 소련과 동유럽의 막대한 경제 원조를 바탕으로 달성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김일성은 이 문제점에 대해서는 별로 고려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북한은 자체적으로 중공업 위주의 발전을 수행할 만한 자본이 아직 축적되어 있지 않았고 여전히 외부의 경제적 원조가 결정적인 요인이었습니다. 이 문제점은 김연철의 연구가 잘 지적하고 있는데 이미 전후 복구 3개년 계획이 종결된 시점에서 사회주의권의 원조는 감소추세에 있었고 북한은 축적된 자본의 부족과 기술수준의 저열함을 ‘정신력’으로 상쇄한다는 심히 일본제국주의 스러운 방식으로 나갑니다. 대표적인 것이 천리마 운동이지요. 외형적으로 보면 분명히 북한의 1차 5개년 계획은 생산량의 증대를 가져왔지만 실제로 그 내용을 분석하면 생산품의 질적 저하가 두드러지게 나타났습니다. 게다가 1950년대 후반기부터 소련과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에너지 공급이 감소하자 대외의존적인 북한의 중공업은 치명적 타격을 받습니다.
※ 1950년대 소련과 동유럽의 대북한 원조에 대해서는 「북한의 전후 복구에 대한 "사회주의 형제국가"들의 지원」에 조금 적은 것이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잘 알고 계시겠지만 한가지 더 이야기 하자면 1960년대 북한의 공업생산 성장률은 1950년대의 전후 복구기와 비교하면 급격히 저하되는 것이 특징입니다. 1954년부터 1960년까지의 공업 총생산액은 연평균 39%에 달했지만 1961년에 들어오면 이것은 14%로 낮아지고 1963년에는 8%로, 그리고 1964년에 17%로 증가했다가 다시 감소해 1966년에는 아예 마이너스 성장을 합니다. 북한경제는 벌써 1960년대부터 엉망이었던 것 입니다.
일단 정리하자면 김일성은 소련의 5개년 계획을 모방해 지속적인 중공업화를 추진했지만 이것은 북한 자체의 경제적 역량 미비로 실패하게 됩니다. 사회주의 국가들의 중공업화는 근본적으로 국가 자체의 자기완결적 경제체제를 만드는 것이 목표인데 이것은 제한된 자원을 중공업에 올인하는 도박이기 때문에 위험도가 높은 정책입니다. 스탈린 시절의 소련은 자체적인 경제적 자원 규모가 컸기 때문에 중공업화로 인한 후유증을 자체적으로 어느 정도 흡수할 수 있었지만 경제 규모가 작은데다 외국의 원조에 의존한 북한은 실패할 경우 그 충격을 흡수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이 실패하면서 북한 경제는 1960년대 내내 심한 부침을 거듭하며 침체에 빠졌는데 김일성은 끝까지 중공업화를 포기 하지 않기 위해서 1970년대에 서방의 자본을 통한 중공업화를 추진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다 아시다시피 대 재앙이었습니다. 지난 글에서도 이야기 했지만 1970년이 되면 이미 남한은 전체 수출의 50% 이상을 경공업 제품으로 할 수 있을 정도로 수출 기반을 마련했지만 1970년대 초반 국제 경제체제에 발을 담근 북한은 여전히 1차산업 위주의 수출에 의존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오일쇼크로 인한 원자재가 하락은 북한에게 결정타로 작용했지요.
그리고 다음으로는 「원조라는 관점을 약간 확장해 보면...」이라는 기린아 님의 글에 인용된 도표에 대해서 조금 이야기를 해 볼까 합니다. 저는 처음에 이 도표를 봤을 때 이 도표가 10년 단위의 수출 통계를 정리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가진 책을 몇 권 뒤져보니 그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 도표는 이대근의 『한국무역론』(2003)에 실린 도표와 비슷한데 이대근과 같은 자료를 참고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이대근의 한국 무역론에 실린 도표는 1961년과 1970년을 기준으로 한 수출상품의 구성 변화를 나타낸 것 입니다. 즉 기린아님의 블로그에 인용된 표의 “1960”은 아직 박정희가 집권하기 전인 1961년의 수출구조를 나타내는 것이고 “1970”은 글자 그대로 1970년의 수출구조를 보여주는 것 입니다.
