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2월 25일 토요일

러시아의 퇴행적 역사인식에 대한 로푸호프스키의 비판

지난달에 포스팅했던 “문서보관소의 전투- 러시아의 감춰진 과거를 밝히다”를 보충할 글 하나를 번역했습니다.


이 포스팅은 러시아 역사가 레프 로푸호프스키Лев Николаевич Лопуховский의 저작 The Viaz'ma Catastrophe, 1941: The Red Army's Disastrous Stand Against Operation Typhoon의 407~430쪽을 번역한 것 입니다. 이 글에서 주장하는 핵심은 제가 2014년  “2차대전기 소련의 인명피해를 연구하는데 있어서의 문제점”에서 소개한 보리스 소콜로프의 주장과도 같습니다. 러시아 정부의 공식 통계인 크리보셰프의 연구가 연구방법에 있어 심각한 문제를 가지고 있고 여기에는 정치적인 의도가 강하게 개입되어 있다는 주장입니다. 저자는 사상자 통계를 조작하는 환경에서 정확한 전쟁사 연구는 불가능하다고 비판합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문제의 상당수는 소련-러시아의 폐쇄적인 정보공개정책과 국수주의적인 역사관에 기인합니다. 푸틴 집권이후 이런 경향은 더 강화되고 있지요. 권위주의 국가가 역사를 정치의 도구로 활용하면서 역사적 진실이 은폐된다고 비판하는데 우리 입장에서도 귀담아 들을만한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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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계적 오류 때문에 인명 손실을 잘못 파악한 것인가 아니면 정치적인 압력이 작용한 것 인가?


영어번역- 스튜어트 브리튼Stuart Britton


그런데 어째서 Россия и СССР в войнах XX века(이하 『20세기 러시아와 소련의 전쟁』)의 집필자들이 추산한 소련군의 인명손실은 다른 연구자들이 추산한 수치와 큰 차이가 나는 것일까? 이와 관련해 대조국전쟁 당시 소련군이 입은 총 인명손실에 대한 논의를 짧게나마 해야 한다. 이 문제는 오늘날 까지도 논쟁의 대상이다.


인명손실을 집계하는 문제는 소련과 러시아의 정치 및 군사지도자들이 러시아 인민에 대한 책임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의지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소련 시절에는 경직된 이데올로기적 통제로 인해 대조국전쟁 당시의 실패와 패배를 제대로 논할 수 없었다. 설사 그런 논의를 하더라도 최대한 개략적인 수준에서만 논해야 했다. 검열기구는 소련군의 전투 손실을 증명할 수 있는 내용은 출간되지 못하게 막았다. 소련 시절 대조국전쟁 당시의 이야기를 은폐하거나 왜곡 날조하는 것은 일상다반사였다.


대조국전쟁 당시의 인명피해를 처음 언급한 것은 스탈린이었다. 스탈린은 1946년 3월 13일 최고소비에트 선거를 앞두고 선거인단에게 전쟁 당시 7백만명의 희생자를 냈다고 말했다.39) 당시 스탈린은 전쟁 직전과 초기 단계에 자신이 실수를 저질러 조국을 붕괴상태로 만든 것을 은폐하기 위해서 인명손실을 축소하겠다고 결심했다. 설사 이 독재자가 인명피해를 더 축소한다고 해도 어느 누가 반론을 제기할 엄두를 낼 수 있었겠는가.(스탈린이 연설에서 밝힌 인명손실은 군인과 민간인 사망자를 다 합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누가 반론이라도 제기했다면 스탈린은 전후 소련의 인구 조사를 금지했을 것이다. 흐루쇼프는 권력을 잡자 스탈린을 깎아내리기 위해서 소련의 인명손실이 ‘2천만명 이상’이라고 했다. 개혁개방의 시대가 오자 소련 학계, 특히 전쟁을 경험한 이들 사이에서는 소련 지도부가 대조국전쟁의 승리를 위해 치러야 했던 막대한 손실을 명확히 하고 붉은군대 육해군의 정확한 인명손실을 발표해야 한다는 요구가 높아졌다.


1988년 4월에 대조국전쟁 당시의 손실을 집계하기 위해 총참모부 부참모장 가레예프Махмут Ахметович Гареев 상장의 예하에 위원회가 설치됐다. 이 위원회는 국방부 산하의 모든 유관 부처와 기구의 대표자들로 이루어졌다. 또한 소련 과학아카데미, 소련 국가계획위원회, 모스크바 대학을 비롯한 여러 연구기관의 인구학자들도 위원회에 참여했다. 그러나 공개된 정보들에 따르면 이 위원회는 인명피해를 추산하기 위한 작업을 직접적으로 할 수 없었다. 같은해 12월에 소련 국방부는 당중앙위원회에 보낸 ‘1941-1945년 대조국전쟁 시기 소련군의 인명 손실’이라는 제목의 비망록에서 추산된 인명 손실을 기밀해제할 것을 제안하고, 동시에 이것을 언론에 공개하는 것의 타당성 문제를 제기했다. 또한 국방부는 위원회가 조사한 내용의 요약본도 제출했으며 여기에는 소련군과 독일군의 인명 손실비율이 포함되었음이 확실하다. 그러나 당시 당중앙위원회는 조사위원회에 어떠한 결정도 통보하지 않았다.


조사위원회가 유관 부서와 기관 대표자 전체의 참석하에 회의를 연 것은 단 두번에 불과했다. 첫 번째 전체회의에서는 각 부서와 기관에 과업을 할당 했으며, 두 번째 전체회의인 약식회의에서는 위원장이 위원회의 조사 결과를 보고했다. 이때 회의 참석자들은 제시된 통계표를 보고 크게 놀랐다. 이 통계는 기본적으로 1966년에서 68년에 걸쳐 진행된 슈테멘코 상장이 책임자로 있었던 총참모부 연구집단의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한 것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이때 슈테멘코 상장의 연구집단은 인구구조를 분석해 전쟁기간 중 소련의 인명피해는 총 2700만명이며 붉은군대 육해군과 NKVD 국경수비대를 포함한 군사작전 중의 총 인명손실은 11,444,100명이라는 결론을 내렸다.40) 이 중 870만명이 이른바 회복불가능한 인구학적 손실, 즉 전쟁터에서 귀환하지 못한 인원이었다.41)


이 자료는 대조국전쟁 승리 45주년 기념식에서 공개적으로 발표됐다. 소련 대통령 고르바초프는 1990년 5월 8일 소련 최고 소비에트에서 한 연설에서 “대조국전쟁으로 2700만의 소련 인민이 희생됐습니다.”라고 발표했다.42) 다음날 소련 국방부는 소련군이 입은 인명손실을 발표했다.43) 소련군의 인명손실을 정리한 내용은 1993년  Гриф секретности снят : потери Вооруженных Сил СССР в войнах(『기밀해제: 소련군이 전쟁에서 입은 인명손실』, 이하 『기밀해제』)라는 제목으로 출간됐다.44) 그리고 그 후로 공식연구는 조금씩 수정되고 보완되어 『20세기 러시아와 소련의 전쟁』라는 제목으로 바뀌어 간행됐다.45) 인명손실을 추산하는 방식이 보완되면서 사망자의 추산치도 변경됐다. 국방부 조사위원회의 공식 조사결과는 총 인명손실 추정치에 기반해 전쟁의 진행 단계별, 연도별, 그리고 분기별 인명손실을 각각 정리하는 형식을 취했다.


이 보고서의 작성자들은 대조국전쟁당시 소련의 인명손실을 추산하는데 슈테멘코 상장의 연구집단이 작성한 통계자료만을 사용했으며, 이를 보완하기 위해 총참모부 기록국, 국방인민위원회, 그리고 기타 기관이 소장한 전투부대의 보고서를 사용한 정도였다. 그러나 부대의 보고서에 기반한 추산치는 실제 손실을 축소해서 반영하는 경향이 있다. 각각의 전략 단위 작전, 전선군 단위 작전을 연구하는 사람들, 특히 원사료를 통해 연구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소련군의 실제 손실이 공식 통계와 크게 차이나는 경우가 많으며, 일반적으로는 공식 통계의 사상자 통계가 축소되어 있다는 점을 알고 있다. 특히 소련군의 패배로 끝난 실패한 작전의 경우 사상자 통계가 축소되는 경향이 강하다. 대규모 부대, 혹은 야전군 전체가 포위된 위급한 상황에서는 하급 부대가 상급부대에 정기적으로 보내는 보고서를 통해 인명손실을 추산하는 것이 어렵다. 일선 사단들이 지리멸렬한 퇴각 중에 있거나 포위된 상태에 있거나, 본부 또는 사단 전체가 전멸했다거나 했을땐 상급부대에 무엇을 보고할 수 있겠는가? 포위망을 돌파한 사단들이 아군 전선에 도착했을 때는 극소수의 인원만 남아있었다. 대개 전멸한 사단의 잔존병력은 새로 도착한 보충병력이나 다른 해체된 부대의 잔존 병력과 합류해 재편성 됐다.


모스크바 방어작전 당시에는 이런 사례들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사례들을 이 글에서 언급하기는 불가능하다. 국방부 중앙문서보관소의 선임연구원 엘리세예프В. Т.  Елисеев는 제53소총병사단의 사례를 분석했다. 이 사단의 기록은 총참모부 문서목록 5호에 들어있는데 1941년 7월 2일 부터 1945년 5월 11일까지 단일한 부대로 작전한 것으로 되어 있다.(다만 1943년 2월 3일 부터 3월 7일까지, 그리고 같은해 7월 31일 부터 9월 7일까지 전략예비대로 있던 시기는 예외이다.)46) 그러나 사료에 의하면 제43군 예하 제53소총병사단은 모스크바 방어작전 첫 주에 전멸했다. 이 사단은 짧은 기간내에 재편성되어(즉 두 번째 편성) 1941년 10월 13일 부터 23일까지 작전했다. 10월 23일 제43군 사령관 골루베프Константин Дмитриевич Голубев는 주코프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제 53소총병사단과 제17소총병사단은 편제를 유지할 수 없는 상황이므로 해체하겠음.”47) 이날 제53소총병사단 사단장이 전사했으며 사단의 잔존병력 1천여명은 다른 두 개 사단의 병력과 합쳐져 10월 26일 제312소총병사단으로 편성됐다. 10월 30일 제312소총병사단은 제53소총병사단으로 개칭됐다.(즉 한달 사이에 같은 단대호의 세번째 사단이 생긴 것이다.) 신편 제53소총병사단은 모스크바 전투가 끝날때 까지 작전을 했다. 모스크바 전투 기간 중 이와 마찬가지로 전멸과 재편성을 반복하며 하나의 단대호를 사용했던 사단은 20여개에 달한다. 이런 사단들이 총참모부에 사상자 통계를 보고할 수 있었다는 가정하에, 보고한 방법이나 총참모부가 이것을 다시 통계로 정리하는 과정은 단지 추정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이런 극단적인 상황에서 발생한 인명 손실을 추산하는 방식은 병력 보충 통계를 이용하는 것인데, 이 방식은 그동안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1940년 12월 9일 국방인민위원회 명령 450 호에 따른 붉은군대의 보고 방법은 이런 경우까지 예측하지 못했다. 국방인민위원회 명령450호에 따른 보고 방식은 병력 변화가 극심하지 않은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전투 상황에 있는 부대에 적용할 수 있는 것 이었다. 이 방식은  해당 부대의 본부 참모진이 상급 부대에 정해진 일정에 따라 보고를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가정을 하고 있었다.48) 그러나 급속한 기동전 상황, 특히 전황이 급속히 악화되어 지휘 및 통신체계가 무너지고 지리멸렬한 퇴각 과정에서 사단급 부대 배치가 수시로 뒤바뀌는 상황에서 이런 일반적인 보고 체계는 붕괴될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포위된 사단들은 전투보고서나 손실보고서를 제출할 수 없었다.


