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1월 28일 월요일

만헤이 전투 당시 격파된 다스 라이히 사단의 판터

지난 글에서 만헤이 이야기가 나온 김에 만헤이 옆동네 그랑므닐에 전시되어 있는 판터 사진을 몇장 올려볼까 합니다. 2008년에 벨기에에 놀러갔다가 찍은 사진입니다. 귀국한 뒤 블로그에 몇 장을 올렸었는데 지난번에 올리지 않았던 사진까지 더해서 크기도 조금 더 키워서 올려볼까 합니다. 사진을 올려놓고 보니 여행이 가고 싶군요. ㅋ













2011년 11월 26일 토요일

만헤이 전투, 그리고 구술자료에 대한 잡상 하나

갑자기 잡상이 떠올라서;;;;

1944년 겨울, 독일군의 아르덴느 지구 반격당시 전개된 만헤이Manhay 전투는 우연적인 요소로 인해 영화와 같은 활극이 펼쳐진 것으로 유명합니다. 이 전투에서 무장친위대 기갑사단 다스 라이히의 전차 에이스 에른스트 바르크만Ernst Barkmann이 지휘하는 한대의 판터가 야간의 혼란속에 우연히 미군의 한복판으로 들어가 혼란을 일으키며 승리를 이끌어 내지요. 전략적으로는 별 의미가 없는 작은 전투였지만 전술적으로는 상당히 재미있는 요소가 있는 전투입니다. 제 개인적으로도 상당히 흥미를 가지고 있어서 2008년에 벨기에에 갔을 때 만헤이와 그랑므닐Grandmenil을 잠깐 답사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전투의 실상은 독일어권 밖에서는 한동안 잘 알려져 있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순전히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여기에는 몇가지 이유가 있을 것 같습니다. 먼저 아르덴느 공세가 워낙에 대규모 전투였으니 양측에서 대대급 내외의 전력이 격돌한 만헤이 전투에는 상대적으로 관심이 덜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긴 합니다. 게다가 바스토뉴와 같이 미군의 선전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혼란속에 패주한 전투이기도 하군요.

미국의 입장에서 아르덴느 전역을 충실하게 정리한 미육군 공간사 The Ardennes :  Battle of the Buldge(1965)에서는 독일군이 선두에 노획한 셔먼을 앞장세워 미군을 기만했다고 서술하고 있습니다.1) 이 서술에서 지칭하고 있는 위장 셔먼은 아무리 봐도 바르크만의 판터에 대한 서술입니다. 미국 공간사는 노획한 독일자료, 전 독일군 출신자들에 대한 방대한 구술자료를 참고하여 독일의 움직임에 대해서도 상당한 수준을 보여주고 있지만 세세한 부분에서는 조금씩의 문제점을 보이고 있는 것 입니다. 미육군 공간사는 지금 시각에서 보더라도 매우 훌륭한 작전사 연구이고 후대의 연구에서도 계속 인용되고 있습니다. 미육군 공간사의 영향인지 1990년대의 저작에서도 독일군이 만헤이 전투에서 노획한 셔먼을 선두에 세운 기만공격을 했다는 이야기가 나타나고 있습니다.2) 제가 2007년에 번역했던 「Das Reich 기갑연대 4중대의 만헤이(Manhay) 전투」에 인용된 미군들의 증언을 보면 이들은 바르크만의 전차를 분명히 독일 전차로 파악하고 있었는데 어째서 노획한 셔먼이 공격의 선봉에 섰다고 미육군의 공간사에 기록된 건지 궁금합니다.