이대근의 연구에 따르면 1961년도의 수출은 1위가 철광석(13.0%), 2위가 중석(12.6%), 3위가 생사(6.7%), 4위가 무연탄(5.8%), 5위가 오징어(5.5%), 6위가 활선어(4.5%), 7위가 흑연(4.2%), 8위가 합판(3.3%), 9위가 쌀(3.3%), 10위가 돼지털(3.0%)로 나타납니다. 하지만 1차 5개년 계획의 성공과 뒤 이은 2차 5개년 계획의 성공으로 이런 구조는 급격히 변화합니다. 1970년의 수출 구조를 보면 1위는 섬유류(40.8%), 2위는 합판(11.0%), 3위는 가발(10.8%), 4위는 광산물(5.9%), 5위는 전자제품(3.5%), 6위는 과자류(2.3%), 7위는 신발류(2.1%), 8위는 담배(1.6%), 9위는 철강제품(1.5%), 10위는 금속제품(1.5%)로 변화되어 있습니다. 즉 이미 1960년대 중반 이후 남한의 수출구조는 1차산업에서 2차산업으로 변화해 있었고 1970년의 수출구조 통계는 그 것의 결과를 보여주는 것 입니다. 북한이 여전히 1차산업 생산품 위주의 수출을 구상하고 있을 때 남한은 이미 오래 전에 수출구조를 혁신하는데 성공한 것 입니다. 물론 김낙년이 지적한 것 처럼 1960년대 남한의 공업화는 부실한 재무구조를 가진 수출기업 등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지만 시작부터 제자리에서 부침을 거듭하다가 스스로의 모순에 짓눌려 자빠져 버린 1960년대의 북한의 공업화와는 비교할 수 없는 대성공이었습니다.
1949년 5월 영등포 미군장교클럽에서 가장 많이 팔린 것은?
1949년의 주한미군사고문단 문서들을 읽다 보니 중간에 아주 재미있는 문서 하나가 나왔습니다. 바로 1949년 5월 영등포 미군기지의 장교클럽에서 판매된 물품들의 목록입니다. 이 목록은 클럽의 지배인인 J. C. Harold 상사가 작성하고 클럽 담당 장교인 William R. Alderman 중위가 서명한 것인데 구체적인 내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Officers Club Yong Dung Po Installation Merchandise Inventory
저 내역에 따르면 1949년 5월 클럽에서 가장 많이 팔린 물품은 코카콜라였고 그 다음은 맥주였습니다. 이 두 품목의 판매량이 너무 압도적이어서 다른 물건들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정도입니다. 이 당시 한국 근무는 극도로 인기가 없었고 한국으로 발령나는 장교나 사병들은 거의 대부분 한국 생활을 싫어했다고 합니다. 아마도 많은 장교들은 한국 생활의 고달픔을 콜라나 맥주를 마시고 수다를 떨면서 달랜 모양입니다.
어쨌든 꽤 재미있는 자료입니다. 만약 다른 시기의 자료도 있었다면 더 재미있는 비교가 가능했겠지만 5월 한달치 밖에 못구한게 조금 아쉽군요.
그리고. 어쨌든 결론이 없으면 심심하니 한 마디만 더 하겠습니다.
승리의 코카콜라!
저 내역에 따르면 1949년 5월 클럽에서 가장 많이 팔린 물품은 코카콜라였고 그 다음은 맥주였습니다. 이 두 품목의 판매량이 너무 압도적이어서 다른 물건들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정도입니다. 이 당시 한국 근무는 극도로 인기가 없었고 한국으로 발령나는 장교나 사병들은 거의 대부분 한국 생활을 싫어했다고 합니다. 아마도 많은 장교들은 한국 생활의 고달픔을 콜라나 맥주를 마시고 수다를 떨면서 달랜 모양입니다.
어쨌든 꽤 재미있는 자료입니다. 만약 다른 시기의 자료도 있었다면 더 재미있는 비교가 가능했겠지만 5월 한달치 밖에 못구한게 조금 아쉽군요.
그리고. 어쨌든 결론이 없으면 심심하니 한 마디만 더 하겠습니다.
