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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4월 1일 월요일

와틀링과 레이놀즈가 평가하는 러시아의 군사적 목표와 역량

지난 2월 중순 RUSI 홈페이지에 올라온 잭 와틀링(Jack Watling)과 닉 레이놀즈(Nick Reynolds)의 칼럼을 번역해 봅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장기화 되면서 다양한 전망이 나오고 있습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양측의 역량을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없으니 "이거다!" 싶은 설이 눈에 띄지는 않습니다만 와틀링과 레이놀즈의 분석은 진지하게 읽어볼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물론 이 글의 결론도 우크라이나에 더 많은 원조를 해 주어야 한다는 '매우 뻔한' 이야기 입니다. 모두가 잘 아는 이야기이지만 실행하기는 어려운 문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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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가 2024년 동안 우크라이나에서 추구할 목표, 그리고 러시아의 역량


 우크라이나를 지배하려는 러시아의 시도를 막아내려면 기본적으로 러시아가 이루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러시아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그리고 그 계획을 달성하기 위한 역량이 얼마나 되는지 이해를 하고 있어야 한다. 전쟁이 진행 되는 과정에서 러시아의 승리 공식에 관해 여러가지 설이 나왔었다. 그러나 현재 러시아 수뇌부는 승리를 어떻게 해서 달성할 것인지 명확한 계획을 가지고 있다. (이 글은) 러시아의 의도와 역량을 설명하려고 하며, 러시아가 성공할 가능성에 대해서 평가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러시아의 전략적 목표들

 러시아는 여전히 우크라이나를 굴복시킨다는 전략적 목표를 고수하고 있다. 이제 러시아는 승리를 향해 가고 있다고 믿고 있다. 최근 러시아 협상단이 제시한 항복 조건을 보면 우크라이나는 지금 러시아군이 점령한 영토를 할양하고 여기에 더해 하르키우, 또는 오데사까지 할양하라는 내용이 있다. 또 나토에 가입해서는 안되며, 우크라이나 정부 수반은 러시아가 동의한 인물을 앉히라고 요구하고 있다. 러시아가 양보했다는 내용은 고작 우크라이나의 남은 지역이 유럽연합에 가입할 수 있다는 것 뿐이다.

 러시아가 이런 결과를 달성하려는 과정은 세 단계에 걸쳐 진행될 예정이다. 첫 번째 단계는 우크라이나의 전 전선에 걸쳐 압박을 계속해 우크라이나군의 탄약과 예비 병력을 고갈시키는 것이다. 이와 동시에 러시아의 정보 기관들은 우크라이나의 협력국들이 군사 원조를 지속하려는 의지를 꺾는 임무를 수행한다. 군사원조가 심각하게 줄어들어서 우크라이나의 탄약 재고가 고갈된다면, 러시아는 전장에서 큰 성과를 얻기 위해 대규모 공세 작전을 (설사 느리게 진행된다 하더라도) 개시할 의도이다. 공세 작전에서 성과를 거두면 우크라이나 정부가 러시아가 내건 항복 조건을 받아들이도록 할 수 있다. 러시아군의 병력 보충과 산업 역량을 기준으로 봤을 때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시간 계획은 2026년까지 승리를 달성하는 것이다.

 우크라이나에서 성공을 거둘 경우 러시아의 목표가 확대되고, 러시아 정부가 우크라이나 및 나토와 체결한 모든 중요한 합의사항을 위반할 가능성이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러시아가 협상을 통해 원하는 것을 얻어낸다 해도 그 다음에 우크라이나의 나머지 영토를 물리적으로 점령하거나 과감하게 또 다른 지역에 무력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다.


 러시아의 군사적 역량

 2023년 초 우크라이나의 러시아군은 조직력이 심각하게 와해되어 있었고 규모는 360,000명 가량이었다. 2023년 6월 우크라이나군이 공세를 개시했을때 러시아군은 410,000명 가량으로 증강됐고 조직력도 훨씬 강화됐다. 2023년 여름 기간 중 러시아군은 국경 지대와 점령 지역에 여러개의 훈련 연대를 창설했다. 그리고 바그너 그룹이 반란을 일으킨 뒤에는 군을 통일화 하려 하면서 용병에 의존하던 경향에서 탈피했다. 2024년 초 우크라이나 점령 지역에 배치된 러시아군 작전집단의 규모는 470,000명 규모이다.

 러시아군은 대대급 이상의 제대를 전통적인 소련식 편제로 되돌려 연대, 사단, 제병협동군 순으로 재편했다. 하지만 연대급 이하는 크게 다르다. 대대는 전선대대(Line Battalions)와 돌격대대(Storm Battalions)로 구성되어 소규모로 분산해서 싸우는 중대 집단으로 작전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런 경향은 전장의 환경에 적응한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대규모 부대를 조율할 수 있는 훈련된 장교가 부족한 현실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현재 러시아군 초급장교의 상당수는 사병에서 진급해 축약된 간부 훈련 과정을 이수하고 임관하고 있다. 심한 경우에는 2개월간의 교육만 받고 임관한다.

 러시아군은 꾸준히 많은 손실을 입고 있지만 병력은 계속 늘어나고 있다. 러시아군은 작전을 대규모로 전개하면서 단절되지 않고 이어지는 전선을 형성할 수 있다. 러시아군 부대는 편제의 30% 수준의 손실을 입으면 전투력을 상실했다는 평가를 받아 최전선에서 빠져 재편성에 들어간다. 러시아군은 현재 대규모 공세를 하는 대신 영토를 점령하고 고수할 수 있도록 우크라이나군에게 작은 피해를 꾸준히 입히는 소규모 공격을 가하고 있다. 러시아군은 이런 방법으로 여러 지역에서 지속적으로 압력을 가하고 있다. 러시아군은 아직 목표로 한 150만명의 병력을 확보하지는 못 했다. 하지만 현재 러시아군 모병관들은 우크라이나에서 싸울 계약병의 85%를 모집했다. 그래서 러시아 정부는 2025년 까지도 현재 수준의 소모를 감당할 수 있다고 믿는다.

 러시아군의 전투 장비를 보면 약 4,780문의 야포(이중 20%가 자주포), 1,130문의 다연장로켓포, 2,060대의 전차, 그리고 7,080대의 기타 장갑차량(주로 MT-LB, BMP, BTR)이 있다. 약 290대의 헬리콥터(이 중 110대가 공격헬리콥터)와 310대의 제트기가 이를 지원한다. 이런 무기체계들은 탄약이 부족해서 운용에 제약을 받고 있다. 특히 220mm 다연장로켓체계와 들쑥날쑥한 152mm 탄약 보급이 큰 문제다.  고속 제트기와 같은 일부 무기체계는 핵심적인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숙련된 조종사가 많지 않아서 제약이 있다. 러시아 공군의 조종사 손실은 Il-20과 A-50U의 장비 운용요원까지 포함하면 159명인데, 러시아 항공우주군 비행부대의 들쑥날쑥한 비행시간을 고려하면 심각한 역량 손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항공우주군은 꾸준히 상당한 규모의 소티를 하면서 항공기 탑재 무기를 발사하고 있다. 종합하자면, 우크라이나군이 꾸준히 상당한 수준의 소모를 강요하는한 러시아군의 질적 수준은 향상되지 않겠지만, 그래도 러시아군은 2024년 내내 지속적으로 공격 템포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러시아의 산업 역량

 현재 진행중인 작전을 지원할 러시아의 산업 역량을 보자. 러시아는 방위 산업을 상당한 수준으로 동원했다. 기존에 있던 시설의 작업 교대를 늘리고 생산 라인을 확대해 나가고 있으며, 가동을 중단했던 시설도 다시 가동을 시켰다. 이렇게 해서 생산량이 크게 늘어났다. 예를들면, 러시아는 연간 1,5000대의 전차와 3,000여대의 다양한 기갑차량을 군대에 공급했다. 미사일 생산도 유사하게 늘어났다. 2023년 초 러시아는 9M723 이스칸데르 미사일을 한달에 6발 생산했고 재고량은 50발 수준이었다. 2024년 초가 되자 러시아는 이스칸데르 미사일을 매달 대량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스칸데르 미사일 사용량은 2023년 여름 이래 꾸준히 늘어났다. 뿐만 아니라 9M723 탄도미사일과 9M727 순항미사일을 합치면 재고량도 200발로 늘어났다. Kh-101과 같은 핵심적인 미사일의 재고량도 유사하게 늘어난 것이 관측되었다.