부대의 편성과 작전에 관한 원사료를 분석해보면 보충 병력 현황을 손실 보고에 반영하는 경우가 거의 없음을 알 수 있다. 간헐적으로 시간에 쫒기면서 보고를 하는 경우가 있었다. 각 부대들은 새로 온 보충병들의 명단을 정리할 시간 조차 부족했으니 그들의 주소 조차 제대로 기록하지 못한 것은 당연했다. 이런 문제점은 병력 현황을 조사할때 거듭해서 나타난다. 예를들어 브랸스크 전선군 소속 제154소총병사단의 보고에 따르면 이 부대는 1941년 10월 1일 부터 10월 21일까지 5,000명의 장교와 사병을 잃었으며 이 중 2,500명이 전사 혹은 실종 및 포로였다. 그러나 최근 발굴된, 이 사단의 병력 보충현황이 기재된 사료를 통해 수정한 통계에 따르면 실제 손실은 15,000명이었고 이 중 9,400명이 전사 및 실종이었다. 즉 제154소총병사단 본부는 아무 쓸모도 없는 많은 양의 보고서를 작성해 상급 부대에 보고한 셈이다. 이점은 ‘서부전선군 예하 부대들의 1941년 10월 인명손실 보고’와 같은 문서도  마찬가지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서부전선군은 1941년 10월에 단지 66,392명의 장교와 사병을 잃었으며 이 중 전사 혹은 실종 및 포로는 32,650명이었다.(이중 26,750명이 실종으로 기재되어 있고 포로는 80명이다.)49) 그러나 엘리세예프의 연구에 따르면 뱌지마 일대에서 포위된 서부전선군 소속 17개 소총병사단과 2개 차량화소총병 사단의 인명손실은 최소 130,000명이라고 한다.50)


『20세기 러시아와 소련의 전쟁』의 저자들은 집필을 하면서 국방인민위원회 인사국이 병적국에 보낸 전사ㆍ사고사ㆍ병사ㆍ실종 통지를 검토했다. 병적국이 정리한 통지서는 총 12,400,900건에 달한다. 이것은 일일단위 통계를 취합해 정리한 공식 사망자 통계(11,444,100명) 보다 956,800명이 더 많은 것이다. 『20세기 러시아와 소련의 전쟁』의 저자들은 병적국의 자료를 활용하지 않은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병적국이 정리한 통지서에는 민병대, 빨치산 부대, 지자체 단위의 군사조직, 그리고 기타 정부기관 소속의 특수 조직의 사망자까지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런 무장조직은 총참모부에 병력 현황 및 사상자 통계를 보고하지 않았다. 또한 크리보셰프의 연구는 징집은 되었으나 배치되어야 할 부대에 도착하기 전에 실종 처리된 500,000명도 누락하고 있다. 이런 유형의 실종자는 민간인을 포함한 소련의 총 사망자 26,600,000명에 포함시켰다. 그리고 각 지역별 병무소의 기록에는 중복 기재된 사례가 간혹 있다. 즉 한명이 전사 또는 실종됐는데 통지서는 각기 다른 모병소로 보내져 등록되는 경우를 말한다. 이런 경우는 보통 전사자 또는 실종자의 친인척이 거주지를 옮길 경우에 일어났다. 또 실종자로 처리됐으나 나중에 생존된 것으로 판명되는 사례가 있다. 후자의 경우 국방인민위원회가 인명 손실을 더 높게 집계하도록 하는 원인이 될 수 있다. 이때문에  『20세기 러시아와 소련의 전쟁』의 저자들은 소련군의 인명손실을 집계할때 오직 군부대의 인명손실 기록만을 참고하기로 결정한 것 이었다.


 『20세기 러시아와 소련의 전쟁』의 저자들이 소련군의 인명손실을 집계할 때 국방부 중앙문서보관소ЦЕНТРАЛЬНЫЙ АРХИВ МИНИСТЕРСТВА ОБОРОНЫ에서 소장하고 있는 전사자들의 신상 파일을 인용하지 않은 것은 놀랄일도 아니다. 국방부 중앙문서보관소의 전사자 신상 파일은 지역별 병무소의 문서들 보다 훨씬 넓은 범위를 다루고 있다. 이 자료에 포함된 내용은 군부대의 보고서,  전선에 나간 가족에게서 연락이 끊긴 사람들이 지역별 병무소에 넣은 민원에 대한 답변은 물론 다른 내용도 들어있다. 이 신상파일에는 지역별 병무소가 1948년 부터 1949년에 걸쳐 전쟁에서 살아 돌아온 사람들을 ‘글자 그대로’ 일일이 찾아 다니며 조사한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물론 이때 실시한 조사가 어느정도 제대로 수행됐는지 평가하기는 힘들다. 당시 지역별 병무소는 차량은 물론 통신 수단도 부족했기 때문이다. 이때 조사한 내용을 요약한 보고서는 총참모부의 조직동원국에 제출돼 기밀로 처리됐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과연 당시 조사를 담당한 사람들이 소련 전역의 마을을 모두 방문했을까? 그리고 이 중 전쟁 기간 중 완전히 파괴되어 지도에서 사라진 곳은 얼마나 됐을까? 조사가 바르게 이루어 졌다면 수집된 내용은 다른 자료들과 교차 검증을 한 뒤 검증결과에 따른 조치가 취해졌다. 이 절차가 끝난 자료들은 철자순으로 정리한 카드에 정리했다. 이 자료들로 인해 실종으로 판명된 군인의 숫자가 늘어났다. 감시자가 도처에 깔려있고 정부 조직의 감시가 철저한 상황에서 설문에 응답한 사람들이 자신의 가족에 대해 고의로 틀린 답을 했을 가능성은 낮다. 응답자들의 답은 아주 간단했을 것이다. “전쟁때 군대에 입대한 뒤로 집에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전쟁 당시 일가족이 몰살을 당했다면 설문조사에 응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국방부 중앙문서보관소는 소장하고 있는 신상파일에 들어있는 정보의 상당수를 전쟁이 끝난 뒤 미국에서 만든 WAST(the Wehrmacht reference service)에 들어있는 포로가 된 장교와 사병의 명단통해 보완했다. 1990년대 초반에 국방부 중앙문서보관소가 정리한 전사자 및 실종자의 신상파일은 총 1720만건에 이르렀다. 이것은 소련 해군과 NKVD 소속 전사자 및 실종자를 제외한 수치였다. 이것은 1960년대에 슈테멘코의 연구 집단이 정리한 전사자 통계보다 580만명이 많은 것이다. 당시 크리보셰프는 국방부 중앙문서보관소의 담당자에게서 이 파일은 아직 중복된 사람을 정리하지 않아 전사자 통계를 내는데 사용하기에는 신뢰도가 떨어진다는 답변을 듣고 이 자료를 사용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당시 시점에서는 소련군의 인명손실을 집계하는데 독일측 자료를 제외하는게 타당했다.


하지만 그 이후 국방부 중앙문서보관소에서는 많은 노력을 기울여서 남아있는 전사자 관련 자료들을 분석하고 신상파일에서 중복자를 제거했다. 또한 탈영병, 군사재판에서 징역형을 선고받고 투옥된 인원, 전쟁이 끝난 뒤 돌아온 전쟁포로를 비롯해 생존자로 판명된 사람들을 걸러냈다.(귀환한 전쟁포로는 포로송환위원회의 기록을 통해 확인했다.)51) 2006년 말 국방부 중앙문서보관소의 전사 및 실종자 신상파일은 총 13,600,000건에 달했다. 이것은 해군과 NKVD 소속 전사자 및 실종자를 제외한 것 이었다.52)


전쟁 당시의 인명손실을 수정하고 보다 정확히 하려는 작업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2007년 말 국방부 중앙문서보관소는 그동안 작성한 소련군 전사자 명단을 알파벳 순으로 정리했는데, 비공식적인 자료에 따르면 정리된 신상파일은 총 13,721,000건이었다고 한다.(국방부 중앙문서보관소는 작업 결과를 비공개 처리했다.) 이 수치는 국방위원회 소속의 저명한 연구자 고리코프의 주장과도 일치한다. “대조국전쟁시기에 2660만명의 인원이 여러가지 이유로 군대를 떠났다. 이 중 절반 가량이 완전손실(사망 및 실종)이었다.”53) 현재 시점에서는 국방부 중앙문서보관소가 정리한 전사자 및 실종자 신상파일을 반드시 활용해야 한다고 본다.


다만 신상카드를 통해 연도별 인명손실을 추산할 수 없다는 점은 문제이다. 실종자로 분류된 사람들의 대다수는 군부대의 명단에서 제외된 뒤 한참 뒤에서야 전쟁 중 적의 점령지역에 있다가 전쟁이 끝난 뒤에 정부의 조사에 참여한 친인척들의 문의를 받고 실종처리가 됐다. 예를들어 1941년 9월 키예프, 또는 같은해 10월 뱌지마에서 부대가 포위돼 실종된 사람들의 경우, 이들의 가족들은 1942~44년에 걸쳐 해방된 뒤에야 정부에 실종자들의 행적에 대한 민원을 넣을 수 있었다. 필자가 수년간 국립추모재단 등에서 연구에 종사한 결과 얻은 경험에 따르면 전쟁 중 적에게 점령됐었던 몇몇 주와 자치공화국의 실종자 민원 처리는 거의 대부분 이런 경우였다. 이때문에 1941~42년 시기의 인명손실은 1943년 이후 보다 과소평가 됐다. 내 가족의 사례를 예로 들겠다. 제120곡사포연대는 1941년 10월 13일 전멸했다.(최고사령부 예비대 포병부대의 전투서열에서 삭제된 것은 1941년 12월 24일이다.) 하지만 실종된 연대원들의 가족에게 통지가 간 것은 1942~43년이었고, 심지어 1944년에 실종통보를 받은 가족도 있었다.


러시아 정부의 공식 전사자 통계와 민간 연구자들이 집계한 전사자 통계가 큰 차이를 보이고 있으며, 정부 당국이 국방부 중앙문서보관소의 전사자 및 실종자 신상파일을 사용하지 않으려는데는 어떤 정치적 의도가 작용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대조국전쟁 당시 소련군과 독일군의 전사자 교환비가 매우 컸다는 사실을 은폐하고 소련군의 인명손실을 최소화 하려는 것이다. 이런 경향은 냉전 시기에 암암리에 등장했다. 바로 정부 부처와 총참모부의 위원회가 인명손실을 집계하기 시작했던 때 부터이다. 격렬한 이데올로기 대립이 있던 당시에는 사상자 통계를 공개하는 것이 2차대전을 왜곡하려는 서방의 ‘사기꾼들’에게 좋은 먹잇감을 주는 것으로 여겨졌다. 소련이 건재하던 시절에는 정치적인 의도가 지속적으로 관철됐다. 모스크바 방어 작전 같이 붉은군대가 큰 손실을 입었던 작전의 경우 그런 경향이 강했다. 전쟁 당시 주요작전에 대한 연구들을 읽어보면 뱌지마 전투나 오룔-브랸스크 작전 당시 사상자 통계를 찾아볼 수 없다. 그냥 삭제된 것이다.


1942년 11월 24일 부터 12월까지 전개된 전략적 공세작전인 ‘마르스’ 작전에 대한 내용은  『20세기 러시아와 소련의 전쟁』에 없다. 오늘날 몇몇 역사가들은 마르스 작전은 독일 중부집단군이 스탈린그라드 방면으로 증원군을 보내지 못하도록 실시한 기만작전이라고 주장한다.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최근 기밀해제된, 전후에 편찬된 총참모부 문건은 마르스 작전을 주요 전략작전 중 하나로 기술하고 있다. 세상에, 단순히 적을 기만하려는 작전에서 수많은 아군 부대가 포위 섬멸됐다니! 마르스 작전에서 전사, 포로, 실종이 된 인원은 70,400명에 달한다. 이것은 작전에 투입된 병력의 14%에 달하는 것이다.54) 이것은 1943년 쿠르스크 방어 작전에서 세개 전선군이 입은 회복불가능한 인명손실과 비슷한 것이다. ‘공식통계’에 따르면 쿠르스크 방어 작전에서 발생한 전사, 포로, 실종은 70,300명이다.


