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월 31일 수요일

민족인가, 국가인가? - 이종욱

오늘 이종욱의 "민족인가, 국가인가? 신라 내물왕 이전 역사에 답이있다"를 샀습니다. 아직은 대략 훑어본 상태인데 이거 생각보다 흥미로운 물건이더군요. 신라사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기존의 역사학이 정통론 세우기에 집중했다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이런 이야기가 나올 것 이라고 생각했는데 발언 수위가 약간 센 편입니다. 앞으로 상당히 욕을 많이 먹을 것 같군요. 뭐, 다른 건 둘째 치고 민족주의가 국교가 된 대한민국에서 이런 책을 낸다는 건 좀 위험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한국 고대사쪽은 아는게 거의 없긴 하지만 근현대사 서적이 아니라 고대사 서적에서 이렇게 노골적으로 정치적 성향을 드러내는 사람은 별로 못 봤던 같습니다. 몇몇 구절에서는 지나치게 자신의 정치적 성향을 광고하고 있어서 찝찝하긴 하지만 들어볼 만 한 부분도 있습니다.

읽으면서 흥미 있었던 구절을 몇 개 발췌해 봅니다.

첫째, 그때나 지금이나 손진태가 말한 내용 가운데 국민이 곧 민족이라는 주장은 분명 잘못된 것이다. 남한과 북한이 분단되어 각기 서로 다른 국가가 들어선 상황에서 국민이 민족이라고 주장한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는 1945년 하나의 민족이 38도선을 경계로 남한과 북한으로 나뉘고, 1948년 남한과 북한에 각기 독립된 정부가 들어서며 한국인이 두 국가의 국민으로 나뉜 사실을 은폐한 것이다. 남한에 사는 사람들은 대한민국의 국민이고, 북한에 사는 사람들은 북한의 국민이 되었다. 지금도 대한민국에서는 한민족 두 국가의 상태가 지속되는 상황에서 민족이라는 용어에 마비되어 국민과 민족을 구별하지 못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그 결과 “민족끼리” “우리끼리”라는 북한의 말에 놀아나고 있다. 그 결과 한 민족 두 국가의 현실에 있으면서도 민족과 민족공조라는 말에 꼼짝 못하고 정치적으로 이용당하고 있다.

146쪽

그런데 이러한 민족이 한국인의 신앙이 되기에 이르렀다. 한 가지 예만 들어보자. 1945년 일제의 패망과 더불어 한국은 38도선을 경계로 남한과 북한으로 나뉘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한 침공으로 벌어진 6.25전쟁 뒤 지금까지 휴전선을 경계로 남한과 북한은 군사적으로 대치하고 있다. 남한은 자유민주주의, 자본주위를 북한은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택했다. 남한과 북한은 서로 다른 이념(사상)과 체제를 가지고 있다. 이렇게 서로 다른 이념과 체제는 공존할 수 없는 것이다. 2002년 서해에서 북한 함정의 공격을 받아 한국 해군의 함정이 침몰하고 해군들이 전사한 전투가 있었다. 이는 이념과 체제를 달리하는 남한과 북한이라는 두 국가 사이에서 전쟁 상태가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인들은 어떤 면에서 때로는 국가보다 민족을 중시하는 모습을 보인다.

153쪽

그러나 남한과 북한이 택한 서로 다른 이념과 체제는 민족과는 다른 문제다. 1945년 해방 이후 남한은 자유민주주의, 자본주위를 북한은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국가의 이념과 체제로 택했다. 그런데 남한과 북한이 택한 서로 다른 이념과 체제는 하나로 합칠 수 없는 것이다. 더욱이 북한은 주체사상을 택하여 자주라는 이름으로 세계화를 거부하며 북한 인민들의 자유를 빼앗고 굶주리게 만들고 있다. 현재 이 세상에서 그처럼 인민의 자유를 빼앗고 굶주리게 만드는 폐쇄적인 나라는 찾아보기 어렵다. 우리들이 각별히 경계해야 할 사실은 그러한 주체사상으로 인민의 자유를 빼앗고 굶주리게 하는 체제의 전파다.