2008년 7월 20일 일요일
수령님의 꿈도 가끔은 이뤄진다
지금은 미라가 되어 세계에서 가장 괴상한 관광상품이 되신 수령님께서는 살아 생전에 많은 꿈을 꾸셨습니다. 수령님은 북조선 인민들이 모두 기와집에 살면서 이밥에 고깃국을 먹을 날을 꿈 꾸셨으며 북조선 전체를 지상낙원으로 만들 것을 꿈꾸셨습니다.
물론 이건 꿈으로만 그쳤고 실현된건 없습니다.
그런데.
수령님이 꿈 꾼 것 중에서 이뤄진 것이 하나 있습니다!
전에 한번 내용을 소개했었던 『Kim Il Sung in the Khrushchev Era』라는 책의 51쪽에는 수령님께서 기계공업을 육성해 미래에는 각국에 Made in DPRK 로고가 새겨진 기계를 수출한다는 포부를 밝히셨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그 꿈은 실현되었으니...
정밀기계인 미사일은 북조선의 주요 수출품이 되었습니다.
물론 이건 꿈으로만 그쳤고 실현된건 없습니다.
그런데.
수령님이 꿈 꾼 것 중에서 이뤄진 것이 하나 있습니다!
전에 한번 내용을 소개했었던 『Kim Il Sung in the Khrushchev Era』라는 책의 51쪽에는 수령님께서 기계공업을 육성해 미래에는 각국에 Made in DPRK 로고가 새겨진 기계를 수출한다는 포부를 밝히셨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그 꿈은 실현되었으니...
정밀기계인 미사일은 북조선의 주요 수출품이 되었습니다.
2008년 7월 18일 금요일
대인배 워커 장군
1950년 11월, 슬금 슬금 중국 인민해방군의 한국전쟁 개입이 확실해지고 있었습니다. 이미 제 1기병사단은 운산 전투에서 중국군에게 타격을 받았으며 최전선에서는 다수의 중국군 포로가 생포되고 있었습니다. 이 상황에서 도쿄의 맥아더 사령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미군 지휘관들은 불안감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이무렵 8군 사령관 워커 중장도 전선 시찰을 나가서 중국군 포로를 심문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물론 워커 중장도 중국군의 본격적인 개입을 우려하고 있었지만 그는 불안감을 느끼는 부하들을 생각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이무렵 8군 사령관 워커 중장도 전선 시찰을 나가서 중국군 포로를 심문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물론 워커 중장도 중국군의 본격적인 개입을 우려하고 있었지만 그는 불안감을 느끼는 부하들을 생각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그래. 이 녀석은 중국인인것 같아. 하지만 LA에 멕시코인이 많다고 해서 LA를 멕시코 도시라고 하진 않잖아."
"Well, he might be Chinese, but remember they have a lot of Mexicans in Los Angeles but you don't call LA a Mexican city."
David Halberstam, 『The Coldest Winter : America and the Korean War』, Hyperion, 2007, p.383
2008년 7월 17일 목요일
총통각하 생가방문 + 잘츠부르크, 린츠
바로 전날에는 아주 편하게 잘 잤습니다. 기분 좋게 잠을 잘 자서 그런지 평범한 아침 식사도 아주 근사하게 느껴지더군요.
아침식사도 즐겁게 마치고 호텔을 나섰습니다. 호텔을 나와서 호텔 앞에 붙은 설명을 보니 300년 정도 된 호텔이더군요.
그런데 브라우나우 암 인 같은 시골에는 왜 왔느냐?
바로 이분 때문에 왔습니다!
↓↓↓↓
↓↓↓↓
↓↓↓↓
↓↓↓↓
아리안 백만볼트!!!
그렇습니다. 이 시골동네에는 이분의 생가가 있는 것이죠.
바로 이 집입니다.
총통의 생가이긴 하지만 총통각하는 그다지 착한 사람은 아니었기 때문에 기념비는 당연히 없습니다. 대신 집 앞에는 강제수용소에서 희생된 사람들을 추모하는 추모비가 대신 서 있습니다.
히틀러 생가의 바로 옆 건물은 엑스박스를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게임가게가 들어 앉아 있었습니다. 이 가게는 덤으로 포르노도 취급하더군요.