『기밀해제』를 집필한 크리보셰프를 책임자로 한 연구집단은 이데올로기적인 이유에서 아예 통계를 조작해 수많은 전투에서 소련군과 독일군의 손실비가 컸던 사실을 은폐하려 했다. 저자는 2005년에 발표한 『기밀해제- 프로호롭카 전투』에서  그와 같은 사례를 제시했다. 크리보셰프의 연구집단은 만슈타인의 공세를 막아내는 과정에서 엄청난 인명손실이 발생한 것에 충격을 받아 보로네지 전선군의 인명손실 중 상당수를 스텝 전선군의 사상자라고 조작했다. 그 결과 두 전선군의 인명손실은 비슷해졌다. 보로네지 전선군은 73,892명, 그리고 스텝 전선군은 70,058명이 된 것이다. 하지만 코네프 장군의 스텝 전선군은 크리보셰프가 주장한 것 처럼 7월 9일에 전투에 투입된 것이 아니다. 스텝전선군은 만슈타인이 공격부대들을 공세 개시선으로 퇴각시키고 있던 7월 18일 밤 부터 전투에 참여했다.55) 스텝전선군이 7월 20일 부터 31일까지 입은 인명손실은 장교와 사병 34,449명이었다.56)


나는 사실을 왜곡하는 자들을 비판해왔다. 나는 2005년에 『기밀해제-프로호롭카 전투』를 크리보셰프에게 보내면서 그가 집계한 보로네지 전선군의 인명손실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그의 연구집단에 속한 연구자 한명이 답신을 보내 나의 비판에 답을 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나는 아직까지도 아무런 답변을 받지 못했다. 사실 내가 사용한 사료는 크리보셰프 연구집단이 사용한 것과 동일하다. 총참모부의 장교 한명은 나와 대화를 나누던 중 크리보셰프를 비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말했다. 크리보셰프는 그 지위때문에 대조국전쟁 시기 붉은군대의 사상자 통계를 집계할 때 공식 노선을 벗어날 수 없다는 뜻이었다. 공식통계를 작성한 이들이 이제와서 실제 인명손실을 은폐했다고 자백하는 것은 정치적인 자살행위이다. 그저 그들이 안스러울 뿐이다. 마찬가지 이유에서 고위층은 지금까지 정리해 온 전사자와 실종자의 신상 파일을 공개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다. 자료가 공개된다면 고위층은 그 자료를 가지고 한 연구의 신뢰성을 떨어트리려 할 것이다.


 『20세기 러시아와 소련의 전쟁』의 저자들이 국방부 중앙문서보관소의 전사자 및 실종자 신상카드를 신뢰하기 어렵다고 드는 이유는 몇가지가 있다. 유가족들의 민원에 따라 전쟁 이후에 작성된 보고서들에는 징집된 사람의 군 복무이력이 생략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때문에 신상카드에 기록된 사람 중에는 붉은군대와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이는 사람도 있다. 이런 사람 중에는 소집된 후 민병대나 기타 군사조직, 또는 해군이나 NKVD 소속 무장부대 등에 배속된 경우도 있을 것이다. 『20세기 러시아와 소련의 전쟁』의 저자들은 이때문에 신상카드에 등재된 사람들을 모두 붉은군대 육군의 인명손실로 집계하는 것은 무리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크리보셰프 연구집단이 집계한 인명손실통계와 국방부 중앙문서보관소가 소장하고 있는 전사자 및 실종자 신상카드에 집계된 인원수의 차이는 460여만 명에 달한다. 이들이 군에 소집된 것은 분명하고 살아서 귀향하지 못한 것도 확실하다. 어떻게 이 460만명 전체를 통계에서 제외할 수 있는가? 그리고 징집명령을 받았지만 부대에 배속된 기록이 없는 상태로 실종 처리된 50여만명을 육군의 전사자 명단에서 제외하는 것이 옳은가? 이들은 징집명령을 받은 순간 군인이 된 것이다. 어떤자들은 실종자들이 단지 군부대의 명단에 없다는 이유에서 이들을 조국의 수호자로 인정하지 않으려 하며, 모든 것을 실종자들의 잘못으로 몰아가려 한다. 과연 그러한가?


 핵심은 국방부 중앙문서보관소의 전사자 및 실종자 신상카드를 인용하는 순간 대조국전쟁기 붉은군대의 전사자 및 실종자가 11,444,100명이라는 ‘공식 통계’의 신뢰성이 떨어진다는 점이다. 그렇게 된다면  『20세기 러시아와 소련의 전쟁』의 내용은 처음부터 다시 검증을 해야 하고 전사자 및 실종자의 숫자는 늘어날 수 밖에 없다. 물론 지금까지 이야기 한 것 처럼 당국자들은 그럴 생각이 없다. 늘어난 총 인명손실을 기준으로 전투 및 작전의 결과를 비교한다면, 특히 독일군의 인명손실과 비교한다면 소련 시절의 멍청한 프로파간다가 만들어낸 신화와 전설의 거품이 꺼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몇몇 군사작전의 승리와 주요 군 지휘관들이 대조국전쟁기에 수행한 역할에 대해서도 재평가를 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대조국전쟁기 소련과 독일의 인명손실비가 1.3대 1이라는 공식 통계에 대해 논하도록 하자. 양측의 인명손실비 문제는 국방부 중앙문서보관소의 전사자 및 실종자 신상파일의 중요성을 높여준다. 이때문에 1995년에는 신상파일의 보존기간 50년이 지난 뒤에 이를 파기해야 한다는 요구까지 나온 것이다. 만약 국방부 중앙문서보관소의 원사료를 보지 못한 사람들이 공식 통계를 제일 신뢰한다면 이 요구가 실현될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


크리보셰프 연구집단은 지휘계통을 통해 생산된 보고서만 활용해 통계를 작성했기 때문에 얼마나 많은 인명손실이 발생했는지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무기 손실 통계도 마찬가지 오류를 안고 있다. 모스크바 전투 당시의 장비 손실을 예로 들어보자. 『20세기 러시아와 소련의 전쟁』은 모스크바 방어 전투가 67일간 전개됐으며 인명손실은 총 658,279명의 사병과 장교이고 그 중 514,338명이 전사 및 포로 또는 실종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같은 기간 소련군은 250,800정의 소화기를 상실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3개 전선군의 주력부대가 포위섬멸된 참패에서 이정도로 장비를 조금 손실할 수 있는가? 어떻게 전사자와 실종자들의 소화기를 절반 이상 회수할 수 있었는가? 모스크바 공세작전에서 소련군은 1941년 12월 5일부터 1942년 1월 7일까지 34일간에 걸친 전투에서 방어전투에 비해 절반 남짓한 370,955명의 인명손실을 입었는데 이중 전사 및 포로 또는 실종은 139,586명으로 되어 있다. 방어작전 때는 이보다 3.7배의 전사 및 포로 또는 실종이 발생했다. 그런데 이때 발생한 소화기 손실은 아군이 포위섬멸 당하면서 지리멸렬해 퇴각했던 시기에 비해 4.4배나 많은 1,093,800정이다. 그리고 방어작전때는 야포와 박격포 손실이 3,832문이었는데 공세작전때는 13,350문이다.57)


이것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물론 가능하다. 이렇게 이상한 통계가 만들어진 이유는 저자들이 손실을 평가하면서 각 부대가 제출한 보고서만 참고했기 때문이다. 즉 포위망안에 같힌 부대들은 보고서를 제출할 수 없으니 포위된 부대들은 손실이 없었던 것으로 집계된 것이다. 크리보셰프 연구집단은 보고서를 제출한 부대의 손실만 집계했다. 물론 총 손실에 대한 추정치를 산출하는 것은 가능했다. 하지만 그들은 그러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면 원하는 결론을 얻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1941년 12월 5일 붉은군대는 주도권을 쥐기 위해 반격을 시작했다. 그리고 무기 손실을 보다 정확히 집계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겼다. 게다가 1941년이 다 끝났으므로 다음해 1월 1일 기준으로 가용한 무기 숫자를 정확히 맞출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크리보셰프 연구집단은 그렇게 했다. 모스크바 전투 기간을 통틀어 1,344,000정의 소화기를 잃은 것으로 집계한 것이다. 이렇게 하면 모스크바 방어작전과 모스크바 공세작전 기간 중 실제로 전사하거나 실종된 인원수와 얼추 비슷해진다. 이 숫자는 공식통계인 653,688명 보다 훨씬 많은 것이다.


무기와 기타 장비의 손실이 막대했기 때문에 여러 병과의 많은 부대들이 해체되거나 편제가 축소됐다. 특히 1941년 11월 26일 국방인민위원회 결정 966호 ‘붉은군대의 편제 축소에 관하여’와 1941년 12월 24일의 국방인민위원장 명령 00123호는 최고사령부 예비대의 전투서열에 있던 64개의 포병연대를 삭제하도록 했다.58) 이중 제120곡사포연대를 포함한 22개 연대는 뱌지마 포위망에서 전멸한 부대였다. 국방인민위원회 결정 966호 ‘붉은군대의 편제 축소에 관하여’의 서술 방식은 딱히 놀라울 것도 없다. 아직 전쟁이 한창이었고 전멸한 부대를 공식적으로 언급하는 것은 금지되었다. 남은 병력과 차량, 무기와 기타 장비는 부대를 공식적으로 해체한 뒤 다른 부대를 보충하거나 신규부대를 편성하는데 활용됐다. 전쟁 초기에는 물자 손실이 엄청났기 때문에 무기를 버리는 병사나 지휘관, 정치위원에 대한 처벌은 갈수록 혹독해졌다.


 1941년도의 전투 작전에서 발생한 완전손실의 상당수는 행방불명이나 포로였다. 이때문에 공식통계와 민간 연구자들의 통계에 큰 차이가 생겼다. 『20세기 러시아와 소련의 전쟁』의 집필자들은 1941년 동안 독일군이 생포한 소련군 포로의 숫자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는 독일 사료를 찾을 수 없었다고 해명했다. 이들은 1941년에는 독일 국방군에서 포로의 숫자를 집계해 보고하는 것을 의무화하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합리화했다. 실제로 독일 육군본부가 포로 숫자를 의무적으로 집계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은 1942년 1월에 가서였다.


그러나 소련군의 인명 손실을 연구할때는 반드시 독일 자료와 교차 검증해야 한다. 독일 자료를 어느 정도 신뢰할 수 있을까? 예를 하나 들면, 히틀러는 1941년 12월 11일 독일 의회 연설에서 1941년 6월 22일 부터 12월 1일까지의 5개월간 소련군이 보유한 17,332대의  항공기, 21,391대의 전차, 32,531문의 각종 화포를 노획하거나 격파했다고 주장했다. 전쟁 초기 부터 소련 수뇌부는 이 주장이 단지 괴벨스의 망상이며 미치광이 히틀러의 헛소리라고 주장했다. 소련의 프로파간다 조직은 전쟁이 끝난 뒤로도 거의 50여년에 걸쳐 같은 소리를 반복했다. 하지만 잔인한 현실은 결코 은폐할 수 없었다. 현재는 소련군이 1941년 한해 동안 3,200대의 KV와 T-34를 포함한 20,500대의 전차, 17,900대의 항공기, 101,100문의 야포와 박격포(50mm 박격포는 제외한 수치)를 상실했음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있다.59) 이 통계는 히틀러가 1941년에 주장한 것과 거의 같다.60) 앞서 1941년 12월 당시 붉은군대는 고작 1,731대의 전차만 보유하고 있었으며 이 중 70퍼센트에 달하는 1,214대가 경전차인 T-26, BT, T-40, T-60였다는 점을 언급했다. 그리고 1941년 9월부터 12월까지 소련은 영국으로 부터 전차 750대, 미국으로 부터 전차 180대를 원조받았음을 유념해야 한다.61)  


그리고 히틀러는 1941년 12월 1일까지 소련군 3,086,865명을 포로로 잡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히틀러의 연설보다는 독일의 2차대전 공간사에서 제시한 통계가 보다 정확하다고 본다.


“1941년에 포로가 된 3,350,000명의 소련군 중 60%가 1942년 2월까지 사망했다. 1941년 12월 한달 동안만 60만명의 포로가 죽었다. 심지어 독일 영내의 포로수용소에서도 소련군 포로의 사망률은 18.5%에 달했다. 1942년 4월까지 포로의 47%가 기아와 티푸스로 죽었다. 소련군 포로가 대규모로 사망한 원인은 독일 제3제국을 옹호하려는 몇몇 인사들이 주장과 달리 나치 체제의 비인간적인 정책 때문이었다.”62)


이 서술은 슈트라이트Christian Streit의 연구와도 거의 일치한다. 그는 소련군 포로 360만명 중 1942년 1월 말까지 생존한 것은 140만명에 불과했으며 이중 노동이 가능한 사람은 수십만명에 불과했다고 주장했다. 2백만명의 포로가 학살되거나 질병과 기아, 학대로 사망했다는 것이다.63) 소련의 공식 통계에 따르면 1941년 소련군의 병력손실 중 완전손실(전사 및 실종, 포로)은 3,137,700명인데 이것은 독일측에서 주장하는 소련군 포로 숫자보다도 훨씬 적은 것이다.64) 소련의 공식통계가 이상한 것은 이뿐만이 아니다.