 이런 성과를 거뒀음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의 산업 생산력은 지속성과 신뢰성 측면에서 심각한 한계에 봉착했다. 예를들어 전차와 기갑차량은 80%가 신규상산이 아니라 기존 재고를 재생해 현대화한 것이다. 현재 비축되어 있는 장비의 숫자를 고려하면 러시아는 2024년 동안에는 생산량을 유지할 수 있을 듯하다. 하지만 2025년이 되면 상태가 더 좋지 않은 장비까지 재생해야 할 것이며 2026년 즈음이 되면 비축된 장비를 거의 소모할 것이다. 재생 차량이 줄어들면서 신규 장비를 생산할 수 있는 여유 설비는 생기겠지만 러시아군에 공급할 수 있는 장비의 숫자는 심각하게 줄어들 수 밖에 없다.

 미사일과 같은 러시아군의 복잡한 무기체계는 또 다른 약점이 있다. 이런 무기들은 서방에서 생산한 부품에 의존한다. 러시아는 일관성이 없고 느슨한 서방의 제재를 파고들어 필수적인 부품들을 지속적으로 획득할 수 있었지만 러시아 군수 산업을 겨냥한 일관성 있는 제재는 공급망을 무너트릴 수 있다. 현재의 결함 투성이 제재만으로도 러시아 군수 산업이 치르는 부품 비용은 30%나 증가했다. 그리고 러시아 군수산업은 대체할 부품을 획득하기 위해 투자를 했음에도 부품 공급을 늘리지 못하고 현재 수준을 유지하는데 급급하다.

 하지만 러시아의 가장 심각한 한계는 탄약 생산인 듯 하다. 러시아 국방부는 2025년에 더 많은 영토를 점령하려는 열망을 현실화 하기 위해 2024년에 400만발의 152mm 포탄과 160만발의 122mm 포탄을 러시아에서 생산하거나 다른 곳에서 획득해야 한다고 평가했다. 러시아의 군수산업계는 2023년에 100만발이었던 152mm 포탄 생산량을 2024년에는 130만발 까지 늘릴 수 있으나 122mm 포탄 생산량은 800,000발에 불과할 것이라고 러시아 국방부에 보고했다. 뿐만아니라 러시아 국방부는 5년 이상의 리드타임을 고려해 새로운 공장을 건설하고 원자재 조달에 추가 투자를 하지 않는 이상 향 생산량이 크게 늘어날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는 단기적으로 러시아가 지금 남아있는 대부분 상태가 좋지않은 300만발의 비축 탄약을 끌어 써야만 러시아군의 적절한 보급을 받을 수 있다는 뜻이다. 러시아는 탄약 부족을 보충하기 위해 벨라루스, 이란, 북한, 시리아 등과 공급 및 생산 계약을 체결했다. 시리아는 완제품 상태의 포탄이 아니라 포탄 껍질만 공급할 수 있을 듯 하다. 북한에서 조달한 약 200만발의 122mm 포탄이 2024년도에는 러시아에게 도움을 줄 수 있겠지만, 2025년에 예상되는 152mm 포탄의 심각한 부족을 벌충할 수는 없다. 러시아의 전체적인 포병 탄약 생산량은 위에서 언급하지 않았던 다연장 포탄을 포함해 연간 300만발 정도에서 정체될 듯 하다.


 결 론

 우크라이나를 지원하는 국가들이 우크라이나군에 충분한 지원을 하지 못한다면 러시아의 승리 공식은 타당성이 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의 협력국들이 우크라이나군에 충분한 탄약과 훈련 지원을 계속해 준다면 2024년에 있을 러시아의 공격을 둔화시킬 수 있을것이며 이렇게 되면 러시아는 2025년에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할 것이다. 러시아가 공세에 필요한 군대의 질적 향상을 이룩하지 못해 2025년에 성과를 거두기 어렵다는 전망을 한다면 2026년에 우크라이나의 항복을 받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할 것이다. 2026년 이후에는 소모로 인해 러시아군의 전투력이 물질적인 면에서 악화되고 러시아의 산업도 충분히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다. 러시아의 전망은 시간이 흐를수록 나빠질 것이다. 러시아의 산업에 타격을 주려면 우크라이나를 지원하는 국가들이 러시아의 군수산업 동원 역량을 목표로 하는 조치들을 시행하는데 역량을 발휘해야 한다. 지금까지의 성과를 감안하더라도 이는 충분한 잠재력이 있다.

 2025년까지 우크라이나가 저항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목표를 달성하려면 러시아의 승리 공식이 통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또 러시아군의 규모가 지속적으로 늘어난다 해도 우크라이나군이 러시아군을 질적으로 압도할 수 있도록 충분한 동원 체계를 구축할 시간과 훈련 체계를 제공해야 한다. 러시아의 입지를 꾸준히 위협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서 러시아가 협상을 모색하고, 우크라이나에 유리한 종전 조건을 협상할 수 있도록 하는건 중요하다. 러시아가 추구하는 전쟁의 방향에 따라갈 때가 아니다.


2022년 9월 2일 금요일

러시아군의 전차 현황과 T-62 운용 문제에 관한 글 두 편

지난 5월 말~6월 초 부터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군과 러시아의 괴뢰군이 T-62 전차를 사용하는 사례가 계속 목격되고 있습니다. 러시아가 서류상으로는 대량의 T-72와 T-80계열 전차를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처음 T-62 투입에 관한 소식이 나왔을 때 많은 사람이 놀랐습니다. 이제 러시아군이 T-62를 사용하는 모습이 매우 많이 목격됐기 때문에 T-62가 21세기 '강대국'의 전쟁에 끌려 나온 이유에 대해 몇가지 설이 나오고 있습니다.

지난 8월 초 Wavell Room 웹사이트에 실린 군사전문가 콜린 로빈슨(Colin Robinson)의 관련 글(T-62s for Russian reserve units in Ukraine)과 9월 1일 영자지 키이우 인디펜던트에 실린 우크라이나 기자 일리야 포노마렌코의 기사가 흥미있어서 번역을 해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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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의 러시아군 예비 부대의 T-62전차

콜린 로빈슨 

러시아군은 우크라이나에서 매우 많은 전차를 상실했다. 875대 가량으로 추정된다. 전차 손실에 대응하기 위한 방안 중 일부는 구식 T-62 전차를 다시 사용하기 위해 현역에 복귀시킨 일이다. 그 원인은 T-62 보다 신형인 전차들을 적절하게 유지하지 못한데 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1단계는 확실하게 끝났다. 키이우를 포위 점령하려던 양익 공세와 하르키우를 노린 공세는 모두 저지되고 격퇴되었다. 이제 전쟁은 장기간의 대치 국면으로 넘어갔다. 아마 전쟁이 몇년은 더 갈지도 모른다. 러시아의 힘은 우크라이나의 의지와 서방의 무기 지원에 부딛혔다.

전쟁의 중요한 원칙 중 하나는 사기를 유지하는 것이다. 2013년 봉기 이전과 직후 우크라이나의 민족주의가 고양되면서 우크라이나는 독립된 국가로 나가고 있다. 우크라이나는 인적 자원에서 우세하다. 독립 분석가들은 젤렌스키가 5월 21일까지 700,000명의 병력을 동원했다고 발표한 내용이 상당히 믿을 만하다고 본다. "가능성이 아주 높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베로도네츠크를 상실한게 우크라이나에게는 큰 패배가 아니다. 전투의 중점은 러시아군을 소모시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국토를 수복하는것은 뒤로 밀릴 수 있다.