히틀러 생가로 가는 길에 지나갔던 탑인데 돌아가면서 보니 1966년에 재건한 탑이더군요. 처음 봤을 때는 꽤 오래된 물건인줄 알았는데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콘크리트로 만들었던 예전의 광화문을 생각하니 복원 하나는 잘 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브라우나우 시내(라고 해봐야 얼마 안되는)를 잠시 구경했습니다.
브라우나우의 Rathaus. 이런 작은동네의 Rathaus는 뭐라고 번역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간단히 시내 구경을 마친 뒤 잘즈부르크로 가기 위해서 기차역으로 돌아갔습니다.
린츠와 마찬가지로 잘즈부르크도 기차를 두 번 갈아타야 합니다.
독일도 그렇지만 시골의 철도 노선은 중간 중간 귀여운 간이역들이 많아서 여행객들을 즐겁게 합니다.
물론 지나가는 풍경들도 마음을 편하게 해 주지요. 여름철에 왔어야 하는데 하는 아쉬움이 듭니다.
그리고 잘즈부르크에 도착했습니다. 만약 전날 기차에서 졸지만 않았다면 오후 늦게 브라우나우 암 인에 도착해 히틀러 생가를 구경한 뒤 다시 밤 기차로 잘즈부르크로 돌아왔을 텐데 졸다가 린츠까지 가는 바람에 계획이 어긋나 버렸습니다.
역 앞에는 1차 대전당시 Kaiserschützen 연대들에 소속된 전몰용사들의 추모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예술의 도시 입구에서 전쟁의 흔적을 마주치니 기분이 묘했습니다.
Kaiserschützen 연대 전몰자 추모비
※ Kaiserschützen에 대한 영문판 위키피디아 항목은 매우 소략합니다. 독일어판 위키피디아 항목이 훨씬 내용이 잘 정리되어 있더군요.
시간이 넉넉하다면 역에서 구시가지 중심까지 걸어갔겠지만 이미 반나절은 날려먹은 터라 별수 없이 버스를 탔습니다. 일단 성당광장과 잘즈부르크 성을 우선적으로 구경하기로 했습니다.
성당 광장에는 커다란 체스판도 있더군요. 사진으로는 많이 봤는데 직접 보니 더 재미있어 보였습니다.
성당 내부는 매우 근사했는데 유감스럽게도 사진을 모두 말아먹었습니다. 제대로 찍힌게 한 장도 없어서 못 올리게 됐습니다.;;;;;
그리고 다시 성당광장으로 나와 잘즈부르크 성으로 올라가는 전동차를 타러 갔습니다.
목표가 보인다!!!
전동차를 타고 올라가는게 예전에 한 번 가봤던 하이델베르크 성이 생각나더군요. 물론 반쯤 폐허가 된 하이델베르크 성과는 달리 잘즈부르크 성은 아주 상태가 양호해서 즐거웠습니다만.
산 꼭대기로 올라가니 전망이 정말 좋았습니다!
잠시 경치를 감상한 뒤 성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성 내부의 많은 구역을 관람할 수 없었습니다. 당장 기념품 가게 하나와 화장실을 제외하곤 다른 부대 시설들도 문을 닫았더군요. 비수기라 그런건지... 달리 설명문도 없어서 영문을 모르겠더군요. 여름에 다시 오라는 건지...(물론 여름에 또 간다면야 저는 정말 좋겠습니다만.)
그런데 성 안에서 놀라운 것을 발견했습니다. 설마 오스트리아에도 허 총재님이 공화당 지부를 만드셨나 싶었습니다!
성에서 내부를 관람할 수 있었던 장소는 몇 군데 되지 않았습니다.
한 방에는 잘즈부르크성이 건립된 당시 부터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기 까지의 변화과정을 모형으로 전시해 놓고 있었습니다. 꽤 재미있더군요.
이 방 말고 감옥으로 쓰이던 작은 방도 구경했는데 너무 어두워서 제 고물 똑딱이로는 사진이 잘 안나오더군요. 전망대 까지 올라가는데 중간에 아무 사진도 없으면 휑할것 같아 그냥 복도 사진을 한 장 올립니다.
성 위의 전망대로 올라가니 갑자기 바람이 세게 불어서 눈을 뜨기가 조금 어려웠습니다. 다행히 금방 바람이 잦아 들더군요.