『20세기 러시아와 소련의 전쟁』 집필자들은 각 전선군의 보고서와 포로송환위원회의 기록을 참조해 대조국전쟁 전 기간 동안 포로나 행방불명이 된 병력은 3,396,400명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여기에 기존의 통계에 포함되지 않았던 전쟁 초기의 인명손실(보고되지 않은 전사  및 실종) 1,162,000명을 더해 총계 4,559,000명이라는 결론을 냈다.65) 하지만 이 통계는 전쟁 초기에 희생된 전사자 일부가 포함했기 때문에 정확한 포로 숫자를 파악하기가 어렵다. 추가된 1,162,000명 중에서 다수가 포로라고 추정되지만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다. 앞서 크리보셰프 연구집단은 부대에 배속되지 못한 채 행방불명 처리된 500,000명을 군 사망자에서 누락하고 대신 민간인 사망자로 분류했다는 점을 언급했다. 크리보셰프의 집계에 따르면 (포로송환위원회 기록에는) 독일군의 포로 수용소에서 해방된 인원은 1,836,000명이며 1,783,000명은 귀환하지 못했다고 되어 있다.(포로수용소에서 사망하거나 외국으로 이민간 숫자이다.) 즉 전쟁포로는 총 3,619,000명이라는 것이다.66) 그런데 이 숫자는 크리보셰프가 전쟁포로 및 실종자로 분류한 3,396,400명 보다 훨씬 많다. 3,396,400명이라는 숫자를 인정한다면 전쟁기간 중 포로 및 행방불명자 중에서 행방불명은 900,000명이 된다. 국방부 중앙문서보관소의 신상파일에 따르면 행방불명 처리된 사람은 7,000,000명에 달한다.


슈트라이트의 연구는 독일국방군 사령부의 포로국에서 작성한 소련군 전쟁포로 숫자를 인용하고 있다. 1944년 5월 1일 기준으로 소련군 포로 5,163,381명이 독일의 포로 수용소에 수용돼 있었으며 1944년 12월에는 5,600,000명이 수용돼 있었다. 그리고 1945년 2월 20일의 독일 육군본부 기록에 따르면 1945년 1월 31일 기준으로 독일의 포로 수용소에 있던 소련군 포로는 5,734,528명이었다.67)


 『20세기 러시아와 소련의 전쟁』 집필자들은 슈트라이트가 인용한 자료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들은 독일군이 포로로 분류한 인원에는 군인뿐 아니라 민간인(철도원, 수로관리인, 군대에 소속된 건설노동자, 민간인 조종사, 통신 업무 종사자, 보건 관료 등)이 포함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민간인의 피해는 각군 사령부나 총참모부에 보고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외국 문헌에 있는 소련군 포로 통계는 실제로 독일에 수용된 군인 포로의 숫자를 평가하는데 인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독일측 사료에 있는 포로 통계를 고려하면, 전쟁기간 중 독일군과 그 동맹군에 의해 포로가된 군인은 최소 5,800,000명 이상일 것으로 추정된다. 이것은 『20세기 러시아와 소련의 전쟁』에서 제시한 포로 숫자보다 1,250,000명이 더 많은 것이다. 두 자료간에 거의 100만명(어쩌면 그 이상일 수도 있다)이나 되는 차이가 나는 이유는 아마도 정부 당국이 포로 숫자에는 관심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또 크리보셰프의 연구집단은 행방불명이 되거나 포로가된 민병대원도 군인 전사자에서 제외하고 대신 민간인 사망자로 분류했다. 국방인민위원회 결정에 따르면 모스크바 시당위원회가 동원한 200,000명과 모스크바 주에서 동원한 50,000명의 집단농장 농민으로 구성된 민병대는 모스크바 군관구 사령부에 소속됐으며, 추후 민병대 모집은 모스크바 군관구 병무소가 담당하도록 했다. 민병대 동원은 매우 촉박하게 이루어졌다. 1941년 7월 2일 모스크바 군관구 결정 0031호에 따르면 민병대 동원은 7월 3일에 시작해 7월 5일에 완료하도록 되어 있었다.68) 그래서 민병대원의 대다수는 병무소에서 등록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게다가 모스크바 군관구와 모스크바 주의 민병대원 명부는 10월 16일의 대혼란속에 사라졌다. 모스크바 주는 최초로 12개 민병사단(병력 145,000명)을 편성한 뒤에도 민병대 편성을 계속했다. 다른 지역에서도 민병대를 편성했다. 민병대 전체가 정규군에 편입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민병대에 자원한 경우에는 정규군 병사와 같은 처우가 보장됐다. 국방인민위원회 결정에 따르면 민병대로 동원된 사람이 불구가 되거나 사망할 경우 그와 그의 가족은 붉은군대 병사와 같은 수준의 연금을 받을 수 있었다. 또 독일군으로 부터 해방된 지역에 살던 사람 중 야전병무소를 통해 징집된 경우가 있다. 많은경우 야전병무소에서 징집된 사람들은 정식으로 부대에 배속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기는 커녕 군복조차 없이 전투에 투입됐다.


포로가 됐으나 여전히 행방불명인 사람들의 운명은 과거 소련은 물론 오늘날 러시아에 이르기 까지 수백만 가구의 가정에 고통을 주고 있다. 독일로 부터 압수해 국방부 중앙문서보관소가 소장하고 있는 전쟁포로 명단은 아직 러시아어로 번역조차 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있다. 이런 사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지금까지도 실종 처리된 사람들의 신원을 확인하는데 필요한 여력이 없거나 의지가 없는 것일까?


크리보셰프 연구집단은 소련군 포로 숫자를 집계하는데 독일 자료를 사용하지 않았으며 포로의 숫자를 최소화 하려 했다. 이것은 『20세기 러시아와 소련의 전쟁』 자체가 소련군의 인명 손실을 축소해 소련군과 독일군의 인명손실 비율을 낮추려는 의도에서 집필됐기 때문이다. 또한 이들은 의도적이건 아니건간에 독일군에게 사로잡혀 목숨을 잃은 소련군 포로의 숫자를 낮춰잡아 나치의 대량 학살이라는 범죄를 축소하고 있다.


대표 집필자인 크리보셰프는 제2차대전을 연구하는 역사가들의 회의에서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우리는 좌우 양쪽에서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총참모부의 문서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비판에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크리보셰프는 집필에 사용한 주 사료가 총참모부에서 월단위로 정리한 뒤 보완을 거쳐 최고사령부에 보고한 독립부대, 각급 부대, 야전군 및 전선군의 사상자 보고서를 참고했음을 밝히고 있다.69) 그렇다면 왜 총참모부가 작성한 보고서와 다른 관련 문서들을 공개하여 학자들이 평가하고 연구에 활용해 대중에 널리 알리지 못하게 하는 것인가?


독일군이 포로를 집계할때 소속별로 분류하는데 신경을 쓰지 않았음은 앞서 설명했다. 예를들어 포로중에는 군부대 소속의 건설 인력이 포함되어 있었다.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1941년 9월 19일에 서부전선군은 담당 구역에 방어시설을 건설하기 위해 9개의 독립건설대대를 편성했다. 그리고 예비전선군과 브랸스크 전선군 담당구역에는 비슷한 건설대대가 129개나 있었다. 예비전선군 구역인 르제프-뱌지마 지구에 배치된 건설대대는  85,336명이었다. 이런 건설대대도 많은 인명피해를 입었다. 건설대대에 소속된 인원 중 25,000명이 뱌지마 포위망에 같혔으며 이 중 아군 전선으로 탈출한 사람은 겨우 1,000명에 불과했다. 서부 방면에서 방어선을 건설하던 10만명의 건설인력 중 포위망을 벗어난 것은 42,000명에 불과했다.70) 1941년 9월 모스크바 방면의 주 방어선 공사에 투입된 건설인력은 1,200,000명 이었는데 10월 10일에는 700,000명으로 줄어들었다. 즉 사망, 부상, 행방불명, 포로가 된 건설인력은 최소 500,000명에 달한다.71) 건설인력 중 NKVD나 국방인민위원회가 관할하는 군대 소속은 몇명이나 되었을까? 1942년에는 전투공병군이 편성됐는데 이 부대는 다수의 전투공병여단으로 편성됐다. 전투공병여단 중에는 공병건설대대를 바탕으로 편성한 부대가 많았다. 건설대대는 군인의 비율이 높았고 이들 중 많은수가 퇴각과정과 포위망 속에서 포로가 됐다. 즉 총참모부는 건설대대 소속 인원에 대한 자료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인명손실을 집계할 때 건설대대원들을 제외해야 겠는가?


부대의 보고서를 통해 인명손실을 집계하는 방식은 일정한 기간별로 병력 현황이 변동된 것을 추적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으므로 실제 손실과 동떨어진 결과를 낳는다. 대표적인 사례가 1941~42년에 걸쳐 전개된 모스크바 공방전이다. 공식통계에 따르면 소련군은 모스크바 공방전에서 1,843,353명의 병력을 잃었다.(전사, 부상으로 인한 사망, 행방불명, 포로가 936,664명, 부상 및 질병으로 인한 손실이 898,689명이다.)72) 미할레프의 집계에 따르면 모스크바 공방전 기간 중 소련군의 인명손실은 2,204,300명으로 공식통계보다 361,000명이 더 많다. 이중 완전손실은 1,284,300명으로 66.6%의 피해가 방어작전 중 발생했다. 그리고 방어작전 중 잃은 병력중 절대 다수가 첫 2주간의 전투에서 발생한 포로라고 한다.(959,200명 중 835,100명의 손실이 1941년 10월과 11월에 발생했다.)73) 군사사연구소가 1989년에 개최한 학술회의에서는 모스크바 공방전 중 아군은 적군보다 3.7배 많은 인명피해를 냈다고 결론 내렸다.74)


지금까지 이야기한 사실들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이 단언할 수 있다. 크리보셰프의 『20세기 러시아와 소련의 전쟁』에 정리된 대조국전쟁 시기의 인명손실 통계는 실제보다 과소평가된 것이다. 그리고 전쟁 초기의 인명손실은 매우 크게 축소된 것이다. 그러므로 전선군 및 야전군의 작전, 특히 소련군이 패배했거나 이른바 ‘종결되지 못한 작전’을 진지하게 연구할 것이라면 『20세기 러시아와 소련의 전쟁』의 내용은 주의해서 살펴야 하며 항상 1차사료와 대조해야 한다.