러시아의 손실은 매우 높다. 현대 전장의 핵심적인 무기 체계는 주력전차다. 주력전차는 보통 120mm나 125mm 주포를 탑재했다. 1916년 9월 플레르-쿠르슬레트(Flers–Courcelette) 전투에 최초로 전차가 투입된 이래로 전차의 장갑을 뚫고 격파하려는 자와 전차의 방어력을 높이는 전차 설계자들의 경쟁이 계속됐다. 우크라이나에서 수많은 러시아 전차가 격파됐다. 몇몇 사람들은 전차가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한다. 이런 주장은 틀렸다. 현대의 제병협동전투는 포병의 지원을 받는 하차 보병과 장갑차량을 적절히 혼성해 이루어진다. 각 병과의 적절한 비율은 언제나 논쟁거리다. 하지만 하차 보병을 지원하기 위해 기갑차량을 사용하는 개념이 위험하다거나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볼 수는 없다.

IISS가 간행한 2022년도판 밀리터리 밸런스에서는 우크라이나 침공 직전 러시아군의 주력전차 숫자를 2,930대로 추정했다. 공개자료를 분석하는 연구자들이나 정보기관들이 현재 진행중인 모든 것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는 없다. 인간의 피로, 스트레스, 흥분으로 인한 전장의 안개가 정확한 분석의 장애물이다. 하지만 SNS 덕분에 과거의 다른 고강도 분쟁들 보다도 전투의 진행 상황을 분단위로 파악할 수 있게 된 점은 사실이다. 1973년 골란고원에서 이스라엘 제7전차여단과 제188전차여단이 시리아군의 침공에 맞서 싸웠을 때는 벽걸이형 유선전화기를 쓰던 시절이었다. 지금은 스마트폰을 가진 사람이라면 즉시 인터넷을 통해 사진을 전송하거나 업로드 할 수 있다.

러시아군의 전차 손실을 파악하는데 있어 SNS의 존재는 많은 노력을 기울이면 매우 유용한 추정치를 얻을 수 있게 한다. 오릭스(Oryx) 웹사이트는 러시아군 전차 손실 분석을 아주 잘 해 놓았다. 이 웹사이트에 따르면 2022년 6월 21일까지 실제로 파악된 러시아군 주력전차 손실은 789대다. 이 중 447대가 파괴됐으며 22대는 손상, 49대는 러시아군이 버리고 달아났으며 252대는 우크라이나군이 노획했다. 물론 오릭스 웹사이트에 올라온 내용이 전부가 아니다. 전장의 상황은 분 단위로 바뀌고 있다. 하지만 트위터의 군사관련 계정들은 다른 데이터와 비교했을 때 오릭스에서 추정한 통계가 실제 손실의 대략 70~80% 수준이라고 본다. 즉 실제 손실은 오릭스에서 추정한 것 보다는 약간, 아마도 20% 정도 높을 듯 하다. 보다 신뢰할 만한 추정치는 6월 16일 미국 합참의장 마크 밀리(Mark A. Milley) 대장이 발표한 것이다. 이에 따르면 러시아는 기갑 전력의 20~30% 가량을 상실했다. 밀리 대장은 이를 '심각한' 피해라고 했다.

침공 당시 러시아군이 보유한 전차는 대략 3,000대 정도였다. 오릭스에서 추정한 파괴된 전차의 숫자 447대는 450대로 반올림 한다.(다른 통계들도 모두 반올림해서 대략적으로 집계한다.) 그리고 이 추정치가 실제 손실의 75% 정도라고 보면 파괴된 전차는 600대다. 같은 방식으로 손상을 입은 전차는 30대, 버려진 전차는 75대, 노획당한 전차는 336대로 추산한다. 약간 보수적으로 접근해서 러시아군이 손상을 입은 전차를 모두 회수해서 수리했다고 가정하면 러시아군의 전차 손실은 약 1,011대다.(반올림해서 1,000대로 친다) 이 숫자는 정확하게 러시아군이 보유한 전차의 30%이고 밀리 대장이 추산한 최대 추정치와 일치한다. 여기서 다시 보수적으로 접근해서 러시아군의 전차 손실을 총 보유량의 27.5%로 추정할 수 도있다. 아니면 20%와 30%의 중간인 25%로 추산할 수도 있다. 여기서 오릭스의 추정치가 실제 손실의 70~80%에 불과하다는 점을 고려해 보자. 러시아군의 27.5%의 전차를 상실했다면 러시아군의 전차 손실은 875대로 추산된다.

보다 객관적인 자료 출처도 있다. 우크라이나군에서 6월 27일까지 1,552대의 러시아 전차를 격파했다고 발표한 것을 언급할 필요가 있다. 전쟁시에 군인들이 적 장비를 성공적으로 파괴했다고 주장할 때는 '전장의 안개'의 영향으로 종종 과장되기도 한다. 1940년 9월 15일 '배틀 오브 브리튼 데이'때 영국공군은 175~185대의 독일 공군기를 격추했다고 주장했다. 전쟁이 끝난 뒤 자료를 보니 독일 공군의 실제 손실은 영국 공군이 추정한 수치의 3분의 1 밖에 되지 않았다. 우크라이나 지도부에게 유리한 선전을 해서 사기를 유지하는 일은 중요하다. 가능한 정확하게 파악하려면 오릭스나 이와 같은 독립적인 분석가들에 의존하는게 좋다.

그렇다면 러시아군은 전쟁 이전 보유했던 가동가능한 전차의 3분의 1을 상실하는 심각한 피해에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가? 5월 24일 우크라이나군 총참모부는 러시아 육군이 예비대대전투단에 치장 물자로 있던 구식 T-62 전차를 배치했다고 발표했다. T-62는 너무나도 시대에 뒤떨어진 장비다. T-62는 보다 신형인 T-72나 T-80과 달리 훨씬 구경이 작은 115mm 주포를 장착하고 있으며, 방어력도 뒤떨어지고 사격관제체계와 무전기도 낙후되었으며, 야간 전투 능력은 전무하다시피 하며 속도도 느리고 주포 발사속도도 떨어진다. 그리고 다른 신형 전차와 비교했을 때 더 불리한 점이 있는데, 바로 탄약 배치다. 1986년에 간행된 제인스의  Main Battle Tank에 따르면  T-62는 115mm 포탄 40발을 싣고 다니는 데 이 중 16발이 차체 전면의 조종수 좌석 옆에 실린다. 적의 포탄이 장갑을 관통해 승무원실 까지 뚫고 들어와 탄약고에 맞는다면 승무원들은 몰살이다. 미국의 M1 에이브럼스 같은 신형 전차들은 탄약을 블로우 오프 패널이 달려 있는 승무원들과 분리된 공간에 탑재한다. 그리고 T-62는 보다 신형인 T-72나 T-80과는 완전히 다른 전차다. 즉 T-62는 부품이 달라서 군수 체계에 추가적인 부담을 준다. 6월 19일 목격된 열차에 실려 이동하던 T-62들은 1980년대 초반에 업그레이드된 형식이었다.

IISS에서는 치장 물자로 있는 러시아군 전차의 숫자가 10,200대라고 추정하고 있다. 하지만 필자가 2000~2001년 사이에 IISS에서 근무했을 때와 아프리카 국가 군대들을 분석하는 팀에 새로운 정보를 보냈던 때의 경험을 돌아보면 IISS의 정보도 자주 업데이트 되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IISS는 전 세계의 모든 군사 문제를 훌륭하게 추적하고 있지만 자료가 들어와야만 분석을 잘 할 수 있다. 러시아군이 비축하고 있는 전차 숫자를 마지막으로 확인한 것은 2018년이었다. 2017년 이전에는 러시아군의 17,500대의 전차를 비축하고 있다고 평가했었다.