그리고 아래를 내려다 보다 보니 꽤 멋진 집이 한 채 눈에 들어왔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던 작은 지도에는 별 다른 설명이 없는걸 보니 유명한 건물은 아닌 것 같은데 경치 하난 좋더군요.
전망대 위에 서서 한참 경치를 구경하다 보니 갑자기 미나스 티리스의 성벽위에 올라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거 영화를 너무 열심히 봤나...
다음으로는 마리오네트를 전시해 놓은 방이 있었는데 이건 뭔가 잘즈부르크 성과 안 어울리는게 아닌가 싶었습니다. 군사시설이었던 건물에 인형을 전시해 놓으니 뭔가 괴이한 느낌이 들더군요.
잘즈부르크 성의 유명한 곳 몇 군데를 구경할 수 없어서 아쉽긴 했지만 어쩔 수 없이 그냥 내려왔습니다. 다른 관광지들도 다 비슷하지만 왜 이렇게 겨울에는 구경하지 못하는 곳이 많은지 모르겠네요.
내려와서 간식으로 슈니첼을 넣은 샌드위치를 사 먹었습니다. 뜨끈뜨끈 했다면 좋았겠지만 원래 이 어린양은 느끼한 것을 좋아하는 지라 먹을만 하더군요.
그리고 구시가지 구경을 계속 했습니다. 중간에 모차르트 생가에도 들렀는데 사진은 찍지 않았습니다.
St.Blasius Kirche
거리를 돌아다니다 보니 역시 모차르트를 벗겨먹고 사는 동네라는걸 잘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도플러의 생가도 잘츠부르크에 있다는건 이날 처음 알았습니다.
다음으로는 모차르트가 이사해서 살았던 집으로 가 봤습니다. 모차르트 기념관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관광객들의 유로를 빨아먹는 곳이죠.
기념관 내부의 전시물 구성이나 배치는 만족스러웠습니다. 중간에 모차르트가 여행했던 지역을 표시해 주는 대형 지도도 있었는데 이게 가장 멋지더군요.
모차르트 기념관을 구경한 뒤 잘츠부르크 중앙역으로 되돌아 갔습니다. 시간이 넉넉했다면 Leopoldskron을 구경하고 싶었는데 여긴 나중에 여름철에 오는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아쉽지만 이미 시간을 너무 많이 썼는지라...
그리고 다음 목적지인 린츠로 향했습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인스부르크→브라우나우 암 인→잘츠부르크→린츠 순서가 되어야 했는데 하필 전날 기차에서 졸다가 잘즈부르크를 지나쳐 버려서 인스부르크→린츠→브라우나우 암 인→잘츠부르크의 순서가 되다 보니 린츠 구경은 애시당초 물건너 갔습니다. 지도를 보면 아시겠지만 잘츠부르크에서 브라우나우로 가는 거리가 린츠에서 브라우나우로 가는 거리보다 훨씬 짧지요. 정말 이럴땐 시간이 너무 아깝습니다.
하지만 그냥 린츠를 지나치기도 아쉬워서 잠시 들러 저녁이나 먹고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시내 구경을 잠시 하다가 혹시 뭐 재미있는 책이 없을까 싶어 한 대형서점에 들어갔는데 2차대전사 서적은 개설서들 뿐이고 톰 크루즈 자서전 같은 것만 잔뜩 쌓여 있더군요. 역시 헌책방이 최고 입니다.
저녁은 터키 요리 비스무리한 음식을 파는 터키인 가게에서 먹었습니다. 터키 요리를 독일인들 입맛에 맞게 바꾼 음식들을 팔았는데 마치 한국의 중국집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저녁 식사를 한 뒤 마지막 목적지인 빈으로 가는 기차를 기다렸습니다. 여행의 마지막이 보이기 시작하니 기분이 묘했습니다. 즐겁기도 하고 아쉽기도 하고...
빈으로 가는 마지막 ICE를 기다리면서 맥주를 한 병 마셨습니다.
아침식사도 즐겁게 마치고 호텔을 나섰습니다. 호텔을 나와서 호텔 앞에 붙은 설명을 보니 300년 정도 된 호텔이더군요.
그런데 브라우나우 암 인 같은 시골에는 왜 왔느냐?
바로 이분 때문에 왔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시골동네에는 이분의 생가가 있는 것이죠.
바로 이 집입니다.