제가 아는 한도 내에서는 만헤이 전투당시 바르크만의 일대 활극이 대중적으로 알려진 계기는 무장친위대 장교 출신인 오토 바이딩어Otto Weidinger가 집필한 다스 라이히 사단사 Division Das Reich(1982) 5권을 통해서가 아닌가 싶습니다. 이 저작에서 바이딩어는 바르크만의 회고에 크게 의존하여 만헤이 전투 부분을 서술했습니다.3) 그리고 다스 라이히 사단사에 실린 바르크만의 회고가  J. P. Pallud의 The Battle of the Bulge: Then and Now(1986)에 번역, 수록되어 영어권에 소개되었습니다. 영어로 번역된 내용은 채승병님에 의해 한국어로 번역되어 소개되었고 이것은 많은 분들이 읽어보셨을 겁니다. 어쨌든 Division Das Reich가 1982년, The Battle of the Bulge: Then and Now가 1986년에 처음 출간되었는데 영어권에서 1990년대에 출간된 벌지전투에 대한 몇몇 저작에서도 만헤이 전투에 대한 서술이 1960년대의 미국 공간사를 답습한 것을 보면 만헤이 전투는 정말 큰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2차대전이라는 거대한 역사적 사건 속에서 만헤이 전투는 정말 작은 일화에 불과합니다. 1960년대의 미국 공간사의 사소한 오류가 계속해서 반복된 것을 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만약 활극의 주인공이었던 바르크만이 1945년 그의 전차가 피탄 당했을 때 전사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물론 그래도 많은 생존자들이 있었으니 어떤 식으로든 만헤이 전투에 대한 독일측 이야기는 완성되었을 겁니다. 하지만 활극의 주인공이 빠진 어딘가 빈 것 같은 방식이 되지 않았을까 합니다. 바르크만이 생존했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는 이 작은 전투의 독일측 이야기를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 비록 인간의 기억력에는 한계가 있어 구술자료는 많은 제약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바르크만과 같이 특별한 경험을 한 사람의 구술은 문서로 된 사료의 한계를 벗어나게 해주는 좋은 자료입니다.


1) Hugh M. Cole, The Ardennes :  Battle of the Buldge(Center of Military History U.S. Army, 1993), p.589
2) Trevor N. Dupuy, David L. Bongard and Richard C. Anderson. Jr, Hitler’s last gamble : The battle of the bulge, December 1944-January 1945, (Harper Perennial, 1994/1995), p.257에서도 그와 같은 서술을 하고 있습니다.
3) Otto Weidinger, Division Das Reich : Der Weg der 2.SS Panzer-division “Das Reich” Bd.5, (Nation Europa, 1999), pp.370~380

2011년 11월 24일 목요일

일조각의 2012년 달력

일조각 출판사에서 2012년 달력을 보내왔습니다.



언제나 그렇듯 달력의 디자인은 동일합니다. 색상만 조금 변했군요. 노란색은 제가 회색 다음으로 좋아하는 색이라서 매우 마음에 듭니다. 


2009년에 처음 일조각과 일을 시작한 이래로 3년이 지났습니다. 들어간 시간에 비해서 아직 거둔 성과는 많이 부족한데 앞으로 달력이 쌓이는 만큼 결과물을 많이 만들고 싶습니다. 올해는 그래도 나름 성과가 하나 있었는데 내년 이맘때 쯤 달력을 받을 때 다음 결과물이 나와 있을지 궁금합니다.

부지런히 일을 해야 겠습니다.

2011년 11월 17일 목요일

예일대 출판부의 2012년 봄 카탈로그를 살펴보니

예일대학교 출판부의 2012년 봄 카탈로그를 살펴 보니 당연히 재미있어 보이는 책이 몇 권 눈에 들어옵니다. 몇 권은 꼭 사야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4월에는 2011년 세계를 뒤흔든 아랍의 봄에 대한 단행본이 한권 나올 모양입니다. The Battle for the Arba Spirng이라는 제목인데 출간된 뒤 서평을 보고 구매하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5월 출간예정작 중에서는 Thomas Friedrich의 Hitler's Berlin : Abused City가 눈에 띄입니다. 히틀러가 베를린을 어떻게 변화시켜 나갔는지, 그리고 변화시켜 가려 했는지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군요. 도시계획에 대한 내용이 주를 이루겠지만 꽤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나오는대로 구매할 생각입니다.

