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태어난 황강동이란 동네는 우리 14대 조상 때 부터 대대로 살아오던 경주 김씨 양반 씨족부락이었읍니다. 100여 호 되는 마을에서 타성받이라고는 다섯 손가락에 꼽힐 정도였고 그것도 우리 마을에 데릴사위로 왔다든가 머슴을 살던 사람뿐이었으니까요.
양반이라고는 하지만 구한말 때 약간의 벼슬을 한 것을 제외하고는 내내 몰락의 길을 밟은 전형적인 몰락양반이었읍니다. 따라서 새로운 시대의 교육을 일부러 거부하고 봉건적 사고방식을 고집한 선조들 덕분에 우리 마을은 개화니 문명이니 하고는 상당히 거리가 멀었읍니다. 그래도 몰락 봉건층의 지조랄까 그런 것은 있어서 일제에 대해서는 굉장히 반감을 가졌읍니다. 우리는 어렸을 때 부터 누가 뭘 좀 잘못하면 저놈 왜놈 물 먹었구나, 고약한 냄새가 나면 왜냄새가 나는구나 하는 소리를 흔히 들으면서 자랐으니까요. 그렇다고 독립투사가 거기서 나왔냐하면 그것도 아니었읍니다. 그냥 시대의 발전을 주체적으로 수용하거나 극복해 내지 못하고 퇴보해 가는 선비의 모습이 남아 있었던 것 입니다.
때문에 우리 마을에서는 해방이 되고 한참이 지났어도 학교를 제대로 구경한 사람이 거의 없었읍니다. 마을 서당이 76년도에도 있었을 정도면 짐작이 갈 겁니다. 나도 어릴 때는 서당을 국민학교와 함께 다녀야 했고 중고등학교 다닐 때도 방학이 되어 집에 오면 서당엘 나가야 했읍니다. 그때는 나 자신도 인근에 하나밖에 없는 우리 마을 서당이 자랑스러웠을 뿐 아니라 명심보감을 읽는 것은 좋은 것이라는 생각을 철썩같이 믿고 있었읍니다. 동네 어른들이 쥐뿔도 아무것도 없으면서 우리는 아직도 서당이 있는 양반동네라는 자부심만 잔뜩 가지고 유교적 전통을 고집하는 분위기가 은연중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영향을 안 미칠 수가 없었던 것 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내겐 아직도 유교적 잔재가 많이 남아있는 것 같습니다. 그게 사람들과 대중적으로 어울린다든지 하는 데 조금 안 좋게 작용한다는 것을 종종 느낄 때가 있거든요.
김문수, 1985년 8월 『현장』과의 인터뷰에서.
현장 편집부, 「어느 실천적 지식인의 자기 반성 : 노동현장 속의 지식인 김문수」, 『현장』제6집, (돌베게, 1986), 128쪽
자아비판으로 부터 30년이 다 되어 가지만 이 분의 유교적 잔재는 여전하신 듯 싶습니다. 자아비판 한번 더 하셔야 할 듯.
흠...그분의 많은 부분을 이해하게 해주는 아주 훌륭한 자아비판이자 인터뷰네요.
답글삭제재밌지요.
삭제1. 그래도 주변 평에 의하면 저 사람은 의정활동할때 지역구 어르신들이나 그냥 "낮은 사람들"에게 꽤 공손히 대했다고 하지요. 아는 분들은 "그 사건"을 접하고 " 저 사람 왜 저렇게 됬냐고 혀 찬분 많았습니다. ㅋㅋㅋ
답글삭제2. 웹에서 x라도 x 소리 듣는 본인이지만(....) 사실 고향은 서울이고 부모님이 저분 고향 근처십니다. ㅋㅋ 모친이 그래서 저분을 특히 좋아하시죠 ㅋㅋ , 근데 모친말 들으면 저 동네가 주변에서는 알아주는 벽촌이라고 합니다. 모친 동네도 그렇게 부촌은 아니지만서도 말 그대로 몰락양반(비속어 수정)들이 모여사는 x촌이라고 하면 아는 정도
1. 지나가는 이야길 들어보면 김문수의 도지사로서 업무 수행능력에 대한 평가는 매우 좋은 것 같습니다. 주로 나이 드신 분들의 평가이긴 합니다만 도지사 시절의 손학규 만큼 평가가 좋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지난번에 문제가 되었던 119 전화건을 보면 공문원들을 아랫것으로 보는 인식이 박혀있는건 아닌가 의심이 됩니다.
삭제2. 말씀을 듣고 보니 그곳에 꼭 한번 가보고 싶어지는군요. 저는 여행을 다니면 그런 동네를 가는지라.
국회의원 시절에 모교에 1년에 한 두번씩 찾아와 귀빈(?)치고는 짧은 연설(?)로 학우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을 받은게 인상에 깊은데 도지사가 된 이후에 들려오는 소리가 영... OTL
답글삭제유능한 인물이고 노동운동가로서의 활동에 대해서는 존경할만한 인물입니다. 하지만 말씀하신 것 처럼 도지사가 된 이후의 몇몇 행보는 실망스러운 것이 사실입니다. 도지사로서 직무를 잘 수행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긴 합니다만.
삭제과연 어떤분이길래... 하면서 스크롤을 내리다가 반전(?)에 놀라 자빠질뻔 했습니다.
답글삭제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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