총통의 생가이긴 하지만 총통각하는 그다지 착한 사람은 아니었기 때문에 기념비는 당연히 없습니다. 대신 집 앞에는 강제수용소에서 희생된 사람들을 추모하는 추모비가 대신 서 있습니다.
히틀러 생가의 바로 옆 건물은 엑스박스를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게임가게가 들어 앉아 있었습니다. 이 가게는 덤으로 포르노도 취급하더군요.
히틀러 생가로 가는 길에 지나갔던 탑인데 돌아가면서 보니 1966년에 재건한 탑이더군요. 처음 봤을 때는 꽤 오래된 물건인줄 알았는데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콘크리트로 만들었던 예전의 광화문을 생각하니 복원 하나는 잘 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브라우나우 시내(라고 해봐야 얼마 안되는)를 잠시 구경했습니다.
간단히 시내 구경을 마친 뒤 잘즈부르크로 가기 위해서 기차역으로 돌아갔습니다.
린츠와 마찬가지로 잘즈부르크도 기차를 두 번 갈아타야 합니다.
독일도 그렇지만 시골의 철도 노선은 중간 중간 귀여운 간이역들이 많아서 여행객들을 즐겁게 합니다.
물론 지나가는 풍경들도 마음을 편하게 해 주지요. 여름철에 왔어야 하는데 하는 아쉬움이 듭니다.
그리고 잘즈부르크에 도착했습니다. 만약 전날 기차에서 졸지만 않았다면 오후 늦게 브라우나우 암 인에 도착해 히틀러 생가를 구경한 뒤 다시 밤 기차로 잘즈부르크로 돌아왔을 텐데 졸다가 린츠까지 가는 바람에 계획이 어긋나 버렸습니다.
역 앞에는 1차 대전당시 Kaiserschützen 연대들에 소속된 전몰용사들의 추모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예술의 도시 입구에서 전쟁의 흔적을 마주치니 기분이 묘했습니다.
※ Kaiserschützen에 대한 영문판 위키피디아 항목은 매우 소략합니다. 독일어판 위키피디아 항목이 훨씬 내용이 잘 정리되어 있더군요.
시간이 넉넉하다면 역에서 구시가지 중심까지 걸어갔겠지만 이미 반나절은 날려먹은 터라 별수 없이 버스를 탔습니다. 일단 성당광장과 잘즈부르크 성을 우선적으로 구경하기로 했습니다.
성당 광장에는 커다란 체스판도 있더군요. 사진으로는 많이 봤는데 직접 보니 더 재미있어 보였습니다.
성당 내부는 매우 근사했는데 유감스럽게도 사진을 모두 말아먹었습니다. 제대로 찍힌게 한 장도 없어서 못 올리게 됐습니다.;;;;;
그리고 다시 성당광장으로 나와 잘즈부르크 성으로 올라가는 전동차를 타러 갔습니다.
전동차를 타고 올라가는게 예전에 한 번 가봤던 하이델베르크 성이 생각나더군요. 물론 반쯤 폐허가 된 하이델베르크 성과는 달리 잘즈부르크 성은 아주 상태가 양호해서 즐거웠습니다만.
산 꼭대기로 올라가니 전망이 정말 좋았습니다!
잠시 경치를 감상한 뒤 성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성 내부의 많은 구역을 관람할 수 없었습니다. 당장 기념품 가게 하나와 화장실을 제외하곤 다른 부대 시설들도 문을 닫았더군요. 비수기라 그런건지... 달리 설명문도 없어서 영문을 모르겠더군요. 여름에 다시 오라는 건지...(물론 여름에 또 간다면야 저는 정말 좋겠습니다만.)
그런데 성 안에서 놀라운 것을 발견했습니다. 설마 오스트리아에도 허 총재님이 공화당 지부를 만드셨나 싶었습니다!
성에서 내부를 관람할 수 있었던 장소는 몇 군데 되지 않았습니다.
한 방에는 잘즈부르크성이 건립된 당시 부터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기 까지의 변화과정을 모형으로 전시해 놓고 있었습니다. 꽤 재미있더군요.
이 방 말고 감옥으로 쓰이던 작은 방도 구경했는데 너무 어두워서 제 고물 똑딱이로는 사진이 잘 안나오더군요. 전망대 까지 올라가는데 중간에 아무 사진도 없으면 휑할것 같아 그냥 복도 사진을 한 장 올립니다.