6월에는 네 권의 책이 눈에 들어옵니다.
첫 번째는 Alison Pargeter의 Libya : The Rise and Fall of Qaddafi입니다. 리비아 문제에 생소한 미국독자를 대상으로 하는 만큼 제게도 꽤 도움이 될 것 같군요. 일단 서평이 나오면 구매를 생각해 봐야 겠습니다.
유명한 Annals of Communism Series에서는 레닌그라드 전투에 대한 자료들을 엮은 The Leningrad Blockade가 출간될 예정이라는군요. 전부 66종의 문서가 실릴 예정이라는데 매우 기대가 됩니다.특히 공산당과 비밀경찰이 어떤 식으로 도시의 통제를 유지했는지에 대해 많은 것을 이야기 해줄 것 같습니다. 이건 무조건 구매입니다.
세번째는 2차대전 직후 독일인에 대한 인종청소를 다룬 R. M. Douglas의 Orderly and Humane 입니다.역시 무조건 구매해야 겠습니다.
마지막으로 Mordechai Bar-On의 모세 다얀 전기가 눈에 들어옵니다. 꽤 재미있을 것 같은데 이건 서평을 보고 생각해 보는게 좋겠군요.

2011년 11월 12일 토요일

스탈린그라드 3부작에 대한 데이빗 글랜츠의 인터뷰

『독소전쟁사』를 함께 작업했던 분들과 진행하던 데이빗 글랜츠의 스탈린그라드 3부작이 잠시 보류되었습니다. 1권 일부는 번역된 상태였지만 3부작이 아직 완결된 상태도 아닌데다 분량 자체가 많아서 접촉해본 출판사들이 약간 부담을 느낀게 큰 원인이었습니다. 완전히 취소된 것은 아니고 마지막 3부가 나온 뒤에 다시 협상해볼 여지는 있습니다만 아쉬운 것은 사실입니다.

다행인 것은 스탈린그라드 3부작 대신 2차대전에 관한 다른 재미있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되었다는 것 입니다. 새 프로젝트는 2013년 쯤 출간될 수 있을 것 입니다. 저는 지금 준비중인 책이 예정대로 2012년에 마무리되면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당분간 스탈린그라드 프로젝트가 진행되지 못하는 것이 아쉽긴 합니다. 제 블로그에 들러주시는 분 들 중에서는 이미 원서를 읽으신 분들도 많으시겠지만 번역본을 기다리시던 분도 많으실 것 같아 더 아쉽습니다. 그래서 아직 원서를 읽어보지 못한 분들을 위해 World War 2, 2010년 5/6월호에 실린 “스탈린그라드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고투하는 데이빗 M 글랜츠(David M. Glantz Fights for the Truth About Stalingrad)”라는 글을 소개해 볼까 합니다. 이 짧은 인터뷰는 글랜츠가 3부작 중 앞의 두권의 핵심을 밝히고 있기 때문에 스탈린그라드 3부작이 어떤 성격의 저술인지 파악하는데 유용한 길잡이 입니다. 인터뷰 자체도 꽤 재미있습니다.


“스탈린그라드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고투하는 데이빗 M 글랜츠”

러시아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퇴역 육군 대령 데이빗 글랜츠는 최근 공개된 소련 문헌들을 집대성하여 연구한, 자료들로 가득찬 책을 출간했다. 글랜츠의 목표는 그의 표현을 따르자면 “진실에 근거하여” 오랫동안 이어진 신화의 실체를 폭로하는 것이다. 글랜츠가 최근 출간한 서사적인 대작, To the Gates of Stalingrad와  Armageddon in Stalingrad는 역사상 가장 장대했던 전투를 새로운 시각으로 다시 쓴 것이다. 예를 들면, 글랜츠와 공저자 조나단 하우스는 붉은군대의 규율을 유지하는 책임을 맡았던, 소련의 잔혹한 비밀경찰 NKVD의 문헌들을 처음으로 활용한 연구자들이다. “비밀경찰의 자료들은 사기의 저하라던가, 검열이 얼마나 이루어졌는지, 탈영병의 숫자라던가 하는 것들을 놀랄만큼 솔직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글랜츠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과거 이 전투의 인간적인 측면에 대해서는 추론에 의거해 쓰여졌습니다. 하지만 사료에 근거해 쓰여진 적은 없었지요.”

산토로(Gene Santoro) : 진실에 근거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요?

