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대전 당시에도 이와 유사한 전차무용론을 주장하는 이들이 일부 있었던 것 같습니다. Military Affairs 1944년 여름호에 실린 빅맨(Fred K. Vigman)의 "Eclipse of the Tank"라는 글은 대전차화력의 강화로 전장에서 전차의 중요성이 감소하고 있다는 주장을 펼쳤습니다. 빅맨의 이 글은 미국이 유럽전선에서 본격적인 대규모 지상전을 펼치기 이전의 경험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상당히 재미있습니다.
이 글의 핵심은 2차대전 초반에 전차가 잠시 맹활약하면서 전차의 시대가 오는 듯 했지만 결국 대전차 화력의 증대로 전차라는 무기체계가 한계에 도달했다는 것 입니다. 글에서는 몇몇 실전 사례들을 예시로 들고 있는데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면 뭔가 좀 이상하게 보입니다.
붉은 군대는 나치의 우세한 기갑전력에 대해 다른 방향에서 대응책을 찾았다. 러시아의 언론들은 전쟁 첫해, 그리고 몇 차례의 작은 승리를 거둔 뒤 여러차례 포병을 “전장의 신”으로 불렀으며 대전차포와 일반 야포를 핵심적인 대전차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포병으로 전차를 상대하여 저지하고, 격퇴할 수 있다는 점이 모스크바 전투에서 드러났다. (독일군은) 1941년 12월, 모스크바에 가장 많은 전차와 기타 기갑장비를 투입했던 것으로 보인다. 붉은 군대는 똑같은 수단으로 대응하기 보다는 나치가 열등한 수단으로 간주한 포병에 크게 의존했다. 베르너(Max Werner)가 지적한 바와 같이 그 결과 나치의 기갑군은 “무력화 되었으며 글자 그대로 고철더미가 되고 말았다.”
1942년에 들어와 소련군이 독일군을 보다 잘 막아내고 무찌를 수 있게 된 원인은 대전차전을 위해 개발된 많은 수의 향상된 기동력과 향상된 성능을 가진 신형 야포와 같은 포병을 강화하기 위한 큰 노력을 기울인 데 있다.
1942년 11월 19일 시작된 소련의 스탈린그라드 공세에서는 나중에 원수로 진급한 보로노프(Никола́й Н. Во́ронов) 대장의 지휘에 따른 강화된 포병의 대규모 운용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1)
물론 전쟁 중이기 때문에 활용 가능한 자료가 극히 제한되기는 했겠지만 저자는 소련이 1942년에 전차군을 편성하는 등 기갑전력의 강화에 주력했다는 점은 무시하고 있습니다. 특히 스탈린그라드 공세에서 소련 기갑부대의 공헌에 관심을 두지 않는 점은 꽤 놀라울 정도 입니다.
이런 태도는 다른 전역을 바라보든 시각에도 그대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비록 나치의 전차 및 급강하폭격기가 영국의 아프리카 주둔군에 초반의 패배를 안기기는 했지만 영국군이 중근동 전역에서 얻은 전투 경험은 포병을 중시하고 전차의 활용 방식을 바꿀 필요가 있음을 입증하고 있다. 1942년 6월 13일, 영국군의 1개 여단이 독일군 88mm의 매복에 걸려 난타당한 기갑 부대의 참패 이후 전차를 앞세우는 전술에 대한 강력한 비판이 일어났다. 주포의 양각이 제한적인 전차에 대해 야포의 우세함이 뚜렷하다는 것은 거의 옳은 주장으로 보인다.
롬멜의 아프리카 군단을 분쇄한 몽고메리의 대규모 반격은 (1차대전 당시의 전투방식과 같은) 유례 없는 중포의 대량 운용과 전차를 돌파 수단으로 사용하는 대신 지원용도로 사용했다는 것이 특징이다.2)
만약 영국군이나 미군이 1944년 이전에 동부전선과 같은 규모의 독일군 기갑전력과 맞서야 했다면 이런 판단착오를 하지 않았겠지만 북아프리카 전선에 투입된 독일군의 기갑전력은 군단급에 불과했습니다. 1942년 하반기 이후로는 독일군의 소규모 기갑전력을 상대로 연전연승을 거두게 되었으니 기갑전투의 성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던 것은 당연한 일 일수 밖에 없습니다.
이런 전차 무용론은 미국에서 상당히 근거 있는 것으로 받아 들여졌던 것 같습니다. 1943년 4월 21일 뉴욕타임즈에는 이런 기사가 실리기도 했습니다.
영국 포병 병과는 이번 전쟁 기간 중 (기존의) 우세를 되찾을 수 있는 만족스러운 신형 전차가 개발되지 않았기 때문에 육상의 공격 작전에 있어 포병은 기갑에 비해 이미 압도적인 우위를 갖추었다고 보고 있다.3)
언론 뿐만 아니라 미군 고위층 또한 북아프리카 전역의 경험을 통해 기갑전투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가지게 됐습니다. 1942년 12월 14일 부터 1943년 1월 25일 까지 전선을 시찰하고 일선 기갑부대의 실태를 조사한 디버스(Jacob L. Devers) 장군이 내린 결론이란게 “M4는 전장에서 가장 우수한 전차다”라는 정도였다니 말입니다.4) 영국군의 전투경험은 미군에게 매우 악영향을 끼쳤는데 맥네어 장군은 북아프리카 전투 이후 대전차대대의 상당수를 견인식 3인치포로 전환하라는 명령을 내리기 까지 할 정도였습니다. 그 결과 노르망디 전역이 시작될 무렵 영국에 배치된 미군의 30개 대전차 대대중 11개 대대가 견인식 대전차포를 장비했다고 하지요.5)
다시 빅맨의 글로 돌아가 보지요. 빅맨은 이 글에서 재미있는 결론을 내립니다.