『기밀해제』의 집필자들은 독일 및 동맹국이 동부전선에서 입은 완전한 인명손실은 “소련군에 비해 겨우 30% 적은 수준이었다. (추축군 손실은 860만명이고 소련군의 손실은 1140만명이다.) 그러므로 양측의 인명 교환비는 1:1.3이다.”라는 결론을 내렸다.75) 그리고 이들은 개정판인 『20세기 러시아와 소련의 전쟁』에서도 이 결론을 반복했다. 그러나 대조국전쟁 당시 소련군의 인명손실은 단지 총참모부의 월간보고에 집계된 내용만 가지고 정리한 것에 불과했다. 전쟁기간 중 11,444,100명의 사병과 병사를 잃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소련의 동맹군 손실 76,100을 더해 총 손실을 11,520,200명으로 정리했다.76)
이 통계에 따르면 붉은군대는 전쟁 초반의 잇따른 참패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으로 잘 싸워서 독일 국방군을 패배시켰으며 인명손실도 독일군보다 30% 많은 수준에 그치고 있다. 비판받을 수 있는 사실이 존재하더라도 ‘부르주아 역사 날조자’들에게 트집잡힐 구실을 줘서는 안된다는 냉전당시 소련의 정치 질서가 이어져 내려온 셈이다. 하지만 1차사료를 접한 대다수의 독립 연구자들은 붉운군대의 인명 손실을 축소하고 전투력을 높여잡는 이 결론에 의구심을 가지고 있다. 군사과학원장인 가레예프 장군은 소련군의 인명손실에 대한 집필진들의 입장이 혼란스럽다는 점을 파악하고 “인명손실에 대한 통계 자료들은 집필자들의 사견일 뿐이며 결코 정부의 공식적 입장이 아니다. 사실 정부는 대조국전쟁 시기의 인명손실을 인민들에게 발표한 일이 없다.”고 비판적으로 말했다.77)


 이때문에 러시아군 내에서는 소련군의 인명손실에 대한 문제제기를 마무리 짓기 위해서 총참모부의 크리보셰프 위원회가 집계한 인명손실을 고위 정치지도자들이 나서서 지지해 줄 것을 바라고 있다. 통신사 노보스트의 보도에 따르면 러시아 국방부의 키릴린 장군은 2010년 5월 5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대조국전쟁 전사자 추모식에서 기자들에게 1941년 부터 1945년까지 소련은 2660만명의 희생자를 냈으며 이중 860만명이 소련군인이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이 통계는 국가 지도자들에게 보고되어 대조국전쟁 승리 65주년의 5월 9일에 공표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전쟁기간 중 수백만명이 희생된 것은 매우 고통스러운 사실이다. 러시아의 정치지도자들은 대조국전쟁 승리 65주년 기념식에서 크리보셰프 연구집단이 추산한 대조국전쟁시기 인명손실 통계를 공식적으로 인정하라는 총참모부의 요구를 거부했는데 이것은 매우 올바른 결정이었다. 고위층에서는 크리보셰프 집단의 연구가 많은 비판을 받고 있음을 잘 알고 있어서 역사 논쟁에 개입하지 않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대조국전쟁 시기 붉은군대의 인명손실은 언젠가는 재검토될 것이다. 특히 붉은군대가 패배한 작전의 인명손실이 그렇다. 그리고 이것은 다시 전체 인명손실을 재검토하도록 하는 기폭제가 될 것이다. 물론 현 시점에서 붉은군대의 인명손실을 정확하게 평가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실제 인명손실에 가까운 수준으로 밝혀 우리가 승리를 위해 치른 희생의 댓가를 깨닫고 다른 한편으로는 어째서 이토록 많은 희생을 치렀는지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참전용사들과 유가족, 그리고 희생자와 실종자들의 친구들은 진실을 알 권리가 있다. 그 진실이 얼마나 고통스럽건 간에 말이다. 그러므로 진실을 마주할 용기와 정치적 의지가 필요하다.


국방부 중앙문서보관소의 신상파일에 있는 명단은 전쟁 중 붉은군대가 얼마나 많은 인명손실을 입었는지 그 전모를 보여줄 것이다. 장교 계급의 피해를 산정할 당시 신상파일을 활용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2000년 말 중복자나 관련없는 사람을 제외하고 정리한 자료를 알파벳 순서대로 정렬한 결과 대조국전쟁에서 발생한 완전 손실은 최소 13,850,000명으로 밝혀졌다. 이중 약 1,100,000명이 장교였다.78) 2007년말까지 정리한 결과 신상파일에 남은 장교는 970,000명으로 줄어들었다. 여러가지 이유로 125,232명이 장교 명단에서 제외되었다. 이 작업은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다.(어쩌면 이미 완료되었는지도 모른다.) 그결과 전사하거나 행방불명된 장교의 숫자는 크리보셰프 연구집단의 통계에 가까워지고 있다. 크리보셰프의 통계는 독일과의 전쟁 중 898,718명의 장교가 전사했으며 2차대전 전체로는 900,188명의 장교가 전사했다고 되어있다.79) 그러나 장교의 경우는 부사관이나 사병들에 비해 정리가 훨씬 잘되어 있는 편에 속한다. 부사관과 사병의 경우 국방부 중앙문서보관소의 신상파일과 크리보셰프의 통계간에 수백만명의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2008년 3월 기준으로, 비공식 정보에 의하면 국방부 중앙문서보관소의 신상파일을 알파벳순으로 정리한 결과 부사관과 사병은 13,271,269명으로 줄어들었다고한다. 이것을 다시 세분하면 다음과 같다.


•전사 4,173,709명(31.44%)
•부상이나 질병으로 인한 사망 1,383,052명(10.42%)
•행방불명 7,156,262명(53.92%) 이 중 1,720,951명은 부대 지휘관에 의해,  5,435,311명은 병무소의 보고에 의해 실종 사실이 보고됐다.
• 군사재판 의한 사형 62,688(0.47%)
국방부 중앙문서보관소 신상파일에 있는 군사재판에 의해 사형을 받은 인원의 수는 『20세기 러시아와 소련의 전쟁』에 기재된 해당 항목의 인원 수 보다 2.5배나 적은 것이다. 『20세기 러시아와 소련의 전쟁』의 표 134를 보면 군사재판에서 유죄판결을 받은 인원은 총 994,300명인데 이 중에서 135,000명이 사형을 언도받고 총살됐다고 기록되어 있다. 어째서 두 자료가 이토록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일까? 특히 『20세기 러시아와 소련의 전쟁』에 기재된 희생자의 수가 신상파일에 있는 희생자 보다 더 많은건 이례적이다. 간단히 설명하면, 국토의 상당부분이 적에게 점령된 상태에서 군사법정의 선고 내용은 정부의 유관 기관에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경우가 잦았다. 군사법정의 선고내용은 따로 정리되어 오랫동안 기밀로 분류됐으며 사형을 받은 사람의 신상정보는 중앙문서보관소의 관련 부서에 전달되지 않았다. 이때문에 행방불명 처리된 사람 중 수만명은 실제로 사형을 받은 사람이며 그들의 가족은 그 사실조차 몰랐다는 것이다. 가족 관련 정보가 부족하다는 점은 신상파일의 미흡한 면을 보여준다. 이 문제에 대해서 내가 실종자들을 찾으면서 접했던 개인적인 경험을 이야기 할까 한다. 총살형에 처해진 사람의 유가족들은 이 소식을 비공식적인 경로, 예를 들면 같은 마을 사람 등을 통해 전해들었기 때문에 굳이 서둘러서 정부에 해명이나 명예회복 등을 요구할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독전대가 공황에 빠져 퇴각하는 것을 막으려고 사살한 사람의 숫자는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전투가 벌어지는 상황에서 도주하는 군인들을 모두 군사재판에 회부해 처벌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국방부 중앙문서보관소의 신상 파일은 전쟁에 동원되어 귀향하지 못한 13,271,000명의 신상정보를 담고 있다. 이 수치는 전쟁 중 전사하거나 실종된 붉은군대 장병의 숫자에 거의 근접한 것이다. 또한 공식 통계치인 8,668,000명 보다 4,600,000명이나 더 많고 붉은군대 육해군과 NKVD 국경경비대 및 치안부대의 전체 작전손실(전사 및 행방불명 8,668,000명에 질병 및 기타 이유로 전역한 인원을 더한 손실) 11,444,100명 보다 1,800,000명이나 더 많은 수치이다. 이때문에 중앙문서보관소의 연구보조원들은 종종 검색해서 찾은 사람에 대한 신상정보가 아예 없는 경우를 발견하곤 한다. 그 이유는 붉은군대가 인사기록, 특히 사상자의 인사기록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1942년 4월 12일자 국방인민위원장 명령 0270호 “전선에서 발생한 회복불가능한 인명손실 명단에 관하여”에 따르면 “현 시점에서 실제 전사자의 3분의 1만이 기록되어 있다. 실종자와 전사자의 경우는 더욱 더 심각하다.”80)  


우리는 특정 전투를 수행하는데 있어, 그리고 작전의 목표를 달성하고 전쟁에 승리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러야 했는지 이해하기 위해서 인명희생을 군사-작전의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다. 이를 통해 우리 군대가 극도로 많은 인명 피해를 입은 원인을 밝혀 지난 전쟁의 과오를 되풀이 하지 않도록 하려는 학자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


국방부 중앙문서보관소의 신상파일을 기반으로 대조국전쟁 시기에 붉은군대가 입은 전사 및 실종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붉은군대 육해군의 손실: 13,271,000명
 •NKVD 국경경비대: 61,400명
 •NKVD 치안부대: 97,700명
 •합계: 13,430,000명


여기에 더해 병무소에 출두했으나 배속됐어야 할 부대의 기록에는 남지 않아 실종처리된 인원 500,000명이 있다. 소집된 기록은 있으나 여러가지 이유로 아직 신상파일이 작성되지 않은 인원까지 고려한다면(그 숫자는 십만단위는 못되도 수만명은 될 것이다.81)) 전쟁기간 중 회복불가능한 인명손실은 아무리 보수적으로 잡더라도 최소 14,500,000명일 것이다. 이것은 전쟁기간 중 동원된 인원 29,500,000명의 절반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전쟁기간 중 소련과 독일 양측의 인명손실비는 1.7대 1로 소련쪽에 더 불리해진다.


인명손실비에서 소련이 더 불리한 이유는 대조국전쟁 시기 군사작전의 특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판단된다. 하지만 이 손실비 조차 크리보셰프가 독일군의 회복불가능한 인명손실을 8,600,000명이라고 집계한 것을 적용한 것이다. 독립연구자들은 크리보셰프가 독일군의 인명손실을 터무니없이 과장했다고 지적한다. 크리보셰프가 독일군의 인명손실을 얼마나 과장했느냐는 별도로 연구해야 한다. 그러나 크리보셰프 연구집단이 저지른 오류 하나는 확실히 지적할 수 있다. 크리보셰프 연구집단은 1939년 6월 1일 이후 국방군과 무장친위대에 동원된 독일인이 17,893,200명이고 여기에 1939년 3월 1일 기준으로 이미 군대에 있던 3,214,000명을 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82) 하지만 뮐러 힐데브란트의 저작을 보면 3,214,000명은 17,893,200명에 포함되어 있다.83) 즉 독일군의 인명손실을 판단하는데 기준점이 되어야 할 독일 국방군과 무장친위대에 소속됐던 독일인의 숫자를 3,214,000명이나 과장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독일의 총동원병력을 과장했어도 크리보셰프의 통계는 딱 맞아떨어진다. 이것이야 말로 조작의 증거가 아닌가. 이런 통계를 어떻게 믿는단 말인가?


1993년에 나온 『기밀해제』와 2001년에 나온 『20세기 러시아와 소련의 전쟁』에 실린 독일과 그 동맹국의 회복불가능한 인명손실 통계를 비교하면 의구심이 증폭된다. 예를들면 2001년 연구에서는 독일군의 손실이 257,000명이나 더 늘었다. 더 놀라운 점은 두 저작이 독일군 포로 통계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는 점이다. 2001년의 연구는 1993년 연구보다 독일군 포로가 1,004,700명 더 많게 집계되어 있다. 여기에 독일 동맹군의 포로를 더하면 그 차이는 1,037,900명이 된다. 1993년 연구에는 포로 숫자가 3,338,400명이었는데 2001년 연구에는 4,376,300명인 것이다. 이건 도데체 어찌된 일인가? 동일한 연구집단이 동일한 산출방식을 적용했는데 숫자는 큰 차이가 난다. 더욱 더 황당한 것은 독일과 그 동맹국의 손실 항목별 통계와 참전국별 손실 통계는 모두 바뀌었지만 회복불가능한 총 손실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1993년 연구에는 8,649,500명이고 2001년 연구에는 8,649,300명이다. 따라서 양측의 인명손실비는 1.3:1로 변화가 없다. 이것이야 말로 고위층의 의도가 개입한  증거가 아니고 무엇인가?


우리의 인명손실을 비롯한 잔혹한 진실을 솔직히 이야기한다 하더라도 우리가 강력하고 교활한 적을 상대로 거둔 위대한 승리의 중요성은 퇴색되지 않는다. 어떤 “열혈 애국자”들은 독립 연구자들이 대조국전쟁 시기의 인명손실을 정확히 밝히려고 노력하는 것이 우리가 거둔 승리를 폄훼하고 국가적 통합의 상징을 모욕하고 훼손하는 한편 소련 군사지도자들의 무능을 부각하려는 행위라고 비난한다. 이 국수주의자들은 조국의 문제점을 모른척 하는 것이 애국이라고 생각한다. 러시아 여론조사연구센터의 소장 페도로프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5% 정도의 사람이 스스로를 이런 부류의 ‘애국자’로 여긴다고 한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주코프 원수가 했던 말을 들려주고 싶다. 주코프는 독일군에 대해 알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진실을 똑바로 바라보고 당시의 현실에 대해 자유롭게 이야기해야 한다. 전쟁 첫 날 부터 맞서 싸워야 했던 독일군의 장점에 대해 평가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전쟁을 치르면서 훈련을 받아 독일군을 무찌를 수 있게 됐다. 하지만 그 과정은 정말 길었다.” 84)


주코프는 전후 인사정책에 대해 평가하면서 이렇게 지적했다.