글랜츠 : 제 뜻은, 신화를 걷어내고 실제 사실의 복원을 시작하기 위해서 양측의 기록을 검토한다는 것 입니다. 전쟁이 어떻게 수행되었는지, 어느 정도까지 수행되었는지 등에 대해 충분한 결론을 얻지 못한다면 전쟁의 전체적인 맥락하에서 정치적, 경제적, 또는 사회적인 요소들에 대해 판단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의 역사가들은 작전이 아니라 사회적인 문제들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것들은 모두 군사적인 현실이라는 구조에 속한 것 입니다.

산토로 : 왜 스탈린그라드를 선택하셨습니까?

글랜츠 :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대한 책은 1950년대 초반 이래 수백권에 달합니다. 초기의 많은 저작들은 독일측의 회고록이나 특정한 독일측 인물에 관한 것 이었습니다. 1980년대에서 1990년대까지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대한 저작들은 근본적으로 앞서 언급한 독일측 자료에다 주로 소련 제62군을 지휘했던 바실리 추이코프의 회고록과 같은 제한된 소련측 자료에 의존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저작들은 상당히 정확하고 훌륭합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러한 저작들은 스탈린그라드 전역의 전체적인 측면과 스탈린그라드의 시가전에 대해서 기본적으로 동일한 결론으로 귀결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결론들은 많은 부분이 잘못된 것 입니다.

산토로 : 예를 들자면?

글랜츠 : 한가지 일반적인 관점을 들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1941년 바르바로사 작전당시 소련군이 독일군에 맞서면서 막대한 인명피해를 입은 것과 달리 1942년 블라우 작전 당시 스탈린은 땅을 내주고 시간을 벌기 위해서 소련군을 매우 빨리 퇴각하게 했으며 보다 방어에 용이한 선 까지 물러선 뒤에는 반격에 나섰다는 것 입니다. 이것은 완전히 틀린 것 입니다. 스탈린은 블라우 작전이 시작되는 순간 부터 물러서지 말고 싸울 것을 명령했습니다. 전쟁 전 기간 동안 스탈린의 전략은 어디에선가 누군가는 무너질 것이라는 생각으로  언제나 어디서건 공격하는 것 이었습니다.

산토로 : 붉은군대는 스탈린그라드로 밀려가는 와중에도 공격을 했다는 것 인가요?

글랜츠 : 널리 퍼진 믿음과는 달리 블라우 작전의 초기에는 소련군의 역습, 반격, 심지어는 대규모의 반격에 의해 치열한 전투가 전개되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반격은 7월에 독일군의 북익에 가해졌습니다. 스탈린은 1941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전차군과 그 밖의 새롭게 편제된 부대를 투입했습니다. 이러한 반격에는 소련군이 500에서 1,000여대 정도의 전차를 투입해 대규모의 전차전이 전개되었습니다.

산토로 : 소련군의 반격은 어떠한 성과를 거두었습니까?

글랜츠 : 최초의 반격은 매우 형편없이 지휘되었고 그랬기 때문에 많은 것을 달성하지는 못했습니다. 독일군에게 소모를 강요한 것을 제외한다면. 7월 말에도 반격이 감행되었습니다. 두개의 새로 편성된 소련 전차군이 돈강 만곡부에 투입되었고 새로 편성된 62군의 지원을 받아 반격을 감행했습니다. 대규모의 전차전이 거의 3주간에 걸쳐 전개되었으며 독일군의 계획을 혼란에 빠뜨렸습니다.

산토로 : 왜 그랬습니까?

글랜츠 : 공세에 나선 독일군의 보병 전력이 1941년 보다 약화되어 있었으며 기갑 부대의 진격을 뒤따르는 많은 보병 부대가 루마니아군이나 이탈리아군이었는데 이들은 히틀러를 위해 죽고 싶은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1942년에는 소련군이 포위되어 전투력을 상실하더라도 병력은 포위망을 벗어나 잠적하거나 나중에 붉은군대에 재합류 할 수 있었습니다.

