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1949년에 작성돼 스탈린에게 제출된 “히틀러 보고서”의 영어판을 읽어 보게 됐습니다. 이것 역시 스탈린 동무에게 올라 가는 것이라 그런지 뭔가 구린 냄새가 곳곳에서 나더군요.
예를 하나 들어 보겠습니다. 쿠르스크 전투에 대한 부분입니다.
1943년 6월, 히틀러는 쿠르스크 전투를 준비하기 위해서 오버살츠베르크에서 동 프로이센의 “늑대굴”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 무렵 터키군 총참모부의 사절단이 방문했다. 터키 사절단은 독일 국방군 총사령부의 초청을 받아 독일을 방문했다. 독일측은 동부전선에 배치된 독일군의 위용을 과시하기 위해 터키 사절단에게 쿠르스크 공세를 위해 하리코프-벨고로드 지구에 집결한 독일 기갑부대의 기동훈련을 참관하도록 했다. 터키 사절단은 이 기동훈련을 참관한 뒤 늑대굴로 돌아와 히틀러를 접견했다. 터키 사절단은 히틀러와 다과를 하기에 앞서 카이텔, 요들과 함께 많은 대화를 나눴다. 터키 사절단은 히틀러를 접견한 뒤 독일 국방군 총사령부의 초대를 받아 프랑스를 방문했다. 히틀러는 터키 사절단과 대화를 나눈 뒤 매우 즐거워했다.
“터키인들은 믿을 수 있을 거야. 하리코프에서 우리 기갑사단의 기동을 참관한게 저들에게 깊은 인상을 준 것 같아.”
터키 사절단은 프랑스에 도착해 서부전구 총사령관 룬트슈테트 원수의 환대를 받았다. 히틀러는 룬트슈테트에게 터키 사절단이 동부 전선의 기갑사단들로부터 받은 깊은 인상을 활용할 기회를 놓치지 않도록 대서양 방벽에서 가장 방어 준비가 잘 갖춰진 지역만 보여주도록 지시했다. 이에 따라 터키 사절단은 Cap Gris Nez에 있는 해안포대 “프리츠 토트”를 방문했다. 터키 사절단은 노획한 야포로 만든 해안 포대는 볼 수 없었다.
1943년 7월 5일, 벨고로드-쿠르스크-오룔 지구에서 공세가 개시됐다. 공세 첫날 히틀러는 그의 부관들에게 자이츨러로부터 전황 보고가 안 들어왔는지 확인하도록 닥달했다. 그날 오후 12시 30분, 자이츨러는 직접 보고를 하기 위해 히틀러를 찿았다. 히틀러는 자이츨러에게 흥분된 어조로 물었다.
“자이츨러. 쿠르스크의 전황은 어떤가?”
자이츨러는 전황에 대해서 모호한 어투로 얼버무렸다. 자이츨러는 현재 전황이 단편적으로 들어와 있다고 대답했다. 러시아군이 매우 완강히 저항하고 있다는 것 이었다. 그리고 한 마디를 덧 붙였다.
“기습의 효과는 전혀 없었습니다.”
히틀러는 자제력을 잃었다.
“페르디난트! 페르디난트 부대를 당장 투입하란 말이다! 어떤 희생이 따르더라도 전선을 돌파해야 한다!”
7월 6일, 자이츨러는 보병과 공병들이 러시아군의 방어선을 여전히 돌파하지 못했으며 피해가 속출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그리고 그 뒤 기갑부대가 투입됐다. 히틀러는 격분했다. 히틀러는 기갑사단들을 예비대로 두고 피해가 어떻든 간에 보병과 공병 부대가 소련군의 방어선을 완전히 뚫기 전 까지는 투입하지 말 것을 명령했었다. 예비대 투입은 돌파구가 열린 다음에 할 계획이었다. 히틀러는 거듭해서 집중적인 타격을 입혀야 한다고 말했다. 이때 히틀러는 마치 열병을 앓는 사람 처럼 보였다. 히틀러는 매 시간 마다 자이츨러에게 러시아군의 방어선이 얼마나 뚫렸는지, 그리고 그의 히틀러 사단이 얼마나 진격했는지 등을 물어봤다.
그리고 며칠 되지 않아 자이츨러는 공세가 완전히 돈좌됐다고 보고했다. 독일군은 방어로 돌아섰고 일부 지구에서는 소련군이 공세를 시작했다. 페르디난트와 티거 전차는 방어진지에 배치된 대전차포와 T-34에 연달아 격파됐다. 히틀러는 사실을 직시하는 것을 거부했다. 히틀러는 주먹으로 탁자를 치며 소리쳤다.
“이건 다 내 명령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야!”