“지휘관들은 전쟁을 치르면서 싸우는 법을 깨우쳐갔다. 그 과정에서 우리 인민의 피를 댓가로 치러야 했다.”85)


이 책에서는 소련과 독일 양측 기록을 통해 뱌지마와 브랸스크에서 어떻게 재앙이 일어났는지를 자세히 서술했다. 그런데 우리의 공식 전쟁사에 서술된 내용을 보면 그 양상이 달라진다.1994년판 군사백과사전에 실린 해당항목의 결론 부분을 참고로 인용하겠다.


“뱌지마 작전의 결과가 실패로 끝난 원인은 소련군 지휘부가 적 주력의 집결과 그 의도를 몰라 적의 주공축선을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전선군 사령관 코네프와 부됸늬는 작전이 진행되는 동안 위협 받는 방향으로 부대를 기동하지 않았으며, 포위된 부대들을 철수시키기나 제대로 지휘하지도 못했다.”86)


부대의 잠재력을 이끌어내는 것은 의심할 여지 없이 지휘관들의 용병술에 달려있다. 코네프와 부됸늬의 과오를 밝히기 전에는 이들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마무리 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뱌지마와 브랸스크에서 있었던 사건에 대한 진실을 모두 밝혀졌는가? 그리고 모든 과오가 코네프와 부됸늬, 예료멘코의 책임인가? 이들은 자신들의 권한 내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했다. 사실 이들은 부대를 움직이기는 했지만 항상 상급 사령부의 눈치를 보면서 매우 소극적으로 했다. 전선의 상황과 동떨어진 명령을 따르다가 패배하는 경우와, 지휘관이 독자적으로 행동하다가 패배하는 것은 붉은군대에서 전혀 다른 문제였다. 1941년 당시 대부분의 지휘관은 독일군보다 상급사령부를 더 두려워했다. 야전군 사령관과 전선군 사령관들은 상급사령부를 두려워했기 때문에 전선이 붕괴되는 상황에서도 올바르고 정확한 보고를 하지 못했다. 결정을 내리면 책임을 져야한다는 두려움이 우리의 지휘관과 장군들을 짓눌렀다.


주코프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뱌지마 지구의 재앙을 피할 기회는 있었다. 독일군이 아군보다 병력과 장비면에서 압도적이긴 했으나 아군은 충분히 포위당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보다 정확하고 빠르게 적의 주공 축선을 파악한 뒤 당장 위험하지 않은 지역에서 적의 주공 축선으로 병력과 장비를 증원했어야 했다.“87)


어째서 그럴수 없었는가? 최고사령부와 총참모부, 그리고 스탈린은 뭘 하고 있었던 것인가? 뱌지마의 참패를 불러온 원인 중 하나는 스탈린이었다. 스탈린을 잘 알았던 바실레프스키는 이렇게 회고했다.

“전쟁 초기에 스탈린이 작전-전략적으로 미흡했다는 점은 잘 알려져있다. 당시의 스탈린은 총참모부 장교들이나 전선군 사령관들과 협의하는 일이 드물었다. 총참모부 작전국의 고위급 장교라 할 지라도 최고사령부가 가장 중요한 작전 지침을 내리기 위해 연 회의에 가끔 참석했을 뿐이다. 당시 스탈린은 독단적으로 결정을 내리는 일이 다반사였으며 이런 결정은 패배를 불러왔다.”88)


스탈린에겐 총참모부가 있었으나 이 조직은 개전 이래로 스탈린 때문에 심각하게 약해진 상태였으며, 스탈린은 가장 중요한 결정을 내릴때 총참모부와 상의하지 않았다. 바실레프스키는 이에 대해 정확하게 지적했다. “ 총참모부의 최고위 직위에 있던 바투틴, 소콜로프스키, 샤로힌, 말란딘 등은 각 전선군과 야전군 사령부에 파견을 다니다 보니 총참모부의 정상적인 작전 업무에 종사할 수 없었다.”89)


스탈린은 아군이 르제프-뱌지마를 잇는 요새화된 방어선으로 퇴각하는 것을 지연시켰고 이때문에 대재앙이 발생했다. 아군이 제때 요새화된 방어선으로 퇴각해 이미 배치되어 있던 예비전선군을 증원할 수 있었다면 사태는 다른 방향으로 전개됐을 것이며, 분명히 소련군에게 유리했을 것이다.(스탈린은 1942년에도 같은 실수를 거듭했다.) 주공 축선의 적군을 저지하기 위해 성급히 공세작전을 기획하고 부족한 지원하에 이를 실행한 결과 가뜩이나 부족한 예비대를 소모한 점도 지적해야 한다. 또한 전쟁 초반의 부실한 대응도 그러하다.
기밀해제된 사료들이 학계에 소개된 덕분에 학자들은 대조국전쟁 당시의 사건을 재조명 하고, 이를 보다 객관적이고 사료에 근거해 이야기 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애국심만 충만한 사람들은 논쟁의 대상이거나 아직 완전히 해결되지 않은 문제에 대해 합리적인 대응을 하는 대신 전쟁에 대해 다시 분석하려는 모든 노력에 대해 목청을 높여 반대한다. 수정주의적인 역사서술을 하는 사람은 찾아보기가 힘들다. 문제는 전쟁의 결과를 재검토하자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폐쇄적인 문서고에 감춰져 있다가 새로 발굴된 사실을 통해 전쟁 중 일어났던 사건들을 재검토 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소련이 최소한 숫적인 면에서는 군사적으로 우월했으며 경제력에서도 그러했음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베를린으로 향하는 승리의 행진이 모스크바의 문 앞까지 밀린 상태에서 시작되어 하리코프와 스탈린그라드를 거쳐야 했는지를 분석해야 한다.


군사 지휘관 뿐만 아니라 국가의 모든 지도층이 실수를 했기 때문이라는 지적은 옳다. 그렇다. 실수는 실수다. 하지만 이것이 본질적인 이유는 아니다. 실수의 결과는 제각각이기 때문이다. 고위층이 실수를 저지르면 그만큼 큰 재앙이 따랐다. 소련 수뇌부가 독일의 공세를 막기 위해 준비하고 모스크바 방어전 기간 중 취했던 행동을 분석하면 최고사령관 스탈린, 총참모부와 서부전선군, 예비전선군, 브랸스크 전선군 사령관 모두가 함께 뱌지마와 브랸스크의 재앙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요즘도 승전기념일이 되면 몇몇 사람들이 뱌지마 전투를 비롯해 소련군이 1941년 내내 패배를 거듭하고 막대한 손실을 입은 원인이 독일군의 숫적 우세 때문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변명의 구실이 될 수 없다. 그리고 소련 수뇌부의 실수와 판단착오 만으로 패배의 원인을 설명해서도 안된다. 1941년 소련의 연전연패는 피할 수 없는 예정된 것 이었다. 당시의 패배는 객관적인 요인들이 작용한 결과였다. 소련 국가 시스템의 성격, 경제적 상황, 인민의 교육 및 생활 수준, 중요한 의사결정을 내리는 시스템, 붉은군대의 지휘관과 참모장교 및 일선부대가 받은 훈련량과 훈련수준 등이다. 전쟁 직전과 전쟁 초기 소련의 정치지도자와 군사지도자들이 저지른 과오와 판단착오는 단지 사태를 더 악화시킨 원인에 불과했다.


이제 전쟁이 끝난지 65년이 지났다. 하지만 대조국전쟁을 객관적으로 기술한 통사는 씌여지지 못했다. 지금 있는 대조국전쟁 공간사는 붉은군대의 패배와 이로 인한 정당화할 수 없는 막대한 인명손실을 초래한 자들이 살아 있을때 씌여졌다. 붉은군대의 지휘관들은 특정한 시기와 사건에 관계된 자신의 업적을 강조하거나 책임을 회피하는 식의 회고록을 써왔을 뿐이다. 이런 회고록의 문제점은 한참 지나서야 알려졌다. 물론 인간적으로는 이해할 수 있는 행동이다. 비판을 받는 것 보다야 업적을 강조하는 쪽이 즐겁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들의 회고록과 공개적인 발언, 그리고 기념식 연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승자라는 권위는 1차사료에 접근하기 곤란한 역사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게다가 회고록은 주관적이었을 뿐 아니라 검열까지 관여했다. 회고록의 저자들은 (검열에 맞춰-역자) 원고를 수정해야 했고 패전과 손실에 대해서는 이야기 할 수 없었다.90)


소련 시기의 대조국전쟁 역사서술이 (특정인의) 입맛에 좌우된 것은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다. 역사서는 당 서기장이나 특정 정치인, 혹은 장군들의 입맛에 맞춰 씌여지길 반복했다. 소련시기 역사 저작의 편찬을 담당한 조직의 구성만 봐도 알 수 있다. 편집위원회가 역사가들에게 압력을 넣을 수 있었던 원인은 그들의 권위 뿐만이 아니었다. 역사가들의 운명과 경력이 편집위원들에게 달려있었다. 대조국전쟁사는 공산당의 이데올로기와 검열을 통해 만들어졌다.


당의 공식노선에 따라 ‘융통성’이 작용한 과정을 내가 직접 경험한 일을 예로 들어 설명하겠다. 나는 소련군사출판사 보예니즈다트Воениздат에 근무하던 중 말라야 젬랴Малая Земля 전투를 다룬 신간서적을 검토하게 됐다. 말라야 젬랴 전투의 ‘영웅’ 브레즈네프가 죽고나서 한달도 채 안됐을 무렵 출판사 편집장은 브레즈네프가 주인공인 책을 읽는데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그냥 내다 버려.” 아직 “전 세계의 진보적 인민들이 노동운동과 공산주의 운동의 탁월한 지도자를 애도하던” 때에 말이다. 물론 이건 편집장이 독단적으로 한 일이 아니었다.  


현재 대조국전쟁사를 다룬 새로운 여러권짜리 공간사가 집필 중이다. 많은 역사가와 학자들은 새 공간사도 소련시절에 나왔던 12권짜리 『2차대전사История Второй Мировой Войны』의 전철을 밟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다. 이 책은 소련의 시각으로만 서술을 하고 있었다.(전쟁은 두 진영이 치르는 것인데 말이다.) 이것은 전쟁사가 아니라 단지 전쟁시기 소련공산당을 찬양하는 역사책에 불과했다. 당시에는 전쟁의 본질에 대한 의문을 제기할 수 없었다. 사실 오늘날 조차 대조국전쟁의 결정적인 전투에 관련된 의문을 진지하게 탐구할 수 있는 여건은 마련되지 않았다. 내가 말하는 ‘결정적인 전투는’ 승리한 전투가 아니다. 승리의 아버지는 많지만 패배는 고아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정기적으로 자료를 기밀해제하라는 명령이 떨어진다. 하지만 지시한 것과 실제로 이행되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앞서 1943년 7~8월의 쿠르스크 전투 당시 보로네지 전선군을 조사한 말렌코프 위원회의 보고서가 러시아 대통령문서고에 소장되어 있다는 것을 언급했다. 일반 연구자들은 대통령문서고에 접근할 수 없다. 대통령문서고의 담당 공무원은 전화통화에서 말렌코프 위원회 보고서는 아직 기밀이기 때문에 공개할 수 없다고 밝혔다. 말렌코프 위원회가 스탈린그라드 전투(1942)와 1943년 초 중부전선군 및 서부전선군을 조사한 보고서는 러시아 국립사회정치사 문서고(옛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문서고)에 소장되어 있다는 점이 의미심장하다. 왜 말렌코프 위원회가 프로호롭카 전투를 조사한 보고서만 감추는 것인가? 쿠르스크 전투에서 승리한 것은 소련인데 말이다!


