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이 조용히 치러지나 했더니 러시아가 그루지아를 공격해서 꽤 시끄러워 졌습니다. 때마침 라피에사쥬님이 이번 사태에 대해 잘 정리된 글을 올려주셔서 흥미롭게 잘 읽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 사태와 관련해서 밀리터리 매니아(???) 들이 인터넷 게시판들에 올려놓은 의견을 보면 실제 이상으로 현재 러시아의 행동이나 능력을 과장되게 인식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아직도 러시아가 군사적으로 미국과 맞먹는 강대국이라고 인식하는 사람이 있다는 건 ‘진짜’ 충격이었습니다. 러시아의 군사력은 1990년대 초반 소련의 해제와 뒤이은 군대의 구조적 붕괴의 충격에서 겨우 회복되는 단계에 있을 뿐입니다. 국경을 인접한 작은 나라와 군사분쟁을 벌이는 것을 가지고 소련의 부활이니 푸짜르가 어쩌고 하는 이야기들을 보면 어이가 없을 지경입니다.
러시아의 군사력이 미국과 비교했을 때 얼마나 취약한 상황에 처해있는 가는 조금 부지런히 관련 자료들을 구해보면 쉽게 알 수 있는 것 입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러시아군 장교단의 현실이 이 점을 가장 잘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러시아의 장교단은 구소련 시절과 비교하면 형편없는 규모로 줄어들었고 이것을 다시 소련 시절의 규모와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것은 정말 엄청난 과업이라 할 수 있을 것 입니다.
러시아 장교단이 처한 현실을 다루기 위해서는 먼저 고르바초프 말기의 소련 장교단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소련에서 장교라는 직업은 1970년대 까지는 매우 선호되고 있었지만 1980년대로 들어가면서 조금씩 기피되는 직업으로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무엇보다 1980년대 중반의 시점에서 장교라는 직업이 경제적으로 큰 매력이 없었다는 점이 큰 문제였습니다. 장교의 낮은 생활수준은 소련이 건국된 이후 붕괴될 때 까지 여전했기 때문에 중견 간부급 이상의 부패문제는 근절할 수 없는 문제일 정도였습니다. 이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1980년대로 들어가면 도시 중산층들이 장교에 지원하는 비율은 계속 낮아졌고 그 틈을 비집고 들어오려 한 것은 교육수준이 상대적으로 낮은 농촌출신들이었습니다. 물론 군사기술의 발전으로 장교가 되기는 더 어려워 졌기 때문에 농촌출신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진 것도 아니었습니다. 결국 1980년대로 들어가면 장교의 정원을 채우는 것이 매우 어려워 집니다. 예를 들면 모스크바 군관구는 1987년에 새로 임관하는 장교가 정원에서 19% 부족했는데 1988년에는 무려 43%가 부족할 정도였습니다. Roger Reese가 지적하듯 1980년대의 장교단은 군인으로서의 자부심 보다는 안정적인 급여 등 현실적인 이유에서 장교를 택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마나 장교라는 직종의 매력이었던 안정성이 사라지자 소련 장교단은 순식간에 붕괴하기 시작합니다. 이미 1988년부터 위관급 장교들이 대량으로 전역을 신청하고 있었고 이것은 그대로 소련이 붕괴할 때 까지 지속됩니다. 소련 장교단의 열악한 생활 수준은 고르바초프의 방어 중심의 군사정책으로 동유럽에서 철수한 병력이 본토로 들어오면서 더 심각해 집니다. 대표적인 것이 주택 부족문제였는데 1990년 2월 경에는 집이 없는 장교가 128,100명에 달할 지경이었습니다. 또 장교의 급여수준도 매우 형편없었습니다. 1990년 소위의 월급은 270 루블이었는데 당시 자녀 없는 부부의 최저 한달 생계비는 290루블이었습니다. 게다가 개혁개방 정책으로 서방, 특히 미국 장교들이 어떻게 생활하는지에 대한 정보가 장교단 사이에 퍼지면서 소련 장교단의 사기는 급강하해 버립니다. 이런 형편이었기 때문에 소련이 붕괴되기 전에 국가를 지켜야 할 장교단이 먼저 붕괴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소련의 붕괴는 이미 시작된 소련-러시아 군대의 붕괴를 가속화 시켰는데 특히 장교단에 가해진 타격은 엄청났습니다. 이미 소련이 붕괴되기 전부터 열악한 생활수준 때문에 장교단은 급속히 감소하고 있었는데 소련의 붕괴로 그나마 보장되던 안정성 조차 사라지자 장교단의 해체는 제동을 걸 수 없을 정도로 진행됩니다.