그렇다면 러시아군이 여러가지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T-62를 다시 현역에 복귀시킨 이유는 무엇인가? T-62 보다 훨씬 신형인 전차들도 치장물자로 있다. IISS는 T-72 7,000대, T-80 3,000대, T-90 200대가 치장물자라고 추정한다. 하지만 예방 차원의 적절한 정비를 하지 않아 충분히 현역으로 사용할 수 없다. 정치학적 개념으로 보면 러시아는 취약국가이다. 그리고 부정부패가 러시아 군대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다. 비축 상태로 있는 러시아 군용차량들이 부정부패가 만연해 만성적으로 정비가 되어있지 않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이것은 냉전이 끝난 뒤 지속적으로 업그레이드를 받고 (정비를 받은) 차량은 T-62 뿐이라는 이야기다. 우크라이나군 총참모부에 따르면 이때문에 T-62를 최소한 예비부대에는 다시 배치한 것이다. 현역으로 재배치 할 수 있는 비축 상태의 T-62가 정확히 몇 대인지는 알기 어렵다. 2017년의 IISS의 마지막 추산에 따르면 2,500대 정도였다. 그런데 갑자기 전쟁이 발발하면서 더 많은 자료를 확보할 수 있었다. 상대적으로 신뢰할 만한 위성사진 분석에 따르면 러시아에 비축 상태로 있는 전차는 10,000대가 아니라 기껏해야 6,000대고 그 중 다시 사용할 수 있는 차량은 3,000대 정도다. 그러니 2,500대의 절반 정도로 추산하는게 현명한 듯 하다. 그러면 대략 1,250대의 T-62를 동원할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T-62는 어디에 투입할 것인가? 우크라이나군 총참모부는 예비대대전술단이 T-62를 사용한다고 본다. 대부분의 러시아 육군 여단은 우크라이나에 1~2개 대대전술단을 파견했다. 그리고 잔여 병력과 일선에 투입할 수 없는 병력은 주둔지에 남겨두고 있다. 물론 지금 남아있는 여단에서 세번째 대대전술단을 편성해서 보낼 수 도 있다. 그럴 가능성은 낮아보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보다 가능성이 높은 건 현역으로 복귀시킨 T-62를 후방지역 부대나 도네츠크 공화국, 루한스크 인민공화국 같은 괴뢰국 군대에 배치하는 것이다. 러시아의 괴뢰군으로는 러시아 제8근위군의 지휘를 받는 돈바스 제1군단과 제2군단이 있다. 그러나 T-62가 배치된 게 처음 확인된 부대는 다른 괴뢰군인 남오세티야 알라니아 자원병대대였다. 이 부대의 상태는 나빠보이지만 그래도 T-62를 배치했다. 그리고 6월 초 러시아가 드니프로강변의 도시인 바실리우카에 30대의 T-62를 배치했다는 정보가 있었다. 바실리우카는 러시아와 크름 반도를 잇는 보급로상에 있다. 폴란드의 Rochan 컨설팅이 전쟁 전반에 관한 정보들과 함께 이 첩보를 선명한 화질의 영상으로 제공했다. 이 영상은 한번 볼 필요가 있다.

하지만 구식 T-62를 어디에 배치하느냐는 문제는 러시아가 이런 구식 전차를 전선에 보내고 있다는 사실에 비하면 중요한 일이 아니다. 러시아군의 1선 전투 장비들은 다수가 파괴됐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차이점은 바로 여기있다. 우크라이나는 서방으로 부터 대량의 신형 장비를 받고 있다. 하지만 러시아는 이런 지원을 받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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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군이 진짜 보유하고 있는 전차는 몇 대인가?

일리야 포노마렌코

러시아군이 진짜 보유하고 있는 전차는 몇 대인가?

러시아의 전면적인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이제 제2차세계대전 이후 유럽에서 가장 많은 전차가 파괴되었다. 크렘린의 무모하고 실패한 키이우 전격전으로 러시아군은 1,000대의 전차를 잃었다. 2월 24일 이후 겨우 몇주 만에 말이다. 4월이 되자 우크라이나 북부의 전장은 전차의 묘지가 됐다. 우크라이나군의 전차 사냥꾼조는 수많은 전차를 산산조각냈다. 러시아군의 규모가 크다 해도 이렇게 많은 전차를 잃어버린 것은 러시아의 공격력에 큰 타격이다. 러시아의 프로파간다와는 달리 악명 높은, 소련 시기에 대량으로 비축된 전차들은 전투에 사용하기 곤란한 고철 더미에 불과하다. 

하지만 러시아가 당장 전차 부족에 시달릴 걸로 보이지는 않는다. 러시아는 심각한 손실을 입었음에도 전쟁을 몇년간 수행할 수 있는 전차를 보유하고 있다. 우크라이나는 이때문에 자원이 풍부한 러시아가 감당할 수 있는 수년간 이어질 장기전을 피하기 위해 모든 것을 다 해야 한다.


대실패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전차의 시대가 끝났다는 관측이 성급함을 보여준다. 주력전차는 앞으로도 하던 임무를 수행할 것이다. 보병을 지원하고, 선봉에서 돌파를 이끌고, 돌파한 뒤 전차를 뒤따르는 기계화보병과 함께 성과를 확대하는 임무다. 우크라이나군은 필요하기 때문에 전투에서 전차의 역할을 확대했다. 포병이 부족해서 우크라이나 전차병들은 탱크에서 직접 관측할 수 없는 목표에 대해 곡사포 처럼 간접사격을 수행하고 있다. 

한편 러시아군은 전차를 집중적인 화력지원 임무에 투입하고 있다. 시가전 상황에서도 그렇게 운용한다. 하지만 영국이 지원한 전설적인 NLAW 같은 저렴한 보병용 대전차화기가 많아 우크라이나군이 러시아군 대열을 매복공격 하게 되면서 전차의 결정적인 역할에 도전하게 되었다. 미국 합참의장 마크 밀리 대장은 6월 중순에 국제사회가 우크라이나에 여러 종류의 대전차 무기 97,000개를 지원했다고 발표했다. 밀리 대장은 이 숫자가 "전 세계에 있는 전차를 전부 합친 것 보다 더 많은 대전차무기"라고 말했다.

서방이 우크라이나군의 대전차 능력을 향상시킨 결과 우크라이나를 신속히 붕괴시키려던 러시아의 계획은 철저히 실패했다. 밀리터리 밸런스 2021년판에 따르면 지난 2월 전면전을 개시할 당시 러시아는 3,330대의 운용 가능한 전차를 보유하고 있었다.(육군에 2,840대, 해군보병대에 330대, 공수군에 160대) 이 자료는 러시아군이 보유하고 있던 모든 전차를 포함한 것이다. 여기에는 T-72, T-80, T-90과 그 파생형이 포함되어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발생한 장비 손실을 집계하는 온라인 조사 프로젝트인 오릭스에 따르면 러시아군은 9월 1일까지 최소 994대의 전차를 잃었다. 하지만 러시아의 독립적인 온라인 분쟁관측조직인 Conflict Intelligence Team은 오릭스의 데이터베이스는 전투에서 발생한 양측 손실의 70% 정도를 집계하고 있다고 본다. 노획되거나 격파된 차량들이 모두 기록되거나 촬영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Conflict Intelligence Team은 러시아군이 거의 1,300대의 전차를 상실했다고 추산하고 있다. 즉 운용가능한 전차의 40%라는 엄청난 숫자를 상실한 것이다. 이 추정치는 지난 5월 CNN이 보도한 내용과도 일치한다. CNN은 익명의 미국방부 고위당국자의 말을 인용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거의 1,000대의 전차"를 상실했다고 보도했다. 우크라이나 군당국의 공식 통계는 이보다 더 크다. 러시아가 전면전을 도발한 지 6개월이 지난 9월 1일까지 우크라이나군은 1,997대의 러시아군 전차를 격파했다고 주장했다. 이 수치는 러시아군의 운용가능한 전차의 총 60%에 달한다.