여전히 많은 자료가 총참모부 문서고와 대통령 문서고(옛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장 문서고)의 특수 서고에 소장되어 있다. 총참모부와 최고사령부의 문서와 중앙정치국의 문서들이 기밀처리되어 있는 점은 변함없다. 학자들은 최고사령부의 보고서와 전선군 사령부에 파견된 총참모부 대표의 보고서, 그리고 총참모장 바실레프스키 장군의 업무일지를 열람할 수 없다. 1981년 부터 1996년까지 암호화된 전문들은 공개 자료였으나 정체를 알 수 없는 일부 인사들의 결정으로 다시 기밀 처리됐다. 위에서 언급한 자료들이 공개되기 전에는 주요 작전의 준비 및 실행과정, 그리고 그 작전의 실제 결과와 사상자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다. 즉 우리가 대조국전쟁의 진실을 알 수 없을 것이란 뜻이다.
정보를 쥐고 있는 사람들은 현재와 같이 복잡한 시기에(그리고 언제 러시아의 사정이 나았던 때가 있었던가?) 대중이 전쟁의 진실을 아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굳이 대조국전쟁 시기에 정치 지도자와 장군들이 저지른 실수를 다시 한번 대중 앞에 끌어내야 하는가? 그러니 유관기관들은 굳이 정보 공개에 적극적이어야 할 이유가 없다. 설사 자료를 공개하더라도 아주 지엽적인 부분만 공개한다. 이런 행동은 이들이 항상 국가와 군대의 체면만 고려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군사사를 담당하는 공무원들은 누군가가 그들의 능력에 의구심을 품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 이들은 애국심이라는 깃발 아래 획일화된 사고방식이 통용되던 시대로 돌아가고 싶어한다. 최근 정부당국은 텔레비전 방송의 몇몇 프로그램을 중단시켰고 인터넷까지 통제하려 한다.


이들은 종종 국가는 애국자를 필요로 하며, 애국자는 승리와 긍정적인 역사를 통해서만 만들어진다는 단순한 생각을 한다. 아주 유치한 착각이 아닐 수 없다. 오늘날에 와서 전쟁의 고통스러운 진실을 은폐할 수는 없다. 전쟁에는 승리 뿐 아니라 패배도 있었다. 그러나 전쟁의 긍정적인 측면 보다는 복잡하고 모순적인, 고통스럽지만 정확한 전쟁의 진실을 알려주는 것이 젊은이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을 것이며 그들의 지적인 면에도 영향을 끼칠 수 있을 것이다. 러시아 작가 빅토르 아스타프예프Ви́ктор Петро́вич Аста́фьев가 바르게 지적한 것 처럼 “과거에 대해 거짓말을 하는 자는 미래에 관해서도 거짓말을 할 것이다.” 여기에는 도덕적인 문제만 있는게 아니다. 고도로 전문적인 군간부를 육성하고 군사과학과 군사술의 발전을 진지하게 생각한다면 대조국전쟁을 진지하고 편견없이 분석해야 한다. ‘조작된’ 전쟁 경험을 바탕으로 군사 사상을 발전시킬 수 있겠는가? 언제쯤 러시아인은 준비하는데 시간이 걸려도 실행은 신속하다는 소리를 그만 들을 수 있을까? 언제쯤 우리 군 지휘관들은 병사들의 피를 댓가로 전쟁의 교훈을 배우지 않고, 전쟁이 나기 전에 싸우는 법을 배울 수 있을 것인가?


오늘날 과거에 있었던 전쟁의 가감없는 진실된 경험을 무시하는 것은 범죄다. 만약 대조국전쟁 직전 우리의 정치 지도자와 군 지휘관들이 중요한 판단착오와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다면 아군의 손실은 실제보다 훨씬 적었을 것이다. 우리가 직접 실수를 통해 배우는 것 보다는 우리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실수에서 배우는 것이 낫지 않은가? 그러지 못한다면 “인명손실은 상관없다.”는 풍조가 만연할 것이다. 그리고 군대가 작은 비적집단 하나에 쩔쩔매도 “우리 러시아의 국방장관은 고금을 통틀어 가장 유능한 인물이다.” 같은 소리나 하게 될 것이다.


 오늘날 러시아 총참모부의 국방추모센터 근무자들은 전사자의 신상정보를 전산화하는데 여념이 없다. 이 작업은 각 부대의 사상자 보고, 병무소의 공지문, 그리고 소련군 장병의 매장 기록 등을 참고해 이뤄지고 있다. 통합된 전사자와 실종자 명단이 작성되고 있다. 2010년 6월 24일 현재, 이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약 12,000,000쪽의 문서와 30,000건의 군인묘지 매장기록을 스캔해 인터넷으로 제공하고 있다. 이것은 올바른 방향이다. 컴퓨터와 인터넷의 도움을 받아도 우리 조국을 수호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 군인들을 집계하는 것은 긴 시간이 걸릴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포위망에 같혔거나 퇴각 중이던 부대는 사상자 보고를 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전사자 데이터베이스의 전사자 및 실종자 숫자는 국방부 중앙문서고 신상파일의 숫자와 수백만명의 차이가 날 것이다. 그리고 15년간 국립추모재단союз Народная Память91)에서 전사자 및 실종자 명단을 작성한 경험에 비춰볼때 신상파일이나 데이터베이스에 기재되지 못하는 전사자나 실종자도 수만명에 달할 것이다. 예산 부족으로 추모재단의 명부에서 중복기재된 사람을 삭제하는 작업이 완료되지 못한 점은 안타깝다.


지금까지 이 재단은 가족과 사랑하는 사람이 사망하거나 실종된 배경에 대한 최소한의 정보를 알려달라는 73,000건의 요청을 받았다. 이 중 18,000명이 답변을 받았다. 55,000명은 여전히 답변을 기다리는 중이다. 이들이 총참모부 국방추모센터가 만든 데이터베이스를 사용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조사한 명단을 사용하는 이유는 알 수 없다. 어쨌든 새 컴퓨터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고 있는 담당자들은 조만간 인터넷을 처음 시작하는 초등학생을 비롯한 각계각층의 민원에 시달리게 될 것이라는 점을 어렴풋이 알고있는듯 하다. 그런 민원은 대개 이럴 것이다. “국방부 중앙문서보관소의 기록을 보면 내 아버지(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는 실종자로 되어 있는데 왜 그쪽의 데이터베이스에는 해당 내용이 없나요?”


피해 없이 전쟁을 치를수는 없다. 우리 붉은군대는 1941년에 다섯달 동안 격렬한 방어전투를 치르며 전황을 뒤집기 위해 많은 희생을 치렀다. 모스크바 전투, 그리고 대조국전쟁에 승리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렀는지는 진작에 알려졌어야 한다. 새롭게 집필되는 대조국전쟁사는 희생자 문제를 더 높은 수준으로 해결해야 한다. 대조국전쟁 당시 실제 인명손실을 밝히는 것 만이 객관적으로 역사를 서술하는 유일한 길이다. 인명손실과 물자손실을 정확히 알지 못하면 전쟁 연구를 마무리 할 수 없다. 군사작전 분석, 지휘관들의 전문성과 역할에 대한 평가, 전쟁으로 부터 교훈을 이끌어내는 것은 승리를 위해 치른 희생과 불가분의 관계이다.92)


이와 관련해 주코프가 대조국전쟁에서 수행한 역할에 대해서도 조금 이야기 해야 한다. 몇몇 역사가들은 ‘으뜸가는 승리의 원수’를 숭배하는 풍조를 만들려고 한다. 하지만 이들이 주장하는 것 처럼 전쟁 기간 중 주코프가 뛰어난 지휘 능력을 보였고 군사술의 이론적 발전과 실천에도 창조적으로 기여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주코프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그가 작전을 준비하고 실행하는데 발휘한 능력을 과대평가하고, 그의 실수로 인해 치러야 했던 막대한 희생은 은폐하려 한다. 군사과학아카데미는 주코프가 군사과학에 창조적인 기여를 했다는 내용의 책을 간행할 예정이다. 소연방원수 로코소프스키는 1930년에 제7 사마라 기병사단의 사단장이었는데 당시 그의 휘하에서 제2기병여단을 지휘하고 있었던 주코프의 자질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충분한 교육과정을 수료한 뒤 부사단장이나 기계화부대 지휘관이 된다면 그 역할을 잘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참모나 행정업무에는 적합하지 않다. 주코프는 그런 업무를  매우 싫어한다.”93)


하지만 전쟁직전 주코프는 총참모장에 임명됐다. 주코프가 총참모장으로 유능했다고 평가하기는 힘들다. 그는 전쟁 직전 붉은군대의 동원 및 전투 준비태세가 미흡했던 점, 그리고 적의 전투력을 과소평가한 점, 마지막으로 전쟁 초기 붉은군대가 연전연패한데 대해 국방인민위원장 티모셴코 보다 더 큰 책임을 져야한다.94)


그러나 1941년 10월 모스크바 축선의 3개 전선군이 동시에 붕괴하고 있던때 스탈린은  주코프와 그의 강인한 의지, 결단력, 그리고 냉혹함을 이용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스탈린은 주코프에게 막강한 권한을 주었다. 물론 주코프는 권한이 주어질 때 까지 기다리기 보다는 이를 쟁취하는 사람이었다. 주코프가 아닌 다른 사람이라면 1941년 10월에 병력 부족과 일선 부대에 대한 지휘 통제 체계가 붕괴되는 상황에 대응할 수 있었을까? 주코프는 사태를 재빠르게 파악하고 모스크바로 향하는 주요 축선의 방어에 필요한 정확한 결단을 내렸다. 그는 뱌지마 전투의 참패 이후 남아있던 얼마 안되는 병력, 특히 대전차부대를 주요 축선에 집중했다.


모스크바의 문턱에서 적을 격퇴하는데 있어 주코프가 지대한 공헌을 한 점은 명백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를 모스크바의 수호자라고 추켜올리고 다른 장군들의 역할을 깎아내리는 것은 문제가 있다. 모자이스크 방어선을 구축하고 다른 지구에서 모스크바 방면으로 병력을 이동시키고, 후방에 있던 예비대를 동원한 것은 주코프가 서부전선군 사령관에 임명되기 전 부터 추진되었다. 총참모부는 모스크바로 향하는 길에서 전개되는 사태를 면밀히 관찰하면서 상황에 맞춰 신속히 대응했고 위태로운 지역으로 예비대를 투입했다.


주코프의 역할을 평가할때 그가 부하들을 위압적이고 무례하고 잔인하게 다뤘다는 점을 빼놓을 수 없다. 로코소프스키는 “주코프의 잔인함은 도가 지나칠 정도였다.”고 회상했다. 주코프는 사람의 목숨을 가볍게 여겼다. 그래서 그는 항상 “인명 희생은 신경쓰지 않는” 명령을 내렸다. 주코프의 명령에 따라 각급 제대의 지휘관과 정치위원들은 공격에 나서는 선두부대와 함께하면서 앞장서 돌격해야 했다. 이로 인해 어떤 댓가를 치러야 했을까? 문제는 지휘관이 부족한 상황에서 이런 명령을 내렸다는 것이다. 주코프의 명령에 따라 일반 병사는 물론 장교들도 수없이 총살됐다. 때로는 재판이나 수사 없이 사소한 일로 총살을 당해야 했다. 하지만 모스크바 방면의 상황이 심각했기 때문에 부대를 집합 시킨 뒤 지휘관을 총살시키는 잔인한 행동을 했던 것은 아니다. 주코프는 할힌골 전투때도 그랬고, 옐냐 전투때도 그랬으며, 레닌그라드 전투때도 그랬다. 서부전선군 예하 제43군 사령관 골루베프 장군은 1941년 11월 8일 스탈린에게 서신을 보내 서부전선군 사령관 주코프를 비판했다. “부임하고 둘째날이 되자 저를 총살하겠다고 했습니다. 다음 날에는 저를 군사재판에 회부했습니다. 그리고 넷째날에는 저를 병사들 앞에서 총살하겠다고 협박했습니다.”95) 그러나 스탈린에게 주코프의 잔인함을 하소연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었다. 스탈린이야 말로 인민과 군대를 가혹하게 탄압했으며 1941년 10월의 위기 이후에도 마음에 안드는 지휘관을 처형하라는 명령을 남발한 인물이 아니었던가.96)


모스크바와 소련 전역의 인민들이 물심양면으로 모스크바 방어군을 지원하지 않았다면 협박과 잔인한 명령만으로 승리를 거두지는 못했을 것이다. 모스크바 전투 당시 아군 장병들이 용기와 의지를 발휘할 수 있었던 원인은 독전대와 총살 위협 때문이 아니라 애국심과 수도 모스크바를 수호하려는 정신을 가지고 있었던데 있다. 또 소련공산당이 적을 격파하기 위해 수행한 역할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소련공산당의 조직과 중앙집권의 원칙은 전쟁 상황에 적합했다. 당의 각 위원회와 콤소몰 조직은 붉은군대 장병들에게 적에 대한 적개심, 승리를 위한 결의와 의지를 고취하고, 전투 임무를 수행하는데 있어 군부대 지휘관들이 부하들을 단결시킬 수 있게 했다.