기동력 자체는 타격력이라고 할 수 없다. 기동력의 가치는 필요한 때와 장소에 화력을 기동력 있게 제공해 줄 수 있는데 있다. 그러나 사용되는 것은 기동력이 아닌 화력이다. 그렇기 때문에 전차의 기동력과 장갑에 중점을 둔다면 화력이 애매해 지게 된다. 전차의 화력이란 전차가 본질적으로 기관총에 대한 대응병기라는 전제조건에 입각해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전차의 장갑, 기동력 그리고 화력은 1차대전 당시 가장 중요한 요소로 나타난 밀집된 소총과 기관총 화력을 극복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전차의 문제점은 대전차 무기를 동원해 전차에 맞서기 전 까지는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았다. 전차는 기동력을 갖추고 있지만 대전차 병기의 발전에 따라 점차 전장에서 가장 크고 눈에 띄는 표적이 되어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전차와 야포의 대결에서 다른 모든 조건이 동일하다면 야포가 우세하다.6)
이 글이 쓰여질 무렵 미군은 아직 프랑스에 발을 딛고 있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 글이 발표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대전차포의 우세를 점쳤던 미국인들은 자신들의 생각이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주
1) Fred K. Vigman, “Eclipse of the Tank”, Military Affairs, Vol. 8, No. 2 (Summer, 1944), p.103
2) Fred K. Vigman, ibid, p.103
3) “Germany's Gamble on Tank And Dive-Bomber Held Lost” New York Times(1943. 4. 21)
4) David E. Johnson, Fast Tanks and Heavy Bombers : Innovation in the U. S. Army 1917-1945(Cornell University, 1998), p.190
5) Steve Zaloga, Armored Thunderbolt : The U.S. Army Sherman in World War II, (Stackpole, 2008), pp.72~75
6) Fred K. Vigman, ibid, p.107
그리고 프랑스에 상륙한 미군전차병들은 독일 전차를 볼때마다
답글삭제"공군!!"
울 외치게 되죠.
;;;;
답글삭제대전차전을_말로만_공부했습니다.avi
답글삭제빅맨의 결론 두번째 문장까진 맞는 말인데... 그 뒤로는 갈수록 점점 아스트랄해지는군요. 이 양반은 체스 둘 때 퀸은 항상 나이트만 갖고 잡았나 봅니다. 요즘 색적기술 갖고도 힘든데 그 때 기술로 '다른 모든 조건이 동일하다면 야포가 우세'하다라니. 그때부터도 맵핵켜고 전쟁하는 줄 알았나 봅니다.
빅맨은 사실 두헤이즘을 일찌감치 터득한 선구자로서 육군이 강력한 전차를 갖게 되면 항공의 장래가 어두워질 것이라 보고 가까이는 날으는 포대로서 멀리는 전략타격능력을 가진 공군으로 독립시켜야 한다는 일념으로 의도적으로 강력한 전차의 탄생을 막거나 지연시키기 위해 야포의... (읭?)
답글삭제<img></img> <span><span>박종민</span><span></span><img></img></span>
답글삭제<span>2차대전 내내 변변한 전차가 없어서 고생한 영국을 통해서만 경험을 얻어낼 수 있었으니, 하긴 태평양에서 일본과 싸울때는 이런 말이 가능할지도.. 일본은 아에 탱크다운 탱크가 없었으니..</span><span>
당시 타이거대 셔면의 교환비가 1:5에 이른다는 이야기를 들은거 같은데... 만약 위 주장이 받아들여져서 수적우위도 확보하지 못하고 독일과 싸원다면 최소한 전쟁이 1년은 더 길어지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span>
독소전쟁의 실상을 잘 알았다면 좋았을 텐데 그렇지 못한게 오판을 저지른 가장 큰 이유 같습니다. 영국군의 경험이야 뭐;;;;
답글삭제수적 우위가 없으면 답이 없죠.
답글삭제<span></span>
답글삭제<span>전차는 기동력을 갖추고 있지만 대전차 병기의 발전에 따라 점차 전장에서 가장 크고 눈에 띄는 표적이 되어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전차와 야포의 대결에서 다른 모든 조건이 동일하다면 야포가 우세하다...</span>
...
그리고 빅맨의 이론은 44년도에 독일군의 전차 포탑위에 달린 '대전차 야포'(???)에 의해서 M4가 탈탈 털리면서 결정적으로 입증되는데...
"<span>제 4차 중동전쟁 초기 이스라엘군의 기갑부대가 이집트군의 대전차 전력에 쓴맛을 보자 전차의 역할에 의문을 제기하는 목소리가 높아졌습니다. 물론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듯 방어력과 기동력이 획기적으로 향상된 일련의 제3세대 전차들이 등장"</span>
답글삭제<span>본문내용중에서 위의 글을 보면 3세대전차의 특징이 기존의 대전차무기에 대항할수 있는 중전차(Middle Tank)에서 중전차(Haevy Tank)로의 회귀로 봐도 될까요?</span>
<span>P.S 어쩐지 미군전차의 목적이 대전차 전투는 부수적이고, 대전차부대(TD)가 따로 있었던 것은 이런 이유였군요.</span>
이런 역설이!!!!!
답글삭제Heavy Tank로의 회귀는 아니지요. 전차의 종류가 다시 분화된게 아니고 MBT자체가 발전한거니까요.
답글삭제북아프리카에서 이미 미군 자신도 체험(?)을 해보았을텐데도 이런 주장이 나오다니 좀 의아하군요. 피드백이 제대로 되지 않았던건지...
답글삭제본문에도 써 놨는데 북아프리카의 경험은 피드백이 될 만큼 충분하지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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