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군대는 한정된 예산으로 챙겨야 할 게 많다 보니 첨단장비를 도입하면서 기존의 재래식 전력도 양호한 상태로 유지해야 한다는 어려운 문제에 항상 봉착해 있습니다.
이렇게 예산의 제약을 받는 국가가 방대한 재래식 전력을 유지하면서 또 첨단 전력을 확보하려고 고분 분투한 대표적인 사례라면 1920~30년대의 이탈리아가 생각납니다. 한국과 종종 비교되는 국가이기도 하군요.
이탈리아는 1차 대전 이전에도 가난한 국가였지만 1차 대전으로 막대한 채무를 지게 된데다 전쟁으로 별 재미를 못 봤기 때문에 계속 강대국 행세는 하고 있었지만 그것 조차 위태위태 했습니다. 하다못해 겨우 식민지 전쟁 수준인 이디오피아 전쟁조차 약간 과장을 하면 국가총력전에 가까운 역량을 쏟아 부어야 할 정도였으니까요. 이디오피아 전쟁으로 1935/6년과 1936/7년 에는 국방비가 크게 증가해 재정 적자가 십억 리라 단위를 돌파했다지요.
이탈리아와 같이 가난한 국가에서는 자원 배분이 매우 신중하게 이뤄 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방대한 규모의 재래식 전력, 즉 보병과 기병이 있었고 이들을 유지하는 것도 이탈리아에게는 큰 부담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1차 대전 당시 전차를 운용해 본 경험이 있긴 했지만 1920년대 동안은 눈에 띄는 기계화부대의 발전이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대안으로 제시된 것이 쾌속사단(Divisione Celeri) 이었습니다. 쾌속사단은 기병을 주축으로 편성됐는데 1933년부터 대대급의 전차부대가 배속됐습니다. 사실 기병과 전차를 결합하는 것은 이 당시 가난한 국가들이 취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습니다. 역시 마찬가지로 빈약한 경제력과 공업력을 가졌고 많은 수의 보병과 기병부대를 보유한 폴란드나 루마니아가 비슷한 방법을 모색했지요.
스페인 내전에서는 차량화 부대인 리토리오(Littorio) 사단에 전차대대가 배속돼 기갑사단 비스무리하게 운용됐습니다만 임시 편제였으니 제대로 된 기계화부대로 분류하기는 좀 어렵습니다.
이탈리아 육군이 제대로 된 정규편제의 기계화부대를 가지게 된 것은 1937년이었는데 이것 조차도 여단급 제대에 불과했습니다.
1937년에 편성된 1 기갑여단(Brigata Corazzata)은 1개 Bersaglieri 연대와 3개 기갑대대, 그리고 기타 직할대로 편성됐는데 1937년에 실시한 여러 차례의 기동훈련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1937년 말 까지 2 기갑여단이 편성을 완료해 이탈리아는 2개 여단의 독립 기계화부대를 보유하게 됐습니다.
그러나 이탈리아는 육군의 기계화를 대규모로 실시하기에는 밑천이 부족한 국가였습니다. 1939년에 이탈리아는 총 71,000대의 차량을 생산했지만 이 중 군에서 징발해서 쓸만한 트럭은 12,000대였고 나머지는 일반 승용차였다고 합니다. 여기에 이탈리아의 자동차 공업은 기술적 수준은 높은 편이었으나 규모가 영세하다는 치명적인 결함을 안고 있었습니다. 숙련된 노동력이 부족하니 전시 동원을 하더라도 생산을 늘리기는 어려운 구조였습니다.
(참고로, 이탈리아가 1940년 6월부터 1943년 6월까지 생산한 군용 차량은 최저 83,000대에서 최고 120,000대로 추정됩니다. 전시 동원치고는 형편 없군요.)
공업력은 둘째 치고 이미 많은 수의 보병사단이 있었기 때문에 보병사단의 유지와 장비 교체에 들어가는 예산도 상당한 수준이었습니다. 그나마 기갑여단이 1937년에 창설된 것도 보병사단의 장비 교체에 우선순위가 밀리던 와중에 된 것이라고 하지요.