산토로 : 독일의 계획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글랜츠 : 독일 제6군이 진격하면서 양 측방, 특히 돈 강을 따라 이어진 선을 보호해야 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제6군의 병력 중 진격에 투입할 수 있는 규모는 계속 줄어들었습니다. 독일 제6군이 돈강 만곡부를 정리한 뒤 스탈린그라드 시가지를 점령하기 위해 공세를 개시했습니다. 이 때가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가장 중요한 시점일 것 입니다. 독일군의 계획은 돈 강을 도하한 뒤 기갑군단을 선봉에 세운 양익으로 볼가강까지 진격하여 스탈린그라드를 점령하는 것 이었습니다. 스탈린그라드를 각각 북쪽과 남쪽방향에서 진입하여 전투를 치르지 않고 점령한다는 것 이었습니다.

산토로 : 무엇이 독일군을 저지했습니까?

글랜츠 : 독일군이 공격을 시작하자마자 소련군은 반격을 시작했습니다. 소련군의 반격은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고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지만 북익의 독일 기갑군단을 완전히 붙잡아 둘 수 있었고 이 기갑군단이 스탈린그라드 방향으로 병력을 투입할 수 없도록 했습니다. 소련군의 반격은 독일군 3개 사단이 40km에 걸쳐 방어에 묶여있도록 한 것 입니다. 이들은 최후의 시가전이 전개된 스탈린그라드 북쪽 외곽의 공업지대로 진입할 수 없었습니다. 독일군 공세의 남익은 계획대로 진격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스탈린그라드 북쪽에서 소련군이 취한 대응이 독일 제6군 사령관 파울루스의 계획을 방해했습니다.

산토로 : 파울루스는 어떻게 해야 했을까요?

글랜츠 : 파울루스가 스탈린그라드 시가지를 제압하기 위해 투입할 수 있었던 전력은 보병군단 1개에 불과했습니다. 이 군단은 3개 보병사단과 약간의 지원부대로 구성되었고 제6군 전력의 3분의1 정도였습니다. 파울루스는 스탈린그라드에 기갑부대를 투입할 수 없었기 때문에 보병부대를 서쪽에서 부터 돌입시켜 블럭 단위, 도로 단위로 진격해야 했습니다. 파울루스는 기갑사단들이 소모될 때 까지 공격에 기갑부대를 선봉에 세우려고 했습니다. 독일 제6군이 시가지 중앙을 장악하고 북쪽으로 공격하려 했을 무렵 독일 기갑전력은 소모되었고 소모전에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1942년 10월 쯤되면 독일군의 연대는 대대규모가, 사단은 연대규모가 되었고 제6군은 기껏해야 군단 규모의 전력이었을 겁니다.

산토로 : 소련군의 전략은 무엇이었습니까?

글랜츠 : 스탈린그라드가 함락되지 않도록 병력을 시가지로 밀어넣는 것 이었습니다. 이들은 희생양이었습니다. 1만명의 사단이 다음날이면 500명만 남곤 했습니다. 소련군의 많은 사단이 소모되고 남은 수준의 규모에 불과했습니다. 대부분의 저작에서 정예부대로 묘사되는 제13근위소총병사단은 시가전이 일어나기 두 달 전에 괴멸되었습니다. 이 부대는 절반정도의 훈련만 마치고 장비는 편제의 3분의1 만 갖춘채로 투입되었습니다. 영화 에너미 앳 더 게이트로 유명해진 제284소총병사단은 3개 연대 중 1개 연대만 소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마치 무하마드 알리의 로프-어-도프(rope-a-dope : 로프에 기대서 상대방의 공격을 흡수하며 지치기를 기다리는 전법) 전술과 같았습니다. 소련군 총사령부, 스타브카(СТАВКА)가 스탈린그라드 전선군 사령관 예료멘코와 정치위원 흐루쇼프가 볼가강을 건너 스탈린그라드로 가지 못하게 한 것은 잔인한 일 이었습니다. 총사령부는 예료멘코와 흐루쇼프가 스탈린그라드에서 죽어가는 병사들에게 동정심을 느끼게 되어 스탈린그라드를 포기할 것을 우려하고 있었습니다.

산토로 : 독일군은 어떻게 대응했습니까?