지난 60여년 동안 한국사학은 위와 같은 사실은 생각하지 않고 민족을 발명해 서로 다른 두 이념과 체제위에 놓고서 남한과 북한이 통일되어야 하는 이유로 삼았다. 현대 한국사학이 만든 민족사는 민족이 우선이고 국가(국민)에는 관심이 없었다. 어떤 면에서 현대 한국사학이 국가와 국민보다 민족이 먼저라는 역사 지식과 역사의식을 한국인들에게 주입한 것이다.

(중 략)

가상의 공동체로서 민족을 만든 현대 한국사학은 그러한 민족이 걸어가야 할 길까지 정해 놓고서 실제 역사는 그 길을 벗어났다고 비판하며 꾸중해 왔다.

(중 략)

대륙을 지배하던 고구려를 자랑스럽게 여기고, 당나라 군대를 끌어들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신라를 반민족적 왕국으로 보는 것이 그 좋은 예다. 이러한 민족사는 과거의 이야기로 그치지 않는다는 점에 더 큰 문제가 있다. 현재의 정치, 군사적 상황을 이해하는 기준이 되는 것을 그대로 지나칠 수 없다.
6.25전쟁 이래 남한과 북한이 군사적으로 대치하는 상황에서 한국은 미국의 도움을 받아 북한의 남침 기도를 막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사학은 외세를 끌어들여 동족의 나라를 멸망시켰다며 신라를 반민족적 행위를 한 나라로 판정하는 역사 공식을 만들었다. 그러한 역사 공식은 6.25전쟁 이후 미국을 중심으로 한 UN군의 도움으로 북한의 남침을 막은 대한민국을 반민족적 행위를 하는 나라로 보도록 만든 것이다.

316~319쪽


이 양반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을 국민이 더 많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마도, 이 책에 대해 실린 기사에는 악플이 엄청 달렸겠지요.

댓글 16개:

  1. 또 하나의 확신범을 보는 기분이군요. 저 또한 무분별한 민족주의 국수주의에 뽀큐를 날리는 입장이지만...
    이나라 실정에선 저양반이 진정한 의미에서 너무 '진보적'으로 앞서나간게 아닐까 저어됩니다.

    저러다 주체태양민족주의 나치즘 신도들 손에 분서나 당하지 않을지....치도곤에 스러지지만 않기를 빌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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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좀 시니컬한 이야기긴 하지만, 지금의 민족아이콘 과잉은 아이러니하게도 일명 민족 운운 하는 사람들에게 친일파니 황군이니 하는 욕을 먹는 박통 치세의 교육탓도 잇지않나는 생각도 듭니다. 그시대 살았던 어른들 이야기를 들어보면말이지요...
    흔히 말하는 민족 자긍심, 한민족의 우수성운운은 그시대부터 생긴 레파토리라더군요. 세계최빈국에 전쟁으로 폐허가 되어 자긍심따위는 땅에 떨어진 상황에서 저런식의 교육이 어쩔수 없는 면도 있었다 하지만요.
    그나저나 자신들이 개발한 논리가 적대자의 무기가 되어 자신들을 공격하는 지금의 아이러니한 결과를 그때 그사람들은 예상이나 했을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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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이영훈, 안병직, 신지호 만큼이나 아주 용맹무쌍한 분이시군요...

    혹시 모종의 사명을 띄고 저쪽 진영에 침투한 에이전트가 아닐가 하는 망상이 잠깐 일어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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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현대 한국사학계의 과오를 아주 정확하게 지적을 했네요.
    늘 현대사학사를 배우면서 통감했던 부분입니다.

    사실 일본의 식민통치의 가장 큰 폐혜는
    이민족에 의한 통치로 인해
    민족으로 대동단결, 민족일도 하사불성
    민족으로 어택땅, 완소민족을
    우리 뼛속에 새겨놓은 거라고 생각합니다.