반면 오릭스는 우크라이나군이 244대의 전차를 잃었다고 추정하고 있다. 이중 125대는 전투에서 격파됐고 나머자는 버려졌거나 러시아군에 노획됐다. 여기에 Conflict Intelligence Team의 70% 법칙을 대입하면 우크라이나군은 2월 24일 이전에 보유하고 있던 800대의 전차 중 300대 이상을 상실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군은 최근 해외에서 전차를 도입했다. 폴란드가 원조한 차량과 러시아군으로 부터 노획한 차량 등이다.


고철 더미에서 부활하다

오릭스의 대략적인 추산만으로도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에서 숫적으로 심각한 손실을 입었음을 알 수 있다. 러시아군은 최소한 구식 T-72B 전차 220대와 2010년대에 개량된 주력전차인 T-72B3/M 270대를 잃었다. 그리고 35대의 T-80BVM과 20대의 T-90A, T-90M형 전차를 잃었다. 이것들은 우크라이나 전문가들이 러시아군 전차 중 가장 현대적이고 우수하다고 평가하는 차량이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서 상실했다고 추정되는 1,300대의 전차는 대략 14개의 완전편제된 전차여단, 또는 42개의 대대전투단에 해당한다. 그리고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가 보유한 전차를 전부 합친 것 보다도 많은 숫자다.

하지만 러시아는 여전히 2,000대 가량의 전투 투입이 가능한 전차를 보유하고 있고, 또 비축되어 있는 전차도 많다. 밀리터리 밸런스 2021년판에 따르면 러시아는 10,200대의 전차를 비축하고 있다. 여기에는 수많은 T-72, 3,000대의 T-80, 200대의 T-90이 포함돼 있다. 그리고 밀리터리 밸런스 2016년판에는 러시아가 냉전의 유물인 2,800대의 T-55(1950년대에 최초로 방사능 방호 체계를 갖춘 전차), 2,500대의 T-62, 2000대의 T-64를 보유하고 있다고 되어 있다. 즉 러시아는 1950년대 부터 지금까지 생산된 전차 17,300대를 보유하고 있다.

서류상으로는 그렇다. 하지만 실제로는 비축된 전차 중 다시 꺼내서 전투에 투입할 수 있는 차량이 몇대나 되는지 알고 있는 사람이 없다. 러시아인들도 잘 모를 것이다. 이를 파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러시아군 주둔지에 있는 차량을 세는 것이다.

우크라이나의 군사 소식 웹사이트인 Ukrainian Military Center에서 주로 러시아의 우랄산맥 동쪽에 위치한 러시아군 비축 시설 19곳의 구글맵스 위성사진을 분석한 결과 비축된 차량 중 2,299대는 다시 사용할 수 없는 상태다. 수십년간 야지에 방치되어 있다 보니 그냥 폐기하는 것 말고는 답이 없는 녹슨 고철이 돼 버린 것이다. 그리고 1,304대의 전차도 의심스러운 상태다. 8월 22일 이 웹사이트에 올라온 글을 보면 "이 전차들은 전차 정비시설에서 복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러려면 먼저 열차에 실어서 전차 생산 공장으로 가져가 하역한 뒤, 정비소로 가져가서 어떤 결함이 있는지 검사를 해야 한다. 다음에는 필요한 부품을 찾아야 하는데 몇몇 부품은 단종된 상태거나 신규 생산을 해야 한다. 이 과정은 시간이 많이 걸린다." 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그리고 2,075대는 수리를 할 수 있어 보인다. 비록 이중 일부는 공장까지 가져가야 할 걸로 보이지만 말이다. 나머지 886대는 제대로 보관이 되어 있고 완전한 운용이 가능해 보인다. 몇몇 러시아군 기지에는 지붕이 있는 차고가 있다. 차고에 보관된 전차는 1,330대 정도로 보이는데 이 차량들의 상태와 숫자는 알 수 없다. 

수리한 구식 T-62와 T-62M은 이미 우크라이나 전선에서 목격되었다. Ukrainian Military Center에서는 이 T-62들이 치장물자로 있는 T-72나 T-80보다 상태가 더 좋다고 지적하고 있다. 아마 이때문에 러시아군이 T-62를 일선에 복귀시켜 우크라이나로 보내기로 결정했을 것이다.

러시아에 비축되어 있는 전차들은 열악한 환경에서 부품을 약탈당하고 분해되었다. 전차 한 대를 정비하기 위해 다른 전차에서 부품을 떼 오는 것이다.(우크라이나도 마찬가지이긴 하다.) 특히 T-72 전차가 그렇다. 이 전차 중 다수는 상태가 엉망이다. 현재 진행중인 서방의 첨단 부품 금수조치로 인해 러시아는 보유한 무기를 수리하거나 현대화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러니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서 대규모 전쟁을 계속한다면 T-72 초기형이나 T-80 초기형 같은 구식 전차들이 더 많이 나오는걸 보게 될지도 모른다.

즉 러시아는 최소한 2,000대의 복구 가능한 전차를 보유하고 있다. 우크라이나에서 전쟁을 하는 동안 전차를 모두 소모하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1960년대 초에 만들어진 고물들을 끌어내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다. 그런데 러시아가 다른 곳에서 전차를 확보할 수 도 있다. 벨라루스의 독재자 알렉산드르 루카센코 정권은 현대화된 T-72 500여대 이상을 보유하고 있다.


2019년 2월 9일 토요일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32-1호에 실린 논문 몇 편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32-1호를 훑어보았습니다. 이번호는 흥미로운 제2차대전 논문이 3편이나 실려있어 매우 즐겁습니다!

가장 눈에 띄는 글은 데이비드 서튼(David Sutton)의 "1941 and the National-Patriotic Revival in Russia"입니다. 이 글은 제목 그대로 푸틴 치하에서 강화되고 있는 국수주의적 환경이 제2차세계대전사, 특히 1941년 전역에 대한 서술에 끼치는 영향을 다루고 있습니다. 필자는 고르바초프-옐친 이래 기세가 꺾여 있던 러시아의 우익-국수주의적 역사관이 푸틴 치하에서 부활했으며 본질적으로는 소련 시기의 역사관과 동일한 맥락이라고 지적합니다. 이런 국수주의적 논자들은 고르바초프-옐친 시기에 활발하게 일어난 '수정주의적' 역사관을 배격하고 영웅적인 과거사를 구축하고자 합니다. 대표적인 저작은 2011년에 간행된 12권짜리 '대조국전쟁사'입니다. 대조국전쟁사의 간행 책임자였던 졸로타레프는 '수정주의적' 역사가들은 러시아의 국제적인 입지를 약화시키려는 의도를 가졌다고 주장한 인물입니다. 그는 '판필로프 사단의 28용사' 등 소련 시절의 날조된 프로파간다에 대한 공격을 되려 '수정주의자'들의 날조라고 주장합니다. 특히 주목할 만한 점은 소련 공산당 지도부에 대한 비판도 거부한다는 점 입니다. 서튼의 글은 이렇게 퇴행적인 푸틴 집권기의 역사서술을 잘 정리하고 있습니다. 꽤 재미있는 글이라 번역을 해보고 싶군요.

다음으로는 니콜라이 로스토프, 이고르 예레민, 세르게이 쿠즈네초프의 공동연구인 "The Particularities of Military Mobilization Campaigns in Siberia in the Summers of 1914 and 1941"가 있습니다. 이 논문은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 초반 시베리아 지역의 전쟁 동원에 관한 글 입니다. 1941년의 경우 공산당이 제1차 세계대전의 경험을 바르게 적용하지 못해 한계가 있었다고 지적합니다. 특히 인력 및 마필 동원과 달리 차량 및 트랙터 등의 장비 동원에 문제가 많았다고 평가합니다.