글랜츠 : 스탈린그라드는 독일군에겐 고기 분쇄기였습니다. 투입하는 사단 마다 소모되었고 이때문에 측면에서 새로운 사단을 차출해야 했습니다. 독일 제6군의 손실규모를 살펴 보면 대부분의 사단이 전투 초기에는 전투가능이라고 평가받았습니다. 그런데 일주일만 지나도 이 사단들은 약체화 되었거나 소모되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소모율이 기록적인 수준이었습니다. 독일 공군이 시가지를 황폐화시킨 것은 이 문제를 더 심각하게 하는 요인이었을 뿐 입니다. 11월 초가 되면 독일군은 사단들이 소모된 상황이었습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진정한 소모전이었던 겁니다.

산토로 : 독일군은 어떻게 공세를 계속해 나갔습니까?

글랜츠 : 독일군은 B집단군에 소속된 공병대대를 모두 긁어모았습니다. 이들은 11월 11일의 마지막 공세에 투입되었습니다. 그랬기 대문에 이탈리아군과 루마니아군을 제외하면 돈 강을 따라 이어지는 선을 방어할 병력이 없었습니다. 헝가리군도 이미 최전선에 투입되어 있었습니다. B집단군의 좌익은 동맹군으로 구성된 집단군이었던 셈입니다. 소련군은 정보를 통해 이러한 약점을 잘 알고 있었고 이 지점에 반격을 가했습니다.

산토로 : 스탈린은 어떠한 유형의 지도자였습니까?

글랜츠 : 스탈린이 전쟁 첫 해에는 사소한 부분 까지 간섭하다가 스탈린그라드 전역이 전개될 무렵에는 군지휘관들에게 결정을 맡기고 이에 따라 소련군 지휘관들은 큰 범주에서만 스탈린의 지휘를 받으면서 전쟁을 치렀다는 신화가 있습니다. 이것은 잘못된 것 입니다. 스탈린은 전쟁 기간 내내 통제권을 쥐고 있었습니다. 1941년에 스탈린의 완고함과 반격에 대한 고집은 막대한 대가를 치르게 했지만 붉은군대가 한번 패배를 겪으면 와해될 것이라는 히틀러의 중요한 가정이 실현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1942년 레닌그라드 전투와 모스크바 전투를 겪고 난 뒤 스탈린과 게오르기 주코프 원수는 똑같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두 사람은 무자비하게 인력을 소모하더라도 계속 싸우면  숫적으로 열세인 적이 소모될 것이라는 점을 잘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작전은 대략 1400만명의 군 사망자(military dead)를 냈습니다. 이러한 댓가를 치르면서 훨씬 더 많은 경험을 쌓고 전투로 단련된 우수한 독일 국방군을 무찌를 수 있었던 것 입니다.

엄살

“이 전쟁에서 우리가 질 수도 있다.... 독일놈들은 우리 보다 훨씬 더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지만 우리보다 더 잘 싸우고 있다.”
(We can still lose this war... The Germans are colder and hungrier than we are, but they fight better)

패튼의 1945년 1월 4일자 일기에서, Trevor N. Dupuy, Hitler’s Last Gamble : The Battle of the Buldge, December 1944-January 1945, (Harper Collins, 1994), p.342에서 재인용

2011년 11월 4일 금요일

중소분쟁 당시 소련군의 T-62 회수/파괴작전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20-1에 실린  D.S. Riabushkin와 V.D. Pavliuk의 글 “Soviet Artillery in the Battles for Damanskii Island”를 읽다 보니 127쪽에서 130쪽 까지 중소분쟁 당시 중국측이 소련군의 T-62를 노획한 경위가 짤막하게 실려있었습니다. 회수작전 자체가 상당히 재미있게 전개되었는지라 간단히 소개를 해 볼까 합니다.

1969년 3월 15일, 이만 국경수비대의 지휘관 레오노프(Д. В. Леонов) 대령은 다만스키 섬의 중국군 방어진지 후방으로 침투하기 위해서 제135 차량화소총병 사단 전차대대에서 1개 전차소대를 차출합니다. 이 대대는 T-62를 장비하고 있었습니다. 레오노프 대령은 4대의 T-62 중 545호차를 타고 선두에서 서서 전진했습니다. 그런데 중국군도 아무 생각없이 후방을 비워놓은 것은 아니었고 레오노프 대령은 선두에서 전진하다가 중국군이 얼어붙은 우수리강의 빙판에 구축한 지뢰밭에 걸려서 전차를 잃게 됩니다. 그리고 탈출과정에서 레오노프 대령과 545호차의 장전수가 전사합니다. 지휘관인 레오노프 대령이 전사하자 나머지 세대의 T-62는 퇴각했습니다.