이탈리아육군이 본격적으로 사단급 기동부대의 편성을 시작한 것은 1939년 부터였습니다.이탈리아 육군도 자국의 공업력과 경제력 문제를 잘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기갑부대의 확장은 2개 기갑사단과 2개 차량화 보병사단으로 편성된 기갑군단(Corpo d’Armata Corazzata) 정도에서 마무리를 할 계획이었습니다. 기갑사단은 기존의 기갑여단을 근간으로 확대 편성할 계획이었고 차량화 보병사단은 이미 편성된 부대가 있었으니 참 경제적인 계획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여기에 기갑군단을 지원하기 위해 3개 쾌속사단으로 편성된 쾌속군단(Corpo d’Armata Celere)을 편성해 두 개의 군단으로 기동군을 편성한다는 것이 계획의 골자였습니다. 물론 쾌속사단들도 이미 편성돼 있었으니 기갑여단을 기갑사단으로 확장하는 것 말고는 특별히 예산이 소요될 건덕지가 없었습니다.
아아… 슬픈 이탈리아.
새로 편성되는 기갑사단은 4개 기갑대대를 가진 1개 기갑연대, 1개 Bersaglieri 연대, 1개 포병연대를 근간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이를 위해 기존의 기갑여단들은 기갑전력과 포병전력을 대폭 증강했는데 쓸만한 중형전차나 중전차가 없었기 때문에 기갑사단들도 어딘가 허전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이탈리아군의 기갑사단은 그냥 편제만 보더라도 여러모로 부실했습니다. 보병이 1개 연대 뿐인데다가 전차들은 아군에게 더 지장을 주는 경전차 뿐이라 전투력이 매우 떨어졌습니다. 편제상 대수는 184대였는데 전차의 성능이 뒤떨어졌기 때문에 실질적인 전투력은 매우 약했습니다.
이 때문에 독일이 상당한 규모의 기갑전력을 육성한 1939년 까지도 이탈리아에서는 중형전차의 개발과 생산이 지연되고 있었습니다. 스페인 내전의 결과 기갑장비의 개선이 중요한 문제로 떠올랐지만 육군은 보병사단과 쾌속사단의 장비 교체를 우선순위에 두고 있었습니다. 사실 자원이 부족한 국가는 새로운 실험을 하기 보다는 기존에 있는 수단에 자원을 더 배분하는 경향이 나타나는데 1930년대의 이탈리아 육군이 그랬던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1933년 부터 이미 2,000대가 넘는 CV33계열 전차(?)가 생산돼 있었기 때문에 기계화부대 편성과 전차 개발에 예산을 더 집어 넣을 명분이 마땅치 않기도 했습니다. 물론 두체가 얼마 안있어 영국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킬 것이란 걸 알았다면 장군과 관료들의 생각도 조금은 달라 졌겠지요. 그나마 1939년부터 생산에 들어간 M11/39는 시대에 한참 뒤떨어진 물건이었고 그 후속작 M13/40도 별로 나을건 없었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CV33 계열은 경전차로 분류하기조차 민망한 물건들이었습니다.
이디오피아 전쟁에서는 전설적인 신화까지 만들어 냈는데 바로 이해 12월 15일에 벌어진 Dembeguina 전투였습니다. 이 전투에서 이디오피아군은 이탈리아군 보병들을 쓸어 버린 뒤 고립된 CV33들의 궤도를 별다른 장비도 없이 끊어 버린 다음 간단히 불을 질러서 격파하거나 그냥 전차병들을 끌어내 때려 죽였다고 전해집니다. 선회포탑이 없고 방어력과 무장 모두 부실한 CV33은 보병지원이 없으면 말 그대로 철제 관에 불과했습니다.
결국 여러 차례 피박을 본 이디오피아 전쟁의 결과 겨우 이탈리아 육군은 선회 포탑을 가진 중형전차 개발에 대해 진지하게 접근하기 시작합니다만 그 결과 나온 M11/39는 당시 기준으로 봐도 부실하기 짝이 없는 물건이었습니다.(3호 전차 같은 걸출한 물건들과 비교해 보십시오)
(사족 하나, 일부 군사사가들은 이탈리아 육군이 이디오피아 전쟁에서 이디오피아 육군에 대해 압도적인 기술적 우위라는 걸 가지고 있었는가에 대해 회의적인 경향도 보이더군요.)
