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1월 26일 토요일

만헤이 전투, 그리고 구술자료에 대한 잡상 하나

갑자기 잡상이 떠올라서;;;;

1944년 겨울, 독일군의 아르덴느 지구 반격당시 전개된 만헤이Manhay 전투는 우연적인 요소로 인해 영화와 같은 활극이 펼쳐진 것으로 유명합니다. 이 전투에서 무장친위대 기갑사단 다스 라이히의 전차 에이스 에른스트 바르크만Ernst Barkmann이 지휘하는 한대의 판터가 야간의 혼란속에 우연히 미군의 한복판으로 들어가 혼란을 일으키며 승리를 이끌어 내지요. 전략적으로는 별 의미가 없는 작은 전투였지만 전술적으로는 상당히 재미있는 요소가 있는 전투입니다. 제 개인적으로도 상당히 흥미를 가지고 있어서 2008년에 벨기에에 갔을 때 만헤이와 그랑므닐Grandmenil을 잠깐 답사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전투의 실상은 독일어권 밖에서는 한동안 잘 알려져 있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순전히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여기에는 몇가지 이유가 있을 것 같습니다. 먼저 아르덴느 공세가 워낙에 대규모 전투였으니 양측에서 대대급 내외의 전력이 격돌한 만헤이 전투에는 상대적으로 관심이 덜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긴 합니다. 게다가 바스토뉴와 같이 미군의 선전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혼란속에 패주한 전투이기도 하군요.

미국의 입장에서 아르덴느 전역을 충실하게 정리한 미육군 공간사 The Ardennes :  Battle of the Buldge(1965)에서는 독일군이 선두에 노획한 셔먼을 앞장세워 미군을 기만했다고 서술하고 있습니다.1) 이 서술에서 지칭하고 있는 위장 셔먼은 아무리 봐도 바르크만의 판터에 대한 서술입니다. 미국 공간사는 노획한 독일자료, 전 독일군 출신자들에 대한 방대한 구술자료를 참고하여 독일의 움직임에 대해서도 상당한 수준을 보여주고 있지만 세세한 부분에서는 조금씩의 문제점을 보이고 있는 것 입니다. 미육군 공간사는 지금 시각에서 보더라도 매우 훌륭한 작전사 연구이고 후대의 연구에서도 계속 인용되고 있습니다. 미육군 공간사의 영향인지 1990년대의 저작에서도 독일군이 만헤이 전투에서 노획한 셔먼을 선두에 세운 기만공격을 했다는 이야기가 나타나고 있습니다.2) 제가 2007년에 번역했던 「Das Reich 기갑연대 4중대의 만헤이(Manhay) 전투」에 인용된 미군들의 증언을 보면 이들은 바르크만의 전차를 분명히 독일 전차로 파악하고 있었는데 어째서 노획한 셔먼이 공격의 선봉에 섰다고 미육군의 공간사에 기록된 건지 궁금합니다.

제가 아는 한도 내에서는 만헤이 전투당시 바르크만의 일대 활극이 대중적으로 알려진 계기는 무장친위대 장교 출신인 오토 바이딩어Otto Weidinger가 집필한 다스 라이히 사단사 Division Das Reich(1982) 5권을 통해서가 아닌가 싶습니다. 이 저작에서 바이딩어는 바르크만의 회고에 크게 의존하여 만헤이 전투 부분을 서술했습니다.3) 그리고 다스 라이히 사단사에 실린 바르크만의 회고가  J. P. Pallud의 The Battle of the Bulge: Then and Now(1986)에 번역, 수록되어 영어권에 소개되었습니다. 영어로 번역된 내용은 채승병님에 의해 한국어로 번역되어 소개되었고 이것은 많은 분들이 읽어보셨을 겁니다. 어쨌든 Division Das Reich가 1982년, The Battle of the Bulge: Then and Now가 1986년에 처음 출간되었는데 영어권에서 1990년대에 출간된 벌지전투에 대한 몇몇 저작에서도 만헤이 전투에 대한 서술이 1960년대의 미국 공간사를 답습한 것을 보면 만헤이 전투는 정말 큰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2차대전이라는 거대한 역사적 사건 속에서 만헤이 전투는 정말 작은 일화에 불과합니다. 1960년대의 미국 공간사의 사소한 오류가 계속해서 반복된 것을 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만약 활극의 주인공이었던 바르크만이 1945년 그의 전차가 피탄 당했을 때 전사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물론 그래도 많은 생존자들이 있었으니 어떤 식으로든 만헤이 전투에 대한 독일측 이야기는 완성되었을 겁니다. 하지만 활극의 주인공이 빠진 어딘가 빈 것 같은 방식이 되지 않았을까 합니다. 바르크만이 생존했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는 이 작은 전투의 독일측 이야기를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 비록 인간의 기억력에는 한계가 있어 구술자료는 많은 제약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바르크만과 같이 특별한 경험을 한 사람의 구술은 문서로 된 사료의 한계를 벗어나게 해주는 좋은 자료입니다.


1) Hugh M. Cole, The Ardennes :  Battle of the Buldge(Center of Military History U.S. Army, 1993), p.589
2) Trevor N. Dupuy, David L. Bongard and Richard C. Anderson. Jr, Hitler’s last gamble : The battle of the bulge, December 1944-January 1945, (Harper Perennial, 1994/1995), p.257에서도 그와 같은 서술을 하고 있습니다.
3) Otto Weidinger, Division Das Reich : Der Weg der 2.SS Panzer-division “Das Reich” Bd.5, (Nation Europa, 1999), pp.370~3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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