성 위의 전망대로 올라가니 갑자기 바람이 세게 불어서 눈을 뜨기가 조금 어려웠습니다. 다행히 금방 바람이 잦아 들더군요.
그리고 아래를 내려다 보다 보니 꽤 멋진 집이 한 채 눈에 들어왔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던 작은 지도에는 별 다른 설명이 없는걸 보니 유명한 건물은 아닌 것 같은데 경치 하난 좋더군요.
전망대 위에 서서 한참 경치를 구경하다 보니 갑자기 미나스 티리스의 성벽위에 올라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거 영화를 너무 열심히 봤나...
다음으로는 마리오네트를 전시해 놓은 방이 있었는데 이건 뭔가 잘즈부르크 성과 안 어울리는게 아닌가 싶었습니다. 군사시설이었던 건물에 인형을 전시해 놓으니 뭔가 괴이한 느낌이 들더군요.
잘즈부르크 성의 유명한 곳 몇 군데를 구경할 수 없어서 아쉽긴 했지만 어쩔 수 없이 그냥 내려왔습니다. 다른 관광지들도 다 비슷하지만 왜 이렇게 겨울에는 구경하지 못하는 곳이 많은지 모르겠네요.
내려와서 간식으로 슈니첼을 넣은 샌드위치를 사 먹었습니다. 뜨끈뜨끈 했다면 좋았겠지만 원래 이 어린양은 느끼한 것을 좋아하는 지라 먹을만 하더군요.
그리고 구시가지 구경을 계속 했습니다. 중간에 모차르트 생가에도 들렀는데 사진은 찍지 않았습니다.
거리를 돌아다니다 보니 역시 모차르트를 벗겨먹고 사는 동네라는걸 잘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도플러의 생가도 잘츠부르크에 있다는건 이날 처음 알았습니다.
다음으로는 모차르트가 이사해서 살았던 집으로 가 봤습니다. 모차르트 기념관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관광객들의 유로를 빨아먹는 곳이죠.
기념관 내부의 전시물 구성이나 배치는 만족스러웠습니다. 중간에 모차르트가 여행했던 지역을 표시해 주는 대형 지도도 있었는데 이게 가장 멋지더군요.
모차르트 기념관을 구경한 뒤 잘츠부르크 중앙역으로 되돌아 갔습니다. 시간이 넉넉했다면 Leopoldskron을 구경하고 싶었는데 여긴 나중에 여름철에 오는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아쉽지만 이미 시간을 너무 많이 썼는지라...
그리고 다음 목적지인 린츠로 향했습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인스부르크→브라우나우 암 인→잘츠부르크→린츠 순서가 되어야 했는데 하필 전날 기차에서 졸다가 잘즈부르크를 지나쳐 버려서 인스부르크→린츠→브라우나우 암 인→잘츠부르크의 순서가 되다 보니 린츠 구경은 애시당초 물건너 갔습니다. 지도를 보면 아시겠지만 잘츠부르크에서 브라우나우로 가는 거리가 린츠에서 브라우나우로 가는 거리보다 훨씬 짧지요. 정말 이럴땐 시간이 너무 아깝습니다.
하지만 그냥 린츠를 지나치기도 아쉬워서 잠시 들러 저녁이나 먹고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시내 구경을 잠시 하다가 혹시 뭐 재미있는 책이 없을까 싶어 한 대형서점에 들어갔는데 2차대전사 서적은 개설서들 뿐이고 톰 크루즈 자서전 같은 것만 잔뜩 쌓여 있더군요. 역시 헌책방이 최고 입니다.
저녁은 터키 요리 비스무리한 음식을 파는 터키인 가게에서 먹었습니다. 터키 요리를 독일인들 입맛에 맞게 바꾼 음식들을 팔았는데 마치 한국의 중국집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저녁 식사를 한 뒤 마지막 목적지인 빈으로 가는 기차를 기다렸습니다. 여행의 마지막이 보이기 시작하니 기분이 묘했습니다. 즐겁기도 하고 아쉽기도 하고...
빈으로 가는 마지막 ICE를 기다리면서 맥주를 한 병 마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