가장 큰 원인은 역시 경제적 곤란이었습니다. 이미 군대가 형편없이 쪼그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정부는 경제난으로 그나마 남아있는 장교들 조차 제대로 대우해 줄 수 없었습니다. 1994년에도 집없는 장교가 12만명에 달했는데 이것은 훨씬 많은 장교가 있었던 1990년과 비슷한 수준이었습니다. 상황이 이 지경이었으니 장교를 지망하는 사람은 급격히 감소합니다. 1989년의 경우 장교를 지원하는 경쟁률이 1:1.9였는데 1993년에는 1:1.35가 됩니다. 여기에 장교를 지원하는 지원자의 자질도 1980년대 이래로 꾸준히 하락하고 있었으니 통계에 가려진 내용은 더욱 더 참담했습니다. 1992년 러시아 국방부가 병력 감축을 위해 36,000명을 조기전역 시키겠다고 발표하자 59,163명이 전역을 신청했고 1993년에 다시 19,674명을 전역시키려 했을 때는 무려 60,033명이 전역해 버립니다. 1992년부터 1994년 사이 러시아 국방부는 71,000명의 장교를 감축하려 했는데 실제로는 155,000명이 자발적으로 전역해 버렸고 게다가 그 절반이 30세 미만의 청년 장교들이었습니다. 러시아 군의 미래를 짊어질 중핵이 무너져 버린 것 입니다. 게다가 이 시기는 암울했던 옐친 행정부가 경제난 때문에 군사비를 계속해서 삭감하고 있었으니 달력이 넘어갈수록 장교 부족은 심각해 졌습니다. 1995년에는 사관학교 생도의 50%가 임관 전에 자퇴할 정도였고 이것은 초급장교의 부족을 가져왔습니다. 같은해에 장교 부족은 정원의 25%였는데 위관급의 경우는 정원에서 50%가 미달이었습니다. 이 해의 군축에서 위관급 장교는 2,500명을 전역시킬 예정이었는데 실제 전역한 인원은 11,000명이었습니다. 젊은 장교들은 늦기전에 사회에서 기회를 잡기 위해 주저않고 군대를 떠났습니다. 1998년 유가 폭락으로 인한 경제난은 정부의 월급에 의존하는 장교들에게 최악의 고난이었습니다. 같은 해 기준으로 소위의 월급은 354루블, 중령은 2,135루블이었는데 당시 러시아에서 빈곤층으로 분류되는 3인 가족 가구의 평균 소득은 2,600 루블이었습니다. 즉 중령 조차도 빈곤층 수준의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것 입니다. 이것은 장교들의 대규모 자살을 불러왔는데 1998년 러시아 전체 자살자의 60%가 장교였다는 통계는 이 시기 러시아 장교단이 얼마나 열악한 상황에 처해 있었는가를 잘 보여줍니다. 국내에도 번역된 『How to Make War』의 1995년판에서 저자인 James F. Dunnigan은 당시 러시아 군대가 처한 문제점을 수습하는데 수년은 걸릴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이것은 아직까지 진행 중이란 점에서 꽤 잘 맞은 예언 같습니다.