마지막으로는 쿠르스크 전투를 주로 연구하는 발레리 자물린의 "Soviet Troop Losses in the Battle of Prokhorovka, 10~16 July 1943"이 있습니다. 제목 그대로 프로호로브카 전투에서 소련군이 입은 인명 및 장비 손실을 정리한 글 입니다. 흥미롭기는 합니다만 그의 기존 연구와 비교했을때 특별히 주목할 만한 내용은 없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논문은 아니지만 흥미로운 글도 있습니다. 리브 파르네모(Liv Karin Parnemo)의 "Russia's Naval Development - Grand Ambitions and Tactical Pragmatism"는 최근 러시아의 해군력 건설은 러시아의 경제적 역량을 고려해 연근해 작전에 초점을 두고 있다고 평가합니다. 아직까지는 소련 시절에 건설한 대형 함정과 잠수함 전력으로 제한적인 원양 작전을 전개하고 있으나 신규 함정 건조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해 역량이 지속적으로 악화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2012년 5월 17일 목요일

국민동원에 특별히 유리한 정치사상은 존재하는 것일까?

지난번에 짤막한 소개글을 썼던 『패튼과 롬멜』은 패튼과 롬멜을 각각 미군과 독일군의 상징으로 하여 두 나라의 군대를 비교하는 방식으로 쓰여졌습니다. 이 책에서 저자인 쇼월터는 미국의 장점으로 병사들의 자발성, 혹은 헌신성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2차대전 기간 중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언도받고 처형된 병사의 숫자를 비교하는 부분에서 잘 드러납니다. 쇼월터는 2차대전 중 군법에 의해 처형된 탈영병은 한명인 반면 독일군은 5만명에 달하는 병사를 처형했다고 지적합니다.1) 이러한 지적은 미국의 체제, 특히 정치문화가 독일의 파시즘에 비해 우월했다는 해석으로 읽히기도 합니다. 쇼월터 또한 2차대전의 승리를 미국 자유주의의 우월성으로 받아들였던 지적풍조의 연장선상에 있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 입니다.

그런데 과연 그렇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인지는 약간 회의적입니다. 일단 쇼월터는 1941년 12월 부터 1946년 3월까지 사형이 집행된 미군 병사가 146명에 달한다는 점을 언급하지 않고 단지 탈영으로 처형된 병사 한명만을 언급함으로써 매우 극단적인 대비를 보여주려고 합니다. 게다가 독일군의 병사 처형에 대해서는 가장 높은 추정치인 5만명을 적용하고 있습니다. 전쟁 중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집행받고 처형된 독일군인의 숫자에 대해서는 연구자별로 큰 차이가 나는데 데이빗 키터만David Kitterman은 1만명에서 1만2천명 사이로 추산하고 있으며 관련 연구로서 많이 인용되는 메서슈미트Manfred Messerschmidt의 연구는 2만명 가량으로 추산합니다.2) 146명대 1만명으로 하더라도 독일군이 매우 많은 병사를 처형한 것은 틀림없습니다만 쇼월터의 서술방식은 약간 문제가 있다고 보여지는군요.

이데올로기적인 경직성이 2차대전 당시 독일군이 군법을 가혹하게 적용하게 한 원인이 되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다른 사례들을 보면 조금 다른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1차대전을 예로 들면 독일군은 전쟁 기간 동안 150명에 사형을 선고하고 48명에 사형을 집행한 반면 프랑스의 경우는 2천여명에 사형을 선고하고 700여명에 사형을 집행했습니다. 미국과 비슷한 자유주의적 정치문화를 가진 영국군은 3,080명에 사형을 선고하고 346명을 실제로 처형했습니다.3)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정치문화를 가진 독일군에 비해 일곱배나 많은 병사를 처형한 것입니다. 정치문화도 중요한 요소이긴 합니다만 실제 전장의 환경이 어떠했는지도 중요한 요소입니다. 물론 절대적인 기준은 아닙니다만 병사에 대한 강압적인 처벌은 해당 군대가 그만큼 병사들을 통제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지표입니다. 그리고 국민동원이 얼마나 효율적으로 이루어졌는가를 보여주는 지표가 될 수도 있습니다. ‘국민 동원’의 신화에서 중요한 것이 바로 자발성이니 말입니다. 1차대전 당시 참혹한 서부전선에서 공화정 체제인 프랑스와 자유주의적인 정치문화를 가진 영국이 병사들에 대한 통제에 독일군 보다 더 어려움을 겪었음을 보여주는 징후가 나타나는 것은 꽤 흥미롭습니다.

물론 미국이 독일에 비해 훨씬 적은 병사를 처형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이것을 단순히 정치문화만 가지고 비교하기는 어려울 것 입니다. 독일군이 군법회의에서 사형집행을 크게 늘린 것은 1944년 하반기 이후부터였고 이것은 나치 체제의 이데올로기적 경직성 외에도 다른 요소들의 영향도 작용한 것으로 볼수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이 독일과 동일한 조건에서 전쟁을 수행한 것이 아닌 이상 쇼월터와 같은 방식의 서술은 약간 위험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같은 경우는 군사사에 관심을 가졌던 초기에 “자발적인 참여에 의한 국민동원”에 대한 환상이 있어서 한국의 징병제가 추구해야 할 방향이 그런 쪽은 아닐까 하는 막연한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보고 들은 것이 조금 늘어나면서 처음에 가졌던 이상적인 생각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쇼월터의 글을 읽으니 동의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최근 몇년간은 우리에게 뭔가 새로운 동원방식이 필요한게 아닐까 생각하면서도 마땅한 대안이라 할 만한게 눈에 들어오지 않는게 고민입니다. 그런 점에서 쇼월터의 주장을 접하니 수긍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1) 데니스 쇼월터 지음/황규만 옮김, 『패튼과 롬멜 : 현대 기동전의 두 영웅』, (일조각, 2012), 280쪽
2) Norbert Hasse, “Wehrmachtangehörige vor dem Kriegsgericht”, Rolf-Dieter Müller&Hans-Erich Volkmann(hrsg.) Die Wehrmacht : Mythos und Realität, (Oldenbourg, 1999), pp.480~481
3) Stephen G. Fritz, Frontsoldaten : The German Soldier in World War II, (University Press of Kentucky, 1995), p.90

2012년 1월 18일 수요일

한국전쟁 이전 미육군의 기갑전력 증강계획

2차대전이 끝난 뒤 미군은 대규모의 동원해제에 들어갑니다. 국무부와 군부는 동원해제가 미국의 대외정책 수행에 악영향을 끼칠 것이라는데 의견이 일치했으며 특히 국무부장관 번즈James F. Byrnes는 강력한 군사력을 유지하는 것을 지지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전쟁 말기에 수립된 동원해제계획은 예정에 맞춰 시행되었습니다. 1946년 초가 되면 동원해제가 당초 예측했던 것 보다 더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고 있었습니다. 전쟁 말기에 수립한 계획에서는 동원해제를 실시하더라도 월간 50,000명의 신병을 보충해서 필요한 병력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었으나 실제로는 월간 37,000명 수준에 머무르고 있었습니다. 반면 동원해제는 계획대로 시행되어 병력은 급속히 줄어들고 있었습니다. 각 군은 전후처리와 소련이라는 새로운 위협에 대비해 동원해제를 최대한 늦춰보려 했으나 미국 국내의 경제적인 이유와 함께 신속한 귀국을 희망하는 병사들의 격렬한 요구에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당시 소련이 새로운 위협이란 것은 정치 지도층과 군부에서나 인식할 수 있었을 뿐 일선에서 연합군으로 싸운 병사들이 깨닫기는 어려운 것 이었으니 말입니다. 여론이 나빠지자 1946년 1월 8일 성명을 발표해 동원해제가 신속히 이루어 질 것을 천명하게 됩니다.1) 미 육군의 동원해제는 모든 징집병을 전역시킨 1947년 6월 30일 완료됩니다.2) 1945년에서 1947년 까지 미국 각 군의 병력이 감소한 추이는 아래와 같습니다.3)