귄세는 히틀러의 명령을 받고 아돌프 히틀러 사단의 현황을 파악하기 위해 출발했다. 귄세는 벨고로드에서 히틀러 사단 지휘관인 제프 디트리히를 만났다. 귄세는 착륙하기 전에 하늘에서 소련군의 강력한 방어선과 곳곳에 널려있는 독일 전차와 자주포의 잔해를 볼 수 있었다. 디트리히는 귄세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진격 할 수 있었던 것은 겨우 10km였네. 하지만 피해가 너무 엄청났어. 작전을 시작할 때 내 사단은 150대의 전차를 가지고 있었는데 지금은 전투에 투입 가능한 게 20대도 되지 않네. 보병의 손실도 매우 큰 상태야. 다른 사단들의 상황도 이보다 나을게 없어. 러시아군의 방어선이 얼마나 종심 깊게 구축됐는지 아는가? 동 프로이센에 돌아가서 말로 보고하는건 쉽겠지. 그러나 여기서는 다르다네. 우리는 돌파를 하지 못했어.”
다음날 저녁 귄세는 동 프로이센으로 돌아갔다. 귄세가 보고를 위해 히틀러를 방문하자 히틀러는 피곤하다는 제스쳐를 취하며 말했다.
“잊어 버리게. 나도 알아. 디트리히 조차 실패했군. 나는 이번 공세로 전세를 완전히 뒤집으려고 했어. 러시아군이 이렇게 강하다니 도저히 믿기지 않는군.”
Ed. Henrik Eberle and Matthias Uhl, The Hitler Book, p.117~119
이미 쿠르스크 전투에 대한 연구를 많이 접하신 분들은 어떤 부분이 문제인지 잘 아실 것 입니다.
먼저 디트리히의 이야기를 보시죠.
“내가 진격 할 수 있었던 것은 겨우 10km였네. 하지만 피해가 너무 엄청났어. 작전을 시작할 때 내 사단은 150대의 전차를 가지고 있었는데 지금은 전투에 투입 가능한 게 20대도 되지 않네. 보병의 손실도 매우 큰 상태야. 다른 사단들의 상황도 이보다 나을게 없어. 러시아군의 방어선이 얼마나 종심 깊게 구축됐는지 아는가? 동 프로이센에 돌아가서 말로 보고하는건 쉽겠지. 그러나 여기서는 다르다네. 우리는 돌파를 하지 못했어.”
이제는 잘 알려져 있지만 SS 2기갑군단은 그다지 큰 피해를 입지 않았습니다. 쿠르스크 전투 기간 중이나 그 이후에도 전투 투입 가능한 전차가 20대 이하로 떨어진 사단은 없었지요.
그리고 그 다음. 히틀러의 이야기를 보시죠.
“잊어 버리게. 나도 알아. 디트리히 조차 실패했군. 나는 이번 공세로 전세를 완전히 뒤집으려고 했어. 러시아군이 이렇게 강하다니 도저히 믿기지 않는군.”
독일측이 쿠르스크 전투를 통해 일거에 전세의 역전을 노렸다는 것은 전형적인 소련의 해석입니다. 소련은 1970년대 까지도 독일군은 쿠르스크의 돌출부를 분쇄한 뒤 모스크바로 총 공세를 가할 계획이었다고 제멋대로 역사를 서술했습니다. 독일측의 의도는 쿠르스크 돌출부를 분쇄해 소련군의 주력 기동부대를 섬멸하고 전선을 단축해 방어에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는 것 이었지 더 큰 도박판에 올인 하자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보고서는 주로 귄세 등 히틀러의 측근들의 증언을 토대로 만들어 졌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증언 자체의 신뢰도는 둘째 치고 내용 자체에 구린 구석이 많습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스탈린의 입맛에 맞춰 주기 위해 많은 부분에 손을 댄 것 같습니다. 신뢰도가 매우 떨어지는 구술 자료집이라고 판단되는군요.
저렇게 해야 스딸린 대원수께서 흡족해 하실터였으니...(겸하여 대원수의 혜안에 대해 아부도 좀 하고)
답글삭제그렇습니다.
삭제페르디난트를 더 투입해라!! 부분에서 뒤집어졌고 이후 파파 제프의 고백[..]에선 물을 토했습니다. 이거 엄청 재밌는데요. 웬만한 대체역사물은 꿈도 못꿀 퀄리티의 훌륭한 소설이군요.
답글삭제히틀러가 거의 찌질 대마왕으로 그려지더군요. 소련판 감벽의 함대인지...
삭제본문의 히틀러 보고서가 국내에 '히틀러 북' 으로 출간된 그것이 맞는지요..?
답글삭제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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