1998년은 지금까지 러시아 장교단이 겪었던 최악의 시기였다고 할 수 있을 것 입니다. 장교단은 계속해서 축소되었고 새로 보충되는 인력의 질적 수준도 80년대에 비해 크게 낮아졌습니다. 게다가 남아있는 장교의 80%도 미래에 대해 비관하고 있었으니 그야말로 최악이라 할 만 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을 넘기면서 상황은 조금씩 개선되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큰 원인은 푸틴 집권 이후 군인의 생활수준 개선을 위한 직접적인 조치, 예를 들어 급여 인상 등이 적극적으로 시행된 것이 주효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교단의 생활수준은 민간인에 비해 여전히 낮았으며 푸틴 집권 초기인 2001년의 경우 여전히 92,000명의 장교가 관사를 지급받지 못했으며 이 중 45,000명은 아예 거주할 집이 없는 상태였습니다. 러시아의 경제가 유가 회복에 힘입어 조금씩 개선되고 있었지만 경제에 대한 불안감은 여전했기 때문에 장교단은 특히 더 큰 불안감을 느꼈습니다. 예를 들어 2004년에 장교 급여가 인상되지 않는다는 소문이 퍼지자 위관급 장교의 대량 전역사태가 다시 벌어졌던 것이 대표적입니다. 장교단의 불안감을 잠재우기 위해서 2005년 러시아 의회는 소위의 월급을 7,485 루블로 인상하겠다는 발표를 했는데 같은 해 3인 가족의 최저 생계비는 7,594 루블이었습니다. 장교의 열악한 생활수준을 개선하기 위해서 2006년에 푸틴 대통령은 3년에 걸쳐 장교의 급여를 67% 인상하겠다는 계획을 내놓았고 현재 이 공약은 고유가를 바탕으로 착실히 이뤄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2008년 현재까지도 러시아 장교단의 생활수준은 민간사회에 비해 조금 뒤떨어졌다는 것이 일반적인 의견이며 체첸과 같은 위험지역 근무를 지원하는 장교가 많은 것도 추가수당을 받아 조금이라도 생계를 개선하기 위한 것 입니다.
푸틴 행정부가 옐친 시기의 군사적 붕괴상태를 다소 나마 개선시킨 것은 사실인데 어떻게 보면 러시아의 장교단 자체가 붕괴될 대로 붕괴되어 최저점에 도달했기 때문에 개선된 것으로 보일 뿐이지 소련군이 전성기에 달했던 시절의 장교단 수준에는 발끝조차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현재 상태의 러시아로서는 지금 있는 장교단의 생활수준을 유지, 또는 향상시키면서 장교단을 확충할 수단이 뾰족하지 않다는 것 입니다. 장교단의 확충 없이 군사력을 증강하기는 어렵습니다. 러시아가 현재 규모의 군대를 유지하면서 준비태세와 숙련도를 높이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겠지만 다시 병력을 증강시켜 미국과 맞설만한 수준으로 만드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입니다. 현재의 러시아 군 병력이 어느 정도인지, 그리고 그 중 장교는 얼마인지는 웹에서 검색해도 충분히 나오는 것들이니 더 부연설명을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러시아의 군사력 증강이 어떻게 될 것인지는 장기적으로 지켜봐야 할 문제이지 국내 언론 기사에 가끔씩 보도되는 자극적인 몇 줄의 기사만 가지고 호들갑 떠는 것은 좀 그렇습니다.
참고문헌
James F. Dunnigan/김병관 역, 『현대전의 실체』, 현실적 지성, 1995
Dale R. Herspring, 『The Kremlin and the High Command : Presidential Impact on the Russian Military from Gorbachev to Putin』,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06
William E. Odom, 『The Collapse of the Soviet Military』, Yale University Press, 1998
Roger. R. Reese, 『Red Commanders : A Social History of the Soviet Army Officer Corps, 1918~1991』,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05
Brian D. Taylor, 『Politics and the Russian Army : Civil-Military Relations, 1689~2000』,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3
Anne C Aldis, Roger N McDermott(ed), 『Russian Military Reform, 1992-2002』, Routledge,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