사단 포병은 겨우 24문의 75mm포를 가진 2개 대대가 전부였기 때문에 지원 화력이 부족한 것도 문제였습니다. 최저 105mm급을 장비한 독일군 기갑사단과 비교하면 화력의 차이가 어느 정도인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현대적인 대공화기나 대전차포도 부족했습니다. 각 기갑사단은 8문의 대전차포와 16문의 대공포를 보유했는데 대전차포의 부족은 스페인 내전에 참전했던 장교들이 가장 많이 지적한 문제였습니다. 영국은 1940년 1월에 이탈리아 측에 대공포와 대전차포를 구매하겠다는 의사를 타전했는데 정작 이탈리아는 자국 군대를 장비할 수량도 채우지 못해 헉헉거리고 있었습니다. 그 때문인지 무솔리니는 이 거래를 굴욕으로 생각하고 사위인 치아노에게 거절하라는 명령을 내렸다지요.
어쨌거나 뭔가 부족한 상황에서도 기갑사단 창설은 진행됩니다.
가장 먼저 편성된 기갑사단은 132 기갑사단 Ariete로 제 2 기갑여단을 근간으로 1939년 2월 1일에 편성됐습니다. 두 번째 기갑사단은 131 기갑사단 Centauro로 짐작하시다 시피 제 1 기갑여단을 근간으로 같은 해 4월 20일에 편성됐습니다. 이 두개 기갑사단은 알바니아 침공을 위해 황급히 병력과 장비를 보충 받았는데 1939년 전반기 동안 80% 정도의 편제를 갖출 수 있었습니다. 이 중 Centauro기갑사단은 알바니아 침공에 투입됐는데 알바니아군의 저항이 거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기계 고장으로 상당한 수의 장비를 잃었다고 합니다. CV33, L3/35는 산악지형에서 종종 기계고장을 일으켜 행군을 방해했다고 하지요.
마지막으로 스페인에서 귀환한 Littorio사단이 정식 기갑사단으로 승격돼 133 기갑사단 Littorio 가 됐습니다.
두체가 호기롭게 영국에 선전포고를 할 당시 이탈리아군의 기갑사단 중 그나마 전투에 투입 가능한 것은 132, 133 두개 사단이었습니다. 그러나 133 기갑사단은 유고슬라비아 침공에 투입된 뒤 1941년 말이 돼서야 장비교체를 완료했고 1942년 1월에야 주 전장인 북아프리카로 파견됩니다.
나머지 하나인 131 기갑사단은 1940년 10-11월의 그리스 침공에서 그리스군에게 큰 손실을 입어 12월에는 예비대로 돌려져 재 편성에 들어갔습니다. 이 사단은 1941년 1월 다시 전투에 투입됐고 유고슬라비아 침공에서는 133 기갑사단 Littorio 와 함께 그럭저럭 훌륭하게 작전을 수행합니다. 그리고 유고슬라비아 전역을 마친 뒤 장비교체를 위해 1941년 3월부터 재편에 들어가게 되는데 북아프리카의 전투로 전차 소모가 급증한 결과 장비 보충이 더뎌 1942년이 돼서야 재편성을 완료했습니다.
그리고 원래 기갑사단에 배속돼 있던 4개 기갑대대가 이집트 침공을 위해 리비아로 파견되는 바람에 기갑사단들의 편성은 더욱 더 곤란에 빠졌습니다.
결국 실제로 영국과의 전쟁이 개시될 당시 이탈리아군이 투입할 수 있었던 기갑사단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132 기갑사단 Ariete는 1941년 1월, 영국군의 반격으로 먼저 파견된 1, 2, 3, 5 기갑대대가 박살 난 뒤에야 리비아에 도착했습니다.
이탈리아의 기갑부대 창설은 국가의 빈약한 경제력과 공업력, 낙후된 기술수준이 결합돼 처음부터 엉망이었습니다. 열강 행세는 하고 있었지만 고작 여단급 전력에 불과한 기갑사단 3개를 편성하고도 자원이 부족해 허덕였으니 이 얼마나 비참합니까.
일선의 이탈리아군 병사들은 최선을 다해 싸웠지만 밑천이 달랑달랑하니 무솔리니가 꿈꾼 기적을 이룰 방법이 없었습니다.
참고서적
Brian R. Sullivan, The Impatient Cat : Assessments of Military Power in Fascist Italy, 1936-1940, Calculations : Net Assessment and the Coming of WW II
Gerhardt Schreiber, Die politische und militaerische Entwicklung im Mittelmeerraum 1940/41, DRZW band 3
Ian W. Walker, Iron Hulls, Iron Hearts : Mussolini’s Elite Armoured Divisions in North Africa
Vera Zamagni, Italy : How to lose the war and win the peace, The Economics of World War II