문제는 T-62가 신형전차로 중국군의 손에 넘어가서는 안되는 존재였다는 점 입니다. 소련군은 즉시 지뢰밭에 격파되어 방치된 545호차를 회수하기 위한 작전에 돌입합니다. 중국군이 545호차를 견인해가려는 것은 뻔한 것 이었기 때문에 작전은 최대한 빨리 진행되어야 했습니다. 원래 작전은 3월 16일에 실시되어야 했으나 놀랍게도 이날 지방선거가 열려서 투표를 해야 한다는 이유로 작전이 연기되었습니다!

소련군의 회수작전은 선거 다음날인 3월 17일 개시되었습니다. 중국군은 소련군의 기동을 파악할 수 있는 위치에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있었기 때문에 소련군의 작전 개시와 함께 포격을 시작했습니다. 소련군은 이에 대해 제13독립 로켓포대대의 BM-21 로켓포와 제378포병연대의 M-30 122mm포 24문과 D-1 152mm포 12문을 동원해 반격했습니다. 이중 제3대대 7, 8포대의 152mm 포는 중국군이 투입한 4대의 ISU-122를 제압하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소련군의 포격은 효과적이어서 중국군의 ISU-122 한대가 완파되었고 다른 한대도 손상을 입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나머지 두대의 ISU-122는 근처의 숲으로 도망쳤습니다. 그러나 정작 견인작전은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545호차에 견인 케이블을 연결하려는 과정에서 한명이 전사하고 한명이 부상당한 것 입니다.

견인작전이 실패로 돌아가자 소련군은 그냥 T-62를 폭파하기로 결정합니다. 그런데 첫 번째 폭파시도는 폭약이 너무 적어서 실패했고 두 번째 폭파시도는 폭약은 충분했으나 전차의 내부에 폭약을 설치하지 않고 전차의 바닥에 놓고 터뜨려서 실패했다고 합니다. 폭약으로 격파하는 것이 두 번 다 실패하자 이번에는 소련이 보유한 괴물 박격포, 240mm구경의 M-240 2문이 급거 투입되었습니다. 그러나 240mm 박격포도 별 효과가 없어서 좀 더 정확한 152mm 포를 투입하기로 합니다. 여기에는 제378포병연대 8포대 소속의 152mm포 2문이 투입되었습니다. 소련군은 처음에는 고폭탄으로 사격했으나 얼음을 깨뜨려 T-62를 가라앉히는 것으로 계획을 바꾸게 됩니다. 이를 위해 3월 말 378포병연대 2대대의 122mm포 12문이 동원되어 얼음을 깨뜨려 버립니다. 545호차가 강바닥이 주저앉자 소련측은 작전이 성공이라고 판단하고 4월에 포병부대들을 철수시켜 버립니다. 다만 중국군이 어떻게든 회수하려는 시도를 할 것에 대비해 T-62가 가라앉은 지점을 감시할 수 있는 위치에 기관총을 배치합니다.

그리고 중국군은 위력적인 소련군의 포병이 철수하자 T-62 회수작전을 재개합니다. 이번에는 가라앉은 전차를 회수하기 위해 해군 소속의 잠수부들을 차출해서 회수팀에 포함시켰습니다. 중국군은 4월 20일 경부터 먼저 잠수부들을 동원해 545호차의 포탑을 먼저 회수했습니다. 강 건너의 소련군은 기관총으로 중국군을 계속해서 공격했지만 중국군은 10일 내내 근성을 발휘해 매일 밤 기관총 사격을 무릅쓰고 잠수부들을 물속에 집어넣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5월 1일~2일 야간에 걸처 강바닥에 가라앉은 545호차의 차체에 케이블을 연결하는데 성공해 전차를 회수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중국인들은 근성을 발휘해 꽤 근사한 전리품을 손에 넣었고 우리는 오늘날 이것을 베이징에 가서 구경할 수 있습니다. 저도 2008년에 545호차를 보고 중국인들의 근성에 경의를 표한바 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