표1. 미군의 병력변화(1945~1947)
1945. 6. 30
1946. 6. 30
1947. 6. 30
육 군
5,984,114
1,434,175
683,837
육군항공대
2,282,259
455,515
305,827
해 군
3,377,840
951,930
477,384
해병대
476,709
155,592
92,222
총 계
12,120,922
2,997,212
1,559,270


육군의 대대적 감축은 기갑부대에도 심각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2차대전 당시 미국의 기갑은 제도상 정식 병과도 아니어서 그 위치가 매우 애매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전쟁부는 2차대전 중 경험을 쌓은 기갑장교들이 원래 병과로 복귀해 그 경험을 잃어버리는 것을 우려하여 1947년 부로 기병병과로 전환하였고 기병병과는 1949년 기갑기병Armored Cavalry로 개칭됩니다. 결국 1950년 육군조직법Army Organization Act에 따라 기갑병과가 정식 병과로 격상되긴 합니다만 이러한 사례는 전후 미육군에서 기갑병과가 어떤 위치에 있었는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례입니다.
또한 동원해제에 따라 대부분의 기갑사단이 해체되어 1948년 중순에는 제2기갑사단만이 현역 사단으로 남게되었고 기존의 전차대대 중 상당수가 1946년 7월 1일자로 경비연대Constabulary Regiments에 배속된 경비기병중대Constabulary Squadrons으 로 개편되어 명맥만을 유지하는 수준이 되었습니다. 게다가 M-26, M-24와 같은 신형장비의 도입으로 기갑병과는 유지하는데 더 많은 비용이 소요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1944년에 M-4를 장비한 기갑사단을 편성하는데 3천만 달러가 소요되었는데 1950년에 M-26을 장비한 기갑사단을 편성하는 데는 2억 달러가 소요되는 실정이었습니다.4)

그렇지만 소련과의 갈등이 심화되면서 미국은 다시 재래식 전력을 강화하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기갑전력이 다시 강화되게 됩니다. 유일한 현역기갑사단인 제2기갑사단의 강화와 함께 제3기갑기병연대가 신규로 편성되었습니다. 또한 유럽에 주둔하고 있던 3개의 경비여단을 기갑기병연대로 개편했습니다.5) 전차대대의 숫자는 다시 회복세로 돌아서 1946년에 12개 대대까지 줄어들었던 것이 1950년에는 64개 대대까지 확대되었습니다.6)

하지만 예산 증액이 어려웠기 때문에 대대적인 병력 증강이나 신규장비 도입은 한국전쟁 이전까지 어려움을 겪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트루먼 대통령은 군부의 의견을 받아들여 1948회계연도에 총병력을 1,641,000명으로 증강하기 위해 96억4700만 달러의 국방예산안을 의회에 제출했지만 의회는 이를 기각하고 87억5100만 달러만을 승인했습니다. 결국 1948년 회계연도의 병력 증강은 당초 목표치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1948년 2월 18일 합동참모본부의 합동참모국장 그런터Alfred M. Gruenther장군은 트루먼 대통령에게 군병력 부족에 대해 보고했습니다. 이 보고에서 그런터 장군은 육군의 병력 부족이 심각한 상태이며 추세가 유지되면 1948년 말 까지 165,000명의 병력이 부족해 질 수 있다고 경고했습니다.7) 트루먼 대통령은 1949년 회계연도에 총병력을 1,734,000명으로 증강할 것을 결정하고 30억 달러의 추가예산을 신청하기로 결심합니다. 이 계획안은 육군을 대대적으로 증강하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었습니다.8) 국방부장관 포레스탈은 1948년 3월 25일에 이 추가예산안을 상하원에 제출했는데 이에 따르면 각 군의 증강 내역은 다음과 같았습니다.9)

표2. 미국방부가 1948년 3월 25일 상하원에 제출한 병력 증강계획
1948. 3. 1 병력
증강 이후 병력
증강 규모
육 군
542,000
782,000
240,000
해 군
397,000
460,000
63,000
해병대
81,000
92,000
11,000
공 군
364,500
400,000
35,500
총 계
1,384,500
1,734,000
349,500


그런데 잘 아시다 시피 육해공군은 예산 증액의 기회가 오자 당초 합동참모본부가 구상한 것 이상의 병력과 장비 증가를 요구합니다. 특히 공군이 이전부터 구상하고 있던 70개 비행단 계획과 해군의 주요 전투함 384척 계획은 끝내 나중에는 제독의 반란이라는 초유의 사태로 이어지게 되지요. 육군도 당초 국방부가 제시한 782,000명 보다 더 많은 837,000명의 병력과 12개 현역사단, 13개의 완편 주방위군사단, 25개의 예비사단을 요구합니다. 각 군의 요구를 모두 반영한 예산은 당초 계획안 보다 90억 달러 늘어난 것으로 이것은 트루먼 대통령이 승인한30억 달러를 세배 초과한 것 이었습니다. 이것을 모두 받아들이는 것은 어려운 일 이었고 결국 합참이 포레스탈 장관에게 35억달러로 약간 늘어난 예산안을 제시하여 간신히 균형을 맞출 수 있었습니다. 트루먼 대통령은 4월 21일 이 방안을 승인합니다. 그러나 재무부가 국방예산의 급격한 증가를 경고하면서 추가예산 신청은 31억5900만 달러로 결정됩니다. 이에 따라 트루먼 행정부가 1949년도 국방예산으로 신청한 금액은 129억6200만 달러가 됩니다. 그러나 상하원은 이보다 더 많은 국방예산을 배정해 최종적으로 승인된 1949년 회계연도 국방예산은 139억4100달러가 됩니다. 이 중 육군에 배정된 액수는 42억 1700만 달러였습니다.10)

새 예산안은 800대의 전차를 신규로 도입하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습니다.11) 새 예산안에 따라 1949년 6월에 전차생산 5개년 계획이 작성됩니다. 전차 생산 5개년 계획은 76mm포 탑재전차 T-41(M-41)과 90mm포 탑재전차 T-42, 그리고 120mm포 탑재전차 T-43(M-103) 등 세 종류의 신형전차를 생산하여 소련의 전차개발에 대응하고자 하는 계획이었습니다. 작성된 전차생산 5개년 계획은 다음과 같았습니다.12)(도표에는 6개년도로 되어 있는데 원문에서 5개년 계획으로 적고 있으므로 그에 따릅니다.)

표3-1. 전차생산 5개년 계획의 생산대수(1949년 6월 작성)
회계연도
T-41
T-42
T-43
총 계
1950
109
109
1951
200
200
1952
31
340
100
471
1953
240
240
480
1954
240
240
480
1955
240
240
480
총 계
340
1060
820
2,220


표3-2. 전차생산 5개년 계획의 소요비용(1949년 6월 작성, 단위 백만달러)
회계연도
T-41
T-42
T-43
총 계
1950
40.3
40.3
1951
45.0
7.5
12.1
64.6
1952
7.0
85.1
35.0
127.0
1953
48.0
84.0
132.0
1954
48.0
72.0
120.0
1955
48.0
72.0
120.0
총 계
92.3
236.6
275.1
604.0


1949 년도의 계획은 예산상의 제약으로 단지 전차 생산 기술을 유지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었습니다.(아무리 평시라지만 2차대전 직후의 미국이 1년에 전차를 고작 백대 단위로 만든다니!!!) 실제로 미 육군에서는 이 정도의 생산계획으로는 전시동원에 필요한 소요는 물론 현재 유지하고 있는 전력을 유지하는 것도 힘들다고 평가하고 있었습니다.13) 이 시기 미육군 기갑사단의 전차 대수는 373대였습니다.14) 1년에 중형전차를 240대 생산하는 것으로는 기갑사단 하나도 장비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는 것 입니다.

