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20-1에 실린 D.S. Riabushkin와 V.D.
Pavliuk의 글 “Soviet Artillery in the Battles for Damanskii Island”를 읽다 보니
127쪽에서 130쪽 까지 중소분쟁 당시 중국측이 소련군의 T-62를 노획한 경위가 짤막하게 실려있었습니다. 회수작전 자체가
상당히 재미있게 전개되었는지라 간단히 소개를 해 볼까 합니다.
1969년 3월 15일, 이만 국경수비대의 지휘관 레오노프(Д. В. Леонов) 대령은 다만스키 섬의 중국군 방어진지 후방으로
침투하기 위해서 제135 차량화소총병 사단 전차대대에서 1개 전차소대를 차출합니다. 이 대대는 T-62를 장비하고 있었습니다.
레오노프 대령은 4대의 T-62 중 545호차를 타고 선두에서 서서 전진했습니다. 그런데 중국군도 아무 생각없이 후방을 비워놓은
것은 아니었고 레오노프 대령은 선두에서 전진하다가 중국군이 얼어붙은 우수리강의 빙판에 구축한 지뢰밭에 걸려서 전차를 잃게 됩니다.
그리고 탈출과정에서 레오노프 대령과 545호차의 장전수가 전사합니다. 지휘관인 레오노프 대령이 전사하자 나머지 세대의 T-62는
퇴각했습니다.
문제는 T-62가 신형전차로 중국군의 손에 넘어가서는 안되는 존재였다는 점 입니다. 소련군은 즉시 지뢰밭에 격파되어 방치된
545호차를 회수하기 위한 작전에 돌입합니다. 중국군이 545호차를
견인해가려는 것은 뻔한 것 이었기 때문에 작전은 최대한 빨리 진행되어야 했습니다. 원래 작전은 3월 16일에 실시되어야 했으나 놀랍게도 이날 지방선거가 열려서 투표를 해야 한다는 이유로 작전이 연기되었습니다!
소련군의 회수작전은 선거 다음날인 3월 17일 개시되었습니다. 중국군은 소련군의 기동을 파악할 수 있는 위치에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있었기 때문에 소련군의 작전 개시와 함께 포격을 시작했습니다. 소련군은 이에 대해 제13독립 로켓포대대의 BM-21 로켓포와
제378포병연대의 M-30 122mm포 24문과 D-1 152mm포 12문을 동원해 반격했습니다. 이중 제3대대 7, 8포대의
152mm 포는 중국군이 투입한 4대의 ISU-122를 제압하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소련군의 포격은 효과적이어서 중국군의
ISU-122 한대가 완파되었고 다른 한대도 손상을 입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나머지 두대의 ISU-122는 근처의 숲으로
도망쳤습니다. 그러나 정작 견인작전은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545호차에 견인 케이블을 연결하려는 과정에서 한명이 전사하고 한명이
부상당한 것 입니다.
견인작전이 실패로 돌아가자 소련군은 그냥 T-62를 폭파하기로 결정합니다. 그런데 첫 번째 폭파시도는 폭약이 너무 적어서 실패했고 두
번째 폭파시도는 폭약은 충분했으나 전차의 내부에 폭약을 설치하지 않고 전차의 바닥에 놓고 터뜨려서 실패했다고 합니다. 폭약으로
격파하는 것이 두 번 다 실패하자 이번에는 소련이 보유한 괴물 박격포, 240mm구경의 M-240 2문이 급거 투입되었습니다.
그러나 240mm 박격포도 별 효과가 없어서 좀 더 정확한 152mm 포를 투입하기로 합니다. 여기에는 제378포병연대 8포대
소속의 152mm포 2문이 투입되었습니다. 소련군은 처음에는 고폭탄으로 사격했으나 얼음을 깨뜨려 T-62를 가라앉히는 것으로
계획을 바꾸게 됩니다. 이를 위해 3월 말 378포병연대 2대대의 122mm포 12문이 동원되어 얼음을 깨뜨려 버립니다.
545호차가 강바닥이 주저앉자 소련측은 작전이 성공이라고 판단하고 4월에 포병부대들을 철수시켜 버립니다. 다만 중국군이 어떻게든
회수하려는 시도를 할 것에 대비해 T-62가 가라앉은 지점을 감시할 수 있는 위치에 기관총을 배치합니다.
그리고 중국군은 위력적인 소련군의 포병이 철수하자 T-62 회수작전을 재개합니다. 이번에는 가라앉은 전차를 회수하기 위해 해군
소속의 잠수부들을 차출해서 회수팀에 포함시켰습니다. 중국군은 4월 20일 경부터 먼저 잠수부들을 동원해 545호차의 포탑을 먼저
회수했습니다. 강 건너의 소련군은 기관총으로 중국군을 계속해서 공격했지만 중국군은 10일 내내 근성을 발휘해 매일 밤 기관총
사격을 무릅쓰고 잠수부들을 물속에 집어넣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5월 1일~2일 야간에 걸처 강바닥에 가라앉은 545호차의 차체에
케이블을 연결하는데 성공해 전차를 회수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중국인들은 근성을 발휘해 꽤 근사한 전리품을 손에 넣었고 우리는 오늘날 이것을 베이징에 가서 구경할 수 있습니다. 저도 2008년에 545호차를 보고 중국인들의 근성에 경의를 표한바 있지요.
1. 선거 운운해서 작전을 늦추었고 그래서 결과적으로 실패했다면 관련자는 시베리아로 갔을수 있겠군요. 스탈린 시대는 아니더라도 말입니다.
답글삭제2. 미국에서 만든 소련/아프간 전쟁 영화 "비스트"에 보면 사이코 탱크 덕후 소련 전차장이 중-소 국경분쟁 당시 망가진 탱크를 어떻게든 끌고 부대로 복귀해서 명성을 얻었다는 언급이 나옵니다. 그 이야기가 생각나네요.(물론 그 영화에서도 이전처럼 자기 탱크를 어떻게든 끌고 오려다가 피 보는게 결말이지만요)
1. 아무래도 경직된 사회여서 어쩔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게다가 전국적으로 실시하는 선거이기도 하고... T-62를 노획당한 책임은 누가 지게 되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삭제박진감 넘치는 이야기 잘 읽었습니다. ^^
답글삭제ps;저도 이준님이 말씀하신 영화 '비스트'가 생각나더군요.
비스트는 꽤 유명한 영화같은데 저는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두분이 말씀하시니 한번 보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삭제....그리고 115mm 활강포를 본 중국인들은 '어, 전차가 불량인데?'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있더군요.-_-;
답글삭제정말 그랬을 것 같군요.
삭제군대 시절 투표 업무를 맡아 봤던 입장에서, 붉은 군대의 행동이 왠지 공감이 가는 것은 왜일까요(...)
답글삭제하하하;;;;
삭제강바닥에 가라앉은 시점에서 어지간하면 포기했을텐데 그걸 온갖 희생을 무릎쓰고 어떻게든 끌고오다니 그만큼 사정이 급했던 걸까요? (아니면 실패할 경우 기다리고 있을 대가가 사람들을 움직이게 만들었다던가...)
답글삭제적대적인 국가의 신형장비가 눈 앞에 방치됐는데 그걸 그냥 놔두는게 더 이상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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