붉은군대 장병들의 영웅적인 행동과 인민들의 헌신적인 노동, 애국심과 적극성 때문에 우리는 대조국전쟁에서 파시즘을 상대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 전쟁당시 우리 조국의 사회주의 사회경제체계와 정치체계의 역할을 어떻게 평가하건 간에, 소련공산당의 역할로 인해 전쟁의 엄혹한 시련을 견뎌낼 수 있었으며, 강력하고 교활한 적과 국가의 존망을 걸고 사투를 벌일때 긍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물론 대조국전쟁 당시, 특히  가장 어려웠던 시기인 전쟁 초기에 인민들이 스스로 각성한 진실된 애국심을 당의 노선에 따라 움직이려고 하는 과정에서 많은 당원과 노동자들은 물론 국가 지도층에도 관료주의적인 병폐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1941년 모스크바 방어작전의 성공으로 우리 군대는 승리의 가능성을 믿게 되었으며 우리의 대의를 확신할 수 있게 됐고,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싸울 수 있는 의지를 가지게 됐다. 모스크바 전투에서 승리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 것은 바로 지휘관의 계획과 결심을 최종적으로 이행하는 말단 병사들이었다. 소련 병사들은 수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적의 기갑사단에 맞서 싸워 적의 의도를 좌절시켰다. 지휘관들의 모든 실수와 판단착오를 만회할 수 있었던 것은 소련 병사들이 희생을 치렀기 때문이었다.


1941년에 수많은 용감한 이들이 치열하게 싸우고 희생을 치르지 않았다면 결코 1945년에 궁극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했을 것이다.


주석
39) Pravda, 14 March 1946.
40) 이 수치는 전사자와 중상자 뿐만 아니라 질병으로 인한 사망, 사고사, 사형은 물론 실종과 전쟁포로 등의 여러 이유로 인해 명단에서 제외된 인원을 포함한 것이다.
41) Krivosheev et. al., Rossiia i SSSR v voinakh XX veka, p. 237. 포로송환위원회 자료에 따르면 이 과정에서 1,836,000명이 전쟁이 끝나고 독일의 포로수용소로 부터 귀환했다. 그리고 기존에 실종자로 분류됐으나 해방된 뒤 소집령에 응한 939,700명도 손실에서 제외됐다.
42) Izvestiia, 9 May 1990.
43) Krasnaia zvezda, 10 May 1990.
44) G. F. Krivosheev (ed.), Grif sekretnosti sniat (Moscow: Voenizdat, 1993).
45) Krivosheev (ed.), Rossiia i SSSR v voinakh XX veka (Moscow: Olma-Press, 2001)를 참고하라.
46) General Staff Roster No. 5 of the rifle, mountain rifle, motorized rifle and motorized divisions of the acting army in the years of the Great Patriotic War, 1941-1945, p. 29.
47) TsAMO RF, F. 208, Op. 2511, D. 216, L. 123.
48) 이 지침은 전쟁 발발부터 1944년 2월 4일까지 유효했다. 이후 ‘전시 붉은군대 인력상황 보고 지침’이 도입되어 이를 대체했다.
49) TsAMO RF, F. 48a, Op. 1640, D. 180, L. 275.
50) Eliseev, “Dokumenty TsAMO o Viazemskom okruzhenii, poteriakh v Moskovskoi bitve” Voenno-Istoricheskii Arkhiv, No. 12 (December, 2006), p. 62.
51) 이에따라 신상파일에서 최소 128,000명이 제외됐다.
52) Eliseev, “Dokumenty TsAMO o Viazemskom okruzhenii, p. 71.
53) Iu. A. Gor’kov, Gosudarstvennyi Komitet Oborony postanovliaet (1941-1945): Tsifry, dokumenty (Moscow: OLMA-PRESS, 2002), p. 62.
54) TsAMO RF, F. 48a, Op. 1640, D. 180, L. 275.
55) 편집자주: 이 문장의 핵심은 스텝군관구의 제5근위군과 제5근위전차군이 프로호롭카 반격 직전 보로네지 전선군으로 배속변경됐다는 점이다. 스텝군관구는 두 부대가 배속변경된 뒤인 1943년 7월 10일 스텝전선군으로 개칭됐다.
56) TsAMO RF, F. 240, Op. 2795, D. 35, L. 123.
57) Krivosheev, et al., Rossiia i SSSR v voinakh XX veka, pp. 273, 275-276, 484 (Table 189).
58) 이 명령문의 전문은 www.soldat.ru/doc/nko/text/1941-00123.html 를 참고하라.
59) Krivosheev, et. al., Rossiia i SSSR v voinakh XX veka의 표 186을 참고하라.
60) 한편 히틀러는 이 연설에서 독일군의 손실은 축소왜곡해서 발표했다. 히틀러는 1941년 12월 6일까지 독일군의 손실이 500,000명이라고 주장했다. 실제로 독일군이 1941년 6월 22일 부터 12월 31일까지 입은 인명손실은 전사, 부상, 실종을 통틀어 831,050명이었다. [Wehrmacht Verlustwesen, BA – MA RW 6/ v. 552.]
61) Polnaia entsiklopediia tankov mira, 1915-2000 (Minsk: Kharvest, 2001), p. 289.
62) Horst Boog, et. al., Germany and the Second World War. Volume IV: The Attack on the Soviet Union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99), pp. 1176-1177.
63) C. Streit, “Massovoe vymiranie sovetskikh voennoplennykh”; Oni nam ne tovarishchi, VIZh, No. 11( November, 1992), p. 28.
64) Krivosheev, et. al., Rossiia i SSSR v voinakh XX veka의 표 134를 참고하라.
65) Krivosheev, et. al., Rossiia i SSSR v voinakh XX veka의 표 120을 참고하라.
66) Ibid., p. 237.
67) C. Streit, Sovetskoe voennoeplennye v Germanii, Vtoraia mirovaia voina: Vzgliad iz Germanii (Moscow: Yauza-Eksmo, 2006), p. 254.
68) http://www.uprava-lefortovo.ru/item1144/ 을 참고하라. 이 웹사이트는 레포르토보구(소련시절 모스크바의 노동절구) 집행위원회의 홈페이지다. 이 문서는 1995년 1월 20일 기밀해제됐다.
69) 『기밀해제』 집필에 참여한 다른 사람들을 개인적으로 만났을때 이들은 인용한 보고서의 구체적인 사항에 대해 언급할 수 없다고 말했다.
70) TsAMO RF, F. 73, Op. 12109, D. 3919, L. 36-38; D. 3928, L. 83.
71) TsAMO RF, F. USUR GSh. Op. 179381, D. 137, L. 312-316.
72) Voennaia-entsiklopediia, Vol. 5 (2001), p. 262.
73) Eliseev, “Dokumenty TsAMO o Viazemskom okruzhenii,” pp. 59-60.
74) Ibid., p. 69.
75) Krivosheev, et. al., Grif sekretnosti sniat, p. 393.
76) Krivosheev, et. al., Rossiia i SSSR v voinakh XX veka, p. 518.
77) M. A. Gareev, Srazheniia na voenno-istoricheskom fronte. Sbornik statei ob aktual’nykh problemakh voennoi istorii (Moscow: Insan, 2008), p. 496.
78) S. A. Il’enkov, “Pamiat’ o millionakh pavshikh zashchitnikov Otechestva nel’zia predavat’ zabveniiu”, Voenno-Istoricheskii Arkhiv, No. 7 (July, 2000), pp. 77-78.
79) Krivosheev et. al., Rossiia i SSSR v voinakh XX veka의 표 134를 참고하라. 여기서 말하는 대조국전쟁은 독일과의 전쟁 뿐 아니라 카렐리야에서 있었던 핀란드군과의 전투, 그리고 일본군에 대한 만주 전략작전도 포함하고 있다.
80) TsAMO RF, F. 404, Op. 9743, D. 12, L. 61-62.
81) 이 수치는 국방부 중앙문서보관소 신상파일에 중복 기재된 사람의 숫자 보다도 많을 수 있다.
82) Krivosheev, et. al. Rossiia i SSSR v voinakh XX veka, p. 508.
83) Mueller-Hillebrand, Sukhoputnaia armiia Germanii, 1933-1945, p. 704.
84) Marshal Zhukov: Polkovodets i chelovek, Vol. 1, (Moscow: Novost’, 1988), pp. 189-190.
85) Arkhiv Prezidenta RF, F. 35, Op. 1, D. 30, L. 95; as cited in VIZh, No. 4 (April, 2003), p. 21.
86) Voennaia entsiklopediia, Vol. 2 (Moscow: Voenizdat, 1994), p. 330.
87) Zhukov, Vospominaniia i razmyshleniia, Vol. 2, p. 9.
88) A.M. Vasilevsky, Delo vsei zhizni, 3rd edition (Moscow: Politizdat, 1978), p. 246.
89) Simonov, Glazami cheloveka, p. 357.
90) 국방부장관 권한대행이 말리노프스키 원수에게 왜 전쟁 당시의 경험을 담은 회고록을 쓰지 않느냐고 묻자 말리노프스키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자들은 내가 진실을 말하지 못하게 하니까. 난 거짓말 따윈 안해.”
91) 과학-정보 센터 ‘미래судьба’의 후신이다. 이 기관은 옛 소련 소속 공화국들에서 추모를 위한 단행본을 간행하기 위해 수집한 자료를 활용했다. 1995년 기준으로 이 기관의 데이터베이스에는 전사 및 실종자 2천만명의 명단이 수집되어 있었다. 이 기록들은 국방부 중앙문서보관소, 군 의무병과 문서고(박물관), 그리고 해군 문서고 등에서 자료를 수집했다.
92) A. N. Mertsalov and L. A. Mertsalov, “’ Generalissimus voennoi nauki’ sdaet pozitsii?” Voenno-Istoricheskii Arkhiv, No. 3 (March, 2003).
93) Krasnov, Neizvestnyi Zhukov, p. 73; 주코프는 1906년 정교회가 운영하는 학교에서 3년 과정의 교육을 마쳤다. 군사교육으로는 1916년에 4개월 과정의 부사관학교를 수료했으며, 1920년 제1 랴잔 기병 학교의 6개월 과정, 그리고 1925년에 참모장교의 자질 강화를 위해 실시한 1년 단위의 기병병과 교육, 그리고 1930년에 고급참모 역량강화를 위해 실시한 3개월 과정의 교육 등이 있다.
94) L. N. Lopukhovsky and B. K. Kavalerchik, Iun’ 41-go: Zaprogrammirovannoe porazhenie (Moscow: Iauza-Eksmo, 2010), p. 653.
95) Izvestiia TsK KPSSS, No. 3 (March, 1991).
96) 1941년 10월 28일, NKVD는 스탈린의 승인을 받은 베리야가 10월 18일에 내린 명령에 따라 쿠이비셰프 근교의 모래 구덩이에서 주요 군 지휘관들을 집단 처형했다. 이 중에는 소연방 영웅이 8명이나 있었고 그 중 한명은 2중 영웅칭호를 받은 스무스케비치Яков Владимирович Смушкевич 중장이었다.

댓글 4개:

  1. 엄청난 숫자도 황당하지만 아직도 저걸 왜곡하는것도 황당하네요. 러시아의 미래를 위해서라면 부끄러운 역사라도 정확히 남기는게 맞는거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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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중국에 비하면 양반이긴 한데 민족주의에 기반한 권위주의 국가의 특성상 어려울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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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교차검증할 능력이 안되다보니 소련측 문서 그대로 보고 있는 입장에선 참... 현재 대외공개가 안되는 러시아쪽 문서고에는 제대로 된 문서가 남아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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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러시아쪽 자료는 어학 능력이 해결되도 문제인게, 뭐든지 원하는 대로 골라볼 수 있는 독일자료와 비교했을때 공개범위 부터 차이가 납니다. 그쪽은 뭐 기밀해제 해 주기 전엔 뭐가 있는지도 파악하기 어려우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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