또한 미국의 대소작전 계획이 방어적인 성격에서 적극적인 반격에 초점을 맞추면서 육군, 특히 기갑전력의 중요성도 강조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1949년 12월 8일 승인된 작전계획 오프태클Offtackle은 반격작전에 미군 41개 사단을 투입하도록 하고 있었는데 프랑스를 해방한 이후의 전과확대 단계에서는 기계화부대와 공수부대의 역할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습니다.15) 새로운 전쟁계획과 NATO의 결성은 미육군에 보다 적극적인 역할을 부여하게 됩니다. 그리고 소련과의 전면전을 상정한 이상 기갑전력이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 이었습니다.

미국 합동참모본부는 1950년 회계연도 국방예산을 작성하면서 정책과 전쟁계획을 반영하여 1949년 회계연도 보다 병력 규모를 더 증강했습니다. 미국 합동참모본부는 1950년 회계연도 내로 육군의 경우 현역 12개사단, 주방위군 34개 사단, 예비군 25개 사단을, 해군은 현역함 993척과 예비함 1,657척, 해병대 2개 사단과 해병항공단 2개, 공군은 70개 항공단을 확보하는 것을 목표로 예산을 작성했습니다. 이 예산안에 따른 병력 규모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이 계획에 따른 예산은 3백억 달러에 달했습니다.16)

표4. 미국 합동참모본부의 1950년 회계연도 예산에 따른 병력규모
현 역
예비군 및 주방위군
육 군
947,000
1,137,000
해 군
519,196
1,555,000
해병대
104,075
165,838
공 군
502,000
140,500
총 계
2,072,271
2,998,338


3백억 달러는 1949년 회계연도에 의회가 승인한 국방예산의 두배를 훨씬 넘는 금액이었기 때문에 현실성이 없었습니다. 결국 포레스탈 장관의 지시에 따라 144억 달러로 제한되었고 최종적으로 트루먼 대통령이 승인한 액수는 3군에 133억9900만 달러, 총 142억4000만 달러였습니다. 이 예산안은 1949년 1월 10일 의회에 제출됩니다. 의회는 3군에 배정된 예산은 139억1200만 달러로 증액했으나 육군과 해군의 예산을 삭감하는 대신 공군만 8억 달러 가까이 증액해 버립니다. 육군 예산은 트루먼 대통령이 제출한 안에서 44억9800만 달러였으나 의회에 의해 승인된 액수는 44억2000만 달러였습니다.17)

1950 년에 이르면 미국 기갑부대는 부대의 숫자는 증가했지만 예산 부족으로 인해 신형 전차 도입의 지연과 기존 전차의 유지정비의 미비로 심각한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한국전쟁 직전 미육군이 보유한 전차를 보면 M-24의 경우 가동가능한 차량이 900대인 반면 가동불능 상태인 차량이 2,557대에 달했고 M4A3E8은 가동 가능한 차량이 1,826대, 가동불능의 차량이 1,376대에 달했습니다. 비교적 상태가 양호한 신형전차 M-46은 319대에 불과했고 여기에 M-26 800여대와 1950년 회계연도 예산으로 M-46으로 개량될 M-26이 1,215대 있었습니다.18) 1948년 이후 국방예산이 지속적으로 증가하고는 있었지만 여전히 2차대전 직후의 급격한 감축의 여파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던 것 입니다.

한편 미육군은 새로운 안보정책기조와 전쟁계획에 맞춰 전차생산계획을 재검토 합니다. 미육군 기갑위원회Army Armored Panel은 1950년 5월 31일 제출한 보고서에서 육군동원계획 I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연간 2,072대의 전차를 생산해야 하며 편제되어 있는 부대의 수요만을 고려하더라도 연간 1,680대를 생산해야 한다고 결론내렸습니다. 이에 따른 전차 생산계획은 다음과 같았습니다.19)

표5-1. 육군 기갑위원회가 작성한 전차생산계획(1950. 5. 31)
회계연도
T-41
T-42
T-43
총 계
1950
109
109
1951
200
200
1952
240
100
125
465
1953
240
960
240
1,440
1954
240
1,200
240
1,680
1955
240
1,200
240
1,680
1956
240
1,200
240
1,680
1957
240
1,200
240
1,680
1958
240
1,200
240
1,680
1959
240
1,200
240
1,680
총 계
2,229
8,260
1,805
12,294


표5-2. 육군 기갑위원회가 작성한 전차생산계획 소요예산(1950. 5. 31 단위 백만달러)
회계연도
T-41
T-42
T-43
총 계
1950
40.3
40.3
1951
45.0
7.5
12.1
64.6
1952
48.0
27.5
43.8
119.3
1953
42.0
187.2
84.0
313.2
1954
36.0
194.4
72.0
302.4
1955
36.0
194.4
72.0
302.4
1956
36.0
194.4
60.0
290.4
1957
36.0
194.4
60.0
290.4
1958
36.0
194.4
60.0
290.4
1959
36.0
194.4
60.0
290.4
총 계
391.3
1388.6
523.9
2303.8


이 보고서는 육군이 추진한 12개 현역 사단 기반의 육군에 포함될 기갑전력을 최소한 기갑사단 2개, (경)기갑기병연대 1개, 기갑기병집단 1개, 수륙양용전차대대 1개로 유지하고 보병과 공수사단에도 기갑전력을 편제할 것을 제안하고 있었습니다.20)

그러나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상황이 급변하게 됩니다. 신형 전차의 확보가 시급해 지자 1952년 부터 양산에 들어갈 T-42는 취소되고 M-46에 T-42의 포탑을 결합한 M-47이 급거 양산에 들어가게 됩니다. M-47은 1951년 6월 부터 1953년 11월 까지 총 8,576대가 생산됩니다.21)  이것은 1950년 미육군 기갑위원회가 제시한 전차생산 10개년 계획의 T-42 생산계획을 압도하는 것 이었습니다. 그리고 계속된 냉전기간의 재래식 전력 증강은 미육군 기갑전력의 양적 수준을 비약적으로 향상시키기 됩니다.



1) James F. Schnabel, History of the Joint Chiefs of Staff : The Joint Chiefs of Staff and National Policy 1945~1947, (USGPO, 1996), pp.101~102
2) James F. Schnabel, Ibid., p.104
3) James F. Schnabel, Ibid., p.109
4) James A. Sawicki, Tank Battalions of the U.S.Army, (Wyvern Publications, 1983), p.34
5) Philip L. Bolte, “Post-World War II and Korea : Paying for Unpreparedness”,  George F. Hofmann and Donn A. Starry(ed), Camp Colt to Desert Storm : The History of U.S. Armored Forces, (1999, University Press of Kentucky), p.218
6) James A. Sawicki, Ibid., p.34
7) Kenneth W. Condit, History of the Joint Chiefs of Staff : The Joint Chiefs of Staff and National Policy 1947~1949, (USGPO, 1996), pp.99~100
8) Kenneth W. Condit, Ibid., pp.101~102
9) Kenneth W. Condit, Ibid., p.102
10) Kenneth W. Condit, Ibid., pp.107~111
11) Philip L. Bolte, Ibid., p.220
12) “Preliminary Report of the Armored Panel”(1950. 5. 31), RG319, Records of the Office of the Assistant Chief of Staff for Intelligence, Top Secret Correspondence, 1914~62, Entry 4, 1950, Box 13, p.2
13) “Preliminary Report of the Armored Panel”(1950. 5. 31), p.2
14) James A. Sawicki, Ibid., p.34
15) Steven T. Ross, American War Plans 1945~1950, (Frank Cass, 1996), pp.118~119; Kenneth W. Condit, Ibid., pp.159~163
16) Kenneth W. Condit, Ibid., pp.123~124
17) Kenneth W. Condit, Ibid., pp.136~137
18) Philip L. Bolte, Ibid., p.224
19) “Preliminary Report of the Armored Panel”(1950. 5. 31), p.4
20) “Preliminary Report of the Armored Panel”(1950. 5. 31), p.7
21) R. P. Hunnicutt, Patton : A History of the American Main Battle Tank. Vol.1, (Presidio, 1984), pp.55~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