    혹자가 말한 말이 있지요.
    "왜 하필이면 신채호냐, 논리가 이병도만도 못한데."
    논리가 없는 역사학은 혀깨물고 죽어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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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화랑세기 논쟁으로 유명한 그분이시군요.
    논쟁을 전혀 꺼리지 않으시는 듯한 느낌도 좀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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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이야~
    기자들이 작심하고 저책 몇번 띄워주면 게거품 물며 낚일 분들이 굉장히 많을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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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학부, 대학원 합쳐서 이종욱 교수님께 두 학기 동안 수업을 들었습니다.아주 강한 소신을 가진 분이시죠. 말씀하시는 걸 들어보면 위해나 당하시지 않을까 걱정되기는 하지만 일제를 미화하는 이영훈 교수 따위와는 격이 다른 분입니다. 에이전트 따위로 운운하지 말아주셨으면 좋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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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이야.. 대단하신 분이 계셨군요.... 조금은 무섭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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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슈타인호프/ 예, 죄송합니다. 제가 실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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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45acp님 // 네. 확실히 이번에는 이종욱 선생님이 지나치게 '세게' 나간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한국의 민족주의 교육은 거의 세뇌에 가까운 수준인데 이런 환경에서 저런 주장을 한다는 것은 엄청난 용기와 확신이 필요하지요.

    행인님 // ?

    티앙팡님 // 실례지만 혹시 한국 고대사를 전공하십니까? 학계에 대해 신랄하시군요

    sonnet님 // 저런 주장을 하는 걸 보면 학문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 분 같습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저런 주장을 하기가 힘들 겠지요.

    민족 문제, 특히 고구려나 발해 같이 민감한 사안을 가지고 논쟁을 시작할 결심을 한 걸 보면 이것 만으로도 대단한 양반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텐보로님 // 확실히 위험하지요.

    슈타인호프님 // 오. 이종욱 선생님 강의를 들으셨군요.

    카린트세이님 // 김유신 동상에 테러하는 인간들도 있다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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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전 근대사를 했지요. 정확히는 개항 전후였습니다.
    대한제국기까지는 어느정도 커버가 됩니다.

    랄까 일제이래 저 민족쵝오론을
    우리 뼛속에 심어놓은 것이
    일제의 가장 큰 잔재라고 생각합니다.
    하다못해 60~70년대 경제성장도
    민족때문이라고 믿는 사람들 학계에 꽤 있습니다.
    내가 그분 밑에서 배웠으니까요.

    뭐 전 화랑세기 논쟁에 학계설을 지지하는 쪽이지만,
    이번에는 정말 옳은 말씀 하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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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아이러니 하게도 저의 지도교수님의 선배이신 윤명철 선생님(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해 90년대 말부터 경고, 고구려사 전공) 같은 분의 경우엔 자신의 논리와 정반대 되는 사상임에도 불구하고 이종욱교수님과 같은 학설의 등장에 대해 도리어 긍정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더군요.
    윤명철 선생님의 경우에도 본의아니게 재야취급당하는 경향이 짙기는 하지만, 저런 주장이 새로 나와서 지금의 경직된 학계에서도 논의가 되어야 당신의 논리도 펼칠수 있는 분위기가 된다고 보시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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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흥미로운 책이군. 학교에서 다시 역사교육을 강화한다느니 떠드는 사람들 보면 한심할때가 많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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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확실히 국사학 관련으로 민족주의 과잉 성향은 심한 편입니다. 당장 고등학교 수업서도 민족 이야기만 나오면 거품무시는 국사 선생님들이 많이 계십니다. 많지요[...]

    민족주의 파쇼[다들 그런건 아니지만 요즘 시대가 수상하다보니 많이들 보이더만요]들 손에 분서 당하시거나 린치당하시지 않길 빌 뿐이지요[에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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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 티앙팡님 // 아하. 그러시군요. 앞으로 많이 배우겠습니다.

    45acp님 // 말씀하신대로 금기시 되는 문제가 있어 자유로운 토론에 지장이 있다면 결코 학문은 발전하지 못 할 것 입니다.

    김동형 // 글쎄말이우.

    리카군 // 안녕하세요. 제 블로그에서는 처음 뵙는 것 같습니다. 들러 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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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 작금의 대한민국에서 민족주의의 병폐는 조만간 大遑盲國을 만들고 말 겁니다. 저 분 진짜 옳은 소리 하셨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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